만경창파(萬頃蒼波) 9화
생기를 잃은 나무 아래에서 조각을 맞추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무언가에 저항하듯 흠칫거리면서도 서서히, 아주 서서히 조각을 조금씩 맞춰갔다.
하지만, 진실로 맞출 마음은 없던 것일까? 그 움직임은 매우 건성건성이며 그마저도 우물쭈물 하고 있다.
그런 소년의 앞에 영상이 하나 떠오른다.
그것은 한 남자의 처절한 생애.
팔을 잃고, 힘을 잃고, 눈을 잃고, 의미를 잃고, 결국에는 긍지마저 무너져버린 남자의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에도 소년은 약간의 동요만 보였을 뿐, 이내 그것을 무시하며 묵묵히 조각을 모아갔다.
"어차피, 완성할 생각도 없으면서 조각은 왜 모으지? 위선인가?"
그런 소년의 뒤로, 어느새인가 한 남성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정확한 상이 맺히지 않은 흐릿한 잔영과도 같아, 실제로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지만, 소년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남자임을 눈치챘다.
"어째서 주저앉아 계시는 건가요?"
그 흐릿한 잔영과도 같은 남자의 맞은편, 그곳에는 남자와는 달리 선명한 모습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꿈에서 자신을 참백도라고 밝혔던 여성이었다.
둘의 등장은 분명 의외였고, 소년은 동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그의 말을 무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완성할 생각도 없다.
위선이다.
이 두가지의 말은 소년의 생각을 정확히 짚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써 소년은 핑계를 댄다.
"아직, 다, 모으지 못했, 어."
"기억의 조각을 말인가? 아니면 자네의 의지를 말인가? 그런 흩어져있는 조각따위, 호로가 기생하게 되면서 형편좋게도 정리해주지 않았나? 네가 하고있는 그 행위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야."
남자의 싸늘한 진실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더이상… 아픈건… 싫어……."
그에 남자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 손짓에 따라, 소년의 앞에 있던 영상이 다른 것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처절한 생애를 살아온 남자의 다른 흔적.
'이 검의 이름은 천타로 하겠습니다.'
검을 얻었을 때의 그는 자신의 미숙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술원의 입학을 권유 받은 그는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었다.
'이긴다.'
영술원의 졸업시험, 거기서 그는 자신의 친우들과 함께라면 승리할 것임을 믿었다.
'고맙다…….'
낙오라고 자신을 비하할때, 친구들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이렇게 많이 자랐으면서, 시즈카는 여전히 어린애로구나.'
소중한 이들은 그를 잊지않고 기억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여러분께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결코 나쁘지 않았던 생활이었다.
"……그만둬, 어째서 이런걸 보여주는거야?"
계속되는 영상에 소년이 머리를 움켜쥐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호소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답없이 다시금 손을 저었다.
영상이 바뀌었다.
'혹시 사신이 되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ㅡ우노하나 선생님.
'『낙오』라고? 웃기지마! 누가 뭐라고해도 자네는 낙오자가 아니야! 있는 힘껏 노력하고 노력해오고 있지않나! 낙오라는 것은 그조차 못하는 놈들에게나 써야하네!'
ㅡ슌스이.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ㅡ쥬시로.
'꼭 행복해져야해요…….'
ㅡ호로인격.
'정말로 돌아오신 것 맞죠?'
ㅡ시즈카.
그리고ㅡ
'못난 놈! 10년 전에 재능의 차를 넘을 만큼 노력하겠다고 한 맹세는 잊은 것이더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져버린다는 핑계가 재능의 부재였더냐!'
ㅡ스승님.
잊을 수 없는 기둥.
"정말이지, 무엇을 외면하는거지? 너는 무엇을 그리도 무서워하는거지?"
"상처입는 것이 두렵나요?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 싫은가요?"
"노력하는 것이 질렸나? 아니면, 자신이 약하다는 것에 질렸나?"
"대가가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남자와 여자의 말이 소년의 가슴으로 사정없이 박혀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상이 다른 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영혼이란 영력으로 이루어진 정신체, 영력이란 영혼의 힘으로 영혼이 존재하기에 있는 법. 자신이 영력이자, 정신체이거늘, 자네는 어찌하여 자신의 영력이 적다느니 부족하다느니 말하는가? 자세히 세상을 바라보면, 결국 자신이 원한는 것은 언제나 곁에 있기를 마련인데.'
다각적 시야, 사상의 자유가 깨우쳐졌다.
ㅡ그것은 대지와도 같다.
'도가에서 흔히 말하는 만류귀종(萬流歸宗)과 만박귀진(萬博歸眞)이라고 할까요. 당신은 단순히 다각적인 시야만을 가질것이 아닌, 그 모든것을 종합하고 판단하고 추려내서 그 끝에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을 알아야합니다.'
수많은 정보 중 진실을 찾는 법을 깨우쳤다.
ㅡ그것은 대지를 풍요롭게하는 물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겠어. 너에게 잡아먹혀 편하게 지내는것이 안식이라면, 난 안식에도 맞서 싸우겠어. 그것이 강해지겠다는 나의 길이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나의 길이다!'
진실을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은 나아가고자 했다.
ㅡ그것은 때론 거칠지만 때로는 온순한 대기와도 같다.
'알겠나? 우리 대장장이는 단순히 물건을 만들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네. 최선을 다해서 만드는 것에는 혼이 깃들기 마련이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제로 『혼(魂)』이라는 존재기에 더욱 그러하다네.'
최초에 그에게 내리신 스승님의 가르침.
ㅡ그것은 그 모든 것을 비추듯 그를 인도하는 빛과도 같았다.
"결과가 없었기에 그동안 해온 노력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셨었나요? 당신은 노력했기에 이토록 값진 것들을 얻으실 수 있었던 것이에요. 노력했기에 그토록 튼튼한 기반(대지)을 얻은 것이고, 노력했기에 그토록 풍요로운 판단력(물)을 가진 것이며, 노력했기에 그토록 자유로운 의지(바람)를 가졌고, 노력했기에 그토록 확고한 희망(빛)을 가지게 된것이지요."
소년에게 여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내용은 그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확신하는 말이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린다면, 결국에는 이후로도 계속 잃을 뿐이다. 이를 악물고 나아가라. 팔이 뜯겨도, 눈이 실명해도, 영력이 없어져도 일어섰던 그 단단한 영혼을 다시금 일어나게 해라."
대지에 물이 흐르고 공기는 맑으며 빛은 따사롭다.
그 결실에 소년의 모습은 점차 자라나 어느새 그 인격에 걸맞는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삭막했던 사막은 풍요로운 벌판으로 변하였으며, 말라비틀어졌던 나무는 어느새인가 잎을 무성히 늘어뜨리며 살랑이는 바람에 가지를 흔들었다.
"그랬구나, 너는 나였구나."
잎을 무성히 늘어뜨린 나무로 다가선 그는 그 나무가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버드나무는 물가 어디나 잘 자라나지, 이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버드나무의 가지는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하지요. 이는 행복을 의미해요."
"버드나무의 잎은 뾰족한 모양이 칼처럼 생겨, 옛부터 힘이 센 장수나 무기를 나타낸다."
"버드나무는 모든 식물 중 가장 늦게까지 잎을 피우죠, 이는 의지를 의미해요."
여성과 남성의 말에 『그』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옆에 있는 버드나무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도망도 치지 못하는군."
어느새인가, 자신의 옆에 나타난 검을 잡으며 그는 천천히 갑자기 일변한 정신세계에 어안이 벙벙해있는 호로에게 다가갔다.
"……기생인가, 의미없는 짓이군."
정말이다.
결국 타인에게 떠밀려 다시 일어난 자신이 할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타인의 몸을 빼앗고 의지를 빼앗는 그런 부질없는 일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째서 멀쩡한거지?! 네놈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지 않았나!"
네놈 덕분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그였으나 대답은 가벼운 칼질로 끝냈다.
단 한번의 가벼운 검격.
그런 가벼운 공격에 쓰러질 호로가 아니었으나, 이곳은 그의 정신세계이다.
단 한점의 미혹도 남아있지 않은 그의 검을 일개 호로가 감당 할 수 있을리 없다.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호로를 무심히 보며, 그는 서서히 정신을 일깨워갔다.
◆
시바 카이엔은 사실상 죽을 고비였다.
몰려드는 호로들, 그리고 지켜야만 하는 형님.
그 모든 것이 그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또다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일지라도, 그는 형님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을 테니까.
그의 참백도는 서서히 힘을 잃어 꺾여 있었다.
참백도가 꺾였다는 소리는 그의 힘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이야기.
결국 형님을 지키지 못한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미안, 시즈카 누나.'
형님을 지키지 못한 사죄에 그는 자신의 큰 누나인 시즈카에게 사죄를 올렸다.
그렇게 단념하고 있던 카이엔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손은 거칠고 투박했으나 따스한 손.
최초의 여화 침입사건 때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손이다.
이에 카이엔은 눈을 슬며시 떴고, 보았다.
평소 광증에 시달려 헤픈듯이 웃고있던 얼굴이 아니다.
정말로 푸근하고 따스한 미소.
"혀, 형님!"
절체절명이라는 상황도 잊고 카이엔이 목소리를 높혀 그를 불렀다.
그에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라는 짤막한 말을 한 후, 자리에 일어서서 카이엔의 앞에서 호로들을 가로막았다.
이 극적인 순간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지만, 그의 힘을 알고있는 카이엔은 얼굴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말에 카이엔은 얼굴을 폈다.
"나를 믿어라."
그 든든한 목소리에 현 상황과 그의 힘 같은 것은 모두 잊은 카이엔이 대답한다.
"믿는다구, 형님."
피를 너무 흘린 탓에 시야가 서서히 점멸한다.
그 마지막 흐릿한 시야에 잡힌 것은 존경하는 형님의 등.
그리고 마지막에 들린 것은ㅡ
"시해(始解)ㅡ, 새겨라 『원명(源銘)』."
틀림없는, 형님의 해언(解言)이었다.
- 9화 만경창파(萬頃蒼波)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