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창파(萬頃蒼波) 8화
세상에 신은 없다.
사후세계, 세계의 진실이자 뒷면이라 할 수 있는 소울 소사이어티에서도 신(神)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사신이 유일하다.
유일신, 절대신, 창조신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다만 우리의 운명을 쥐고 흔들수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렇다면 바랄 뿐이다.
부디, 눈 앞의 가련한 남자.
자신의 형님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나빠져갔다.
때문에 쿠치키 바쿠야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퇴각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어느쪽도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다.
퇴각을 하게되면 전열을 재정비 할 수는 있지만, 그의 자존심과 모옥 안의 '그'의 목숨을 장담 할 수 없다.
싸우게 된다면, 결과가 어찌되었건 자신을 제외한 사신들의 대부분이 죽을 터였다.
그러나 쿠치키 바쿠야는 대장이었다.
자신의 사정으로 인하여 수하들이 희생되는 것을 단순히 지켜보는 그런 한심한 대장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의무를 다하며 책임을 지는 대장이다.
"후퇴한다!"
그렇기에 후퇴를 명령한다.
모옥 안에는 '그'와 시바 카이엔이 남아있다.
모옥 주변에는 수하들의 시신이 널려있다.
그 모든것을 물끄럼이 바라보던 바쿠야는 후퇴하는 수하들을 위해서 천본앵의 꽃잎을 이용해 거대한 벽을 만들어 호로들을 공격했다.
그 후, 수하들과 같이 후퇴한 바쿠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후, 그 이유가 모옥의 '그'때문인 것을 깨닫고는 이내,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4대 귀족가문의 차기당주라는 신분으로 탄생한 이후,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일수 였던 그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비롯하여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마저 말 할 수 있었던 자.
비록,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전달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바쿠야는 깨달은 것이다.
'친구… 인가…….'
친구.
생소한 단어였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단어겠지.
왜냐하면, 아무리 시바 카이엔일지라도, '그'를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일테니까…….
'미안하다.'
전해질리 없는 사죄와 함께, 바쿠야는 수하들에게 전열 재정비 및 원군 요청을 명했다.
◆
시바 카이엔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호로가 기생한 형님을 베어버리는 것이 적어도 형님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만약, 자신이 기생된다면 동료에게 자신을 베어달라고 부탁했을테니), 차마 형님에게 검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동료들은 후퇴했는지 밖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현저히 줄어들다가 이내 사라졌다.
석관급의 호로들이 모옥 밖에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었고, 형님의 몸에 기생한 호로가 계속 공격해오는 상황.
"얌전히 당하고 그 몸을 내놓으실까? 이 몸은 너무 약하니 그 몸으로 갈아타주지."
케케케, 하고 거북한 웃음과 함께 내뱉은 말에 시바 카이엔의 머리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렇다, 호로가 기생한 형님은 영력이 적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귀도술』에 대한 저항이 극도로 적다는 이야기.
"박도의 9술, 격!"
"뭣?!"
박도술로 포박한다.
박도술에 의해 결박당한 호로는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결코 그것을 풀 수 없었다.
시바 카이엔은 그렇게 몸이 굳어버린 형님을 들쳐매고 모옥을 나선다.
한시라도 빨리 우노하나 대장님께 가자.
그녀라면 분명 이 사태의 해결법을 알고 있을 테니.
하지만, 그것이 쉬울리 없다.
왜냐하면ㅡ
"아직, 쥐새끼가 남아있었군."
밖은 디에즈 에스파다를 비롯한, 석관급의 호로들이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의 몸에 기생한 호로는 현재 혼란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기생을 할 경우, 그 대상이 어떠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건간에 먹어치울 수 있다.
그것은 호로가 정신을 먹어치울때에 정신력을 쓰는 것이 아닌, 그저 능력 자체가 정신을 먹어치울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
물론, 정신력이 강할 경우에는 버티기도 하지만, 결국 호로에게 먹히게 되어있다.
때문에 이번 기생에서도 호로는 손쉽게 그 정신을 먹어치웠다.
하지만, 엉망이다.
마음이 부숴져, 기억은 파편으로 흩날려 여기저기 산발해있고, 정신은 혼탁한데다가 무너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신을 먹어치운 현 상황에서도 그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미쳐버린 남자는 저항한번 하지 않았다.
때문에 호로는 손쉽게 먹어치웠다.
미쳐있었기에 정신은 흩어져 있어 그 기억을 모으는데 조금 힘들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도 호로는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은 당연히ㅡ
"……기생인가, 의미없는 짓이군."
자신이 기생하여 먹어치운줄 알았던 남자가, 정신세계에서 떡하기 검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