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翼) 4화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필연이던 우연이던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그 남자, 하야나기 카이쥰은 운명이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왔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가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과 그 힘에 의한 길의 방향.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깨달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를 부정하고 『체념』해 어떠한 일에 대한 고민등에서 해방된다는 정적주의 사상의 운명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남자를 괴롭게했다.
과거, 남자는 들었다.
"그리 생각하지 말거라. 이는 하늘이 정한 운명이니, 곧 천명이니라."
천명(天命)『하늘이 정한 운명』
남자가 일찍이 할머니와 마을 사람을 잃었을 때에 들었던 말.
하늘은 뜻이 있었기에 자신의 마을을 태웠고, 자신만 살렸으며, 이후 전쟁터에서 죽게하시고, 팔을 가져가시고, 눈을 가져가시고, 힘을 가져가셨다.
그 뜻은 너무도 드높고 고귀하기에 일개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스님, 저희 마을사람들이 이렇게 되는걸 하늘이 정하신건가요?"
스님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할머니가, 스님이, 그리고 스승이 말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운명.
그 말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비록 체념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측면으로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운명을 통해 하늘의 순리 혹은 신과도 같은 초월적인 것에 기대어 체념하는 것이 주였다면, 현대에 와서는 그 운명을 깨달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천적으로 변해, 인간으로 하여금 여하한 형태로든지 그곳으로부터의 해방의 수단을 강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어릴적 들어왔던 말은 사실상 체념에 가까웠다.
초월적인 존재가 정했기에, 인간은 그 것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살아야하며, 그로인해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서기보다는 원망과 체념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정적주의,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를 최대로 억제하고, 초인적인 신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수동적 사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우르키오라 쉬퍼.
하야나기 카이쥰.
그리고 원명.
이 3종류의 인격은 결국 하나로 완성되어 세계의 진실을 본다.
운명, 그리고 그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이들.
그 모든 것이 남자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 운명을 아는 이들은 말한다.
남자가, 그리고 그의 지인들이 사는 세계를 『블리치』라고, 그리고 그 운명을 『원작』이라고 말이다.
◆
남자의 눈앞에 펼쳐진 『원작』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쿠로사키 이치고였다.
일찍이, 남자가 우르키오라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사신이 되었고 소울 소사이어티에 침입했으며, 친구를 구하고 아이젠 소스케의 진실을 깨달아, 이후 우르키오라에게 납치된 오리히메를 구하기 위해 웨코문드에서 싸우고 결국 우르키오라를 쓰러트리고 아이젠 소스케마저 거꾸러트린다.
그것은 실로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희생된 이들도 분명히 있었고, 결과적으로 쿠로사키 이치고는 모든 힘을 잃었다지만, 끝맺음 자체는 활실히 맺어지며 결국 아이젠 소스케는 저지되었다.
애시당초, 운명(원작)에서의 그는 어디까지나 쿠로사키 이치고의 시련이 되어 그를 강하게 키우고 나아가서는 승리의 발판이 되는게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분명 쿠로사키 이치고에게 패배하여 몸이 가루가 되었고, 그것은 정해진 운명(원작) 그대로였다.
그렇다.
남자는 알아버린 것이다.
운명이 이끄는대로라면 그는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결국 쿠로사키 이치고를 주인공으로 한, 결말이 정해진 희극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본래, 운명이 보여준 이야기 대로라면 『하야나기 카이쥰』이라는 존재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단순히 『우르키오라 쉬퍼』라는 이야기의 배역이 되기전의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외팔이 되어서도, 눈을 잃고 영력을 잃고, 마음을 잃고 끝내는 목숨마저 잃었다지만, 그는 『운명(원작)』이라는 거대한 틀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본 운명에서는 그의 친우인 슌스이와 쥬시로 마저도 그에 대한 회상도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는 철저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본래 이 시대의 이야기(운명)의 주인공은 쿠로사키 이치고였으며, 그의 존재 가치는 단지 우르키오라 쉬퍼로서의 가치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나아가도 결국 자신은 우르키오라 쉬퍼가 될 운명이었으며ㅡ 하야나기 카이쥰으로서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님이, 할머니가,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곧 하늘의 천명이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결국 무가치한게 아닌가?
자신의 노력은 헛수고가 아닌가?
어차피 노력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나아가지 않았어도, 그는 운명이 이끄는대로 우르키오라 쉬퍼가 되어 그 생을 마감하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인명재천(人命在天)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결국 그는 정해진 길을 걸어가며 발악을 했을 뿐이란 말인가?
그의 고뇌는 깊어져 갔다.
차라리 이것이 진실이었다면 모르는 편이 나았다.
원명으로서도, 하야나기 카이쥰으로서도, 우르키오라 쉬퍼로서도 결국 정해진 길을 걸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인것이다.
그는 제 역할을 다하고, 운명이라는 틀에 속박되어 무대에서 내려왔다.
노력은 헛수고였고, 존재의의는 결국 호로가 되어 이야기의 발판이 되는 것 뿐이었다.
한가지 긍정적인 소식이라고는 결국 아이젠 소스케가 타도된다는 것 뿐일까.
그렇게 남자는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암담함으로 진실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절망에서 간신히 주변을 둘러 봤을 때에, 그곳은 감옥이었다.
녹이 슬어있으나 튼튼한 쇠창살과, 살기석 특유의 향이 섞여있는 바위를 깍아 만든 암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톡톡 소리를 내는 그곳을 남자는 알고있었다.
"이곳은… 구더기 소굴인가……."
그의 수십, 수백년의 세월이 새겨진 곳.
진실을 알고, 절망속에서 결국 도달한 곳이 그의 인생의 몰락지중 하나였던 구더기 소굴의 형태라는 것에 그는 탄식했다.
이것이 그의 결말이었나?
운명에 놀아난 이의 말로가 결국 이것이었나?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에 그는 사고가 잠겼다.
그리고 그렇게 수일이 지난 후, 어느날 갑자기 맞은편에 한 남자가 쓰러진 상태로 나타났다.
맞은편의 남자는 한참을 죽은듯이 쓰러져있다가 구토를 하며 덜덜덜 몸을 일으켰다.
토사물이 섞인 더러운 행색에 오른소매는 팔이 없다는 것을 알리듯이 허전한 맞은 편의 남자.
어쩌면 이 남자 또한 자신처럼 운명에 놀아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말로가 자신과 같은 이 구더기 소굴이 아닐까?
그렇기에 남자는 말했다.
"이곳에 온걸 환영하네, 신참."
"……여기는 어디입니…까?"
"여기는 『구더기 소굴』이라는 곳일세. 흔히들, 감옥이라고도 하지."
본래의 구더기 소굴도, 그리고 지금 이 공간도 결국 감옥이다.
운명이라는 굴레에 갇힌 이들을 위한 감옥.
남자의 말에 맞은편의 남자가 자신의 외팔로 조심조심 눈 부위를 더듬고 전방의 쇠창살을 더듬었다.
그에 남자는 그 모습에 기시감을 느꼈다.
외팔, 그리고 장님.
영력이 없으며, 쇠창살을 더듬고, 구더기 소굴에 갇혔다.
그것은 마치ㅡ
"스승님, 스승님은 괜찮으신겁니까?!"
맞은편의 남자는 탁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마침내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게된 남자는 탄식을 하듯 대답했다.
"글쎄, 나도 이곳에 갇혀있는 처지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얼마전 시바 우에슌이라는 자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열렸었다는군."
맞은편의 남자.
구더기 소굴.
그리고 스승님의 안부.
그것은ㅡ
과거, 자신이 영안을 얻었을 때의 상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