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陳姬) ‘국향(菊香)’ 1화
일찌기 을지 대신께 바치려고 산삼을 향산서 캐다가 을지 대신을 만나서, 그 길로 정승을 따라온 연파대는 이내 승상 댁 한 방에 우거해 있었다.
천하의 형편이 좀 이상야릇해 가므로, 서울로 돌아와서는 아침 일찌기 입궐하고 저녁 늦게야 귀택하며, 며칠 지나서 임금의 옥체 미령하여 승상이 집에 들어앉을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파대는 승상께 뵈올 기회가 태무하였다.
승상 댁에 비치해 있는 책을 보며 소일하였다. 그 책은 대개가 한적(漢籍)이었다. 한토에서 한인이 저술하여 발간된 책이었지만, 한토라는 데는 끊임없는 역왕난리(易王亂離)와 혁명 소동에, 저술의 본고장인 한토에 전하는자 쉽지 않고, 동방 낙원 고구려에 도리어 곱다랗게 보존되어 있어서, 본고향 한토에서는 이름까지 잃은 희귀서(稀貴書)가 을지 승상댁 서고(書庫)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심심하기 때문에 소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거기 빠졌다. 빠져서 탐독하노라면 책이란 것은 또한 읽느니만큼 소득이 컸다.
이십 미만의 한창 총명한 나이의 파대였다. 한 번 읽으면 좀체 잊히지 않았다. 부쩍부쩍 늘어가는 자기의 지식에 스스로 경이의 눈을 던지면서, 파대는 욕심 사납게도 읽고 또 읽었다.
서고와 제 방에 왕복하는 이외에는, 일체로 밖에 나다니지 않고 독서에 미쳤다.
승상의 존재까지 잊었다. 승상도 파대의 존재를 잊었는지, 집에 데려다 둔뿐 아무 참견이 없었다.
파대가 소리골서 을지 승상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 지 거의 반 년이나 지나서 이듬해(영양왕 제이년) 정월이었다.
글읽기에 피곤한 허리를 좀 펴느라고 파대는 뜰에 나섰다.
하늘을 우러르니 북국 특유의 맑게 갠 하늘에는 바람 한 점 없는 양하여, 움직임 없는 고요하고 찬 공기는 도리어 일종의 쾌감을 준다.
파대는 머리를 젖혀 하늘을 향하고 상쾌한 한기(寒氣)를 즐기며 한참을 그 자세대로 서 있었다. 문득 두런두런 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고 보니, 지금 막 대궐에서 돌아오는 을지 승상의 수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승상 댁에 우거해 있으면서도 승상을 뵈옵기 진실로 오래간만이었다. 그렇게도 사모하고 존경하는 승상을 오래간만에 뵈오매 참으로 반가왔다. 좀 비켜 서서 수레가 가까이 들어와 승상이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수레가 파대의 앞을 지나서 청방 뜰 아래까지 이르러, 승상이 바야흐로 수레에서 내릴 때에, 파대는 빨리 그 앞에 가서 국궁하였다.
“승상님, 오래간만에 뵈옵습니다.”
을지 승상은 고개를 돌려 파대를 보았다. 낯익은 젊은이지만 언뜻 누군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눈치에 파대가 앞질러 스스로 자기가 누구임을 아뢰었다.
“아! 이게 누구요? 언제 올라왔소?”
“저는 상년에 승상을 따라 올라와서 지금껏 승상 댁에 숙식하고 있었읍니다.”
“그렇소? 한 뜰안에서 살면서도 모르고 지냈군! 좌우간 들어오오.”
파대는 승상을 따라 청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도 바쁜 몸이라, 내 집에 객을 두고도 전연 무관심했군. 과히 나쁘게 생각 마오.”
“아이, 대인은… 대인, 보잘것 없는 소동이올시다. 해라를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초에….”
마치 소녀처럼 얼굴이 다홍빛이 되었다.
“허허- 남의 사람을 해라야 할 수 있나? 그렇게 어렵다면 허게를 하지.”
“네, 제발….”
평생을 두고 사모하던 어른을 이렇게 가까이 모시고 직접 그이와 수작을 하니 파대는 다만 황공할 따름이었다.
“동무도 없이, 게다가 내가 주인 구실을 못했으니, 그동안 퍽 갑갑했겠군?”
“네, 대인 댁 많은 책을 여쭈어 보지도 않고 꺼내다 읽느라고 적적한 줄은 모르고 지냈읍니다.”
“거 기특하지! 젊은이가 놀든가 장난할 생각을 않고 공부를 한단-책이란 무슨 책이든 해롭지 않은 게니….”
“하도 읽을 욕심에 급하와 대인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천만에! 책이란 읽으라고 생긴 게지 서고에 잠재우라고 생긴 건 아니니까, 읽을 사람이 있으면 읽을 게지.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공부에 빠진담! 기특하지. 참, 젊은이가 그 정성으로 구한 산삼, 나랏님의….”
왕의 일을 말할 때는 으례 승상은 머리를 깊이 숙이는 것이었다.
“탈이 중하시어 나랏님께 바쳤네. 내가 먹은 것보다 더 흡족하겠지?”
“삼의 효험은 보셨읍니까?”
“하늘이 부르시는데 삼 따위가 무슨 보람을 내겠나? 삼의 보람은 못 보셨지만 마음으로 흡족해 하셨지.”
파대는 머리가 수그러졌다. 국왕의 승하고 모르고 지낸 불충의 꾸지람이 가슴을 눌렀다. 아무리 공부에 열중했다기로 이 나라 신자 된 도리로 나랏님의 승하도 모르고 지내단, 이런 불충이 어디에 있으랴? 승상은 고요히 말을 계속하였다.
“적자 된 우리로서야 애통 망극한 일이지만, 우리 전 나랏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천하 만방을 눈 아래 굽어보시며 일생을 지내셨네. 보수가 고희(古稀)를 지내시어 명민하신 태자께 위를 부탁하시고, 유감없이 떠나셨으니 한되는 일은 조금도 없네.”
물론 승상으로서는 그 임금을 임종 때까지 모시고 그 뒤 고이고이 안장(安葬)까지 해 모셨으니 한 되는 일이 없지만, 파대는 이 나라 만성으로, 더우기 같은 서울 안에 있으면서, 독서에 혹하여 임금의 승하까지 몰랐다는 불충에 대한 가책 때문에, 충성의 덩어리인 승상의 앞에 감히 머리도 들 수 없었다.
이치로 따지자면 대살림 댁 한편 방에 있는 자기에게 국상 같은 중대한 일도 알려 주지 않은 승상을 나무람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만, 파대에게 있어서는 을지 승상은 다만 신성한 존재일 따름이지 원망이나 나무람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까이 모시어 본 일은 없었다. 용안조차 우러른 일이 없었다. 따라서 정으로는 관심되는 바 없었지만, 이 나라 만성에게 전통적으로 새겨져 있는 임금께 대한 충성의 탓으로, 파대는 무거운 자책감을 느낀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기 방에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돌아와서 망연히 앉아 있는 파대의 귀에, 문득 이상한 음률이 들렸다.
무거운 마음으로 저녁을 끝낸 방금 뒤였다. 귀를 기울이니 거문고소리- 무엇을 사뢰는 듯 조르는 듯, 밤하늘에 울리어 나가는 그 음향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마음에 커다란 오뇌를 품은 사람이 몇 가닥 줄로써 가슴의 오뇌를 하소연하는 애끊는 음조에 틀림이 없었다.
자기의 오뇌를 따로 가지고 있는 파대는 처음에는 무심히 들었다. 그러나 무심히 듣고 있는 동안 부득부득 가슴에 사무쳤다. 그 음조는 ‘이런 것이라’는 격식과 틀에 맞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탄자(彈者) 스스로가 자기의 가슴에 사무친 호소를 거문고를 통하여 사뢰는 진실한 음조였다. 매한가지로 가슴에 큰 수심을 가지고 있는 파대에게는 절절이 심현에 울리는 음조였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덧 공명하였다. 자기로도 무슨 때문인지 모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서 뜰로 내려섰다. 얼굴과 온몸에 끼얹는 밤의 냉기에 뜻하지 않고 몸서리치면서, 파대는 그 음률의 날아오는 방향을 타진해 보고 그쪽으로 차차 발을 옮겼다.
캄캄한 그믐이었다. 백만을 자랑하는 대고구려 서울 장안경(長安京)도 겨울의 밤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국상 중의 장안경은 이 나라 만성의 왕실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무한한 정숙이 이을 따름이었다.
파대는 그냥 들려오는 음률을 향도삼아 차차 뒤로 돌아갔다.
이 댁에 몸을 붙인 지 반 년이 넘었지만 지리를 전연 모르는 파대는, 오직 그 음률만을 향도삼아 어딘지도 모르는 모퉁이를 몇 개 돌았다. 그리고 이댁 후당 쪽으로 들어섰다.
또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비로소 불빛이 보였다. 캄캄한 가운데를 뚫고 오던 파대는, 맞은편에 홀연히 나타난 광명에 한순간 멈칫 섰다.
맞은편에는 별당 한 채가 있었다. 꼭꼭 닫힌 창 안에 휘황하게 켠 불이 창을 통하여 이 근처 일대를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문고의 음률은 그 방에서 울리는 것이 분명하였다.
음률의 유혹에 끌려서 여기까지 무심히 오기는 하였지만, 무슨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파대는 거기 우두커니 서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는 것과 동시에 파대의 머리에는 여러가지의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음조는 ‘이런 곡조는 이렇게 뜯는다’는 능한 솜씨뿐 아니라, 탄주자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오뇌를 진정으로 사뢰는 하소연이니, 그도 정녕 무슨 오뇌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탄주자는 사내일까, 여인일까?
그 섬세한 솜씨로 보아 탄주자는 분명 여인으로 보았다. 여인일진댄 젊은일까? 노파일까? 또는 중년일까?
그 음조의 박력과 탄력으로 보아서, 세상 만사에 피곤한 노파로 보기보다 중년이나 젊은이로 보는 것이 지당하다. ‘어떤’‘젊은’‘여인’일까? 의문과 함께 일어나는 그 호기심은, 파대로 하여금 그냥 못박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게 하였다.
언제부터 시작된 거문고인지 언제까지 계속될 거문고인지, 방 안의 거문고는 그냥 계속되었다.
그 방 밖에도 몇 채 후당이 우뚝우뚝 서 있는 모양이지만, 다른 방에는 불빛도 인기척도 없고, 오직 그 한 방에서 거문고소리만이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 타는 곡조가 무슨 곡조인지는 파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곡조는 탄주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곡조다. 젊은 파대의 마음에 푹푹 들어박히는 호소다.
이로써 탄주자는 가슴에 무슨 큰 오뇌를 품은 자일시 분명하였다. 가슴에 오뇌를 품은 ‘젊은 아낙’-.
누구일까? 대신 댁 누구일까?
문득 다른 음률이 한 가지 더 섞이었다. 사람의 육성(肉聲)으로서의 노래였다.
지금껏 거무고로만 하소연하던 음률의 주인은 육성까지 섞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성(女聲)이었다. 그리고 탄력 많은 젊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여기 파대의 호기심과 의혹을 더 크게 한 것은, 그 육성으로 부르는 노래의 가사(歌詞)가 부여 계통의 말이 아니고 한어인 듯싶은 것이다.
한어를 모르는 파대라 분명 한어라고 단정키는 힘들었지만, 그 노래의 악센트나 발음이나 청이 분명 한어 계통이었다.
(한어? 한녀-漢女?)
알지 못하는 방언이라 가사의 뜻은 알아들을 바이 없지만, 거문고와 어울려서 들려 오는 그 육성은 오장을 끊는 듯한 무슨 호소일시 분명하였다.
(공녀-貢女일까? 을지 승상의 애첩일까?)
파대는 머리를 기울였다.
한토에 생기는 뭇 제왕들이 고구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고구려 왕께 무슨 높은 벼슬과 함께 값나가는 보물을 보내는 전례가 있는 것은 파대도 아는 바였다.
그러면 저 노래부르는 한녀는 저곳의 어느 천자가 고구려 대신 을지공에게 그 환심을 사고자 보낸 한희(漢姬)일까?
저 여인은 을지 승상의 한 애첩일까? 외국 여인을 애첩으로 두었다는 일종의 분개심이 을지 대신께 일어나려는 것을 파대는 힘있게 눌렀다.
을지문덕은 파대에게 있어서는 다만 신성한 존재였다. 그 신성한 존재에 대하여 신성치 못한 현실이 보이려 할 때에, 파대는 마음에 저절로 일어나려는 불쾌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현재한 외국의 젊은 여인을 보매, 그런 것이 있는 이상은 을지 승상의 신성이 얼마간 깎일 것이로되, 그래도 승상만은 절대로 신성시하고 싶은 파대는, 이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여, 자기가 여기까지 나왔던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내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발을 떼려 하였다.
그때 후당 안에서 들려 오던 거문고소리가 문득 그쳤다. 그리고 거문고를 약간 밀어 놓은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아!”
그것은 노래부르던 음성의 탄식성이었다.
“이젠 다 뜯으셨어요?”
후당 안에는 두 명 이상의 여인이 있는 양하여, 노래부르던 음성과는 다른 음성이 하는 말이었다.
“아유 곤하다! 이젠 자련다.”
분명 고구려 발음이 약간 서투른 외국 여인의 말이었다.
“곤하시구말구요! 언제부터시라구- 금침하리까?”
“승상도 주무시는지?”
“승상께서는 자정이 지나서야 주무시니까 아직 안 주무실걸요.”
“그럼 나도 더 앉아 있으련다. 승상께서도 그냥 기침해 계신데, 나 같은 것이 벌써 다리 뻗고 자서야 되겠니?”
그 뒤에는 기다란 한숨- 적적하고도 진실미를 띤 한숨이었다.
그 한숨소리에 동정이 간 듯한 시녀의 소리가 뒤를 이어 났다.
“참 아씨도 적적하시겠어요. 젊으신 신세로 부모님 슬하를 떠나 만리 밖 타국에- 쇤네 같으면 가슴 답답해 탁 죽겠는걸요.”
“답답하거든 장지문이나 좀 열어라.”
“창문 연다고 가슴 답답한 것이 좀 나으리까?”
“하여간 좀 열어라.”
그 소리에 응하여 밖으로 향한 장지문이 더르륵 열렸다.
안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을 피해서 약간 비켜 서며 파대는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광명한 촛불 화광 아래 드러난 방 안의 광경은 파대의 앞에 전개되었다.
시녀와 마주 거문고를 약간 밀어 놓고 앉아 있는 색시는 분명 한녀였다.
나이는 십 칠팔-.
세도를 자랑하는 한토의 어느 천자가 고구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고르고 골라서 보낸 선물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희대의 미녀였다. 그 눈초리, 입매, 눈매, 코 모양, 추호 나무랄 데가 없는 희대의 인품이었다. 불쾌한 감정으로 그 여인을 보려 했고 또 보아야 할 파대였지만, 열어 젖힌 창 안에 나타난 한녀의 자태에 눈을 던질 때, 파대는 황홀하여 눈이 아득하였다.
문창이 열리기 때문에 파대는 황홀히 어두운 쪽으로 비켜 섰지만, 안에서의 이야기는 그냥 계속된다.
“고국 만리….”
“가시고 싶으시겠어요.”
“아니 추호도 가기 싫다. 승상께서 두어 주시기만 하시면 한 백 년 이 나라에 살고 싶다.”
“아씨, 창을 열면 아직 몹시 서늘한걸요. 도로 닫읍시다.”
“좋도록 하려무나.”
다시 창이 더르륵 닫혔다.
창이 열렸던 시간은 진실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닫겼다.
짧은 시간이니만큼 파대가 그 한녀를 본 것도 잠깐 사이였다. 그러나 창이 도로 닫힌 뒤에는, 파대는 마치 그 창에 넋을 앗긴 사람처럼 정신을 수습할수가 없었다.
그 여인을 파대는 분명 공녀요 승상의 애첩으로 보았다. 저런 미녀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시기와 부러움에 가까운 감정이 일어남과 함께 욕심까지 무럭무럭 일어났다. 숭배하여 마지않는 승상 을지문덕과, 미인 한녀의 주인 을지 승상과는 분리되어, 을지 승상에게 대한 엷은 시기까지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을지 승상께 대한 불쾌한 감정은 죄악으로 여겨서 스스로 크게 꾸짖을 파대였지만, 평소 경건함을 자랑하던 파대의 마음에도 그런 더럽고 불쾌한 감정이 연해 일어나는 것은 금할 수가 없었다.
방 안에서 불을 끄고 자리에 드는 소리를 듣고야, 파대는 무슨 큰 보물을 떨어뜨린 듯한 애석한 느낌을 가슴 부듯이 느끼면서 제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