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칠백 년
성조(聖祖) 단군 왕검이 태백산록에 자리잡고, 온 동방의 만성을 산하에 넣고 나라를 이룩한 지 일천 수백 년, 단군 해모수(解慕漱)때에 해모수의 아드님 고주몽이 북부여땅에 고구려나라를 이룩했다.
고주몽은 그의 이룩하나 고구려나라에서 그의 효용한 만성들을 구사하여 동정서벌, 그의 국토를 넓히어 나갔다.
이리하여 단군 족속의 원갈래는 북부여에서 시작하여 그의 영토는 사면으로 넓어 갔다.
-이 족속을 뒷날 사가(史家)는 ‘부여족(扶餘族)’이라 한다.
그런데 그때 이 인간 세계는 부여족과 대립하여 ‘한족(漢族)이라는 인종이 있었다.
소위 요순의 후예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족속으로서, 그 족속에는 요행 큰 학자가 몇 사람 나서 학문이라는 것을 숭상하고, 그 나라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경앙하고- 이러한 세월이 얼마 흐르는 동안에, 그 나라는 인간세계에 중원이라 일컫게 되고, 인간에서는 그 나라를 천자의 나라라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렇게 되매, 그 나라 백성도 자연 자기네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자긍심이 생겨, 자기네는 화(華)요 다른 나라는 오랑캐〔夷狄[이적]〕라 여기게 되었다.
고구려도 이 중화인의 눈에는 한 개 동이(東夷)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로서는 그런 데 개의하지 않았다. 자기네는 성인 단군의 후예로라는 굳은 신념으로써, 중화인이 요순의 후예면 고구려인은 단군 성인의 후예라 하여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중국의 눈에는 여간 거슬리지 않았다. 고구려를 한 번 두들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 중국에는 외국을 정복할 만한 힘이 모자랐다. 중국이란 나라는 그 나라 백성은 모두가 저 잘난 맛에 사는 민족이라, 제각기 제가 천자가 되어 보려고 들먹거리는 판이라, 한 개의 나라 한 개의 왕실이 오래 계속되어 보는 일이 없이 일이십 년 가다가는 새 천자가 생기고 일이 십 년내지 수삼십 년 가다가는 꺾어지고, 동쪽에 한 천자가 생기면 서쪽에도 다른 천자가 생기고, 이렇듯 쓸데없는 국가들이 천자놀이를 반복하느라고 나라가 한 뭉치가 되어 보지 못하였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이렇게 어지러운 세월을 거듭하노라니, 동방의 가시〔荆[형]〕 고구려에게는 손 댈 겨를이 없었다.
그 동방의 고구려는 고주몽이 나라를 이룩한 이래 단일 민족으로 나날이 크고 자라니, 지금의 중국으로서는 어디 감히 넘볼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는 고구려 원정을 벼르기만 하면서 국내 통일에 힘쓰던 중국 종족은, 후한(後漢) 영제(靈帝)때 비로소 국내를 통일하고 곧 고구려 원정의 길을 떠났다. 벼르고 벼르던 터이라, 국내 통일이 되자마자 곧 떠난 것이었다.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사년이요, 후한 영제 가평(嘉平) 원년, 한족은 한족 건국 이래 눈의 가시이던 고구려를 치러 대군을 몰아 고구려로 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한’의 대군의 내구(來寇)를 맞아 싸우지 않았다.
‘한’에 그다지 못하지 않도록 광대한 지역을 가진 고구려는 변방군을 엄칙하여 ‘한군’이 국내에 깊이 들어오도록, 다만 유격군으로 한군을 시달리는 뿐 큰 회전은 피하였다.
한군은 아무리 쫓아와야 누구 마주 싸워 주지 않고 고구려 깊이 들어오매, 식량 수송도 곤란한 위에 날씨도 매운 겨울철로 들게 되므로, 할 수 없이 도로 회군하기로 하였다.
무력전보다 식량전 수송전에 패하여 돌아가는 ‘한’군에게 고구려는 지금껏 깊이 감추어 두었던 온 병력을 들어 엄살하였다. 역사상에 이 싸움이 기록되기를,
‘한군 대패하여 필마도 돌아가지 못하였다(漢軍大敗匹馬不返[한군대패필마불반])’
이라 하였다. 즉 건국 이래의 국시를 한 번 펴 보러 왔다가 필마도 못 돌아갔다는 참패를 본 것이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 뒤,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에, 헌제는 이 철천의 원수 고구려를 어떻게든 멸하여 보려고, 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씨를 명하여 또 고구려를 원정하여 보았다.
참수 산적(斬首山積)
‘목 벤 것이 산과 같았다.’
역시 한군의 참패였다.
그로부터 오 년 뒤 요동의 공손씨(한족 계통이 아니다)는 한의 실력을 저울질하였으므로, 한의 굴레를 벗고 스스로 따로 섰다.
이런 것도 한 가지의 원인이 되겠지만 본시부터 국가놀이〔國家遊戱[국가유희]〕, 천자 경쟁을 즐겨하는 ‘한인’들은 ‘후한’도 선 지 이미 백 사오십 년 되어서는, 사면에서 ‘천자’가 되려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고국천왕 말년경부터 산상왕(山上王) 초년경에는, 수만의 ‘한인’들이 국가놀이에 분요한 제 나라 한토를 피해서 낙원 고구려를 찾아와 투신하였다.
과연 한실은 조조(曹操)에게 망하고 조씨의 위(魏)가 일어나고, 촉에서는 유현덕(劉玄德)이 일어서 촉한(蜀漢)을 이룩하고, 강남에는 손권(孫權)이 일어서 오(吳)를 세워서, 천하에 하나밖에는 없어야 할 ‘천자’가 셋씩이나 생겼다.
여기서 ‘천자’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위’에서는 자기네가 한실(漢室)의 뒤를 받았으니 자기네가 정통 천자라 하였다.
천하의 부고(富庫) 천하의 중원 ‘강남’을 차지한 ‘오’는 자기네야말로 중국 천자로라 하였다.
‘촉’은, 한실은 유씨의 것이니 촉의 유현덕이야말로 한실의 정통 주인이라, 따라서 자기네야말로 진정한 중원의 주인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이(東夷) 고구려의 무게는 차차 올라갔다.
한때는 동방의 오랑캐라 하여 우습게 보고 멸시하던 고구려지만 지금 세 천자 정립한 이때, 그래도 호(胡)가 아니요 만(蠻)이 아닌 의과의 나라〔衣冠之國[의관지국]〕 고구려를 자기네 편에 끌어 넣으려는 공작과 경쟁이 시작되었다.
동천왕(東川王) 사년, ‘위’의 둘째 임금 명제(明帝) 청룡(靑龍) 이년에, ‘위’에서 친선사가 많은 예물을 받들고 고구려로 찾아왔다. 이리하여 동방 웅국 고구려와 서방 신흥국 ‘위’는 서로 친선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자 다음해에 ‘오’에서도 고구려로 친선사가 찾아왔다. 그러나 ‘위’와 이미 친선 관계를 맺은 고구려로서는, ‘오’와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은 고구려 덕의에 용납되지 않는 바였다. 그래서 ‘오’에서 온 바의 사신을 목 베어 그 목을 ‘위’에 보냈다.
‘위’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맺기는 맺었다. 그러나 ‘위’와 고구려는 국경선(國境線)이 서로 맞닿은 관계로 끊임없이 작은 충돌이 있었다. 연해연방 국토를 확장해 나아가는 고구려라, 자연 국경선 가까이서는 딴나라와 충돌이 생기는 것이었다. 요(遼)땅으로 늘 진출해 나가는 고구려라, ‘요’땅의 종주권을 가졌노라고 자임하는 ‘위’와는 자연 국경선상의 충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토에서는 또 ‘국가놀이’가 진행되었다. ‘위’,‘촉’, ‘오’의 삼국도 선 지가 한 사십 년 되었으니 시작될 만도 하였다. ‘진(晋)’이새로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위’와 ‘촉’을 멸하고, 십오륙 년 뒤에는 ‘오’까지 없애고 한토를 또 통일하였다.
그 통일이 한 사십 년 계속된 뒤에는 북방 오랑캐 족속〔匈奴[흉노]〕이 일어나 ‘한〔前趙[전조]〕’을 세우자, ‘진’은 남방으로 쫓겨 내려가고, 소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현출하였다.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저(低), 강(羌)의 북방과 서방의 다섯 오랑캐가 북중국 지방에 일고 자라서, 혹은 오륙 년 혹은 삼사십 년씩 국가 노릇을 하였다. 오호가 전후하여 세운 나라가 합계 열세 나라였다.
동시에 흉노에게 쫓긴 한족의 ‘진(晋)’은 남쪽에서 도망하여 소위‘동진(東晋)’이 되었다. 한족의 세운 나라도 합계 셋으로 갈라졌다. 이렇듯 한토의 무수한 민족이 ‘국가놀이’,‘천자놀이’에 골몰할 동안은 고구려는 태평 무사하였다. 눈의 가시같이 ‘요’지방 통일에 방해가 되던 ‘연(燕)’을 ‘북위’를 시켜 멸하고, 혹은 동과 남으로 더욱 국토를 넓히어,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의 두 명주의 재위 일백여 년 간에는, 이제는 누구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동방의 대제국으로 약진하였다.
서쪽 나라들은 여전히 국가놀이 -국가 도태 작용- 가 계속될 때에, 그때 갓 송(宋)을 멸하고 생긴 남제(南齊)에서 건국한 첫 해, 많은 예물과 함께 고구려 임금 장수왕께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벼슬을 보냈다. 표기대장군의 직함을 남제의 천자에게서 받은 장수왕(육십칠년이었다)은 거기 대하여 고맙다는 사례사를 보냈다. 그런데 불행 고구려의 그 사례사는 남제로 가는 길에 ‘북위’군사에게 잡혔다. 길이 고구려에서 중국 영토 어디를 가려 해도, 북위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금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갖고 있노라고 자신하던 북위의 천자는 크게 노염을 냈다.
“너희는 남제에 서방질을 하느냐?”
질투의 사신이 고구려로 왔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은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버려 두어라! 경쟁이다. 이제 북위에서도 남제에 질소냐 하고, 짐께 벼슬을 보내리라.”
과연 이 임금 승하하자 북위에서는 허둥지둥, 차기대장군(車騎大將軍) 대부(大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의 벼슬을 보내어 왔다. 그리고 새 임금 문자왕(文咨王)께도 바삐 그만한 벼슬을 보내어 왔다.
새 임금 제삼년에 이번은 남제에서 합계 스물한 자의 엄엄하고 위엄성 있는 기다란 직함이 왔다.
왕의 제십칠년에는 ‘양’나라에서도 그만한 벼슬이 왔다.
드디어 노골적으로 봉왕 경쟁(封王競爭)이 시작되었다.
안장왕(安藏王) 이년-.
‘양’이 안장왕께 기다랗고 놓은 벼슬을 보냈다. 그런데 그 사신은 불행 오늘 길에 중로에서 ‘북위’에 잡혔다.
‘북위’는 낭패하였다. ‘양’에게 졌다는 큰 일이라 하여 ‘양’에게 지지않을 기다랗고 높은 벼슬을 급급히 안장왕께 보내어 왔다.
기성 국가는 무론이요, 한토에 생기는 무수한 새 나라는 생기기가 무섭게-아니 오히려 생기려는 수속 공작으로- 고구려왕께 높은 벼슬을 보냈다. 이것이 그들의 최급 최대의 정사였다. 말하자면 국가 창립 계출(屆出)이었다.
좀 더 똑똑히 따지자면, ‘국가 승인 신청’이었다.
비 뒤의 죽순(竹筍)처럼, 일변으로 생겨서 한편으로 소멸되는 한토의 뭇 작은 나라들, 혹은 이삼 년 혹은 이십 년, 잘하면 사오십 년 가다가는 쓰러지는 군소 국가들은, 자기네가 스스로 한 국가를 이룩하고도 이것이 과연 국가인지 국가의 자격을 가졌는지, 스스로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고 위태롭다. 남이 국가로 인정해 주기 전에는, 스스로 믿기 힘든 미약한 존재다.
동린(東隣)에도 서린(西隣)에도 하도 수두룩한 집단들- 현재 앞집 김 서방도 뒷집 이 서방도 부하 몇 명씩 모아 가지고, 장차 세월 좋으면 칭제(稱帝)를 하여보려고 대기하고들 있다. 어느 누가 정말 제(帝)가 되고 국(國)이 될지, 도깨비판 같아서 예측할 수 없다.
이렁저렁 제 부하 몇 백이고 몇 천이고를 모아 가지고 칭제를 한다 할지라도, 남이 인정해 주기 전에는 너무도 믿기 힘든 존재다.
그리고 그 인정을 받는데도 이웃 나라(다 마찬가지인 얼치기 국가다)에게는 승인을 받으나마나다.
여기 고구려국의 인정이라 하는 것이 천 근의 무게를 갖는 것이다.
건국 육칠백 년, 단일 왕실 밑에서 단일 민족으로 순조롭고 건실하게 자라기 오늘날에 이른 고구려국의 지위는 진실로 뭇 닭 가운데 한 학(鶴)이었다.
한편으로 생겨서 한편으로 사라지는 무수한 국가들이, 내가 천자다, 아니 네가 천자다, 이건 내 땅이다 네 땅이다 야단들 할 때에, 동방에 묵연히 웅립하여 단군의 후손이요 고주몽의 나라이라는 단 한 가지의 구호를 자랑삼아, 작은 나라들의 아우성을 묵연히 굽어보면, 한 번 휘두르면 천하를 뒤엎을 실력을 가지고도, 오직 내 옛터밖에는 눈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시무시하고도 점잖은 나라 고구려―.
이 고구려에게 인정받는 국가라면, 넉넉히 나는 국가이라고 버틸 수 있을것이다.
강구하다 못해 마지막에 안출해 낸 것이 봉왕(封王) 수단이었다.
다른 인정과 달라서 천자 승인은 좀 예가 다르다.
태수나 제후(諸侯)는 천자가 내려주는 벼슬이니, 어느 ‘천자 욕망자’가 고구려 왕께 이 천자 존속의 권력 행사인 봉왕을 하거나, 장군 혹은 제후로 봉하여서 고구려 왕이 거절하지 않고 잠자코 이를 받으면 즉 고구려 왕은 나를 천자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고구려 왕이 거절하지 않고 잠자코 받게 하기 위해서는, 욕심날 만한 많은 예물과 함께 고구려 왕께는 천자 승인 신청의 후보자인 뭇 제왕(諸王)들이 보낸‘왕’호며 ‘장군’호가 많은 예물과 함께 소나기로 쏟아졌다.
뭇 제왕 후보자들은 고구려 왕께 많은 예물을 보내면서도 내심 전전긍긍하였다.
“퇴하지나 않을까?”
“거절하지나 않을까?”
“모(某)가 보낸 것은 받은 모양인데, 내가 보낸 것은 퇴하지나 않으려나?”
그러나 인심 후한 고구려 왕은 누가 보낸 것이든 턱턱 받았다. 거절하거나 사양하는 절차가 귀찮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가운데서 자라는 칠백년에, 고구려는 더욱 커지고 더욱 가멸어졌다. 백성을 자랑하는 저 나라에 비기어서 만성을 자랑하는 고구려, 오호 부스러기인 저 나라에 비기어 사족(예맥, 숙신, 부여, 한)이 한데 뭉친 고구려, 자라고 완숙하였다는 것과 속이 아울러 겉이 그만치 자라니만큼 속(문화)도 찬란히 꽃이 피었다.
북방에는 부여의 웅대한 대자연을 배경삼은 북방 문화가 자랐다. 남방에는- 국가놀이의 소란한 한 본토를 망명하여, 낙토(樂土)고구려를 찾아 모여든 한인들이 가지고 온 한 문화를 토대삼아, 예술 소질이 풍부한 이곳 토민들이 만들어 낸 남방 문화(이른바 낙랑 문화며 고구려 문화)가 찬란하게 빛났다.
한토에서는 천자놀이, 국가놀이에 골몰하기 때문에 한 가지의 문화가 계속적으로 자라고 발달되지 못하고, 자라다가는 부러지고, 피다가는 시들어, 온갖 문화의 초생품(初生品)만 잡연하게 널려 있어, 마치 문화 발생 간색마당〔見本市[견본시]〕인 듯한 느낌이 있는 반대로, 여기 고구려에는 칠백년간 단일 민족의 손으로 자라고 핀 문화는 온 동방을 찬란한 꽃동산으로 화하였다.
요컨대 한토의 부단(不斷)한 국가놀이 천자놀이의 분요는 고구려로 하여금 외우(外憂)의 근심이 없이 마음 놓고 국가 키우기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였다. 동남방의 소국 백제며 신라(서라벌이 신라라 이름을 고쳤다) 등이 갉작갉작 변방을 긁기는 하였지만, 이런 것은 같은 단군의 후손이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문제삼지 않았다.
서쪽에서 보내는 뭇 왕호(王號)나 턱턱 받아 두고 친선 사절이나 어름 어름 교환해서, 저들은 마치 시앗의 경염(競艶) 같아, 서로 곱게 보이기에만 급급하여, 고구려는 언제까지든 베개를 높이 하고 땅이나 두드리며〔擊壤[격양]〕나라 기르기에나 몰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遼) 역내의 옛터도 이제 다 회수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가멸고 기름진 강역을 곱다랗게 유지나 해나가면 그만이다. 더 욕심 나는 것도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저 한토에는 또 한 개의 새 나라가 생겨났다. 양광이라는 새 장수가 생겨서 한동안 휩쓸더니, 종내 주(周)를 없애고 수(隋)를 세웠다.
“또 하나 생겼구나.”
하고 평범한 일이라 고구려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고구려 평원왕 이십사년이었다. 북제는 그보다 삼 년 전에 주에게 망하였다. 그 주가 수에게 망한 것이었다.
이제는 한토에서는 진과 수가 남았을 뿐이라, 고구려는 좀 경계하는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족이 수없이 갈라졌기에 자기네끼리의 경쟁으로 다른 데를 돌볼 경황이 없었지만, 그 사이 육칠백 년을 꾸준히 한족에게 무언(無言)의 위협을 가하여, 한족이란 자존심까지 내어던지고 고구려에게 굴해 지내 오던 한족이다.
고구려에게 대한 절치부심하는 심사는 그들의 전통적 사상이다.
중원이라 하고 중국이라 하던 한족의 자존심과 자긍 자만심은, 그 사이 육칠백 년간 동이(東夷) 고구려에게 여지없이 짓밟히어 온 것이다.
한족의 힘이 나뉘어 있기에 그만그만했지 한족이 한데 뭉치기만 하면 그 첫 창끝을 고구려로 견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족이 넘어지느냐, 부여족이 넘어지느냐, 단군 후손이 망하느냐, 요순의 후손이 망하느냐 하는 단판 싸움은 반드시 벌어질 것이다.
오호십육국으로 갈라졌던 한토가 지금 진과 수의 단 두 나라로 대립되어 남았다 한다.
그들이 동이 고구려에게 설욕(雪辱)하기에 혹은 진과 수가 합세가 될는지도 알 수 없다.
만약 진과 수가 합세가 되지 않으면, 가까운 장래에(지금 형세로 보아서) 반드시 한 국가가 먹히고 한 국가가 먹어서 단일 국가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개벽 이래 억울한 욕(한족이 다른 국가에게 굴해 살았다하는)에 대한 설욕전이 시작이 될 것이다. 여름에도 두터운 옷을 입고야 살 수 있다는 북국에서, 겨울에도 온갖 과일이며 채소가 때를 자랑하는 남쪽 끝가지- 얼마나 넓은 땅인지 잘 이해하기조차 힘든다. 이렇듯 무변 광대의 영토와 무수한 인구를 가진 한이, 제 나라 온 힘을 한데 뭉칠 수가 있다면 놀랄만큼 무서운 힘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무심히 보고, 그 나라의 관례에 따라서, 이제 또 어디서 새 사람이 나타나려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보았다.
그러나 새 사람의 출현은 예상 밖으로 더디었다. 뿐더러, 지금 현재 남아있는 진과 수는 각각 제 힘만 기르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 같은 가벼운 행동은 스스로 삼가는 기색이 분명하였다. 여기서 고구려는 이 형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위대한 국가 고구려의 사활은 실로 지금 대책을 바로 세우고 잘못 세우는 데 달렸다.
그때의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은 이 별다른 데가 없는 근일 형세에서 여상한 비상성을 발견하였다.
그 사이 몇 십 년 국가 정무에 너무 골몰하여서 등한시했던 건강을 좀 돌볼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국가의 운명과 국가의 긍지가 걸려 있는 중대한 판국이다.
“급한 일 생기와 급사(急使) 보내오시면 곧 궐하에 달려오리다.”
임금(평원왕)께 하직하고 소리골로 내려와서 산장에 몸을 잠갔다.
경개 아름답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소리골에 몸을 잠그고, 유유한 날을 보내고 있는 대재상 을지문덕-.
드디어 그 날이 이르렀다.
진이 수에게 망하였다.
수가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벌써 고구려에 대하여 수상한 말썽을 부리려는 눈치다. 칙사는 곧 소리골 을지 대신에게로-. 칙사 따라 올라온 대신은 곧 어전에 달려가 엎드렸다.
“자라기 전- 힘 기르기 전에 부수어 주오리다.”
“오호십육국이 아니라, 오십호십육만국으로 아주 가루를 만들어 주오리다. 내 나라 고구려 건드릴 딴 생각 품기만 했다가는….”
“저들에게 한족이란 자랑이 있으면 우리에겐 단민(檀民)의 자랑이 있읍니다.”
고구려 만성을 대표하여 성조(聖祖) 동명(東明)께 굳게 맹세하였다.
효용키로 이름 높은 고구려의 만성은, 자기네의 튼튼한 수령을 맞아 힘을 다해서 수적(隋賊)을 때려 부수기를 하늘과 선조에게 맹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