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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평원(平原)-영양(嬰陽)


 여름은 가고 가을도 차차 짙었다.

 정무에 고달픈 몸을 산 곱고 물 맑은 소리골서 한동안 쉬어, 다시 예전의 몸을 회복해 가지고 장안(長安) 서울로 돌아온 을지 정승-.

 돌아와 보니, 국제 정세는 매우 미묘하게 되어 있었다.

 천자는 별 종자며 나는 별 종자랴 하여 내 힘이 남보다 약간만 우월해보이면 나도 천자가 되어 보려고 덤벼드는 한인이라, 한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허다한 천자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하여, 한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라기보다 오히려 천자 야심가의 연극사라고 하는 편이 옳을-이러한 역사를 지으면서 내려오다가, 수(隋)나라의 문제(文帝)에 이르러 드디어 뭇 천자 야심가를 토평하고 중국 천지를 통일하였다.

 이 사실은 고구려로서는 대안의 불〔對岸의 火〕처럼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한인이 고구려를 밉게 보는 것은 태고적부터였다.

 그러나 영주의 통치 아래 통일된 단일 민족으로 개벽 이래 오직 민족 실력만 길러 온 고구려와, 제각기 천자가 되어 보려는 산산이 부스러진 한(漢)민족과는, 그 실제의 힘이 서로 비길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토에 새로 나라를 이룩한 새 천자는 고구려라는 튼튼하게 자리잡힌 기성 국가의 승인을 받고서야 비로소 국가행세를 할 수 있는 관계상 고구려를 괄시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부득이 고구려에게 머리 숙이고 굴하여 오기는 하였지만, 한민족이라는 자긍심과 자부심을 동이 고구려에게 여지없이 유린당한 그만큼, 한인들의 마음에는 고구려에 대한 원심이 자랄 대로 자랐다.

 과거 전한(前漢), 후한(後漢) 등 임시로나마 한토가 한 천자 아래 통일되기만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고구려 원정에 손을 대는 그들이었다.

 ​그​런​지​라​,​ 지금 수의 문제(隋文帝)가 한토를 통일하였으매, 통일 사업이 안돈되기만 하면 곧 고구려에게 손을 뻗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소​리​골​서​ 몸을 정양하고 있다가 수의 한토 통일이라는 비보에 허덕허덕 서울로 달려온 을지문덕-.

 그 사이 중국인의 외우(外憂)가 없었으니만큼, 내치(內治)에만 오로지 힘쓰느라고 국방 관계에는 약간의 결함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워낙 효용한 종족인 위에 민족적 전통과 긍지가 있으니만큼, 그리 힘들이지 않고 천하 무적의 대고구려군을 쌓아 놓았다.

 “장차 수적(隋賊)이 내구(來寇)하면 어떡하려느냐?”

 “쪽 발가벗겨서 돌려 보내겠읍니다.”

 오오, 장하다 고구려 혼아! ​동​명​(​東​明​)​성​제​에​서​부​터​ 우금 딴 나라 군화(軍靴)에 밟혀 보지 않은 이 거룩한 땅을 지킬 자는 너희 젊은이들이니라.

 승상은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고요히 머리를 조아서 그들의 마음을 북돋아주었다.

 임금은 옥체 약간 미령하였다.

 재위 삼십이 년간, 저 한토에 일고 잦는 여러 나라에서 아첨의 선물인 대장군호며 왕호를 무수히 받고, 명재상의 좋은 보필을 받으면서 빛나는 대고구려국의 왕위를 누리기 삼십이 년, 안온하고 무사하던 고구려국에 약간의 풍파가 보이려는 듯한 무렵에 옥체에 이상이 보인 것이었다.

 ​“​이​걸​로​써​ 속세를 하직하는가 보구료.”

 가을의 석양볕을 영창으로 가득히 받아서 꽤 명랑한 침전에, 을지 승상의 시칙으로 고요히 병상에 누워 있는 왕은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

 ​“​태​자​도​ 장성하오셨으니 뒤는 튼튼하옵니다.”

 ​“​태​자​도​ 장성했거니와 노련한 대신들이 꽉 지키고 있으니 뒷 근심은 추호없지만 세상 되어 가는 형편을 이 내 눈으로 좀더 보고 싶구료!”

 왕은 눈을 고즈너기 떴다. 늙기 때문에 피부에는 탄력이 없고 눈 정기도 약간 흐릿하지만, 그 아래 감추어져 있는 패기며 영기는 능히 젊은이를 누를 만하였다.

 ​시​조​(​始​祖​)​ 동명성제부터 이 왕실에 전통적으로 흘러내린 만만한 투심을, 그것도 또한 유난히 많이 타고난 왕은 재위 삼십이 년간을 평온하게 안온하게 보낸 것이 퍽 미흡하였다. 한토의 뭇 군소 제국들이 오직 고구려에게 아첨하고 환심 사기 위하여 요만한 분규도 없이 안온하게 보낸 왕의 생애(生涯) 삼십이 년간이, 그의 성격에 비추어 보아서 몹시 미흡하였다. 안온한 생애를 다 보내고 임종이 눈앞에 보이는 지금에 한 개의 분규가 생길 눈치였다.

 이 운명의 작희에 왕의 눈가에는 적적한 미소의 그림자가 흘렀다.

 ​“​하​늘​은​ 왜 짐(朕)의 마음을 모르시는고?”

 ​“​나​랏​님​도​!​ 온 천하의 천자들을 호령하시며 일생을 보내시고도 아직 부족하시오니까?”

 군신은 서로 마주 보고 미소하였다.

 ​“​광​(​廣​-​隋​帝​[​수​제​]​)​에​게​서​ 온 편지를 어디 한 번 또 읽어 주시오.”

 을지 승상은 왕의 머리맡에 놓인 문갑에서 일전 수제에게서 온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왕의 요구에 응하여 그것을 읽었다.

 ​(​略​[​략​]​)​ ​雖​稱​藩​附​[​수​칭​번​부​]​ ​誠​節​未​盡​[​성​절​미​진​]​ ​且​曰​彼​之​一​方​[​차​왈​피​지​일​방​]​ ​雖​地​狹​人​少​[​수​지​협​인​소​]​ ​今​若​黜​王​[​금​약​출​왕​]​ ​不​可​虛​置​[​불​가​허​치​]​ ​終​順​更​撰​官​屬​[​종​순​경​찬​관​속​]​ ​就​彼​安​撫​[​취​피​안​무​]​ ​王​若​酒​心​易​行​[​왕​약​주​심​역​행​]​率​由​憲​章​[​솔​유​헌​장​]​ 即[즉] ​是​朕​之​良​臣​[​시​짐​지​량​신​]​ ​何​勞​別​遺​才​彥​[​하​로​별​유​재​언​]​ ​王​謂​遼​水​之​廣​[​왕​위​료​수​지​광​]​ ​何​如​長​江​[​하​여​장​강​]​ ​高​句​麗​之​人​[​고​구​려​지​인​]​ ​多​少​陳​國​[​다​소​진​국​]​ ​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짐​약​불​존​함​육​책​왕​전​건​]​ ​命​一​將​軍​[​명​일​장​군​]​ ​何​待​多​力​云​[​하​대​다​력​운​]​

 이것이 유명한 개황(開皇) 십년의 문제(文帝)의 새서였다. 요컨대 문제가 천하를 통일은 하였는데, 통일한 체면상 우내(宇內)의 뭇 나라에서 마땅히 조공사(朝貢使)가 와야 할 것이고 수제는 거기 대하여 가납(嘉納)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꿈쩍 소리가 없다.

 고구려 측으로 보자면, 도리어 전례에 의지하여 한토의 천자로 즉위한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구려 왕께 상당한 예물과 벼슬을 보내 와야 할 것이다.

 ​수​나​라​가​ 한토를 통일하였다 하니, 예전처럼 아첨 경쟁은 안할지 모르나, 그래도 무슨 인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수나라 측에서 보자면 대국(大國)의 면목이 있다. 한토의 천자면 즉 천하의 주인이다. 천하가 내게 와서 꿇어 절해야 할 것이다. 안하는 자가 있으면 대국으로서의 면목상 꾸짖어 절하도록 시키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천하의 주인이 된 수나라, 동이의 나라 고구려에게 절을 받지 못하면 대국으로서의 면목이 없어진다. 고구려로서 절하지 않으면 정토(征討)의 벌을 마땅히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갖은 힘 다 써서 간신히 한토를 통일하나 수는 이제는 동방의 웅국 고구려를 칠 힘이 없었다. 고구려를 건드리려다가는 아직 튼튼히 자리잡히지 못한 내 나라 수가 도리어 부서질 염려가 있다.

 대국의 면목상 치기는 해야겠고, 칠 힘은 부족하고- 이 양난(兩難)의 입장에 선 수는, 국내의 지자(智者)들을 다 모아 연구한 결과, 한 장의 새서를 고구려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천하의 주인인 수의 면목도 상하지 않을 겸, 고구려의 노염도 사지 않을겸- 이런 어려운 역할을 해야 할 새서다. 꽤 신중히 의논하여 꾸민 글이다.

 ​-​고​구​려​ 너희가 건방지고 괘씸하여 마땅히 너희를 벌할 것이지만, 그리고 너희를 벌하려면 무슨 큰 힘까지 들일 것 없이 아주 손쉬운 일이지만, 너희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기만 하면, 너희도 짐의 양신(良臣)이라 구태여 벌해서 무얼 하랴. 그러니 이제부터는 마음 다시 먹고 짐의 헌장(憲章)을 잘 지켜라.

 ​문​면​(​文​面​)​에​ 나타난 뜻으로는 꾸중에 가깝지만, 이면의 의의는 우리는 너희를 건드리지 않을 터이니, 너희도 제발 잠자코 있어만 다오. 짐의 면목도있고 하니 남이 보는 데는 제발 너희도 수나라의 번방(藩邦)인 체하여 다오하는 것이었다.

 을지 승상이 읽어 바치는 수제의 새서를 잠잠히 듣고 난 왕은 눈을 승상에게로 굴렸다.

 “편지 회답을 하잡니까?”

 ​“​회​답​까​지​ 해 뭘 하리까? 저희네도 회답이 있으리라고는 기다리지 않으리다.”

 ​“​수​사​(​隋​使​)​는​ 그냥 객관(客館)에 묵어 있소?”

 “그럴 줄 아옵니다.”

 “그걸 조롱이나 해서 돌려 보냅시다그려.”

 “신이 알아 하오리다.”

 왕의 환후가 무슨 증세인지는 국내의 이름있는 의원 아무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어디가 특별히 쏜다든가 아프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맥- 기력이 없었다. 사람이란 하루의 피곤은 밤잠으로 쉬고 나면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새 기운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은 그렇지 못하였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 귀찮고, 마음으로는 늘 일종의 강박관념에 위협받았다.

 왕은 이 증세를 곧 당신의 승하할 징조라 보았다. 세상에서 할 사업은 다 끝마쳤고, 태자도 장성하여 뒷근심도 없이 되었으니, 즉 이 세상에는 더 생존할 아무 의의도 없으니 하늘이 부르시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였다.

 이 나라의 국민성의 일부를 이룩한 숙명사상의 지배를 받는 왕은, 이번 병상에서는 다시 일어 보지 못할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이 지휘하시는 일이라,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안달할 것도 없었다. 너무도 곱게 안온하게 일생을 보낸 것이 그냥 불만일 뿐이었다. 그 밖에는 이 임금재위 기간 중에 한토에 생겼던 북제(北齊), 진, 주, 통일전의 수 등의 뭇천자가, 고구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다투어 보낸 예물이며 벼슬을 받으며, 국가적으로 아무 위협도 받지 않고 가멸고 굳센 국가의 광휘 있는 임금으로, 좋은 재상을 좌우에 거느리고 영특한 태자를 아래 데리고, 진실로 왕자로서도 수월하고 훌륭한 일생을 보낸 것이다.

 “좀 분규를 겪어 보았으면….”

 이것이 왕의 유일한 유한이었다 하면, 그 일대가 어떠하였는지 넉넉히 짐작할 것이다.

 지난날 연파대가 을지 승상을 위하여 향산에서 구해 낸 산삼은 모두 왕의 병상에 바쳤다.

 왕은 그 산삼을 쓰면서도 고소하였다.

 ​“​하​늘​이​ 부르시는데 이런 게 무슨 효험이 있겠소?”

 승상이 정성들여 바치는 것이매, 물리치지 못하고 받기는 받으나, 약효는 애당초 생각치도 않았다.

 입에 발린 아첨의 말을 할 줄 모르는 고구려인의 천성을 타고난 을지 승상은 역시 고소하였다.

 ​“​그​래​도​ 산촌의 소동이 정성으로 캐어 온 것이옵기 신도 감사히 받아두었던 것이옵니다.”

 ​“​진​시​황​께​나​ 보냈으면 좋아할걸, 짐이야 하늘이 부르시는데… 아까운 신품을 헛되이 쓰는구료.”

 과연 왕은 그 가을 시월에 승하하였다. 재위 삼십이 년간의 부강한 국가의 영특한 임금으로서, 다만 수나라의 거만한 코를 두들겨 주지 못한 것을 한가지의 한(恨)으로 남기고서 그의 조상의 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평​원​왕​이​라​ 호하였다.

 이십여 년 간을 이 왕을 모시고 협조하여 국가 대성에 큰 공을 남긴 승상 을지문덕은, 이 왕을 보내고 그의 맏아드님인 신왕을 모셨다.

 선왕 재위 이십오 년간을 태자로 부왕을 모신 신왕은, 나이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당당한 대고구려 사직을 물려받기에 아무 부족이 없는 이였다. 게다가 명승상 을지문덕이 선왕의 유명으로 신왕을 보좌하고, 더우기 을지 승상과는 함께 신왕을 모신 우의(友誼)도 있는 관계상, 군신지간 이상의 의와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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