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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라이의 철직(綴織)


0화. Prologue - 이야기의 끝에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회색 연기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 아래 남자는 있었다. 이리저리 깨진 도로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분진이 안개같이 퍼져있는 탓인지, 시야는 평소보다 흐릿하게 그저 윤곽만이 보일 뿐.

‘아...’

왠지 이곳은 자신이 잘 아는 곳인 것 같다, 하고 남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편으로 돌아보니 반쯤 무너져 철골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TV를 통하여 보는, 지진이 한바탕 휩쓸고 간 직후 대지에 남겨진 상처와도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정신이 든 곳에서부터 멍하니 걸음을 옮겨 여기 저기 부서진 길을 지나간다. 스스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르르, 하고 허물어진 건축물들이 다시금 붕괴하는 소리와, 깨진 신호등과 가로등에서 들리는 빠지직, 하는 방전음만이 그의 귀에 들리는 이 도시에서 나는 소리의 ​전​부​였​다​. ​

사람들이 재난을 피하여 도망치는 듯한 소리도, 구조대가 생존자를 찾아다니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도시의 모두가 사라지고 자신만이 남은 듯이.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

무너진 건물더미 한가운데 덩그러니 생겨있는, 제법 넓은 공터에 그는 도달했다. 공원이었던 곳인가,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리고─작게 패인 구덩이를 지나 올라선 자리에,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어라...’

하지만 분진 때문인지 하늘이 어둡기 때문인지, 그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멍한 머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소녀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확​신​이​었​다​. ​

소녀 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조용히 뭐라고 말을 하지만, 머리가 멍하여 잘 알아듣지 못한다. 다만 알 수 없는 감정과 생각만이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요동쳐서 작은 두통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

그리고 갑자기 두통이 멎은 것을 깨달은 남자의 귀에 또렷하게 소녀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럼 안녕히.」

‘...!’

그것이 작별을 고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직후, 남자는 갑작스레 무너져 내리는 지면 아래로 떨어져갔다.

2015년 3월 5일, 스마트폰 및 패드와 같은 고성능 단말기가 완전히 보편화된 어느 날 사람들의 단말기기에 ​라​케​시​스​(​L​a​c​h​e​s​i​s​,​ 그리스의 운명의 세 여신 중 현재를 관장하는 여신)라는 이름의 ​어​플​리​(​a​p​p​l​i​c​a​t​i​o​n​)​가​ 전송되었다. “모두에게 마땅히 공개되어야 할 것을 공개합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올라온 이 어플리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대상에게 특정 날짜에 일어나게 될 일의 간략한 내용과 그 원인에 대한 실시간 공지.

2. 자신의 특정 행동에 따른 결과 혹은 특정 결과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행동에 대한 실시간 답변.

3. 개인의 생년월일과 이름 등 신상을 입력하는 것으로 자신의 죽는 날짜와 사인 확인. 

처음에는 대부분 장난으로 치부하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두지 않았으나 어플리를 실행한 사람들의 제보가 뉴스나 인터넷에 올라오게 되면서 상황이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라케시스를 통하여 통보된 내용이 전부 적중되었으며, 어플리를 설치한 단말기를 통해서 어디서든지 내용을 확인 가능하고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이러한 정보들이 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확인하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라케시스로 인하여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에 대하여 각 국가에서는 라케시스의 사용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플리의 특성상 라케시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몰래 복사되어가며 계속 사용되었고, 라케시스의 예지능력을 이용하여 사회를 좀 더 합리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2020년대 초, 라케시스를 수용하기로 한 일부 국가들은 스마트형 기기를 비롯한 ​유​비​쿼​터​스​(​U​b​i​q​u​i​t​o​u​s​)​ 산업을 국가적으로 통제하고, 라케시스에 관한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케시스를 수용하기로 한 이 일부 국가 중 하나에 속하는 일본은 2020년 중후반기, 라케시스를 이용한 스케줄링 프로그램을 만들어 배포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국가의 이익 및 사회발전을 위한 협조”라는 명목으로 해당 프로그램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규를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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