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실에 매달린 추의 무게 - 차사(猪獅)의 수레
우에노 공원 한쪽 구석.
「후아아암...평화롭구만.」
안도장 무단침입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하바네가 강의를 빠진 문제를 둘러대기 위하여 코우 누님에게 끊은 진단서는 뉴스에서 이런저런 방송이 흘러나간 뒤라 대충 사유결석으로 넘어갔지만, 그 대신 친구 녀석들의 질문공세에 파묻히는 바람에 이래저래 골치를 썩어야 했다.
「뭐야, 큰 사건 한번 겪고 나니까 달관한 것처럼 느껴지냐.」
하바네 옆의 안경을 낀, 딱 보는 순간 책이랑 친구할 것 같은 녀석이 태클을 걸어왔다. 야마구치 오오카(山口 大歌)라는 왠지 여자아이 같은 이 녀석은 이름이나 보기와 달리 사실은 육체파. 중학교 때부터 함께 축구를 하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아니. 그냥 뭐랄까...불행하다! 라는 느낌이었으니까. 요즘.」
「음. 확실히 동경대생이 된 이후부터 요즘 꽤나 트러블에 많이 휘말리고 있지. 하지만 다 그것도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넘기시게. 어차피 요새는 어지간해서는 상위대학 나온 녀석들은 관료직이나 대기업 직행이잖아? 원래 좋은 일 전에는 다소 화가 붙는 법이야.」
확실히 그럴 법도 하다. 원래부터 무한경쟁을 반복하는 교육구조 상으로 사회적 위치의 큰 범위가 결정되는 건 대학이고, 현재의 플래너에 따른 생활방침을 전제로 하는 사회에서 그 사람의 채용 여부까지 어릴 때부터 계획하는 경우는...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오는 시점에서 그 결과를 정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유리하겠지. 플래너에 나오는 금지사항이나 필수사항에 종종 수업이나 문제 상황에 뛰어들게 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인생설계에 개개인 간의 충돌이 없게 하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강의성적, 도 아마 대학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네는 2군 그룹에서 계속 머무를 생각이고?」
「설마. 이제 다리도 많이 좋아졌고, 조만간 다시 1군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뭐, 무리는 하지 마라. 여튼 태워줘서 고맙다.」
「뭘. 축하파티로 불러내줬으니 이 정도는 서비스로 쳐도 되잖냐. 고마우면 나중에 밥이나 한 끼 더 쏴라.」
지갑 탈탈 털릴 각오는 해야겠군, 하고 하바네는 웃으며 오오카에게 손을 흔들고는, 공연장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야마구치 오오카는 원래 국내 축구 선수 팀의 1군, 말하자면 국가대표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게다가 등장한 후에 각종 경기에서 수비수로 상당히 맹활약했기 때문에 수비수로서는 이례적으로 뉴스에서 기대주로 떠받들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2년 전의 사건...’
경기를 마치고 경기장을 나가는 도중에 경기장 스폿이 기괴한 각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는 왼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한동안 뛰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약 반년동안 병원신세를 졌고, 1년 이상을 재활치료를 마치고 막 다시 필드 위에 선 것이다.
그리고 비록 2군이었지만 복귀경기에서의 신고식은 대성공이었고, 경기를 보던 하바네는 야밤에 호텔에서 소리를 질렀다가 옆구리에 유에의 크로스를 맞고 엎어졌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경기장 근처로 몰려가서 거나하게 축하파티를 벌였는데...
늦은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보니 유에에게서 문자로 『우에노 공연장에서 집합. 오후 3시.』 라는 문자가 와 있어서 급하게 오오카에게 부탁하여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다.
‘뭐, 호텔 밖에서 하루 묵은 건 확실히 너무 안일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저지른 짓이 걸리지 않았다 뿐이지, 만약 발각되면 바로 현장에서 처리될 지도 모른다. 뭐 하바네에게는 아직도 실감이 없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공연장은 항상 점심시간을 끼고 공연을 한단 말이지.’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보라는 건지 공연장 건물에 편의점이라던가 스낵코너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자유공연을 보러 올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볼 때는 마유미가 왜 이런 곳에서 작은 연극 팀과 공연을 하고 있는지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유에의 이야기를 듣거나, 마유미 본인의 언동을 봐서는 굉장히 진취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이런 정체상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가 뭘까.
「아얏!」
「웃기지 마! 그런 결말, 인정할까보냐!」
순간 공연장 건물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을 무심코 보니 한 쌍의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남자 쪽이 화가 나서 여자 쪽 머리를 쥐어박은 모양이다.
「─」
...다가가면서 보니, 청바지의 여자 쪽은 일전에 무대 위에 난입하여 소동을 벌인 사람이고, 코트의 남자 쪽은 그 때 그녀를 잡으러 왔던 사람이다. 또 그때 같은 상황이 벌어졌던 건가. 웬만하면 무시하고 가자, 하고 하바네는 최대한 소리를 안들은 것처럼 하면서 두 남녀의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존재하는 의미가 없는 걸.」
「그래서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자기 의지를 증명하라는 거냐?! 세이 네놈은 정말 인간을 뭐로 보고─」
「어?」
여자가 낸 목소리에 무심결에 돌아보는 순간, 하바네와 여자 쪽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 색인지 푸른색인지 구분이 안가는, 뭔가 묘한 색감의 눈동자. 통상적인 황인종의 눈동자와는 다른 그 눈동자에 잠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쨌든 지금의 문제는 피하고 싶은 상대와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안 좋은데...이건 안 좋아. 어떡한다...하고 고민하던 하바네의 입이 무심결에 열렸다.
「아...안녕하세요.」
「...응? 응. 안녕?」
...최악의 선택지다. 이건 뭐 갑자기 도망가도 이상해지고,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더 붙이기도 이상하잖아! 왜 스스로가 갑자기 엉뚱하게 인사를 건넸는지 하바네는 몇 초 전의 스스로를 저주했다. 여자가 어리둥절한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고, 남자 쪽은 『네놈은 또 뭐냐』 라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무심결에...하하하...죄송합니다.」
뭐야, 이 얼빠진 대응은, 하고 자책하고 있으면서도 뭔가 행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헤에─」
여자가 하바네를 뭔가 관찰하듯이 이리저리 둘러보고, 남자 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인이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다.」
「응? 클라드, 그건 아니지. 적어도 의문을 가졌으면 들어볼 권리는 있다구.」
여자 쪽이 고개를 돌려 남자의 말을 부정했다.
「있잖아, 들어봐. 내가 저 아저씨한테서 RC헬리콥터를 몇 개 선물로 받았어.
그런데 이봐, 헬리콥터는 날기 위해서 존재하는 물건이잖아? 그래서 높은 산이나 들판에서 디오라마 무대 제작을 해가면서 멋지게 비디오 촬영을 했는데 말이지─저 아저씨는 그런 식으로 마구 다루면 모형이 망가져버리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난 저놈들을 선물로 준 적이 없어! 적절한 비유이긴 하다만!」
남자가 버럭 소리를 내건 말건 여자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나름대로 사랑하는 헬리콥터들의 정체성을 지켜줄 수 있게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 저 아저씨는 그런 것보다는 헬리콥터의 안전이 더 중요한가봐. 그냥 안전한 운동장에서나 날리라고 하시네.」
「그게 사랑하는 쪽의 태도냐! 그리고 항상 불만이었는데 난 아저씨가 아냐 이 오카마 자식아!」
...뭔가 남자 입에서 이상한 단어가 나온 것 같지만 무시하자.
남자가 폭발해버린 걸 보면서 하바네는 빠져나갈 구멍을 생각했다. 일단 이 논란을 종결짓지 않으면 이 두 사람은 하바네를 붙잡고 계속 싸워댈 것 같고, 그렇다고 도망가기에는 이 사람들을 지나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들키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은 이 논쟁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일단 헬리콥터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자(?)가 뭔가 물건을 험하게 다루기 때문에 남자 쪽이 화가 나 있다는 것. 그리고 여자(?)의 지론은 자기는 물건을 용도에 맞게 쓰고 있으니까 비난당할 이유는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중재하면 되는 건가?
「그래서 그 헬리콥터 말인데요. 부서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RC헬리콥터는 프로펠러나 꼬리 쪽이 떨어지면 고치면 된다. 하지만 그냥 프로펠러 같은 게 아니고 심장─엔진이 부서지면 죽는 거다. 못 날리게 되는 거지.」
「프로펠러 같은 거라니! 프로펠러가 없는 헬리콥터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
「프로펠러 같은 건 얼마든지 새로 달아줄 수 있잖아! 이 귀차니스트야!」
다시 옥신각신하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서 하바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RC헬리콥터의 엔진이 크게 손상되면 다시 못 날린다...남자가 걱정하는 것을 해소하면서 여자(?)가 원하는 헬리콥터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거라면...
「그러면 그냥 전기모터를 쓰는 헬리콥터로 놀면 되지 않을까요.」
「...응?」
「어차피 가솔린 엔진이 손상되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처음부터 엔진이 없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전기모터 헬리콥터는 크기도 별로 안 크고.」
「그러면 지금 있는 헬리콥터는 어쩌고?」
그래, 지금 이 문제가 벌어지는 원흉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거나 남자 분 쪽이 다시 가져가시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납득을 안 하시는 것 같으니 아예 다른 쪽에 맡기거나 팔아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만. 서로 싸울 바에는 부서져도 고치기 쉬운 전기모터로 대체하고 없애버리는 게 좋다고 봅니다.」
...후우웅...
「헤에. 없애고 대체해버리는 게 낫단 말이지.」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자 쪽 표정이 어째 영 좋지 않은 것이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뭐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은데 어때? 클라드?」
「미친 결론이다. 스스로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끄응...네 맘대로 해!」
화가 나서 꿍해진 남자를 보던 여자(?)가 하바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세이(成). 그리고 이쪽은 클라드. 내 전우라고 할까.」
전우라니 기묘한 호칭이군. 소개를 받은 뒤에 보니 남자 쪽은 얼굴 조형이 약간 서구권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니, 턱 모양을 보면 러시아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에 반해서 여자(?) 쪽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뭐, 소위 TV에 나오는 모델이나 아이돌과 같이 갸름한 얼굴인데, 모델이라고 하기엔 체형이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그리고 아까부터 네 녀석이 하고 있는 오해를 하나 풀어주자면, 이 자식은 남자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네 녀석이 남자 쪽이 더 좋다고 하면 모르겠다만.」
「...?!」
하바네의 안에서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이었다.
...
「늦었네요. 공연 다 끝나서야 오고. 숙취 때문에 늦었나?」
하바네가 약속장소인 앞 열 오른쪽 관람석으로 오는 걸 발견한 유에가 물었다.
「아니, 아쉽게도 그보다 더 머리 아픈 상황을 겪고 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명물’한테.」
「아하. 힘드셨겠네요.」
마유미 쪽에서 대답을 해 왔다.
「뭐...이 공연장 자체는 명의에 올라가 있는 부잣집 아저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건설한 모양이지만, 공연장의 건립을 의뢰한 건 그 아가씨인 모양이니까요. 일단 관리자라는 명함 때문에 여기서 쫓아내고 싶어도 스스로 나가기 전에는 쫓아낼 방법도 없고, 적당히 적응할 수밖에 없죠.」
아가씨라는 부분을 정정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하바네는 다른 쪽 인물에 대해서 물었다.
「그럼 저 클라드라는 사람도 공연장 관계자인건가?」
「일단은 경비소장이라는데 뒷소문이 좀 그렇죠. 어딘가의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다든지 서구권의 용병부대 출신이라든지 등등.」
확실히 저렇게 맨날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다니면 그런 소문이 날 법도 하지.
「뭐 저만큼 특이한 조합도 드무니까 다들 한번 겪고 나면 저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어차피 현장이랑은 그다지 관련 없는 쪽의 사람들이에요. 그저 공연장 자릿세나 시설 유지비 같은 걸 관리할 뿐.」
「저쪽은 안 그런 것 같던데.」
「뭐 종종 무대에 난입해서 공연이 망쳐지거나 하기는 하지만요. 개중에는 애드리브로 넘겨버리는 사람들도 있고...어차피 저번에 본 것처럼 쫓아내도 어느새 다시 나타나서 구경하거나 또 난입하니까요.」
음...사람들이 공연을 벌이고 있는 무대를 갑자기 망쳐서 어쩌려는 걸까. 세이라는 그 남자의 행각은 그야말로 기인이라고 할 만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공연장을 설립해서 길거리 배우들에게 공연장소를 제공하려고 한 의미가 있기는 한 건가.
「일단은 공연은 끝났고, 약속시간보다는 늦었지만 하바네로 씨도 딱 맞게 오셨으니 이제 카페 쪽으로 옮겨서 회의를 시작하죠.」
하바네가 세이라는 인물의 모순적인 행동에 의문을 떠올린 순간, 카즈키가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일주일 동안 최대한 조사할 수 있는 데까지는 조사해봤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이상 진전을 보려면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추가적인 정보 획득과 앞으로에 대한 의논이 필요할 것 같거든요.」
듣자하니 플래너의 백업 데이터를 저장하는 컴퓨터가 관공서 중 어딘가에 있다는 최초의 가설과는 달리 굉장히 골치 아픈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한데다, 확인된 것만 10여개에 아직 전체 개수도 파악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페 쪽에서 다시 정보보안부의 서버에 침입하여 좀 더 자료를 찾고, 그 후에 작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한다.
「그런데 카즈키 씨. 왜 기밀 정보를 전송하거나 서버에 침입할 때에는 그 카페 쪽을 쓰는 건가요.」
순간, 카즈키의 웃는 얼굴이 왠지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아아. 과거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예전에 위키릭스 쪽에 줄이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기재들을 전부 그 카페에 숨겨놨거든요.」
위키릭스. 2007년에 설립된 이래 각 국가의 기밀정보를 모아서 축적, 게재하는 활동을 했던 단체로, 전 세계의 정부나 기업에서 숨기고 있는 비윤리적 행위를 폭로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활동하였다. 2015년 라케시스가 배포되면서 발생한 혼란기에서 라케시스로 인한 모든 보안시스템과 기밀문건의 강제공개나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짐에 따라 강제적인 목적달성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하여 실질적인 존재의미를 상실하기도 했다. 그러다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은 이후에는 뭔가 거대한 내용의 해킹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만 위키릭스의 이름이 거론될 뿐, 원래의 단체는 사라지지 않았냐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뭐,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부분은 계속 숨기고 싶어 하게 마련이죠. 아무리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걸리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라는 그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요. 이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카하시 카즈키가 속해 있던 곳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위키릭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적어도 해커들 사이에서도 세계 일류급이라고 해도 좋을 해킹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최소한 정부 이상의 단체에서 쫓기게 될 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마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을 모아서 그룹을 만든 건 유에라는 건데,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데려온 거지...?’
새삼 유에 녀석을 다시 보게 되는 하바네였다. 아버지인 안도 씨가 재정계 인사들의 라케시스 유용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도 놀랄 일인데, 딸인 이 녀석은 그러한 정부의 암부에 대응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행동하고 있다. 이 녀석은 언제부터 이런 준비를 해 왔던 걸까.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인가...아니면 아버지인 안도 씨가 예의 조약서로부터 손을 떼고 정치계를 떠난 시점부터인가.
아니...어쩌면 두 시기는 같을지도 모른다, 하고 하바네는 생각했다. 자신은 자기 옆의 중2병 탐정처럼 전후과정을 사실에 가깝게 예상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하지만, 안도 씨는 아마 정치계에서 손을 뗀 직후에 안도장으로 내려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안도 부녀가 사는 곳에 방세를 지불한다거나 유에랑 얽힌 이런 저런 이유로 방문했을 때에 그는 유에의 어머니가 안도장에서 찍은 사진이라거나, 사용하던 물품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 어쨌든 얼른 자리를 옮기죠. 다음 공연 시작해버리기 전에.」
어쨌든, 꽤나 오래전부터 이러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녀석은.
「...? 뭐 내 얼굴에 묻었어요? 하바네로 씨.」
「아니아니. 유에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해서 놀랐을 뿐이야.」
「...」
퍽, 하고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음, 훌륭한 로킥이다, 라고 하바네는 다리를 잡고 주저앉으면서 생각했다.
...
「뭐 보시다시피 현재 추측되는 지점은 지금 보여드린 대로 14곳입니다. 그 외에 확인하지 못한 곳이 최소 3군데.」
테이블 위에 3~4장의 지도를 펼쳐놓은 채로 노트북을 열심히 조작하며 카즈키가 말했다. 지도가 여러 장인 이유는, 수도권 밖의 위치에서도 확인된 포인트가 있다나. 하지만 이건...예측 지점이 10여 군데에 일부는 수도권 밖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백업을 이렇게 많이 보관할 의미가 있을까. 어디까지나 기밀이어야 하잖아? 플래너의 데이터가 미리 만들어져 있다는 건. 하지만 그렇게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담은 저장매체라면 절대 작지는 않을 거고, 그런 걸 이렇게 많이 만들어두면 언젠가는 걸릴 텐데.」
「그렇지. 하바네로 말대로 이건 말이 안 되는 결과야. 뭐 그래서 카즈키 형님이 좀 더 정보를 캐내보려고 해킹 시도를 해보실 예정이지만. 내 생각에는 저 중에 몇 개는 분명히 더미일거다. 대충 꼽자면 서약서의 인물들 숫자에 맞게 6개? 정도. 어차피 저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뒀을 정도의 위인들인데 결국 자기들 말고는 믿기 힘들 테니까.」
「저도 아마 그럴 것이라 추측합니다만, 일단 그렇다면 아무런 지표 없이 걸러내는 건 불가능하니까요...오...」
카즈키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키보드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페 2층에는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와 카즈키가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들 숨을 죽이고 그가 작업을 끝마치길 기다렸다.
「「......」」
잠시 후에 프린터가 위이잉 소리와 함께 몇 개의 출력물을 토해냈고, 그 직후에 컴퓨터가 종료되었다. 작업이 끝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즈키의 얼굴은 왠지 전과는 달리 찡그린 상태다. 뭔가 있었던 건가.
「...됐습니다. 우리들의 예상대로 나머지는 더미였군요. 게다가 신라 군의 말대로 굉장히 골치 아픈 곳에 배치되어 있네요. 그 중에 하나는 절대로 폭발물을 쓸 수 없는 곳...이라 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음...그리고...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이 카페에서 나갑시다.」
「형님, 설마 들킨 거야?」
신라의 질문에 카즈키는 아니요,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는 들키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누군가가 같은 짓을 벌이다가 이쪽 회선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보안부 측이 아니라 같은 해커라고 생각됩니다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쪽에 손을 대려고 시도한 건지는 모르겠군요. 접속장소는 잘 감췄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호텔로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그 전에 일단 이것을, 하고 카즈키가 건네는 종이를 멤버들은 받아들었다.
「이건...」
골치 아픈 곳이라는 신라와 카즈키의 말의 의미를 하바네는 그것을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 소유로 된 빌라의 지하실이라거나, 전자기기 관련 다국적기업의 제품개발부의 모 컴퓨터 같은 곳은 아무래도 좋다. 경비야 삼엄하겠지만 이왕 근접한 곳에 저장매체를 두고 있다면 대상 기기를 파괴한 직후에 바로 연락하여 상대를 찾아서 제압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떻게든 둘러댈 거리를 만드는 것은 차지하고 몰래 폭발물을 설치하는 방법을 쓰면 간단하게 원격에서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첫째로 총리 관저의 자료보관실...여길 일반인이 어떻게 들어가냐...적어도 어지간한 연줄, 그리고 제대로 된 용무 없이는 100% 쫓겨나고 말 것이고, 그 안에서 소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농담이지...?」
「...빌어먹을 썩을 정치가 놈들...」
신라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카즈키 씨가 말한 폭발물을 쓰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할 장소는 다름아닌 원자력 발전소의 메인터넌스 시스템이었다. 아니, 이건 바이러스를 이용해도 곤란한 것이 시스템 데이터를 날려버리면 발전소가 폭주한다는 소리가 된다.
...이건 대체 어떻게 손을 대야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