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자색과 적색의 실 - 죽음(死)과 광기(狂)
타다닥...
어딘가의 건물 지하의 어두운 복도 한 구석,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바네와 신라 2인조는 커다란 박스 안에서 숨을 죽인 채 바깥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박스라니 너무 고전적인 거 아니냐.」
「고전적이기에 가장 잘 먹히는 법이지. 누가 설마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박스숨기를 실천하는 멍청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냐.」
「자기 입으로 멍청이라고 말하냐...」
팟, 하고 패드에 『심부름은 잘 되어가고 있어?』 하고 문자표시가 뜬다. 하바네는 급하게 『배달은 잘 했는데 구면의 깡패들이랑 마주쳐서 곤란하게 되었다.』 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러하다. 지금 건물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그들을 찾고 있는 것은 구면의―물론 실제로 모습을 본 게 아니긴 하지만 안도장 건으로 엮여있는―깡패, 그러니까 말하자면 보안부 녀석들이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가장 처치곤란하다고 판단되었던 모 원자력 발전소 안. “발전소 안에 들어가는 거라면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 볼게요”라는 소라하의 한마디로 일단 견학생의 신분으로 보안을 통과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었다. 그리고 관계자와도 일단 이야기가 되어있었던 건지 기기관리자 또한 선선히 미리 준비한 무선장치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들썩, 하고 신라가 박스를 들어내면서 궁시렁거렸다.
「제엔장.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뒤를 밟힌 거지? 카즈키 형님은 해킹할 때 마주친 상대는 다른 쪽이라고 말했다고.」
「다른 쪽이라고 해서 현 내각에 비협조적이라는 법은 없겠지. 해킹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걸 보안부에 찔러줬다고 해서 자신에게 손해는 없을 테니까. 그보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기 위한 안을 생각해봐. 탐정.」
「음...」
신라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하바네 쪽도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본다. 일단 녀석들이 들이닥친 것은 무선장치를 넘기고 관리관이 그것을 기존 부품과 대체한 직후이다. 그런데 보안부에서 이쪽의 해킹여부를 알고 있다면 우리의 계획도 눈치를 챌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들은 바로 카메라에 자신들이 찍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올라왔고, 관리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하바네와 신라 쪽만 계속 쫓아오고 있다.
‘둘이 갈라졌다가 만나는 수법을 썼는데도 그대로 쫓아왔다. 그렇다는 것은, 녀석들은 우리에게 용무가 있다는 건데. 그럼 역시 해킹 쪽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우리들의 신상이 넘겨진 건가?!’
하지만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타다다닥...
「이런 젠장!」
복도로 나서자마자 기관단총을 든 헬멧들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어둑어둑한 지하실에서 이리저리 도망치게 되면 미리 조사해둔 건물구조 덕에 하바네들 쪽이 현재는 더 유리해 보일수도 있겠지만, 저쪽에는 야간투시경도 있는 모양이고, CCTV 관리실을 장악하고 있다면 아마도 이쪽의 움직임 따위 전부 보인다는 건데.
「그래서 일단 계획은 생겼냐!」
「생겼다! 그러니까 일단 따라오기나 하라고!」
타다닥...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가 코너로 꺾어지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살벌한 음성이 들려온다.
드르르르르륵!
「와, 야 이 미친놈들아! 진짜 죽일 셈이냐!」
도망치던 신라가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옆의 비상스위치 같은 물건을 쾅 하고 누른다. 그와 동시에 위로부터 격벽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거 있었으면 진작에 쓰지 그랬냐.」
「관리실이 점거된 거 잊었냐. 아마 얼마 안 되어서 풀릴 테고, 우리 퇴로를 막는 데 쓰이게 될 거니까 당장은 못 쓴 것뿐이야. 하지만 뭐 이제 퇴로고 뭐고 없으니까 이판사판으로 가려고.」
이판사판...?
신라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서는, 복도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막 따라 들어온 보안부 특수부대원들 앞으로 떨어진 그 무언가가 바닥에 닿는 순간―
「뭐해, 임마! 엎드려!」
콰아아아아아앙! 드르륵!
신라가 하바네를 잡아 쓰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총성 몇 발이 울려퍼졌다.
이건...설마...
「임마, 그러다가 벌집이 되면 나 혼자 어떻게 도망가라고 그러냐?」
신라는 하바네의 귓가에 이런 한 마디를 날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하바네는 따라 일어나지 못했다. 방금 울린 굉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라가 벌인 짓이 무엇인지 인지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이해하는 순간 패닉에 빠졌기 때문에.
「크...그에에에...」
신라가 던진 것은 수류탄, 명백히 민간인이 소지할 수 없는 물건 중 하나였다. 이런 걸 들고 잘도 탐정이니 뭐니 모범시민이니 이야기를 할 수 있냐. 아니 그 이전에 방금 쫓아오던 특수부대원들 중에 두 명을 제외하고는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다. 목숨이 붙어 있는지는...확인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마구잡이로 상대를 죽여도 괜찮을 리가 없다. 어이 이봐. 이건 그냥 불가피한 살인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퍽.
「윽...」
「네 녀석은 어떻게든 살아줘야 하니까 정신 바짝 차려. 이건 더 이상 탐정놀이도 뭣도 아니다. 전쟁이지. 전쟁에서 옳았는지 틀렸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아. 미쳤느니 살인자니 하는 비난은 얼마든지 받아주겠지만, 그 전에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한다.」
비교적 성한 시체와, 목숨이 겨우 붙어 꺽꺽대고 있는 자가 가지고 있던 기관단총과 탄창을 갈무리하면서 신라가 말했다. 덜덜거리던 하바네는 그 말에 불끈하며 대답했다.
「쿨럭...그래서, 이 녀석들을, 다 죽이고, 살아나가자고? 그게 제대로, 된, 사고방식이라고, 진짜,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또 중2병이라도, 도진 거냐.」
「어느 쪽도 아냐. 다만 내가 살아온 환경은 미쳐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거든...시체를 처음 보는 거라면 패닉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대부분인데, 그러는 네 녀석도 어지간하다.」
하바네의 툭툭 끊어지는 말에 대꾸하던 그는 갑자기 기관단총을 들어, 부상자의 머리를 퍽 하고 내려찍었다.
「...!」
「기절시켰다. 일단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기고. 통신기기는 전부 부수자고. 이 녀석들 입막음용으로 자폭까지 생각하고 작전슈트에 폭약까지 채워둔 모양인데, 덕분에 수류탄 효과 한번 제대로 봤군. 뭐, 이 녀석은 운 좋게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하나.」
역시 신라라는 이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고 하바네는 생각했다. 카즈키 씨의 내력도 그렇고, 유에가 데려온 사람들 전부가 이런저런 내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만...신라라는 이 남자가 어떤 성장환경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름대로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한 하바네 자신은 적어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가볍게 취급하는 이런 방식은 공감할 수 없다.
그래도 하바네는 말없이 신라가 건네는 기관단총을 받아들었다. 신라의 말대로 일단 상대를 죽이든지 죽이지 않든지 무기는 위협에는 쓸 수 있겠지.
「납득하지 않는 건가. 그래서 난 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지.」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
「확실히 유에가 데려온 상대는 현 체제를 긍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 나처럼.」
철컥...
「하지만 넌 뭐랄까, 현 체제의 구축과정에서 생긴 피해자도 아니고, 나처럼 선대의 업을 이어받은 미친 녀석도 아니야. 으음...그냥 평범하게 살던 녀석인데...어째서 너는 현 체제를 부정하려고 하는 거냐.」
「...무슨 소리야. 이런 누가 봐도 불합리한 체제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저항하는 게 당연하잖아.」
「법에는 저항하면서, 지극히 인도적인 방법으로? 그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냐? 넌 거기서부터 뭔가 꼬여있어. 네가 생각하는 이 사건의 결말은 뭐야? 그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결말과 같은 것일까?」
아마,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하바네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난 유에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네 녀석이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유에가 네 녀석을 데려온 이유는 지금의 계획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지...뛰어!」
갑작스런 외침을 따라 정신없이 달린다. 드르르륵, 하고 신라가 든 기관단총에서 소음이 쏟아지고, 코너에서부터 튀어나오던 ‘적’들이 쓰러진다. 코너가 있는 앞쪽 길로 건너는 것과 동시에 신라의 손짓을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귀에 뭔가 뜨거운 것이 스치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틈 따위 없다. 정신없이 달려, 녀석이 가리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 1층 비상구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올라간다.
뒤에서 신라의 조롱하는 듯한 말투와, 모르는 사람들의 욕짓거리와 비명소리를 들으며, 하바네는 신라가 가리킨 곳으로 올라갔다.
...
「...뭐 이걸로 종료인가. 간만에 본업으로 돌아가려니 힘들구만. 이런 사회에서 격리된 지역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하바네가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지하 1층. 주변에 신라 외에는 움직이는 사람은 이미 없다.
「아까 맨 처음부터 해서 총 8명 해치운 셈인가. 다 잡으러 내려온 건 아닐 테니까 아마도 윗 층에 몇 명 남아있겠지만 말이야...」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담배 맛이 쓰게 느껴진다. 삐빅, 하고 휴대폰 발신음이 울렸다. 하바네에게서 온 문자다. 『카메라 있는데 어떡할까.』
「...애송이가 끼어들면 이래서 힘들다고.」
『바닥에 떨어뜨려』 라고 보낸 뒤에, 핸드폰을 도로 코트에 집어넣는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인간을 버린 자들의 마음을 이해해줄 리도 없다. 쾌락이나 다른 무언가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 또한 스스로와 동료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 이 기분을 이해해줄 리는...
‘어이, 선대. 죽어 나자빠진 뒤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당신은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했을까.’
하긴 자신과 닮은 존재가 있다는 건 이해해줄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자신의 어둠을 비춰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나 하바네로나 서로가 마음에 안 드는 건 그런 쪽이겠지. 녀석은 부정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너도 정상적인 녀석은 아니야, 하고 신라는 읊조렸다.
이라나미 하바네라는 남자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확증이 없지만, 어쩌면 사카키 신라 자신보다도 미쳐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뭐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신라는 하바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사다리 쪽과는 반대편인, 통상적인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
「음...」
신라가 올라오지 않는 것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하바네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비상탈출구로 보이는 이곳으로 올라왔지만, 아무래도 여기가 밖이거나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직도 건물 안에 있는 듯한 느낌.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봐야 한다.
스윽...
벽을 등지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다가, 감시카메라가 있는 쪽 복도까지 다가갔다.
‘어떡한다...’
걸리게 되면 바로 무장병력이 이쪽을 향해오겠지.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하바네는 신라에게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아 하는지 물어보았다. 잠시 후, 패드에 신라의 대답이 표시되었다.
『바닥에 떨어뜨려.』
어이, 그래도 괜찮은거냐. 카메라 한쪽이 못쓰게 되면 상대편에서 이쪽의 위치를 특정하기 쉬워지잖아. 어쨌든 생각이 있겠지, 하고 그는 난생 처음 잡아보는 실제 총의 총구를 카메라 쪽으로 향했다.
투둥! 투둥! 챙그랑!
「으이크!」
렌즈가 박살나고, 카메라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총알에 맞아 뭉개졌다. 예정과는 달리 깔끔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카메라는 파괴된 셈이다. 몰려오기 전에 튀자, 하고 하바네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다다다닥,
‘너무 빠르다고!’
상대측에서도 이쪽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속하게 대응해온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하바네의 뒤를 쫓아 무수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하바네는 급한 대로 복도에 있는 아무 방이나 하나를 열어제낀 뒤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신라 녀석의 말 대로면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한 콘크리트 격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방에 숨어드는 건 자충수겠지만...
「달리...방법이 없는 건가.」
...없구만.
투둥! 투둥! 투둥! 챙그랑...
방 안에도 카메라가 있는 것을 보고 하바네는 급히 카메라를 부쉈으나, 아무래도 이 방에 들어온 게 제대로 외통수이긴 한 모양이다. 조만간 요원들이 이 방에 몰려들어 문을 부수고 자신을 벌집으로 만들 거라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차기 시작했다.
‘여기는...뭐하는 곳이지.’
TV나 소파, 옷걸이에 침대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누군가의 생활공간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건 여기는 발전소 직원의 숙소인가...? 그런 것 치고는 뭔가 도자기같은 장식품도 있고 본격적인데...그럼 발전소 관리소장 정도 되는 사람의 방인가?
「...음.」
문 밖의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면서 하바네는 쓸 만한 게 없는지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뚜―하고, TV의 화면이 갑자기 켜졌다.
「뭐, 뭐야...!」
놀라는 하바네에게는 아랑곳않고, TV는 그대로 자신에게 입력된 ‘DVD 재생’이라는 명령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DVD가 실행된 지 약 10초 정도가 지난 뒤에 흰 바탕의 화면이 드러나고, 문자 하나가 떠올랐다.
『진실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전한다. 우선 이전의 해킹 건에 대해서는 신세를 졌다. 이쪽에서도 당신들의 정보는 알리지 않았으니 따로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너희들의 움직임을 눈치 채기 시작하고 있다. 조만간 너희들이 가진 힘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겠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일전의 카페에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보내두었다. 그럼 무운을.』
「...?」
대체 이건 뭐지, 하고 하바네는 혼란에 빠졌다. 이 원자력 발전소에 잠입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사전조사조차도 와 본 일이 없는 곳, 그것도 갑자기 들어온 방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남긴 것이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했다. 게다가 이전의 해킹 건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카즈키 씨가 말한 난입자라는 것은 이 메시지를 남긴 자로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라케시스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만이 아니라는 건가...?
그리고 그 정체를 알리지 않은 누군가가 보내온 정보.
「그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 채기 시작하고 있다...고.」
그렇다는 것은 역시 지금 무장부대가 들이닥친 시점에서 상대방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 녀석들은 메인터넌스 룸을 그냥 지나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쿵!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소리에 하바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제길...결국 들킨 건가.」
이대로 가면 확실히 잡히고 만다. 하바네는 생각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녀석들을 넘어서 달아날 방법은? 아니면 이 방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은? 침대 밑에 숨을까? 아니, 그건 아마 금방 들켜버리겠지. 그러면 창밖으로 뛰어내릴까...라고 해봐야 여긴 창문이 없다.
쿵! 쿵! 쿵!
어쩔 수 없지, 하고 하바네는 기관단총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식들아! 지금 나는 무장하고 있다. 네 녀석들이 들고 있는 총이랑 같은 물건을 들고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수류탄도 갖고 있어! 네놈들이 이 문을 뚫고 들어올 거라면 먼저 죽고싶은 놈들부터 뛰어들어!」
쿵! 쿵! 콰앙...!
그리고 하바네의 외침이 무색하게 문이 부서지면서 예의 무장대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하바네가 총을 들고 있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신속하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위를 향에 총을 마구잡이로 쏘갈기는 하바네였지만,
퍼억,
...저항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멍청한 놈들. 고작 이런 놈에게 당했나.」
머리에 강렬한 충격과 함께, 서서히 정신이 멀어져간다...
「한 놈 더 있다니 그놈이 벌인 짓이겠지. 일단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끌고 간다.」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
또다시 꿈을 꾼다. 언제나 똑같은 꿈.
소녀는 언제나 하바네에게 말했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결과라고. 하바네는 수긍할 수 없어 언제나 소녀에게 저항해보지만,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들은 이렇게 죽어버린 것인가. 왜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간 것인가.
하지만 결국 그의 저항은, 언제나처럼 아무 보람도 없이 끝나버린다.
소녀의 한마디로 인하여.
「운명에 대한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며─그럼 안녕히.」
결정? 이 참혹한 결말의 스위치를 누른 것이 나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이런 결말 따위 원하지 않았어. 나는 그저 모두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는 자유를 원했을 뿐이야.
그리고 대관절,
애초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야?
...
「...게 싫다면 당장 이쪽으로 끌고 오는 게 좋을 거야.」
「저 미친 자식...!」
누군가 자신의 몸을 거칠게 끌고 있는 것을 느끼며, 하바네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 아까 나 잡혔었지, 하고 멍한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른다. 몸을 움직여보니 팔이 묶여있는 것이 바로 죽은 것은 아니고 일단 인질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인질? 하지만 딱히 인질을 잡지 않아도 보안부의 녀석들에게 불리한 점은 없을 텐데―물론 죽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걸까...
「보안부에 연락할 생각도 접는 게 좋을거야. 그런 기미가 보이는 순간 날려버릴 테니까.」
멍한 눈을 들어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확인한 순간, 하바네는 자신의 그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야, 이 미친 중2병 녀석아. 거기서 뭐 하는 거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하바네의 눈앞에 들어온 광경은, 예의 원자력 발전소의 시스템 관제실. 그리고 거기서 컴퓨터와 제어봉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명백히 폭약이었다. 그 폭약들 다 어디서 난 거야. 이 미친 녀석...!
「―아니면, 그냥 우리 다 같이 여기서 날아가는 게 좋을까?」
자신을 둘러싼 10여명의 특수부대원을 상대로 총구를 겨눈 채로 모종의 스위치를 들고 있는 신라는 유유자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들은 저 녀석을 인질로 삼고 날 끌어낼 생각이었겠지만, 그 판단 미스로 인해서 이젠 네 녀석들 목숨이 인질로 잡히게 생겼지. 너네가 뭘 지키러 왔는지 누구를 죽이러 왔는지 같은 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원자로를 폭발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건 아니겠지?」
「야 이 미친놈아!」
「어, 일어났냐?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빼내줄 테니까.」
이 미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하지만 하바네도 신라의 이 미친 짓이 먹히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가 원자로 자체를 거래대상으로 잡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냥 죽는 길 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권력자들이 라케시스를 써서 상황을 비튼다면 모를까, 현재 상황에서는 그저 나를 내어주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 외에는 수단이 없었다.
「...내어줘라.」
「...안됩니다. 그랬다간 상부에서...」
「상부에서 원자로 폭발사건을 더 문제삼을 것 같나, 아니면 단순 용의자 처리에 실패한 건을 더 문제삼을 것 같나.」
「......」
덜컥.
「거기 대장. 좋은 판단이야. 여차하면 전부 다 날려버리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테러리스트 새끼.」
「썩어빠진 내각을 떠받들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거든? 네 녀석들은 절대로 진실을 믿으려고 들지 않겠지만. 어쨌든 길을 열어. 우리 둘의 목숨이 확실히 보장되면 스위치를 버리도록 하지.」
스위치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대장 쪽이 대답했다.
「...그쪽에서 스위치를 파기한다는 걸 이쪽에서 어떻게 신뢰하나.」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 같이 죽는 수밖에.」
신라는 웃는 표정으로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서서히 누르기 시작했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아아!」
「...그만! 알았다! 네놈들의 목숨은 보장하겠다!」
「그럼 내가 저 녀석을 데리고 발전소 앞마당까지 나갈 때까지 호위나 부탁해볼까. 아 저격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걸. 이 곳으로 오는 동안에 전부 처리해버렸으니까. 궁금하면 테스트해 보던가.」
「...」
신라의 말에 따라 보안부 요원들 쪽은 하바네를 거칠게 신라 쪽으로 밀치고, 신라가 슬쩍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하바네는 앞에 나동그라지는 꼴이 되었다.
「뭐, 팔은 나중에 풀어줄테니까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는 마라. 어차피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그야 지하에서 생각난 게 이 방법뿐이었는데 어쩌냐.」
그대로 하바네와 신라는 발전소 밖으로 걸어서 나가고, 무장부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을 비롯하여 3명이 그 뒤를 따랐다. 관제실을 지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서 길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발전소 앞을 지나 도보 가까이 도착했을 무렵, 신라가 입을 열었다.
「어휴 이렇게 마중 안나와주셔도 되는데 말이지.」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해보려 했을 뿐이다.」
「아, 약속? 이거 말이지.」
스위치를 든 손에 눈길을 슥 준 신라가 웃으며 스위치를 흔들어 보인 뒤에,
그 버튼을 꾹―하고 힘차게 눌렀다.
「?!! 무슨 짓을! 크억!」
탕, 타다당, 하고 울리는 총성과 함께, 대장과 그 세명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발전소에서부터, 멀리서 들어도 몇시간 전 지근거리에서 수류탄이 터졌을 때와 거의 비등한 수준의 크기로 들리는 폭음이 울렸다.
「?!! 신라! 네놈...」
「워, 워, 어이, 정신 차리라고. 네 녀석이 어리숙한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까지 속아버리면 속이는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뭐...?!」
하바네는 멍한 채로 신라가 가리키는 발전소 건물로 시선을 향했다.
「핵반응이 일어나는 구조는 익히 알 거라고 생각하...기엔 문과생이었지. 핵반응이 일어나려면 필요한 연료가 우라늄235. 그리고 핵반응을 억제하기 위해서 함께 사용되는 게 우라늄238. 제어봉이라는 중성자 발사 장치의 조정과, 연료 배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폭발의 빈도가 정해지는 거다. 뭐 간단하게 말하면 폭발시키기 이전에 핵반응 장치를 전부 꺼두고 관제실 안에서 적당한 양의 폭약만 터뜨린 거지. 발전소는 네가 깨어나기 한참 전부터 멈춰있었어. 뭐 걸리면 천문학적인 수의 벌금을 물어야겠지만. 걸리면 말이지.」
「...카즈키 씨도 동의했었던 거냐.」
「물론, 무선제어기로 원자로 제어권을 얻은 카즈키 형님이 협력 안 해주면 해낼 수 없는 작전이었지.」
「이런 테러리스트 같은 일을 잘도 벌였군. 우리가 몇 명이나 죽인 건지 알고는 있냐.」
순간, 신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테러리스트 같은? 잠꼬대는 그만 하라고 했잖아. 우리는 저쪽 입장에서 보면 정진 정명한 테러리스트라고. 네가 그렇게 보이지 않고 싶은지 여부는 상관없이 말이다. 저들은 우리를 죽이려 드는데, 네가 언제까지 그런 윤리관에 얽매일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빨리 바꾸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죽어, 하고 무자비한 테러리스트 탐정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