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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왕


코끼리의 왕 제1장. 갑작스런 귀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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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닭의 울음소리가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늦은 새벽잠에 바짝 긴장한 신체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노아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곁에 놓인 주전자를 찾았다. 고개를 들자 가시지 않은 피로가 밀려와 정신이 아찔했지만, 잠기운은 일찌감치 달아난 뒤였다. 주전자 주둥이를 입 안으로 밀어 넣자 차가운 물줄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종유석처럼 달라붙은 가래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삼 개월 동안 불어 닥친 모래바람에 편도가 심하게 부어올라 매시간 가래가 끓어올라서 노아는 한동안 의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만, 지금은 포기한 상태였다. 

  천막 안은 가죽에 들러붙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였다. 푸석해진 야자 잎사귀를 요 삼아 수십 명의 노신들은 바닥에 한데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수십 명이 울려대는 코골이 소리에 가뜩이나 협소한 천막 안이 더더욱 좁게만 느껴졌다. 노아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천막 입구를 열었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밀려들어왔고, 입구 가까이서 자던 노신 하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노아는 얼른 천막 밖으로 나왔다. 

  구지가는 목적에 따라 5개의 지구와 시청사, 그리고 외곽 지역으로 도시가 구획되어 있었다. 노신 지구엔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남대문으로 가기 위해선 상업 지구를 통과해야만 했다. 상업 지구에 도착하자 로베르트 랑카 세인트르 광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 중앙에는 뱀의 시대에 만들어진 무딘 시계가 위치해 있었는데, 인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괴하지 않고 내버려둔 유일한 건축물이었다. 무딘 시계에는 인간의 뼈로 만들었다는 시침 대신 새로이 상아를 깎아 만든 시침이 '5'를 향해 비척걸음을 가고 있었다. 성문 개방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노아는 무딘 시계를 받치는 지짓돌에 쓰인 한 줄의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도 그러할 것이다. - 로베르트 앙헬>. 

  벌써 수백 번도 넘게 읽은 글이었지만 노아는 신이 말했다는 잠언치고는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 지당하게 여겨지는 것일 뿐이었으며, 애초에 신의 말씀이라는 포장은 그 본연의 가치보다 비싸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시간보다, 오히려 시계를 닮았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시계는 임의적이며, 오차가 존재하며, 언젠가는 멈춘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뱀의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죄인을 요리해서 온 시민에게 먹이는 형벌이 마치 축제처럼 벌여졌다고 한다. 뱀의 시대에 인간은 노예요, 도구이며 식량에 불과했다. 그리고 로베르트 앙헬이 사악한 뱀을 쓰러뜨린 뒤, 인간은 하염없이 낮고 낮았던 자신들의 지위를 코끼리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코끼리의 삶은 기상부터 수면, 훈련과 각종 노동에 이르기까지 시계가 한 바퀴를 돌듯 체계적이고 빈틈없었다. 

  특히 코끼리 궁전에서 기르는 성상聖象의 경우 살아서 움직이는 한 마리의 시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례가 도래하면 각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구지가 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온갖 향유와 허브로 치장된, 이른바 '성령이 강림한' 성상이 시청사 중앙에 올라설 때이다. 강력한 마취제에 절은 성상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대한 기요틴에 목이 잘려나갔다. 단번에 잘리지 않으면 한해가 불행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칼날은 항시 잘 갈려 있었으니 그것만은 어쩌면 코끼리에게 위안일지도 몰랐다. 그 뒤 코끼리의 시체는 거대한 가마솥에서 삶아져 인간의 안주거리로 전락했다. 인간의 손에서 자라나 그 위장에서 용해되기까지, 코끼리의 삶은 모조리 인간의 것이었다. 아니, 남은 가죽과 뼈마저도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을 따진다면, 죽음마저도 코끼리의 것은 없었다. 그러한 생각을 마치는 순간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코끼리 궁전은 그의 직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어둠 사이로 남대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노아는 초병 하나가 이리로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베이 파 유엥이었다. 키는 노아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지만 다부진 체격이 마치 맹수를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그러나 맹수가 아닌 잡수雜獸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아는 알고 있었다. 노아의 앞에 다다른 베이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2년 동안 한결같구나, 노신.”

  노아는 짧게 목례하고는 답했다.

  “한결같이 구지가의 외벽을 지킨 당신 덕분에 가능할 따름입니다. 베이 파 유엥.”

  베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경탄스러운 것은 네놈의 그 한결같은 어조와 성실함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무미건조함과 무의미함 역시 한결같음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사납기 그지없는 베이의 태도에서 노아는 그놈의 혓바닥이 쉽사리 멈추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노아는 '노신'이었다. 입 근육을 위로 밀어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그려냈고, 눈꺼풀을 적당한 크기로 접어 '조심스러운 눈빛'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허리를 숙인 자세'를 취하여 자신을 '노아'에서 '노신'으로 '재조립'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 또한 약자의 하소연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제 삶이란 본디 이 한결같음을 아끼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제 행복이고 희망입니다. 다만 제가 경망스럽고 도가 지나쳐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노신이기에 지닌 어쩔 도리 없는 원죄입니다. 부디 분을 삭이고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베이 파 유엥.”

  말이되, 그 흉내에 불과한 혀 운동의 조합을, 목소리를 가장한 톱니바퀴의 회전음을, 과연 말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파신 사내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베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밤길 조심해라. 언제 코끼리 무덤으로 갈지 모르는 노신아.”

  노아는 다시 한 번 목례하고는 그 옆을 지나쳤다. 쪽문이 열려 있었다. 노아는 도시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지인의 소개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이 시스템이 익숙지가 않네요. 좀 더 재밌는 편집이 가능할 것 같은데, 우선은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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