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왕 제1장. 갑작스런 귀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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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일을 마치고 흔들의자에서 낮잠을 자던 노아는 눈 속으로 파고드는 햇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햇빛이 욕조에 담긴 물에 반사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었다. 노아는 팔을 위로 길게 내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즐긴 단잠이었다.
“잘 잤어요?”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치아키가 다른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노아가 당황하여 말했다.
“이런, 옆에서 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시끄럽게 했네요.”
“괜찮아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개운하니까요. 정말이지 요새는 이렇게 게으름 피우며 하루하루 보내니 참 편해요.”
그렇게 말하며 치아키는 히죽 웃었다. 그 모습에 노아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대로 성례가 계속 치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편하게...”
말을 끝맺고 나서야 노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치아키의 표정은 이미 좋지 않아 보였다. 치아키가 말했다.
“하긴 노아는 이리듀스만 죽지 않으면 만사형통이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이리듀스가 갇혀있는 우리를 노려보았다. 이리듀스는 이제 다섯 살이 된 성상으로 치아키의 오빠인 이스가 노아와 함께 데리고 온 코끼리였다. 그리고 치아키는 이리듀스가 이스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치아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노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치아키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꺼냈네요. 히히, 그냥 농담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저 사무실에 먼저 갈게요. 점심 때 봐요!”
빠른걸음으로 사라지는 치아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노아는 흔들의자에 풀썩 몸을 기댔다. 치아키가 이리듀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녀에게 뭐라 변명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코끼리 궁전에서의 업무는, 마치 쌀 한 가마니에 든 쌀알 개수를 새는 것과도 같았다. 일 자체는 간단하지만 한숨도 쉴 틈이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궁전 내․외부를 청소하고 나서 코끼리들이 근육이 약해지지 않도록 우리에서 빼내어 운동을 시키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문제는 성례 날짜가 잡힌 이후이다. 성상들은 일 년에 단 두 번 있는 성례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키워지는 특별한 코끼리들이었다. 따라서 성례를 치르게 될 성상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어선 안 됐다. 따라서 성상의 건강 상태를 항시 체크하는 것은 물론, 오랜 감금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산책도 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성례 당일에 인간의 말에 잘 따르도록 미리미리 훈련을 시키는 등 이것저것 신경 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다섯 마리나 되는 코끼리를 하루 종일 훈련시키고 나서 해가 질 때쯤에 되어서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노신들은 대부분 저녁 식사를 배급받기 위해 야간 보수 공사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본래 코끼리 궁전에서 일하는 노신들은 굉장히 힘든 직종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성례가 중단되면서 코끼리 궁전의 업무는 굉장히 한산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로베르티나 르유 앙헬라이온 교회에서 다음달 중으로 성례를 시행해야 하는데, 작년 겨울 로베르티나 교회의 대주교인 리안 미다 르 로베르티나가 사망하면서 잠정적으로 성례가 중단된 것이다. 그래도 구지가에 교회라곤 로베르티나 하나 밖에 없었기에 로베르티나 교회에서는 어떻게든 대주교 없이도 성례를 강행하려고 했지만, 작년 겨울 갑자기 드가 파 즈뷔라는 최초의 파신 대주교가 구지가에 나타나서는 즈뷔 로베르티 옹 앙헬이라는 교회를 지어버렸다. 따라서 로베르티나 교회는 성례를 치를 권한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로베르트 앙헬의 본산이 있는 이르니아 대륙의 카이가에서 새로운 대주교가 도착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여기서 재밌는 점은 즈뷔 교회가 성례를 개최할 때 코끼리를 제물로 바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는 점이다. 코끼리 궁전은 오직 성상만을 키우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현재로선 사실상 모든 업무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로베르티나 교회의 눈치가 보여 아예 일손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봤자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노아는 치아키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리듀스가 있는 우리로 들어섰다. 철창 사이는 사람이 통과하기에 충분히 넓어 우리를 열지 않아도 쉽사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리듀스는 노아가 오는 걸 언제 알았는지 벌써부터 우리 앞에 서서 노아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아는 문득 이리듀스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선물로 받았을 때만 해도 허벅지 높이까지밖에 안 됐었던 녀석이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자신보다도 커진 것이다. 노아는 이리듀스의 콧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잘 지냈나요? 그 동안 다른 일로 바빠서 자주 못 왔네요. 이해해줘요."
노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이리듀스는 나팔소리 같은 울음을 내며 노아의 가슴에 이마를 비벼댔다. 노아에게 이리듀스는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다. 치아키에게는 미안했지만, 노아는 이대로 성례가 성상 없이 진행되어서 이리듀스와 좀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다시 성례가 행해진다면, 이리듀스는 인간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삶이란 임의적이며, 오차가 존재하며, 언젠가는 멈춘다.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언제 죽는지는 알 수가 없다. 죽음이란 언제나 막연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은 듯 떨어져서, 죽음이라는 명백한 마지막을 앞에 두고서도 인간은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은 어떠한가. 그들의 삶은 절대적이며, 완벽하며, 성례와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에게 삶이란 단순히 죽기 위해 앞에 놓인, 갈림길 없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만약 코끼리가 인간들만큼 지능이 높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노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형수는 죗값을 치른다는 명분이라도 있지, 코끼리의 죽음을 결정지은 것은 오직 인간, 이토록 영리한 인간들의 광신적인 믿음 때문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삶도 다를 바 없다고, 그렇게 노아는 생각했다.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출생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놓아버렸음에도 여전히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것. 노아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현재의 본능에 충실하면 될 일이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 순간 노아의 등 뒤에서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으면서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목소리였기에 노아는 뒤를 돌아보고서야 캐롤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캐롤은 우리 안으로 유유히 들어왔다. 캐롤이 다가오자 이리듀스는 긴장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노아 역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캐롤이 말했다.
“이 친구와 친한가 보네요. 매일 붙어있는 거 같은데.”
한 번도 두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사이였기에 노아는 캐롤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노아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저와는 인연이 깊은 아이니까요.”
캐롤은 한 번도 노아에게 보인 적 없었던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코끼리와의 인연이라. 큰 허우대와 달리 완전 계집애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네요?”
“예?”
“곧 죽을 코끼리한테 애정 갖지 말라는 얘기예요. 사실 저라면 치아키 말마따나 인간을 죽인 코끼리 따윈 도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치아키 얘기 들어보니, 당신 정말 별로던데요? 사내대장부가 동물 죽이지 말라고 징징거리는 거 정말 꼴 보기 싫거든요.”
순간 노아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두 귀를 의심해야 했다. 뭔가, 굉장히,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대사가 아닌가? 노아는 헛기침을 하고는 답했다.
“...뭐,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죠. 지인한테 선물로 받은 코끼리라서 애정이 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나저나 말이 좀...”
“앤이라고 했나요?”
“예?”
“치아키에게 들었어요. 이 코끼리를 준 여자 이름이 앤 드루얀이라고, 홀로 코끼리 무덤에서 사는 학자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노아는 왠지 말이 순식간에 잘려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금 전에 사내대장부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그 이름 맞습니다. 그녀가 이리듀스를 저희에게 선물했지요. 이스하고 같이 데려...”
“혹시 했어요?”
예? 뭘 말이죠?”
“그 여자랑 했냐고요.”
노아는 계집애건 사내대장부건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동안 아는 체 한 번도 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좀 당황스럽군요. 근데 이제 여기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따가 다시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 좀 나가주시겠어요?”
캐롤은 아무런 사심 하나 없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삐졌어요?”
“사람 속 긁는 게 취미이고 특기인가 본데 그런 취미 공유하려고 왔다면 사람 잘못 봤습니다. 더는 얘기할 거 없으니까 그만 두시죠.”
“그렇게 해요. 사실 제가 볼일이 있었던 것은 이리듀스거든요. 단둘이 있고 싶은데 잠시 나가주겠어요? 당신이 있으면 좀 많이 방해가 될 것 같군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어쩜 이토록 이죽거릴 수 있을지! 노아는 거의 감탄할 심정에 이르렀다.
“…왜 난데없이 시비를 거시는 건지 전 도저히 이해가...”
“이 아이, 이대로 목이 잘려나가기에는 정말 아깝네요.”
역성을 지르려고 했던 노아는 예상치 못한 캐롤의 말에 입을 그만 다물고 말았다. 캐롤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는 이리듀스를 억지로 붙잡고는 그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붙였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성례가 다시 치러진다면 이 아이가 1순위가 된다고 들었어요. 치아키가 그러더군요. 성상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노아는 화를 억누르며 답했다.
“당연히 치아키는 그렇게 얘기했겠죠. 그녀는 이리듀스를 싫어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성상 1순위는 리미다우입니다. 이리듀스처럼 어린 코끼리는 아직 성례를 치르기에 한참 남았습니다.”
캐롤은 이리듀스에게서 이마를 떼고는 노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구지가에서는 최근 즈뷔 교회 때문에 성례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어요. 그만큼 로베르티나 교회에선 곧 다가오는 성례에 가장 완벽한 성상을 제물로 사용하려고 하겠죠. 리미다우를 보니까 피부병이 심해서 완치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더군요. 여러 변수가 존재하지만, 제 생각에도 다음 성례에 쓰일 코끼리는 이리듀스가 아닐까 싶어요.”
노아는 뭔가 그녀의 논리 이면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아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성례는 열리지 않잖아요? 로베르티나 교회에 새 대주교가 부임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카이가에서 대주교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고요.”
캐롤은 말했다.
“당연하죠. 카이가에서 대주교가 올 리가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그리고 노아는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가한 일상과 평화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로베르티나 교회의 대주교였던 리안 미다 르 로베르티나가 죽었다는 것은, 노아 자신이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였던 것이다.
바로 리안의 딸, 유카 미다 르 로베르티나 2세가 구지가로 귀환한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