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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늙음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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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남자고교생의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은 일상생활을 담은 무료하고 지루한 우리들의 일상단편. 비슷한 느낌의 일본만화보단 한참 전에 썼습니다

(36) 시계는 하염없이 똑딱똑딱


​​그러니까, 그는 학생주임 선생님께 지적받은 머리를 10mm로 박박 깎고,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으며, 매일 6시 무렵 일어나 적당한 시간에 등교를 해서, 가끔씩 늦을 때도 있지만 하여간 제시간에 맞춰 복도쪽 창가 제일 끝 분단의 앞에서 세 번째 왼쪽 자리에 앉는다. 

아침 조례를 잠깐 듣고 0교시 자율학습을 한다. 그는 영어보충교재를 꺼내놓고 자습을 쬐까 해 보려고 하지만, 반은 졸고 반은 깨어나있는 유체이탈의 마음가짐으로 보고 있으니 페이지는 넘겨질 줄 모르고 '제 1단원 - to 부정사의 쓰임'에 머물러 있다. 어디선가 친숙한 종소리가 들려 문득 눈을 떠 보니 벌써 0교시는 끝났고 자기 자신이 학교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그러니까 책상에 엎드려 머리 박은 채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선하품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 일렬로 늘어진 남근들의 행렬, 그리고 각각의 소유자들이 배설의 쾌감에 몸부림치는 그 광경 속에 그가 알고 있는 면상이 보여서 상큼발랄하게 뒤통수를 후려갈겨준다. 덕분에 깜짝 놀라 바지에 레몬 주스 몇 방울 묻은 친구에게서 쌍욕 한 번 얻어들은 후, 그 또한 배설의 광경 속에 섞여든다. 물론 아까의 보복으로 수없는 물리적 타격을 받긴 했지만. 가벼운 욕을 지껄이며 낄낄거리다 보니 1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교실에 들어와 50분 간의 수업을 듣고, 또 이것이 세 차례 반복되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 급식 메뉴는 맛이 개돼지죽이라는 소리가 들려와 매점에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선약한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다를 떨다가, 3분도 채 안 된 라면을 억지로 풀어헤쳐 후루룩 들이마신 후에 아직 다 먹지 못한 녀석의 것을 한 젓가락 뺏어먹는다. 그리고 입 한 번 슥 닦고는 저 멀리서 빵을 먹고 있는 호구에게 달려가 또 한 입 얻어먹고, 그렇게 먹으며 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5교시 직전까지 다가와 있다. 그는 계란과자 한 개를 우물거리며 재빨리 교실로 들어간다.

다시 수업의 연속, 시계바늘은 느린 척 하면서도 홱홱 지나가버려 시간은 종례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이번 주는 그가 속한 분단이 청소하는 주이다. 빗자루를 손에 들고 대강대강 먼지들을 쓸고 있자니 지난 주에 봤던 모의고사의 성적표가 나왔다고 교탁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빗자루를 내던지고 자신의 성적표를 가져온다. 대충 주변 아이들의 점수조사를 해 보니 어려웠던 이번 시험에 비해서 그의 성적은 그럭저럭 잘 나온 듯 싶다. 와글와글 떠들고 있자니 선생님이 들어와 청소도 안 하고 뭔 잡담질이냐며 교실문을 땅 친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청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청소가 끝나고 또 한 차례 야자를 하려니 졸음은 쏟아지고 글씨는 개판이요 문제집에는 붉은 소나기만 좍좍 내린다. 오늘은 어째 공부도 안 될 성 싶어 옆자리에 앉은 놈하고 농담따먹기나 하고 있으려니 부반장 되는 녀석이 야자 시간엔 좀 조용히 하라며 소리지른다. 짝이 중얼거리기를, 이번 시험 망쳤다고 아주 생난리를 치네. 저래봤자 내일이면 잠이나 퍼 잘 새끼가. 그는 소리죽여 낄낄거리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는 아까 풀다 말았던 물리 13번 문제에 집중한다.

'AB + B행렬이 성립할 때 AB는 ​정​사​각​행​렬​인​가​'​라​는​ 명제의 증명 과정을 딱 세 줄 정도 남겼을 무렵, 그날의 일과를 마치는 종소리가 딩동댕동 울린다. 금세 시끌벅적 달아오르는 반 분위기에 휩쓸려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싼다. 수없는 교복의 인파에 휘말려 어떻게든 교문에 다다르고, 친구들과 헤어져 귀로에 올랐다.  그는 문득 노오란 가로등 불빛 밑으로 쏟아져나오는 몇백의 개체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분명히 저 가운데에는 전교 1등도 있고 전교 꼴등도 있다. 노래를 잘 부르는 놈도, 못 부르는 놈도, 뚱뚱하고 마른 놈들도 있을 터이다. 어느 정도 한계는 있겠지만 머리 모양에 변화를 준 놈도 있겠고 얼굴의 차이는 극명하겠지.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째서 모두 하나의 개미떼에 불과한가.

그는 생각했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하루, 똑같은 복장, 똑같은 모양으로 정제되고 있는 무리들은 아직도 한참의 쳇바퀴를 더 남겼다. 그 안에서는 모두 똑같은 것을 강요받고, 또한 모두 똑같아지려 애쓴다. 그가 지금 살아가는 삶은 다른 녀석들과 별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하늘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어둑했던 하늘은 왠일인지 맑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이 맑아도 떠있는 수억의 별들은 모두 '별'에 불과하다. 그는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별들 하나하나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갑자기, 무언가가 목을 턱 하고 죄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등에 맨 가방의 무게가 왠지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의지한 채로 그의 곁을 지나쳤다. 늙음의 냄새, 가 확 풍겨왔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저 할아버지와 그리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왜일까. 아직 고등학생인 그는, 어리디 어린 그는 늙음이 두려웠다.

문득 바라보니, 확실히 그의 시계는 특별할 것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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