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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百鬼夜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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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너무 많이 봤더니 이런 내용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문화침략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
 
시커먼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 있는 밤. 그날도 나는 노오란 전등이 소주에 비치는 기묘한 광경을 보며, 주인마저 졸고 있는 노오란 포장마차의 밤. TV에서는 어릿광대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옆에서는 레코드판의 잡음 같은 이야깃소리들이 들려왔다. 세상 참 더러워. 이젠 뉴스도 듣기 싫다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녀석들이 나쁜 짓을 해대는지 원. 그런데 아무도 벌을 받지 않아. 나는 또 한 잔을 쭈욱허니 들이켰다. 소주병에 비치는 것은, 주로 날벌레였다. 그들은 노오란 불빛에, 그 열기에, 아니라면 내가 모를 그 어떤 매력에 이끌려 생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기껏해야 그런 것이다, 생명 하나란. 죄 하나란 겨우 그런 것이다. 나는 그따위의 개똥철학을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주워 삼키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마신 밤이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도. 어쩌면 나는 그때 술 취한 자의 특권-자신의 목소리를 자기가 들을 수 있다는 어느 소설의 말처럼, 단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옆의 사람들의 소리는 어느 새엔가 사라졌다. TV는 꺼져 있었다. 그들이 떠나간 것인가, 내가 어딘가로 떠밀린 것인가. 알코올이 껴서 둔해진 머리로 잠시 생각해보다가,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오늘도 그 밤이다.
  
  차가운 광풍(狂風)이 비닐 천막 뒤엣편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왔을 때, 나는 그리 놀라지도,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주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뒤를 돌아보는 것 따위의 촌스런 리액션을 취하지도 않았다. 보름달 뜨는 밤은 백귀야행의 밤이라 했던가.  나는 그저 그렇게 씨부렸다.  소주병에는 노오란 전구등과, 그것에 미칠 듯이 달려드는 벌레들과, 입이 찢어질 듯이 괴기한 웃음을 웃는 백색의 사내가 비쳤다. 사내는 맹수에라도 쫓기는 듯 괴로운 호흡으로 웃어댔다. 나는 슬쩍 조소를 띄워 그에 답했다. 허어연 머리의 사내는 허어연 양복을 입고 허어연 구두를 신고 허어연 웃음을 지으며 뻔뻔하게도 인사치레를 했다. 초면이네요. 나는 대답했다. 구면이겠지.
  
  그리고 사내는 그날도 그 언제나처럼 번들거리는 안광을 뿜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42) 삐에로가 늘 그렇듯, 광대 같은 사내는 어딘가 겁먹은 투의 말을 잇는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근방의 전설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름달 뜬 밤에 사라진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오늘과 같은 밤입니다. 네, 딱 오늘 같은 밤이었습니다. 달은 노오랗게 떠오르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던 밤. 그 고장의 전설대로 아이들은 귀신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백귀야행, 귀신의 밤. 그곳에 있는 건 원하는 것. 그러나 조심하라. 잡히면 죽고, 도망쳐도 죽으리라. 언제나 무서운 것은 인간. 달이 가득 찬 밤에 쫓고 쫓기며 웃으리라. 그러나 언제나 무서운 것은 인간. 신은 그 누구도 벌하지 않으리. 그리고 언제나 속이는 것은 인간. 잠들지 못하는 밤, 쫓고 쫓기며 웃어대리라. 
  
  아이들은 이 노래가 산속 깊은 곳의 동굴에 들어가지 말라는 얘기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또래 녀석들이 언제나 그렇듯, 동굴로 들어가 보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리 없지요. 아이들은 묘하게 예민하니까요. 당연히 매력적인 무언가가 금기 속에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첫 번째 아이가 말했습니다. 번득이는 안광들은 우리를 좇지 않아.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 두 번째 아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어.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 세 번째 아이가 말했습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헛소리만 해.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 네 번째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가지 않겠어. 모두 조심해.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보름달을 받아 노오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아이가 남고, 세 아이는 떠나갔습니다.
  
  
  동굴 안은 깊고, 어둡고, 숨 막힐 정도로 따뜻했습니다. 아이들은 끝날 줄 모르는 길을 걷고 또 걷다가 마침내 지쳐버렸습니다. 촛불의 불빛은 두려움을 없애기에도 부족했지만, 피로를 덜어주기에는 더욱 부족했지요. 지치고 지쳐 포기하고 싶은 녀석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여기서 쉬고 있을게. 너희끼리 다녀와. 두 아이는 약간 망설임이 섞인 눈빛으로 마주보았습니다만, 행동엔 관성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멈춘다고 말한 녀석은 아무리 말해도 멈출 뿐, 나아가길 원하는 자들은 아무리 말해도 나아갈 뿐. 그들은 단순히 두 녀석은 깊고 따스한 어둠에 먹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나아갔습니다. 노오란 불빛에 꼬이던 날벌레가 한 마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불빛을 잃어버린 벌레는 살 수 없습니다. 벌레의 절규가 멀어져가는 불빛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미 나아간 그들에게는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가 남고, 두 아이가 떠나갔습니다.
  
  
  흘러내린 식은땀 한 방울이 용기를 뒤흔들 정도로, 등불마저 꺼져가는 칠흑 같은 어둠의 자궁 속에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조금 밟은 것 정도로 신경질이 난 건 아닐걸요. 그저, 어둠 속에서 사람은 미치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때릴 수는 없으니까 옆의 방해물을 때린 것뿐이죠. 아이들의 싸움은 단순히 격앙된 감정의 표현이니까요. 다만 누구의 이빨이 나가든, 손가락이 부러지든, 눈을 찔리고 목을 조르고 팔을 부러뜨려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싸움은 멈추지 않을 뿐입니다. 더 이상 누굴 때리거나 맞기에는 너무 지쳐버린 한 녀석은 등불도 잊고 떠나갑니다. 어두운 장막의 뒤를 향해서. 자신이 버렸던 패배자와 만나기 위해. 뭐 만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끝없이 불길한 마성을 풍기는 어두컴컴한 내장 속에서 과연 그 어떤 것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한 아이가 남고, 한 아이가 떠나갔습니다.
  
  
  남은 아이와 남은 등불. 여하간 둘 다 얼마 남지 않은 건 분명했습니다. 다 타버리기 전에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는 없었죠. 두려움, 공포, 후회. 그런 건 다 도중의 일일 뿐입니다.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그 순간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본능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끝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등불이 꺼진 지는 이미 한참 오래전 일이지만, 아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더듬고 더듬으며 그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노래 속에 숨어 있던 것은 이제 와서야 소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얘.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소년은 무시했습니다. 소년의 귀에 무엇인가가 속삭였습니다. 얘, 네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니. 소년은 필사적으로 기었습니다. 얘, 네가 지금 무엇을 향해 가는지 아니. 끝에 끝까지 가면 무언가 있을 것 같니. 아무것도 없어. 이제 그만 포기해.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자아, 이제 포기해. 여기가 너의 한계야. 바야흐로 백귀야행의 밤. 도망쳐도 숨어도 살아날 수 없는 곳. 너는 이제 끝이야. 귀신은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필사적인 감정을 소년은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가 이 앞에 있다는 걸 알자,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뻗었습니다. 안돼. 그건 아니야. 너는 그걸 집을 수 없어. 그걸 집으면 너는 죽어. 그게 이 너의 끝이야. 그건 집으면 안 돼. 소년은 그 더럽고 상처입은 손으로, 쉬어버린 목소리로,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손을 뻗었습니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내가 찾던 것은 바로.
  
  금기. 도대체 금기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금기 안에는 분명히,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 미약한 신보다도 더 강력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금줄을 깨부수고 태아를 바수는, 갈기갈기 동물을 찢고 필요하다면 남을 배신하고 빼앗고, 쓸데없는 규칙을 어기고, 결국 모든 게 행한 그대로 흘러가는데 말입니다. 처벌 따윈 없습니다. 잡히거나, 보이거나, 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면 됩니다. 아무렴 어때요. 신은, 당연하게도 그 빌어먹을 신은 아무도 벌하지 않으니까요. 
  
  힘. 깨부수고 바수는, 찢고 더럽히는, 빼앗고 어기는, 행한 그대로 흘러가는, 그러나 원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릴 수도 있는 힘. 노래 속에 숨겨져 있던, 모두가 찾아 헤매던, 그리고 소년이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 그것이 그 동굴 안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떻게 그것을 소년이 느꼈는지는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을 막론하고, 어쨌거나 그것은 소년의 바로 코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소년은 분명히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은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러니까, 안광을 번득이며 동굴 밖에서부터 그들을 쫓아간, 그들의 헤맴을 모두 지켜본 피투성이 소년은 미소 지으며, 상처투성이 소년의 손을 밟고 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지. 상처투성이 소년이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음 짓던 피투성이 소년은 천천히 그것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래, 난 분명히 가지 않았어. 그곳에 남았었어. 그리고 너희가 출발하고 나서, 너희의 불빛을 따라가, 남아있던 약해진 벌레들을 짓밟고, 마지막 순간을 숨죽여 기다렸어. 그래서 여기에 서 있지. 그래서 이것을 손에 넣었지. 상처투성이 소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백귀야행의 밤, 귀신의 안광이 불빛으로 노오랗게 물들어 녀석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무서운 것은.
  
  
  그리하여 영원할 듯한 밤이 끝났습니다.
  그가 가까스로 기나긴 말의 끝을 맺었을 때, 소주병에 비친 불빛은 취한 듯이 비틀거렸다. 울렁거리는 포장마차는 한 차례의 바람을 더 맞아 휘날려대고 있었다. 취한 자는 말이 없다. 다만 광기에 취한 자만이 말할 뿐이다. 한 자락의 광소(狂笑)는 한 차례의 말할 기회를 맞아 다시 낄낄거렸다. 어떠십니까. 짓밟힌 놈의 그 얼굴을 상상해봐요. 참 우습고도 치졸한 이야기 아닙니까, 저 휘황찬란한 달님을 쳐다보며 하는 이야기치고는. 그러고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은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당신, 취했구만.
  
  달은 없다. 보름달을 닮은 듯한 거짓 달빛만이 있을 뿐. 노오랗게 빛나는 눈물은 어김없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 내린다. 참 이상했다. 광대도 바람도 거짓 눈물만을 흘려댈 뿐인데, 그의 눈물은 왜 이리도 인간다울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한다. 하하하. 그러니까 언제나 속이는 것은 인간. 녀석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후회하고 있다. 몇백 년 전에도, 몇백 년이 지나도. 그리고 지금도.
  
  바깥의 달은 곧 새까맣게 물들어버릴 것이다. 보름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의 자유도 영원하지 않다. 다음 보름도 다시 백귀야행의 밤이려니.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말한다. 웃으며 말한다.
  
  "도망쳐."
  
  노오란 불빛은 잠시 어둠 속으로 자리를 비킨다. 광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나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맞는다. 찰랑거리는 소주병에 푸르른 달밤이 허어옇게 비친다. 자아, 도망치려고 했던 손오공은 언제나 부처님 손 안에 있기 마련. 너는 아직도 동굴 안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상처투성이 소년의 안광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실상은, 그러니까, 죄는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세 명의 귀신은 웃지도 않고 그의 뒤에 서서 그를 비웃는다. 몇백 년 동안이나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또 앞으로도 얼마나 괴로워해야 할 것인가. 이것으로 이 미쳐버린 공연은 또 잠시 막을 내린다. 나는 광대의 공포 어린 절규까지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지켜봐 주었다. 
  
  다시 말해 백귀야행의 밤, 술주정뱅이 광대는 몇백 년 동안이나 이 밤을 맴돌았을까. 몇백 년 동안이나 쫓기고 쫓겨, 드디어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몇 번일까. 광대는 매번 이곳을 찾아왔다. 매번 이곳에서 붙잡혔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밤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계속되는 것인가. 그들은 살인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업보. 나는 중얼거렸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이 그 어떤 죄이든 간에.
  
  달밤은 여전히 차다. 주인마저 졸고 있는 그 노오란 불빛 속에서, 나는 노오랗게 비치는 소주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영원히 돌아올 그의 보름달과는 다르게, 나의 아침은 영원할 듯한 밤조차 넘어 언제나 나를 찾아올 테니.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포장마차를 나서 언덕을 넘어 집으로 가는 길, 그 미치도록 푸르른 달밤 아래에는 어린 아이들이 입이 찢어질 듯한 웃음을 지으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돌아오는 것도 인간. 벌을 받으러 찾아들어 오는 것은 인간.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것. 저 원혼의 백귀마저. 
  
  나는 묵묵히 노래를 들으며 걸어가다가, 흘깃 그 꼴을 보고서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웃었다. 노오란 안광을 한 아이들은 노오란 보름달 아래에서 새빨갛게 물든 광대의 잘린 머리를 휘두르며 즐거이 즐거이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이곳에서 이 저주받은 막을 시작하리라.
  
  유달리 푸르른 미치광이의 달밤. 그야말로 백귀야행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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