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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짐승과 마을 이야기


22화



드래곤 칼리버가 부러졌다.
백마리 동족의 유골과 천마리 동족의 비늘과 만마리 동족의 원한이 담긴 검이, '괴물'의 날개와 부딪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하지만, 그걸로 좋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의 동족들이여… 수고했다!!]


자신의 종족조차 지키지 못한 어리석고 약한 왕.
과거의 드래곤왕 알카드론은, 드래곤 사이보그 「브류나크」로 다시 태어났다.


간신히, 천년 전의 '멸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이 세계를.
간신히 부활하여, 터전을 잡고 평화를 되찾으려는 이 생명들을.


이런 괴물의 멋대로인 사정 때문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

 

 


드래곤 로어(Dragon roar).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정점에 서있던 최강의 종족 드래곤.
그 생명의 파동이 담긴 로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압도하고 경직시킨다.


그것을, 루퍼스의 코앞에서 터트렸다.


"……………!!"


루퍼스조차, 고통으로 인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귀에서는 피까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력한 방어막이라도, 아무리 철저하게 공격을 쳐내도.


'소리' 그 자체가 귀로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느닷없는 로어. 그로 인해 생겨난 갑작스러운 통증.
그 결과 생겨난, 단 한순간의 틈.


브류나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브류나크의 몸이 가속된다.
어깨, 팔, 다리, 발뒤꿈치, 허벅지, 허리, 등, 날개.
전신에 있는 부스터가 일제히 가동하고, 광익으로 인해 얻은 추진력까지 더해져 잔상조차 남기지 않는 스피드로 루퍼스에게 돌진했다.

 


「DRAGONIC BITE」

 


드래곤은, '인류'가 아니다.
인간을 뛰어넘는 지성을 지니고 있어도, 아무리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근본은, '인류'가 아니라 '야수'에 가깝다.
최후의 최후로 믿을 것은 지혜도 도구도 마법도 아닌, 그 자신의 힘.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


그 심플한 공격이, 루퍼스의 날개 중 하나를 물어뜯어 떨어뜨린다.

 


​"​─​─​─​─​─​─​─​─​─​─​─​─​─​─​─​─​!​!​"​

 


처음으로, 비명을 지른다.
거대한 그림자의 날개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을.
날개가 떨어진 자리에서는 피 대신 칠흑같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루퍼스는 그곳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청룡의 활 시위를 놓고, 디아나의 노랫소리가 끝난다.
활에서 떠난 빛의 화살이 기세와 속도를 더해가며 하늘로 올라간다.
번개도 불도 아닌, '빛'의 구슬. 수많은 윌 오 위스프들이 모여들어, 화살을 따라 날아간다.
음속을 넘어선 빛의 화살은 날아가면서 빛을 흡수하여 더욱 커졌고, 루퍼스의 남아있는 한쪽 그림자 날개를 꿰뚫는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그림자 벽'과는 달리, 마치 '진짜 새의 날개'와도 같이.

 


주작이 불꽃과 함께 날아오른다.
그녀의 몸 자체가 태양과도 같은 빛을 발하며, 하늘을 밝히고 그림자를 걷어냈다.
이윽고 자신의 몸 앞으로 그 빛을 집중시켜, 루퍼스를 향해 던지고 폭발시켜 루퍼스의 마지막 남은 그림자 벽마저 지워버린다.

 


기계와 백호, 현무와 라이네스가 뛰어올랐다.
라이네스, 백호, 기계, 현무의 순서대로.

 

현무를 밟고, 기계를 밟고, 백호를 밟고 가속을 더한 라이네스는 루퍼스가 있는 높이까지 도달했다.
루퍼스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검이 루퍼스의 목을 가른다.
목의 옆쪽이 벌어져, 검은 안개를 뿜어낸다.

 


─하지만, 베어진 것은 전체의 절반. 완전히 떨어뜨리진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백호의 참격.
극한까지 몸을 가속하여 루퍼스가 있는 곳까지 뛰어오른 다음, 그 근력 증폭을 오른팔로 옮긴다.
라이네스가 미처 다 자르지 못했던 루퍼스의 목을, 백호의 발톱이 완전히 잘라내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몸은 아직 움직였다.

 


남아있는 그림자의 날개를 움직인다.
빛의 화살로 인해 반쯤 잘려있던 날개를 휘둘러, 마치 깃털─크기는 하나하나가 장창에 필적했지만─과도 같은 '칠흑색'을 떨어뜨린다.

 


현무가 기계의 앞으로 나섰다.
몸을 웅크릴대로 웅크리고, 몸 자체를 변형시켜 '방패'가 된다.


현무의 방패는 칠흑색의 깃털틀을 막아낸다. 그 충격으로 인해 방패가 찌그러지고 금이 가고 깨지지만,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깃털까지 막아냈을 때 현무는 다시 몸을 펼쳐, 루퍼스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이제까지 흡수했던 충격량을 에너지로 바꿔, 현무는 가슴의 보석에서부터 열선을 발사하여 루퍼스의 남은 날개를 완전히 떼어낸다.


그 반동으로 자신은 지면까지 추락해버렸지만, 그 대신.


─더이상, '기계'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흑의 십자를 내지른다.


루퍼스가 몸을 돌린다.


하지만, 늦다.


몸을 돌리는 것보다 먼저.


몸의 중심, 심장부를.

 


강철의 송곳이, 완전히 꿰뚫었다.

 

 

 


지면으로 추락하는 사람들을 브류나크가 마법으로 안전하게 캐치, 지면에 착륙시켰다.
그리고 브류나크 자신도 땅에 내려앉았다.


[끝나고 보면, 꽤 싱거웠군.]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려 땅에 떨어진 루퍼스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 상으로 보면 브류나크가 루퍼스와 공중전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브류나크도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 끝난 겁니까?"
[그림자로 변환할 틈도 없이 목을 자르고 심장을 꿰뚫었다. 녀석에게는 더이상, 생명의 느낌이 나지 않아.]


안개로 변신해있을 때는 타격을 거의 받지 않는 뱀파이어도, 실체를 가졌을 때 심장에 말뚝이 박히면 죽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실체와 비실체를 오고 갈 수 있는 자라도 실체일 때 공격당하면 목숨을 잃게 되어있다.


[… 그럼, 끝난거군.]


백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시작으로, 일행이 주저앉아버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연전연투를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피로와 데미지가, 지금 '최후의 일격'을 날리면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나, 태어나서 이렇게 노력해본 적 처음일지도…"
"몇번이고 말하지만, 그건 자랑이 아니다."
"… 라이네스 씨는 꼭 이럴 때만 심술궃게 나온다니까요. 이래서 노처녀는─"
"너도 나랑 동갑일텐데!!"
"아야, 아야! 몇번째인진 모르겠지만 폭력 반대!!"
"몇번째인지 모르겠지만, 폭력에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할 발언을 하지 말라고!!"


이 판국에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문제로 다투기 시작하는 라이네스와 디아나를 보며, 성수들은 혀를 찼다.


[… 기운이 남아도나보네, 저쪽은.]
[그치만 살짝 부러울지도. 저만큼 친하다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주작은 백호 쪽을 곁눈질했지만, 그쪽에선 이쪽을 보지도 않고 있다.
한숨을 토하고 고개를 몇번 젓고는 청룡을 향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현무는 지나치게 공격에 두들겨진 반동으로 입은 데미지 때문에, 아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버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루퍼스의 공격을 막아내준 덕분에 마지막 일격이 제대로 들어간 거지만.


"… 백호."


그리고, 기계가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뭐냐, 안드로이드.]
"아까의 '제국으로의 보고 내용'. 지켜줄 건가요."
[… 당연한 소릴.]


백호는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지난 시간 동안 이 땅에서 고생한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됐지만, 그래도 백호의 입장에선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연방과의 전쟁'이라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까.


문득, 백호는 기계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아. 우리들은 하루 정도 쉬어서 체력을 회복한 후 제국으로 복귀할 거니까.]
"… 로켓은 없을텐데요. 무슨 수로?"
[그거라면─ 그가 도와주겠지.]


백호는 브류나크를 올려다보며 말했고, 브류나크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번 일은 그대들 덕분에 해결한 것이기도 하니까.]
[… 봤지?]
"…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기계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름을,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 뭐?]
"저의, 이름입니다."


A넘버즈 안드로이드 타입Z.
그것은 자신의 '번호'이지 '이름'이 아닐 것이다.


'자아'를 가지고 난 이후부터, 쭈욱 알고 싶었던 것.
기억을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름'은 그것과 별개의 문제.


기계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었다.
라이네스에게도, 디아나에게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을 들려주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백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아, 그렇지. 기억이 없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백호는 말을 이었다.


[알았다. 너의 이름은 A넘버즈 ​타​입​Z​의​─​─​─​─​─​]​

 

 

 


[끝날 것 같으냐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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