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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1편은 이야기를 끊기 싫어 다소 길게 쓴 편입니다.
2편부터는 이보다 짧아질 예정입니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1화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고소공포증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역사가 헤르토스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던 제왕 로우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저 고소공포증이란 하찮은 듯 하면서도 놀랍도록 공포의 대부분을 차지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묘한 병명이다. 인간은 누구나 높은 곳에 올라서면 두려울 수밖에 없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할 때 고소공포증이란 병명을 갖다붙이고 그 공포와의 재대결을 피하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지배할 뻔했던 로우케 황제. 그는 십만의 연합군을 불과 오천의 기병으로 몸소 관통할 정도의 기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시찰을 위한 비공정 탑승에 거부함으로써 반란의 기미를 조기에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충분할 듯하다. 지금의 내가 둘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 지는 이로써 명백해졌으므로.

“젠장, 빌어먹게도 높은 탑이잖아앗!”

지금 내가 매달려 있는 곳은 오 층짜리 길드의 옥상이 손수건만하게 보이는 탑의 꼭대기이다. 매서운 바람이 귀를 스칠 때마다 밧줄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때마다 나와 같이 매달린 뤼르 아저씨는 눈을 감고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신의 축복을 기도하는 그 기도문은 왠지 장례식장의 추도사처럼 음산하게 느껴졌다.

“아아, 제왕이시여.”

나는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겁쟁이라 부른 작자들을 여기다 묶어버릴 수만 있다면.”


이 일을 맡은 건 역시나 돈, 돈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맞이한다. 그것은 이전에 갖다바친 등록금의 효력이 다했으며, 이제 새로운 금액을 학교측에 선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졸업까지 앞으로 한 학기가 남았지만, 이맘때에 느껴지는 불안감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엘드 왕국은 한때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될 뻔했던 키드런트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이지만, 그렇다고 인심 좋게 국립대학의 등록금을 무상으로 해 준 적은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역사학과의 교수님께서는 왕족의 품위유지비에서 백분의 일만 떼서 준다면 너희 같은 머저리들에게까지 장학금 혜택이 돌아올 거라고 열변을 토하고, 강의가 끝날 때쯤엔 비굴한 표정으로 아까의 말은 모두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렸다. 아무튼 등록금 미납이 학교에 좋은 이미지를 선사할 리 없기에 난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방학 동안 한시적으로 조교 일을 맡게 되어 내야 할 등록금은 약간 내려갔다. 그나마 다행이다. 도무지 일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요즘의 나라 사정은 썩 좋지 않다. 길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우글거리고, 일자리를 구한다는 공고를 붙이러 온 사람의 뒤로 긴 행렬이 생길 정도였다. 국왕 폐하께선 일단 근심하는 표정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폐하 스스로가 그 말을 믿을지조차 의문이다. 밤낮으로 무도회니 정책홍보니 최근 회의당에서 자유파와 몸싸움이 잦아지자 왕당파 의원들을 단체로 국왕친위대 훈련장에 밀어넣고 격투기를 수련하게 한다느니 해서 워낙 바쁘신 몸이었으므로. 아무튼 경기는 엘드 건국 이래 다섯 번째라는 작년의 불경기보다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고, 그래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어서 오십쇼.”

「랑테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듣기 싫은 목소리다. 안면 근육을 가볍게 조절하며 들어가 보니 랑테 씨가 소파에 앉은 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돼지비계를 문지른 것처럼 미끄덩한 목소리와는 달리, 새까만 수염과 구렛나루가 연결되어 늑대인간처럼 덥수룩한 얼굴을 가진 중년의 사내이다.

“녀석, 왔구나. 일자리 구하러 왔냐? 미리 말하는데, 이번엔 지난번처럼 도망쳐버리면 위약금을 받을 테다.”

“쳇, 마차에 치여 산산조각난 시체를 꿰매라고 하면 사형 집행수라도 도망가 버릴 걸요. 그건 일반인으로써 당연한 행위라구요.”

“그래? 우리 가게는 높은 보수를 보장하는 일만 도맡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텐데. 그러니 그런 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냐.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면 여긴 왜 왔지? 그야 방학이니 등록금을 벌까 했더니, 거리에 워낙 찬바람이 불어 일을 구하지 못한 거겠지. 하지만 우리 가게에 의뢰되는 일들도 너보다 훨씬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잽싸게 채간다구. 너처럼 느슨하게 이것저것 골라 일하 일하는 녀석을 보고 배가 불렀다고 하는 거야. 아직 먹고 살 여유 정돈 있으니까 호사스럽게 좋아하는 일만 골라 하려는 거지.”

나왔다. 속사포 공격. 숨쉴 틈도 없이 다다다 쏟아내는 그의 독설은 작년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내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였던지라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게다가 난 일을 구하러 왔고, 그렇기에 그와 싸우면 매우 곤란했다. 할 수 없이 기세를 좀 죽였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불평은 안 할 테니, 일단 일이 뭐뭐 있나 좀 보여주세요.”

“음.”

일단 내 기세를 죽이는 데 성공한 그는 독설을 뚝 그치고 전단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다른 일은 초보자가 하기 좀 그런 것들이고, 이게 무난해. 보수도 상당히 세니, 한번 하면 네 며칠간은 놀고먹어도 될 게다. 일하는데 시간이 며칠씩 걸리고 하는 것도 아니니 딱 안성맞춤 아니냐.”

그의 너스레에 현혹되면 안된다. 난 ‘초보자의 정성이 요구되고, 약간 섬세한 재주가 필요하지만 역사학과인 너라면 세심한 손놀림으로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장황한 설명에 혹했다가 산산조각난 시체 앞에서 울부짖었던 경험이 있다. 일은 제공받되, 판단은 내 스스로 정확히 내려야 한다는 교훈을 그때 배웠으므로, 난 신중하게 전단지를 흝어보았다. 그리고 마음껏 황당해했다.

“마법사 길드의 탑을 닦으라구요? 아니, 거긴 일반인이 못 들어가는 곳이잖아요?”

“그야 일반 관람객 수준을 이야기하는 거지. 국왕은 그럼 일반인 아니냐? 우리처럼 마법 못 쓰는 인간이지만, 틈만 나면 들어가잖냐. 그러니 걱정 마라.”

랑테 씨는 콧구멍을 후비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이거, 들어갔다 못 나오는 거 아니에요?”

소문을 들은 적 있다. 마법사 길드에서 인체해부를 목적으로 일반인을 납치해간다는 불길한 소문. 진위 여부는 파악된 바 없고 왕실 수사대에서도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했지만, 길드 안에서 올라오는 까만 연기는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보수는 분명 아찔할 정도로 높았지만, 그래도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그가 한마디를 추가했다.

“들어갔다 나온 사람하고 같이 갈 테니 안심해라. 그럼 됐지?
 마침 올 시간인데… 아, 왔군.”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랑테 씨.”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으로 들어온 손님은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평범하게 생긴 아저씨였다. 후줄근한 차림에 덥수룩한 머리, 까칠한 수염을 보아하니 노숙자 티가 팍팍 났지만, 아무튼 틀림없는 일반인이다. 이런 사람이 들어갔다 왔을 정도라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뤼르 씨와 함께 들어선 길드는 실로 삭막한 곳이었다. 우릴 안내하는 사람이 손가락을 튕겨 만들어낸 불씨로 담뱃불을 붙인다거나, 옆에 있던 사람이 ‘여긴 금연이에요!’란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날린 한파가 담배를 얼려 버린다든가 하는 일을 보며, 난 벌써 닫혀진 입구 너머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길드 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마법사였고, 괴짜라고 추측되었으며, 정신병자들인 게 확실시되는 작자들이었다. 사계절 내내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상자를 무려 38년 동안이나 만들어내려 한 사람이나(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목적은 그저 여름에 귤을 먹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공간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 상자에 코끼리를 집어넣으려 19년 동안 애를 쓴 사람 등은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한다. 난 여기서 다른 예들을 열거하고 싶지 않다. 그것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벗어나 버리는 것 같으므로. 그나마 사람을 죽여 시체로 실험을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것도 도저히 확신할 수 없다는 게 슬프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도착한 곳은 끝도 없는 계단이 펼쳐진 탑이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높이였다. 이 정도라면 고향에 있는 어지간한 산보다 높은 수준이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도시의 미관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마법을 걸었다고 한다. 하긴 저렇게 ㅅ 자 모양으로 멋대가리없이 솟아 있는 탑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계단을 올라가기 전 탑 아래에 붙어 있는 게시판을 보니, 이 탑이 만들어진 후 탑 안으로 연구실을 옮긴 마법사가 꽤 된다고 한다. 저 꼴보기 싫은 탑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면 탑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상한 논리를 댔다는데, 잘 이해되진 않는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쉬었다 오르고, 노래부르며 오르고, 명상에 잠기며 오르고,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오르다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해 보니…
마법사들이 공중에 둥둥 뜬 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많이 봤는지 뤼르 씨는 달관하는 표정을 지었고, 난 거울을 보고 싶을 정도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실례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다시 담뱃불을 붙이는 안내인 뒤로 스치듯 날아가는 마법사를 멍하니 바라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탑을 닦으러 걸어올라왔고, 이제부터 목숨을 걸고 줄 하나에 매달려 탑 전체를 닦아야 한다. 떨어지면 당연히 사망. 근데 지금 둥둥 떠 있는 작자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확실하다!

“분명 우린 이 탑을 닦으러 왔는데 말이죠. 줄에 매달려 이 탑을 닦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도 매우 오래 걸릴 텐데 말인데요. 근데 저 분들은 날아다닐 수 있으니 그냥 저분들에게 맡기면 간단한 문제 아닌가요?”

워낙 큰 충격을 받은 터라 내 입은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아무래도 까마득한 그 높이에 질려 고소공포증이 꿈틀거린 게 아닌가 싶다. 안내인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뤼르 아저씨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일단 말을 꺼내놓고 보니 비위를 거스르는 짓을 했나 해서 덩달아 불안해졌다.

안내인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빤 후 연기를 뿜었다. 담배를 피지 않는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독한 담배연기는 내게 오지 않았다. 도너츠 모양으로 뿜어져나온 연기는 허공에서 보랏빛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먹음직스러운 빵 모양으로 변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빵 모양이 확실하다. 그것은 계속 움직이며 바게뜨로, 카스테라로, 페스츄리로 모양을 바꾸어갔다.

“자,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빵을 구워본 적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놈의 빵 얘기란 말인가. 아무튼 질문은 질문이므로 일단 대답했다.

“예. 요즘도 직접 구워먹고 있는데요?”

하숙집의 커다란 공용 화덕을 사용해서. 통 맛있게 굽는 방법을 알 수 없어, 요샌 다른 것에 도전할까 생각 중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쩐지 낭패라는 표정이다. 그는 잠깐 침묵을 견지한 끝에 다른 타겟을 선택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뤼르 씨는 상황을 눈치챈 듯 매우 아쉽다는 태도로 고개를 흔들었고, 그제서야 안내인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해 나갔다.

“빵이란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만 기술을 배우면 금방 빵을 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꼭 빵을 집집마다 모두 구워먹어야 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매일 같은 빵을 구울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빵집이란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도 다양한 종류로 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린 그저 여러 가지 수단으로 돈을 벌고, 그것과 빵을 교환하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빵을 직접 구워먹는다는 건 노동력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지를 잘 말해주는 하나의 사례인 것입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안내인 씨, 대부분의 빵집이 파는 빵의 가격은 아시는지? 빵 다섯 조각, 세 식구가 그럭저럭 한 끼 식사로 할 수 있을 정도의 그 빵과 교환해야 하는 금액은 2피아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 달 수입이 60피아 정도이니, 그것으로 삼시세끼를 먹으면 잔고는 제로가 된다. 반면 집에서 빵을 구워먹는 비용은 장작과 밀가루 등의 재료를 모두 합쳐도 한달에 30피아를 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생일이나 회갑 정도에만 빵집을 이용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폐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 일설에는 그들의 수입이 빈약해지면 연금술로 화폐를 위조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 안내인 씨나 길드의 여러분들에게 ‘쪼들리는 수입’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일 테니, 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복잡한 심정을 숨겼다.
안내인의 달변은 이어졌다.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날 의식한 것 같았다), 우리처럼 마법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기타 등등의 경우에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미칠 지경입니다. 당신들을 안내하는 이 순간까지도 전 실험실로 달려가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열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이 클래스를 연구하는 우리들이 과연 빵을 굽는다는 행위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야 할까요? 절대 아닙니다! 우린 빵을 사먹는 대신, 그 시간마저 연구에 투자함으로써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건 엄격하게 말해 기회비용의 문제란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겐 생소한 말이겠지만요.”

사실 정말 생소한 단어였던지라 도대체 반론할 맘이 생기지 않았다. 이럴 땐 그냥 감동받은 표정으로 박수를 다섯 번 치는 게 상책이다. 더 많으면 아부 같고, 적으면 성의없어 보인다. 짝짝짝짝짝. 뤼르 아저씨도 옆에서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안내인은 자신의 달변이 만족스러웠는지 있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닦은 후 손을 휘저어 담배연기를 흩뜨려놓았다.

 “그럼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일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는 그걸로 충분하신지?”

“예. 구명줄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장비도 가져왔구요.”

그와 나는 어지간한 등산가 못지않게 밧줄을 가져왔다. 챙길 땐 몰랐지만, 지금 보면 그의 결정이 적절한 것 같다. 이 괴물같은 탑이라면 목숨을 지탱해 줄 구명줄도 그만큼 길어야 할 테니까. 그 밖에도 얼룩을 없애는 데 쓰는 약품이나 기름걸레 등도 지참한 상태였다. 안내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난간 너머로 풀쩍 뛰어올랐다.

“앗! 위험…!”

뤼르 씨가 묵묵히 내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표정으로 금방 상황파악이 된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심정이었다. 공중에 거꾸로 뜬 채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네들에게로 유유히 날아가는 저 사람에게 무슨 걱정이 필요하단 말인가.

오히려 걱정해야 할 쪽은 이쪽이다. 꼭대기까지 올라온 이상,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뤼르 씨와 난 밧줄을 풀어 난간에 단단히 묶은 후 반대편 끝을 각자의 허리에 묶었다. 만에 하나 중간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이 밧줄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아주 잠깐, 추락하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 마법사들이 날아오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곧 포기했다. 저 작자들은 내 추락을 지켜보며 어째서 일반인은 하늘을 날 수 없는지에 대해 토론할 자들이다.

“그렇게 매듭을 여러 번 묶는 건 좋지 않아. 허리가 너무 졸리면 곤란하니.”

뤼르 씨의 충고를 듣고서야 난 허리에 줄을 묶는 것을 그만두었다. 몇 번을 해도 불안했다. 이건 지금까지 겪어본 높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창문닦기 아르바이트라면 몇 번 정도 해보았지만, 이건 그런 시시한 건물이 아니다. 추락하면 골절이나 타박상 정도가 아니라 에누리없이 사망이다.

“그럼 다 묶었으면 내려가 볼까.
도구 잘 챙기고, 출발하지.”

뤼르 씨가 관록있는 목소리로 작업의 시작을 선포했다.
난 공중의 마법사들을 원망의 눈으로 한번 흘낏 바라본 후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상아탑 -상아처럼 매끈한 모양이라 붙여진 애칭이라고 한다- 은 아까 말한 것처럼 ㅅ 자 구조이다. 극단적으로 폭이 좁은데, 이는 아래로 내려가도 크게 바뀌지 않아 뾰족한 스피어를 연상시킨다. 이 덕분에 두 사람만으로도 어찌어찌 탑을 청소할 수 있다. 군데군데 빗물받이통이나 난간 등이 존재해 그것들을 짚으며 내려오는 게 가능하다.

뤼르 씨와 난 각각 탑의 두 면씩을 맡기로 했다. 돌출된 부분을 짚고 내려오며 준비해 온 도구로 벽과 창을 닦는다. 탑은 일반 주택처럼 회칠을 한 게 아니라 뭔가 희한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정말 상아로 만들기라도 한 건가, 란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기름걸레로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낼 때마다 순백색의 은은한 광채가 떠돈다. 그 모습에 보람을 느끼며 다른 부분을 닦는다. 이번엔 초를 칠해 볼까? 확실히 아까보다 나아 보인다. 우유처럼 뽀얀 빛을 보고 있자니 낙서를 하고 싶어졌지만 아쉽게도 펜은 가져오지 않았다. 만약 있었다면 목숨을 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어나가는 청년의 장대한 서사시를 남겼을 텐데.

작업의 성과가 곧장 드러났기 때문에 기분은 흡족했지만, 어떤 순간에도 한 손과 두 발은 어딘가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허리에 줄을 묶었다지만, 그걸 전적으로 믿는 것은 좋지 못하다. 발아래는 쳐다보기만 해도 금세 아찔해진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당장 오줌부터 지릴 것이다. 혹시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제발 부탁이니 정신을 잃었으면 한다. 맨정신으로 이 아득한 높이의 무게를 견뎌낼 자신은 없다.

그에 비한다면 뤼르 씨는 매우 능숙했다.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묵묵히 닦고 있다. 저 속도라면 날 추월하기에 충분했지만, 나와 페이스를 맞추고 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그가 닦은 벽은 분명 여기보다 훨씬 깨끗할 것이다. 랑테 씨는 그가 이 일에 20년간 종사해온 전문가라고 했다. 저런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하더라도 알아서 처리해 줄 것 같은 듬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일처리도 보다 대범해지고 빨라진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저, 뤼르 씨.”

“뭔가?”

“지금 중얼거리고 계신 게 대체 뭔가요? 노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랬다. 아까부터 계속,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무언가가 내 신경을 자꾸 건드렸다. 작업여건상 계속 마주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웅얼거림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다. 설마 내 욕은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찜찜함을 없앨 순 없었다.
내 질문에 그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건 기도문이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일터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잖나. 이런 곳에서 일하다 보면 신앙이란 걸 갖기 마련이지. 신이시여, 절 보호해 주십사 하고 말일세.”

“아, 그렇군요. 윽!”

위험, 위험했다. 멋쩍게 대답한 후 버릇처럼 코를 긁을 뻔했다. 한 손은 걸레를 잡고 있으니 다른 손으로 긁는다는 건 몸을 지탱하는 축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걸 뜻한다. 안 그래도 약간 불안정하다고 느끼던 차였던지라 이런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이런 내 모습을 뤼르 씨는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자네는 이런 일에 경험이 거의 없는 듯하군. 게다가 이런 높이도 난생 처음일 테고. 그런 것치곤 매우 잘 하고 있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게.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할 테니.”

공중에 매달려 창이나 벽을 닦은 경험은 있다. 단, 그것은 2,3층짜리 평범한 건물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느낌이 이상하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등을 허공에 계속 내맡기고 서 있으려니, 어딘가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팔힘이 결코 약한 편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어째서인지 벌써부터 경련을 일으키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상황이 이런지라 언젠가부터 난 벽만 바라보는 대신 아래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매우 좋지 않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난 뤼르 씨와 긴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뤼르 씨는 이런 일이 두렵지 않으시겠네요. 20년이나 이런 일을 하셨으면 평지나 이런 탑 꼭대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난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굳건한 심지의 소유자라도 애송이가 자신의 경험을 칭찬한다면 기분이 풀려 장광설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경험이란 그 기회비용이란 놈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한 개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고생의 탑인 것이다. 이런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 점에서 뤼르 씨의 답은 상당히 낯설었다.

“아닐세. 20년이나 이 일을 해왔어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라네.”

“예? 하지만…”

“자네와 나는 경험이 다르지만, 떨어지면 죽는 건 똑같잖은가. 오히려 난 이 일을 계속할수록 불안해진다네. 오늘은 무사히 넘겼지만 내일은 또 어떨지, 과연 내일도 오늘처럼 수당을 받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말일세. 내가 신에게 기도하는 건 어찌 보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오늘도 부디 절 지켜주십사 하고 말이야.”

 맞는 말이다. 최소한 아까 안내인의 말보단 훨씬 인간적이다. 하지만 난 무신론자다. 원래 상대방의 의견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지만, 지금은 대화를 좀 더 이끌어나가고 싶다.

“그렇다면 신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자리에 서도 난간을 붙잡은 내 손을 믿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도움을 구하진 않죠. 만약 신이 정말로 있다면 제가 난간을 놓는 순간 절 떠받쳐주겠죠? 하지만 그걸 시험해보고 싶진 않군요.”

일부러 살짝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내용을 말해 보았는데, 의외로 뤼르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렇지만 말일세, 신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을 관장하는 분일세. 지금 우린 안전띠를 하고 있고, 이건 신이 매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는 거지. 하지만 자칫 그 안전띠의 매듭이 풀어져버린다거나 하는 건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난 부분이야. 우린 늘 안전띠를 꽉 매지만, 그 안전띠가 스르륵 풀린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신은 전지전능하다기보단 매우 꼼꼼한 성격이로군요.”

“최소한 내가 생각하는 건 그렇단 말일세. 신에게 기적을 비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런 건 제 손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작자들이나 바라는 것이지. 신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우린 그에게 기댈 순 있을망정 가야 할 길을 대신 가 달라고 할 순 없지.”

뤼르 씨는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마무리짓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뱃갑을 위아래로 흔들어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문 후, 다시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들고 상아탑의 벽에 그었다. 불이 확 붙자 그것으로 담뱃불을 붙이더니 훅 불어 불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 손만으로 한 그 과정은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맛있다는 듯 쭈욱 빨고 연기를 내뱉더니 문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먼. 담배를 피우나? 위험해서 이쪽에선 줄 수 없는걸.”

“괜찮습니다. 담배는 피우지 않습니다.”

정중히 사양한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뤼르 씨는 말하면서도 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선 지금 일을 해야 했다.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걸레질을 하고, 그것을 마른 걸레로 한 번 더 닦는다. 혹 저 마법사들이 탑 주위를 날아다니며 우리의 청소를 체크할지도 모르므로 정성을 다한다. 그래도 이 속도라면 해지기 전까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뤼르 씨는 담배를 다 태우고 거리낌없이 꽁초를 던진 후 일을 재개했다. 과연 전문가답게 순식간에 내가 한 부분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본심은 일보단 대화인 듯싶다. 아까의 나와 마찬가지로, 이번엔 그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넨 회당에 나가본 적 있나? 아니, 미리 말하지만 포교하는 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저런 류의 질문은 질색이다.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내 심장에 꾸역꾸역 고여 있다. 한때 내 모든 걸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던 신의 구역. 빛이 머무는 성스러운 곳. 장엄한 노래. 웃음. 그것들을 정말 믿었던 때가 있었다. 무거워지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난 되도록 간단하게 말했다.

“예. 예전에는 꽤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역시 그렇군. 난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시는 분을 믿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자네는 뭐가 맞지 않아 그만두었나?”

잠깐 아저씨의 표정을 살펴보니 정말 포교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일 년 전인가 다짜고짜 내게 설교를 시작한 거리의 포교자와 한바탕 싸우고, 끝내 ‘이단자 녀석! 심판의 때에 암흑으로 굴러떨어질 녀석!’ 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게 갑자기 생각난다. 그때 내가 지었던 비웃음을 이 자리에서 다시 지을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난 무난한 대답을 꺼냈다.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곳에 갈 때마다 신을 섬기려는 건지, 사람을 섬기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엘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어 몇 개의 종교가 있지만, 공식적인 국교는 하늘의 신 오데사를 모시는 오데사 교이다. 종단에서는 자신들이야말로 모든 신들의 정점에 선다고 호기롭게 주장하고 있고, 엘드는 신에게 왕위를 인정받아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이를 국교로 선택했다. 내가 예전에 다녔던 곳도 이곳이었다.

사람들이 막연히 신의 존재에 대해 깨달아갈 무렵, 하늘의 신 오데사가 현신해 사랑과 봉사를 전파하며 사람들의 죄악을 거두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 결국 죽였고, 다행히 그는 신이라서 시체를 남기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 나중에야 그가 한 행적들을 토대로 그가 인류의 죄를 거두어간 구세주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으니 언젠가 다시 올 구세주를 위해 살아야 하리라는 게 주된 교리이다. 그 실천 방법은 이웃 사랑이나 자선, 효도 등 반박할 여지가 없는 인류보편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문제였다. 경전 구석에 몇 줄 나온 희사 항목을 예배시간의 시작과 끝마다 반복해서 강조하고, 말씀을 섬기는 것 못지않게 세속의 재물을 신께 바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세속의 재물을 자신들에게 바치면 자신들이 알아서 하늘에 제물로 바치겠다는 얄팍한 수법이었다. 그래봤자 거두어진 재물은 회당 뒤 하늘이 보이는 마당에 설치된 제단 위에 잠시 머물렀다 창고로 직행하기 마련이었다. 즉, 고스란히 종단의 손에 넘어간다는 소리였다. 매번 신도들 중 가장 많은 액수를 내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하고, 액수가 빈약한 자들을 은근히 거론하며 보다 나은 성의를 보일 것을 예배의 마무리로 삼는 그 뻔한 작태를 왜 난 이제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다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이 죄를 걸머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내가 좀 더 말하기를 기다렸던 듯, 아저씨는 잠깐 간격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동감이네. 나도 그곳과는 맞지 않아. 신이란 가장 낮은 곳이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법일세. 가장 귀한 존재이자 가장 비천한 존재 옆에 있는 분이지. 이건 그냥 내 의견이네만, 회당만 높게 지어놓고 그곳을 신의 집이라 떠드는 작자들은 신을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 도구로 여기는 자들일 뿐이야. 입으로야 뭔 말을 못하겠나? 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우린 신에게 모든 걸 바쳐야 한다? 하 - 우스운 말이지. 우리가 신의 대리인이란 그 작자들에게 모든 걸 바치면, 그들은 그걸 신에게 바치는 대신 자신들의 배불리기에 돌려 버리니까.”

이건 오히려 무신론자인 내가 할 소리였다. 하지만 뤼르 씨가 말하니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20년간이나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자연히 지상의 변질된 종교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게 될 수밖에. 모든 종교는 신에게로 이르는 디딤돌이란 멋진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뤼르 씨는 종교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신의 모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탑도 마찬가지라네. 마법사들은 진리에 도달하려는 염원을 담아 이처럼 높은 탑을 세웠다고 한다네. 하지만 아무리 높이 쌓더라도 탑은 탑일 뿐, 하늘로 연결되는 사다리는 될 수 없어. 회당이든 탑이든 간에 가장 높은 존재가 될 수 없으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그걸 깨닫는 놈은 좀체 없다니까. 하긴, 이런 녀석들 덕에 내 밥벌이도 궁하진 않지만.”

마지막 말을 농담처럼 픽 꺼낸 뤼르 씨는 다시 벽을 바라보고 일을 재개했다. 내가 보기엔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후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나쁘지 않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존경할 만하다. ‘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증오한다. 신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라고 유명한 장군이 말한 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역시 신념을 가져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은 문제가 될 만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역사를 바꿀 정도의 힘을 스스로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묘한 카타르시스에 잠긴 채 다시 발을 내딛었다. 아까 봐 두었던 작은 굴뚝 위에 발을 얹고 살짝 눌렀다. 시험삼아 한 것이 아니라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고, 그래서 발이 미끄러지면서 내 몸이 기우뚱 기울어짐을 느꼈을 때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바로 당황스러움이었다. 그 순간, 척추 끝에서부터 찌르르한 감각이 올라와 순식간에 머리 전체에 퍼졌다. 그 느낌은 마치 사정이라도 하는 듯한, 그렇지만 그만큼의 서늘함을 동반하는 짜릿함이었다.

“아?”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던 것 같지만, 그것은 목구멍을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추락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닦은 하얀 벽들과 이제부터 닦아야 할 지저분한 벽들이 마치 교차하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엄청난 강풍이 내 전신을 습격하고, 머리를 지배했던 그 짜릿함은 이제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잔상을 남기며 스쳐지나간다.


뤼르 씨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으로 보인다.


허리에 묶인 밧줄이 위태롭게 펄럭인다.


갑자기 어려진 내 모습. 미친 개에게 쫓겨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다. 이건 내 기억일까? 다음 순간, 난 오줌을 싸고 집 밖에서 울고 있었다. 아니, 산산조각난 시체의 팔 부분을 조립하며 구역질하고 있다. 왜 난 이런 일까지 맡아야 할 정도로 궁핍해졌지?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대답해준다. ‘넌 죄를 지었잖아.’ 아아, 맞아. 내게는 죄가 있었지. 그렇다면, 내 몸이 박살날 때 내 안의 죄도 산산조각이 나는 걸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을 깨닫기 전, 이미 난 기절하고 있었다.


찰싹, 찰싹.
뭔가를 때리는 소리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크게 들릴까?
문득 묘한 아픔이 뺨에 느껴진다.

“이봐! 정신 좀 차려!”

부옇던 시야가 서서히 환해지면서, 거꾸로 서 있는 뤼르 씨의 모습이 보인다. 왜 그가 거꾸로 서 있지? 그것을 생각해보려 할 때 허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직접 신음을 내지 않았지만, 그 고통에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다행이군. 일찍 정신을 차려서.”

“…저, 살아 있나요?”

“일단은 그렇다네.”

“그런데 뤼르 씨가 왜 떠 있어요?”

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아까의 구명줄이 내 몸을 어떻게 지탱해 준 모양이다. 허리의 통증은 줄이 완전히 팽팽해졌을 때의 반동으로 생긴 모양이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어떻게 거꾸로 매달린 내 앞에 뤼르 씨가 둥둥 떠 있단 말인가. 내 눈은 그의 몸을 더듬대다 묘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거 뭡니까?”

내 눈이 향한 곳을 본 뤼르 씨는 잠깐 당황해했다. 그는 자신이 양 손에 들고 있는, 반으로 찢어진 양피지 비슷한 물건을 흔들어보이며 물었다.

“이걸 모르나? 자네, ​스​크​롤​(​S​c​r​o​l​l​)​ 처음 보나?"

"예. 얘기만 들었지……“

“이건 주문을 담은 종이일세. 찢으면 안에 있는 주문이 방출되는 거지. 여기엔 내가 비상용으로 비행주문을 담아두었는데, 이런 데서 쓸 줄 몰랐군. 사람 목숨 구하는 데 썼으니 다행이지만.”

“…정말, 아저씬 철저한 사람이군요. 그 정도라면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무슨 소릴.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나. 오늘의 내 기도문은 ‘혹시 사고가 생기더라도 제가 스크롤을 쓸 정도의 의식은 ​남​겨​주​십​시​오​’​였​다​네​.​ 추락하면 누구나 의식을 잃기 마련이니까, 이런 게 있어도 쓸모없을 거 아닌가.”

“그도 그렇군요.”

반론을 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긍정했을 때, 갑자기 얼굴에 물이 떨어졌다. 빗방울은 절대 아니었다. 뤼르 씨의 뒤로 펼쳐진 하늘은 얄미울 정도로 새파랬으니까. 묘하게 따뜻한 그것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턱을 타고 그대로 입 안에 들어왔다. 찝찔한 맛과 익숙한 향.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자자, 정신을 차렸으니 일단 탑 안에 들어가 밧줄을 풀자고. 자네 옷도 좀 갈아입어야겠고.”

뤼르 씨는 웃음을 애써 참는지 얼굴을 씰룩이며 말했을 때 난 울고 싶어졌다.
맙소사, 정말 싸 버리다니.


일을 시작할 때 머리 위에서 붉은 빛을 뽐내던 태양이 산너머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퇴장할 때쯤 일은 종료되었다. 뤼르 씨는 나를 탑 안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고 무서운 속도로 일을 해 나갔고, 급기야 내 몫까지 마무리지었다. 아까부터 계속 한 말이지만 이 사람은 정말 전문가다웠다. 역시 아까의 속도는 날 생각해서 쉬엄쉬엄 한 듯하다.

일당을 받고 길드를 나서자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에게서 도망친 빛이 상아탑 안으로 숨었는지, 밖에서 바라보는 탑의 모습은 마치 빛의 기둥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내인 씨의 말에 따르면 저 빛은 반영구 램프 - 불을 켜고 끌 필요 없이 광원마법이 걸려있어 항상 빛나는 무지막지하게 비싼 물건 - 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얼마짜리라는 거야? 그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밤에도 저렇게 번쩍번쩍하면 잠을 잘 수가 없지 않을까? 어쩐지 물어보기 민망한 질문들을 꿀꺽 삼킨 후 난 뤼르 씨에게 인사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릴께요.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뭘. 언젠가 자네가 날 도울 때도 있을지 누가 아나? 대신 스크롤 비용은 받아야겠네.”

뤼르 씨가 웃으며 제시한 스크롤의 값은 내 입에서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다행히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안내인 씨가 특별 서비스로 스크롤을 할인판매해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 오늘의 일당 전부를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다. 난 두 조각 난 스크롤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은 후 반토막난 돈을 세며 한숨을 쉬었다.
기분 좋게 스크롤을 챙기고 유유히 걸어가던 뤼르 씨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툭 던졌다.

“자네, 오늘 정말 운 좋게 목숨을 구한 걸세.”

“예?”

“자네가 구명줄을 달았던 난간 말일세. 추락의 충격으로 거의 우그러져 있더군. 조금만 더 충격이 갔다면 부러졌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내가 스크롤을 쓸 틈도 없었을 거야.”

“……”

아아,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구나.
뤼르 씨는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더니 옆으로 걸어와 어깨를 툭 쳤다.

“어떤가. 내가 왜 신에게 기도하는지 이제 알 것 같나? 자넬 구해준 건 나 이전에 신의 뜻이었네. 신께서 자네를 더 살려두기로 마음먹었기에 그 난간을 그대로 유지시켜준 걸세.”

아아, 또 그 소리인가. 이젠 반론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한순간, 오늘부터 신이란 존재를 믿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간이 부서지지 않은 것과 뤼르 씨가 스크롤을 가지고 있던 것, 내가 요즘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먹어 몸무게가 가벼워진 것 등이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래, 그건 모두 내 뜻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 치자. 하지만 내 돈이 떨어진 것, 국왕 폐하가 근래들어 무도회와 정책홍보와 기타등등을 하시느라 바쁘신 것, 랑테 씨가 이 일을 소개해 준 것 모두가 신의 뜻이라면? 거기까지 파고들자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하지만 결국 난 신을 인정할 수 없다. 그 신의 부속품처럼 미리 예정된 일만 하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진 않겠다. 난 내 의지를 가지고 있고, 거대한 역사 속에서 무력하나마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까지의 내 모든 행동이 계획된 것이었고, 내가 거기 따른 것에 불과하다면 나란 존재는 그 순간 소멸하는 것이다. 난 그러한 내 생각을 얘기하려 했다. 그 때 이유없이 머릿속에 아까 떠올랐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한 번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순식간에 아까의 기억이 우르르 되살아났다. 다시 보고 싶지 않던 모습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간 경험은 탑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더욱 아찔했다. ‘휴드, 난……’ 그녀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목소리는 좀 더 깊은 곳에 감춰둔 기억을 끄집어낼 것을 요구한다. 마법 같은 초승달 아래, 뜰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줄, 그리고…… 갑자기 욕지기가 밀려나온다. 난 급히 담벼락으로 뛰어들어가 토하기 시작했다. 뤼르 씨가 급히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이렇게 눈물겹게 고마울 줄은 몰랐다. 만약 나 혼자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토하는 걸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힘겹게 입을 닦은 후 겨우 말했다.

“뤼르 씨. 지금까지 생각해봤는데요.”

난 뤼르 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지금까지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신의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이런 일 두 번 다시 못할 것 같아요.”

뤼르 씨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을 대로 하게나.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사는 게 사람 아니겠나.”

다행히 안내인 씨는 내게 토한 자리를 정리하라고 말하는 대신 수위에게 치울 것을 부탁하고 들어갔다. 수위는 투덜거리며 삽을 들고 걸어왔고, 괜히 미안해진 나는 서둘러 길드를 나왔다.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상아탑의 빛이 사라지고 석양이 깔린 거리가 펼쳐졌다. 여지껏 인위적인 빛 속에 있었던 내게는 오히려 하늘도 땅도 취한 것처럼 불그스름해진 이 편이 더 마법 같았다. 거리에는 뛰어노는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와 뤼르 씨는 그들 틈에 섞여가기 위해 이별했다.

“그럼 다음에 또 인연이 생기면 보기로 하세.”

“예. 언제 또 뵈었으면 좋겠네요.”

그는 손을 흔들고 작업도구를 챙겨 터벅터벅 걸어갔다. 석양빛에 함께 물들어 보랏빛으로 비치는 그 뒷모습에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있었다. 바닥에 긴 그림자가 늘어지고, 그것은 해가 넘어가면서 차츰 옅어져갔다. 마치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무더기의 아찔한 향기가 그림자를 지워나가는 것 같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그림자는 차츰 심하게 흔들거렸고, 뤼르 씨의 모습이 흐릿해질 무렵에는 혼자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는 멀었지만, 나를 향해 손을 드는 저 모습을 못 볼 리 없다. 난 무심코 내 그림자를 향해 뒤돌아섰고, 내 그림자 또한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난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후, 피곤하고 지친 내 몸을 누일 내 방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며칠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 동안 걸어 간신히 방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서서히 감기는 눈을 깜빡이면서, 내가 이대로 쓰러져 잤다가 일어났을 때 오늘 떠올랐던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기를 나 자신에게 기원했다. 
 
소시민 휴드의 이야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도 꽤 오래 전에 만들어졌네요.
옛날 교회를 다닐 무렵 종탑에 장식을 하러 올라간 적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을 살려 보았답니다.
등이 허전한 느낌이 얼마나 오싹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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