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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6화


어느새 그의 말투는 고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난 눈을 부릅뜨며 그가 교수님께 계속 신성력을 시전하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랐다. 사도의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종단은 그 석관이 발굴된 사실을 조금 늦게 접했어. 정확히는 네가 그것을 손에 넣은 다음에야 조사를 시작했지. 네 평소 연구와 물건의 상관관계를 깨달았을 땐 물건이 상아탑에 넘어간 뒤였고, 뒤늦게 사람을 파견했을 땐 악마가 깨어나 상아탑을 나선 뒤였지. 그 머저리 마법사들은 눈뜨고 악마를 놓쳐버렸고.”

“그 소녀는 악마가 아니야!”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사도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벽을 보는 채로 다시 외쳤다. 흰 벽 너머로 살짝 비치는 거무스름한 더러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기랄!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내가 봤어요. 그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우리처럼 따뜻한 피가 흘렀던 사람입니다. 가사상태에 빠져있다 마법으로 깨어난, 그저 오천 년을 거슬러왔을 뿐인 사람이라구요! 무슨 자격으로 그 불쌍한 소녀를 악마라 규정하는 겁니까!”

“오데사가 그녀를 악마로 정했다. 여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흥! 당신네들의 신 따위! 당신들만의 잣대로 섬기는 신이, 그를 섬기지 않는 자에 대해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애당초 악마란 게 있기나 한 겁니까? 아무리 신에게 기도해도 응답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악마 아닙니까!”

갑자기 나를 잡고 있던 자들이 내 몸을 휙 돌렸다. 난 몸을 가누며 다시 마주치게 된 사도를 노려보았다. 사도는 힘없이 의자에 늘어져 있는 교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브릭 교수의 제자답게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 전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이미 이런 사상이라.”

“그렇단 말이지. 자네에겐 그릇된 사상을 고칠 기회를 줘야 하겠군.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쁘니, 그 이야긴 천천히 나누도록 하세. 어제 자네는 석관을 갖다준 것뿐만 아니라 악마를 직접 보기까지 한 건가?”

이런, 실수다. 교수님은 단순히 과거의 연구내용이 거슬리는 것이지만, 내가 소녀를 본 데다 실험에까지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난 문답무용으로 악마 소환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오데사의 귀 앞에서 과연 얼버무림이 통할까? 눈앞의 교수님을 생각하니 차마 모험은 할 수 없었다. 난 필요한 만큼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네. 마법사 씨가 그녀를 소생시키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자네의 이름은?”

“휴드.”

“그 마법사의 이름은?”

“게펜타이너.”

“실험은 어디서 이루어졌지?”

“그의 연구실.”

묻지 않는 내용은 철저히 함구하는 방식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촘촘한 질문공세로 날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들이 조사하면 다 나올 내용이라 난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사도는 그녀의 용모와 특징 등을 시시콜콜할 정도로 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에 대한 심문은 일단 끝났습니다.”

이제 와서 가식적인 존댓말로 돌아간 오데사의 귀는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를 구속하던 자들이 나를 놓아준 후 밖으로 뛰어가고, 두 명이 남아 사도의 옆에 섰다. 난 사도와 교수님 사이로 뛰어가 그의 시선에서 교수님을 지켰다. 사도는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푸른 빛이 맺혀 있었다.

“그걸로 뭘 할 속셈이죠?”

“얘기가 끝났으니 마무리를 할 셈이라네, 휴드 군.” 

“……하지 마시죠. 아는 것 다 대답해줬으니 이걸로 된 거 아닙니까?”

“내가 자네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가? 날 막으려면 날 설득해보게나.”

그는 손을 들어올린 채 다시 웃었다. 저 웃는 표정은 감정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 무의식적에 기억하고 있는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신도들을 축복하는 표정이, 신에게 거슬리는 무리를 처단할 때도 똑같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난 어떻게든 할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생각은 마음 속에서 점점 헝클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은 내가 하겠소, 오데사의 귀.”

정작 대답을 한 것은 내 뒤에 있던 교수님이었다. 신성력으로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아까의 꼬장꼬장한 기세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교수님은 나직하게 신의 사도에게 말했다.

“종단이 왜 그 소녀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있소. 일단 그 소녀에게 내재되었다는 악에 대해선 잘 모르겠소. 좀 더 조사하고, 그녀와 대화해 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지요. 당신은, 종단은 그 소녀가 구세주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것. 즉, 죽음에서 깨어나 부활했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게지요.”

저게 교수님의 연구내용이었던가. 난 나직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들리는 교수님의 말에 전율했다. 학교에선 단순히 청동기 시대의 생활에 대해서만 강의했던 교수님이, 엘드의 국교인 오데사 교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 말이 먹혀들어갔는지 오데사의 귀는 처음으로 그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이……이 불경한! 집어치우지 못해! 신의 사도 앞에서 무슨 망발인가!”

“오데사의 현신인 구세주는 죽음을 초월했다고 알려져 있소. 그건 신의 사도에게도 불가능한 일. 오직 오데사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소. 그런데 이 소녀가 오천 년을 뛰어넘어 되살아났다고 하면, 종단은 과연 이를 널리 알릴까요? 그보다는 조용히 덮어두는 게 논란의 여지를 없애는 좋은 방법이겠지요.”

“헛소리. 우린 단지 악이 깨어났다는 신탁에 따라 행동할 뿐! 당신도 알다시피, 그 소녀에게 내재된 어둠의 크기는 엄청나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엘드에 크나큰 저주가 내릴 수도 있소. 우린 그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뿐이오. 뿐만 아니라, 당신과 그 게펜타이너란 작자에겐 일이 처리된 후 분명하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니 각오하시지!”

“각오야 처음부터 하고 있으니, 당신들의 기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 증거를 없애려는 행동이나 당장 그만두시오!”

교수님은 아까까지와는 달리 사도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지만, 교수님의 모습은 일어나 있는 사도보다 거대하게 느껴졌다. 신의 권위를 무기로 삼던 사도는 더욱 푸르게 빛나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지만 그것을 내리치지는 않았다. 그 부들거리는 손에 맺혀 있는 빛은 잠시 후 사그라들었다.

“당신의 제자와도 할 말이 많지만, 당신과는 나중에 정말 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지금은 당신과 말싸움을 하느니 그 소녀를 잡으러 가는 게 효율적일 테니까. 당신과의 대화는 이런 협소한 곳이 아니라 종단 본부에서 하겠소. 일이 끝나는 대로 종단 이단 심문 회의를 개최할 생각이니, 오데사의 일곱 사도를 모두 친견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게요.”

교수님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도는 더 말하지 않고 소맷자락을 떨치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 남자는 사도를 문까지 배웅한 후 그대로 나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얼굴만 내밀 수 있는 창문 두어 개는 이곳을 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거나 본부로 끌고 가지 않은 건 차라리 고마운 일이다.
회당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갑자기 이곳이 넓게 느껴진다. 여름이니 이곳에서 하루이틀 보내는 건 별 무리 없을 것이다. 난 일단 교수님을 부축해 긴 의자에 눕히고 술을 다시 꺼냈다. 교수님은 몸을 일으켜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드러누웠다.

“아까 사도에게 당하신 건 어떠세요? 좀 괜찮으신가요?”

“그래. 난 괜찮아. 자네는 어떤가?”

“저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일단 좀 쉬시죠. 아침부터 무리하셨으니, 이참에 눈 좀 붙이세요.”

“……그럴까…… 확실히 피곤하긴 하구먼. 그럼 난 잠시 자겠네. 무슨 일 있으면 깨우게.”

교수님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폐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피시시 하는 힘빠지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내뱉어졌다. 사실 난 교수님이 사도와의 다툼으로 피곤해서 주무신다기보다는 술 두 모금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싶지만, 어느 쪽이든 교수님을 쉬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난? 의외로 별로 지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기 때문일까. 사도에게 통렬한 한 방을 먹인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면, 여기까지 끌려온 보람이 좀 생기는 것 같다. 그렇다고 미래의 암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생각하기 싫다.

배가 고파 가방에서 봉투에 든 빵을 꺼냈다. 기억을 되짚어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둔 빵을 집어 우물거리다 문득 가방 안의 책이 생각났다. 교수님이 쓴 논문이라고 했지? 난 그것을 꺼내 보았다. 표지도 없이 대충 제본만 되어있는 상태이지만, 이건 무려 원본이었다. 갑자기 황송한 마음이 일어 조심스럽게 몇 장 넘겨 보았다. 서문은 교수님이 찢어내 버렸는지 흔적만 남아 있었고, 본문으로 들어가자 청동기 시대의 여러 풍습들과 현재 종교와의 연관성에 대해 나와 있었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에는 검은 줄이, 교수님 개인의 의견에는 빨간 줄이 쳐져 있어 쉽게 분간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의견을 따르자면 현 종교는 인간이 탄생한 이후부터 쭉 존재해왔던 오데사에 대한 믿음이 구세주의 등장으로 체계화하여 오데사 교로 탄생하였다는 종단의 기원설을 처음부터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 말미에는 제본되지 않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석관의 소녀에 대한 몇 가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아마 이 메모가 구체화하는 날이면 교수님은 정말 오데사 교의 본부로 직행할지도 모른다. 엘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지만, 오데사 교는 엘드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교수님께 무슨 짓을 해도 고발당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가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논문을 다 읽고 가방에 넣은 후 책의 내용을 다시 곰씹어볼 때 교수님이 눈을 떴다.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아닐세. 일어나겠네.”

교수님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곧게 앉았다. 누런 얼굴에 그래도 생기가 좀 도는 게 보여 다행이다. 이제부터 교수님과 둘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부로 끌려가길 손놓고 기다릴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맘에 안 드는 사실은 내 경멸의 대상인 오데사 교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신의 수족들의 뜻이라니. 내 불안과 초조가 전해졌는지 교수님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권했다. 난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거절했다.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인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꼭꼭 닫힌 창문을 빠끔히 열고 연기를 내뿜었다. 비흡연자인 나를 배려한 것일까. 후우우, 소리는 마치 교수님의 긴 한숨 같았다.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는 다시 파이프를 빨며 말했다.
 
“휴드 군. 자네 나이가 올해 몇인가??”

“생일 지나면 스물넷이 됩니다.”

“세상을 생각할 순 있어도 몸소 겪어본 불합리함은 많지 않은 나이로군. 나와는 반대야. 난 이제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두었다네. 그저 겪고, 또 겪으며 어떻게든 버틸 뿐이지.”

교수님은 갑자기 창문을 확 열었다. 경첩이 고장났는지 문은 심하게 삐그덕대며 열렸다.  마침 공기도 좀 답답했던 터라 난 반대편 창을 열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교수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곳에는 이 창문만 열려있네. 이곳을 통해 안과 밖의 공기가 통하지. 자네가 그 문을 열면 공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이곳의 답답한 공기는 날아갈 거야. 그리고…… 우리가 밖에 노출되는 게 두려워 두 문 모두 닫아 버리면 여기는 언제까지고 답답한 상태 그대로일 뿐일세. 이러고 있으면 발각되지 않을 거란 헛된 희망을 품으며 먼지섞인 공기를 마셔야 하는 거지.”

난 창틀에 손을 댄 채 그대로 멈췄다. 교수님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지금 상황에 대한 비유?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 옆에 자신의 손을 짚었다. 힘줄만 톡 도드라진 앙상한 손이었다.

“두려움을 떨쳐야 하네. 우리는 닫는 자가 되어선 안 돼. 그 문을 여는 것 때문에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세계 전체가 손해를 입더라도 물러서선 안 되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을 뿐이고, 진실이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왜곡될 뿐이네. 우리는 진실을 편한 대로 수정해선 안 되네. 오직 있는 그대로를 캐내야 하지. 그러한 작업을 통해 남는 것이 상처뿐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해.”

교수님은 단숨에 말하더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두운 집 안에 햇빛이 들어오며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를 비추었다. 제법 상쾌한 아침바람이 실내를 채우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햇빛에 비쳐지는 교수님의 얼굴은 마치 자살하기 위해 태양을 바라보는 흡혈귀처럼 비장함이 넘치고 있었다.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우린, 물러설 수 없네.”

‘우리’라는 말의 울림이 듣기 좋았다. 드디어 한 패가 된 기념으로, 난 지금 상황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교수님의 결의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애시당초 종단이 그 소녀를 악마로 규정한 시점에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따지기라도 해야 합니까?”

“시간과 장소가 충분하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우리는 어떻게든 종단보다 먼저 소녀를 찾아내야 하네.”

“찾아내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보호해야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목소리는 교수님의 것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당황한 눈치로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다 창문 너머로 목을 길게 뺐다. 창문은 작은 편이라서 교수님이 앞에 서자 거의 가려졌다. 벽 너머에서 교수님의 ‘아!’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누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교수님이 저렇게 가리고 있으니 누군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음, 음.’하며 누군가와 간단히 대화한 교수님은 창에서 목을 빼자마자 나를 붙잡고 구석으로 달려갔다. 뭐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회당의 벽이 퍽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흙먼지가 거의 나지 않아서 마치 케익을 칼로 자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문 형태의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 몇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선두에 선 건장한 남자는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게펜타이너 씨! 무사하셨군요!”

“종단 놈들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사하네.”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소녀에게 뭔가를 당했던 것 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얼굴이었다. 게펜타이너 씨는 굳은 표정으로 나와 악수한 뒤 교수님께 목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릭 교수님. 좀 더 일찍 구해드렸어야 했겠지만 저희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습니다.”

“아니, 아니요. 휴드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게펜타이너 님. 저희야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밖의 감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잠시 재웠습니다. 의외로 경비가 허술하더군요.”

그들이 무작정 쳐들어온 것 같아 나는 아까까지 오데사의 귀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칫했으면 상아탑과 종단의 전면전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들이 늦게 도착한 것이 오히려 행운이 되었다. 교수님이 악마를 소환한 죄로 자신과 그를 이단심문할 것 같다고 하자 마법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 소녀는 악마가 아닙니다. 꽤 특이한 점이 있긴 하지만, 기본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오천 년 전의 생활상을 입증해줄 수 있는 귀중한 실험소재이지요. 신이니 악마니 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종단 녀석들이야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한 것뿐이지요. 이제 와서 제가 종단에 가 항변한다 해도, 악마에게 씌웠다는 소리 이상을 듣지 못할 겁니다.”

실험소재란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저 사람의 말투가 원래 저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게펜타이너 씨는 그렇게 말하고 느닷없이 자신과 같이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브릭 교수님. 게일, 마커, 라드론입니다. 나와 같이 상아탑에 있는 마법사들입니다. 중력을 연구하는 친구들인데, 그 덕분에 각종 생물의 포박에 능합니다.”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나 짧은 턱수염을 금색으로 염색한 사람은 보자마자 마법사란 걸 알 수 있었다.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분위기가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수위 아저씨의 모습까지 보인 건 의외였다. 어딜 봐도 하숙집 옆방 아저씨처럼 평범하게 보이는데, 마법사라니. 상아탑의 수위는 과연 대단하다는 걸까.

그런데 왜 게펜타이너 씨는 굳이 일행을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애당초 그의 연구에는 동료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그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이익을 감수하며 그를 따라나선 저들의 공통점은? 이익, 사정, 명령이라는 조건 중 하나겠지. 난 여러 갈래의 예측 중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모두 소녀와 접촉했던 인물인가요?”

“정답. 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저기 마커가 제일 나중에. 덕분에 상아탑에서 그 소녀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렇게 왔지. 성공할 경우 꽤 짭짤한 보수를 받을 수도 있고 말이야.”

……셋 다 정답이란다.
수위아저씨, 즉 마커 씨는 이름을 불리자 손가락 하나를 들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다른 손을 폈다. 그러자 밝은 빛이 천장에 비치며 소녀의 영상이 떠올랐다. 교수님의 설명과는 달리 아직 관 속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게펜타이너가 실험실 안에 비치했던 수정구에 비쳤던 영상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했던 실험을 재검토하곤 하는데, 이번엔 그 덕분에 소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게펜타이너나 저희나 이상하게 그녀에게 당하고 나니 당할 때의 기억이 사라지더군요. 아마 종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상아탑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단순빈혈 사고로 판단하고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그걸 막아준 이 영상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영상만으로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배우고 싶은 마법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교수님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인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로 영상은 사실적이었다. 만약 저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있다면 없는 돈을 쥐어짜서라도 찾아다니며 볼 텐데.

영상 안에서 게펜타이너 씨가 주문을 외우며 그녀의 몸에 있는 붕대의 매듭을 풀었다. 그 순간 붕대 위의 문자들이 검은 빛을 발산하며 제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마법사는 놀라며 급히 다른 주문을 외우지만 검은 빛은 그 주문을 튕겨낸다. 뱀처럼 서서히, 은밀하게 소녀의 몸에서 벗겨지는 붕대가 왠지 에로틱하다. 소녀의 팔다리를 얽매던 붕대가 느슨해지자 소녀는 기지개를 펴듯 몸을 쭉 편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한층 강해지며 소녀와 붕대 전체를 감싼다. 잠시 동안 소녀가 있던 자리를 어둠이 지배한다. 마법사가 성물의 무더기로 뛰어가 닥치는 대로 한 아름 안고 달려오는 사이, 어둠이 서서히 걷힌다. 붕대로 온몸이 얽매여 있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붕대가 옷처럼 팔다리를 감싸고 있다. 자세히 보니 허리 아래로 늘어뜨려진 붕대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치마처럼 둥글게 돌아갔다. 붕대만으로 저런 맵시를 연출하다니, 패션 센스가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소녀는 천천히 관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팔다리를 가볍게 움직여 보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마법사는 성물을 내밀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한 손을 내밀어 마법사의 가슴에 갖다댄다. 순간 마법사는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진다.

마커 씨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영상이 끝났다. 나와 교수님은 게펜타이너 씨를 바라보며 무언의 항의를 했다. 결국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것은 그가 독단으로 그녀의 봉인에 손댔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말했다.

“일단 밝혀둘 게 있군. 저 봉인을 푼 건 제가 맞습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봉인을 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난리가 난 것이잖소!”

교수님이 벌컥 화를 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게펜타이너 씨는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표시를 했다. 교수님은 그를 노려보며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봉인을 푸는 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제겐 저 소녀를 깨운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언데드였다면 사흘 후 근원으로 돌아가 잠들겠지만, 소녀는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네에겐 봉인에 쓰인 기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겠지. 아닌가?”

게일 씨가 짧은 턱수염을 만지며 묻자 게펜타이너 씨는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들이라 그의 행동 뒤에 있는 내막을 금방 알아챈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게펜타이너 씨를 추궁하는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긴. 자네 심정 이해하네. 그런 귀중한 연구재료가 있으면 잠시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상아탑에 있는 그 녀석이 한심하군. 이 소녀만 있으면 시간축을 늘였다 줄이는 기술을 대폭 보완할 수 있을 텐데.”

“그 쪽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물체에 대한 영구보존주문이 실현될지도 모르지. 몇천 년을 뛰어넘을 수 있다니, 이거 나도 한 번 당해보고 싶어질 정도인걸? 오천 년 후의 세계는 얼마나 발달해 있을까?”

마법사들은 벙쪄 있는 우리를 놔두고 느닷없이 게펜타이너 씨가 부러워 죽겠다는 식의 전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봉인마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의 원형이라는 둥, 붕대의 샘플을 진작 채취해놓을걸 하는 푸념 등이 잇따랐다. 도저히 끼어들 수 없어 멍하니 듣고 있었지만 금방 인내의 한계가 왔다.

“그만! 지금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들 하시는 거에요? 소녀를 찾아서 보호한다더니, 소녀를 잡아서 해부라도 할 셈인가요?”

“보호야 하지. 해부는 그 아이를 연구하다 죽으면 그 때 가서.”

마커 씨가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난 내가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자마자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작자들에게 잠시나마 공감했다는 게 경멸스럽다. 이 현재밖에 모르는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 안타깝게 몸부림치던 소녀의 갈색 눈동자가 떠오른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분과는 달리 몸은 앞으로 튕겨져 나가려 했다. 어느새 꽉 쥐어진 주먹을 의식할 순간도 없이 휘두르려는 순간 왼쪽 팔에 강한 압박이 들어왔다. 교수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팔에 파고들어 있었다. 너무 꽉 잡아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였다.

“휴드.”

교수님은 속삭이듯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난 나를, 정확히는 교수님이 쥐고 있는 내 팔을 보았다. 교수님이 있는 힘껏 쥐었을 그 악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형편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이제 됐습니다. 정신이 돌아오네요.”

“그래. 갑자기 현기증이 났나 보구나.”

“네. 갑자기 말이죠.”

난 비틀거리며 교수님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난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 신선한 바람을 쐬고 싶다. 난 뒤로 고개를 젖혀 좀 편한 자세를 취하며 교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할 테니 얘기를 간단하게 합시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두 가지요. 그 소녀가 무슨 수법으로 당신들을 쓰러뜨린 건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교수님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 그러니까 단숨에 상황을 정리해버리는 질문을 했다. 그 말에 마법사들은 난상토론을 멈추고 쑥덕거렸다. 소녀에게 당했던 각자의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쑥덕거림이 끝나자 게펜타이너 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단숨에 쓰러져 버렸으니까요. 손이 닿고, 그리고 정신차려보니 몇 시간 후. 일어났을 때 몸이 굉장히 개운했던 걸 보니 체력 흡수라든가 하는 주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몇 차례 더 당해보든지 해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확실한 건 모르겠다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려주시오.”

교수님은 썩 내켜하지 않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무엇을 시킬지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시킬지 예상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게펜타이너 씨의 다음 말로 증명되었다.

“이미 알고 있으실 텐데요. 아니, 모르고 계신 사실도 있긴 하군요. 그 소녀는 상아탑의 최상층에 있는 천리안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 붕대의 기운 때문인 것 같은데, 저희가 그렇다면 종단 쪽에서도 신성력으로 찾아내긴 어려울 겁니다. 신탁이 내렸다고 해도 그건 신탁일 뿐, 그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하지만 아직 남은 수단이 있지요.”

마법사와 교수님의 시선이 부딪쳤다. 둘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게펜타이너 씨의 얼굴은 평상시와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상당히 강압적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구해줬으니 너희도 등가교환을 해야 할 것이다, 라는 마법사다운 논리였다. 어차피 이들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지금은 이들의 기대에 따르는 것이 낫다. 난 생각을 굳히고 교수님 앞에 서서 눈싸움을 막았다. 둘은 제3자의 난입에 의해 결투를 중단당한 검사들처럼 뒤로 물러났다.

“휴드 군, 그럼 부탁하겠네. 자네와 자네 스승님의 지식이라면 그 소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네, 네. 저희도 그 편이 낫겠네요. 종단에서 얼씨구나 하고 소녀를 잡아 태워버리는 걸 보는 것보단 말이죠.
하지만 저흰 저희대로 행동하겠습니다. 같이 행동하는 건 사양이에요.”

“그래. 그럼 우리는 그때까지 따로 소녀를 찾아보겠네. 상아탑에는 당분간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니. 소녀를 발견하면 바로 연락주게. 나처럼 당하지 말고.”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연락은 어떻게 하죠?”

“그 손수건을 잡고 우리에게 말하면 되네.”

뜬금없이 손수건? 이라 생각했던 난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장소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조차 까먹게 되기 전에 난 교수님의 팔을 잡고 구멍으로 갔다. 영문을 모르는 교수님은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나와 밖으로 나왔다. 얼른 회당을 벗어나려 했지만 마법사의 목소리가 마법보다 끈질기게 내게 들러붙었다.

“그거 한 번만 더 쓰면 원래대로 돌아가니 잘 사용하게!”

“휴드 군, 손수건이 뭐 어쨌다는 건가? 아니, 혹시 자네와 저 분이 손수건을 주고받을 정도로……”

​이​상​야​릇​애​매​모​호​모​를​ 바라보는 눈빛의 교수님이 한 말이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 손수건을 씹어먹어 저들과의 연락수단을 없애는 것으로 제 순결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됐네. 침대맡에 야한 책을 숨기는 남자치고 변변한 놈을 보지 못했으니, 자네가 순결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네."

나와 교수님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를 듬뿍 담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인공의 나이가 나왔습니다.
양판소라면 늙다리 급인 스물넷...
그래도 지금 제 나이에 보면 그저 부러운 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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