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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8화


수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폭발하고 점멸해 간다. 가슴의 압박이 한층 더해져 한 손으로 가슴을 눌러야 했다. 가쁜 숨을 쉬며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헝클어져 온통 새까매진 것 같았다. 내 안에서 점점 커져 가는 괴물이 이제는 날 이끌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건 내가 아니라 괴물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난 생각을 그만두고 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달이 비추는 길가에는 개 몇 마리만 외롭게 짖고 있었다. 그들이 짖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뾰족한 돌멩이라도 밟았는지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러나 괴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개들이 나를 향해 몇 차례 짖다가 꼬리를 말고 돌아섰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안의 괴물은 나를 부숴버릴 만큼 비대해졌다. 여기서 괴물을 토해내면 어떻게 될까? 부의 감정의 덩어리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왠지 내게는 이 괴물이 실체를 가지고 당장에라도 이 초라한 마을을 부숴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마을까진 부수지 않아도 좋으니, 녀석이 나가고 난 뒤에 남은 나라는 빈껍질을 산산조각내 주었으면 좋겠다.
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들이킨 숨을 헛삼켰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휴드 님.”

달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칠흑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가 내게 인사했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건강해 보이네.”

내 첫마디는 수백 번을 생각했던 첫마디 중 어느 하나도 아니었다.

“네. 전 깨어있는 동안에는 일정한 건강을 유지하니까요. 먹고, 마시고, 잘 필요가 없는 몸입니다.”

“그럼 인간이 아니잖아.”

“말씀드렸잖아요. 제물이라고.”

예전과 마찬가지다. 이래선 대화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검은 기운은 내가 옆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하고 있었다. 소실된 기억에 대한 상실감에서 탄생했을 뿐인 내 안의 괴물이 그녀를 둘러싼 악의의 기운을 냄새맡고 미쳐 날뛰고 있다. 어서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고, 저 여자는 악의 화신 그 자체일 거라고 또렷하게 속삭인다. 애당초 괴물이 날 이끌었던 이유는 그녀를 먹잇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저 여자를 만나는 즉시 저 가느다란 목을 꺾어버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실 먹이는 나고, 날 그녀 앞에 몰아넣기 위해……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네요, 휴드 님.”

“요새 밥을 잘 못 먹어서.”

농담 한 마디 하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종단은 눈앞에 있는 소녀를 악마로 규정했던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그녀 앞에 서고 보니 그 말이 납득이 갔다. 새까만 붕대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검은 기운은 이제 독기가 되어 주변을 침식하고 있었다. 장마철의 습기보다 더 찐득하게 온몸을 훑는 독기를 털기 위해 난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가 연민의 시선을 보내며 한 손을 들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법사의 영상에서 봤던 그 모습이었다. 저기 닿으면 끝장이다! 해롭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단 몇 분이라도 의식을 잃을 순 없다. 난 올라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그녀의 팔을 쳐냈다. 거뭇한 독기에 닿는 순간 까무러칠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경험한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크기의 고통은 차라리 막연하게 다가왔기에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흐릿해진 시야를 되돌리며 애써 제자리에 선 채 버텼다.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보며 더듬거렸다.

“지금, 거부하신 건가요?”

“그래. 이 제멋대로 아가씨야.”

“하지만, 저를 느끼고 이곳으로 오신 것 아니었나요? 전 휴드 님을 느꼈습니다. 반쪽짜리 테르에 시달리며 평온을 구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다른 분들게 가기에 앞서 휴드 님을 찾아온 겁니다.”

테르? 교수님의 논문에서 본 것 같다. 고대의 제물과 희생은 테르의 소멸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업’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건 나중에 논문을 다시 봐야 할 듯하다. 참, 그리고 대강의 장소를 예측하긴 했지만 결국 이곳에 온 건 내 무의식이니 그녀의 말은 반만 맞은 셈이다. 난 고개를 반 정도만 끄덕여 긍정했다.

“휴드 님은 그 상태로 계시면 안 되요. 휴드 님의 테르는 다른 사람과 달리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상태라 오히려 불완전한 업이 신체를 좀먹을 수도 있어요. 그냥 제가 한 번 흡수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투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이 불완전한 사건들을 한데 엮어주는 고리가 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단숨에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었다.

“그런 거였나? 너……사람의 업, 아니 테르를 흡수하기 위한 제물이었나?”

“예. 전 선택된 무녀. 모든 사람들의 테르를 제 몸에 그러안고 봉인되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아까 기억해냈던 교수님의 논문 내용을 인용해 보면, 태초부터 신을 믿었고 거기에서 오데사 등의 종단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종단과 달리, 교수님은 종교가 없던 시절이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교수님은 그 예로 엘드에서 멀리 떨어진 한 섬에 사는 미개인들의 풍습을 들었다. 그들은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선정해 신으로 대접하고 추앙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개월에서 몇 년 뿐이고, 새로운 신을 뽑아야 할 때가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죽인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저질러진 마을 사람들의 죄를 모두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하고, 그럼으로써 살인자들은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교수님은 이러한 방식이 고대에는 좀 더 방대한 스케일로 행해졌을 거라 논문 말미에서 추측했는데, 그녀는 그러한 추측의 정도를 뛰어넘고 있었다. 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을 추측한 뒤 바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네 검은 기운은 사람들에게서 흡수한 테르라는 거야?”

“예. 테르란 의식 중에, 무의식 중에 저지르는 모든 죄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나는 고뇌의 덩어리입니다. 테르는 사람을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것을 깨달은 족장님은 힘이 없어 늘 핍박받던 저희 일족 중 저를 골라 테르를 처리하게 하고, 대신 저에게 이름을 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저희 부족의 세력을 키워주신다는 약속도 해 주셨구요.
전 그에 따라 선발된 무녀입니다. 족장님은 제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주술을 걸어 주셨습니다. 제가 테르를 모으는 동안에는 결코 죽지 않고, 식사나 잠도 필요없게 해 주는 주술, 제게 테르를 흡수당한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게끔 하는 주술, 방해받지 않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술 등등이지요. 전 그 상태로 족장님이 다스리는 모든 땅을 돌며 사람들의 테르를 흡수했어요. 테르를 흡수당한 사람은 자신이 흡수당했다는 기억 없이,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 존재는 빠르게 알려지고, 빠르게 잊혀졌죠. 마치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내놓으면 파도가 밀려와 지워버리는 것처럼요.“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위를 잠식하고 있는 검은 기운을 내게 소개하려는 듯, 그 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이걸 보세요. 제 시대에는 이 주술을 불어넣은 성스러운 천에 테르를 담는 걸로 충분했습니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지만 테르를 흡수할 때마다 점점 새까매져요. 이 천이 거의 까만색이 되었을 무렵 전 봉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며칠 지나지도 않아 제가 가진 테르는 이 천의 한계를 넘어 이렇게 표면에 나오게까지 되었습니다. 휴드 님도 보셨죠? 관 안에 있을 때의 제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그래서? 그건 네가 희생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아! 그럴 필요 없어!”

난 발끈해 외쳤다. 내가 발끈한 것은 그녀에 대한 연민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화가 난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지배구조에 대해서이다. 그녀와 달리 난 그 시대의 지배구조와 그 문제점에 대해 개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귀족이나 왕족 등이 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유한한 것들을 지배할 뿐이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게 오늘날의 종교이다. 종교는 각종 규칙과 제약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지만, 스스로도 자신이 만들어 낸 제약에 묶일 때가 많다. 그러나 몇 천 년의 지배자는 정해진 규칙 대신 자의적 판단을 절대적 지배도구로 삼고 피지배자들의 몸과 영혼 모두를 한손에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에 주술적인 의미니, 업의 봉인이니 하는 건 알 바 아니다. 내가 희생이라고 표현한 건 이 때문이다. 옛날보다 몇 백 배는 많은 업을 내재하고 있을 지금의 사회도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넌 이제 제물이 아니야! 그 시대엔 제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구! 네가 살던 때 네 역할이 중요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굳이 다시 봉인되기 위해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의 업을 모을 필요는 없단 얘기야.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둠의 기운 너머로 붕대가 흐릿하게 보인다. 붕대는 당장에라도 찢어질 듯 팽팽하게 몸에 휘감겨 있었다. 그 때문에 몸의 굴곡이 뚜렷이 도드라져 보였지만 난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휴드 님께 남은 테르를 제게 주세요.”

그 목소리는 내게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 이렇게나 수상하게 보이는 그녀의 손에 자신을 맡긴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담긴 호소에 넘어간 것일까? 아니면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무너져내릴 듯한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함이었을까?
그녀는 내 반응이 없자 재차 말했다.

“휴드 님께 남은 테르를 제게 주세요. 제게 있는 휴드 님의 반쪽짜리 테르가 제 완전함을 흐트러뜨리고 있습니다. 휴드 님의 테르를 처음 흡수한 날에는 제가 완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답니다.”

무슨 말인지 간신히 알 것 같다. 그녀가 석관에 있을 때, 우연히 그녀와 접촉한 적 있었다. 그때 그녀는 ‘아직 덜 흡수했다’고 말했었지. 그렇다는 건 현재의 난 딱 어정쩡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 안의 괴물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들볶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 잃어버린 기억의 행방을 알았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좋아. 달라면 주지. 줄 수 있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먼저 네가 가져갔다는 내 테르를 되돌려줘. 거래는 그 다음이다.”

그녀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 눈을 치켜뜬 표정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다.

“그런 부탁은 처음 받는군요. 테르란 인간이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돌려받고 싶으시다구요?”

“그래.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부탁할게.”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에 감기지 않은 두 손이 기도하듯 모아졌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손 위로 아주 작은 어둠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구체를 건드리자 그것은 손가락 끝에 달라붙었다. 손가락이 그 상태를 유지하며 내게 다가왔고, 난 저항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서느런 느낌이 이마에 닿았다.

세계가 부서졌다.

내 안의 괴물이 몸부림쳤다.

괴물이 갈래갈래의 감정들로 변해 흩어진다.

내가 나로 있지 못하고 흩어져 간다.

 

정적.
정적.
무채색의 공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암흑조차 없는 텅 빈 공간을
낯익은 목소리들이 채워 간다.


???   오데사 님은 항상 우릴 지켜보고 있단다.

???   오데사 님께 ​기​도​드​립​시​다​.​(​찬​송​ 소리가 들린다)

???   저는 오데사 님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   오데사 님께서 여러분께 영광을 내리시길.

???   불평하지 마. 난 오데사 님께 모든 걸 바칠 몸. (잠시 침묵하다) 그렇게 내가 축복을 받을 때, 그 축복은 네게도 돌아가는 거야.

잠시 정적. 여전히 무대도, 배우도 존재하지 않는다. 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생각한다. 떠오를 듯 하지만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왁자지껄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너무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는 통에 알아듣기 힘들다. 이삼 분 정도 시끄러움이 유지되다 멈추고, 아까의 목소리가 다시 말한다.

???   어째서? 어째서야? 난 오데사님에게 모든 걸 바쳤어!

무감정한 목소리   당신의 정성은 아직 오데사님에게 닿을 만큼 크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 오데사님을 섬기십시오.

???   하지만 무엇을 더 바치란 말인가요?

무감정한 목소리   우리의 신은 신도의 정성이 하늘까지 닿을 때 비로소 응답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재산을, 당신의 육체를, 당신의 영혼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각오로 오데사를 섬겨야 합니다.

또 잠시 침묵. 휴드는 진부함을 느낀다. 정적이 흐르다 느닷없이 남녀의 고함과 노성이 들림. 휴드는 그것이 자신의 부모님 목소리란 걸 깨닫는다. 그의 얼굴에서 지루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과 ???와의 말다툼, 이어서 중년인 듯한 사내의 열락에 젖은 신음소리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한데 겹친다. 신음소리가 몇 차례 반복되다 사라진다. 옷 입는 듯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 말이 이어진다.

???   다 바쳤어. 재산을, 육체를, 영혼을. 그럼 남은 건 생명뿐일까? 생명을 바쳤을 때, 난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정적. 이번에는 몇 분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휴드는 무채색의 공간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다 문득 발 아래를 본다. 길게 늘어진 새까만 그림자가 휴드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림자는 점점 커지며 세계를 잠식한다. 세계가 까맣게 변해간다. 휴드의 모습이 그림자에 잠식된다. 완전한 어둠 안에서 휴드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서성거리는 발소리나 헛기침 소리가 그의 존재를 말해준다.

이윽고 어둠의 장막이 올라간다. 서서히 올라가는 어둠 뒤편에는 그림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다. 휴드의 모습이 어둠 뒤의 빛에 비추이며 다시 나타난다. 천천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달빛이 내리는 평범한 밤의 풍경이다. 그러나 휴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그 풍경을 바라본다. 어둠이 절반 넘게 걷히자 오물이 흩뿌려진 은행나무 아래가 보인다. 감질날 만큼 천천히 걷히는 어둠은 여지껏 가리고 있던 흔들리는 여자의 다리와 허리, 가슴, 목을 세밀하게 비춘다. 휴드는 여자가 왜 흔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곧 답을 찾는다.
여자는,
은행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휴드   흔들흔들. 흔들흔들. 하늘에도 땅에도 발디디지 못하고 흔들흔들.
       저게 네 누나의 모습이야.

세상 모든 곳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는 누나의 시체들 사이에서,
휴드의 목소리가 휴드에게 속삭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머리를 짓눌러 으깨는 듯한 고통에 난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 내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있던 그녀는 당황하여 손을 뗐다. 아까의 검은 구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 구체가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더 지끈지끈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제 기억난다.

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내 행동이 의외였는지 멍하니 내 손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손가락을 구부려 힘을 잔뜩 축적한 다음……

“부활 기념이다.”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때려넣었다.


“아야!”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주변을 잠식하는 검은 기운을 풀풀 날리는 주제에 이마를 감싸쥐고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언밸런스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그녀의 이마보다는 검은 기운에 접촉한 내 손가락 쪽이 백 배는 더 아플 테지만, 이럴 땐 아픈 내색을 보이면 안 되는 법이다.

“이제 네 멋대로 구는 건 그만해. 더는 못 봐주겠어.”

그녀가 항변하려는지 입을 벌렸지만 뻐끔뻐끔하며 아우아우, 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어지간히 아픈가 보다. 여자를 상대로 전력을 다한 딱밤을 먹이긴 처음이라 좀 미안하긴 하다.

“넌 사람들의 테르를 흡수한다고 했지. 그게 사람에게 있어선 안 될 거라고 하면서 말야. 누가 그걸 정했는데? 네 시대의 잘난 족장님들? 지금은 뼛가루도 남지 않은?”

“그분들은 하늘로 돌아가셨어요!”

“그래? 난 네 시대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 그렇지만 기억해 둬. 사람의 테르란 결코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녀의 감정이 변화한 탓인지 검은 기운이 마치 불꽃처럼 크게 일렁였다. 그녀는 그 기운이 지금도 새어나오고 있는 붕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독기를 보세요. 전 무녀이기 때문에 견딜 수 있지만, 이만한 양의 테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그는 바로 죽고 말 거에요. 마치 독을 매일 마시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 테르를 제가 흡수하겠다는데 그게 싫으신 건가요? 그걸 끌어안아야 할 만큼, 휴드 님의 테르가 가치가 있나요?”

“있어.”

난 한 마디로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그녀가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아랑곳없이, 난 내가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온 기념사를 읊기 시작했다.

“오래 전 일이야. 내 누나가 광신의 길에 빠져 신관에게 몸을 더럽혀지고, 마침내 자살까지 했어. 요즘엔 흔한 얘기야. 이것이 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난 이 이야길 듣고도 별 감흥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것은 내게 일어난 이야기.

“내게도 책임이 있었어. 누나가 그 지경이 되도록 전혀 말리지 않고, 오히려 기대감에 부풀었었으니까. 왜 그랬던 거 같아? 그건 말야, 누나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신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기대감 때문이었어.”

누나와 항상 손을 잡고 가던 회당. 늘 새겨들었던 ‘정성만 있다면 누구든지 신과 만날 수 있다’ 그 말을 한 신관은 훗날 신의 대리인께 몸과 마음을 바치라는 감언이설로 누나의 몸을 더럽혔다.

“누나는 절망감 속에서 자살을 결심했지만 난 그 절망을 모른 채, 누나가 자신의 몸을 바쳐 신을 만나려는 걸로 지레짐작했었어. 넌 모르겠지만 옛날, 신을 만나고자 수행을 거듭하고 급기야 절벽에서 몸을 던진 자가 마침내 신을 만나 구원받았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믿었던 거야. 그래서 오히려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지. 멀찌감치 숨어 누나가 밧줄을 준비해 목을 매는 걸 바라보며, 난 신이 나타나 누나의 열성을 칭찬해 주길 기다렸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누나의 몸에서 똥오줌이 쏟아지고, 축 늘어진 시체가 덜렁거릴 때까지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런……”

“그때부터였지. 내가 무신론자가 되고,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다짐했던 건. 누나는 목숨까지 버리며 신을 간구했지만 그 신은 끝끝내 누나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나중에 알아보니 신은 항상 대중 앞에서가 아니라 신관들 앞에만 나타나는 존재더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거기서 내 의문은 생겼지. 신관들이 신의 힘을 빌어 신성력을 쓴다지만, 그것이 과연 신의 뜻일까? 아니, 그 전에 그 힘이 정말로 신의 힘이 맞는 걸까? 신의 유무에 상관없이 종단 녀석들이 헛소리를 지껄이며 사람들을 우롱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난 의심하고 또 의심해. 이것이 내가 가지게 된, 결코 버릴 수 없는 나의 테르, 나의 업이야. 내가 나로, 휴드로, 신을 믿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무신론자로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내가 내 과거를 남 앞에서 이야기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난 혼자 있을 때에도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은 한 번 저지른 실패를 배제할 수 없기에 그것마저 포함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내겐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 한계일 뿐, 다시 끄집어낼 각오는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내 과거를 남에게 토로하며, 난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냉정한 척, 강한 척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그대로 흘러내린다. 난 고개를 숙여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그림자 위에 떨구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울다 울다 몸의 수분을 모두 흘리고 껍질만 남아버리고 싶었다.

“휴드 님.”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난 대답하기 싫어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휴드 님.”

그녀의 얼굴이 내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검은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려다 흠칫해 다시 거두었다. 내 눈물이라도 닦아주려던 것이었을까. 난 스스로 눈물을 닦고 뿌연 시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휴드 님과 누님의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그야 부모님이지.”

말하고 나서 곧 난 생각없이 말한 걸 후회했다.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아닌 것이다.

“저는 봉인된 후에야 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름이란 비밀의 힘을 담고 있는 주문입니다. 그것은 족장님만 알고 있는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족장님은 이름을 가진 자는 하늘로, 이름이 없는 자는 대지로 돌아간다고 선언하셨죠. 그러니 휴드 님의 누나도 하늘에 있을 거예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는 말치곤 꽤 지리멸렬한 논리다. 그녀가 날 위로하려 한다는 건 알겠지만, 살짝 심술이 나서 반박하고 싶어졌다. 난 입을 떼려다 그녀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아 나온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제가 제일 신기한 게 그것이었어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이름을 갖고 있어요. 이름이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될 수 있다는 표시, 스스로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이지요. 그런 소중한 것을 모든 사람이 갖고 있을 수 있다니,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발전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이름이란 것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져 버린 걸까요?”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의 쟁취를 위해 모든 사람의 테르를 한 몸에 받아들인 소녀에게 차마 답은 후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휴드 님이 스스로의 테르를 밝혔으니 저도 그것을 밝혀야 하겠죠.
전 죽지 않고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 깨어났어요. 왜 그런지 짐작가는 게 있으세요?”

“아니. 없어.”

“그건 제가 잘못된 의식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전 제가 부여받게 될 이름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그래서 친구를 통해 제가 들어갈 석관의 뚜껑에 족장님이 새겨놓은 이름을 미리 알아버렸어요. 친구의 아버지가 석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원래대로라면 무녀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을 받은 후 석관에 담긴 채 매장되고, 얼마 후 그 몸 안에 있는 테르와 함께 소멸하게 됩니다. 그렇게 더럽혀진 육신을 벗은 후 이름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 이미 의식 전에 제 이름을 알아버렸답니다. 그 때문에 의식이 반쯤만 성공해 이렇게 다시 깨어나야 했답니다. 거의 제 짐작이지만 맞을 거예요.”

그녀가 쿡쿡 웃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추억을 저렇게 덤덤하게 얘기할 수 있다니. 난 정반대의 것, 즉 유쾌한 추억을 불유쾌하게 늘어놓는 건 잘하지만 그녀처럼 말할 순 없다. 그 점에 있어 그녀에게 마음 속으로 존경을 표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는 거잖아. 그럼 된 거지. 설마 살아있어 죄송합니다, 하는 게 네 테르는 아니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축복. 그걸 자책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큰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로 제 테르로 남게 되었죠.”

“그게 뭔데?”

“그게, 음, 사실, 말하자면,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뭣!”

난 입을 딱 벌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름이란 걸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네가, 한 번 들은 걸 잊어버렸다는 걸 상상하기 힘든데.”

“모르겠어요. 사실 몇천 년을 잠들어있어서 그런지 기억에 약간 혼란이 있어요. 그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지도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기다릴 필요 없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느닷없이 들린 울퉁불퉁한 아저씨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녀에 비하면 가히 소음공해라 불러 마땅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쩌렁 울렸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신께 거역하는 자들이 이런 곳에 숨어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우리 인간 모두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오직 참회와 믿음만이 그 죄를 씻고 하늘로 돌아갈 방법인저!
전능한 신은 그 팔로 모든 악을 쳐부수나니! 악마여! 신의 이름 앞에 무릎꿇고 회개하라!”

“빨리도 오시는군.”

난 자조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신이 있는 세계에서 무신론자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과연 그에게 있어서 그녀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곧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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