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9화
“그럴 리가 없잖아? 이름이란 걸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네가, 한 번 들은 걸 잊어버렸다는 걸 상상하기 힘든데.”
“모르겠어요. 사실 몇천 년을 잠들어있어서 그런지 기억에 약간 혼란이 있어요. 그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지도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기다릴 필요 없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느닷없이 들린 울퉁불퉁한 아저씨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녀에 비하면 가히 소음공해라 불러 마땅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쩌렁 울렸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신께 거역하는 자들이 이런 곳에 숨어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우리 인간 모두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오직 참회와 믿음만이 그 죄를 씻고 하늘로 돌아갈 방법인저!
전능한 신은 그 팔로 모든 악을 쳐부수나니! 악마여! 신의 이름 앞에 무릎꿇고 회개하라!”
“빨리도 오시는군.”
난 자조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나타나자마자 자기소개를 저렇게 거창하게 하는데,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예상 외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내가 결계 밖으로 나온 게 금방 탐지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대체 어디 있었길래 벌써 온 거야?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를 만나자마자 함께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일부러 천천히 돌아보니 사도 두 명이 서 있었다. 굉장히 과격한 인상을 가진 체구좋은 사내와 다리가 길고 날렵하게 생긴 사내. 참 이름과 이미지가 일치하는 사람들이다.
“옆의 분은 ‘다리’입니까?”
“그렇다.”
오데사의 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종단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오데사의 팔은 종단 최고의 무력으로 적을 분쇄하고, 오데사의 다리는 이동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마 내가 결계 밖으로 나오자마자 위치를 탐색하여 소수정예를 급파한 모양이다. 먼젓번에 만난 오데사의 귀만 해도 상아탑의 마법사 네 명과 동등하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물며 오데사의 팔이라면 무력으론 대항할 방법이 없다.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 이들에게 설득 같은 건 불필요하다. 난 그녀와 함께 끌려가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교수님께 전할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교수님이 지금은 부럽다. 내가 열심히 대응책을 생각해내느라 아무 말이 없자, 오데사의 팔은 기세좋게 외쳤다.
“악마여!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싸우지 않고 너희를 종단 본부로 데려가겠다. 어떠냐? 지금 이 자리에서 반항한다면, 네 목숨은 결코 보장할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 때문에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그들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관계가 어떤지 알았는지,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분들은 휴드 님과 저에게 적대하는 무리입니까?”
“그래. 넌 악마고, 난 협력자래.”
난 그녀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맹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악마가 뭘까요?”
“뭐?”
난 어이가 없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 시대엔 악마란 개념이 없었던가? 하긴, 신이란 개념이 없으면 악마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자세히 설명할 시간도 없었기에 난 한마디로 정의내렸다.
“호환, 마마, 질병의 원천 같은 녀석.”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가볍게 한 소린데 어지간히 충격받은 것 같다. 저 정도 반응이라면 과거의 호환, 마마, 질병은 지금과 차원을 달리하는 재난이었던 걸까.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재난 카테고리에 저것들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기가 막힌 듯 한참 후에야 제대로 분노할 수 있었다.
“뭐라구요? 세상에!”
그녀는 이마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화를 냈다. 지금까지 쭉 단정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아이도 감정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준다. 그녀의 감정변화에 따라 검은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자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구름이 낀 것처럼 캄캄해졌다. 그 모습은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의 손바닥만한 그늘만큼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두 사도는 급히 어둠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흉흉한 분노를 담아 외쳤다.
“두 분은 말을 거두십시오! 이름을 가진 분들이라도 이런 무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희 일족을 대표하는 무녀. 제가 거두는 것은 이 대지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테르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가진 모든 테르는 제 스스로 세상의 평화를 꿈꾸며 거둔 것 뿐인데!”
“악마를 악마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겠나? 신탁은 널 악마로 규정했다. 네가 악마가 아닐 리 없어! 우리의 신은 전능하다!”
오데사의 팔은 악당 같은 대사를 날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몸을 웅크렸다 펴며 고함을 질렀다. 소리에 앞서 기세가 먼저 날아왔다. 마치 태풍과도 같은 신성력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밀려왔다. 그녀는 나를 흘끔 보더니 내 앞으로 뛰어나와 검은 기운을 펼쳤다. 두 기운이 맞부딪치며 소용돌이처럼 한데 엉켜 휘돌았다. 만약 이곳이 마을 밖 벌판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였다면, 그 부실한 마을은 오늘 밤 내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유 ․ 무형의 기운이 한데 얽혀 맴도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때 보고만 있을 줄 알았던 오데사의 다리가 몸을 날렸다.
“일단 자네부터 제압해야겠군.”
마치 동네 산보라도 가는 것 같은 움직임과 말투였지만,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난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들에게 사념을 보냈다. 게펜타이너 씨는 직접 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가 사념보다 조금 늦게 입을 벌리고 말을 하려는 찰나, 등뒤에서 무차별 타격이 가해졌다. 등, 종아리, 허리, 옆구리, 어깨 등 내 몸 이곳저곳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이게 직접적 타격인지 신성력인지 분간이 되지도 않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몸의 중심을 잃고 막 쓰러지려는 내게, 오데사의 다리가 그녀의 뒤를 노리고 달려가는 게 보였다.
“조심해!”
난 그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오데사의 팔과 벌이는 결투에 정신이 팔렸는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이제 끝장이다, 라고 내가 생각했을 때, 그녀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오른팔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 오데사의 다리가 철컥 달라붙었다.
“에?”
그녀의 움직임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물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것처럼 가볍게 휙 팔을 휘둘렀을 뿐이다. 이건 예측한 것도 뭐도 아니었다. 오데사의 다리는 자석에 붙는 쇠못처럼 저절로 그녀의 손에 붙은 것이다. 사도도 당황했는지 자신의 가슴에 닿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잠깐 버둥거렸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아직 자유로운 입으로 구원을 청했다.
“빠, 빠지지 않아! 이봐!”
“그 손 놓아라!”
오데사의 팔이 호통치며 기세를 더욱 늘렸다. 그녀의 검은 기운이 잠깐 밀리며 그녀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잠깐의 불균형을 놓치지 않고, 오데사의 팔은 오른손을 뒤로 당기며 앞으로 돌진했다. 오른손에 모든 힘을 모으는지 주먹에 눈부신 빛이 넘실거렸다.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사도는 기합을 발하며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순간 어둠의 기운이 방패처럼 한데 뭉쳐 주먹과 맞부딪쳤다. 주먹이 거기에 막혀 더 전진하지 못하자 사도는 한층 기운을 내며 주먹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냈다. 그때 갑자기 어둠의 방패 한가운데서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와 주먹을 잡았다. 사도의 전력이 담긴 주먹에 일부러 접촉하다니! 난 보기 흉하게 고꾸라진 채로 살짝 탄식을 토했다. 그런데 그 탄식의 꼬리가 목구멍을 벗어나기도 전에 사도의 몸이 경직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종단 최강의 신성력을 소유한 자가 단숨에 제압당하다니.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큭! 무슨 짓을 한 거냐, 악마!”
오데사의 팔은 노호하며 몸을 움직이려 용을 썼다. 붙잡힌 주먹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흰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러나 그 빛은 나오는 족족 그녀의 손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신성력과 그녀의 검은 기운은 반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그렇게 따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까까지 신성력과 충돌했던 것은 검은 기운이었지만, 지금 그 신성력을 흡수하고 있는 건 그녀 본연의 힘이다. 그녀는 이까지 악문 사도에 비해 한결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몸에 둘러진 붕대는 어느새 그녀의 몸에서 살짝 풀어져 검게 빛나며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거 놔! 악마가 신성력을 흡수한다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사도가 절망적으로 외치며 왼손을 들었다. 그는 왼손에 신성력을 모아 눈앞에 있는 검은 기운의 방패를 내리쳤다. 두 번, 세 번, 두 기운이 반발하며 귀를 찢는 듯한 파열음을 냈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말하는 신성력이란 게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의 양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거기 잡혀 있던 두 사도의 몸이 들렸다. 남자 둘을 저렇게 가볍게 드는 게 저 가녀린 소녀란 게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내가 본 장면들 중에선 그나마 저게 가장 현실성있는 모습이라는 게 우스웠다. 어느새 눈을 감고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오데사의 다리와 여전히 반항하고 있는 오데사의 팔에게 그녀는 심판을 내리는 것처럼 선언했다.
“당신들의 기운 역시 테르입니다.”
화악! 두 사람의 몸이 불타는 것처럼 눈부신 빛으로 휩싸였다. 오데사의 신도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될 만큼 장엄한 모습이다. 단, 빛 속에 둘러싸인 자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걸 무시한다면. 저들의 신성력은 지금 그녀에게 강제로 흡수되기 위해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출되는 것이다.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저 악마를 벌하소서!”
솔직히 앞뒤 정황 없이 이 장면만 본다면 악마가 신의 사도를 농락하는 장면으로밖엔 비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신이 악마를 어둠으로 내쫓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어둠의 기운에 농락당해 허우적대는 걸 보니 강렬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부글거리는 충동의 힘으로, 난 아픔마저 잊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이야말로 신이 없다는 걸 알 수 있군요! 무려 신의 사도들께서 이렇게 위급해지셨는데 신은 어디 가셨답니까? 사도를 구하고, 악마를 퇴치해야 할 신께서는 대체 어디 계신 걸까요?”
“시, 시끄럽다, 악마의 하수인……”
오데사의 다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난 일부러 움직일 수 없는 그의 앞으로 힘겹게 걸어가 코앞에서 그를 조롱했다.
“그건 당신들의 주장일 뿐이죠. 대체 언제까지 악마 타령인가요? 인정하기 싫으시다면 신을 직접 모셔와 이 아이가 악마이니 처단해달라고 하세요. 그렇지만 저도 사람, 이 아이도 외양은 좀 이렇지만 사람입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하게 놔두란 말입니다.”
“불경한 놈! 신은 인간에게 구현하여 이루신다! 우리는 신의 대리인이란 말이다!”
“아, 그럼, 무적의 대리인님들께서 주인님이 하셨던 것처럼 악마를 내쫓으시던지요.”
반격당할 염려 없이 일일이 대꾸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좋을 줄은 몰랐다. 혹시 내게 침이라도 뱉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사도들은 더 이상 내 말에 신경쓰지 않고 기도문을 읊으며 움찔거렸다. 그러나 기도문으로는 계속해서 가해지는 그녀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후우.”
그들이 축 늘어지자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지막 빛까지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그녀는 빛을 잃은 두 사람을 가만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들에게 외상은 없었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그들이 그녀에게 완전히 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힘을 너무 썼는지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게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피곤함에는 아랑곳없이, 검은 기운은 훨씬 더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살짝 풀려난 붕대가 허공에서 춤추고, 그 덕분에 그 틈새로 그녀의 맨살이 조금씩 비치고 있다. 어둠의 기운이 가리고 있어서 그녀에게 켕기지 않고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젠 그녀에게서 세 발짝 정도 떨어져 있지 않으면 위험할 지경이다. 그녀가 눈치채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 채 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덕분에 내 소원을 풀 수 있었어.”
“소원이요?”
“신관과 말싸움해서 이기기. 여태까진 소심해서 성공하지 못했거든.”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 키득 하고 웃었다.
“이런 식으로 이기는 건 반칙 아닌가요?”
“저쪽이야 항상 반칙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난 맨손이니까. 평상시에 내가 저랬다간 당장 신성력에 가루가 될 걸.”
신성력이란 말이 나오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흡수한 기운을 확인하려는 듯 두 손을 가슴까지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질문했다.
“휴드 님. 신성력이란 무엇이지요?”
“신을 믿어 발생하는 힘.”
“달라요……”
그녀가 멍하니 말했다.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차 질문했다.
“그럼 신이란 무엇이지요?”
“종단에서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핍박받으면서도 사랑과 평화를 전도하며 사람들의 죄를 거두었고, 결국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 하늘로 돌아간 구세주라더군. 그래서 그에게 구원받은 우리는 그에게 빚을 갚아야 하니 열심히 믿고 따르세. 으샤으샤. 이 정도?”
“그래서였군요.”
정말 이 여자애애겐 농담을 섞어 말하는 현대식 화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진지해진 모습을 보여 날 부끄럽게 했다.
“이들의 힘의 원천이 테르인 이유를 알겠군요. 불쌍한 사람들,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어요.”
“신성력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야?”
“신에 관해선 잘 모르겠어요. 제 시대엔 그런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이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속죄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가지게 되었죠. 거기에서 테르는 탄생했어요. 믿음의 힘이었다면 강했을 테지만, 죄책감에서 오는 힘은 제게 있어선 이 검은 기운과 마찬가지일 뿐이었어요. 이 쪽이 검은 기운보단 훨씬 익숙하고 다루기 쉽지만, 결국 테르일 뿐이란 거죠.
우습죠? 이렇게 어두운 기운과 그렇게 밝았던 빛이 결국은 쌍둥이나 마찬가지라니.”
그녀의 표정에서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에 난 그녀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오열하고 있는 소녀의 것이었다.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제 시대엔 족장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테르를 내주었어요. 족장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완전한 존재였으니 그럴 필요 없었죠. 그런 분이 아닌 자들에게 그런 행위는 일상의 배변이나 성교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였어요. 거부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그렇다고 제게 감사하거나 저를 존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 행복했어요.
사실 무녀의 직책도 제 스스로 자원한 것이었어요. 비록 깨끗해진 사람들이 다시 테르로 더럽혀진다 해도, 그 동안만큼은 이름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완전해질 수 있으니까요. 제 손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땐 너무 행복했어요. 또 마지막엔 족장님의 의식을 통해 저 또한 완전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구요. 족장님은 제게 테르로 더럽혀진 육신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제가 봉인되기 전 흡수했던 테르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거기에 지금 새로 흡수하기까지 해서 이젠 제 허용량을 넘고 있어요. 제가 이만큼 막대한 테르를 언제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진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억지로 테르를 흡수했죠. 아니, 의무라기보단 소망이지요. 이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쫓겨다닐 뿐이겠지만, 테르를 계속 모으다 보면 뭔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 혹시 알아요?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이 불완전한 몸이, 테르를 모으다 보면 뻥 하고 터져버릴지? 그렇게 되면 전 잠들 수 있는 걸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닥가닥 떨려 나왔다. 난 이제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희생의 제물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진 무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자부심을 잃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절망에 빠진 소녀일 뿐이다. 이 세상에선 그녀의 역할이 필요없고, 오히려 악마로 규정되어 배척될 뿐이란 것은 아무 데도 기댈 데 없는 낯선 세상에서 마지막 긍지마저 잃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종단의 사도가 둘이나 당했는데, 종단에서 구경만 할 리도 없었다. 아마 오데사의 눈은 이 장면들을 모두 보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쯤 2차 파견대가 조직되어 이리로 달려오는 중일지도 모른다. 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결정을 내렸다.
“일단 여길 피하자. 곧 아까 같은 자들이 몰려올 거야.”
“아니요. 전 여기 있겠습니다.”
그녀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검은 기운이 내 손을 쳐냈다. 짜릿한 아픔으로 내가 끙끙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테르를 모으는 건 불가능해요! 지금 피해봤자, 앞으로 제가 뭘 할 수 있단는 거죠? 악마라고 불리면서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아야 하나요? 사람들에게 배척받으며 생각했어요. 이건 의무다, 이건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럼 하지 않으면 되잖아!”
내가 확 열이 올라 소리치자 그녀가 어깨를 움찔 했다. 참 답답한 녀석이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걸까.
“아까 내가 그렇게 떠들어대던 말을 그새 잊었어? 여기서의 너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 그런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나와 교수님이 널 쫓아다닌 거고! 여기서 누가 네게 테르를 흡수하라고 강요한 적 있어? 말해봐!”
“자유? 자유라구요?”
그녀가 갑자기 나를 노려보았다. 아까 사도들과 싸울 때보다도 더욱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의 붕대는 이제 검은 기운과 거의 동화되어 있었고, 그 기운의 가닥가닥이 나를 향해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해야 할 장면이다. 난 실례인 줄 알면서도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번엔 그녀의 시선이 나와 그녀 간의 거리를 포착했다. 검은 기운이 다시 그녀에게로 빨려들어갔다. 기운을 자신 주위에 막의 형태로 둘러친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저를 가장 잘 이해해주리라 믿은 휴드 님도 거기까지입니다. 그 거리가 휴드 님의 마음에서 나온 대답이에요. 제 몸에 가두어도 이 정도인데, 이를 해방시키는 순간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나올지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그러니 전 앞으로도 이것을 끌어안고 살아야 해요. 이런 절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겠죠. 결국 제 자유란, 저 혼자만 누릴 수 있는, 결코 다른 사람과는 공유할 수 없는 왜소한 것이겠지요.
이름을 갖는다는 건 무리에서 떨어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가진 자가 무리에서 소외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 처지는 차라리 어울릴 수도 있겠군요. 이름을 가졌지만 그것을 잃어버렸으니, 이런 반쪽도 못 되는 자유나마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전 싫어요. 이런 제가 싫어요. 기쁨으로 받아들인 테르를, 이제 와서 짐으로 여기는 그런 제가 휴드 님께도 어리석게 비치겠죠?”
“……미안해.”
난 여러 의미를 담아 사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가지는 않았다. 내게는 그 행동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그대로 서 있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비춰졌다.
“잠깐이나마 제 편이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더 이상 휴드 님과 함께 할 수 없겠군요. 전 이곳에 남을 테니 휴드 님은 멀리 떠나세요. 아까는 두 명 뿐이라 제가 지켜드릴 수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절 잡으러 온다면 그 땐 막을 수 없어요.”
“에이, 지키긴. 아까도 이렇게 늘씬하게 맞았는걸……”
시아에게 하듯 가볍게 농담을 던졌지만, 곧 내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농담이 안 통한다는 걸 진작에 알았는데 또 실수했다. 그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검은 기운을 뻗어 사도들의 몸을 내 쪽으로 던졌다. 조금 차가워진 그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원하신다면 휴드 님이 맞은 만큼 그들을 때리십시오. 저희 부족에선 대부분의 폭행죄는 같은 양의 폭력을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아니, 사양.”
딱히 내가 박애주의자라 갑자기 이들이 사랑스러워진 건 아니고, 그냥 축 늘어진 사람을 패는 건 영 맘에 들지 않는 터라 거절했다. 그러고 보면 이들도 처치곤란이다. 만약 오데사의 눈이란 존재가 이곳을 보았을 거란 확신을 하지 않았다면, 난 목격자를 처리해야 한다는 범죄의 제 1 원칙을 뇌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만간 종단에서 우르르 올 테니 저들은 여기 놔두고 가도 상관없다.
문제는 그녀다. 도무지 내 힘으론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자리만은 벗어나야 한다. 난 슬그머니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리다 곧 집어넣었다. 지금 마법사들을 동원해 강제로 데려가 봐야 그녀에게 상처만 더할 뿐이다. 그리고 아까 그들을 불렀으니 이르든 늦든 언젠가 이곳에 올 것이다.
결국 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녀가 내게 등을 돌린 채 있었으므로 그녀의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녀의 눈이 찡그려졌다.
“왜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가 돌아서서 인사해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 없으면 펑펑 울 것 같으니 여기 있어줘야지.”
“누, 누가 운답니까!”
당황했는지 소리를 빽 지른다. 찔린다는 얘기일까. 하지만 울 것 같다는 말은 내 진심이었다. 나보다 나이어린, 아니 정신연령만 어린 소녀를 이런 상황에서 놔두고 간다는 건 꿈자리가 사나워질 일이다.
“울지 않을 거면 왜 여기 남아있는 건데?”
“움직이면 쫓기겠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찾아올 테니까요. 전 오직 테르를 흡수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제 인생을 걸기로 서원한 몸. 이제 와서 그걸 포기할 순 없습니다.”
난 그 말뜻을 조금 늦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몇 사람이 오든 테르를 흡수해버리면 그만 아니냐는 말이다. 본심은 그게 아니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렇게 버티겠다는 말이겠지. 종단에서 아까처럼 두어 명씩만 보내 준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고, 질이 아니면 양으로 승부를 볼 것이다. 혹은 국왕과 교섭하여 정규군을 내보낼 수도 있다. 그 지경까지 간다면 그녀는 백 명의 재봉사가 공유하는 한 개의 바늘꽂이 신세가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는 몸이라 자신하고 있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이야기이다. 아니, 화살 수십 개가 꽂힌 채 살아있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일 것이다.
“그쪽은 그걸 원하지 않을걸. 그들의 테르는 자연적으로 쌓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쌓이는 거니까. 네가 뺏어가면 덮어놓고 화부터 잔뜩 낼 걸? 그리고 현실도피하려 하지 마. 지금 네가 이러는 것도 결국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러는 거 아냐?”
분명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해 갔지만 난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직접 제시해 줄 순 없겠지만,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그녀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난 되도록 그녀가 아까의 말을 철회하고 나와 함께 떠나 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녀가 고민하다 내린 결정은 내 생각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휴드 님. 제게 이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이름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렇게 역설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그녀의 눈을 보았다. 분명 진심이었다. 단 그 눈빛은 뭔가를 결심한 것이라기보다는 뭔가를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제 이름을 기억하려고 그동안 노력해봤지만 결국 무리였어요.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의식이 완성되어 제 안의 테르를 소멸시킬 수 있겠지만, 이젠 포기할래요. 아마 전 계속해서 사람들의 테르를 흡수하고, 악마라 불리며 떠돌아다니고, 그렇게 육체가 먼지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살아있겠죠. 이건 제 철없는 호기심이 부른 과오이고, 제가 건드릴 수 없는 제 테르입니다.
그렇지만 소원은 하나 생겼어요. 모두가 이름을 가진 이 세상에서, 저도 이름을 가지고 싶어요. 남들이 가지니까 저도 가지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이 세상에서도 존재하고 있다는 걸 제 스스로 느끼고 싶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가장 고마운 분인 휴드 님께 그 이름을 받고 싶어요.”
그녀는 애써 말을 끝내고 끝내 고개를 숙였다.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하고 나니 감정이 복받치는 거겠지. 검은 기운이 폭넓게 펼쳐지며 그녀를 막아서서 난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저렇게나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걸 보니 과거에서도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했을 것이다. 난 고개를 돌려 못 본척하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말했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상관없어. 예전부터 네게 지어주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으니까, 그걸로 하면 되겠지?”
“예? 예전부터라구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검은 기운이 덩달아 줄어들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밝은 표정을 짓는 소녀의 얼굴은 날 가슴아프게 만들었다. 무거운 가슴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난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저기말야. 여자애가 울다가 웃으면 어딘가에 털이 난다는 얘기가 있는데 말이지.”
“정말요? 하지만 전 더 이상 털이 날 곳이 없는데요.”
……이런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자.
난 벌개진 얼굴이 부끄러워져,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저기, 네 검은 기운 말야. 잠시 없앨 수 있어?”
“예? 그건……아주 잠시만이라면 없앨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기운이 저를 감싸고 있어야 제가 이것저것에서 보호되기 때문에, 되도록 이대로 있는 게 좋아요. 굳이 걷어내려면, 그러니까 숨을 참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기분도 그렇고, 걷어낼 수 있는 시간도 그 정도이고.”
“그거면 충분해. 그 기운을 걷어주지 않을래? 아, 되도록 그 붕대에 담긴 기운까지.”
“하, 하지만…… 이건……”
“부탁할게. 네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그래.”
“………………………………예.”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안절부절하며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저러지? 꽤나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하지만 난 ‘오빠 믿지? 손만 잡고 잘게.’ 류의 요구를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찔리는 게 없다. 몇 분 정도 그대로 서 있은 후에야 그녀는 행동을 개시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후우우우웁,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변해 그녀의 전신을 통해 빠르게 흡수되었다. 입으로만 흡수했다면 시간 깨나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검은 기운이 빨려나가고 나자 이번엔 그녀가 온몸에 감고 있는 붕대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어떤 표현을 써도 부족할 만큼 새까맣던 빛깔이 점점 하얘지고, 급기야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푸른 달밤 아래의 한 조각 어둠이었던 그녀가 달 주위를 맴도는 희디흰 조각구름으로 변하는 모습은 사도들이 신성력을 뿜어내는 것보다 더욱 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자신을 덮고 있던 모든 테르를 내면으로 흡수한 그녀는 심호흡을 멈추자마자 비틀거렸다. 역시 본인에게도 힘든 일이었나 보다. 난 그녀가 땅에 쓰러지지 않도록 급히 다가가 부축했다. 계속 들이쉬기만 한 부작용인지 그녀의 숨은 헐떡이는 얕은 숨으로 바뀌어 있었다. 붕대 너머로 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어 난 그것을 약간 느슨하게 할 생각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붕대는 기다렸다는 듯 스르르 풀렸다.
“어어어?”
난 그냥 매듭의 끝을 살짝 당겼을 뿐인데, 그녀의 온몸에서 붕대가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붕대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삽시간에 몽땅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나가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태초의 모습, 즉 나신이 되었다. 그녀를 부축한 상태라 나신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이다.
그때 어깨에서 살짝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가 기댄 쪽이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이빨자국이 난 내 옷이 보였다. 그녀는 살짝 혀를 내밀며 놀리듯 말했다.
“이런 걸 바랐나요? 휴드 님?”
“아, 아니, 난 모르고……”
내 품 안에 다시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가 키득거렸다. 내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괜찮아요. 이게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제게 휴식은 필요없지만, 그래도 가끔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 땐 이렇게 붕대를 벗고 맨몸이 되곤 했어요. 물가로 가 목욕을 하고 겉모습을 물에 비춰 보며 일족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던 과거에 대한 감상에 빠질 수 있었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를 살짝 밀어냈다. 난 그녀가 미는 대로 물러났다. 어느새 기운을 차린 건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몰라도 그녀는 혼자 힘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소녀의 육체는 성적인 의미를 떠나 그저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잘 손질된 비단 실처럼 매끄럽게 늘어뜨린 긴 머리, 금빛 솜털이 보기좋게 비치는 팔다리, 적당히 부푼 가슴, 군살없이 팽팽한 복부 등은 소녀가 실체라기보다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원숙한 분위기가 그런 앳됨을 지우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남성이고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떠나, 그저 멍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행복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나신을 가리는 대신 오히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난 그 의미를 깨닫고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나를 힘껏 껴안았다. 옷이 구겨질 정도로 힘껏 날 끌어안은 그녀의 숨은 뜨겁고 습기에 차 있었다. 그 숨이 닿은 자리가 이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가 들먹거리지 않도록 난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가만히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 시간이 결코 오래 지속되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난 이 순간이 영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겹쳐진 두 그림자처럼, 그녀가 가야 할 길을 함께 걸어주고 싶었다.
축축해진 내 가슴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속삭였다.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래.”
난 가슴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던 그 이름을 천천히 끄집어냈다.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그녀와의 모든 관계가 끝나고 그녀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머리까지 올라온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었다. 난 그녀가 기다려준다는 사실에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역시 말해야 한다. 그녀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안겨주고 싶다.
난 각오를 굳히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눈앞이 번쩍 빛났다. 난,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손이 내 등을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조금도 아프지 않다. 갑자기 배에 이물감이 느껴지더니 몸 안의 피가 밖으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그제서야 엄청난 격통이 밀려왔다. 난 피가 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키려 노력하며 아래를 보았다.
“어?”
얼음의 창이 그녀와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휴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녀와 나란히 꿰인 탓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머리만 뒤로 돌렸다. 3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교수님이 나를 향해 달려오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부딪쳐 퍽 쓰러졌다. 교수님은 그에 아랑곳없이 다시 일어나려 하지만 뭔가가 짓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 주위의 중력만 갑자기 높아진 것 같았다. 이건 마법이다!
“괜찮……아?”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피를 조금씩 토하며 콜록거렸다. 아무래도 폐를 찔렸나 보다. 난 죽을 정도로 아프지만 말은 할 수 있는데, 그녀는 폐 쪽을 당해 그나마도 불가능한 것 같다. 어떻게든 이 창을 빼낸 후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우리를 꿴 순백의 얼음창이 우리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간다. 그녀와 너무 밀착해 있어서 창을 잡을 수 없었기에 일단 공간을 벌리려고 몸을 조금 뒤로 당겼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아, 칵! 커흑! 제길!”
있는 힘을 다 했지만 고작 몇 센티 정도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움직이는 반동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지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내 옷을 뚫고 등 깊숙이 박혀있는 게 느껴진다. 난 내가 빠져나가는 것도, 그녀를 빼내려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 그녀의 등 뒤, 얼음의 창이 날아왔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나와! 마법사!”
제발 내 예상이 틀리길 바라며 난 공기가 흔들리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마법사답지 않게 딱 벌어진 어깨와 큰 키. 실루엣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법사, 게펜타이너 씨는 백색 로브에서 냉기를 풀풀 날리며 내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