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니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프레시아와의 사역마 계약을 마치고, 단순한 고양이로 돌아가 수명이 다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기보다 살아난 것에 대한 의문을 먼저 느꼈다.
분명히 그대로 죽는 길만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
[일어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리니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기 위해 그대로 고개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거대한 붉은 용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의 리니스는 단순한 고양이의 몸. 그런 그녀의 시점에서 신장 2m를 가볍게 넘기는 마그마 드래곤은 하늘을 꿰뚫을 듯한 거인이다. 게다가 빈말로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군요'라고는 못할 흉악한 드래곤의 얼굴. 놀라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하지만 리니스가 놀라건 말건, 마그마 드래곤은 하던 말을 계속 했다.
[의료 머신의 기능은 멀쩡한가 보군. 오래된 거라서 잘될지 몰랐는데.]
의료 머신. 그런 단어가 나왔다는 건, 자신을 치료해준 것이 이 사람… 아니, 이 용이라는 이야기일까. 확실히 정황상으로 봐선 그것이 맞다.
리니스는 눕혀져있던 몸을 일으키고 마그마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나았으면 꺼져라. 거슬리니까.]
대놓고 폭언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마그마 드래곤은 리니스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벽에 등을 기댄 후 천천히 바닥에 앉아, 다리를 주욱 펴고 고개를 숙였다. 내버려뒀다간 그대로 잠들어버릴 생각 만만이다.
"뮤우!"
[… 뭐냐.]
자신의 왼손 부근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마그마 드래곤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귀찮게 굴지 말고 빨리 사라져'라는 의미가 담긴 위협에, 리니스조차 움찔하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여기서 꺾였다간 죽도 밥도 안된다는 생각에, 리니스는 두려움을 참고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뮤우, 뮤! 뮤우!"
[……]
"뮤, 뮤우 뮤! 뮤우뮤우!"
[……]
"뮤웃! 뮤뮤, 뮤!"
… 과연, 여기까지가 되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다고 해도 참기 힘들다. 손 근처에서 노는 건 그렇다쳐도, 다리 위로 타고 올라와 가슴을 밟고 얼굴에 올라오기까지 했다. 레플리로이드이기에 발톱에 긁혀도 아플 일은 없지만, 기분나쁜 건 어쩔 수 없다.
마그마 드래곤은 리니스가 얼굴 앞에서 뛰어내리는 틈을 노려 오른손을 휘둘렀다. 뛰어난 감각을 지닌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낚아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뮤우?!"
꼼짝없이 붙잡힌 리니스는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로, 마그마 드래곤이 정말로 힘을 주고 붙잡았더라면 지금쯤 리니스는 묘사하기 차마 끔찍한 꼴이 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건 상당히 '가볍게' 붙잡고 있다는 이야기. 물론 아무리 '가볍게' 붙잡고 있다고는 해도 원래의 힘이 힘이니까 지금의 리니스가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일 리 없다.
마그마 드래곤은 리니스를 붙잡은 채로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갔다.
[죽일 생각까진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꺼져.]
마그마 드래곤이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골목과 연결되어있는 오래된 지하창고. 마그마 드래곤의 거체─그것도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인─를 숨기기 위해서, 급한대로 마련한 은신처 치고는 꽤나 그의 마음에 들었던 장소다.
조용히 문을 열고, 주변을 살핀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주저없이 리니스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냥?!"
갑작스레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 리니스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면에 부딪히기 직전에 간신히 세이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리니스는 고개를 다시 돌린다.
─마그마 드래곤은 온데간데없고, 굳게 닫혀진 철문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냐냐냐냐냐냐냐냐냐냐냐냥?!"
급한대로 앞발톱을 이용해 열심히 긁어보지만 그런다고 문이 열릴 리는 없다.
리니스는 망연한 얼굴로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 분명 밖에다 내다버렸는데 왜 여기에 있는거냐.]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그마 드래곤은 가볍게 한숨을 쉰다.
─그의 앞에는, 아까 내다버렸을 때와는 달리 먼지투성이가 된 고양이가 있었다. 사람이나 마그마 드래곤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작은 구멍. 그것을 찾아내서 기어들어온 것이다.
마그마 드래곤은 리니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박스를 걷어차, 조금 전 리니스가 들어온 구멍을 막아버린다. 그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주변의 기물들을 사용해서 하나하나─ 그러나 확실하게 막아간다.
그 행위에 리니스가 점차 몸을 떨던 중, 마그마 드래곤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좋다, '뮤우뮤우라는 소리를 내는 기이한 생물' 녀석. 상대해주지. 어디 이번에도 밖으로 던져져서 들어올 수 있나 두고 보겠다. 네 녀석의 그 잠입 테크닉을 모조리 내 앞에서 보여봐라. 전부 쳐부숴주마.]
오해하고 있어.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어, 이 사람?!
리니스가 아연실색하고 있는 사이, 마그마 드래곤의 거대한 손이 그녀를 다시 한번 낚아챘다.
'이렇게 되면, 다소의 소모를 각오하고…!'
리니스는 결심을 굳혔다.
<제 말이, 들립니까?>
[……?!]
마그마 드래곤은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 주변에 그의 감각에 걸리는 '인간'은 당연히 한명도 없었다.
[청각 센서가 고장났나… 하지만 엑스에게 크게 데미지를 입은 건 없는데.]
<다릅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거니까… 라고 할까 혹시나 해서 해본건데 역시 들리는군요!>
[…… 곤란한걸. 아무래도 심각하게 고장이 난 모양인데. 의료 머신은 나한테 쓸 수 없고─]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환청도 아니고 노이즈도 아니에요!>
[… 그럼 좋다. 지금 나한테 말하고 있는 네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단 거냐.]
그렇게 대답하는 한편 센서의 감도를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센서에 걸리는 생물이라고는 자신의 손에 붙잡혀있는 고양이 뿐─
<지금 당신 손에 잡혀있는 그 고양이예요!>
[………………]
정확히 5초.
마그마 드래곤의 사고와 행동이 완전히 정지한 시간이다.
오른손에 들어간 힘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리니스는 간신히 빠져나왔고, 마그마 드래곤의 앞에 섰다.
─그 직후.
─그녀의 몸이,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그마 드래곤의 시각이 한순간 그 기능을 잃어버렸을만큼 강한 빛.
물론 마그마 드래곤은 레플리로이드 중에서도 굴지의 무도가다. 시각이 없어진 정도로 그의 전투력에는 거의 영향이 없고, 이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있다.
그러나 그가 경계했던 '공격'은 오지 않았고, 잠시 후에 그의 눈을 가렸던 '빛'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고양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승복을 걸친 여인만이 남아있었다.
IRREGULAR HUNTER - X
8화
마그마 드래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여인─ 리니스를 보고, 다시 손을 보고, 다시 그녀를 보고. 그것을 몇번인가 반복하더니 조용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 수면은 충분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꿈'이라는 광경인가. 나는 레플리로이드니까 이런 현상을 겪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이건 꿈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고 제대로 현실이니까요."
리니스의 말에, 마그마 드래곤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사기칠 생각하지마라. 그게 진짜라면 좀전의 고양이는 어디로 치운거냐.]
"그러니까, 좀 전의 고양이가 저고 제가 그 고양이예요."
리니스는 한번 더 빛을 발했고,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인간의 모습이 된다.
"이제 됐죠? 그럼─"
[… One More Time, please.]
"곤란해요. 벌써 마력 소모가 심해져서… 라고 할까 대위기?! 우와아, 마력 모자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없는데!!"
잠시동안의 소란이 그치고.
간신히 리니스는 마그마 드래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넌 뭐인거냐. 인간이 됐다 고양이가 됐다 할 수 있는 생물은 아직까지 들어본 적 없다. 아니라면 그거냐. 라이칸슬로프인가 뭔가 하는 변신 종족인거냐. 다른 거라면 츄바카브라─]
"… 늑대도 아니고 살아가는데 피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미엔 간 적도 없구요. 부탁이니까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시겠어요?"
[… 미안하군. 이런 일은 처음 겪는거라서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일단 '들어'는 주지. 말해봐라.]
"네, 그러면 먼저─"
리니스는 차근차근히 자신과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신이 '리니스'라는 이름을 가졌고,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커녕, '이 세계'의 출신도 아니라고 하는 것.
자신이 '마법'과 그것을 사용하는 '마도사'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왔다는 것과, 바로 얼마전까지 어떤 마도사의 '사역마'였다는 것까지.
리니스에게 듣기로, 사역마라는 건 마도사와의 계약을 통해 그의 시중을 드는 존재라고 한다.
[그럼 그 사역마로서 마도사의 옆에 있어야할 네가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이유는 뭐냐.]
"거기부터가 본론입니다만… 저는 그녀의 사역마인 동시에, 그녀의 딸을 교육하는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그녀와의 계약이 해제되고, 보통의 고양이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기간 한정 계약이라는 건가.
본래 그녀의 정체는 단순한 살쾡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교육'을 맡았던 짧은 기간동안 '이성'과 '지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조만간 그녀는 그 모든 걸 잃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고 능력을 빼앗기게 된다는 건 좀 가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에, 저기…"
[응?]
"제 말… 믿으시는 건가요…?"
아까부터 쭈뼛거리던게 그것 때문이었던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 거짓말이 섞여있는건가?]
"아니오, 그렇진 않지만…"
[그럼 문제없잖나.]
애초에 마그마 드래곤 자신도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고, 아르카디아 이외의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해도 놀랄 것은 없다. 물론 '마법'이라는 물건에 대해서는 상당히 예상밖이었지만…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녀석'과의 결판 이외의 다른 것따윈 알 바 아니다.'
이레귤러로 전락하고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지금.
싸우는 것 이외의 것을 할 수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은 '싸움'밖에 없다.
[사정은 알았다. 하지만 그걸 어째서 나에게 이야기하는 건지 아직 말하지 않았다만.]
"… 네. 본래의 저는 이미 보통의 고양이로 돌아갔어야 하지만, 저는 아직 사라질 수 없어요…!"
그녀는 알아버린 것이다.
계약이 끊기기 직전, 그녀의 주인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그녀의 계획이 진행되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되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부디 힘을…!"
이날, 리니스가 한 행동은.
이 이후에 정해져있던 운명을, 크게 비틀어놓게 된다.
파직, 하고.
작지만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오르면서 손을 거부한다.
"스물 여섯번째 시도 실패…"
엑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눈앞에 있는 '검은 책'을 바라보았다.
자동 수복 장치가 따라가지 못할만큼 '거부'당한 덕분에, 그의 오른손은 상당히 너덜너덜해진 상태. 물론 이것도 내버려두면 낫겠지만, 그걸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접촉을 시도했기에 생긴 부상이다.
그 시도를 '책'도 알아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지나치게 연속으로 방전해서 출력이 떨어진 것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손을 댔을 때와 비교해서 엑스의 손을 휘감는 '거부반응'은 상당히 줄어들어있었다.
물론 그 이외에 건진 것도 있다.
'역시 생각했던대로…'
하야테가 간직하고 있던 이 책.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오히려 아르카디아의 데이터 베이스에 가깝다. 어떤 원리로 '책'의 형태이면서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까진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것은 엑스에게 있어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하야테가 모아놓은 괴기현상 관련책의 내용들처럼, 이 책이 사실은 보통의 책이고 엑스의 손을 튕겨내는 건 무언가 오컬트적인 것이 일으키고 있는 일이었다고 하면 전혀 손쓸 수 없었을테니까.
"자, 그러면…"
상대의 정체가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한 것'이라는 걸 알아냈다면 그 다음 해야할 일은 정해져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 이 책이 행하는 거부반응은 총 4가지.
첫번째는 경험했던 대로 강렬한 스파크. 전투형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엑스의 손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정도의 출력이다.
두번째는 고열의 화염과 극저온의 냉기. 물론 그 발동시간과 범위가 극히 짧기에, 피해를 입는 건 엑스의 손 뿐.
세번째는 인식 왜곡. 앞의 둘을 돌파할 경우, 교묘하게 시각, 청각, 촉각을 속여 책에서 손이 벗어나도록 만든다.
마지막은 단순한 압력. 세번째까지 넘으면, 그때는 단순한 '힘'으로 밀어내 책에서 손을 떨어뜨린다.
그저 억지로 누르려고 했다간 거부반응에 의해 되려 쓴맛을 보게 된다. 보통의 레플리로이드(혹은 엑스가 아직까지 그 존재를 모르는 '마도사'라고 하는 이들)라면 그냥 포기하거나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해제하려고 들겠지만, 다행히 엑스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없는 힘이 있다.
우선,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겉표지에 닿는 순간 맹렬한 스파크와 함께 통증이 밀려올라왔다.
"큭…"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아프다. 안그래도 지금 오른손은 상처투성이라서 아픈데.
「볼트 캣피쉬」
전기를 다스리던 메기형의 레플리로이드. 엑스의 오른손이 그의 것으로 변하고, 엑스의 손을 감전시키고 있던 스파크들이 맹렬한 기세로 오른손에 빨려들어갔다.
책에서 방전되던 스파크가 모조리 흡수되고, 지극히 짧은 순간 거부반응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직후, 이번에는 책에서 솟아오른 불줄기와 냉기가 오른팔을 휘감고 위로 올라온다. 화상과 동상으로 인해 손에 흡수되어있던 전격으로 만들어낸 그물망이 단숨에 파괴되버리고, 엑스의 장갑에 손상을 입히기 시작했다.
「블리저드 버팔로」
「플레임 스텍」
얼음의 힘을 가진 들소형 레플리로이드, 그리고 불꽃의 힘을 가진 사슴형 레플리로이드. 엑스의 오른손과 왼손이 그들의 것으로 바뀐다. 오른팔에서 만들어진 얼음의 장갑으로 불줄기를 막고, 왼손을 뒤덮은 고열의 불꽃으로 냉기를 막아낸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수증기가 방안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주위의 온도를 조절하고, 책에서 나온 거부반응을 상쇄한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거부반응은 인식 왜곡. 책의 위치는 변함없지만 엑스의 감각 자체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결코 책에 손이 닿지 않도록 하는 거부 반응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엑스의 선택은
「마그넷 센티피드」
자력을 조절하는 힘을 지닌 지네의 레플리로이드. 그의 힘으로 '책'에 자력을 걸고, 자신의 손을 끌어당기게 한다. 이 방식이라면 아무리 감각을 흐트려놓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히고 촉각이 이상해졌어도, 책쪽에서 저절로 손을 이끌어줄테니까.
이야기로는 길었지만 여기까지 돌파하는데 약 5초. 그 동안 행해진 공방 횟수는 1200번을 넘는다. 돌파하는 쪽도 그것을 막아내는 쪽도 비정상. 지구의 상식은 물론이고 아르카디아와 미드칠더, 혹은 근대 베르카의 기준으로도 있을 수 없는 연산속도로 '공격'하고 '방어'하고 '교체'하고 '상쇄'하며 '반격'한다.
'역시나, 인가…!'
아르카디아에도 몇개 안되는 기간트급 슈퍼 컴퓨터. 그것과 동등 수준의 연산능력을 가진 '컴퓨터'다. 그것이 정답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그에 가까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엑스의 '해킹'에 여기까지 저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증거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무형의 압력'. 속성도 없고 계산도 없는, 단순한 '힘'으로 밀어내버리는 거부 반응. 전기도 불꽃도 얼음도 자력도, 이 거부 앞에서는 힘을 잃고 튕겨져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이버 피콕」
본래는 현실이 아닌 사이버 공간 내에서 해킹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 타입의 레플리로이드. 그의 힘이 엑스의 오른팔을 통해 재현된다.
─즉, 엑스의 원래 오른팔이 사라지고, 그 팔꿈치 부분에서부터 푸른 색의 에너지체와 같은 무실체의 팔이 새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힘들과는 달리, 소울 바디로 이루어진 팔. 그것은 자신을 거부하는 압력을 반대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남은 것은 '상성'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힘 대결. 압력을 밀어내고 책에 닿은 엑스의 소울 암이, 책이 만들어낸 프로텍터와 부딪혀서 그것을 해제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책은 프로텍터가 해제되자마자 그것을 재구성하여 엑스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미 앞의 네개에 달하는 방어벽(거부반응)을 잃어버린 책으로서는 이 프로텍터 프로그램만이 유일하게 남은 방패. 그러므로 쉽게 돌파당해줄 리 없다.
엑스가 해제하고, 책이 복구한다.
서로 맞서는 둘의 속도는 거의 동등. 아니, 근소한 차이로 엑스의 속도가 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빨라졌어?!'
느닷없이 책의 연산속도가 엑스의 속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공수가 역전되어, 이번에는 책이 엑스에게 침입하고 엑스가 그것을 막는 형태가 되었다.
'어째서 갑자기 빨라진거야?!'
… 아니, 다르다.
책의 연산 속도가 빨라진 게 아니라, 자신이 느려졌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른 레플리로이드의 힘을 빌리는 데에는 제약이 많이 따른다. 지금처럼 신체의 일부─팔이나 다리─를 해당하는 레플리로이드의 것으로 바꾸는 정도가 한계라는 것과… '시간'과 '횟수'의 제한.
자주, 그리고 강하게 사용할수록 에너지 소모가 심해지고, 그 출력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든다. 다른 레플리로이드의 힘을 사용한 것에 비해, 지금 사이버 피콕의 힘을 사용한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대로 계속 막고 있어봐야, 이쪽의 프로텍터가 깨지는 건 시간문제… 그렇다면…!'
엑스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결심을 굳혔다.
지금껏 플레임 스텍의 것으로 되어있던 왼팔을 들어올리고
「사이버 피콕 더블」
그 팔 역시, 사이버 피콕의 것으로 바꾼다.
왼팔 역시 팔꿈치부터 소울 바디로 바뀌고, 오른손처럼 책에 갖다댄다.
사이버 피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더 줄어들지만, 그에 비례하여 책에 대한 공격 속도가 올라갔다.
─남은 시간 1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103683장.
─남은 시간 0.82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88621장.
─남은 시간 0.54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52017장.
─남은 시간 0.33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40285장.
─남은 시간 0.28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29463장.
─남은 시간 0.03초.
남아있는 방벽의 수 9983장.
─남은 시간─
남아있는 방벽의 수─
[거절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스스로 해라.]
마그마 드래곤은 거기까지 말한 후 몸을 돌려,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의 말과 행동에, 리니스는 잠시 숨을 멈출만큼 경직되었다.
[너를 구한 건 단순한 우연과 변덕이 겹쳐진 결과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걸 오해하면 곤란하지.]
분명히 마그마 드래곤에게는 있을지 모른 다. 그녀를 도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리니스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누가 됐든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도와야할 이유는 없다. 그럴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엑스에 대한 것만도 충분히 벅찼다. 다른 일에 끼어들만한 여유나 여력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을만큼.
리니스는 얼굴이 약간 창백하게 되어있었지만,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원래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렇네요… 확실히 말씀하신대로예요."
확실히 리니스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자신의 주인이었던 '그녀'를 막기 위해서는 리니스의 힘만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상대가 '그녀'라는 점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위험할테니까.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제 일을 돕기 위해 죽어주세요."같은 말을 할 수 있을만큼 리니스는 뻔뻔하지도, 냉혹하지도,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리니스는 마그마 드래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리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해요. 부디 잊어주시길. 그리고… 치료해줘서 고마워요."
[… 말했지만, 단순한 변덕이었다. 감사받을 이유는 없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치료해준 건 치료해준 거잖아요?"
[…………]
돕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한때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몸이고, 비록 사신에게 넘어가 타락한 몸이라곤 하지만 품성까지 팔아먹은 기억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에게 다른 사람을 도와줄만한 여유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네요."
[… 뭐가 말이냐.]
"당신은 레플리로이드… 기계 생명체라고 했었죠? 그런데도 마력이 느껴지다니."
리니스의 말에 의하면, 원래 자신같은 기계 존재에게는 마력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리니스는 자신에게서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라고는 해도, 정작 마그마 드래곤 본인은 마력 자체를 느끼지 못하니까 의미는 없지만).
'… 아, 혹시 저것 때문인가.'
얼마 전 자신의 앞에 나타나고, 엉망으로 박살나있던 자신의 몸을 고쳐놓았던 '푸른 보석'.
그 푸른 보석과 접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자신과 다른 레플리로이드의 차이라면 그것 이외엔 없다.
'그것때문이라면, 그건 정말로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보석이었다는 건가.'
웃기지도 않지만. 스스로 한 생각에, 마그마 드래곤은 쓴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딱히 빗나간 것도 아니었다.
분명 '쥬얼 시드'는, '그런 물건'이었으니까.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여기는…"
그의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은 「도시」. 하지만 엑스에게 익숙한 아르카디아의 도시나, 우미나리 시가 아니다.
처음 보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도시. 재질도, 양식도 그가 알고 있는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장소. 기능미보다는 조형미가 우선시 되어있는 옛 시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고대의 도시가, 그 '책' 속의 안.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지만 그 중 누구도 엑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엑스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이곳이 '책' 속의 세계라면,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은 환영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엑스는 사람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를 더 이동했을까.
"… 있다."
엑스는 걸음을 멈추고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백명이나, 이백명. 혹은 그 이상일지 모르는 이 도시의 수많은 행인들 속에서.
─오직 한 사람.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끌릴 것 같은 긴 은발을 흩날리면서.
루비빛의 눈동자로, 엑스를 직시하고 있다.
"……"
"……"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곧이어 서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섯 걸음정도 남은 시점에서 다시 정지.
"… 당신인가. 아까부터 이곳으로 들어오려고 한 '침입자'는."
"… 당신인가. 이 도시의 주인이고, 바깥의 '책'을 관리하는 자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세계를 여행하며, 그 대부분을 멸망시켜온 경이와 전율의 「저주받은 마도서」.
─통칭, '어둠의 서'.
끝없는 가능성과, 그에 버금가는 위험을 함께 내포하여 성장하는 「푸른 유성의 용사」.
─통칭, '이레귤러 헌터 X'.
서로가 태어났던 세계에서조차 전무후무할 두 '불규칙(IRREGULAR)'이.
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