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나리 임해 공원 AM 5 : 55.
이곳에서 나노하는 유노, 알프를 동반한 채 페이트와 대면했다.
페이트는 알프의 필사적인 호소조차도 외면, 나노하와의 교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나노하는, 그런 페이트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서로가 가진 쥬얼 시드를 전부 걸고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력이자 진심의 승부.
두 사람이 두 사람으로서 있기 위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
─그것에 쓸데없는 방해가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
IRREGULAR HUNTER - X
23화
"보고합니다! 헌터 드래곤은 코드 맘모스와 해변 서쪽에서 교전 중! 헌터 이글은 해변 남쪽에서 코드 펭귄과 대면! 헌터 스파이더는 해변 북쪽에서 코드 맨드릴과 교전을 시작! 헌터 엑스는 현장으로 이동 중이지만, 코드 쿠완거와 코드 비스트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경계한걸까.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린디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을 두려워한 적이 없을 테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경계해야할 존재는 오직 이레귤러 헌터 뿐.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은 '적'이긴 해도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또 분한 일이지만 실제로 자신들은 프레시아와 페이트가 관련된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저러나… 잠시 못본 사이에 모습이 상당히 변했는걸, 저 사람들."
플레임 맘모스도 차일 펭귄도 스파크 맨드릴도, 지금까지의 모습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더욱 커지고, 더욱 험악하며, 더욱 흉측하고… 더욱 강인해보이는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소가 아스라에서 펼친 광역 결계 안이라고 하는 점이었다.
"헌터들에게서 연락은 왔니?"
"네, 왔는데… 왔지만…"
린디의 질문에 에이미는 상당히 대답하기 곤란해했다.
무슨 연락이 온걸까. 린디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마침내 에이미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론 오지 마라.』 세 사람이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은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 라고 하네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헌터 엑스?"
린디의 앞에 띄워진 새로운 스크린에는 막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엑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건물과 건물을 넘어가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괜히 와서 휘말리지 말라는 소리예요. 무시하셔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 셋이 그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상황이 상당히 심상치 않아졌다는 이야기니까, 가능하면 따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확실히 심상치 않아진 것 같긴 해요. 저 사람들 모습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지금 보내줄 게요."
린디가 말하자, 그것을 들은 에이미가 재빨리 컴퓨터를 두들겨 엑스에게 영상을 전송했다.
─전송하기 무섭게, 엑스의 얼굴이 굳었다.
<… 이건 설마─>
"알고 있는건가요?"
<… 네에. 만약 이게 제가 알고 있는 그 물건이라면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설령 가더라도 크로노 레벨이 아니라면 지극히 위험하고.>
"… 정확히 이건 뭐하는 물건이지?"
크로노가 질문했지만, 엑스는 잠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엑스에게 있어서 이것과 얽혔던 기억 중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이름은 '리미티드(Limited)'라고 불리는 반유기체계 기계 생물… 분류는 『레플리 브레인』이라고 해. 레플리로이드같은 기계에 기생해서 그 능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육체 자체도 변질시켜버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알기로 리미티드는 오직 한 개체만이 만들어졌어. 그 한 개체조차도 파괴됐고. 까놓고 말해서, 지금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물건이야.>
"글쎄… 당신이 모르는 것 뿐이고 더 만들어지거나 그때 그것이 남아있던 것 아닌가?"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어. 리미티드도 그 제조자도 내가 파괴했으니까.>
한순간이지만, 린디도 크로노도 에이미도 할 말을 잊어버렸다.
간신히 입을 연 것은 크로노였다.
"… 에, 음…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지만, 그 제조자는 과학자 타입의 연구자형 레플리로이드였어. 바이러스에 걸려 오염되는 바람에 리미티드를 만들어냈고, 그걸 내가 파괴한 거고.>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아니, 물론 의심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살인'같은 걸 했을 리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의심했을 리가 없잖아.
<의심해도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아니, 아니. 믿는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응, 믿고 말고. 안 믿을 리 없지."
'… 약간 정돈 의심했지만.'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크로노는 곧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래서. 이 물건이 레플리로이드에게 달라붙으면 모습이 바뀌고 보다 강하게 된다… 그런건가?"
<아아. 단지 그것만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불필요한 사항이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그런데 하라오운 함장. 부멜 쿠완거와 슬래시 비스트의 사진이 없는 걸로 봐서 이 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맞습니까?>
"… 말 그대로예요."
정말로, 이 소년은 통찰력이 뛰어나다.
<그렇다면 저는 이대로 나노하와 페이트가 싸우는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동료들에게 가보지 않아도?"
<제가 걱정하면 그것만으로도 되려 화낼 사람들이니까요. 게다가… 그들이라면 리미티드 이레귤러가 상대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그것은, 과거 리미티드와 직접 싸워본 경험에서 산출된 적의 스펙 데이터에 근거한 말이기도 했지만.
─동료를 믿는 '이레귤러 헌터'로서의 마음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그 마음을 간파한 린디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우리들은 당신의 의견에 따라 프레시아 테스타롯사의 체포에 주력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엑스는 통신을 종료했고, 곧 스크린이 사라졌다.
"… 함장. 저희는─"
"응. 우리들은 예정대로 프레시아 체포에 집중할거야. 저쪽은… 저 사람에게 맡겨두면 어떻게든 될 거고."
그를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어본 시간은 그보다도 더욱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면 분명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 그렇지만, 괜찮을까요 함장님. 나노하 짱이나 그 애들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응?"
그렇게 생각할 즈음, 에이미가 린디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프레시아 테스타롯사의 가족과… 그녀에게 일어났던 사고에 대해서."
그녀의 말을 들은 린디는 잠시 눈을 감았다.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 확실히 우리 입장에선 나노하 양이나 페이트 양 중 어느 쪽이 쓰러져도 상관없어. 그렇게 싸움으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페이트 양의 귀환 지점을 추적해서 프레시아 여사를 찾아낼테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노하 양이 이겨주는 쪽이 최선이고 가장 깔끔하게 끝나는 방법이니까. 지금은… 혼동을 주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린디의 얼굴에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쓴웃음이 담겨있었다.
[부오부오, 내 상대는 역시 너냐!!]
일단은 그렇게 된 것 같다. 본의는 아니지만. 마그마 드래곤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이 녀석과는 이런 거 저런 거 쌓인 게 많은데다 지난번에도 결판을 못내고 어중간하게 넘어갔기 때문에 다시 붙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다.
나노하와 페이트가 만난 공원의 서쪽 거리.
빌딩도 차량도 많이 있었지만, 사람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라면 마음껏 날뛸 수 있을터.
'그건 그렇다치고 저 모습은…'
마그마 드래곤은 플레임 맘모스의 모습에서, 과거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유추해냈다.
아마도 리미티드 사건이라고 했던가. 그때도 이레귤러들이 본래 모습과 다른, 기이한 모습으로 변이했었다.
게다가, 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다.
지금 플레임 맘모스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전에 만났을 때하곤 비교도 안되게 올라가있다.
<… 리니스.>
<네, 드래곤. 관리국에서 결계 설치를 끝냈어요.>
<좋아. 그럼 너는 지금 당장 엑스한테로 가라. 마도사의 힘은 여기보다 그쪽에 더 필요할테니까.>
<…에?! 하지만…!>
그것은 불과 5분 전까지 리니스가 가장 바라던 말이었다. 그녀로서도 페이트와 알프를 만나고 싶었고, 허락받는다면 설득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플레임 맘모스가 이곳에 나타남으로서 나노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신은 서포트에 전념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다른 데 가있는 넌 여기 있어봤자 큰 도움이 안돼. 괜히 휘말리기라도 하면 골치아파진다.>
<……!>
<날 바보로 알면 곤란하지.>
무도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한 가지가 바로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도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도, 마그마 드래곤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일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리니스의 신경이 나노하와 페이트가 싸우고 있는 바다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다.
<이곳은 나 혼자로 충분하다. 넌 빨리 가서 네 제자 버르장머리나 고쳐놔.>
<… 그럼, 부탁할게요!>
살쾡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리니스는 그대로 뛰어올라,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그것을 확인하고 마그마 드래곤이 고개를 돌린 순간.
─플레임 맘모스가 그 거대한 어금니를 내세우며 돌진해들어왔다.
[큭……!!]
간신히 두 손을 뻗어 플레임 맘모스의 어금니를 받아내지만, 고작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돌진력이 아니다. 지면을 붙잡고 버티던 마그마 드래곤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버리고, 플레임 맘모스는 자신의 어금니를 붙잡은 채 공중에 떠버린 마그마 드래곤을 그대로 밀어내며 돌진을 계속한다.
돌진, 돌진, 돌진, 오로지 돌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딪혀 부숴가며, 오직 앞으로 돌진했다.
자동차를, 벤치를, 가로수를, 가로등을, 건물의 벽마저 뚫어가면서.
[적당히… 하라고!!]
마그마 드래곤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어금니를 붙잡은 방식을 바꿨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을 찔리지 않기 위해 그저 손으로 막는 형태로 붙잡았을 뿐이지만, 자세를 전환하여 위로 올라가 평행봉을 잡는 형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는 반동을 이용하여 그대로 플레임 맘모스의 안면에 무릎차기.
하지만 플레임 맘모스는 끄떡도 하지 않고 돌진을 계속했다.
어차피 그거 하나로 멈출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마그마 드래곤은 곧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어금니를 밟고 올라서서 플레임 맘모스를 뛰어넘어, 이 거대한 코끼리의 등 뒤로 넘어갔다.
물론 그것을 감지한 플레임 맘모스도 더이상 무모한 돌진을 계속하진 않았다. 마그마 드래곤이 자신의 등에 달라붙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움직임을 바꿨다.
─그 거대한 몸집으로 점프하여,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등부터 땅에 떨어졌다.
'……!!'
신음조차 나오지 않을만큼 강한 충격.
얼마 전까지의 플레임 맘모스였다면 이렇게 빠른 행동 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리미티드라고 하는 건 여기까지 레플리로이드를 강하게 만드는 물건이었던가.'
솔직하게 인정하자. 지난번 싸움에서 플레임 맘모스를 거의 끝장내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기억 덕분에, 이 녀석을 경시하고 있었다. 얕보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
무도가로서 가장 해선 안될 '방심'을 한 것이다. 지금 것은 그것의 벌이라고 생각해두자.
플레임 맘모스가 추가 공격을 위해 몸을 들어올리는 순간 마그마 드래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탈했다.
「라이징 파이어」
「파이어 웨이브」
마그마 드래곤이 입을 벌리고 격렬한 화염을 쏟아내자, 플레임 맘모스도 코로부터 불길을 뿜어냈다. 지금까지 플레임 맘모스가 사용한 것은 손으로 들고 투척하던 화염탄이었지만, 지금은 말그대로 '화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두 불과 불이 부딪혀, 주변을 녹여간다.
이곳이 결계 공간 내부가 아니었다면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부서졌을까.
유감스럽지만, 지금의 마그마 드래곤에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밀리고 있었으니까.
[쳇…!!]
마그마 드래곤은 불길을 멈추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마자 플레임 맘모스의 불이 마그마 드래곤의 불을 집어삼켜버리고, 그가 있던 자리를 덮쳐 깨끗이 태우고 녹였다.
설마 자신이 출력에서 밀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주변이 어두워졌다.
황급히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자, 그곳에서는 자신보다도 높이 뛰어오른 플레임 맘모스가 자신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급한대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플레임 맘모스의 체중을 받아들인다. 공중에 떠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방어를 했다고 해도 플레임 맘모스의 추락이 멈출 리도 없고, 마그마 드래곤은 플레임 맘모스에게 깔린 채 지면에 떨어졌다.
굉음.
도로 한복판에 직경 10m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고, 마그마 드래곤과 플레임 맘모스는 그 중심부에 있었다.
플레임 맘모스는 그대로 마그마 드래곤을 밟고 뛰어올라 크레이터 밖으로 나갔고, 마그마 드래곤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조금 전과 이번의 공격으로 받은 데미지를 합치면 그의 몸에 가해진 충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조차도 한순간 휘청거렸을 정도로. 간신히 무릎을 꿇는 것만은 면했지만.
[부오부오부오, 봤냐!! 이것이 이 몸의 진짜 힘이다!!]
… 어차피 아이템빨이겠지, 빌어먹을 자식.
이를 갈지만 저 녀석이 엄청나게 강해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크기는 곧 힘이고 강함! 나보다 작은 녀석이 나보다 강할 리 없지! 역시 지난번에 엑스에게 진 건 내가 방심했기 때문이야! 이번엔 그렇게 안된다고! 반드시 그 녀석을 밟아 뭉개줄테다!]
꿈틀, 하고.
지금 그 발언에, 마그마 드래곤이 반응했다.
[… 한가지 묻지.]
[부오?]
[너…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거냐.]
마그마 드래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레임 맘모스는 폭소를 터트렸다.
[부화화화화화화!! 당연히!! 재밌으니까지!! 나보다 작고 약한 녀석들따윈 살 가치도 없으니까!! 지금 같이 다니는 놈들은 도움이 되니까 살려두고 있는 거지만, 그 이외의 다른 녀석들은 죽여없애는 게 당연하잖아!! 즐겁고!! 재밌고!!]
플레임 맘모스.
이명은 "작열하는 오일탱크".
이레귤러 헌터 제 4 육상부대 출신이며, 주 활동 무대는 중동.
하지만 그는 이레귤러 헌터에 있었을 때부터 자신보다 작고 약한 레플리로이드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인망이 대단히 나빴다. 시그마의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가담했으며, 그 이유조차 "자신의 실력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시험할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시그마의 이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고, 시그마에 대한 충성심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그마의 반란에 가담하면서 본성을 드러낸 것 또한 사실. 엑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용광로 근처에서 다른 레플리로이드들을 태워죽이며 즐기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꼬드겨져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이레귤러'가 된─
[…… 미친 놈.]
마그마 드래곤은 주저없이 그렇게 내뱉었다.
[부옷?!]
[그 따위 성질머리를 하고 있으니 네놈이 그 모양인거다.]
[뭣?! 뭐라고?!]
[네놈이 시그마의 반란에 참가했을 때, 네놈을 따라 반란에 참가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지.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부옷! 당연하지! 그 놈들은 멍청하고 약하고 겁쟁이였으니까! 이 몸을 따를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 그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네놈은 이미 완전히 글러먹었다는 거다.]
반대로 차일 펭귄의 경우에는 그가 17분대에서 이끌고 있던 분대원들이 전원 차일 펭귄을 따라 반란에 참가했다.
확실히 이 녀석은 강하다. 그것이 '리미티드'라고 하는 도구에 의해서건 아니건, 어쨌든 강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비틀거리던 몸을 다잡는다.
꿇을 뻔했던 무릎을 일으킨다.
속으로 욕을 퍼붓는다.
눈앞에 있는 플레임 맘모스를 향해서가 아니라, 이런 한심하고 어리석고 썩은 정신을 가진 소인배의 앞에서 넘어질 뻔 했던 자기 자신에게다.
아아, 그렇다. 자신은.
타오르는 폭염의 무도가 「마그마 드래곤」은.
─이런 놈의 앞에서 쓰러지기 위해, 지옥에서 되돌아온 게 아니다.
['힘'만이 강함의 전부는 아니다… '크기'만이 강함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네놈따위에게, 엑스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네놈은 나한테도 못이긴다.]
[부옷?! 조금 전까지 빌빌거리던 주제에 잘도!!]
그건 인정하고 있다. 확실히 조금 전까지는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아니다.
지금부터 자신은, 이 덩치만 크고 정신은 모자란 코끼리를 두들겨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니까.
자신 역시 이것을 엑스로부터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폭염의 무도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빌어먹을 덩치를 쳐날리기 위해서.
[보여주지… '힘'과 '마음', 그 두개가 합쳐진─ '진짜 강함'을!!]
공원 남쪽의 거리.
이곳에서도 역시, 두 상급 전투형 레플리로이드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톰 이글에 비해, 차일 펭귄은 지상전 전용의 레플리로이드다. 당연히 전술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 지금까지는.
「스톰 토네이도」
「샷건 아이스」
스톰 이글의 오른팔이 발사한 회오리와, 차일 펭귄이 입에서 뱉어낸 얼음의 송곳─ 아니, '얼음의 창'이라고 불러야할 공격들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본래라면 지난번에 엑스가 사용했을 때처럼 얼음을 튕겨내야 정상이지만, 샷건 아이스는 스톰 토네이도를 관통해버리고 스톰 이글을 향해 날아들었다.
[꾸왁, 받아라!!]
스톰 이글이 날개를 훼쳐 그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얼음의 창들을 피해버리자, 차일 펭귄은 두 팔을 넓게 펼쳤다.
그 순간 차일 펭귄을 중심으로 강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스톰 이글을 향해 덮쳐왔다.
눈보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날개를 움직이지만, 그렇게 행동하려고 하는 순간 눈보라에 휩싸였다.
강렬한 눈보라에 뒤덮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리저리 날려다닌다.
간신히 옆에 있는 건물의 벽을 붙잡고 정지하지만, 그때는 이미 또다시 차일 펭귄이 눈보라를 즉시 멈추고 발사한 얼음의 창이 스톰 이글을 향해 날아왔다.
차일 펭귄이야 눈보라를 일으키는 걸 멈췄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 스톰 이글은 아직까지 눈보라에 휘말린 채였다. 어찌되었건 한번 일으킨 눈보라는 만든 사람이 멈췄다고 금방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얼음의 창이 고속으로 날아온다. 보통 같으면 그대로 당해버리거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스톰 이글은 재빠르게 판단해서 움직였다.
입을 벌리고, 철구들을 뱉어낸다.
발사된 철구들은 그대로 날아오는 얼음의 창들과 부딪혀 폭발했다. 그리고 그렇게 폭발하여 부서진 철구 속에서 작은 새 형태의 메카니로이드들이 튀어나와, 뒤를 이어 날아오는 나머지 얼음 창들과 부딪혀 역시 함께 폭발. 눈보라가 멎을 때 쯤에는 스톰 이글에게 날아오던 얼음의 창들도 모조리 박살나거나 빗나가서 멀찌감치 날아가고 난 다음이었다.
스톰 이글은 건물의 벽에 달라붙어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날개를 휘둘러 차일 펭귄을 향해 깃털 폭격. 칼날처럼 날카로운 깃털들은 어지간히 두꺼운 장갑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차일 펭귄은 별 다른 방어 태세도 취하지 않고 몸으로 모두 받아냈고, 차일 펭귄의 몸에 닿은 깃털들은 모조리 튕겨졌다.
깃털들이 모두 떨어지자, 차일 펭귄은 스톰 이글을 향해 다시 한번 샷건 아이스. 아까보다도 훨씬 많은 얼음의 창들이 공중에 떠있는 스톰 이글을 향해 날아갔다.
'피하는 건 쉽다… 그렇지만…'
평면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차일 펭귄에 비하면, 공중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입체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스톰 이글로서는, 아무리 빗발치듯이 쏟아지는 얼음의 창들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아까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이 아니라면 단순히 그 영역을 벗어나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톰 이글 자신이, 적을 앞에 놓고 도망치기만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스톰 이글은 날개를 반쯤 접고, 아래를 향해 고속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물론 차일 펭귄.
쏟아지는 얼음 창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낸다. 가끔 몸에 살짝살짝 스치는 것들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꾸왁, 떨어져라!!]
자신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스톰 이글을 보고 차일 펭귄이 고함을 터트렸다.
그 순간 지금까지 날아왔던 얼음 창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대형의 얼음 창이 나타나 스톰 이글의 바로 정면을 향해서 날아왔다.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날아오는 얼음창을 관찰했다.
앞이 가늘고 뒤쪽이 굵은 송곳형.
그것을 확인한 후, 입을 벌리고 철구를 쏜다.
첫발째가 창의 끝과 충돌한다.
두발째가 창의 끝과 충돌한다.
세발째가 창의 끝과 충돌한다.
네발째가 창의 끝과 충돌하여 폭발하고, 지금까지 깨진 철구들에서 나온 메카니로이드들이 한꺼번에 얼음창과 부딪힌다.
─전부, 철구들이 충돌한 곳과 같은 지점에 부딪히고 폭발했다.
얼음창의 가장 중심부까지 충격이 전해지고, 곧 얼음창 전체에 금이 가더니 산산히 부서졌다.
하나의 거대한 얼음창이 아니라 단순히 작은 파편이 되버린 것들은 스톰 이글에게 부딪혀도 아무런 데미지가 없다. 스톰 이글은 얼음 조각들을 헤치고 날아가, 단번에 차일 펭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벤다.
오른손의 손톱으로.
스치고 지나듯이 베어가르며, 내려온다.
그러면서, 한번 더 벤다.
이번에는 오른발에 있는 발톱으로.
오른손과 오른발로 베어가른 후, 왼발로 차일 펭귄의 가슴을 걷어차 그 반동으로 자리를 이탈했다.
[……!!]
[그래서. 지금 뭔가 했냐.]
차일 펭귄은 걷어차인 가슴 쪽을 툭툭 털어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려 스톰 이글을 향했다.
강철조차 갈라버리는 손톱과 발톱으로 베었음이 틀림없는 가슴과 복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단순히 모습만 바뀐 게 아니란 말이지…]
상당히 태연한 척하면서 말했지만, 지금의 스톰 이글은 속으로 상당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깃털 칼날도 튕겨낸 것까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자신의 손톱과 발톱에 직접 베여도 멀쩡했던 건 아머 아르마딜로밖에 없었다.
[꾸왁. 당연하지. 확실한 승산도 없을만큼 너하고 싸울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야.]
확실히 그랬다.
차일 펭귄.
이명은 "설원의 황제".
원 이레귤러 헌터 제 17부대 소속이었으며, 시그마의 반란에 초창기부터 따랐다. 본래는 레플리로이드들에게도 위험한 극지방의 열악한 환경에서의 활동을 상정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머리 회전속도는 비상하게 빨랐다. 그 때문에 속성도 반대인데다 크기가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힘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플레임 맘모스와는 이런저런 상극성때문에 사이가 대단히 나빴고.
어찌되었건, 그는 시그마의 반란에 합류하기 전부터 교활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너도 너군. 그런 얼간이한테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을텐데 굳이 나와서 고생을 하다니.]
[… 뭐?]
[꾸왁. 그렇잖아? 너도 원래는 우리들처럼 시그마님의 밑에서 일했을텐데.]
[어차피 좋아서 했던 일도 아니니까 알 바 아니고, 누가 그딴 걸 물었나. 네가 지금 말한 '얼간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거냐.]
돌아올 대답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물어본 것은, 단순히 확인을 위해서일 뿐이다.
[꾸왁. 엑스인 게 당연하잖아. 멍청하고 한심한데다 연약해빠진 얼간이라면 그 녀석밖에 없지.]
차일 펭귄의 엑스에 대한 혐오는, 그때에도 이미 극에 달했었다.
헌터로서 가장 필요없는 감정인 '연약함'을 갖고 있는데다 갖고 있는 능력도 제대로 못쓰는 멍청이라 정말로 능력이 있는건지 어떤건지도 모르겠다고.
100년 전 반란 당시에도 시그마는 휘하의 레플리로이드들에게 계속 엑스가 가진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차일 펭귄은 엑스에 대한 악감정만을 키워갔다. 그의 기준으로 볼 때는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던' 엑스가 자신들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을테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100년 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꾸왁, 꾸왁. 이걸로 알았겠지. 이제 너는 리미티드를 사용한 내 상대가 못된다고.]
─시그마의 반란에 따랐다가, 엑스에게 파괴당하기 전의.
[하지만, 나한테도 인정이라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리들이나 지껄이고 있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겠다면, 옛정을 생각해서 봐줄 수도 있어.]
─즉, 이 자식은.
[내가 때려부수고 싶은 건 엑스 뿐이다. 너 같은 걸 상대로 힘 낭비하고 있을 시간 없어.]
─한번 죽어놓고도,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 안되겠는걸.]
[꾸왁? 뭐?]
[너 같이 썩어빠진 놈을 만나게 해봐야 아무것도 안되니까 말이지.]
한번 죽기 전에도, 어렴풋이는 깨닫고 있었다.
한번 죽고 난 후에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싸움을 할 때마다.
누군가를 쓰러트릴 때마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럼에도,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것이, 스톰 이글이 알고 있는 「엑스」다.
자신들 중 그 누가 엑스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엑스와 같이 그토록 고뇌하며 미래로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을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역시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통틀어 오직 엑스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 아직 힘의 차이를 제대로 못느낀 것 같은데. 포기한거냐, 아니면 멍청한거냐. 어쨌든 좋다. 굳이 싸우겠다면, 확실하게 폐기시켜주마!!]
[멍청한 건 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바로 앞의 진실조차 보려고 하지 않는 네놈이야말로, '진짜 이레귤러'다.]
스톰 이글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녀석에게 엑스가 질 거라는 생각따윈 털끝만큼도 하지 않지만, 지금의 엑스는 정상이 아니다. 따라서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절대로 보내지 않는다.
이 녀석을 자신의 손으로 이곳에서 쓰러트린다.
「이레귤러 헌터」는 엑스만이 아니니까.
비록 그 이름을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게 됐다고 해도.
그때부터 품고 있던 신념은, 지금도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천공의 귀공자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우리야!!]
다른 장소보다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있는 공원 북쪽의 거리에서 스파크 맨드릴을 상대하고 있는 웹 스파이더는,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보다도 훨씬 사정이 나빴다.
그의 무기는 라이트닝 웹. 전기로 이루어진 그물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적을 쓰러트리거나 출력을 낮추면 포박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라이트닝 웹」
다시 한번 번개 그물을 발사해서 스파크 맨드릴을 감쌌다.
웹 스파이더와 크기가 비슷했던 저번까지와는 달리, 지금의 스파크 맨드릴은 원래의 2배가 넘는 크기로 불어나있었다. 라이트닝 웹으로도 미처 다 덮이지 않을 정도로.
물론 라이트닝 웹의 전격이라면 딱히 전부 덮이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위력적이지만…
<우걱, 우걱, 우걱, 우걱, 우걱>
… 이것이, 문제였다.
스파크 맨드릴은 자신을 감싼 라이트닝 웹을 손으로 움켜쥐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서 먹어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라이트닝 웹을 먹으면 먹을수록, 스파크 맨드릴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파크들도 더욱 커지고, 더욱 많아졌다.
웹 스파이더 자신도 몸에 전기가 흐르고 있고, 전기 흡수력도 꽤 있다고 자부하지만 지금의 저 녀석 수준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것도 리미티드의 힘인가…!!]
혀를 차면서 자리를 박찬다.
그 자리에, 스파크 맨드릴의 오른팔에 달린 드릴이 웹 스파이더가 있던 곳을 파헤쳤다.
'빨라…!!'
덩치가 훨씬 커졌음에도 스피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지금도 자칫 잘못했으면 맞을 뻔 했으니까.
웹 스파이더는 자리를 이탈하는 것과 동시에 팔을 뻗었고, 그의 체내에서 만들어진 4기의 거미형 메카니로이드가 거미줄을 단 채로 스파크 맨드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미 메카들은 스파크 맨드릴의 몸 여기저기에 부딪히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물론 이 거미 메카들에게 장착된 폭약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왠만큼 강한 전투형 레플리로이드라도 데미지를 크게 받을 정도고, 일반형의 레플리로이드라면 이거 하나로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따겁잖아!! 계속 도망다니지 말라고!!]
스파크 맨드릴은 아무렇지도 않게 쫓아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스파크 맨드릴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전격들이 그를 지키는 갑옷이 되어 폭발의 위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까뜩이나 덩치가 커졌으니 방어력도 늘어났겠지.
스펙에 있어서도 능력에 있어서도, 상대는 자신보다 위다.
하지만, 본래부터 '게릴라'라는 건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법부터 배우고 시작한다. 처음부터 정직하게 정면으로 싸워줄 생각은 없었다.
웹 스파이더는 단 한 곳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스피드로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와 함께 거미줄을 뿜어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어다니며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어놓았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에도, 가로등과 벤치 사이에도, 건물과 차량의 사이에도.
스파크 맨드릴은 드릴을 앞세워 그것을 쫓아다니며 둥지들을 망쳐놓기도 했지만,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냥 내버려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날아오는 거미 메카들을 때려부수거나 몇개 놓친 것은 그냥 몸으로 받아내거나 했다.
확실히 스파크 맨드릴은 빨라졌지만, 전체적인 속도에 있어서는 웹 스파이더가 아주 약간 더 위였다. 그렇지만 웹 스파이더는 이동하면서 거미집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따라잡히는 간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웹 스파이더는 끊임없이 거미집을 만들면서 돌아다녔다.
얼마나 그렇게 만들며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마침내 스파크 맨드릴은 웹 스파이더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거미집을 만들 시간도 없이.
[이제 그만 단념하라고! 자꾸 쫓아다니는 것도 귀찮으니까!!]
[아. 도망치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말하고, 웹 스파이더는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밟고 180도 방향을 바꿔 스파크 맨드릴을 향해 돌진했다.
그대로 드릴을 피해서 스파크 맨드릴에게 달라붙은 웹 스파이더는 강렬한 전격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정. 전격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무, 엇을?!]
[네놈이 전기를 먹는 것처럼, 나 또한 같은 일이 가능하다는거다…!!]
스파크 맨드릴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전격의 갑옷들이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격들은 웹 스파이더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웹 스파이더가 스파크 맨드릴의 전력을 모두 가져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웹 스파이더를 향해 빨려들어가던 전기들이 흐름을 멈췄다.
[웃기지도 않는 짓을! 리미티드로 강화된 지금의 내 힘은 네 용량따윈 가볍게 넘고 있다! 오히려 내가 네놈의 힘을 전부 가져가주마!!]
그렇게 외치며, 스파크 맨드릴은 다시 한번 전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웹 스파이더의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웹 스파이더에게, 이 방법으로 스파크 맨드릴을 쓰러트릴 생각은 없었다. … 그렇다고 하기보다, 쓰러트릴 수 있을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웹 스파이더 역시 마그마 드래곤처럼 「리미티드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며, 그런 물건으로 강화된 스파크 맨드릴의 힘이 자신보다 아래라고 믿을만큼 자신의 성능을 과신하진 않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으로 충분했다.
단 한순간만, 스파크 맨드릴의 몸을 감고 있는 전기의 갑옷이 얇아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까지 웹 스파이더가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은 거미집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에 가늘어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웠지만, 수많은 투명한 거미줄이, 그 거미집들과 스파크 맨드릴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 거미줄을 타고, 거미집 속에 숨어있던 거미 메카들이 날듯이 몰려온다.
비록 스파크 맨드릴이 부숴버린 거미집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숫자가 남아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20체가 넘는 거미 메카들이, 스파크 맨드릴의 뒤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스파크 맨드릴이 부숴버리게 한 거미집은 처음부터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만든 페이크. 처음부터 그 거미집들은 스파크 맨드릴이 피하거나 부수는 틈을 타서 이 투명한 거미줄을 걸어, '부서지지 않은 거미집'들과 연결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설령 인간이 손으로 만진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만큼 가늘지만, 대단히 견고한 실. 그 실을 이용해서 스파크 맨드릴이 어디에 있든 거미 메카들이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의 스파크 맨드릴은 앞에서 달라붙은 웹 스파이더에 신경쓰느라 뒤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다.
이대로 거미 메카들이 스파크 맨드릴에게 붙어서 전부 폭발한다면 쓰러트릴 수 있다.
[멍청이.]
─웹 스파이더의 귀로, 스파크 맨드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미고 있는가 궁금해서 한번 걸려들어줬더니 겨우 이거냐.]
그때, 웹 스파이더의 눈에도 '무언가'가 들어왔다.
줄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거미 메카들.
그 아래 쪽에서 빛나고 있는 '전기 구슬'들이.
[설마 너, 내가 눈치 못챘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땅바닥에 깔려있던 전기 구체들이 일제히 거미 메카들을 향해 튀어올랐다.
─앞서서 달리고 있던 거미 메카들이 전기 구체에 휘말려 폭발하고.
─뒤를 이어 오고 있던 메카들은 그 폭발에 휘말려 폭발했다.
그것을 보고 있을 틈도 없이.
스파크 맨드릴의 왼손이 웹 스파이더의 안면을 틀어쥐고,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카… 악…!!]
그 일격만으로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기고, 웹 스파이더는 그 안에 파묻혔다.
[꽤나 시시하구만, 게릴라 대장.]
스파크 맨드릴은 처음부터 웹 스파이더가 무언가를 꾸미며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 만들어진 거미집을 부수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머지 거미집들을 남겨두었으며, 웹 스파이더가 자신에게 달라붙어 전기를 흡수할 때도 그것이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웹 스파이더를 따라다닐 때부터, 그가 거미집을 만드는 틈을 타 자신도 일렉트릭 스파크를 만들어 바닥에 지뢰처럼 깔아두었다. 혹시나 거미집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다면 그대로 달라붙어 폭발하도록.
아니나 다를까, 웹 스파이더의 진짜 무기는 남겨둔 거미집이었고, 스파크 맨드릴이 깔아둔 일렉트릭 스파크도 그에 따라 움직여 거미집을 터트렸다.
[으, 으윽…]
웹 스파이더는 4개의 팔로 지면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과연, 이라고 할까.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당해주진 않았다.
스파크 맨드릴.
이명은 "호속권의 뇌왕".
원 이레귤러 헌터 제 17 정예부대 출신으로, 엑스와도 전우였던 동시에 저 시그마의 신임까지 받고 있던 1급 대원이었다. 나른한 성격에 귀찮은 걸 싫어하고 게을러터진 레플리로이드였지만, 전투력 레벨만큼은 특 A급.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면 다른 헌터들을 능가할지언정 결코 뒤지지는 않는 활약을 벌였었다.
[뭘 그렇게 일어나려고 발악하는지 모르겠네. 저쪽하곤 달라서 이 세상에 이레귤러 헌터같은 건 없잖아. 근데 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하는거야?]
대답을 하고 싶어도 아파서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비록 전력은 상당히 가져왔지만, 스파크 맨드릴에게 실질적인 데미지는 주지 못했다. 실제로 스파크 맨드릴은 바닥을 뚫고 전기선을 꺼내, 거기서부터 직접 전기를 먹어치워 빼앗긴 전력을 보충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말야. 너희들 지난번부터 계속 달려들고 있는데… 너희가 틀렸고 우리가 옳다고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본 적은 있냐?]
[…… 뭐?]
스파크 맨드릴은 바닥에서 뜯어내 입에 물고 있던 전기선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이 세계엔 우리들을 만든 놈들도 없고, 인간들도 없어. 시그마도 없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고 말야. 그럼 우리들이 하고 싶은대로 움직여도 된다는 거 아냐?]
[… 이 세상 모든 자가 네놈 말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이 세상은 혼돈이 되버릴 거다.]
[그러니까, 그거의 어디가 나쁘냔 말이야.]
[… 뭐라?]
한순간, 고통이 사라졌었다.
[혼돈이니 질서니, 어차피 인간이 멋대로 정해놓은 거잖아. 인간도 아닌 우리가 그걸 왜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건데?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과 대등하고, 성장하기에 따라선 인간을 능가할지도 몰라. 개중에는 능가했다고 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아무튼, 그런 우리가 '인간'들의 기준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
웹 스파이더는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도 아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 아직, 몸은 문제없이 움직인다.
그것을 확인한 웹 스파이더는 입을 열었다.
[… 확실히. 틀린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진짜로 네놈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면 말이지만.]
레플리로이드의 가능성.
레플리로이드가, 인간을 능가하는 새로운 종족이라는 이야기.
그 모든 것은, '시그마의 날' 때 시그마가 내세웠던 이상이었다.
[뭐, 생각하는 건 귀찮거든, 나는. 게다가 시그마가 하는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아서.]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자신이 머리를 쓰는 것조차 싫어할만큼 게으르고.
남의 말에 휩쓸리기 쉬운.
말그대로, '실력과 인격이 어울리지 않는' 레플리로이드.
이 녀석도 다른 이레귤러들과 마찬가지였다.
[분명 네가 말하는대로, 우리들이 옳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놈들이 틀렸다고 하는 건 확실하게 알겠군.]
웹 스파이더라고 해서, 인간의 말에 무조건 따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그가 스스로 지니고 있는 자부심. 그리고 신념.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웹 스파이더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설령 우리가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 이미 알고 있거든. 수없이 틀려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서, '정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바보 하나를 말야.]
흉내를 내보려고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우리들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새로운 정답을 찾아 해매면 된다. 네놈들같은 '오답'을 하나하나 없애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정답이 나오겠지.]
밀림의 게릴라는 다시 한번 투지를 불태웠다.
타카마치 나노하.
페이트 테스타롯사.
두 소녀는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격돌하기 시작했다.
페이트는 상냥한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서.
나노하는 페이트를 슬픔에서부터 구해주기 위해서.
창의 형태로 변환된 나노하의 레이징하트.
대겸의 형태로 변한 페이트의 바르디슈.
두 사람의 마음을 건 무기들이 충돌했다.
그 참격과 진격이 부딪힌 결과는, 완전히 호각. 분홍색의 빛과 금색의 스파크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대로는 벨 수도 뚫을 수도 없다. 그것을 곧바로 이해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밀어내며 떨어졌고, 무너진 자세를 빠르게 가다듬었다.
『Photon lancer』
한발 빨랐던 것은 페이트 쪽.
바르디슈의 낫 형태를 빠르게 해제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금빛 번개 구슬들을 만들어냈다.
『Divine shooter』
그것을 본 나노하도, 결코 빠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레이징하트 역시 바르디슈에 맞서는 것처럼, 번개 구슬과 똑같은 숫자의 분홍빛 구슬들을 만들어냈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대치하던 두 소녀는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소리쳤다.
"파이어!!""슈웃!!"
번개의 창과 빛의 탄환들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발사되었다.
하지만 결코 서로 충돌하진 않았고, 그대로 비껴가며 서로의 주인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페이트는 뒤로 물러나며 빛의 탄환들의 궤도를 파악했고, 그것들이 어느 시점에서 동시에 자신을 노리자 앞에 마력 장벽을 전개하여 막아냈다.
그러나 그녀보다도 나노하가 더욱 빨랐다. 필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번개창들을 피해낸 나노하는 다시 한번 빛의 탄환들을 만들어내 주변에 깔아둔 다음이었으니까.
"슛!!"
나노하가 레이징하트를 휘두름과 동시에, 다시 한번 빛의 탄환들이 페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Scythe form』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바르디슈의 모습이 다시 한번 도끼에서 큰 낫의 형태로 변환된 후 금빛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페이트는 사이즈 폼의 바르디슈를 들고 휘두르며, 나노하를 향해 날았다.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네번.
─마지막 다섯번째는 피해내고, 그 이외의 탄환들은 전부 낫으로 베어내 없앴다.
"아…!!"
그것을 본 나노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판단을 끝맞쳤다.
『Round Shield』
나노하가 왼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고, 레이징하트가 말한다.
그와 함께 나노하의 앞에는 분홍빛의 마력 장벽이 펼쳐지고, 그 직후 페이트의 낫이 그 위에 꽂혔다.
실로 아슬아슬한 타이밍. 조금이라도 펼치는 것이 늦었다면 당했을지도 모른다.
페이트의 낫이 나노하의 방패를 뚫기 위해 스파크를 일으킨다.
이를 악물며 버티던 나노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까 전에 페이트가 피해냈던 탄환을 조작하여 페이트의 뒤쪽으로 돌려보내 공격했다.
'……!!'
그것에 놀란 페이트는 공격을 거두고 한 손으로 마력 장벽을 펼쳐, 빛의 탄환을 막아낸다.
막아내고 나서, 나노하 쪽을 돌아보았다.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던 하얀 소녀가.
그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Flash move』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페이트의 머리 위였다.
페이트의 신경이 디바인 슈터에 팔린 동안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갔고, 고속이동마법을 사용하여 그대로 페이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내린 것이다.
"하아아앗!!"
페이트는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위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바르디슈를 들어올렸다.
레이징하트와 바르디슈의 두번째 충돌.
또다시 빛과 스파크가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력이 정면충돌한 여파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바다가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한다.
폭발과 함께 섬광이 가득 퍼졌고, 나노하는 그 속에서 페이트를 찾았다.
─조금 전 페이트가 나노하를 놓쳤듯이, 이번에는 나노하가 페이트를 놓쳤다.
그렇다면 노리는 것은 아마도…
『Scythe slash』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마자 바르디슈의 기계음성이 들려왔다.
페이트의 짧은 기합소리를 듣고는 위를 올려다볼 틈도 없이 움직였다.
나노하의 구두에서 펼쳐진 빛의 날개가 훼를 치고, 나노하의 몸을 움직여주었다.
그 덕분에 페이트의 낫은 아슬아슬하게 나노하를 스치는 것에 그쳤다.
나노하의 자켓 앞에 달린 리본의 끝이 잘려서 떨어지고, 나노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채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지만.
나노하의 앞에 있는 것은, 그 사이에 페이트가 깔아둔 전격의 구슬들. 아까 사용한 '포톤 랜서'들이다.
『Fire』
페이트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바르디슈가 포톤 랜서를 움직였고, 번개의 창들은 일제히 나노하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레이징하트는 방어벽을 펼쳤고, 나노하는 방어벽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포톤 랜서를 튕겨냈다.
첫발째는 아래로, 두발째는 위로, 세발째는 뒤로, 마지막은 다시 아래로.
포톤 랜서들은 방어벽에 의해 전부 튕겨져 허공이나 바다로 떨어졌고, 그 틈을 타 거리를 벌린 나노하도 페이트도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시간상으로 볼 때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 오고간 공방은 셀 수도 없다.
만약 이곳에 헌터나 이레귤러가 있었고 그들이 이것을 봤더라도, 경악하거나 감탄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싸움은 이레귤러 헌터와 이레귤러의 싸움 중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페이트 테스타롯사는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마법은 마력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하얀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훈련을 받아온 자신과는 달리, 경험은 턱없이 부족한 초보자에 지나지 않았다. 정면대결이라면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 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이 소녀는 강해졌다.
고작해야 몇주일만에,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원인은 알고 있다. 다름아닌 페이트 테스타롯사 자신이다.
이 하얀 소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더 강해져왔다.
그야말로, 페이트의 영역까지.
'방심하면… 당한다.'
─그럴 수는 없다.
어머니를 위해서도.
어머니의 소망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녀의 웃음을 바라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 옛날의 다정했던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서도, 져서는 안된다.
반드시 이 소녀에게 이기고, 쥬얼 시드를 갖고 돌아가야 한다.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자신에게는 필요없었다.
─그래… 기억 속의 어머니가, 자신을 '페이트'가 아니라 '아리시아'라고 부른 것도, 지금은 신경쓸 필요없는 이야기다.
쥬얼 시드를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그 생각 자체가, 자신을 가시덩굴처럼 옭아매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아니, 알면서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이 길밖에 없었다.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것 이외의 '사랑하는 방법'같은 건 모르니까.
부멜 쿠완거.
이명은 "시공의 참절귀".
원래부터 강자들이 많은 이레귤러 헌터 제 17 정예부대 출신이며, 그때부터 냉혹한 성격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의나 악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적은 반드시 살해하고 아군이라도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폐기처분했다.
시그마의 반란에 참가했던 것은 "냉정한 분석을 거듭한 결과"였다고 하며, 시그마의 부하들 중 가장 시그마의 생각을 잘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엑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 쿠완거."
[역시 이쪽 루트를 선택했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분홍빛의 섬광과 금색의 번개가 몰아치는 해변이 멀지 않은 도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이건만, 지금은 부멜 쿠완거가 가로막았다.
원래의 몸과는 다른, 리미티드에 의해 변질된 몸으로.
[역시 과거에 시그마가 했던 말은 맞았던 모양이군. 단순한 B급 헌터에 지나지 않았던 네가 잘도 이렇게까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것에만큼은 감탄밖에 할 말이 없어.]
시그마가 말했다.
자신들을 따르는 레플리로이드를 모아놓고, "엑스는 우리들의 미래다"라고.
그때 차일 펭귄은 이렇게 반응했다. "그런 한심한 놈이 우리들의 미래일리 없다."라고.
플레임 맘모스는 이렇게 반응했다. "아무래도 시그마가 미친 것 같다."라고.
스파크 맨드릴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라고.
그 자리에 있던 레플리로이드 거의 모두가 시그마의 말을 겉으로든 속으로든 부정하던 가운데.
오직 부멜 쿠완거만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대로 그 당시엔 B급 헌터였던 엑스는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평가되던 이레귤러들을 수없이 매장했으며, 끝내는 부멜 쿠완거는 물론 시그마까지도 쓰러트렸었다.
[확실히 너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지. 시그마가 기대했던 그대로. 설마 우리들 전원을 쓰러트려버릴만큼 성장할 거라고는─]
"한가지 묻고 싶은데."
부멜 쿠완거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며 엑스가 끼어들었다.
"네가 말하는 그 '성장'이라는 건… 전투력을 말하는건가."
잠시 동안 침묵하던 부멜 쿠완거는 곧이어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이외에 네놈에게 뭐가 있나.]
지금의 말로 확실해졌다.
아무리 냉정하고 아무리 명석하다고 해도.
부멜 쿠완거 역시, 본질적으론 "단순한 이레귤러"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는 엑스의 성장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부분'. 지극히 빠른 전투력 상승에 대한 것 뿐이었다.
그의 머리에도, 엑스의 '감정'이나 '마음'같은 것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결국 부멜 쿠완거도, 다른 이레귤러 멤버들과 다를 바 없다.
「FIGHT」
엑스의 갑옷이 모습을 바꾼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 변신했던 '스톰'에서, 오직 싸움만을 위한 경량형의 갑옷으로.
쓸데없는 부분들이 모조리 배제되고, 장갑이 극단적으로 얆아진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시그넘과 잠시 겨루었을 때와 비슷한, 격투용의 소매가 없는 슈츠와 몸 여기저기에 최소한도로 장착된 얇은 파츠 아머. 헬멧조차 없다.
[아무래도 확실히 싸울 마음이 든 것 같군. 그럼 나도 사양않겠다! 보여주도록 하지. 내가 얻은 리미티드의 힘을!!]
부멜 쿠완거가 두 팔을 넓게 펼쳤다.
그와 함께, 그의 팔 전완부에 붙어있던 칼날들도 펼쳐진다.
─오른팔을 휘두른다.
─왼팔을 휘두른다.
─다시 오른팔을, 왼팔을 휘두른다.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부멜 쿠완거의 검은 수많은 참격파를 만들어내 발사했다.
수십개에 달하는 참격파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엑스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얼굴과 목을 가리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팔을 스친다.
어깨를 스친다.
살짝 드러난 볼을 스친다.
허리를 스친다.
허벅지를 스친다.
머리카락이 살짝 잘려나간다.
부멜 쿠완거가 날린 참격파의 절단력은 확실히 굉장했다. 일단 닿은 곳에 있는 장갑들은 확실하게 둘로 쪼개졌으니까.
아마도, 지금 엑스가 가진 갑옷 중 가장 방어력이 높은 어스의 아머를 두른다고 해도 이것들을 막아내진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참격파를 쏟아내는 부멜 쿠완거는 그대로 몸을 날려, 참격파들에 섞여 엑스를 향해 돌진했다.
머리를 숙이고, 뿔을 앞세워서 단번에 꿰뚫어버릴 기세로.
엑스는 방어를 위해 교차시킨 팔의 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참격파의 폭풍이 지나가고, 이어서 부멜 쿠완거의 뿔이 엑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엑스의 눈앞에서 부멜 쿠완거의 모습이 사라졌다.
[죽어라!!]
부멜 쿠완거가 갖고 있는 순간이동 능력.
그 힘은 리미티드에 의해 훨씬 강해졌으며, 지금은 특별한 모션이 없이도 바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능력을 사용해서 엑스의 뒤로 돌아와, 팔에 붙어있는 검을 휘둘렀다.
검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엑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 리미티드에는 안좋은 기억이 있어서.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
날아오는 부멜 쿠완거의 검을 왼손으로 붙잡아낸다.
왼손바닥의 장갑이 갈라지고 피를 닮은 의사 체액이 튀어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잡은 채 강제로 끌어당겨, 옆으로 보내면서 부멜 쿠완거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팔을 붙잡힌 채 앞으로 끌려온 부멜 쿠완거는 엑스의 옆을 지나가는 꼴이 되어, 등 위를 엑스의 앞에 드러낸다.
─그 등 위에, 엑스의 오른주먹이 떨어진다.
─주먹은 날개를 부수고, 등을 파헤치고, 복부까지 관통한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아래를 향해 날린 주먹이, 바닥마저 때리고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든다.
─그에 의해, 꿰뚫린 부멜 쿠완거의 몸도 지면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직접적인 충격'.
─곧이어 음속을 넘어선 주먹이 낳은 충격파가, 그 뒤를 이어 발생했다.
─주먹보다 늦게 발생한 충격파가, 관통된 상처를 통해 부멜 쿠완거의 몸 속에서 발생했다.
─폭발하듯이 생겨난 충격파가, 부멜 쿠완거의 몸을 둘로 쪼갰다.
그것으로 끝.
부멜 쿠완거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박힌 오른주먹을 뽑아낸 후, 엑스는 왼손바닥을 들어올려 바라보았다.
단순히 피부와 장갑만이 갈라졌을 뿐, 내부까지 잘리진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도 재생되고 있었고, 몇분만 있으면 흉터조차 남지 않게 될 것이다.
…… 신경쓰였다.
부멜 쿠완거는 나타났지만 슬래시 비스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공포를 모르는 "강철의 파괴왕"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내버려둬서 좋을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엑스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나노하와 페이트가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