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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꽃(수필 모음)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아는 사람만 아는 명곡, 이적의 ‘순례자’를 나는 좋아했다. ‘길은 또 여기서 갈라지고……’라는 첫 소절을 들을 때마다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곤 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정말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분만 그런 것이었고, 눈을 떠 보면 난 언제나 평탄한 외길을 걷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선택의 기로에 선 적은 거의 없었다. 무난하게 친구를 사귀고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다녀온 그런 삶. 전역하고 나선 남들처럼 여자친구도 사귀며 행복하게 잘 지냈다. 내 발밑에는 항상 소소한 금빛 모래가 반짝였고, 난 거기 시선이 팔려 앞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걷기만 하면 새로운 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빛 모래가 깔린 길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아니, 어쩌면 가벼운 산들바람 정도에 모래가 산산히 흩날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애처롭게 모래 알갱이를 찾아다니다 문득 고개를 들자, 그제서야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지나온 길의 모래가 죄다 날아가 버려서 발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공무원 공부는 몇 년을 질질 끌었다. 참을성 있게 날 기다려주던 여자친구는 끝내 날 포기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모님도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채근했다. 그에 대한 내 최초의 선택은 ‘도피’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난 부모님과 누나들을 졸라 노량진에 방을 하나 마련한 뒤 그 안에 칩거했다. 공무원에 합격할 때까지 혼자 지내리라는 각오로 왔지만, 정작 혼자가 되자 두려워졌다. 마치 달도 뜨지 않은 밤길을 혼자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근 보름간을 방안에 처박혀 흐느끼며 그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야, 난 비로소 걸을 수 있었다.

새벽 수업을 듣기 위해 밖으로 나온 첫날, 난 검푸른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길을 걸었다. 콘크리트뿐인 회색 길을 걷다 문득 MP3를 꺼내 보았다. 이 안에 있는 노래를 지운 후 동영상 강의를 집어넣어야 했다. 노래를 모두 삭제하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순례자’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채, 눈을 감고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그러자 이제야 정말 갈림길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간 걸어왔던 길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고, 이제부터 새롭게 걷고, 새롭게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아주 먼 훗날 힘이 다할 때 나 웃고 잠들 수 있을까.’ 난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따라 불렀다. 다행히 이적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도록 ‘나조차 모르고 좇는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걸을 것을 충고할 뿐이었다. 그거면 내겐 차고 넘치도록 충분했다.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MP3의 노래를 모두 지웠다. 수 년 간을 함께 했던 ‘순례자’도 함께 지워졌다. 그렇지만 그 가사는, 그 음은, 그 끝없는 길은 고스란히 내 안에 있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후, 난 가방을 고쳐 메고 학원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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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가사

순례자

길은 또 여기서 갈라지고 다시금 선택은 놓여있고
내가 가는 길 내가 버린 길 나 기억할 수나 있을까
어느 하늘 어느 대지 어느 바다 어느 길 끝에
나조차 모르고 좇는 그 무엇이 있을까
해는 또 언덕을 넘어가고 바람은 구름을 불러오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나 그저 걸을 수 있을까
어느 하늘 어느 대지 어느 바다 어느 길 끝에
나조차 모르고 좇는 그 무엇이 있을까
돌아가고 파 고개 돌려도 흩어진 발자국 하나 찾을 길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길의 시작은 여긴가
별은 또 갈 길을 일러주고 이슬은 눈물 덮어주고
아주 먼 훗날 힘이 다할 때 나 웃고 잠들 수 있을까

 
경기도시공사에서 수필 모집할 때 썼던 글입니다.
제게 힘을 주었던 이적의 노래는 여전히 제 애창곡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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