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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깎던 노인(팬픽&패러디 모음)


구속영장 깎던 노인


벌써 한달 전 일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아청법을 몸으로 겪을 때다. 트러블 다크니스를 사려면 일단 법에 걸리지 않는지 알아봐야 했다.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구속영장을 깎아 부치는 노인이 있었다.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기 위해 그만 아청법을 해제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들은 척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좀 이놈의 법을 완화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발의된 법을 에누리하겠소? 더러우면 다른 나라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아청법 해제는 흥정하지도 못하고 법 적용을 너그럽게 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영장을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깎는 것 같더니, 이내 속도가 붙어 마치 감자를 깎듯 우르르 내놓는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차고 넘치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잡을 놈은 다 잡을 것 같으니 그만 깎으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주문한 트러블 다크니스가 집에 올 시간이 빠듯해 왔다. 불안하고 긴장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법을 완화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깎아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잡을 만큼 잡아넣어야 실적이 오르지, 여기서 그만두면 회식비나 나오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하드코어 배포자가 다 잡혔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이제 다운로더만 남았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계속 잡겠소."

하고 내뱉는다. 88만원 세대로서 이민갈 자금도 없고, 책은 이미 도착한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애원을 하면 점점 잡을 놈이 많아진다니까. 영장이란 신속하게 깎아야지, 늦게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컴퓨터에 입력하고 태연스럽게 대량 프린트를 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아청법이 사회 이슈가 된 것을 확인하더니 다 됐다고 내게도 영장을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영장이다.

괜히 상담하다 영장을 받은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법을 집행해 가지고 정의가 구현될 턱이 없다. 시민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영장만 되게 청구한다. 법질서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다시 접속해 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여성부 배너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비글을 닮았다. 충성스러운 눈매와 축 처진 귀에 내 마음은 약간 일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증가한 셈이다.

집에 와서 영장을 내밀었더니 아내는 이미 하나 더 왔다고 야단이다. 일전에 다운받은  R-15 애니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19금이 아닌 애니가 잡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거의 대부분의 애니에 있는 교복이나 로리 캐릭이 성교 행위나 유사 성교 행위, 노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모든 행위를 하는 게 잡힌다고 한다. 요렇게 뭉뚱그려 놓으면 어떤 애니라도 아청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궁금증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증오스러웠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일본 애니 세일러문은 아름다운 미소녀 전사가 악을 물리친다는 단순명쾌한 구조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끈 전연령 대상 애니다. 그러나, 요새 아청법에 의하면 불필요한 노출을 일삼는 애니일 뿐이다. 예전에는 애니를 제작할 때, 교훈성과 상업성을 함께 추구했다. 이렇게 이야기와 재미를 함께 고려한 후에야 비로소 작품을 완성한다. 이것을 고전 명작이라 한다. 그러나 요새 한국 애니는 교훈성만을 추구한다. 완성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애니가 아이를 망친다고 버젓이 뉴스에 나오는 우리 사회에서 상업성을 고려한 애니가 나올 것 같진 않다.

게임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게임을 실행하면 스토리는 얼마, 캐릭터는 얼마, 게임성은 얼마, 식으로 구별했고, 한번 흐름을 타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곤 했다. 가령 게이머 원사운드는 '시바...... 게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란 말을 남겼다. 그가 세운 기록을 사회에서 알아주는 건 아니다. 단지 그는 그냥 한 것이다. 열정이다. 지금은 그런 열정조차 걸 데가 없다. 여성부는 지속적인 셧다운 제도로 청소년 프로게이머를 비롯한 여러 유저를 물먹였고, '강박적 상호 작용'과 '과도한 보상 구조', '우월감 및 경쟁심 유발'을 들먹이고 있다. 그들은 여성은 여성이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지만, 게임을 들먹일 그 순간만은 오직 모든 게임을 사회 부적응자가 되는 지름길로 몰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여성부 게임평가를 만들어냈다.

이 영장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이 보기에 죄를 지었구나 하는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법질서를 집행한담.'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를 노려보는 세상에서, 어떻게 게임과 애니를 가질 수 있담.'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떡값에 사과상자라도 건네주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출두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노인은 나처럼 미천한 소시민이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 노인이 있었던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허전하고 허탈했다. 내 마음은 훈방조치되었음에도 안타까웠다. 저 멀리 여성부 홈페이지 배너를 바라보았다. 아, 그때 노인의 자리가 저 옆에 있었겠구나. 열심히 영장을 깎다가 유연히 여성부와 하이파이브를 나누었을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그래서요? 깔깔깔.'이란 여성부의 명언을 되새겨 보았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컴퓨터를 포맷했다. 전에 아내 몰래 신작 애니를 챙겨보던 기억이 난다. 애니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네티즌이 크게 숨 쉬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빅파이니 정을 준다느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지금도 날 지켜보고 있을 영장 깎던 노인이 생각난다.
가장 최근에 쓴 작품입니다.
아청법 관련 이슈가 터졌을 때 속에서 열불이 나 이렇게 토해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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