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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깎던 노인(팬픽&패러디 모음)


[FATE] 운수 좋은 날


이날이야말로 후유키 시에서 마술사 노릇을 하는 시로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초깡패 헤라클레스를 칼리번으로 단매에 때려눕힌 것을 비롯하여 무슨 떡고물을 얻으려는지 불쑥 나타난 캐스터를 어영부영 소멸시켜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마침내 세이버와 데이트를 하기로 되었다.

첫 투영에 이십만 엔, 둘째 번엔 오십만 엔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투영을 연달아 실패했던 시로는 만 엔짜리 지폐 무더기가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칠십만 엔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세이버와의 데이트 비용으로도 쓸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토오사카에게 루비 두어 개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토오사카가 카드빚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생활피도 없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이자 한 번 갚아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지름이란 놈에게 돈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지른다는 자기의 신조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돈을 보탠 적이 없으니 빚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듯이 누워 일어나기는커녕 새로 모로도 못 눕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빚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대영수컷을 때려잡은 일 때문이다. 그때도 시로가 오래간만에 전투에 참가해 기껏 잘 싸웠더니 시로의 말에 의하면, 오라질년이 천방지축으로 대영수컷의 손아귀에 잡혔다. 마음은 급하고 강화마술은 깨질 듯해 채 칼리번을 투영하기도 전에 가진 보석을 몽땅 마술에 사용하더니 그날 저녁부터 가슴이 땅긴다, 억울해 죽겠다 하고 눈을 흡뜨고 지랄을 하였다. 그때 시로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년, 마술사는 할 수 없어. 마술에 실패해서 탈, 성공해서 탈,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하고 투덜대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흡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시로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이 빚쟁이가 그러고도 보석탐은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루비가 갖고 싶다고 시로를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이자도 못 갚는 년이 보석은 또 사용하고 지랄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루비를 사 줄 수도 있다. 빚에 눌린 토오사카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이​리​야​(​나​이​불​명​)​에​게​ 대영수컷 피규어를 사 줄 수도 있다. --
칠십만 엔을 손에 쥔 시로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눈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소스와 국물으로 얼룩진 옷소매로 닦으며, 집문을 나설때였다. 옆에서 '마스터!'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세이버인 줄 시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이버는 다짜고짜로,

'그럼, 제가 곁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죠. 서번트로서, 마스터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아마도 좀전에 튕길 듯 말 듯 했던 것은 대세인 츤데라라 함이로다. 오늘 가기로 작정을 하였건만, 좀전에 거절했던 게 있어 어찌 할 바 모르다가 마침 나가려는 시로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입가의 밥풀도 떼지 않아 묻히고 오고, 비록 고급은 아닐망정 토오사카의 파자마를 입고 아침나절에 집에서 뛰쳐나와 시로를 뒤쫓아 나왔으랴.

'그것은 서번트로서 말인가, 아니면 알트리어로서 말인가?'

하고, 시로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하인근성이 충만한 이 여자를 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연이은 승리와 투영의 성공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토오사카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토오사카는 그 잔고가 0인 통장에 다크서클이 듬뿍 가미된 큰 눈을 박으며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거지가 됐는데...'

하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래도 시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가난뱅이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나가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찍이 들어와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서번트로서 따라오겠단 말을 들은 순간에 세이버를 희롱하던 손, 세이버와의 행위를 관찰하던 음란한 눈, 끝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 터는 토오사카의 얼굴이 시로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마스터는 날 데리고 갈 거냔 말입니까?'

하고 세이버는 초조한 듯이 마스터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

'최고급 꽃등심 가게 오픈이 열한 시에 있고, 그 다음에는 동물원 사자우리 개방이 두 시라던가'

라고 중얼거린다.

 (중략)

 그는 불행이 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세이버와 아까까지 즐거운 데이트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곧 불행을 향해 달려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근처 공원에서 서번트가 나온다. 그의 누런 갑옷은 황금을 처바른 듯, 노란 머리는 악취미적으로 세우고, 허여멀건한 얼굴에 비웃음을 띄워 한결 재수없고 뭉툭한 귀걸이를 제딴에는 패션이라고 달아놓은 듯한, 시로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잡종, 자네 세이버와 데이트한 모양일세 그려. 재미 많이 봤을 테니 이만 죽어버리게'

금삐까는 마술사를 보는 말 맡에 부르짖었다.

(중략)

시로는 반 죽은 와중에도 루비를 사 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아버지의 유산인데,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다. 만일 시로가 반 죽은 상태가 아니었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 -- 대영수컷이 지나간 뒤의 폐허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빚으로 신음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혹은 시로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을 년, 주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하여간 시로는 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피냄새 -- 거실 벽에 잔뜩 칠해진 피, 토오사카의 몸 여기저기에 묻은 피, 한바탕 난리를 치르느라 엉망이 된 부엌에서 나는 냄새 등이 무딘 시로의 코를 찔렀다.
집안에 들어서며 루비를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시로는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 오라질년, 다쳐서 누워있으면 제일이야! 주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누운 이의 몸을 몹시 흔들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건 트윈테일일 뿐 몸은 송장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흔들어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주인은 식객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삼단 같은 환자의 트윈테일을 붙잡아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년!'

'......'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루 보지 못하고 천정만 바라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이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시로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루비를 사 왔는데 왜 쓰지를 못하니, 쓰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FATE 세이버 루트+운수 좋은 날 패러디입니다.
가급적 둘 모두 보고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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