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묵시록 카이지X월야환담 시리즈] '늪'의 몰락
‘늪’의 몰락
특이한 데라곤 아무데도 없는 빌딩에 세 남자가 섰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이었다. 야쿠자처럼 생긴 선글라스 남자, 얼굴에 칼자국이 난 비쩍 마른 남자, 그리고 짧은 머리를 하고 재수없는 면상을 한 남자. 이들이 일행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요소는 단 하나, 굳은 결의였다.
“이제 시작입니다. 사카자키 씨, 엔도 씨.”
“그래. 이제 시작이다.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희뿌연 세 줄기 담배연기가 도시의 더러운 공기 속으로 섞이는 것을 바라보며 셋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날이다, 라고.
따지고 보면 이들은 절대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제애의 지하도박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던 카이지, 불법금융업을 하고 있던 엔도, 야간경비원을 하고 있던 사카자키. 세 사람은 무슨 일을 꾸미기는커녕 옷깃이 스치기도 힘든 인연이었다. 하지만 운명인지 셋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카이지가 극적으로 지하세계에서 일시적인 휴가를 얻고, 엔도가 파산의 위기에 처하고, 사카자키는 가족들과 이별하게 되었다. 제각각의 사정들이었지만 해결책은 간단했다. 거액의 돈. 그것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돈이면 해결 안 되는게 없다는 말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 만큼이나 설득력이 있다. 카이지는 이들을 잘 구슬려 거액의 돈을 만들 방법을 철저히 모색해 보았다. 그 결과가 지금 향하는 곳이다.
카이지의 발밑에는 불법도박장이 있었다. 여러 도박이 있었지만 가장 베팅이 큰 것은 바로 ‘늪’이라 불리는 기계였다. 한 개 4000엔인 구슬들이 쌓이고 쌓여 물경 7억에 달하는 괴물. 그 기계를 털 수만 있다면 이들 모두는 걱정 끝 불행 끝 해피해피~라는 이야기. 물론 그 기계가 정직한데 사람들이 재수가 없어서 여지껏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래서 카이지는 온갖 비책을 준비해 두었다. 사카자키와 짜고 ‘늪’을 부순 후 부품교체를 하게 만들었고, 위층의 환풍구를 뚫어 기계의 점검봉을 바꿔치기했다. 게다가 근처의 공사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건물의 구석에 20톤의 물을 몰아넣어 건물 전체를 기울게까지 했다. 한 개도 아니고 세 개의 비책이라면, 승률은 70% 이상이다.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겠지만, 그때의 운은 이제껏 실패한 사람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을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는지 셋은 필터까지 담배를 피우고도 쉽게 버리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는 가운데 엔도가 먼저 꽁초를 버렸다. 카이지와 사카자키도 얼굴을 굳히며 꽁초를 발 아래 놓고 짓밟았다. 카이지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보죠. 그동안 짓밟아온 자들을 짓밟기 위해.”
“가자.”
군자금과 독기를 가슴에 품고 세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시끌벅적했다. 도박이라는 게 결국 잃게 된다는 게임인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부나방처럼 몰려든다. 자신만은 대박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헛된 꿈을 꾸는 사람들. 지갑이 바닥나고 사채꾼들이 몰려오고 결국 집에서 쫓겨난 후에 꿈을 깨는 사람은 오히려 이른 편이다. 그 지경에 이르고서도 그동안 잃은 돈에 집착하며 사기와 강도를 일삼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자들도 부지기수다. 멀든 가깝든 언젠간 그렇게 될 인종들을 향해 카이지는 비웃음을 날렸다. 그들과 자신은 다르다. 그들에게 이것은 게임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전투다. 그것도 전략과 전술 모두를 치밀하게 준비한.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이치죠우를 찾았다. 그 거만한 낯짝에 대고 선전포고를 한 후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늪’앞에 이치죠우와 몇몇 직원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이치죠우 일행은 야구모자를 쓴 장신의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선객인가. 조금 귀찮게 됐군... 아니, ’벽‘을 허물어뜨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먼저 좀 기계를 달궈놓는 것도 괜찮겠지’
카이지와 엔도, 사카자키는 이치죠우 앞에 멈춰섰다. 그제서야 이치죠우는 그들이 온 것을 눈치챘다.
“카이지? 어떻게 네놈이 여기에?”
“흥.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한 판 하려고 왔다.”
“그래... 뭐, 그것도 좋겠지.”
이치죠우는 기분나쁘게 큭큭 웃고는 과장된 손짓으로 환영의 인사를 했다.
“카이지 씨에게 있어선 귀중한,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저희 카지노에서 보내주신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보내드려야 할지... 하지만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그때 이치죠우의 뒤에 있던 장신의 남자가 모자를 고쳐쓰며 말했다.
“헤이. 그쪽이 손님이라는 건 알겠는데, 내 쪽이 먼저야. 점장씨, 그렇지?”
“예. 차례는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천 엔으로는 저 게임을 하실 수 없습니다.”
“왜? 어차피 구슬이 한 개가 있든 백 개가 있든 기계 안에서는 하나씩만 움직이잖아.”
“그건 그렇겠지만 저희 가게에서는 삼백만 엔 이상 카드를 끊어야 저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점원들이 설명해드렸을 텐데요.”
“Shit! 재팬은 이런 부분이 너무 깐깐해!”
남자는 모자를 벗어 붕붕 휘두르며 과장된 실망의 몸짓을 했다. 모자를 썼을 땐 잘 보이지 않았는데, 벗고 나니 희한하게도 백발의 외국인이었다. 긴 백발을 흩날리며 어린아이처럼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무슨 탤런트가 드라마를 찍는 것 같다. 하지만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잔뜩 해진 청바지와 라운드 티를 입고,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모습은 마스크가 받쳐주든 말든 영락없는 히피였다. 별볼일 없는 놈인 것 같았기에, 카이지 일행은 어서 그가 떠나줬으면 했다. 잔뜩 결의를 굳히고 왔는데, 이상한 놈 때문에 긴장이 풀려선 곤란하다. 그것은 이치죠우도 마찬가지였는지, 직원들을 시켜 그를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남자가 먼저 출구 쪽을 향했다. 그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볼을 부풀리며 외쳤다.
“알았어! 삼백만 엔이라고 했지? 그 정도 돈, 복권 몇 장이면 만들 수 있다구!”
외국인이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자 이치죠우는 화가 난 얼굴로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누가 저런 녀석을 들여보냈어? 요즘은 신원인식이 그리도 허술한 거야?”
“아닙니다. 분명 근무는 제대로 섰는데, 어쩐지 저희도 모르는 새 들어와선...”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지금은 중요한 손님을 맞아야 하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시말서 내용이나 생각하고 있어!”
한편 카이지 일행은 외국인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묘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살다살다 저런 또라이는 처음 보는군.”
엔도가 입을 열자 사카자키가 맞장구쳤다.
“놔둬. 자기 동네에선 저런 게 통하나 보지.”
“동감입니다.”
세 사람은 느슨한 표정으로 서 있다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눈앞에 이치죠우가 다가와 예의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로서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군요. 담당직원을 확실하게 문책할 테니, 저 사람은 이쯤에서 잊어주시고 게임을 하도록 하지요. 그럼 어떤 게임을 하시겠습니까? 저희 가게는 룰렛이나 바카라 같은...”
“그럼...”
카이지는 뚜벅뚜벅 걸어가 늪 앞에 섰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치죠우는 표정이 굳어졌다.
“이거다. 이 ‘늪’을 하고 싶어...!”
“어딜! 이건 너희 같은 가난뱅이가 할 게임이 아냐!”
발끈하는 직원을 제지한 채 이치죠우는 상냥하게 물었다.
“직원의 폭언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 게임은 최소 삼백만 엔 이상의 금액이 필요한데 말이죠. ”
“돈이라면 있어.”
엔도가 가방을 열었다. 잠깐이었지만 이들은 가방이 열리는 순간 눈부신 빛이 뿜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가방 안에는, 가방만한 부피의 금괴와 맞먹는 액수의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디서 이런 돈을 구한 걸까. 저 수완좋아 보이는 엔도라는 남자의 짓일까. 이치죠우는 이를 악물었다. 표정관리를 하려 해도 놀라움을 숨기기 힘들었다. 카이지는 그런 그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오천 만 엔이다. 충분하겠지? 이 정도 액수면...”
이치죠우는 한참 침묵하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저 기계가 난공불락인 건 너도 확인했을 텐데?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지? 그렇지?”
“흥.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 뻐기다가 내가 세게 나오니까 의심이 나서 그만두고 싶은 거야?”
“뭐라고!”
“사실이잖아? 아니면 이 카지노의 명물, ‘늪’이란 녀석을 믿지 못하는 건가? 하긴,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 어차피 네 녀석은 이 정도가 한계니까. 네 놈은 이곳의 관리자일 뿐이야! 하하핫!”
이치죠우는 대답 대신 거칠게 카이지의 멱살을 잡았다. 웃음소리는 멎었지만 카이지의 냉소는 이치죠우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곧 풀고,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손을 털었다.
“흥. 제 발로 죽으러 왔으니 말릴 필요는 없겠지. 이봐, 게임 준비해!”
“예... 따라오시죠.”
직원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카이지가 신발을 벗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이치죠우는 직원 하나에게 슬쩍 물었다.
“설정은 빠짐없이 되었겠지?”
“예. 방어벽 체크도 빠짐없고, 설정 C로 맞춰져 있으니 절대 녀석들은 이길 수 없습니다.”
“좋아.”
이치죠우는 낮게 중얼거리고 카이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상관, 쿠로사키가 인정한 남자 카이지. 그의 파멸이 곧 펼쳐질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그는 카지노의 지배인으로서가 아니라 구경꾼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카이지의 발버둥을 지켜보기로 했다.
‘늪’은 과연 늪이었다. 카이지가 준비한 비책과 이치죠우의 방어책이 곳곳에서 현란하게 부딪쳤지만, ‘늪’자체의 힘이 더해지면서 카이지는 점점 구렁에 빠지고 있었다. 이치죠우는 슬슬 긴장에서 풀려 미소까지 띠게 되었지만, 카이지의 표정에서 미소 따윈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구슬은 점점 떨어져 갔지만, 3단 원반은 도무지 자신의 문을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구슬이 다했다. 카지노의 직원들과 제애의 심부름꾼들이 그를 둘러쌌다. 카이지는 여태까지의 당당함은 간곳없고 히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쌌다. 벌써부터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을 흉하게 적시고 있었다. 심부름꾼들의 손이 그의 옷을 잡고 자리에서 끌어내려 했다. 그때 카이지는 소리를 질렀다.
“돈! 돈이라면 아직 있어! 70만...!”
“안돼, 안돼!”
이치죠우의 손이 돈을 쳐냈다. 허공에 흩날리는 70장의 지폐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는 카이지를 향해 이치죠우는 독설을 퍼부어댔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가게는 최저 300만엔이 있어야 ‘늪’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지. 70만엔 따위 푼돈으로는 할 수 없는 고급이라구! ”
“이치죠우... 어떻게 좀, 깎아서...”
“안 돼! 물러나!”
이치죠우가 밀치자 그에게 매달리던 카이지는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는 4000엔짜리 구슬이 가득 쌓인 곳이었다. 돈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 그였지만 조금도 기쁠 리 없었다. 직원들이 그를 일으키려 하자 카이지는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제발 누가 도와줘! 돈이야! 돈! 보면 알겠지! 이제, 이제 조금만 더...!”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아니, 속으로는 그들도 카이지를 돕고 싶었다. 이제껏 누구도 하지 못한 경지에까지 이르고, ‘늪’을 진정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뛰어난 청년이다. 하지만 그를 도우려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카이지는 다시 소리질렀다.
“당신들도 봤잖아! 조금만 더 있으면 함락이야...! 조금만 더...! 나에게 힘을!”
마지막 대사는 마치 변신소녀물에 나오는 대사 같잖아, 하고 이치죠우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여기 둘러선 머저리들 중 카이지를 도울 만큼 얼빠진 작자는 없다. 실제로 저들 모두 비분강개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자리에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님 하나하나의 인상과 신원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런 반응을 예측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카이지와 그 일행들을 내쫓고 최고급 와인으로 직원들과 건배하면 오늘의 일과는 끝난다. 카이지는 끌려나오면서 계속 발버둥을 쳤지만, 이치죠우의 눈에는 더러운 벌레가 사람에게 밟힌 후 마지막으로 꿈틀대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질끈 묶은 백발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이보라구! 삼백만 엔! 가져왔다!”
“아니... 당신은 아까...”
느닷없는 타이밍에 이치죠우와 구경꾼들, 심지어 카이지와 제애의 직원들까지도 동작을 멈췄다. 백발의 외국인은 스포츠 스타처럼 이마의 땀을 상큼하게 훔치며 싱긋 웃었다. 그는 품에서 다섯 장의 복권을 꺼냈다. 급히 긁은 티가 역력한 즉석복권에는 제각각 백만 엔, 육심만 엔, 사십만 엔, 그리고 오십만 엔 두 장의 당첨금액이 적혀 있었다. 한 번 보기도 힘든 고액의 당첨복권을 이런 데서 무더기로 보게 되다니!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합친 인생으로도 이 정도의 양을 맞추긴 힘들 것이다. 그런 것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마련해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큭! 어떻게 이런... 당신! 번호를 조작한 거 아냐?”
“조작? 노, 노. 나 진... 아니, 아르곤은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않아. 언제나 당당하게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 의심되면 확인해보든가.”
“아니... 하지만 우린 원칙적으로 현금을...”
“사장님이 영 쪼잔하시군. 그럼 이건 어때?”
아르곤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외국인이 복권 다섯 장을 몽땅 이치죠우에게 안겨주었다. 그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후, 복권과 아르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르곤은 씨익 웃었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올 거라 확신했다.
“이게 진짜라는 건 확실해. 그리고 난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냐. 어차피 저 기계를 정복하면 돈은 얼마든지 딸 수 있잖아? 그러니 이걸 받고, 카드에 사천 엔만 충전시켜 주는 거야. 그 정도 푼돈이면 잃어도 큰 손해는 없잖아? 그리고 당신은 앉아서 삼백만 엔을 버는 거지.”
“......”
이건 보통 미친 놈이 아니다. 7억 엔을 쏟아붓고도 어쩌지 못한 기계를 구슬 하나로 점령하겠다고?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어딘가 미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란 게 이치죠우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실제로, 얼마 전 사카자키가 승려의 복장을 하고 와 신불의 가호를 빌 때도 혹시 해서 내버려두기도 했다. 그가 호기심이 많다기보다는, 인간의 호기심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권을 조작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이렇게 단시간에 할 순 없을 터였다. 혹시 회장에게서 메시지가 있을까 해서 기다려봤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손짓해서 카드를 가져오게 했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었지만, 구슬 한 개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느니 얼른 쫓아내려는 생각도 한몫 했다.
심부름꾼들에게 붙잡힌 채 구슬더미 속에 누워있던 카이지와 아르곤의 눈이 마주쳤다. 아르곤은 눈을 찡긋 감으며 카이지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카이지는 그를 미친놈으로 여겼기에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질질 끌려갔다. 이치죠우는 손수 문을 열어 그를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기 전에 강한 기세로 문이 열렸고, 그 서슬에 이치죠우의 몸이 튕겨나갔다.
“카이지! 무사해?”
“아저씨! 어디 갔다 온 거에요... 우린 다 끝났어요!”
“아직 안 끝났어!”
사카자키는 들고 온 가방의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지폐다발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이치죠우와 직원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건...”
“돈이다, 돈! 네놈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돈! ”
사카자키는 돈을 집더니 냅다 이치죠우의 얼굴에 던졌다. 지폐다발의 끈이 허술했는지 지폐가 사방으로 날렸다. 직원들이 황급히 날리는 돈을 줍다가 이치죠우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덜덜 떨면서 소리쳤다.
“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알잖아! 저 기계는 어떤 수단을 써도 정복할 수 없어! 이미 충분히 비참해져 놓고...!”
“터졌다!!!!!!!!!!!!!!!!!!!!!!!!!!!!!!”
어마어마한 고함 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뭣!!!!!”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늪’으로 달려갔다. ‘늪’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하는 낮은 소리는 마치 우는 소리 같았다. 그동안 정복되지 않았던 무적의 기계가, 한 사람의 침입자에게 굴복하는 자신을 원통히 여기고 있었다. 아르곤은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곤 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카이지와 이치죠우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마치 형제 같은걸. 보기 좋은데?”
“누가! 그보다 이런 사기꾼 같으니! 구슬 한 개로 무슨 짓을 한 거야! 여러분,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흥분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지가 통과한 것처럼, ‘벽’을 가볍게 통과하고...”
“구슬 움직이는 게, 마치 손으로 방향을 정해 굴리는 것처럼...”
“원반을 통과하는 걸 보니까, 얼음으로 된 길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매끄럽게...”
마지막 말을 듣고보니 문득 실내가 조금 추워진 것도 같았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어쨌든 이치죠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끝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털썩 주저앉아 아르곤이 구슬을 열심히 쓸어담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구슬을 쓸어담던 그가 문득 카이지를 바라보고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카이지는 엉겁결에 손을 벌렸고, 그러자 한 줌의 구슬과 풍선껌 하나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아르곤은 7억 엔짜리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그거 줄게.”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열심히 인형의 눈을 붙이는 중이었던 래트와 몬티는 마스터의 외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모처럼 손에 들어온 거액의 비자금으로 아르곤은 플랙스 메디컬에 투자를 시도했다. 한국에 막 들어와 한참 주가가 오르는 것을 주목했기에, 7억 엔을 10억 엔까지만 불린 다음 에스프리의 자금으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세건이란 녀석이 플랙스 메디컬의 본사를 말 그대로 날려버리면서 주가는 블랙 먼데이가 아니라 블러디 먼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곤두박질했고, 아르곤은 괜히 “팬텀, 이 개자식은 잘만 벌던데!”라며 하늘을 우러러 절규했다. 아르곤은 형편없는 액수로 떨어진 비자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냥 그 돈으로 자기 무기나 하나 사기로 했다. 진마 마리아에게 부탁한 후, 그 자신도 잊을 때 쯤에서야 물건이 도착했다. 며칠째 콩나물 라면만 먹어 초췌한 얼굴이 된 래트와 몬티는 구슬꿰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서 돈이 나 이런 괴물딱지를 산 겁니까! 저희 모르게 숨겨둔 돈 있는 거 맞죠?”
안광을 빛내며 따지는 몬티를 눈앞에 두고 아르곤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거트가 영양실조로 반쯤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오리콘 포니까 오리콘 차트라고 하죠, 마스터.”
“시끄러! 아예 빌보드 차트라고 하지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