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X 퇴마록] 그들의 전쟁

녹는다.

녹는다.

녹고 있다.

얼굴을 쥐어뜯는다. 팔을 문지른다. 옷을 벗는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몸뚱아리가 녹아내리는 게 멈추지 않는다. 미츠리가 비명을 지른다. 그 입술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보인다. 얼마나 그 입술에 입맞춤하고 싶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나의 입술이 녹고 있는 건 아닌지 만지는 게 고작이다.

교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뛰어나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거워지는 몸을 움직여 겨우 출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참극은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짓밟힌 버러지처럼 복도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다. 제대로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바깥에서는 이러한 참상을 알고 있을까? 아니, 불과 몇 분 사이에 평온하던 학교가 이렇게 되었다. 제대로 알릴 여유가 있을 턱이 없다.

문득 무슨 소리가 들렸다. 챙챙챙 하는,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면, 아직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다. 난 어떻게든 그쪽을 향해 가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이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다리가 꺾이고, 그 다음엔 팔이, 다음에는 목이 - 그리고 난 어느새 바닥에 엎드린 꼴이 되었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는 가운데, 내 바로 코앞에 있는 손 하나가 녹아드는 게 보인다. 부식의 정도가 다른 사람보다 심해서 손가락 하나가 벌써 보이지 않는다. 그 손이, 서서히 움직여, 내 얼굴로 다가온다. 얼굴을 약간 들어보니, 눈꺼풀이 녹아 안구가 드러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괴물은 싫어.

괴물은 다가오지 마.

그럼 나는?

볼이 바르르 경련했다. 녹아드는 손은 내 볼로 향했다. 그 손이 닿기 바로 조금 전, 볼에서 무언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 눈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부위가 없었다. 그 눈이, 방금까지 내 볼살이었던 단백질 덩어리가 바닥에 철퍽 흘러내린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와라, ​세​이​버​어​어​어​어​어​어​어​!​!​”​

바깥쪽에서 아련하게 들리는 외침이 들린다. 아마도 환청이겠지. 이 절망의 구덩이 안에서 저렇게 기세좋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난 흐려져 가는 정신을 재촉하며 다만 어서 기절하기만 간절히 바랐다. 그 바람은 바깥에서 빛이 번쩍하는 순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요이치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사건으로부터 나흘 뒤였다. 신체 여기저기가 녹아내린 학생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화상보다도 질이 나쁘다고 할 정도로, 학생들은 예외 없이 신체의 일부분을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다른 학생들보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의 경우 쇼크로 인한 일시적인 것으로, 곧 회복했다. 왼쪽 볼의 살이 떨어져나간 것은 피부이식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다고 한다. 오른쪽 볼과 눈꺼풀, 입술이 녹아내린 미츠리의 경우에는 성형수술을 해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요이치의 옆 침대에 누운 채 그녀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요이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울다가 쇼크 증세를 보여 실려나갔고, 그 뒤로 병실을 옮겼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유는 무엇일까. 테러라도 당한 것일까. 정신이 들고 나자 요이치에게는 이번 사건의 원인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조바심 속에서 tv를 켜 보니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캐스터는 아무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후유키 시의 고등학교에서 가스누출사고가 일어나 학생과 교사 등이 병원에 실려갔다고 말했다. 자료화면도,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 뉴스 말미에 나오는 ‘오늘의 ​사​건​사​고​’​식​이​었​다​.​ 화면이 곧 전환되고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보며 요이치는 처음엔 의아해했고 나중엔 분노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상식을 초월한 일이었다. 그 자신도 직접 겪었지만 제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이상한 일은 그 일을 직접 겪은 학생들이 그때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 한두 명과 이야기할 때는 쇼크로 인한 일시적 기억상실일까 생각했는데, 병실 안에 있던 모든 학생이 과거의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과연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사실이기는 한 걸까? 아니면 자기 혼자 사건에 대한 망상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그때의 고통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학교는 절대 꿈이 아니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고통을, 미츠리와 그밖의 사람들의 아픔을 되갚아줄 대상이 없어져 버린다. 평소 음모론을 좋아하던 요이치였기 때문에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건을 일으킨 누군가’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묘하게 적중하였다.

“역시, 뭔가 있었어.”

되찾은 목소리로 요이치가 중얼거렸다.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에서 탈출해 학교로 돌아와 보니 수상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부서진 창문이나 여기저기의 벽이 깨진 흔적이 보였다. 위치를 살펴보니 누군가가 다른 대상을 이리저리 내동댕이치다가 창문으로 던진 듯 했다. 아래로 내려와 살펴보니 분명 누군가 추락한 흔적이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창문을 깰 힘은커녕 교실의 문을 열기도 힘겨워했다. 분명 그 사건에 영향받지 않은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서 명함을 꺼내들자 그것을 받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한국인 펜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보내준 명함이었다.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리로 전화해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예를 들어보라고 하자, 그는 다음 편지에서 ‘주술이나 심령적 사건’이라고 답하며,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이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명함에 적힌 한국의 누군가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성이 느껴졌다.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긴장해서 그는 떠듬떠듬 이야기했다. 취미로 익힌 한국어가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저,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 연락드리는데요, 후유키 고등학교에 있는 요이치라고 합니다. 그쪽이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한국어를 익히긴 했지만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위해 취미삼아 익힌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회화한다면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은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일본에서 전화할 정도면 장난전화는 아니란 거네. 그래, 무슨 일이야, 고등학생?”

“제가 고등학생인 걸 어떻게……?”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복잡한 거 생략하고, 요즘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 봐요.”

뭔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요이치는 정신을 집중해 하나하나 떠올렸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자유로운 손을 들어 입을 누르며, 그가 보고 겪은 일들을 리플레이했다. 생각을 마치고 나서야, 여자가 어째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침착하구나. 많은 일을 겪느라 고생 많았어.”

갑자기 여자가 목소리를 달리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다정하고, 좀 더 배려심이 깃들어 있었다. 왜 태도가 달라진 것일까? 이래서야 마음 속을 샅샅이 읽힌 것 같지 않은가? 요이치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하려 애썼다.

그때 등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 도망가면 안 되지, 소년.”

요이치는 수화기를 든 채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수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병원 관계자처럼 생기진 않았다.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그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그는 남자의 손에 잡혔다.

“으윽! 이거 놔! 당신 병원 사람 아니지?”

“그래. 마술사 협회 소속이다.”

“마술사……?”

상식을 초월하는 일은 이제 그만! 요이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요이치의 손에서 핸드폰을 나꿔채 그것을 가만히 듣다가 전원을 껐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은 걸까? 남자는 느릿하게 말했다.

“한국어로군. 난 한국어는 몰라. 라틴어는 알아도.”

“라틴어?”

“마술을 쓰려면 기본적으로 관계되는 지식이 적힌 책의 언어를 알아야 하지. 독일어나 프랑스어도 조금씩은 할 줄 알지만, 한국은 마술이란 게 전무한 오지여서 언어를 익힐 필요가 없었어. 그나저나 이 여자는 누구일까?”

요이치는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눈을 마주보았다. 절대 겁먹으면 안된다. 설사 지금 상황이 뱀 앞의 토끼와 같다 할지라도, 당하기 전까지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이 남자에게 여자에 대해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좋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온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목적?”

남자는 손을 놓았다. 남자의 손에 지탱되던 요이치의 몸이 살짝 중심을 잃었다. 그때 남자는 여유있게 요이치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외국어를 중얼거렸다. 요이치의 눈이 서서히 흐려지고, 입가에 침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남자의 손이 조금씩 빛나면서 그 빛이 요이치의 머리 안으로 흡수되어갔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들자 요이치는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 쓰러진 것을 들쳐업으며 남자는 귀찮은 기색을 듬뿍 담아 말했다.

“이 녀석이 마지막인가. 이제 기억조작 같은 귀찮은 짓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군.”

 

“현암군! 신부님! 준후야!”

평소 승희답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마침 집 안에는 그녀가 부른 대상 전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일전에 큰 사건을 해결한 후 휴식차 며칠간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휴식 중에도 신부복을 입고 있었던 박신부가 제일 먼저 뛰어나오고 그 뒤를 현암과 준후가 이었다. 둘은 한참 게임 중이었는지 약간 부루퉁한 기색이었다.

“승희야, 무슨 일이니?”

박신부가 온화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흥분한 승희를 편안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아까 투시한 참혹한 영상을 떨쳐내려 머리를 붕붕 흔든 후 승희는 입을 열었다.

“큰 사건이 있어요. 누군가 제게 연락해서 그를 투시해보았는데,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고 또 벌어질 거에요. 그것을 막아야 해요.”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불안했다. 마지막에 요이치가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요이치의 마음이 어두운 기운에 의해 닫히고, 그 직전 ‘매지션’이란 말이 들렸다. 그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누군가가 관련되어 있었고, 최악의 경우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일으킨 사건일 것이다. 수십, 수백명의 몸이 녹아내리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일으킨 존재를 막을 수 있을까?

승희는 다시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꾸짖었다. 이런 일행을 두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이들과 함께 수많은 위험을 겪었고, 그 모두를 이겨내고 이 자리에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어디라도 달려갔고, 그들의 웃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항상 누군가를 구하려 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게 하기 위해 힘을 쌓아온 사람들 - 그것이 자신의 믿음직한 동료들이었다. 힘이 모자란 적은 많았지만, 여태까지 모두를 구해왔고, 구해갈 정의의 사자들. ‘무슨 전대물 같잖아?’ 진지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잠깐 웃음이 나왔다.

승희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일본에 가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