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새로운 조류]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은하영웅전설 새로운 조류 외전 -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인하르트의 거대한 작전, 라그나로크를 실행하기 위해 제국군이 막바지 훈련에 여념이 없는 어느 날이었다. 오전 7시 50분이 되자 부리나케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각자의 위치에 위치하는 인원들이 있었다. 평범한 아침조회 시간인데 어쩐지 필사적일 만큼 빠릿빠릿한 모습이다. 수천 척의 함선 안에서 모든 인원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군율에 철저한지를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이 광경을 그들의 대장, 불꽃 같은 주황색 머리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본다면 흐뭇한 표정을 짓겠지. 이들을 모르는 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도 바보 녀석들은 활발하구만.”
제국군 최강의 무력집단이라 알려진 흑색 창기병 함대의 대장, 비텐펠트는 기함 브릿지에 설치된 ccrv를 보면서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병사들이 저렇게 아침 조회 준비를 열성적으로 하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말하는 참모는 없었다. 그들은 왜 대장이 저런 구겨진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음,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제 목소리 괜찮죠? 어제 술자리가 있어서 술을 한 잔 하고 잤는데, 목이 좀 잠긴 것 같아서요. 아, 문제없다구요? 에헤, 다행이다. 그럼 시작할까요?”
수컷들만 즐비한 함대 전체에 이질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퍼졌다. 마이크 테스트인데 어째선지 벌써부터 전함대에 절찬리에 방송 중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기립해 있던 이백 만의 장병들은 일제히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환호했다. 역시 일찍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뒷돈과 뇌물, 공갈, 협박 등에 의해 기함의 오퍼레이터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음성을 함대에 송출하고 있었다. 어째서 마이크 테스트까지 방송되냐고 묻는 자는 이백만 명 중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몽땅 노출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에이리카 발렌슈타인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고쳐 잡고 ‘본방송’을 시작했다.
“흑색 창기병 여러분,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제국력 489년 12월 24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우주는 새까맣지만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오늘의 해가 떠오를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자, 아직 남아있는 잠을 털어내고 오늘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십시오.”
제국군 소령 에리이카 발렌슈타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흑색창기병 함대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었다. 기립한 채 상큼한 여성의 목소리로 하루를 열며 병사들은 달콤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역시 이런 사무적인 목소리가 더 좋군.’
‘아냐, 아까의 천연스러운 목소리 쪽이……’
‘하악하악 발렌슈타인 짱, 조회 끝나자마자 어제 만들다 만 발렌 짱의 피규어를 완성시키고야 말겠어!’
제국군 제각각의 상념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가운데, 발렌슈타인은 의례적인 방송을 끝냈다. 그녀의 방송은 아침과 저녁, 하루 이틀. 원래 하루에 1회였지만,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높으신 분들의 압력으로 인해 2회로 증가했다. 이미 과거 뮈켄베르가 원수부가 발렌슈타인의 방송을 애청했다는 사실을 쿠데타 이후 알아낸 바 있는 비텐펠트는 그 뒤를 이은 높으신 분의 마찬가지 행동에 대해 아예 체념하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제국 재상 리히텐라데가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에게 사로잡히기 직전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발렌슈타인의 방송 모음집을 듣고 있었던 사실은 현장에 있던 병사들을 철저히 입막음시켰기에 다행히 비텐펠트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방송을 끝내자마자 발렌슈타인 소령은 총총걸음으로 브릿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20분 후, 그녀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큰 쟁반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넘어질 듯한 위태로운 발걸음이었지만 용케도 쟁반을 든 채 비텐펠트의 앞까지 도착했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그녀가 쟁반을 내려놓고 나면 참모진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 그럼 홍차 한 잔씩 하세요. 오늘의 간식은 스콘입니다.”
“흠. 이게 스콘이란 건가……”
참모진과 비텐펠트는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빵이나 과자가 있으면 일단 먹고 보지, 그것의 이름을 알려 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발렌슈타인이 부임한 이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며칠에 한 번 자신이 직접 과자를 구워 대접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남자들은 브리오슈니 마들렌이니 하는 새로운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비텐펠트가 먼저 스콘을 집어들자 참모진들도 뒤이어 제각각 집어들었다. 발렌슈타인은 웃음을 머금고 그들이 스콘을 입에 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귀한 과자를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참모진들은 스콘을 살짝 베어무는 정도에 그쳤지만, 비텐펠트는 코웃음치더니 손에 든 스콘을 우걱우걱 해치우고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그리고 참, 오이겐 중령님, 지난번에 부탁드린 이벤트는 잘 진행되었나요?“
“음. 앙케트 말이지? 마침 집계가 마무리된 참이네. 결과가 나왔는데 지금 볼 텐가?”
“네. 그런데 표정이 좀 안 좋으신데요?”
“아, 아니, 푸흠, 아무튼 보게, 큭큭……”
별안간 흑화가 시작된 중후한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그녀가 닷새 전쯤 오이겐에게 부탁한 것은 ‘평소 제 방송을 들어 주는 장병들을 위해, 소소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싶으니 협력해 달라’였다. 먼 옛날 인류의 기원인 지구에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란 경축일로 정하고 성대한 축제를 벌이며 선물을 교환했다는 데에서 착안해, 장병들에게 깜짝 이벤트를 벌여 줄 요량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생각하는 이벤트란 기껏해야 장병들의 편지를 낭독해주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정도의 범위였다. 하지만 오이겐은 그 말을 조금, 아니 지나치게 넓은 범위로 해석했다. 그녀의 사고와 오이겐의 사고는 아무래도 회랑 하나 분량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콘솔을 조작해 설문 결과를 확인하던 그녀의 눈썹이 조금씩 찡그려졌다. 우선 투표에 참가한 인원이 너무 많았다. 어째서일까? 자신은 고작 수백 명 정도 참여할 줄 알았는데, 이건 어림잡아도 수십만 명이다. 게다가 그들의 의견은 편지 낭독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뭔데 그러나?”
비텐펠트가 몇 걸음 걸어가 그녀의 옆에 섰다. 장신인 그와 여성 중에서도 키가 작은 편인 그녀가 나란히 서자 고목나무 옆의 매미 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둘은 제법 어울렸다.
콘솔을 바라보던 사령관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처음엔 웃음을 참느라 그런 것이었는데, 설문을 읽을수록 점점 화가 치밀고 있다는 것을 참모진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설문을 주도했던 오이겐은 몇 발짝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호오…… 우리 흑색창기병의 제군들이 제법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있군. 발렌슈타인과 하룻밤을? 이봐, 오이겐. 이 녀석 영창으로 보내 버려. 발렌슈타인과 식사 한 끼, 이건 건전하긴 하지만 계집애같은 녀석이군. 그리고 발렌슈타인과 일일 데이트……”
“소, 소리내서 읽지 마세요!”
그 못지않게 얼굴이 새빨개진 발렌슈타인이 급히 콘솔을 몸으로 가렸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체구로는 콘솔 전부를 가릴 수 없었다. 비텐펠트는 요리조리 고개를 내밀어 가며 어렵지 않게 내용을 계속 읽어나갔다.
“어디보자. 설문 1위는……허! 이런 개자식들을 봤나!”
비텐펠트의 얼굴이 급격히 시뻘개졌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주홍색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모습은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발렌슈타인을 덮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발렌슈타인은 조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는 대신, 그는 아까까지 발렌슈타인이 잡고 있던 마이크를 낚아챘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그는 대뜸 소리쳤다.
“방송 연결해!”
“예……예! 연결됐습니다!”
“아, 아. 흑색창기병 여러분, 내 목소리가 들리나? 사령관 비텐펠트다! 전원 그 자리에 서서 내 말을 듣도록!”
등뒤로 흉악한 오라를 풀풀 풍기며, 진홍의 사령관은 거침없이 외쳤다.
“제군들의 설문 잘 보았다. 압도적으로 1위를 한 설문을 발표하도록 하지. 1위는 발렌슈타인 쟁탈 격투 대회더군! 가장 강한 놈이야말로 미녀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과연 우리 흑색창기병다운 발상이다! 칭찬하도록 하지!”
저 멧돼지들 같으니, 하고 참모진 전원이 속으로 탄식했다. 물론 멧돼지의 대장은 킹 피그, 아니 킹 타이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그는 공기를 들이쉬고 투기를 내쉬는 듯한 흉흉한 기세로 재삼 외쳤다.
“제군들의 마음은 잘 알았다! 특히 사령부에서만 그녀를 독점하지 말고 남자답게 가장 강한 자가 그녀를 독차지하자는 익명의 의견이 참으로 많더군! 사령관으로서, 이런 강한 남자들을 키워낸 게 참으로 자랑스럽다! 허나!”
“그, 그만 좀 하세요! 비텐펠트 대장님!”
“들었나? 그녀가 그만하라고 하는군. 하지만 그만둘 순 없지! 왜냐고? 너희 버러지들, 되다 만 멧돼지들과 달리, 난 이 함대 최강의 사내이기 때문이다!
어이, 익명의 제보자들! 듣고 있겠지? 이건 그녀 이전에 나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사령관으로서, 아니 남자로서 그냥 지나칠 순 없지! 따라서 작은 이벤트를 개최하고자 한다!“
비텐펠트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오퍼레이터에게 손짓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오퍼레이터는 황급히 그의 영상을 송출했다. 여태까지 음성만 송출받던 전 함대의 장병들은 느닷없이 경애하는(빌어먹을) 사령관이 눈앞에 등장하자 - 정확히는 그의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의 발렌슈타인을 보자 - 웅성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영상 속에서 비텐펠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자신의 가슴을 탕 하고 내리쳤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오늘 자정까지, 전 함대 장병들에게 무차별 격투를 허용한다! 그동안 계급이란 없다! 오직 사내와 사내, 강한 자와 강한 자끼리 붙어 싸우고, 승리를 쟁취하라! 그리고 선택받은 세 명의 강자는 이곳에 와 마지막으로 나와 싸운다! 알겠나! 무기는 일체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주먹으로 승부할 뿐이다! 가장 강한 자가 그녀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다!
에이리카 발렌슈타인은 바로 내 것이란 말이다아!“
약 3초 간의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적 환호. 통신회선을 열어둔 탓에 이백만의 장병이 내지르는 환호성 소리가 엄청난 파도가 되어 기함을 덮쳤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은 오퍼레이터들은 헤드폰을 떨어뜨리며 귀를 잡고 신음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발렌슈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대장님! 말도 안 돼요! 이런 건 규율에 어긋납니다! 이백만 장병 전원에게 계급을 떼고 한 판 붙으라니, 하극상이 일어난다니까요!”
“시끄러워! 시말서 따위 얼마든지 써 주마! 그리고 우리 함대는 원래 이런 거친 게 어울려! 계집애처럼 데이트하고 싶다, 편지쓰고 싶다, 식사하고 싶다, 하며 징징거리는 녀석은 이곳에서 꺼져버리라지!”
“…………………………그런 걸 기대했는데…………”
발렌슈타인의 모기만한 목소리는 아우성 속에 묻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경애하는) 대장의 기세를 보며 이미 말리는 것을 포기한 참모진들은 그런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비텐펠트는 그들의 접근을 제지하며 발렌슈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면,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거냐?”
“네? 네?”
순식간에 머리가 과포화 상태가 되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통 알 수 없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군복에 싸인 단아한 몸매가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비텐펠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시 내뱉었다.
“이 함대의 최강자는 바로 나다. 따라서 널 소유하는 건 바로 나.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냐?”
“에? 에에에?”
이 말은 자신이 여기 있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단 말일까? 아니면 비텐펠트 대장은 자기가 사령관이니까 부관을 자기 곁에 두는 게 당연하단 말일까? 해석은 이리저리 갈라지는데, 어느 것도 적중하는 게 없었다. 두뇌가 명석하기로는 저 얼음의 참모장 오벨슈타인과 맞먹을 정도란 평을 일각에서 얻었던 그녀였지만, 이런 상황에 오자 그런 명석함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아니, 어쩌면 멧돼지들 틈에서 그녀의 이성이 조금씩 마모되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대혼란에 빠진 발렌슈타인과, 그런 그녀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령관을 보며 참모진들은 할 말을 잊었다.
‘평소에도 바보 커플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바보에다 커플 선언을 할 줄은……’
‘사령관, 이런 상황에서 프로포즈라니……’
‘게다가 이거 생방송 중인데…… 불난 데 핵탄두 같은 걸 끼얹나?’
이미 사태는 더 이상 수습 불가능했다. 비텐펠트의 이런 모습은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이를 본 함대원들은 자유행성동맹군이 자신의 함에 레일건을 쏟아부었을 때보다도 더 격하게 분노했다. 누군가가 “발렌슈타인 소령은 내 거야!”라고 외치며 옆자리의 동료를 가격하는 것으로, 대혼란의 서막이 올랐다. 모두는 일심동체가 되어 “빌어먹을 주홍머리!” “악마 녀석!” “머저리!” “키만 큰 녀석!” “양 웬리에게 패배한 개!” 등의 위험한 규탄을 서슴지 않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아군이 아군을, 하사가 상사를, 사병이 소위를 가격하고 발로 차는 등의 아비규환이 이만 척의 함대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거기에는 동료도, 아군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넘어야 할 장애물, 그리고 최종 보스를 상대하기 위한 전초전 상대일 뿐!
“발렌슈타인!”
“네, 네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군인이라면 결코 상상하지 못할 풍경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던 발렌슈타인이 상관의 호명에 한 타이밍 늦게 대답했다. 그 타이밍, 그리고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 비텐펠트는 그녀의 대답을 얻는 걸 포기했다.
“대답은 오늘 자정에 받겠다. 아니, 그때까진 대답하지 마라! 이건 오늘 내가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이 순간부터 나 비텐펠트는 네 대답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사내일 뿐이다! 놈들을 모두 때려잡은 후, 놈들의 시체를 밟고 섰을 때 대답을 들려주도록! 알겠나!”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군복을 거칠게 벗어제꼈다. 사령관의 직책을 표시하는 어깨의 견장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순간, 그는 멧돼지들을 사냥하는 킹타이거가 되어 무섭게 포효했다. 단단한 근육을 불끈거리며 무섭게 포효하는 저 남자가 과연 상처받은 자신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인지는 포효한 당사자만이 알 수 있으리라.
대혼란은 그 후 약 23시까지 지속되었다. 그 처참한 현장을 몇 줄로 묘사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한 일이리라. 오늘 훈련하는 건 흑색창기병 함대가 유일했기에 이러한 난동은 기적적으로 총사령부에 들키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의 필사적인 호소 덕분에 기함만큼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총사령부에 훈련은 차질없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은 그 보고를 끝내자마자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폭력과 광기의 순간이 막을 내리고 23시 55분. 동료의 주먹에 쓰러졌던 자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방에 튄 피를 닦고 집기를 정돈하는 자숙의 시간, 최후의 승자는 비틀거리며 긴 복도를 걸어갔다. 옷은 걸레가 되었고 얼굴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데다 한 팔은 깁스를 하고 무릎 부근에도 붕대가 칭칭 감겨져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처럼 당당했다. 그가 그나마 성한 팔을 쳐들어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많이 다치셨네요.”
“좀 가려운 정도지.”
“아무튼 어서 들어오세요.”
긴 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입어 한결 청초해진 발렌슈타인은 대조적으로 평소보다 더욱 엉망진창인 상관을 바라보며 한숨쉬었다. 비텐펠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여성의 방으로 들어가는 건 그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작은 테이블로 안내해 의자에 앉혔다. 테이블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기에 앞서 피곤이 몰려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향기, 알 수 없는 온기가 온몸을 감싸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것을 즐겼다.
“저…… 아무튼 이기신 거죠?”
불안한 듯 발렌슈타인이 묻자 비텐펠트는 눈을 뜨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그것을 하늘로 치켜올렸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 몸은 제국군 최강이다! 고작 부하들 따위에게 져서야 킹 타이거의 이름이 울지!
물론 최종 선발된 세 놈은 좀 힘든 상대였긴 하지. 특히 한 놈은 날 이기려고 몰래 사이옥신 마약까지 썼더군. 그래서 힘껏 짓밟은 다음 영창으로 보냈지. 생각 같아선 핵융합로에 쳐넣고 싶었지만……“
“어머, 그러면 안 돼죠. 사이옥신 마약이라면 제가 나중에 판매원을 찾아내 근절시켜야 하니까요.”
이래 보여도 그녀는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 뻔한 대규모 마약 사건을 처리해낸 인재였다. 그런 그녀의 일화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잘못할 뻔했군. 그 녀석은 네 사냥감이란 말이지? 좋아. 맛있는 먹이를 위해 그쯤은 기꺼이 양보하기로 하지.”
비텐펠트는 말을 끝내고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마치 성적표를 내밀고 어머니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같은 저자세에 그녀는 풋 하고 웃었다.
“뭐가 우스운가?”
그가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묻자 발렌슈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장님은 과연 흑색창기병의 두목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살짝 불경한 언사이긴 했지만 둘 다 신경쓰지 않았다. 이 정도의 친밀함은 늘상 유지해 오던 것이었다. 자유로운 함대의 분위기에 그녀가 전염된 것도 그렇지만, 비텐펠트 또한 그녀의 언행이라면 어떤 것이든 묵인해 주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이제, 둘 모두 한 걸음을 살짝 더 전진시키려 하고 있었다.
“자요, 선물.”
“응? 선물이라니?”
“원래 매년 12월 25일은 선물을 교환하며 하루를 즐기는 날이에요. 그래서 오이겐 중령님께 이벤트를 부탁드렸던 건데, 모르셨나 보네요.”
“그런 날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군. 하지만 취지는 좋아 보여.”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한 팔로 힘들게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작고 흰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케이크 위에는 까만 초콜릿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 쓰여져 있었고, 그 아래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호랑이 한 마리가 긴 창을 들고 귀엽게 포효하는 모습. 밋밋한 평면 케이크만 봐 왔던 그에게 이런 수제 케이크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보다도,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기에 파급효과는 더욱 컸다.
“……대장님이 이기실 줄 알았어요.
대장님은, 항상 무적이시니까요.“
볼을 약간 빨갛게 물들이며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케이크는 금방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처음부터 비텐펠트가 이겨서 자신을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즉 발렌슈타인은, 아까의 대답을……
“우오오오! 발렌슈타인!”
비텐펠트의 거구가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에 의자가 뒤로 우당탕 넘어갔다. 아까 붕대를 감아두었던 무릎이 삐그덕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발렌슈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그녀의 작은 몸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그녀는 저항하는 대신 그의 몸을 작은 손으로 마주 끌어안았다.
“발렌슈타인! 넌 내 거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네…… 우선은 식사부터 시작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에 들을 말을 지금 듣는 기분도 나쁘진 않네요.”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재차 수줍게 말했다.
“제가 대장님 거라면, 대장님도 제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물론이다! 나도, 내 아래의 이백만 머저리들도, 이만 척의 함대도, 모두가 네 것이다! 넌 로키의 화신이자, 오딘이 보내주신 여왕이니까!”
처음으로 끌어안은 여자의 품이 정말 따뜻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비텐펠트는 킹 타이거다운 사랑 고백을 마쳤다. 그러자 바렌슈타인은 그를 끌어안은 팔을 풀어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비텐펠트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뺨에 살짝 닿았다. 그 촉촉함, 그 따스함에 비텐펠트가 피격당할 때, 발렌슈타인이 환히 웃으며 전한 마지막 말이 그를 격침시켜 버렸다.
“바보.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요.”
후일담
발렌슈타인 소령의 방을 청소하던 당번병이 발견한 의문의 쪽지. 꼼꼼하게 찢겨져 있었지만, 발렌슈타인의 팬들의 힘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복원한 쪽지는 이번엔 철저하게 소각되고, 관계자들은 그 쪽지의 존재에 대해 함구하게 된다.
문제의 쪽지.
-원작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녀석들-
의수 : 의수는 싫어
철벽 : 함께 있으면 목숨이 위험해
예술가 : 취향이 맞지 않는걸? 그리고 콧수염은 정말 싫어
침묵 : 패스
로리콘 : 임자도 있고, 나이도 많고, 게다가 로리콘.
역시 호랑이가 가장 무난하네. 흑색창기병으로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