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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2화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았지만 시아는 일찌감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오후수업은 없는 날이었다. 아니, 있었더라도 출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밥을 먹는 게 하루의 낙이었지만 오늘은 그나마도 힘들었다. 오늘도 브릭 교수의 연구실에 갇혀 애처롭게 신음하던 교수의 고양이 펠을 산책시키기 위해 꺼내온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주받을 여드름과 저주받을 교수,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가자 이미 종적을 감추었던 저주받을 휴드 등을 떠올리자 이가 절로 갈렸다.

 

“으으으, 성질나!”

 

화풀이할 대상도 없다 보니 그녀의 짜증은 극에 달해 있었다.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지고 있었지만, 그나마 바깥의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열기를 다소 식혀주었다. 그래도 옆에서 보면 파직파직 방전이 일어난다고 느낄 정도였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그런 현상은 갈수록 심해져서,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에는 멀쩡히 잘 놀던 꼬마가 그녀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이 현상에는 그녀도 좀 당황했다.

 

“왜 갑자기 우니, 꼬마야? 무서운 거라도……”

 

“으아아아앙! 저리 가! 무서워!”

 

꼬마는 그녀를, 정확히는 그녀 앞에서 서성대는 고양이를 보며 버둥거렸다. 그가 무서워할 만도 한 게,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크르릉대는 거대한 삼색 고양이가 자신을, 정확히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존재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살이 거의 없이 팽팽한 근육과 쫙 당겨진 털가죽, 치켜세운 수염, 빳빳한 꼬리 등등이 모두 눈앞의 적을 말살하겠다는 맹렬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꼬마가 자신이 아니라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는 걸 이제야 눈치챈 시아가 혀를 찼다.

 

“얘는 참. 이게 무서워서 그러니? 남자답지 못하네. 얘가 얼마나 순한데?”

 

시아가 고양이를 등을 쓰다듬자, 고양이는 즉시 완전복종자세로 배를 드러내고 뒹굴거렸다. 그녀는 그런 고양이를 힘들게 들어 안더니 소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앞에 고양이의 커다란 얼굴이 들어오자 꼬마는 자지러지려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시아의 커다란 눈동자였다.

 

“자, 안심해도 좋아. 이 고양이는 순해서 사람을 할퀴는 일은 거의 없어. 참, 이름은 펠이라고 해.”

 

“잠깐, 거의는 뭐야!”

 

“뭐, 살다 보면 불의의 사고란 것도 발생할 수 있는 법이잖니.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도 본능적으로 사람을 할퀼 수 있다구?”

 

“그런가……”

 

꼬마는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금방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 조심스럽게 작은 손을 들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제법 많아 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아이에게 이런 느낌은 색달랐다. 집에 가면 고양이 한 마리 사 달라고 조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가 눈을 뜨자 고양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두 앞발을 쳐들었다. 마치 항복할게요~ 같은 자세였다. 그런 자세에서는 발바닥의 육구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육구의 연분홍빛에 반한 아이는 약간의 망설임을 떨치고 고양이의 왼발을 덥석 잡고 문질러 보았다. 부들부들하면서도 말랑말랑한, 행복해지는 촉감이 온몸을 적셨다.

 

“와아! 이거 되게 기분 좋아악!”

 

육구에 건방진 꼬마의 손이 닿는 순간, 펠은 자비심없는 고양이 펀치를 날렸다. 발톱을 숨기고 주먹으로만, 그것도 단 일격에 승부를 결정지은 쾌속의 펀치였다.

 

 

 

“너 때문에 돈 깨졌잖아. 몰라! 너 간식 안 줄 거야!”

 

고양이에게 맞고 엉엉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그나마 있던 잔돈마저 몽땅 써 버린 시아였다. 펠은 화내는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기 위해 방 구석에 앉아 가르릉대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 모습이 시아에겐 참을 수 없이 귀여웠지만, 오늘은 반성하라는 의미로 안아주지 않았다.

고양이 사료값이랑 산책 시켜주는 아르바이트(원래는 공짜였지만, 브릭 교수가 고양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 돈을 조금 받기로 했다)값을 계산해 굴러다니는 종이에 적고 나니,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이대로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피셔 교수가 낸 과제는 만만하지 않았다. 당장 누구를, 무슨 내용으로 리포트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충 했다가 또 비웃음당하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짧고 굵게, 딱 한 사람만 정해서……라고 한다면……’

 

학교 친구들이나 부모님 등을 골랐다간 귀찮아서 대충 했다는 티가 팍팍 날 테니 보류. 머리를 굴리다 보니 왜 아까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는지 후회도 되었다. 꼭 교수의 말을 그대로 따를 거 없이, 조금만 협상했어도 보다 쉬운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곧 머리를 붕붕 휘둘렀다. 후회하는 것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펠이 그녀를 따라 머리를 흔들다 곧 질렸는지 다시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일단 일어났다. 아르바이트라도 가서 머리를 식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돈도 없으니 오늘 가서 일당으로 달라고 졸라야 할 판이었다.

시아는 펠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바람을 맞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도 집안에서 그녀의 짜증을 받는 것보단 이걸 훨씬 반겼다. 워낙 느슨한 아르바이트라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인터뷰 건을 곰곰이 생각하며 15분쯤 걷자 ‘카페 세르네’란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가게가 나왔다. 대학교 근처에 있다고 무책임하게 대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붙였지만, 아주 오래된 가게이다. 영업한 기간을 따지면 아마 그녀의 나이 정도는 될 것이다. 겉보기엔 소박하면서도 메뉴가 실하고 인심이 좋아 단골이 많다. 주인이 시아의 집 근처에 살고 있어 안면이 있었기에, 그녀는 열 살 무렵부터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다. 공짜로 음료수니 파르페니 하는 간식들을 얻어먹은 세월이 오 년(아이스크림만은 비싸서 얻어먹지 못했다), 드디어 철이 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자원해 용돈벌이를 하며 틈틈이 음식을 주워먹는 정도까진 발전했다. 출근 시간 같은 건 애초에 정해두지 않고, 그냥 틈날 때마다 와서 일을 돕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혼자 가게를 잘 꾸려나가던 주인으로선, 그녀가 다짜고짜 ‘그간의 은혜를 갚고 싶으니 오늘부터 ​일​하​겠​습​니​다​!​’​라​며​ 밀어닥치자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다행히 일은 잘 하는 편이었지만, 들쭉날쑥하게 오는 데다 올 때마다 가게의 메뉴를 탐식하곤 했다. 워낙 단 거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가족이나 주인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가 어디냐고 한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탄은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가는 손님과 엇갈려 들어가자 문에 단 방울이 재차 딸랑 울렸다.

 

“안녕하세요, 모방 아저씨! 펠도 왔어요!”

 

“……그래, 펠도 왔나 보구나.”

 

주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카운터에서 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 여기 빌붙기 시작했을 땐 풍성한 머리였지만 지금은 정수리 부근까지 머리가 후퇴해 있다. 붙임성이 있지만 유약한 성품인지라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카운터의 여닫이를 제끼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가 반가워서 뛰쳐나간다는 상황도 웃기지만, 그보단 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펠을 데려오는 걸 반대했던 이후, 고양이는 그의 처신을 기억하기라도 하는지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펠은 낮은 자세로 크르릉거리며 그를 경계했다. 목줄도 없는 거대한 고양이가 자신을 노려보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시아는 ‘절대, 절대 펠이 아저씨를 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 근거없는 말을 믿고 싶진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녀가 펠을 데려온 그날 무전취식자가 행패를 부리다 펠에게 잡혀 버렸다. 그로서는 ‘이걸로 저 녀석의 위험성이 더더욱 입증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심과는 반대로 ‘정 네 사정이 그렇다면 올 때 데려와서 잘 관리하려무나’라고 말해야 했다.

만약 손님이 줄기라도 했다면 정말 마음을 굳게 먹고 펠을 추방했을 텐데, 도리어 몇몇 가십지에 ‘고양이가 무전취식자를 잡다’ 따위의 기사가 실리면서 엉뚱하게도 가게의 명물이 되어 버렸다. 흉악한 외모에 까칠하기까지 하지만 어째선지 시아의 말에만 절대 복종하는 펠의 모습은 손님들에게 의외의 인기를 얻기까지 했다.

그녀는 펠을 청소용구함 근처의 지정석에 앉혀 두고 앞치마를 둘렀다. 작은 체구인지라 앞치마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메이드 옷이란 것도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데, 라고 생각하며 아까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정리했다. 테이블을 닦은 후 의자를 보니 커피로 얼룩진 소식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커피를 흘려 그냥 놔두고 간 것 같은데, 어차피 한 번 읽으면 끝인 소식지인 만큼 다시 찾으러 올 일은 없을 것이다. 걸레를 내려놓고 눈을 몇 번 굴려 보자 아까 교수의 방에서 본 제목 중 하나가 다시 나왔다.

 

“시아? 거기서 뭐 하니?”

 

일하다 말고 갑자기 목석이 된 그녀가 이상해 보여 모방이 말을 걸었다. 시아는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반문했다.

 

“아저씨. 혹시 치유의 성녀라고 아세요?”

 

“음? 알지. 한 일 년 전에 갑자기 등장한 소녀라던데. 신비한 힘으로 다친 사람을 치료해 준다더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언제 다치면 가 봐야지.”

 

시아의 귀가 쫑긋했다.

 

“가까워요?”

 

“응. 여기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숲이 나오는데, 거기 큰 주택에서 산다더라. 근데 그간 공짜로 해오던 걸 요새 돈 받기 시작했다고 말이 많은 모양이던데? 본 적이 없어 그 이상은 모르겠구나.”

 

그 말은 시아가 본 소식지의 내용과 일치했다. 다만 그 소식지는 지독히 악의적인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빈민을 위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였나, 아니면 어린 소녀가 돈맛을 알아버린 것인가…… 하지만 애당초 그동안 대가를 받지 않은 행위만으로도 욕할 여지가 없지 않나? 사회학도인 그녀는 수업시간에 ‘언론이란 칭찬보다 무조건적인 비판 쪽이 더 관심을 끄는 법’이라고 배웠다는 걸 새삼 확인하고 씁쓸해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 보았던 여러 소식지 중 그녀를 옹호하는 글은 하나도 없었다.

 

‘교수님도 그래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건가.’

 

소녀라는 걸 보니 자기보다 나이가 어릴 텐데, 이런 기사들을 보면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서 위로해주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치유의 힘이란 것도 보고 싶긴 하고, 돈을 얼마나 받는지도 알아두었다가 나중에 다쳤을 때 도움받아보고 싶기도 하고, 성녀라는데 얼마나 이쁠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과제도 수행하고 싶고…… 시아의 호기심은 순식간에 그럴 듯한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이미 본 목적이 가장 뒤로 밀려났지만, 어쨌든 그녀를 만나면 많은 것이 한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계획을 착착착 세워나가며 모방에게 선언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 시작하려던 아이가 순식간에 앞치마를 벗어제끼고 뒤돌아선다. 손님 올 때까지 한숨 돌리려던 모방은 당황했다.

 

“잠깐, 뭐가 그렇게야? 설명을 해 줘야지!”

 

“걔 만나러 가요!”

 

“어째서!”

 

“대학교 과제 때문에요!”

 

모방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던진 후 그녀는 활기차게 뛰쳐나갔다.

삽시간에 다시 혼자, 아니 둘이 된 모방은 잠시 멍하니 있다 구석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펠은 주인이 없어지자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웃는 것 같은데, 그것이 도저히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고양이의 몸이 서서히 꼿꼿하게 세워졌다. 그대로 시아를 따라 나가면 좋을 텐데, 어째선지 그는 카운터를 향해 다가갔다. 관록 있는 사냥꾼의 패기를 풀풀 풍기며 천천히 걷는 고양이의 모습은 카운터에서 조금씩 떨기 시작한 나약한 인간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이,대,로,는,

살……

 

“죄송해요. 펠 산책시켜야 하는데 깜빡했어요. 펠! 이리 와!”

 

시아가 문을 벌컥 열었다. 가게에 가득했던 살기가 열린 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시아를 흘끔 보더니, 모방의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혀를 쯧 차고는 뒤돌아섰다. 시아가 웃으며 손짓하자 펠은 후다닥 달려가 그녀의 발목에 몸을 비볐다. 그녀가 겨우 고양이를 떼어내고 나가면서 가게 문을 닫자, 비로소 가게는 평온해졌다.

멍하니 있던 모방은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몽둥이와 겨자, 생강 다진 것, 매운 맛 소스 등의 투척 수단들을 카운터 아래로 옮겼다. 떨리던 그의 다리는 그제서야 좀 진정되었다. 그는 ‘이놈, 다음엔 꼭 본때를 보여줄 테다’ 라는 허망한 다짐을 하며 시아가 벗어놓은 앞치마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걸어서 한 시간이란 거리는 좀 애매하다. 날씨가 좋으면 기분 좋은 산책,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두 다리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어째서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남기게 하는 그런 거리이다. 다행히 시아는 길동무와 좋은 날씨라는, 여행의 두 가지 즐거움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길동무가 매우 과묵하다는 것은 좀 유감이었지만.

주택들이 점점 드문드문하게 늘어선다는 걸 인식할 때쯤에 큰 숲이 나타났다. 숲에는 큰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기 온 사람들이 모두 환자라면,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을 거란 시아의 예상은 근본부터 빗나갔다고 할 수 있었다. ‘저기, 10분, 아니 15분 정도만 그 성녀님을 뵈도 될까요?’라며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겠고, 저기 합류해 마냥 기다리다 보면 날이 저물 것 같고……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가 보기로 했다.

가까이 가 보니 아까의 웅성거림이 점차 명확히 들려왔다. 사람들은 몇 명의 사내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사내들은 입구를 몸으로 막고 인상을 쓰며 소리쳐댔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모르쇼! 성녀님께서 형편이 어려워져서 돈 좀 받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불만들이슈? 불만 있으면 병원이나 신전으로 꺼지쇼!”

 

엘드에 여러 종교가 저마다 번성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각 종교의 신전에서 만드는 성수는 의약 쪽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이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마시면 외상, 내상의 치유속도가 상당히 빨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플 땐 일단 병원에 가 진단과 치료를 받으며 성수를 들이킨다. 덕분에 종단들에게 있어 성수는 헌금에 이은 제2의 수입원이었다. 단, 성수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점, 그리고 서로 자기네의 성수를 팔아먹기 위해 상대방 쪽을 헐뜯는다거나, 가짜 성수가 심심찮게 나돈다는 점 등이 단점이었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툴툴거리면서 돈을 꺼내들어 남자들에게 건넸다. 그들이 사례비 명목으로 걷고 있는 돈은 은화 두 개, 즉 2피아였다. 세 식구의 하루치 식사비 정도라면, 병원비나 헌금 대신 지불할 액수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들이 제법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도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이유였다. 남자들은 액수를 확인한 후 한 사람씩 통과시켰고, 간혹 거동을 못할 정도의 환자가 오면 5피아를 받아냈다.

 

‘입구부터 저런 자들이 지키고 있으면 평판이 좋아질 순 없겠네’

 

시아는 머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차례가 오면 ‘전 치유의 성녀님을 취재해 그분에게 덮어진 오명을 씻고자 합니다’ 운운으로 무료입장할 계획이었다. 다쳐서 온 것도 아닌 만큼, 돈을 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호소문의 초고를 작성하는 도중에도 입장은 이어졌다. 몇몇 가난한 환자들은 결국 씁쓸하게 돌아갔지만, 대다수는 돈을 냈다. 딱 한 번, 도끼질하다 실수로 자기 다리를 찍었다는 나무꾼이 ‘난 못 내니 배 째라!’ 고 드러누웠지만, 남자들은 ‘그럼 돌아가시던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대답할 말이 궁해지자 그는 아예 그 큰 덩치로 사람들의 앞을 막고, 자기 몸 위를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끼자루로 찍어버리겠노라고 을러댔다. 덕분에 조금 뒤에 있던 시아도 민폐의 폭풍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난감해하는 그녀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제가 당신의 돈을 대신 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을 하며 남자가 성큼 나섰다. 숱이 적은 회색 머리 위로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괴상하게도 얼굴의 오른편만 면도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둥그런 두상에, 덥수룩한 얼굴과 미끈한 얼굴이 좌우 비대칭을 이루고 있어 얼핏 보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쪼개 붙인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꽤나 인상적인 모습일 테지만, 사람들은 곧 좀더 인상적인 물건을 찾아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남자의 왼쪽 가슴에는 엘드 마법사 협회의 상징, 상아 브로치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네. 저는 마법사입니다.”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몰라도, 그의 그 말은 모두의 의문을 상쾌하게 해소시켜주었다. 어차피 마법사라는 직종은 미친 놈이라도 섣불리 사칭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이름이지만, 그걸 본인의 입으로 듣자 새삼 그 이름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우르르 물러나고, 심지어 땅에서 소리지르며 뒹굴던 나무꾼마저 황급히 일어나 절룩이며 뒷걸음질쳤다. 이들에게 마법사란 하늘과 땅을 뒤집고,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것 쯤은 스프 한 숟갈을 떠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란 괴이쩍은 인식이 있었다.

마법사가 자연재해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특히 엘드의 마법사 협회는 폐쇄적이기로 유명했다. 키드런트 대륙 현존 최고의 대마법사, ‘시간의 흐름을 걷는 자’ 로넨 라키드가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비틀어놓은 상아탑이란 건물을 만들어낸 후, 마법사들은 종이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도통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안에만 있으면 협회에서 공급해 주는 물건들로 생활하며 원하는 실험 등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뭣하러 나가야 하는가? 소문을 듣고 엘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까지 찾아온 마법사들로 상아탑이 북적이자, 엘드 왕실에서는 행여나 이들이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몇십 년째 상아탑의 수장을 맡고 있는 로넨이 온화한 성품이라 별 문제는 없었지만, 대신 그는 ‘마법사들이란 방해를 받는 건 싫어하는 법’이란 은근한 한 마디를 던진 적 있었다. 그래서 왕실은 차라리 이들이 필요한 때 이외엔 밖에 나오지 않아도 되도록 유도했다. 상아탑을 섣불리 건드리느니 그냥 손 안에 두고 감상하며 가끔 자랑하는 보석 정도로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워낙 대외 활동을 자제하다 보니 일반인들은 이처럼 제멋대로 그들의 능력을 재단하곤 했다. 어차피 마법사를 본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소문은 여러 갈래로 퍼져야 했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하게 부풀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도 그런 점을 알고 있는지,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수금인들에게 말을 건넸다.

 

“저 분을 포함해서, 여기 남아계신 분 모두의 금액을 대신 내 드리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법사 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야 따라야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저는 상아탑의 사자로 온 나호 헬펜베르크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성녀님의 시간을 제가 사고 싶습니다. 제가 시간을 얼마나 빼앗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다들 물러가시고 내일 다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돈은 편하실 대로……”

 

남자들이 설설 기는 것을 비굴하다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는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시아조차도 모처럼 만난 마법사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엘드에서 마법사란 상아탑에 소속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특별한 행사나 모임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얼굴 비치는 걸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자기들 얼굴 보았다고 살인멸구를 저지른다거나 하진 않지만, 비공식상에서 그들을 본 사람은 꽤 드문 편이다.

 

‘그런데 아까까지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나타난 거지?’

 

그런 시아의 의문에 마법사가 대답해 줄 리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그냥 마법을 썼으려니 하고 편하게 갖다붙이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마법사가 저벅저벅 걸어와 그녀 앞에 서더니 어깨를 짚었다.

 

“그건 비밀이라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네?”

 

무슨 말인지 언뜻 짐작가지 않아, 시아는 마법사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법사가 직접 걸어온 말이 이런 식이라면, 그녀는 향후 마법사에 대해 몇 가지 좋지 않은 편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고 싶어했던 것 아니었나요?”

 

“에? 우에?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면 다들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까요.”

 

그녀의 생애에 기념해야 할 마법사와의 첫 대화는 매우 우울했다. 몇 마디 나눴지만 얘기가 전혀 진전되지 않는다. 그녀의 성격상 말대답이든 딴지든 뭐든 걸어야 할 타이밍인데, 상대가 마법사란 점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법사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무꾼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 시아만 남게 되었다.

 

“마법사님, 어서 들어가시지요. 여기로 쭉 가시다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저희는 다른 사람이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여기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사내들은 직접 안내하지 못하는 게 죄송스러운 듯 머뭇거리며 길을 가리켰다. 그리고 시아에게 어서 떠나라는 뜻을 담아 눈을 부라렸다. 그 눈빛을 보자 시아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저 작자들에게 굴복해 떠난다 한들, 다시 왔을 때 입장이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해결을 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법사를 졸라 함께 들어가는 것. 막 만난 사람과 일행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이 분은 제 일행이니 저와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죠.”

 

마법사는 느닷없이 선언했다.

 

“예? ……예? 아, 네.”

 

시아는 느닷없는 그의 태도에 놀랐지만, 그가 시아의 팔을 살짝 잡고 그대로 이끄는 통에 반박할 길이 없이 그대로 끌려갔다.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작자라고 속으로 욕하면서도, 일단 필사적으로 자긴 마법사와 지금 막 만났지만 어쨌든 지금부터 일행이라는 게 빤히 보이는 어설픈 표정연기를 펼쳤다. 펠이 불편한 듯 신음소리를 내자 그녀는 애꿎은 고양이를 걷어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다행히 남자들은 그 점보단 다른 점에 신경을 썼다.

 

“저, 저기, 마법사 님, 아니, 아가씨. 두 분의 헌금이……

 

차마 마법사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안쓰럽다기보단 다소 짜증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시아도 입을 여는 대신 마법사를 흘끔 지켜보았다. 그러자 머리 하나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마법사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당황한 그녀는 빨개지기 시작한 얼굴을 푹 숙였다.

그는 무덤덤한 태도로 소매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시아가 흘끔 보니 백지였다. 이제부터 어음이라도 쓰려는 걸까? 그는 종이에 손가락으로 뭔가 끄적이고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짜고짜 사내들에게 건넸다.

 

“이걸 갖고 상아탑에 가세요. 쓰여진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사내들은 분명 백지일 터인 쪽지를 받더니 얼굴이 확 펴졌다. 더 이상 체면차릴 수 없었는지, 그간의 정중함은 때려치우고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마법사에게 외쳤다.

 

“되고말구요! 그럼 저희가 정직하게 계산해서 청구하겠습니다!”

 

“암요! 저희는 믿음과 신용,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시체니까요!”

 

“음. 그럼 일단 수고 좀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적막해진 숲 속에 두 사내의 외침이 찌릉 울렸다. 그녀는 대체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마법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에는 시아와 펠도 딸려 있었다. 걸음이 워낙 빨라 시아는 순식간에 질질 끌려갈 지경에 처했다. 막 그만두라고 그녀가 외치려던 찰나, 그는 보폭을 늦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 실례. 이제 천천히 가겠습니다. 그리고 마법을 좀 썼습니다. 그들의 눈에만 작용하는 환각마법입니다. 저걸 들고 상아탑에 가면 아마 고생 깨나 할 겁니다. 저들은 그래도 싸요.”

 

그 말을 듣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우뚝 섰다. 얼굴이 조금 더 빨개진 것을 느꼈지만 그게 부끄럽진 않았다. 그녀의 추측대로라면, 정말 부끄러울지도 모를 일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짧은 머리를 괜히 손으로 한 번 넘기고,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후,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마법사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머리를 끄덕여 뭔가를 허락해 주었다.

한층 굳어진 표정을 가면 대신 얼굴에 씌우며 시아가 말했다.

 

“제가 말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마법사 님, 마법으로 남의 생각을 그렇게 읽어대면 재미있나요?.“

 

전투고양이 펠과 마법사 헬펜베르크가 등장했습니다.
평범한 소녀지만 주변인물들이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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