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3화
숲은 조용했다. 침엽수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가을의 햇살은 나뭇잎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바늘귀를 통과한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내려왔다. 빛은 주로 숲 가운데 난 작은 오솔길 위로 비쳤는데, 덕분에 길 위에 서 있는 두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는 서로의 간극 사이가 조금이나마 덥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마법사 쪽이었다.
“아니요. 그건……”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제가 얘기할 거니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를 째려보았다. 주인의 기운을 읽은 펠이 ‘이제 저 녀석을 때려눕혀도 되는 거야?’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몸을 비볐다. 하지만 시아는 고양이의 표정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펠, 장난치지 마. 나 지금 진지하다구.
이렇게 서서 얘기할 게 아니라 우리 걸어가면서 이야기하죠?“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분을 다 삼키지는 못했는지, 난폭하게 보일 만큼 팔을 휘저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법사와 고양이도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마법사가 나란히 걷자 그녀는 바로 쏘아붙였다.
“알아요. 당신이 지금도 제 생각을 읽고 뭔가 말하고 싶다는 거. 이미 당신은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오기 전에 뭘 먹었는지, 몇 번이나 연애를 했는지, 심지어 몇 살까지 밤에 오줌을 쌌는지까지 모두 읽었겠죠. 그거 얼마나 악취미인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죠?
당신이 위대한 마법사이고, 전 평범한 사람이에요. 우린 처음 본 사이고,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거에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그 마음 속을 읽는다는 건 엄청난 실례일 텐데, 하물며 처음 본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정도로 신경이 두꺼우신가요?“
‘허. 일반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군.’
나호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특기는 독심술로, 탑에 들어가 몇 년의 연구 끝에 완벽하게 마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상아탑의 마법사들이 정신 방벽을 쳐놓아서 기술을 익히고도 쓸 데가 없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상아탑의 의뢰가 공고되자 일반인들에게 실험삼아 써먹을 요량으로 자원했던 것인데, 그 대상이 된 처녀가 두려워하기는커녕 화를 바락바락 내고 있는 것이다.
“자, 진정하세요, 아가씨. 내가 사과하겠소. 마법을 쓰지 않겠습니다. 이러면 됐소?”
사과하면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반성과 잘못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물론 그 자신조차 무의식적으로 취한 행동이니만큼 어느 정도 면죄부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면죄부를 줄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응징이 가해졌다.
‘지금 마음 또 읽는 거야? 정말 구제불능이네. 자기가 말해놓자마자 거짓말이나 늘어놓다니, 인간 말종이야. 그렇게 괴상한 스타일을 하고서 모태부터 동정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 왜 마법사가 됐는지 알 것 같네. 당신 같은 사람은 탑에 처박혀서 지나가는 여자들 보며 하악거리는 게 더 어울려, 이 관음증 환자야!’
“헉!”
나호는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시아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입에 가느다랗게 걸린 웃음을 읽고서야 그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세요? 뭔가 무서운 걸 본 것처럼? 아니, 제 얼굴을 그렇게 빤히 보신다는 건 제가 무섭다는 말일까요?”
“아, 아, 아니오. 어서 갑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과하겠소.”
어떤 마법사든 자기가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켜야 한다. 가장 악한 마법사라 해도 거짓말쟁이로 불리는 것만은 사양한다. 일반인들도 그런 정도의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더 이상 매도하기 전에, 나호는 시전하고 있던 마법을 중단했다. 곧 그와 그녀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몇 차례 그를 흘끔거리더니 그가 얼굴표정을 바꾸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배시시 웃었다.
 
“우후후, 저야말로 사과드릴게요. 마법사 님께 아주 약간 실례될 만한 생각을 잠깐 할 뻔했거든요. 그런 것까지 읽히면 저 시집도 못 가요~”
“…………”
시아가 두 뺨에 손을 올리고 꺄아꺄아 하고 부끄러워 했지만, 이번엔 그가 동행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난 어린애처럼 팔다리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걸어가는 마법사를 보고 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드에게 이야기를 듣길 잘했네. 마법사란 꼭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그저 너무 오래 혼자 있다 보니 다들 괴짜가 된 것 뿐이라고 했었지.’
그녀의 절친한 친구 휴드는 여름방학 때 상아탑에서 탑을 닦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우연히 그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중얼거렸던 걸 놓치지 않고 캐물은 결과, 휴드는 감히 시아에게 그런 재밌는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죄로 아이스크림 2인분을 사내야 했다. 그때 휴드에게서 들었던 마법사들의 인상이 그리 나빠보이지 않았기에 - 희한하게도 탑만 닦고 왔다는 녀석이 이 얘기를 하면서 우수에 찬 표정을 지어내 그녀에게 놀림받기도 했다 - 그녀는 평소 갖고 있던 마법사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다. 만약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의 시아였다면, 마음을 읽히는 걸 깨닫자마자 무서워서 울며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아직 화가 덜 풀렸지만, 그 장본인을 혼내줬으니 이제 화해할 때다. 어쩌면 이 만남이 그녀의 과제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그녀는 저만치 멀어진 마법사를 향해 뛰어갔다.
한 십오 분 가량 걸어가자 이 층짜리 집이 나타났다. 새하얀 회벽은 군데군데 빛바래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아담하고 깔끔했다. 정원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화단에 즐비했는데 계통없이 심겨져 있어 좀 난잡해 보였다. 돌보는 사람의 솜씨가 정원사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정원 바로 옆에 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물은 보통 집 뒤에 판다는 게 상식인데, 무슨 사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호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고 두어 번 노크했다. 현관의 문 너머로 들어오란 소리가 작게 들렸다. 소녀의 목소리인 걸 보니 치유의 성녀 본인인 듯했다. 문을 열기 전, 나호는 시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시아 양, 슬슬 준비해 주십시오. 꼼꼼한 기록 부탁드립니다.”
“예.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게요.”
아까 서로 사과하고 화해한 후 나호는 시아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의뢰내용은 저택에서 일어날 대화를 모두 노트에 기록해 달라는 것이었다. 펜에 마법을 걸어 자동으로 쓰게 하면 되겠지만, 혹시라도 불완전할 수 있으니 사람이 쓰는 게 낫다고 한다. 시아도 스스럼없이 그 일을 맡았다. 그의 마법 덕분에 입장료를 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라도 승낙하는 게 도리에 맞다. 대신 그녀도 자신이 노트를 다 적으면 똑같이 한 부 베껴 과제에 쓸 생각이었다. 마법사는 난감해했지만, 자신이 지정하는 문구를 지운다는 조건으로 결국 승낙해 주었다. 
나호가 문을 열었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타 길들여졌는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그는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더니 흠칫했다. 뒤에서 그의 등을 보고 있던 시아는 금방 사정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치유의 성녀가 너무 예뻐서 넋을 잃은 게 아닐까. 남자란 별 수 없는 생물이라고 비웃으며 그녀도 빼꼼히 들어갔다. 혹시 실례가 될까 해서 펠은 문밖에 둔 채였다. 시아는 앞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호를 피해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 시야가 트이며, 그녀는 집주인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집주인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행이신가요?”
“……”
시아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겨우 고개를 들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신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미인을 좋아하는 건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는 게 진리라고 새삼 느끼면서, 눈을 호강시키기 위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거실 옆에 난 네모난 유리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이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크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도기인형 같았다. 까맣고 윤기있는 머리카락을 몇 가닥으로 가늘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고, 갸름한 이마를 따라 찰랑거리는 앞머리는 지금 막 소녀가 핀으로 고정시키는 중이었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보는 게 부담스러워 시아는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목에 건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은으로 만든 줄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가운데에 달린 푸른 보석에서는 광택이 나지 않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속이 비칠 정도로 새파랬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하얀 피부에 잘 어울렸다. 별 장식 없는 파란 원피스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쇄골, 팔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슬아슬하게 병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마른 몸매였던지라 가슴선은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편이 그녀의 병약함을 살리며 독특한 매력을 갖게 했다.
“치유의 성녀 님이 맞으신지요?”
나호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소녀가 살풋 웃었다.
“그런 거창한 말은 부담스러워요. 그냥 필리시아라고 불러주세요.”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그보다 평민인가? 아니면 사정상 성을 대지 않는 걸까?’
시아는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마법사가 그녀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로 선사한, 잉크가 내장된 펜이었다. 이거라면 둘이 무슨 대화를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나호는 시아를 흘끔 바라보고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한 후 필리시아에게 말했다.
“저 분은 우리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온 분입니다. 사람들 간의 대화란 때론 천상으로 날아가지 않게 붙들어 맬 필요도 있는 법. 제겐 매우 중요한 일이니 저 분이 대화를 기록하는 점에 대해선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건 상관없지만, 두 분은 치유가 목적이 아니시군요?”
“네. 그리고 제가 밖의 분들에게 부탁해 뒤의 사람들이 오늘은 오지 않도록…… 아니, 실례했습니다. 지금 얘긴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말하던 나호가 갑자기 당황해 말을 끊었다. 시아는 마법사가 굳이 그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아니요, 나호 님. 이건 필리시아 님이 알아야 할 문제에요. 필리시아 님은 이 문제로 명예에 심각한 흠을 입었으니까요.”
 
“네? 무슨 말씀이시죠?”
사정을 모르는 필리시아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자세를 보면 성녀가 아니라 이쁜 여동생으로 보인다. 잠시 후 그 표정이 달라질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시아는 말을 이었다.
“필리시아 님이 모르는 사이, 숲의 입구에서 불한당 녀석들이 돈을 걷고 있었어요. 그들은 그동안 필리시아 님이 아무 대가 없이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는 걸 악용해, 성녀님의 형편이 어려워져서 이젠 조금씩 돈을 받아야 한다고 속였어요. 다행히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피해는 적었지만요.”
“그럴 수가!”
시아의 예상대로 필리시아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보니 그녀는 이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게 확실해 보였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 입술이 띄엄띄엄 열렸다.
“어째서…… 사람들이 제게 얘기해 주었더라면……”
“이야기할 리가 없겠지요.”
의외로 나호가 시아 대신 대답했다. 그의 얼굴도 썩 기분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땅히 돈을 받아야 할 입장의 당신이 그동안 돈을 받지 않았던 사실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모두가 그렇진 않았겠지만, 아직까진 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놈들이 돈을 갈취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비율이 역전되고, 불평이 쏟아졌겠지만요.
또 돈을 내고 들어오자 자신은 여기 올 자격이 있다는 만족감이 생긴 것도 있을 겁니다. 돈도 없어 못 들어가는 무리들과 자신과는 차이가 있다는 자부심도, 성녀님께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겠지요.”
‘하지만 그 잡종들은 필리시아 님과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나쁜 기사를 잔뜩 써댔지.’
본인을 앞에 두고 나니 새삼 자신을 오해하게 만든 소식지의 필자들에게 악담을 퍼붓고 싶어지는 시아였다. 하지만 이것까지 말하면 필리시아가 더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아, 이 얘긴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가 봐야 해요. 숲 입구라고 했죠? 어서 그 사람들을 내쫓고……”
필리시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시아가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났을 때 다리가 저려 비틀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병약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으려 했을 때 마법사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더니 부드럽게 그녀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 움직이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자들은 제가 이미 응징했거든요.”
“어떻게 말이죠?”
“가짜 쪽지를 쥐여 상아탑으로 보냈습니다. 문지기 앞에 가서야 그 쪽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스스로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자백하고 자수할 때까지, 상아탑에서 약간의 제재를 가하겠지요.”
“상아탑? 마법사이신가요?”
필시 그녀도 마법사를 처음 본 것이리라. 태도엔 별 변화가 없었지만, 그 눈을 보니 호기심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도시에 살고 있다면 공식 행사나 축제 때 가끔 마법사를 볼 수 있었겠지만, 이런 외진 곳까지 마법사가 올 일은 없었을 터였다,
“예. 저는 마법사입니다. 상아탑의 청탁을 받고 온 사자로 봐 주시면 무방하겠군요. 상아탑에서는 서신으로 전하기보다는 직접 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가요……제게 무슨 볼일을? 그쪽에도 병자 분이 생기셨나요?”
“아닙니다.
상아탑이 원하는 것은 필리시아 님, 바로 당신이십니다.“
필리시아의 편안한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상아탑에 대해 제가 아는 건 거의 없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제게 관심을 보인다면, 아마 제 힘 때문이겠군요.”
“맞습니다.”
나호는 잠시 자리에 앉을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 그냥 의자에 손을 짚고 일어나 있는  채로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힘에 우리 상아탑은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힘은 지금껏 관측된 적 없는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마법사가 불을 쓰거나 대상을 얼리는 것은 몸 밖에 무한히 존재하는 에테르를 자신이 보유한 마나로 정제한 결과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바닷물이 에테르이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준비한 염전이 마나, 염전의 인부는 마법사, 그 모두의 결과로 탄생하는 소금은 마법이겠지요. 당연히 아실 상식이겠지만, 이제부터의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굳이 다시 꺼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리시아는 물론이고 마법에 문외한인 시아까지 한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명쾌한 비유였다. 스스로도 만족했는지, 나호는 시아가 적고 있는 내용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가 걱정 말라는 제스처를 보내자 마법사는 안심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힘은 그와 다릅니다. 에테르를 가공하여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마법이라는 현상이 순수한 에테르로 구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에테르는 신체 에너지로 바뀔 수가 없어요. 신체 에너지란 외부의 에테르가 몸 안에 들어와 변질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에테르라 부를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걸 마나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마나는 개개인의 것이지,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없으니까요. 즉 신체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성녀님의 힘은 에테르와 마나 이상의 힘이란 뜻일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는 신성력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각 역시 곧 철회해야 했습니다. 치유라는 형태로 발현된 신성력은 아직 보고된 바 없었고, 무엇보다 성녀님께서 신성력을 쓰셨다면 교단에서 감지하고 달려왔겠지요.
마법과 신성력,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니라면, 성녀님의 힘은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저희로서는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기적이란 걸 검증해보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법사는……“
“신이 아니기에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읽어 현재를 살아간다, 겠지요?”
널리 알려진 경구를 필리시아가 말하자 마법사는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는 자들입니다. 저희에게 있어 진리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관통할 수 있어야 하는 하나의 해답이니까요. 설령 그것이 나중에 뒤집어진다 해도, 그때까지 유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지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 힘을 어떻게 연구하실 생각이죠?”
필리시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호는 반색했다.
“일단 저희 상아탑에 와 주십시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과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상아탑 최고의 마법사들이 필리시아 님의 힘을 연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곤란한데요.”
마법사의 희망을 필리시아가 싹둑 끊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라 시아의 펜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소녀는 나직하게,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담아 말했다.
“제겐 저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고 있어요. 전 그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요. 제가 상아탑에 오래 머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치유받지 못할 테니까요.”
“당신이 왜 성녀님이라 불리는지 알겠군요……
하지만 저희가 당신을 모시려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당신의 기적은 기적으로 끝나선 안됩니다. 저희의 연구로 대중화시켜,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를 익힐 수 있게 된다면 엘드, 나아가 전세계에 큰 보탬이 될 겁니다. 먼 길을 갈 때 중간중간 쉬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희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저희는 필리시아 님 개인이 보는 환자보다 수십 배는 더 돌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나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시아에게도 그 말은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명의 한 사람보다 평범한 의사 수십 명이 다수에게 더 도움이 된다. 이익을 바라고 환자들을 돌보는 게 아닌 만큼, 필리시아가 자신의 기술을 상아탑에서 재현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면, 병자를 돌본다는 원래 취지에 잘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필리시아를 흘끔 본 시아는 의아해했다. 필리시아의 표정은 얘기를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연구가 일이 주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지요?”
“예. 주 단위가 아니라 몇 년 내에만 끝나도 다행이겠지요. 저희는 대략 오 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오 년!”
두 여자가 동시에 탄식했다. 나호는 덤덤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새로운 마법의 개발이란 기존의 공식에서 도출해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계산식을 다시 짜는 행위이고, 하물며 성녀님처럼 짐작도 할 수 없는 힘은 그 힘 자체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시간이 걸립니다. 저희에겐 오 년도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런 불확실함에 몸을 맡길 정도로 전 한가한 게 아닙니다. 차를 끓여드릴 테니 이것만 드시고 돌아가 주세요.”
필리시아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정말로 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흔히 부탁을 거절할 때 예의상 미안하다는 한 마디 쯤은 할 텐데, 그녀에겐 그런 게 허식으로 비쳐지는 모양이었다.
잡을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용인이 없는지, 아니면 직접 하는 걸 좋아하는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설득에 실패한 나호는 그녀에게 대화를 더 시도하는 대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것으로 현재의 기분을 표현했다.
“이런. 역시 안 되는 건가. 대단하긴 대단하군.”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긴 하네요.”
나이도 어린 소녀가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상아탑의 마법사가 하는 부탁을 당당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니, 시아는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나호는 굳은 목을 몇 차례 움직여 꺾어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차 마실 시간 정도는 줄 수 있다는 거군. 아직 기회는 있어.
그렇다면 오늘, 이 곳에서 열다섯 잔쯤 마시고 가야겠어.“
“예?”
이 작자, 유식한 말을 줄줄 읊다가 왜 갑자기 엉뚱해지는 걸까? 시아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무례한 상상을 했다. 그러자 그는 시아의 눈치를 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슬슬 마실 테니, 내가 다 마신 뒤는 시아 양이 스무 잔 정도 마시는 걸로 합시다.”
“절대 싫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