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4화
오후의 티 타임은 마법사가 벼르던 것만큼 길지 않았다.
“시, 실례.”
해쓱하게 질린 얼굴로 나호가 일어났다. 그는 금방이라도 뻗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용케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필리시아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찻잎을 잘못 썼나……”
그녀의 말대로 찻잎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찻잎과 함께 들어간 재료가 문제였다.
“피, 필리시아 님. 늘 이렇게 드시나요?”
시아가 가까스로 두 모금 째를 목구멍 안에 흘려넣은 후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필리시아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특제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이렇게 한 잔 마시면 피로가 풀리거든요. 밤에 졸릴 때도 좋구요.”
‘피로가 풀릴 만도 하겠지……’
초콜릿과 박하와 우유와 찻잎을 잘게 빻아 레몬즙과 섞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건더기를 걸러낸 액체이다. 차마 차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그 액체를 한 모금 들이키자, 시아는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깨어난 정신은 온 몸 구석구석에 경보 메시지를 발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일단 단 맛이 느껴지긴 하니 최대한 거기 집중해 이 위기를 벗어나려 한 그녀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반면 성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한모금에 꿀떡 털어넣은 나호는 사색이 되어 화장실과 테이블을 왕복해야 했다. 온실 속의 위장보다는 야생(?)의 위장이 훨씬 뛰어나다는 증거일까.
필리시아는 누군가가 갖다줬다는 쿠키- 그녀가 만든 쿠키가 아니란 사실에 시아는 감동했다 -를 아작아작 먹으며 태연하게 차를 홀짝거렸다. 시아가 차를 한 모금 삼킬 때마다 쿠키를 와구와구 먹어 입가심을 하는 걸 빤히 바라보며,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환자분들이 없으니 좀 쓸쓸하네요. 하루쯤 쉴 필요는 느꼈지만, 갑자기 휴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나호 님이 돌려보내셨다는 환자분들게 죄송스러워지네요.”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쓸쓸해 보였다. 대체 얼마나 환자들을 생각하면 모처럼의 쉬는 날까지 마음 편히 있지 못하는 걸까. 치유의 성녀로서의 그 모습은 분명 숭고해야 한 터인데, 시아에겐 어쩐지 찜찜하게 느껴졌다. 자기보다 어린 소녀가 인생을 삼사십 년 산 사람처럼 저러고 있다는 게 어쩐지 걸렸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숙고해 보기에 앞서,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 필리시아 님.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어째서요?”
악의가 없는 건 알겠는데, 어쩐지 대화하기 조금 힘들다. 시아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사실 전 나호 님을 처음부터 따라온 게 아니에요. 필리시아 님을 보기 위해 오다가 우연히 마법사 님을 만났던 거예요.
이제 제대로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시아, 세르네 대학의 학생입니다. 전 소설가인 피셔 교수님의 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필리시아 님을 인터뷰하고, 필리시아 님을 독자로 가정한 소설을 쓰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인터뷰?
소설……?
…………피셔!”
필리시아의 머릿결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살짝 흥분했는지 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설가 피셔 교수님이라면, 기사도 문학을 쓰는 분을 말씀하신 거죠? 전 그분의 독자에요!”
“예에?”
이번엔 시아가 놀랄 차례였다. 세상에, 그 양반이 유명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치유의 성녀님께서 팬이라는 건 의외였다.
“후후, 밤에 잠들기 전에 그분의 책을 읽는 게 요새의 낙이랍니다. 그분은 다른 분과는 다르게 글을 쓰셔서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아요. 시아 씨는 당연히 그분의 책을 잔뜩 읽어보셨겠지요?”
"아, 아니, 안 읽어봤는데요……“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의 책을 구해다 읽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사도 문학이라면 기사가 나와서 난리를 치다가 공주를 구하거나 나쁜 놈을 물리치면 끝나는 거잖아? 란 생각을 갖고 있는 그녀였다. 수업을 들은 것도 뭘 배우겠다기보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시아는 여태까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필리시아가 뭔가 상처받은 듯한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굉장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시아 씨는 왜 피셔 씨의 수업을 들으시는 건가요?”
시아가 움찔할 만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더욱 괴로운 것은 필리시아의 질문이 순수한 의문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학교에서 무료로 진행해주는 데다, 교수님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호기심에……”
“아, 그러셨군요. 잠시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바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행여라도 그녀의 기분이 상했으면 어쩌나, 하던 시아의 걱정은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금방 내려온 필리시아의 손에는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이 있었다.
“자요. 전 다 읽었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나중에 돌려주러 오실 때 꼭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아마 그땐 시아 씨도 저처럼 피셔 씨의 팬이 되어있을 걸요?”
전혀 망설임없이 책을 내주는 소녀를 보며 시아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설마 이 아이가 피셔 교수의 책을 보존용, 보관용, 대여용으로 세 권씩 사놓은 건 아니겠지? 라는 상상이었다. 소녀의 방이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쓸데없는 상상은 삼가기로 하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볼게요.”
“예. 그럼 그 인터뷰란 걸 해볼까요? 처음 하는 거라 긴장되긴 하지만, 저도 시아 씨가 쓴 소설을 보고 싶네요”
“아, 그건 너무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책을 받고, 교수에게서 받은 노트를 꺼내들던 시아가 잠시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만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마구 물어볼 생각이다. 마법사가 돌아오면 또 자기 얘기만 해댈 테니, 그전에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럼 질문 시작할게요. 필리시아 님은 답변 가능한 건 솔직히 답변해주시고, 대답하기 싫으신 건 넘겨 주시면 돼요. 괜찮죠?”
소녀의 흑발이 위아래로 출렁이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질문을 개시했다.
“먼저 필리시아 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식구는 없는지부터 알고 싶어요.”
화장실에서 신음하고 있던 나호가 들었다면 바지를 내린 채 쓰러져 버렸을 만한 질문거리였다. 열 대여섯의 소녀가 외진 곳에 혼자 살고 있는데, 거기에 사정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된다. 솔직하고 밝은 성격의 시아였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두운 면을 잘 보지 못하는 게 단점이었다. 그나마 시아에게 다행인 것은 필리시아가 그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 이미 익숙해졌다는 점이었다.
“전 고아랍니다. 수도에 있는 그란테 고아원에서 자라다 열다섯 살 때 제 능력이 발현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을 치유해주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노부인의 손자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고쳐주었는데, 그 부인께서 감사의 의미로 이 집을 선사해주셨어요.”
고아란 말에 시아는 흠칫했다. 쓸데없는 걸 물어봐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지만, 말한 본인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설프게 동정하는 건 대놓고 비웃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떠올려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나이가……아, 나이는 제가 맞출게요! 열여섯! 열여섯 맞죠?”
“예. 바로 맞추시네요. 시아 씨는……열여덟 정도 되시나요?”
“에헤헤, 젊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스물둘~”
“에엣……열여섯이라 말하려다 두 살 높인 건데, 정말 동안이시네요.”
“아, 아니 그건 좀.”
동안에 은근히 콤플렉스가 있던 시아였던지라, 성숙해 보이는 열여섯 소녀에게 그런 말을 듣자 뭔가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녀의 표정이 이리저리 바뀌자 소녀는 살짝 미소지으며 막 생각난 사실을 제안했다.
“저, 시아 씨. 부탁이 있는데, 우리 편하게 얘기하지 않을래요?”
“편하게……? 어떤 식으로?”
“시아 씨는 그냥 말 낮춰 주세요. 전 시아 언니라고 부를게요. 다시 뵐 분인데 계속 말 높이시면 불편할 것 같아서요. 괜찮으신가요?”
‘괜찮으신가요?’라고 말하며 아래에서 살짝 눈을 치켜뜨는 그 모습은 평소 얌전하던 개가 드물게 응석부릴 때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동물에 약한 시아는 순간 뛰쳐나가 그녀를 끌어안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언니.”
“나, 나, 나, 나도……잘 부탁……할게.”
딱히 귀족이 아니니 안심하고 말을 낮추거나 하는 게 아니라, 소녀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서 시아는 힘들게 말을 낮췄다. 한 번 성공하니 그 뒤론 수월했다. 게다가 나이차이가 꽤 난다는 것도 있었기에 시아는 곧 부담을 떨치고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필리시아는 겉보기엔 내성적이고 말없는 아이 같지만, 평소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있어서인지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잘 이끌어갔다. 덕분에 시아는 눈앞의 소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고아원의 원장이 착한 사람이라 그녀를 돈벌이에 이용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내보냈다든가, 사례는 받지 않지만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은 감사히 받아 생활에 보탠다든가, 틈틈이 정원을 손질하는 게 취미지만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든가, 하루 평균 15~20명 정도의 환자를 받는다든가 하는 일상의 모습들. 악의적으로 그녀를 다루어대는 소식지들에겐 별 매력 없는 사실들이겠지만, 시아에겐 알면 알수록 치유의 성녀란 이름 아래 감추어진 소녀의 풋풋한 맨얼굴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요소들이었다.
여자끼리 한참 떠들어대다 보니 어느새 쿠키가 다 떨어졌다. 필리시아가 차를 마시는데 자신도 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아가 필사적으로 차를 마신 결과였다. 하지만 접시와 찻잔이 비자마자 새 쿠키와 차가 그녀 앞에 다시 자리잡았다. 망연자실해 있는 손님을 향해 필리시아는 한 점의 어둠도 없는 맑은 웃음을 선보였다.
“좀 놔뒀더니 차가 더 맛있게 우러난 것 같네요. 좀 식었지만 더 맛있을 거예요. 참, 그리고 이 쿠키는 제가 만든 건데 맛있을지 모르겠어요. 맛없으면 드시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냐. 정성들여 만들었을 텐데 맛없을 리가 없지.”
만약 인터뷰가 끝난 다음이었다면, 그녀는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차라기보다 포션의 경지에 다다른 정체불명의 액체, 그리고 초콜릿이나 건포도는 절대 아닌 것 같은 까만 것들이 송송 박힌 쿠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녀에게 미래는 없었다.
그때 창백해진 얼굴이 된 나호가 돌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아침식사를 과식해서 그런지……”
“저야말로 죄송해요. 제 치료는 외상에만 효과가 있어서 나호 님의 배탈은 손쓸 방법이 없네요.”
안그래도 슬슬 필리시아의 기적이란 걸 보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의외로 한정된 쓰임새였다. 궁금해하는 시아의 표정을 눈치채고 필리시아가 설명해 주었다.
“제 치유는 신체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병에 걸렸을 때 신체를 활성화시키면, 자칫 병까지 활성화될 우려가 있어요. 어디까지나 우려이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하면 섣불리 손댈 수는 없답니다.”
“그러면 함부로 쓸 수 없겠네.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치유를 좀 볼 수 있을까, 라고 말하려던 시아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그새 쿠키가 바뀐 줄 모르는 나호가 생각없이 쿠키 세 개를 집어들고 한입에 털어넣고 있었다.
와드드드득, 하고, 쿠키가 아니라 접시를 씹어먹는 것 같은 불길한 소리가 그의 입 안에서 밖으로 분출되었다.
“………………………………………!!!!!!?????
………!!!”
“…………………….”
아직 필리시아의 등 뒤에 있던 나호는 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필리시아는 시아에게 말을 거느라 아직 그에게 일어난 사태를 알지 못했다. 그는 비명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핏발선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는 눈만 살짝 움직여 시아를 가리킨 후 손을 휘휘 저었다. 무리하지 말고 얼른 화장실로 가라는 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법사는 자신의 두뇌가 저 테이블을 박살내기 위한 주문을 검색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해야 했다.
눈앞에 있던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쿠키를 기어이 꿀꺽 삼키자마자 그는 외쳤다.
“아무래도 다시 실례해야겠군요. 오늘 모처럼 걸어서 그런지 얼굴에 땀이 다 흐를 지경입니다.”
“어머, 정말 땀이 많이 나시네요. 그런데 여기 오신 지 한참 되었는데……”
“땀은 생명의 물! 얼른 닦지 않으면 그만큼 제 생명이 유출되는 겁니다! 그럼 실례!”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이고는 부리나케 왔던 길로 돌아갔다. 이번엔 얼굴이 거무죽죽해진 게 아까보다 더욱 심각해 보였다. 사라지는 그의 등을 눈으로 배웅한 시아는 쿠키접시를 살짝 필리시아 쪽으로 민 후 조용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걸 보니 한결 견딜 만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짜고 꽤 많이 썼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기분 탓.
시아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필리시아는 마법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마법사가 한 말이 의외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해, 그녀는 혼자 감탄했다.
“그렇네요. 생명의 유출. 저분 말씀대로라면 지금 저분이 화장실에 가는 것도 생명의 유출을 위해서겠죠?”
“필리시아, 음식 먹을 땐 그런 얘기 하지 마아~”
입안을 감도는 오만가지 맛에다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까지 추가되자, 시아는 견디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추욱 늘어졌다.
나호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린 후 두 사람은 필리시아와 함께 집을 나왔다. 노을이 번져 푸른 숲이 붉게 물드는 시간이었다. 새하얀 필리시아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감돌아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
“그럼 나호 님, 언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펠도.”
“예. 오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드렸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니, 생각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연락해 주십시오. 이 카드를 잡고 제게 말을 거시면 됩니다. 그리고 카드가 빛나면 제가 연락을 시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3킬로 정도 몸무게가 줄어든 듯한 나호가 필리시아에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표면에 뭔가 새겨져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굉장히 비싸 보였다. 시아는 그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했던 고양이는 나른한 듯 야옹, 하고 울었다. 평소의 크르렁거리던 모습은 간곳없고, 졸린 건지 아픈 건지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올 때는 쌩쌩했으니, 아무래도 밖에서 늘어지게 자다가 잠이 덜 깬 것 같다고 시아는 추측했다.
“책 잘 볼게. 그리고 소설은 너무 기대하지 마. 일단 다 되면 보여주러 올 테니까.”
“알았어요. 종종 놀러오세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필리시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뒤로 하고 시아 일행은 숲으로 향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필리시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무들의 그림자 사이로 작은 그림자들이 폭 파묻혀 사라지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걷는 도중 그녀의 발길이 잠시 멈추었다. 현관과 화단 사이, 타액에 젖어 동그랗게 뭉쳐진 풀덩어리가 보였다. 고양이는 가끔 풀을 먹고 토해 속을 비우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 먹은 화단의 풀은 썩 몸에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고양이가 헤롱대던 게 떠올라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소녀는 허리춤에 매단 작은 주머니를 꺼내 안을 확인해보았다. 안에는 풀빛 가루가 약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이제 시작할 의식에 사용할 양 정도였다. 필리시아는 화단으로 가 잡다한 화초들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꽃잎과 잎, 뿌리, 줄기 등을 익숙한 솜씨로 채취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화단은 정원이라기보단 약초밭에 가까웠다. 그녀는 목 위까지 잠갔던 단추를 가슴께까지 풀어헤친 후 작업을 시작했다. 절구 안에 가져온 것들을 밀어넣고 꼼꼼하게 갈자, 그것은 주머니의 가루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가루를 햇볕에 말려 독소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하루는 그대로 둬야 했다. 다음부턴 가루를 만드는 걸 미뤄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찬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세공이 잘 된 기다란 담뱃대가 있었다. 필리시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가루를 집어넣고 꼭꼭 눌러담았다. 약간 모자라지만 이 정도라면 아직 괜찮은 편이다.
거실의 소파에 반쯤 누워 부싯돌로 불을 붙인 후 필리시아는 그것을 입에 물고 쭉 들이쉬었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에 작은 불꽃이 일렁이고, 그 직후 보라색 구름이 가늘고 길게 둥실 떠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소파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고 다시 한 모금 빨아들였다. 뇌가 마비되고, 영혼이 분해되었다가 재구축되는 느낌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보라색 연기의 향이 향긋하다. 창백했던 얼굴에 다소 혈색이 돌고, 상기된 몸에서 열이 조금씩 났다.
그녀는 담뱃대를 입에서 떼고, 불그스름해진 입술을 움직였다.
“사라져라.”
매일 되새기던 말을 오늘도 입에 머금는다.
“사라져라.”
몽롱한 정신에 말이 아로새겨진다.
“사라져라.”
시간이 흐르고, 말이 공기 중에 사라져 간다. 하지만 말이 사라질 때마다 다음 말이 꼬리를 이어 나타난다.
“아픔아, 사라져라.”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 배어나기 시작한다. 목이 마르고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이미 정상적인 체온을 넘어, 고열로 의심될 정도로 온몸에서 열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평소보다 무난한 편이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 얼마 남지 않은 하루의 의식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현관에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