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5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숲을 빠져나와 벌써 십오 분 정도 걸었다. 나호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서 걷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숲을 벗어난 것도 다행이라고 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시 봐도 얄미웠어요, 저 사람들. 마법사 님 앞에서야 저렇게 굽실거리지만, 아마 저만 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기도 무서웠을 거예요.”
굽실거리는 그들을 지나치며 뭔가 부자연스러움이랄까, 혹은 찝찝한 점을 느꼈지만, 어쨌든 잠시 후 상아탑에서 그들이 겪게 될 일들을 떠올리자 그런 위화감은 곧 사라졌다. 상아탑이 그들을 제대로 혼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아에게 마법사가 놀리듯 말했다.
“하하. 시아 양에겐 든든한 경호원이 있잖습니까.”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펠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는 길에 다른 풀을 뜯어먹고 몇 번 더 토하더니 이제 완전히 나은 모양이었다.
시아는 펠에게서 시선을 떼고, 약간 우물쭈물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전 성녀님의 생각을 읽지 않았습니다.”
시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도끼눈으로 변신해 그에게 따졌다.
“또 읽은 거예요? 또? 읽은 거 맞잖아요!”
“진정해요. 그런 생각을 할 거라 짐작했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이 타이밍에 질문할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갑작스럽게 제 사생활이 궁금해진 것도 아닐 테고.”
궁금해! 사실 그게 더 궁금해! 라고 시아는 속으로 외쳤다. 옷 센스야 그냥 문자 그대로 거지 같다고 치부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대체 왜 얼굴의 반은 면도하고 반은 놔둔 거냐고! 마법사니까 그러려니 하기에 앞서서,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혼자 씩씩거리던 시아는 문득 마법사가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 걸 깨닫고 머쓱해했다. 이 타이밍에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가 마음을 읽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예. 사실입니다. 시아 씨는 제가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다 드러나서 재미있군요.”
“캬, 캬오! 지금 저 가지고 장난치는 거죠?”
화내는 걸 보니 마치 고양이 같다. 괜히 발아래의 괴물 고양이를 거느린 게 아니라고 생각되어 나호는 피식거렸다.
“마음만 읽지 않으면 실례가 안 될 테니까 말이죠. 아까 성녀님을 만났을 때도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얼마나 참았던지……”
“그야 당연한 행동이죠. 그동안 남의 마음을 멋대로 읽으신 게 잘못된 거예요.
뭐, 그래도 잘 참으셨네요.”
그의 입장은 필리시아를 설득하는 것.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선 그의 의도를 눈치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나호는 실례가 된다는 이유로 최대의 장점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마법사가 왜 왔는지 기억하고 있던 터라, 시아는 순수하게 그를 칭찬해 주었다.
그렇지만 나호가 순수한 의도만으로 마법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필리시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란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행여라도 자신이 마법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채이면 교섭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나호는 자신이 그걸 절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주도면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제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읽지 않는다고 확신했기에, 그녀는 맘 편하게 재잘거렸다.
“그런데 왜 아까처럼 마법으로 휙 이동하지 않는 건가요? 굳이 이렇게 힘들게 걸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정말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 자력으로 시전하는 이동 마법은 기껏해야 열다섯 걸음 내의 거리 정도만 이동 가능합니다. 단, 상아탑에서 밖으로 나갈 때만은 다릅니다. 상아탑은 에테르를 고도로 압축시킨 공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 공간 안에선 상당한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거지요.”
“과연 상아탑은 대단하네요. 하지만 자력으로 그렇게 가까운 거리밖에 이동할 수 없다면, 그 주문은 별로 실용성은 없네요.”
“그 대답은 조금 보류하기로 하지요. 하지만 시아 양,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발전할 가능성을 품고 있답니다. 마법사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혹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세상을 버리고 상아탑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마법사는 특별한 인종이 아니라, 다만 탐구에 대한 열정이 안주에 대한 욕구를 이긴 자들일 뿐입니다.“
좀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나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시아는 생각이 짧았음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사과한 후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나호 님은 바로 상아탑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예. 일단 오늘은 통신용 카드를 전달한 걸로 만족할 겁니다. 상아탑에서도 한정제작해야 할 만큼 귀한 물건이니만큼 성능도 확실합니다. 상아탑에 돌아가서 종종 그녀에게 연락하며 그녀의 경계심을 풀어야겠죠.”
“뭐, 작전은 괜찮네요. 그런데 그거 그렇게 귀한 물건이었어요? 하나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유감이지만 그건 무리랍니다. 여유분은커녕, 줬던 것도 언젠가 회수해야 하는 물건이라서요. 마법사 한 사람 당 두 장만 지급되는 물건이거든요.”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시아는 금세 포기하고 옆의 나무에 살짝 기댔다. 까끌까끌한 촉감이 등을 타고 느껴질 때, 그녀는 문득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저기요! 혹시 그 카드, 마법을 쓸 수 없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이쪽에서 말을 거는 건 힘들지만, 듣는 건 가능하지요. 어때요, 한번 해보지 않겠나요?”
“해볼게요! 해볼게요!”
마법사가 시원스럽게 자신의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카드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패여진 홈에 손가락 끝이 닿을 때마다 주황색 빛이 금빛 카드 위로 번져나갔다. 그는 문양을 다 그린 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반대편 손바닥으로 세 번 두들겼다. 그러자 아까의 홈에서 금빛이 뿜어져나와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는 그것을 시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일단 제 마나를 넣었으니 시아 양도 몇 마디 정돈 전할 수 있을 겁니다. 성녀님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보도록 하세요. 마음 속으로 하든, 소리내어 불러보든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이름을 부르는 상대를, 마법사가 굳이 극존칭을 써서 부르는 게 좀 껄끄럽긴 했지만, 이런 것이 어른의 사정일 것이다. 시아는 감사히 카드를 받은 후 조심스럽게 새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필리시아”
낡은 문이 신음을 흘리며 개방되었다. 멍한 정신을 애써 가누며 필리시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석양마저 거의 사라져가는 시간이라 손님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호와 시아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방문객들에게 물었다.
“환자이신가요?”
“환자? 맞습니다, 성녀님.
돈에 환장한 정신병자 둘인데, 치유해 주실라우?”
건들거리며 들어온 남자들은 숲 입구에서 멋대로 돈을 걷던 사기꾼들이었다. 시아와 나호가 보았다면 바로 알 수 있었겠지만, 필리시아는 이들의 존재를 방금 알았을 뿐이었다.
사내들은 어두운 실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실내에 있는 빛이라고는 담뱃대 끝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 뿐이었고, 그것도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하나가 혀를 차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필리시아의 손에서 담뱃대를 빼앗았다. 아직 의식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필리시아는 손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지만, 성인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리 만무했다.
남자는 담뱃대를 들어 입에 물고 쭈욱 빨았다. 얼마 남지 않은 내용물이 새빨간 심장을 드러낸 후 사그라들었다. 평소에 피우던 것과 다른 쓰디쓴 맛에, 남자는 담뱃대를 땅에 떨어뜨리며 캑캑거렸다. 뒤에 있던 사내가 그 꼴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어대자 남자는 담뱃대를 발로 걷어차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성녀? 이런 독한 걸 피우는 꼬맹이가 성녀라고? 웃기시는군.”
“당신들은 누구죠?”
완료되지 않은 의식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소녀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옅은 어둠 속에서 까만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띠자, 뒤에 있던 남자가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때렸다.
“악……!”
비스듬히 앉아 있던 필리시아는 그대로 소파에 처박혔다. 거의 완성되었던 의식이 깨지고, 억누르려 했던 고통이 왈칵 밀려왔다.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담뱃대를 바라보았다. 안에 있는 내용물은 모두 써 버렸고, 새로 만드는 가루는 오늘 쓸 수 없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녀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그녀를 친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어이, 성녀님. 이래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어?”
그가 필리시아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녀는 그의 역겨운 숨을 맡으면서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최근의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이는 젊어 보였지만 둘 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데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있어서 원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히죽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아아, 참. 성녀님은 우리 얼굴을 모르나? 이거 섭섭하네. 꽤 오래 한솥밥을 먹은 사이인데, 필리시아.”
한솥밥이란 말에 필리시아는 정신이 확 들었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 그란테 고아원의……”
비로소 그녀는 대상의 범위를 파격적으로 좁힐 수 있었다. 고아원은 꽤 큰 규모였기 때문에 모든 아이의 이름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나이로 보아 짐작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거친 성격을 가진 데다 착실하게 일하는 걸 싫어해 스무 살이 되도록 고아원에 눌러붙어 빈둥거리던 2인조의 얼굴과 이름이 그녀의 뇌를 두드렸다.
“후로, 켄?”
“맞아. 내가 후로, 저쪽이 켄.”
후로는 아직도 캑캑거리고 있는 켄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가 냅다 걷어찼다. 캑캑거림이 그치자 그는 다시 필리시아의 앞에 서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쥐었다.
“우린 동기야, 필리시아. 동기 좋다는 게 뭐냐?
동기가 굶어죽게 생겼으니 힘 좀 써달라고.”
그는 필리시아를 소파에 거칠게 앉혔다. 거의 내던지다시피 한 것이라 그녀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남자는 쪼그려 앉아 필리시아와 눈을 맞추고 흥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그 이상한 힘을 깨쳤을 때, 멍청한 원장은 너를 내보냈지. 널 그대로 고아원에 붙잡고 있었으면, 혹은 부자들에게 팔아치웠더라면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넣었을 텐데. 우린 널 바로 쫓아가려 했지만, 원장은 네가 어디로 갔는지 끝내 밝히지 않더군. 그래서 우린 소식이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고아원에서 죽치고 있었어. 그리고 이렇게 기다린 보람을……엿차.”
“꺅!”
후로의 손이 필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약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소녀의 그런 표정은 사내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네 덕분에 제법 많이 벌긴 했어. 게다가 오늘 봉 하나가 들어와 짭짤했지. 하지만 이런 건 푼돈일 뿐이야. 진짜 돈벌이는 따로 있다구. 세상에는 너 같은 특이한 소녀를 원하는 변태들이 꽤 많은 편이지.”
“이, 이거 놔요!”
그의 손이 필리시아의 얼굴을 더듬었다. 뜨겁고 끈적한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필리시아는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뿌리치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 손은 흔들림에 아랑곳않고 얼굴에 딱 달라붙은 채 슬슬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매끄러운 목을 지나, 목걸이에서 잠시 멈췄다. 그 땀방울을 따라가 목걸이를 움켜쥐었던 손은 곧 흥미를 잃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광택이 없다 보니, 어둠 속에선 그저 그런 싸구려 목걸이 쯤으로 보였다.
“내가 네 정체를 몰랐더라면 이렇게 널 주물럭대진 못했을 거야. 그래도 명색이 성녀님이잖아? 무슨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넌 기껏해야 알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은 꼬마 계집일 뿐이잖아. 안 그래? 애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도도한 척하던 모습을 난 알고 있다고. 그러고보니 우리가 배고파서 돈 들고 나가 군것질 좀 했던 걸 고자질한 적도 있었지?”
필리시아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둘은 원장의 방에 몰래 들어가 21피아를 훔친 적이 있었다. 마침 청소하러 들어오던 필리시아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둘은 고자질하면 죽는다고 그녀를 위협한 후 빠져나갔지만, 그녀는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원장을 찾아나섰다. 그녀의 신속한 행동 덕에 돈이 크게 줄기 전에 무사히 회수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려낸 필리시아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건 도둑질이었잖아요!”
“도둑질? 아냐. 먹고 살자고 하는 게 어떻게 도둑질이야? 그리고 저 윗대가리들은 하루에도 수만 피아씩 해 처먹고 있는데, 우리 같은 버러지들이 고작 몇십 피아 만지작거리는 게 어째서 죄가 되는데?
잘 들어. 너나 나나 켄이나, 모두 부모가 버린 자식들이야. 엘드라는 국가가 차마 죽일 수 없어서 마지못해 키워준 쓰레기들이라구. 넌 너 자신이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냐? 날 때부터 부모에게 쓰레기 취급받았던 네가? 착각하지 마. 사람들이 성녀로 떠받들든 말든, 본질은 바뀔 게 없어. 사람들한테 돈 걷어내는 우리나, 여기서 되지도 않는 성녀 놀음이나 하고 앉아 있는 너나 똑같다는 말이야!“
코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후로가 소리지르자 필리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과 그, 모두가 쓰레기라고?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패한 의식의 반동으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원피스가 순식간에 땀으로 젖어들어가고, 솜털 하나하나가 일어났다. 동공이 확장되며 어둠 속에 있던 사내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뱃속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후로는 그녀를 다시 소파에 앉혔다. 그러자 방 안의 가구들을 뒤지고 있던 켄이 그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후로! 쟤 가슴을 봐! 뭔가 빛나고 있어!”
“음? 그렇군. 이건 뭐야?”
어둠 속에서 그녀의 가슴이, 정확히는 가슴 쪽의 옷 안에서 은은한 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후로는 필리시아의 왼쪽 가슴을 덥석 잡고 거기 있는 주머니 안을 뒤졌다. 그러자 금속도 아니고 종이도 아닌 질감이 느껴졌다. 꺼내 보니 카드 같았다. 어떤 카드길래 어둠 속에서 혼자 빛날 수 있는 걸까? 그는 카드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펴보았다.
그때 그의 귀로, 마음으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리시아.”
카드를 잡고 정신을 집중하던 시아가 갑자기 나호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님! 이 카드, 상대방의 목소리가 다르게 들리기도 하나요?”
“그런 적은 없는데요.”
“그런데 웬 남자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누구야?’ 라는데……혹시 다른 사람의 카드랑 뒤섞여버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럴 리 없어. 잠깐 줘 봐요.”
시아가 나호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금색 카드는 나호의 손 안에서 더욱 선명한 빛을 발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질 때 마법사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카드에 평소보다 과한 힘을 쏟아부으며, 반대편의 카드를 쥐고 있는 자에 대해 탐색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겐 필리시아가 아닌 누군가의 정보가 우르르 들어왔다. 그것이 누구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호는 외쳤다.
“제길! 그 놈들이야!”
“누구라구요?”
“그놈들! 사기꾼들! 녀석들은 상아탑으로 향하거나 한 게 아니야!”
“아……!”
아까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숲에서 나오는 길은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상아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갈 때에도, 그 후에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야 마법사가 ‘오늘은 환자를 받아들이지 않게 해 달라’라고 부탁했기에 가능하다고 해도, 마법사가 나온 이상 그들이 거기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짐이 없었기 때문에 몸만 움직이면 되는 그들이, 마법사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을 이유라면?
“필리시아!”
“맞아! 놈들은 성녀님을 노리고 있어!”
나호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아와 펠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달리면서 마법사는 생각나는 대로 외쳐댔다.
“그 개자식들은 내가 거액을 줬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여길 떠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여기에 더 이상 볼일이 없어졌으니, 나가는 김에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셈이야! 돈이든, 아니면 그녀 본인이든 챙기려고!”
순식간에 거기까지 추리해 낸 나호는 과연 마법사다웠다. 논리적 추론의 중간 과정을 꽤 빼먹긴 했지만 시아도 바로 알아듣고 심각해졌다. 어차피 이들은 상아탑에 돈을 찾으러 언젠가 올 테니 그때 족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필리시아의 신변이 위험해진 게 거의 확실해진 만큼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은 나호보단 시아의 달리기 속도가 약간 더 빨랐다. 시아는 몇 미터쯤 그와 거리가 벌어지자 갑자기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나호가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서자, 그녀는 기운차게 외쳤다.
“먼저 갈게요! 뒤따라오세요!”
“하지만 당신 혼자선……!”
“펠이 있잖아요!”
시아의 손이 펠을 가리켰다. 펠은 주인이 자신을 인정한 게 기뻤는지 거만하게 목을 뒤로 젖혔다. 마법사가 고양이를 보더니 바로 납득하고 끄덕였다.
“무리하지 말아요! 곧 따라갈 테니!”
나호의 외침을 뒤로 하고, 시아는 펠과 함께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달리기는 자신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람처럼 달리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는 펠에게 외쳤다.
“펠! 먼저 가! 가서 남자는 모두 반쯤 죽여놔! 죽이지만 않으면 뭘 해도 용서해줄게!”
“카릉!”
맹수의 울음소리가 적막한 숲의 밤공기를 흔들었다. 고양이는 지금까지는 본실력이 아니었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숲길을 질주했다. 그 뒤를 있는 힘껏 따라가면서 시아는 필리시아가 무사하기를, 그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처지가 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