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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7화


물의 신 셀레스티네. 그 손은 모든 것을 낫게 하며, 그 눈빛은 모든 고통을 거두어간다고 알려져 있다. 단 한 번, 암흑의 신 우르칸이 지상에 내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 땅에 강림했을 때, 여신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권능은 신을 믿는 사도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기에, 사도가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치유한 사례는 전무하다. 그나마 신성력을 담아 만드는 성수가 타 교단보다 효력이 탁월하기에 셀레스티네 교단은 상당한 교세를 가질 수 있었지만 - 셀레스티네를 믿는 자가 셀레스티네 교에서 만든 성수를 마시면 효과가 극대화되므로 - 기적과 환상, 권능을 좇는 사람들은 망설임없이 타 종단으로 향하곤 한다.

셀레스티네와 그녀와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나호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기적을 매도할 수 있었다.

 

“유감입니다. 진실된 기적이란 걸 보는 게 제 소망이었습니다만, 이번에도 허탕을 친 것 같군요. 당신이 혹 셀레스티네 교의 신자라면……아니, 생각해보면 그것도 허탕이겠군요. 그네들이 신성력을 사용해서 벌이는 일들이란, 마법사들이 마나를 사용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태어나던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호 또한 어린 시절 마법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마법이란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적이라 믿고 있다가, 정작 마법의 실체를 알게 된 후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마나와 에테르, 연산이란 세 가지로 조합되는 마법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암산으로 푸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호는 진실된 기적을 보는 것을 소망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로서는 드물게 종교에 빠져보기도 했지만, 신성력이란 것이 신의 힘을 직접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마법사들처럼 에테르를 가공한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이마저 포기한 바 있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사실은 상아탑의 원로들이라면 대부분 추측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아탑은 자신들이 짜내는 ‘공식’이 아닌 ‘믿음’으로 에테르를 바꾼다는 것이 자칫하면 마법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섣불리 발표했다간 종단의 어마어마한 반격을 받을 게 두려워 ‘명확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발표를 보류함’이란 봉인을 붙였던 것이다.

이처럼 마법과 종교 양측에서 모두 실패했던 그에게 필리시아는 상당한 기대되는 존재였다. 종단에 몸담지 않았으면서 마법도 아닌 힘을 쓴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힘, 기적이 아닐까? 하지만 결국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을 읽어 진실을 깨닫고 나니, 그저 허망해질 뿐이었다.

 

“차라리 제가 마음을 읽지 않았더라면, 전 기적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좀 더 믿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더군요. 당신이 제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안 직후부터 말이죠.”

 

“무엇일까요, 제가 숨기고 있었다는 게?”

 

“약초 냄새입니다. 집안에는 잘 정제된 약초가루를 태웠던 냄새가 배어 있었지요. 처음엔 너무 희미한 냄새라 잘 몰랐지만, 다시 들어와 보니 진한 냄새가 나더군요. 우리가 간 직후에 당신이 피운 거겠죠. 게다가 잘 살펴보니 화단에 심겨진 것이 마약에 준하는 약초인 루케 종류더군요. 마약에 비해 부작용이 적은 대신 쾌감도 적고, 최면술 같은 의식에 필요한 트랜스 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그런 약초를 당신같은 사람이 피운다는 건, 피우는 본인이 그걸로 자기암시 같은 목적으로 쓰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게 뻔하지요.

그리고 당신의 몸은 결코 정상인의 것이 아닙니다. 뭔가 건강에 안 좋은 일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오고 있단 말이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그 고통을 참기 위해 루케로 고통을 없애는 자기암시를 걸었다. 맞습니까?”

 

루케를 피운 후 최면술이나 자기암시를 걸어 강력한 진통 효과를 이끌어내는 건 종종 쓰이는 방법이다. 특히 환자가 고통을 견딜 만한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 때 더욱 그랬다. 그는 굳이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담뱃대를 주워들어 안을 살펴보았다. 역시 루케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배어 있었다. 마법사들의 필수과목 중 하나가 약초학이었으므로, 이 정도를 유추해내기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마법사의 지식에, 필리시아는 한숨지었다.

 

“대단하시네요. 나호 님은 마법 외의 지식도 뛰어나시군요.”

 

“그저 상식입니다, 필리시아 양.”

 

그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더는 성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표현일 것이다.

 

“이제 하나하나 따져 봅시다. 당신이 15세에 갑자기 깨우친 힘이 원래 이런 것이었나요? 처음부터, 상처입은 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변질된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그걸 대답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야……아차, 이거 참. 벌써 마음을 닫아버렸을 줄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의 마음은 다시 견고한 장벽에 가려졌다. 아까처럼 그의 능력을 우습게 보고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불어 그녀의 얼굴도 적대적으로 변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나호는 널부러져 있는 사내들과 동급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럼, 이제 어쩐다, 하고 마법사는 생각했다. 그의 임무는 그녀를 상아탑으로 데려와 그 힘의 출처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올 리 없었고, 그렇다고 그가 질질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매끈한 턱과 덥수룩한 턱을 함께 쓰다듬으며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다. 머리(이 쪽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항상 모자로 가린다)와 수염을 그렇게 해괴하게 반만 길렀던 것은 철없던 시절 ‘마법과 신성력에 속하지 않는 기적을 찾을 때까지 이런 모양을 하고 있겠어!’라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 허탕을 쳤다간 최소 수 년을 더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뭔가 다른 화제를 찾던 마법사의 두뇌가 갑자기 과거의 수업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루케 가루를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흡입할 경우, 분명 부작용이 있었다. 몸에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더욱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현상이었다.

 

“당신은 지금 미각을 거의 상실했을 겁니다. 그렇죠?”

 

아까보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자신이 몸으로 겪은 일이라 더욱 그렇다. 아까 같은 차는 자양강장의 목적으로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맛은 도저히 감당할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아무리 본인이 그 맛이 익숙해졌다 할지라도, 눈 한번 찌푸리지 않고 한번에 마실 수 있다는 건, 루케의 부작용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듯, 필리시아는 두 팔을 으쓱했다.

 

“아까 차가 맛없었으면 그냥 얘기를 하시지 그러셨나요. 남자분이 소심하게 투정부리시면 곤란하답니다.”

 

“정말 소심한 건 어떤 때라도 입을 다물고 있는 남자지요. 전 약간 반응이 느린 것뿐입니다. 소심하다면 이런 말은 못하지요.

사,

아,

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습니다! 맛없었……!“

 

“남자가 뭐 그렇게 쪼잔해요!!”

 

나호의 우렁찬 목소리를 밖에서 들은 시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법사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호는 ‘읍읍!’하면서도 꿋꿋하게 진실을 외치려 했다. 펠이 이 작자를 없애버리게 놔둘 걸 그랬나…… 하고 약간 후회하면서, 시아는 애써 웃으며 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아하하…… 미리 말하지만 나 엿들은 거 아니다? 저기 멀리 있었는데 소리가 너무 컸던 것 뿐이라구. 그리고 마법사 님도 참, 이렇게 온 동네에 다 들리게 소리치면 민망하잖아요? 소녀의 예민한 가슴에 상처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되죠!”

 

시아가 너무 완벽하게 숨을 틀어막은 통에, 나호는 점차 버둥거렸다.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충혈되었지만 시아는 상처입은 소녀를 달랠 생각을 하느라 그걸 보지 못했다. 결국 나호의 필사적인 눈이 필리시아에게 꽂혔다. 두 개의 시선이 많은 것을 담고 교차된 후, 필리시아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름다운 흑색 눈동자, 아니 그 아래의 눈두덩으로 향하더니 갑작스레 휙 내려갔다. 그러자 눈두덩 아래 숨어있던 붉은 속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생기없는 입술 사이로 묘하게 생생한 붉은 혀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동작에서 굳이 복잡한 의미를 찾는 건 바보 같은 짓이리라.

 

“풋!”

 

시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에 힘을 늦췄다. 속칭 ‘메롱’을 시전한 필리시아의 모습이 너무 어색해 보여서였다. 덕분에 나호는 시아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매일 괴물고양이 펠을 들었다 놨다 하느라 그녀의 힘은 성인 남성인(평균치에 도달하지는 않지만) 나호에 필적했지만, 그것이 나호에겐 별 위안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필리시아가 보는 것도 잠시 잊어버리고 화를 벌컥 냈다.

 

“시아 양!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무례한 짓이라구요?”

 

시아가 나호를 째릿 흘겨보았다. 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는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에, 그가 굳이 마음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무례한 건 마법사 님이 먼저였잖아요. 필리시아가 우리를 생각해서 정성껏 타온 차를 그렇게 무시하시면 안되죠. 안그래도 힘든 일을 겪었는데, 달래주러 온 우리가 저 아이를 더 상처입히면 안되잖아요?”

 

“그, 그건…… 그게 아니라……”

 

아까 잠시 필리시아의 마음을 읽었을 때, 그녀의 마음 속에 ‘모처럼 손님이 왔으니 벌칙 게임이라도…… 몸에는 좋을 테니 상관없겠지?’를 즐겁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었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나호였다. 시아는 분명 뒷말은 흘려듣고, 그녀의 기억을 읽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두고 날뛸 게 뻔했다. 그래서 그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알겠습니다. 말조심을 하도록 하죠. 그러니 시아 양은 다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따지고 보면 갑자기 쳐들어온 시아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는 게 맞다. 하지만 명령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가의 웃음을 빠르게 지우며, 시아는 필리시아의 입가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핏자국이 뭔지 제게 설명해주시기 전에는 나갈 생각이 없는데요?”

 

둘은 아차 싶었다. 상황을 모르는 시아에겐 나호가 그녀를 때린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아까의 괴한들에게 맞은 거라고 둘러댈 수도 없는 것이, 시아의 태도로 봐서는 아까 사내들에게 봉변당했을 때엔 저런 핏자국은 없었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난처해진 나호는 도와달라는 뜻으로 필리시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언니, 이건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나호 님이 절 때리거나, 때렸거나, 후려치거나, 후려쳤거나, 주먹을 휘두르거나, 휘둘렀거나, 한 게………… 절대 아니랍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정성스럽게 강조하는데다, 의미심장한 간격을 둔 필리시아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인지, 선선한 가을 저녁의 대기가 초겨울의 냉기로 바뀌어 집안을 휘감았다. 시아는 목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될 만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호를 바라보았다.

 

​“​흐​~​~​~​~​~​~​~​~​~​~​~​~​~​응​.​

그러니까 마법사 님은 필리시아를 절대절대절대절대 때리지 않았다는 거네. 맞지요?”

 

“맞다니까! 그 기분나쁜 강조는 또 뭐요!”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누가 나호 님이 때렸다고 하기라도 했나요?”

 

나호는 대답하는 대신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시아와 대화할 때마다 자신이 마법사란 사실을 자꾸 망각하게 된다는 게 그에겐 상당한 치욕이었다. 이성을 잃고 감정에 폭주하는 마법사는 거짓말하는 마법사만큼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다행히 그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발톱을 세우고 으르릉대는 시아와 그 뒤에서 비웃음 비스무리한 것을 입가에 걸치고 있는 필리시아를 마주볼 수 있었다.

 

“필리시아 양, 시아 양에게 나가라고 해 주십시오. 몇 가지만 확인하면 간단히 끝날 문제를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끌고 가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간단히 끝날 문제…… 마법사님에겐 간단한 문제였군요. 전 그렇지 않은데.”

 

“더 이상 말 돌리지 마시오. 시아 양을 내보내주시겠소?”

 

“제게 명령하지 마시죠.”

 

“말 돌리지 말라니까!”

 

다시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시아는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당황한 채 서 있었다. 지금 나가든 그대로 있든, 어느 한쪽을 편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슬금슬금 열린 문으로 들어온 펠이 심상찮은 공기를 느끼고 털을 곤두세우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싸움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란 표시였다. 하지만 시아는 녀석처럼 느긋하게 관전할 수 없었다.

 

“저, 저기요. 그냥 제가 나가면 될 문제……일까요?”

 

“필리시아 양, 마지막이오. 시아 양에게 나가라고 하시오.”

 

“왜 제가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요!”

 

시아가 기껏 꺼낸 말은 거물들의 대화에 묻혀버렸다. 이젠 필리시아가 왜 피를 흘리고 있었는지 물어보기도 힘들었다. 아무리 시아가 털털한 성격이라 해도, 화난 마법사에게 말을 걸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호가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았을 때, 시아는 죄 지은 게 없는데도 - 아니, 조금밖에 없는데도 -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좋습니다, 필리시아 양. 마지막이라고 했죠? 이젠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마법사는 더 이상의 유예를 두지 않고, 암묵적으로 시아에게 하지 않기로 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시아 양, 여기 있는 필리시아 양이 그동안 어떤 식으로 힘을 써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 그건 기적이 아니라 순 억지스러운 기술일 뿐이었어요! 자기 생명을 남에게 들이붓는 방식이었단 말입니다!“

 

“네?”

 

그녀에겐 뜬금없는 타이밍이라 시아는 그 말을 당장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호는 분명 시아가 아닌 필리시아를 겨냥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저 소녀가 성녀란 건 헛소리입니다. 마법을 쓰지 못하고 속임수를 쓰는 자를 마술사로 격하시키는 것처럼, 필리시아 양도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는 성녀라 지칭받을 자격이 없어요. 게다가……”

 

“그 말을 그렇게 하고 싶으셨나 보네요. 어디 더 해 보시죠?”

 

필리시아가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고통은 여전히 그녀 안에 존재했지만, 마법사에 대한 분노와 비밀을 드러낸 수치심이 잠시나마 그것을 잊게 해 주었다. 소녀가 짓고 있는 적대적인 표정을 보면서 시아는 마법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필리시아.”

 

필리시아의 시선이 시아를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아는 한 번 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필리시아.

네 기적이란 게 네 생명을 깎는 거야?”

 

“네. 덤으로 환자의 고통을 제 몸으로 흡수하기도 해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환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마법사가 아까 마저 이야기하려던 것이 이 내용일 게 뻔했기에, 그냥 선수를 쳐 말해주었다. 힘을 얻은 후, 고아원의 원장을 제외하곤 말해본 적 없던 내용을 말하고 나니, 그녀는 갑자기 허탈해졌다.

이제 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저 마법사처럼 한심하다는 듯 날 쳐다볼까,

아니면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지을까.

그녀의 사고는 거기에서 잠시 끊겼다.

 

“필리시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시아가 그녀 앞에 날아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무작정 흔들어댔다. 필리시아는 당장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지만 시아는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시아의 동작에, 눈빛에, 목소리에 가득한 분노는 이제껏 나호와 맞섰던 필리시아마저 움츠러들게 했다.

 

“그럼 넌 네 생명을 남에게 무작정 줬다는 거잖아! 생명이란 게 하룻밤 자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아닐 거 아냐! 넌, 넌 그렇게 자기 수명을 무책임하게 깎는 걸 몇 년이나 해왔단 말이야?”

 

“그게 왜 무책임하단 건가요? 언니는 나호 님보다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제 힘 자체는 기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 항상 책임감을 갖고 행동했다구요.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남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으니까요. 이제껏 아무 것도 몰랐던 언니나 나호 님이 저를 틀리다고 할 수 있어요?”

 

“틀려.”

 

“틀립니다.”

 

둘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덧셈이나 뺄셈처럼, 그들에겐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소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걸까? 수많은 사람들을 대가 없이 고쳐주고, 그들의 고통을 내가 모두 받아주었는데? 고통에서 구원해주고, 절망이 가득한 이 세상에 기적이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는데?

 

‘그걸……그 기분, 그 느낌, 그리고 이 고통을!

당신들은 정말 알고서 그런 무책임한 대답을 하는 거야?’

 

모처럼 친해져도 될 것 같았던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마저 자신을 부인한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녀를 마음 속에서 배제하면 그만이다.

 

“둘 다 같은 생각이신가요? 그렇다면 저랑 더 할 얘기는 없겠네요. 저에 대해서는 알아서들 생각하시고, 그만 나가주세요. 이제 여길 정리해야 내일 다시 사람들을 치유해줄 수 있으니까요.”

 

“너!”

 

“언니도 똑같아요! 절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주려는 시늉을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구요! 애당초 우린 오늘 막 본 사이였으니까, 보기 싫으면 언제든 안 보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입밖에 내고, 그리고……! ……흑…………!”

 

필리시아의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치밀어올랐다. 타인의 것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통이었다. 그것을 말로 변환해 입밖에 내자 뜨거운 숨이 호흡을 방해했다. 숨을 몰아쉬며 하던 말을 끝마치려 했지만 울음이 왈칵 터져나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주체 못할 만큼 줄줄 흘러나와 얼굴을 온통 적셔대고, 턱에서 굴러떨어져 목걸이에 닿았다. 그때 목걸이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신경쓰지 못했다.

나호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필리시아 양을 이해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부끄러움이란 걸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당신을 비난하는지, 그 방향을 애당초 잘못 잡은 것 아닙니까?”

 

“나호 님, 지금은 그냥 아무 말 말아주세요.”

 

시아가 살짝 돌아보며 부탁했다. 그 표정은 단짝인 휴드가 보았다면 그녀답지 않다고 두고두고 화제로 삼을 만큼 처연했다. 마법사는 팔짱을 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시아는 필리시아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손수건을 꺼내 소녀의 얼굴에 가져갔다. 하지만 필리시아는 그녀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고개는 아직 숙인 채였지만, 그 표정에 떠올랐을 감정을 시아는 읽을 수 있었다.

 

“필리시아, 난.”

 

“어서 나가주세요!”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겠다는 어조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둔다면,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적을 굳이 검증해 파헤치고 조롱거리로 삼는 두 사람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아는 절대로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펠이 문앞에 서서 문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밖에누군가 있다는 표시였다. 셋이 침묵하자 문을 콩콩 두들기는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잘 몰랐지만, 나호는 잠시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황파악을 하고, 급히 문을 열러 갔다. 노크소리가 나는 곳은 문의 가장 아래쪽이었는데,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거길 치진 못할 정도의 높이였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사람은 혼자 일어설 수도 없는 중환자란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의 예상대로, 문을 열자 문밖에는 추레한 행색의 환자가 쓰러져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그가 기어온 흔적이 있는 걸 보면, 오직 여기 오겠다는 의지만으로 숲을 통과한 듯했다. 필리시아는 자신의 체력이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늦어도 세 시 전엔 환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곤 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녀에게 오는 환자 중 응급환자는 아직 없었다. 응급환자를 치유해 줄 경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고통 또한 엄청날 게 분명했기에, 그녀는 그런 환자는 받지 않겠다고 공표한 바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이 자는 병원이나 신전에 먼저 가야 하지 않았을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나호는 쪼그려앉아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맨손으로 그를 만지지 않은 건 마법사다운 신중함이었고, 그것이 그를 살렸다.

 

“이보시오. 어디가 아파서 여기 온 겁니까?”

 

“사, 살려……”

 

엎드려 있던 환자가 고통스럽게 몸을 반쯤 뒤집었다. 드러누우려는 목적 같았지만 체력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그 짧은 순간, 마법사의 예리한 눈은 짧은 소매 안에서 부어오른 겨드랑이를 보았다. 다음 순간, 나호는 그를 들여놓는 대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문을 닫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걸 비난할 순 없었다. 두 여자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의 표정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악의 꽃……! 최악의 전염병 환자입니다!”

 

신의 축복이 없이는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불길한 병명이, 마법사의 떨리는 목소리로 오랜만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세 전염병 끝판왕인 흑사병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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