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 8화
마법사의 얼굴은 공포로 새파래져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껄끄러운 병인 ‘악의 꽃’은 그만큼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역사적으로 이삼십 년에 한 번 꼴로 발생하는 이 병은 일단 생겼다 하면 순식간에 나라 전역으로 퍼질 만큼 엄청난 전염력, 그리고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자랑했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선 고작 한두 시간만에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 넘게 버티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죽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백 명 중 하나만 살아도 신의 축복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치료방법도 없고 성수도 듣지 않아서, 교단들은 이를 일컬어 ‘악신 우르칸의 숨결’이라고 규정하고 저주한 바 있었다. 반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병에 걸렸을 때 생기는 붉은 반점에 착안해 ‘악의 꽃’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호 님. 확실한 건가요? 당신은 지금 고작 몇 초만 보았잖아요. 제가 알기로 그 병은 대략 35년쯤 전에 마지막으로 발생했을 텐데, 그렇다면 나호 님이 직접 본 적은 없는 병 아닌가요?”
너무 느닷없는 마법사의 선언에 필리시아가 반론을 제기하려 했다. 그러자 나호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저걸 못 알아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겨드랑이가 부풀어오르는 병은 흔치 않고, 게다가…… 병원에서 기겁을 하고 내쫓았군. 지금 확인했소. 자신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자는 당신뿐이란 걸 알고 이리 온 거겠지.”
어느새 마법으로 남자가 왜 이곳에 왔는지 파악해낸 나호였다. 그 말에 둘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의사와 신관이 그의 병명이 악의 꽃이란 걸 눈치챘다고 한다면 그것이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환자가 병원에 왔다면 의사는 당장 국가에 신고해 더 이상의 발병을 막아야 한다. 환자를 격리시키고, 그가 접촉한 모든 사물을 불태우는 등의 조치를 통해, 대규모 감염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자는 어떻게 병원에서 빠져나와 이곳까지 온 것일까?
둘에게 그 질문을 던질 여유는 없는 것 같아 나호는 안도했다. 그 남자의 머릿속에는 병원에 가 의사에게 보인 후의 행적도 기록되어 있었다. 단 굳이 아이들에게 밝힐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몇 시간 전, 구걸을 하던 남자는 고통을 느꼈다. 남자의 직업은 거지였고, 그 때문에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 거지가 자신의 돈으로 진료를 받는다는 게 좋게 보일 리 없었으므로 - 은밀히 의사를 찾아왔다. 의사는 그의 병명을 알자마자 그를 내쫓았다. 자신의 병명에 놀란 그는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쫓겨났다. 의사는 그를 따라 현관까지 나오더니, 슬그머니 20피아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받고 자신의 병원에 왔다 간 사실을 숨겨달라는 부탁의 표시였다. 최악의 전염병을 가진 환자가 이 병원에 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병원은 즉각 격리조치되어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돈을 쥐었지만, 이제 그에게 돈은 무거운 금속 조각에 불과했다. 절망에 빠져 보금자리인 쓰레기장으로 돌아온 그에게 구겨진 종이 하나가 보였다. 그 종이에는 ‘치유의 성녀, 타락’이란 기사가 쓰여져 있었다. 그 기사는 그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었다. 성녀가 돈을 받는다면, 이 돈을 모두 주고 고쳐달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지껏 병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이 자가 최초로 발병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건 둘째치고, 남의 안전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안정만 추구하는 의사의 모습에 나호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의사가 안쓰럽기도 했다. 문제의 환자와 가장 오래 접촉했기에 발병률이 높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의사가 저런 모습을 취하고 정상영업을 하려는 것은 자신만은 결코 그런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헛된 자신감 때문일까?
‘돌팔이 때문에 사람 여럿 죽어나가겠군. 손써야겠어.’
나호는 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가 필리시아에게 줬던 카드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일단 상대와 대화하는 게 가능했다. 마력을 불어넣어야 보석이 활성화되면서 신호를 보낼 수 있으므로 마법사만 다룰 수 있는 도구였다. 그는 그것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곧 보석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음성을 구현해내지 못하기에, 그 소리는 보석의 소유자의 마음 안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통화신호를 보내신 분이 나호 님이십니까?
-맞소. 보고할 게 있어요
목소리는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나호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용무를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나호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 전에 제가 먼저 알려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나호 님 뿐만 아니라, 현재 상아탑 밖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에게 공통된 사항입니다. 엘드 내에 있는 모든 마법사는 현 시간 부로 상아탑에 최대한 빨리 집결할 것, 이상입니다.
-뭣? 아니, 무슨 이유로? 그런 소집령은 엘드에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거의 그에 준하는 사태입니다. 엘드에 몇 시간 전 ‘악의 꽃’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상아탑에서 긴급 회의를 열고, 상아탑 수장 로넨 마이어 님의 책임 하에 모든 마법사를 안전지대로 대피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야!!”
나호는 소파 위에 보석을 내던지고 모자를 마구 구겼다. 그 와중에도 모자를 벗어 내팽개치지 않은 것은 아직 그에게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증거였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고기라도 씹는 것처럼 거칠게 손톱을 씹어대는 걸 보면 그 가정이 상당히 설득력을 잃긴 했지만.
나호가 이곳에 와 있는 동안, 밖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상아탑의 수장이 이렇게 신속하게 대처한 걸 보면, 지금쯤 국가 전역에 비상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의사놈이 발병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위협은 유일한 출입구를 막은 채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곳에 오래 있다간 병에 걸릴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고 마법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가 익힌 공간이동은 밀폐된 공간에선 쓸 수 없는, 잘 쳐줘도 초급과 중급의 중간 정도의 수준인 데다, 자신만 이동가능했다.
‘이 층에서 세 사람이 뛰어내릴 경우 쓸만한 마법은……없군.’
필리시아는 상황을 점점 비관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나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보석을 집어들었다. 그 용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나호에게 도로 내밀었다.
“자요. 이거, 아까 카드처럼 통신할 때 쓰는 거죠?”
“……그렇소.”
“상황을 들려주시겠어요?”
“좋지 않소. 엘드에 악의 꽃이 발병했다는 게 상아탑에 알려졌소. 그래서……아니, 아무튼 저 작자가 발병원인 것 같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법사 소집령은 기밀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기에 그는 그 부분만 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시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럼 거기 물어봐 주세요! 병이 혹시 여기저기 퍼졌는지!”
집과 친구가 바깥에 있는 그녀가 그것을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나호는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기를 빌면서 다시 보석을 쥐었다.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시오. 현재 엘드에 얼마나 그 병이 퍼진 거요?
-아직은 퍼지지 않았습니다.
나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상아탑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낸 거요?
발병원은 이곳에 있다. 아니, 혹시 이 자도 감염된 것 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나호에게 목소리가 대답했다.
-발병한 환자를 진료했다는 의사가 국가에 신고했습니다.
-그럼 그 의사도 감염된 거요?
-아닙니다. 얼굴에 붉은 기가 돌긴 했지만, 단순한 발진이라고 밝혀졌습니다. 그는 환자가 병명을 듣자마자 뛰쳐나가서 미처 잡지 못했다고 주장했다더군요.
-바보 레벨을 벗어난 머저리라 병에 안 걸렸나 보군요.
-네?
-아닙니다. 그보다 이쪽에……
“가지 마! 필리시아!”
대화에 집중하던 나호에게 시아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보석에 전달되는 마력을 잠시 차단하고 눈을 뜬 그에게 기절초풍할 만한 광경이 비쳐졌다. 필리시아가 문고리를 잡고 막 당기려 하고 있었고, 시아는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놓으세요, 언니! 저 분을 돌봐야 해요!”
“넌 외상 환자만 치유할 수 있다며!”
“아니요. 병을 치유해 주는 것도…………가능하긴 해요.”
“그 간격은 뭐냐고! 말해봐! 그건 네가 평소 행하던 치유보다 몇 배로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필리시아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안으로 열리는 방식이라, 시아가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은 오히려 힘을 보태주는 결과를 낳았다.
문이,
서서히,
열리고 -
“무슨 짓이야!”
나호가 필리시아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얼마나 급했는지,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공간이동으로 이동할 정도였다. 그는 필리시아의 팔을 쳐내 문고리에서 손을 떼게 한 후 온몸을 던져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는 쾅 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뿌지직 하는 섬뜩한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펠이 털을 곤두세우며 크르렁거렸다.
“저기, 나호 님.”
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호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낮게 대답했다.
“말하지 마세요, 시아 양. 지금 상상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고 있는데, 그게 현실이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럼 지금부터 참는 법을 익히셔야겠네요.”
“나보고 이런 상황을 참으라고? 제기라아아아아아아아아알!!!”
문에 끼여 있는 남자의 왼팔을 내려다보며 마법사는 절규했다.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방출하기 위해서였다. 문이 열리면서 환자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순간, 그들의 발병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병의 전염원인에 관해선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었지만, 환자와 접촉을 하거나 가까운 곳에서 함께 호흡하면 병에 걸릴 확률이 8할이 넘는다는 것은 수많은 사례로 인해 정설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원인제공자인 필리시아는 문을 향해 다시 나아가려 했다.
“나호 님, 시아 언니. 비켜주세요.”
“어딜 가려고! 필리시아, 제발 좀 그만해! 이 바보야!”
“작작 해요! 당신이 지금 나가서 뭘 어쩌려고? 다른 병도 아니고, 악의 꽃이란 말이오! 필리시아 양의 거덜난 생명력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도……!”
필리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눈꼬리가 바르르 떨린 것을 나호는 놓치지 않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의식을 치르지 않은 채의 그녀로서는 치유에 따르는 반동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다. 아니, 지금 버티고 서 있는 자체가 그녀에겐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했다.
“저 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오직 제 도움만을 바라고 온 사람입니다. 전 그 희망에 응해야 해요.”
“성녀 놀이는 좀 그만 하란 말이오! 저 사람은 포기하고, 우리라도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놀이가 아니라고 했죠!”
필리시아의 비통한 외침이 나호의 말을 잠재웠다. 뜻밖의 기세에 나호가 잠시 멈칫한 사이, 그녀는 시선을 필리시아에게로 돌렸다.
“언니. 제가 줬던 책 제목을 아시나요?”
“제목? 그거…… ‘기적의 기사’였지, 아마?”
“네. 그런데 말이죠. 그 책에 제대로 된 기적이라곤 하나도 나오지 않는 거 아시나요?”
소녀가 투명하게 웃었다. 얼굴 뒤의 배경이 비친다고 생각될 정도로 덧없는 미소였다. 시아는 그 미소를 자신 같은 사람은 결코 지을 수 없을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이에요. 늘 기사가 되기를 꿈꾸지만, 기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쌓지 않으면 될 수 없죠. 그래서 그는 기사도 문학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엔가, 그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온 가족이 죽고 그만 겨우 살아남게 되었답니다. 그는 크나큰 비탄에 빠졌고, 사람들은 그를 위로했어요. 하지만 무엇으로도 그의 비탄은 메꿀 수 없었죠.“
“잠깐, 지금 그런 얘길 할 상황이……”
“절망에 빠진 그를 구원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현실을 이겨낼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어느 날엔가 광기에 빠져 선언했어요. ‘나는 기사가 되었다!’라구요. 그의 과거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엾은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합의했어요. 우스꽝스러운 그의 검술에 찬탄하고, 일부러 악당 역할을 맡아 그에게 패배하기도 했지요. 심지어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를 공주로 분장시켜 그에게 구원받게 하기도 했답니다.”
소곤거리는 듯한 그녀의 말이 어째선지 머릿속에 직접 입력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심지어 펠도 환자의 팔을 물어뜯으려는 걸 멈추고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아무리 그가 기사 흉내를 내도, 그는 결국 기사가 아니었어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죠. 하지만 그는 몇 년 후 왕국에 토너먼트가 열렸을 때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모험을 치르고, 무명을 떨치는 화려한 기사가 되었어요. 아, 이 부분이 참 재미있는데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 안타깝네요.
오랜 모험을 마치고 그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기 위해 모였어요. 모두 그의 기사 놀음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죠.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정말 재미있는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전 정신을 차렸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전 이제야 비로소 제가 기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 말을 하고 말에서 내린 그는, 긴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그 사람은, 죽은 거야?”
어느새 그 이야기에 빠져 있던 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필리시아가 대답을 하기에 앞서, 마법사가 그녀의 앞에 섰다.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그걸 굳이 지금 이야기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전 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답니다. 평범한 기사소설이 아니란 이유로 판매량은 저조했지만, 전 이 작품이 피셔 님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요? 그 책을 유품으로 전달하고 싶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한다 한들, 당신의 등가교환 방식으로는 무리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소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마법사의 품에 스르륵 안겼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망토처럼 그녀의 등을 덮었다. 시아가 보기엔 그녀가 중심을 잃어 비틀거리고, 그것을 마법사가 받쳐 주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엉뚱했다.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시아를 안은 채 그대로 무릎을 꿇어버린 것이다.
“커흑…… 필리시아……양, 당신 무슨……짓을……”
“잠시만 그렇게 있어주세요. 곧 끝날 테니까요.”
그와 같이 주저앉았던 필리시아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 손에는 흰 빛이 머물러 있었다. 아까 불한당을 눕혔던 기술이란 걸 나호는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방심을 속으로 욕했다.
“나호 님!”
“난……괜찮으니, 어서…… 문을.”
무방비로 당해서 그런지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마법사인 만큼 정신적 고통에 익숙해져 있어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힘의 정체를 나호는 아까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 일로 대강 알고 있었다. 필리시아가 흡수한 고통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전이시키는 것. 고작 일부가 이 정도라면, 본인이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의 본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필리시아가 시아를 향해, 정확히는 시아의 바로 뒤에 있는 문을 향해 다가왔다. 고작 두 걸음 정도의 거리였지만 둘에겐 참으로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필리시아의 손에는 여전히 빛이 머물러 있었고, 그것은 노란 램프의 빛을 중화시키며 흰 그림자를 너울거렸다. 그 빛의 움직임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시아는 필리시아가 한 걸음을 내딛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한 걸음만 더 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언니.”
필리시아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시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시아는 입을 벌렸지만 대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까라면, 필리시아가 자신이 틀렸냐고 물었을 때라면, 그녀는 철없는 소녀에게 ‘다른 어떤 대가라도 상관없지만, 자신의 생명 자체를 담보로 거는 건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다’란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필리시아는, 그리고 그녀가 던진 질문은 아까와 달랐다.
“저는.”
어째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까? 시아는 저도 모르게 비켜서고 있었다. 펠도 주인이 비키자 망설임없이 주인 곁으로 몸을 옮겼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며, 필리시아는 시아의 귀에 속삭였다.
“기적을 보고 싶어요.”
그녀가 문을 열었다. 소녀의 가느다란 팔이 환자의 팔을 들어올려 끌어당겼다. 남자의 볼품없는 육체가 그녀의 품에 들어왔다. 그 무게 때문에 필리시아는 휘청거리며 주저앉았지만 끝까지 남자를 놓지 않았다.
필리시아의 몸에서 흰 빛이 발산되었다. 온몸에서 나온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막 지상에 추락한 별처럼 눈부셨다. 백만 개의 초를 켠다 한들 그 빛보다 아름답진 못할 것이다. 빛은 그녀의 몸을 휘감고, 남자를 감싸안고, 나아가 집안에 있던 시아와 나호마저 집어삼켰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 광채의 중심에 있는 필리시아의 모습은 고귀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이 순간, 필리시아는 진정 성녀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시아는 빛에 휘말린 중에도 그것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정말 성녀라면, 저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에서 피를 토하진 않을 테니까.
모든 것이 자신의 색을 잃고 희게 물든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녀가 점점이 토해내는 피만이 오롯이 새빨갰다.
그 붉음의 의미를 시아는 알 수 있었다.
이 눈부신 빛이 소멸할 때, 필리시아의 목숨도 함께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