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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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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1화 제로와 제로의 사역마


기슈와의 결투 이후로 나흘이 지나갔다. 포프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5일 째, 바꿔 말하자면 대마왕 버언과의 대사투를 벌인 지 닷새란 시간이 경과했다. 만약 이곳에 오지 않고, 그 세계에서 검은 핵의 폭발에서 살아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세계지만, 가장 큰 위협이 없어지고 온 나라가 일치단결되어있는 만큼 세계는 빠르게 복구되어갔을 것이다. 그 중심에 용사가, 그리고 자기가 있을 터였다.

“세상의 중심이라.”

포프는 영웅으로 칭송받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지금은.”

영차, 하고 짚더미에서 몸을 일으킨다. 팔을 몇 차례 붕붕 휘두르고 허리를 움직여 스트레칭을 한 후 기지개를 쭉 편다. 충만한 마력이 그의 전신을 휘감는다. 그렇게 잠을 완전히 깬 후 허리춤의 지팡이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유일한 증거인 흑색의 지팡이가 고고한 광택을 가느다란 햇빛을 받아 고고한 광택을 발했다.
포프는 창문을 열며 짚더미 옆에 위치한 화려한 침대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루이즈. 아침이야.”

“네, 넵!”

분명 말하기 전까지 숙면에 취해 있었을 루이즈가 눈을 뜨자마자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세웠다. 마치 몬스터에게 기습을 받은 모험가처럼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에 휘파람을 불어주면서도 포프는 내심 미안했다.

“아니, 이제 일주일째야. 그렇게 신속하게 일어날 필요 없어. 처음 봤을 때처럼 느긋하게 일어나 내게 심부름을 시키고 지각 직전에 나서면 된다고?”

“그그그그럴 순 없어요. 네게 그런 일을 시키면 브리밀이 하늘에서 탄식할 거야. 그리고 방정리 같은 건 시에스타에게 맡겼으니까 이제 심부름 시킬 것도 없어요.”

묘하게 더듬거리는 루이즈. 이제 포프에겐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낮에는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포프와 제법 말장난을 치며 어울렸지만, 이렇게 막 깬 직후처럼 아직 의식이 멍할 때는 포프에게 위압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곳 트리스테인에서도 굴지의 명문으로 꼽히는 라 바리엘 가의 삼녀가 이렇게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과 외경을 느끼게 된 이유는 포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그걸……’

포프는 잠깐 숨을 삼키고 이불을 확 걷어냈다. 그러자 네글리제 차림의 루이즈가 햇빛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얼른 일어나! 오늘은 특별히 이 몸이 옷을 입혀주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발휘해보는 에로 파워다.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한 만큼 영 어색했지만 루이즈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꺄~! 싫어! 혼자 입을 테니까 나가버렷! 저리 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태도는 그녀가 그를 더 이상 다른 사역마들과 같은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리라. 루이즈의 매서운 발차기와 묵직한 베게의 일격을 맞고 뒤로 넘어지면서, 포프는 희미하게 ‘그래도 사역마 때가 좋을 때도 있었지……’ 란 생각을 해 보았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포프의 존재는 격상했다.
격상이란 말로도 포프의 위치변화를 다 나타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기슈와의 결투 때 펼친 헥사곤 급의 주문은 그곳에 있던 수많은 학생들에게 깊숙이 각인되었다. 마법학원이란 마법을 배우러 온 학생들이 모인 곳이고, 따라서 학생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라인 메이지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대부분 트라이앵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학원장 오스만과 과거 ‘염사’라 불린 콜베르 정도가 그나마 돋보이는 존재랄까. 그런데 이러한 무리들 사이로 느닷없이 스퀘어도 아닌 헥사곤 클래스의 메이지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전속성. 광장에서 포프의 위용을 본 학생들은 그가 헥사곤 클래스의 이름모를 주문을 쓰고, 그 직후에 어지간한 물의 메이지 다섯에 필적하는 물의 주문으로 빈사상태의 기슈를 몇 초만에 회복시켰다는 사실을 곳곳에 퍼뜨리고 다녔다. 오스만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입을 다물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전 학원에 포프의 실력이 퍼진 이후로 생긴 변화들.

“……오늘도냐.”

교문에서부터 쭉 이어진 한줄기 길. 그 길을 만드는 건 두 갈래의 학생들이다. 마치 귀빈이라도 영접하는 것처럼 꺅꺅거리며 포프를 쳐다보는 학생들. 여자에게라면 땡큐 감사, 라며 달려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남학생들의 끈적한 시선까지 받는 건 좀 괴롭다. 게다가 수군거리고는 있어도 정작 포프와 루이즈에게 말을 걸려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루이즈는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걷지만, 정작 그녀보다 키가 큰 포프는 쏟아지는 부담의 무게 때문에 엉거주춤하게 걷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매력인지, 아니면 헥사곤 스펠을 쓰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인식되었는지 학원에는 그렇게 어기적거리며 걷는 게 유행하게 된다.

교실. 마법수업은 며칠째 진행되지 않고 있다. 광장에서 벌어진 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헛소문이라 일축하며 포프에게 ‘가벼운 대련’을 요청한 기트가 다른 계통도 아닌 바람의 계통으로 박살난 이후 - 그 탓에 기트가 ‘바람이야말로 최강!’이라고 안 그래도 영 미심쩍었던  자신의 사상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 선생들은 수업에 불참하거나 포프에게 솜씨를 보여달라고 조르기만 할 뿐이다. 선생이 그러는데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식당. ‘헥사곤 메이지 전용’이라 쓰인 휘황찬란한 의자가 식당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포프는 무시하고 루이즈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사람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의자를 치우는 사이 루이즈는 식탁의 포크를 들었다 내려놓는다. 대기하고 있던 포프가 접시를 내밀자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의 2/3가 접시 위에 가득 담긴다. 포프가 그것을 받자 루이즈는 식사를 재개한다. 그녀의 주장은 자신이 포크를 들었으니 식사시작, 포크를 내려놓았으니 식사 끝이라고 한다. 식사가 끝났으니 당연히 식탁 위의 음식은 잔반. 그것을 포프에게 전해준 후, 아까의 식사로는 성이 차지 않아 식사를 재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루이즈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포프는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포프의 원래 세계는 궁핍하기 때문에, 왕족이라도 이 정도의 아침식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험을 시작한 이후로 맛있는 음식을 먹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잔반이든 뭐든 그는 신경쓰지 않고 맛있게 먹어댔다.
그 모습에 덩달아 식사를 맛있게 즐기게 된 루이즈가 어딘가의 사이즈가 증대되어 흐뭇하게 미소지은 건 몇 달 뒤의 이야기.

주방에는 출입금지. 이건 포프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다. 결투 후 시에스타는 울면서 그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주방의 다른 인원들은 그가 들어올 때마다 마치 귀족에게 하는 것처럼 굽신거렸다. 포프가 자신 또한 평민이니 여러분과 똑같이 대해달라고 해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마법=귀족이라는 인식이 깊게 깔린 하르케게니아에서 이 정도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는 평민이란 그들의 상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 포프가 검을 들고 날뛰었다면 아무리 굉장한 솜씨를 보였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그를 평민으로 생각하고 친근하게 접했을 것이다. 빠르게 그것을 파악한 포프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시에스타를 루이즈에게 천거해 전속 시녀로 두게 했다. 전속 시녀라면 지금보다 일도 편해질 뿐만 아니라 지난번처럼 시비가 붙더라도 자신이나 루이즈가 커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시에스타가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자신의 존재를 평민들에게 잘 중재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의 루이즈와의 개인마법교습.

​“​이​오​(​폭​렬​주​문​)​!​”​

포프의 마법이 막 허공에 띄운 나뭇가지를 강타했다. 위력을 최대한 죽였지만 나뭇가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미약한 폭음의 여운이 남은 가운데 루이즈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외친다.

“이…이오!”

쾅! 아까와는 달리, 3층에서 추락한 피아노가 지면과 격돌한 것만큼이나 엄청난 소리가 났다. 허공에 던진 나뭇가지는 멀쩡히 내려왔지만 정작 그보다 뒤에 있던 탑에 폭음이 들렸다. 보물창고가 있다는 학원의 본탑이다. 엄중한 결계가 쳐져 있다고 하니 차라리 저기 맞고 흔적이 남지 않는 게 다행이다.

“아직 멀었어! 이오!”

쾅!

“이오!”

쾅!

“이오! 이오! 이오!”

쾅! 쾅! 쾅!

“……저기 말야.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저 탑에 원한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어!”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지팡이 끝에서 폭음이 전해진다. 워낙 거리 조절이 안 되는 루이즈의 마법이라, 약간의 감정 변화만으로도 이렇게 근거리에서 폭발할 수 있는 모양이다.

“우왓!”

그녀와 딱 붙어서 훈련을 지도하던 포프가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방출된 그의 마력이 폭발을 한순간에 지운다. 폭음이 들리자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즈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후에?”

​“​위​…​…​위​험​했​다​.​”​

포프는 식은땀이 살짝 난 걸 느끼곤 바로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슬슬 루이즈가 지겨워하는 기색을 띠고 있는 걸 눈치채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법을 몇 차례 살펴본 결과, 그녀의 마법이 폭렬주문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꽤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에 기본에서부터 다시 되짚어 볼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괜찮아?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아. 잠깐 쉬었다 계속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론 그만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싫증을 느낀 사람을 억지로 훈련시켜야 할 만큼 전란으로 들끓는 세계가 아니니 굳이 억지로 시킬 필요는 없다.

“아니, 오늘은 그만. 특별 하드 트레이닝 교습도 아니고.”

“뭐야, 그게?”

“그런 게 있어.”

자신이 며칠 만에 포기하고 도망간 데다 타이도 사흘밖에 훈련받지 못해 결국 제대로 통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 스승 아방의 특별 수업을 떠올리며 그는 몸서리쳤다.
루이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신의 사역마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 남자를 소환했을 때 들었던 참담한 심정이 이제는 눈부신 자긍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 운룡 급의 몬스터를 소환했더라도 지금만큼 기쁘진 않았을 것이다.
제로라 불리며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 외면받던 그녀가 한순간에 모두의 경외감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이제 그녀를 대놓고 제로라 부르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만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탑 클래스의 메이지란 평가를 들을 가치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차고 무도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목걸이를 자랑하는 처녀의 것과 비슷했다.

‘헥사곤 메이지가 제 사역마입니다, 아버지.’

집에 보낼 편지의 초고를 막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루이즈의 어깨에 올라오는 갈색 손이 있었다. 자칭 미열의 큐르케였다. 명석한 두뇌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던 중이었던지라 그녀의 이름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선 채로 책을 읽는 재주를 선보이고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는 아마 타바사일 것이다.

“연습에 열중이네, 제로. 이젠 좀 솜씨가 나아졌어?”

루이즈의 기분이 한순간에 팍 가라앉았다.

“큐르케, 너! 아직도 날 제로라고!”

“어머? 제로를 제로라고 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가 널 제로라고 부르는 건 말야.”

갈색 피부의 미녀 큐르케가 목 위의 버튼을 풀고 탐스러운 가슴곡선을 살짝 드러냈다.

“바로 여기, 네 유아체형 때문에 하는 말이니까.”

포프가 그녀와 루이즈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납득한 듯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가. 그럼 어딘가에 맥스의……”

​“​뭘​납​득​했​냐​사​역​마​주​제​에​건​방​져​!​”​

루이즈의 몸이 한바퀴 회전했다. 작은 체구에 걸맞는 빠른 스피드가 더해져 발차기는 무서운 기세로 날아왔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을 터였지만, 반드시 맞아야 할 분위기였기 때문에 포프는 눈물을 흘리며 허공 3회전 이후 화려하게 지면에 나뒹굴었다. 물론 적당히 몸을 틀어 충격은 거의 제로였다. 오리하르콘도 부수는 처녀의 일격을 몸으로 줄곧 받아내며  그는 다소 전사의 육체를 가질 수 있었다.  
포프가 얼마 전 크게 다쳤던 기슈보다도 더 처참한 자세로 지면에 눕자 큐르케가 갑자기 달려왔다.

“달링! 괜찮아요?”

“뭐라고!”

루이즈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지팡이를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큐르케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포프의 몸을 일으켜세우더니 머리를 들어 무릎베게를 해 주었다. 정신이 멀쩡했던 포프는 일단 눈을 감고 있었지만, 머리에 전해지는 푹신하고 따뜻한 감촉과 어딘가 열기를 품은 향수의 매혹적인 냄새에 아찔해졌다.
순간적인 쾌락에 취해 입을 열 타이밍을 그가 놓쳤을 때 큐르케가 루이즈에게 선언했다.

“나 미열의 큐르케는 지금부터 포프를 내 달링으로 여기겠어! 불만 있어?”

뭐? 뭔 소리야? 여자에게 도무지 인기가 없던 포프에게 난데없는 애정선언은 기쁘다기보다 당혹스러웠다. 모험을 하는 동안 마암에게는 계속 채이기만 하고 메를르에겐 고백만 들은 채 더 이상 진전이 없었던 포프에게 이런 체험은 그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서투른 그라도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등에 맺힌 식은땀에서 한기를 느끼며 그는 두 사람의 다툼에 귀를 기울였다.

“헛소리! 달링이라니? 이 색녀! 지금도 애인은 무지 많잖아!”

“필요없어, 그런 거. 베스트리 광장에서의 달링의 위용과 비교하면 그런 녀석들은 쓰레기 이하니까. 뭣하면 네게 다 줄까?”

“이익!”

루이즈는 입술을 깨물더니 곧장 큐르케에게 달려왔다. 그 기세로 큐르케에게도 한 방 먹이나 싶었지만 그녀는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자신의 사역마를 일으켜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포프가 마지못해 정신이 든 척 하자 그녀는 냅다 큐르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일어났으면 얼른 저 녀석이랑 싸워요! 코를 납작하게 해 주라구!”

“에, 또, 뭐라고? 큐르케랑? 어째서?”

“그야 날 모욕했으니까지!”

‘모욕? 그건 이렇게 분노해야 할 정도로 모욕이었나?’

포프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길지 않은 15년의 인생 중 자신의 가슴크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좌절했던 여성이 있었던가? 일단 어릴 적 마을의 여자애들은 제껴두고, 마암부터 시작해 레오나, 메를르, 파푸니카 삼현자, 카알의 여왕님 등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고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자기 크기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모두 평균은 넘는 사이즈였던가?

“빨리 싸워!”

루이즈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포프는 마지못해 앞으로 나서며 큐르케에게 질문했다.

“저기, 나랑 싸울 거야?”

“별로. 달링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고, 나와 프레임이 힘을 합쳐도 달링에겐 상대가 안 될걸.”

큐르케는 아무렇지도 않게 패배를 인정하더니 다시 달려와 재차 포프를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내 패배 인정! 난 달링의 포로니까 마음대로 해!”

“엑! 뭐야 그 상큼한 인정은!”

더 말하려고 했던 포프였지만 가슴팍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다음 할 말을 잊었다. 이 느낌은 거의 마암과도 비슷한 느낌. 굉장한 글래머였던 마암과 필적하는 존재가 이 세계에도 있을 줄이야. 얼굴을 조금 바꿔 상상해 마암이라고 상상해보자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마구 들끓었다. 상냥하고 자신에게 안기는 마암이란, 자보에라 이후 -

“……잠깐 떨어져 줄래?”

“응? 달링, 왜 그래?”“

​“​…​…​…​…​…​…​…​…​트​라​우​마​가​.​”​

헤롱헤롱한 듯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근처 나무에 머리를 쾅쾅 박으며 괴로워하는 포프였다. 표정을 보니 어쩐지 구역질을 참고 있는 것 같아 등을 두들겨주려 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잠시 내버려두면 안정될 것 같아 큐르케는 곧 그에게서 등을 돌려 루이즈를 마주했다.

“흐응. 루이즈, 실망인걸. 다짜고짜 사역마를 내보내려 하다니. 시비를 걸었으면 본인이 맞서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 아닌가?”

“네게 그런 예의 따윈 차릴 필요 없어!”

“내게 예의를 차리란 것만이 아냐. 달링에 대해서도 예의를 차리란 거야.”

“뭐? 포프는 내 사역마야! 내 사역마니까 내가 명령할 수 있고, 나와 항상 같이 다닐 수 있고, 나 대신 싸울 수도 있는 거야!”

“그래? 그거 진심?”

“당연한 거 아냐?”

루이즈는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허세를 부렸다. 그 모습은 최근 등교할 때마다 주변의 학생들에게 드러내고 있는 그런 성격의 거만함이었다. 큐르케는 질린 듯 루이즈를 바라보다 휙 등을 돌렸다.

“가자, 프레임, 타바사. 지금은 상대할 필요가 없겠네.”

“뭐? 큐르케, 시비를 걸고 도망치기야?”

“달링을 번쩍이는 방패로 생각하고 그 뒤에 숨은 것만 해도 한심한데,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줄 알고 좋아하는 어리석은 계집애. 그만 정신 좀 차려.”

한마디 한마디가 지팡이에서 뿜어져나온 불꽃보다도 더 뜨겁게 루이즈의 뺨을 달아오르게 했다. 약간 진정하고 다시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포프에게도 그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최근 그가 루이즈에게 느끼던 것과 비슷한 평가였다.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내 사역마’란 감정에 취해 처음의 노력과 열성이 무뎌지고 있는 주인님이었기에 조만간 한마디 해줘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 큐르케가 정확히 지적해주었다.
루이즈가 뭔가 크게 외쳤다. 의미없는 비명과 같은, 자존심을 상처받은 맹수가 내는 그런 소리였다. 날카로운 소리였지만 큐르케의 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루이즈에게 들리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이즈, 재미없게 변했네.”

그 말 속에는 큐르케에게는 보기드문 진지함이 묻어 있어서, 루이즈는 움직일 수 없었다.
큐르케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루이즈에게 포프가 다가왔다.

“루이즈.”

포프가 꼿꼿하게 서 있는 루이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에 손이 파묻히자 그녀의 떨림이 느껴졌다.

“루이즈.”

다시 한 번, 상냥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포프.”

포프는 참을성있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오 분 정도 그렇게 서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겁한 것 같아?”

“이런, 너무 정직한 질문인걸.”

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숨에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 그녀의 완고한 성격을 잘 말해주었다. 이런 질문에 돌려서 대답하는 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지금은 큐르케가 맞는 말을 했어.”

“……그래? 내가 포프 뒤에 숨어서, 헥사곤 메이지를 소환한 메이지라는 사실에만 취해 있는 제로란 사실이 맞는 말이라고?”

“루이즈!”

가만히 루이즈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루이즈가 포프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아까부터 흘리고 있던 굵은 눈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눈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볼 위로 흘려보내며 루이즈는 포프를 노려보았다.

“인정받고 싶은 게 그렇게 나빠? 이제 겨우 날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까 이제 그걸로 끝내야 한다는 거야? 이제까지 날 무시하던 녀석들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쳐야 한다는 거야?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무시만 당했는데, 잠깐이라도 그 녀석들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나빠.”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포프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단 한순간이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게 있어. 사람마다 조금씩 틀리겠지만, 난 네가 지켜야 할 것이 진짜 용기라고 생각해. 지난번에 말했지? 이 녀석은 마법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네 모습은 어땠지? 전력으로 부딪치고, 전력으로 실패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시 부딪치고 있었잖아?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돼. 나 때문에 네가 전력을 다할 수 없게 된다면 난 무척 슬플 거야.
난 네 편이고, 네 힘이야.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네게 존재했던 게 아니야. 진짜 용기를 지닌 네게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 내게 명령하기 전에, 네가 전력을 다했는지, 네 힘이 아쉽게도 약간 미치지 못할 때 내게 힘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힘에 취해 날 이용하는 게 아닌지 다시 생각해줬으면 해. 난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포프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자 다시 루이즈에게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포프가 당황하며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그 손을 붙잡으며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애당초 사역마에게 인정받은 것부터 이상했는데, 이젠 사역마에게 충고까지 듣다니……”

“별 수 없잖아. 난 애당초 클래스 ‘참견쟁이’ 사역마로 소환되었는걸.”

소년의 농담에 소녀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고 배를 부여잡고 눈에 맺힌 눈물을 사방에 뿌리며 한참 웃더니 다시 허리를 펴고 포프와 눈을 마주쳤다. 며칠 동안의 음습함이 가신, 본래의 외곬수인 그녀의 형태가 포프의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 잘난 척은 여기까지 할게.”

“그래.”

“하지만 못난 척 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

“단 한순간도 잊지 마.
넌 최강이고, 난 최강의 사역마를 소환한 최고의 메이지라고.
이런 말은 이제 낯뜨거워서 더 못할 테니, 네게 마지막으로 하는 거야.”

“루이즈답네.”

포프가 그녀가 경어를 더 이상 쓰지 않는 걸 깨닫고 빙긋 웃었다.
잘생기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지극히 소년다운 얼굴이었지만 루이즈의 눈에는 그가 섬광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숙사를 향해 앞장서서 걸으며 등 뒤에 있는 소년을 떠올린다.

방금 전의 난 포프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오로지 진실만 이야기하고 있는 그에게 묻는다면, 과연 그때도 똑바로 이야기해줄까?

내가 포프에게서 본 빛남처럼, 포프가 나를 보았을 때도 그 빛남을 느끼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포프가 말했던 ‘진짜 용기’란 걸 쭈욱 간직하고 있어야겠지.
 
원작이 딱 클라이막스에서 끝났던 터라, 이번 편은 쉬어가는 느낌으로 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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