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2화 백은의 전우
녹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학원에 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우수에 찬 소녀나 수업을 땡땡이치기 위해 도망쳐오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명문 트리스테인 마법학원의 학원장 비서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위치는 평민이었다. 올드 오스만처럼 털털한 성격의 귀족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이곳의 학생들은 오히려 어린 만큼 감정이 폭주하면 강자의 잔학함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일전, 평민 사역마에게 검을 들이대던 기슈가 그 좋은 예였다.
긴 다리로 기운차게 걷던 미스 롱빌의 귀에 문득 익숙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나 여자 모두 아직 앳된 목소리였다. 말소리가 또박또박하게 들리는 걸 보면 아직 제대로 시작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호기심을 발휘해 소리가 들리는 곳을 엿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발걸음을 빨리해 그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저것이 귀족의 자제라면, 이 모습을 들킨 순간 목격자를 해코지하려 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미스 롱빌은 거기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케가 나오면 어떨까?
그녀의 내면에서 ‘흙더미의 후케’가 둥실 떠올랐다. 미스 롱빌이란 이름은 이곳에 숨어들기 위한 위장 신분. 그녀의 진짜 정체는 세간에 화제가 자자한 흙더미의 후케이다. 노리는 것은 훔쳐내지 못한 적이 없는 연금의 대가. 꽤 많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의외로 추적은 허술했기에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둑맞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꽤 고민될 만한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털었던 데다, 범행 후 ‘난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쪽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정말 약점을 알고 그렇게 남기는 건 아니지만, 그 쪽지 덕분인지 귀족들의 신고는 열에 두셋 정도에 불과했다.
후케로서의 사고가 가동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귀에는 더 이상 젊은 연인의 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빠르게, 조용히 학원의 본탑을 향해 걸으며 그녀는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탑의 공략을 고민했다. 스퀘어 급의 메이지 여러 명이 건 고정화 마법은 그녀의 연금으로 뚫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법을 믿고 경비가 소홀한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하지만 탑을 공략할 방도가 없다면 경비의 유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그 대머리를 꼬드겨야겠어’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는 대머리 선생 콜베르를 떠올려 보았다. 먹잇감으로는 이상적이다. 올드 오스만처럼 성희롱을 하면서도 은근히 빈틈이 없는 노인네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자신과 몇 마디만 대화하면 금세 얼굴이 붉게 물드는 중년의 남자 쪽이 상대하기 훨씬 수월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그와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술을 한 병 먹여놓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술술 대답해 주겠지.
하지만 그녀 스스로 도둑질할 수 없다는 사실은 후케로서 굴욕적이다. 얼굴과 육체는 색기를 띄우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이런 쪽에는 경험이 별로 없는 쪽이다. 별로 호감이 없는 상대와 몇 시간 동안 억지로 웃으며 마주 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 무심코 고개를 들어 빌어먹을 탑을 보고,
“어?”
먼지 하나 묻지 않아야 할 탑의 벽에 그을음이 잔뜩 묻은 것을 보았다.
제로의 대모험 제5화
- 백은의 전우 -
“루이즈, 아침. 슬슬 일어나.”
“거절한다.”
“흐으으으음, 그래? 또 옷을 갈아입혀 줘야 하나?”
“맘대로 해…… 너무 피곤해……”
“이것도 약발이 떨어졌네. 그렇다면……”
포프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작은 열매 두어 개를 꺼내 손톱으로 껍질을 벗겼다. 하얗고 달콤해 보이는 과육이 드러나자 루이즈의 입을 벌리고 그것을 집어넣었다. 약간 차갑고 새콤달콤한 느낌에 루이즈는 행복한 신음을 내며 기분좋게 우물거렸다. 포프는 기분나쁘게 씨익 웃고 루이즈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우물우물, 꿀꺽.
“이게 뭐야아앙앙앙아앙아악!”
“오, 혼이 들어간 외침! 오늘도 활기차, 루이즈!”
“이, 이런 지옥같은 신 맛이! 물! 물!”
“여기.”
포프가 컵을 건네자 루이즈는 호쾌하게 그것을 원샷했다.
푸하~! 하며 입을 닦는 루이즈의 입가에 하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뭐야, 이거. 우유?”
“응. 맛있지?”
“맛……있었을라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루이즈. 막 일어났는데도 복슬복슬함을 유지하고 있는 복숭아빛 머리가 사랑스럽게 흔들거린다. 분명 그녀는 우유를 엄청나게 싫어해서 포프와 시에스타에게 확실히 주의시킨 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먹은 우유는 입안에 퍼진 신 맛을 중화시키며 고소한 맛까지 남겼다.
“신기하긴 했어. 이 열매가 여기에도 있을 줄이야. 이름은 다르지만.”
포프는 주머니에서 열매 하나를 꺼내 손가락으로 튕겨 그대로 입에 넣었다. 루이즈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우물거리며 씹었다. 루이즈가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표정변화 없이 코를 한 번 긁적이곤 우유를 컵에 따라 마셨다. 이걸 보면 아무래도 루이즈를 골리려는 게 아니라 원래 그의 방식인 것 같다.
“그거, 무슨 의미야? 그런 순서로 먹는 거야?”
이런 걸 먹였다는 화보다 호기심이 앞서 루이즈가 질문하자 그는 열매 하나를 더 꺼내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말야, 로뎀의 열매란 거야. 내가 살던 세계에선 우유가 여기보다 더 맛없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가 우유를 먹이려고 할 때마다 싫다고 했지. 그러자 엄마는 이 열매를 먼저 먹이고, 내가 발버둥칠 때 우유를 먹였어. 그 뒤로 난 우유를 잘 먹게 되었고. 뭐, 그러니까 이 로뎀의 열매의 즙은 우유와 어울리면 묘하게 맛있어진다는 얘기랄까.”
“흐음. 그럼 내게 이걸 먹인 건 앞으로 우유를 잘 마시란 얘기?”
“그래. 편식은 좋지 않아. 내가 오기 전엔 우유를 하수구에 그대로 쏟았다며?”
“……주의하지.”
루이즈는 자기 말을 확실히 지키는 귀족답게 컵에 남은 우유를 깨끗이 비웠다. 포프와 만난 뒤 잔반처리에 굉장히 민감해진 루이즈이다.
좋은 교훈도 얻었겠다, 잠도 다 깼겠다, 루이즈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몸치장은 시에스타가 도와주었다. 포프는 열매채집을 도와준 시에스타에게 감사의 표시로 손을 흔든 후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옷을 입고 나오길 기다렸다.
수업이 종료되었다. 포프와 거의 상관없는 정치학이었기 때문에 그는 비스듬히 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다가 루이즈가 흔들어 깨어났다. 함께 교실을 나서려는데 큐르케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포프에게 다가왔다. 포프가 내심 ‘맥스의 큐르케’라 이름붙인 존재답게, 색기가 사방팔방 퍼지며 남학생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거기에 가장 자극된 것은 포프의 주인인 루이즈였다.
“거기까지! 당신이 무슨 짓을 할지 뻔해요!”
“뻔하다면 잘됐네. 어차피 밤엔 달링과 같이 있을 거면서. 낮엔 좀 빌려주면 안될까?”
“안돼요! 포프는 빌려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의외였는지 큐르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식적으로 내뿜던 색기가 사라지자 소녀의 천진한 표정이 살짝 드러나보였다.
“놀랐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어젠 안 그랬잖아.”
“사람은 반성하고 하루 지나면 달라지는 법이에요.”
“헤에, 그래? 그럼 나랑 일대 일로 결투할 수도 있겠네?”
큐르케가 지팡이를 내밀자 프레임이 앞으로 엉금엉금 걸어나와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여차하면 불을 뿜을 기세에 학생들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루이즈는 겁먹지 않고 똑바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손을 품에 넣은 걸 보니 여차하면 지팡이를 꺼내들고 예의 ‘폭발’을 발산할 모양이었다. 그녀는 포프를 쳐다보지 않았고, 포프도 그녀가 아니라 둘이 대치하는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갈색 피부 때문에 유난히 돋보이는 붉은 입술이 살짝 비틀릴 때, 청색의 소녀가 소리없이 다가오더니 자신의 지팡이로 머리 하나는 큰 친구의 뒤통수를 살짝 쳤다.
“장난은 그만.”
“너, 너, 그거 모서리로 찍으면 어떡해. 아야야…… 알았어.”
큐르케가 뒷통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하하 웃자 썰렁하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려하게 지팡이를 집어넣고 텅 빈 손을 살짝 폈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표시였다.
“과연, 변했네. 달링이 충고해줬지? 하루 만에 사람을 바꿔놓다니 달링도 대단해.”
“난 몇 마디 충고만 해 줬을 뿐이야.”
포프가 웃으며 손사래쳤다. 그의 충고는 적절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베스트리 광장에서의, 블랙 로드를 손에 넣기 전의 자신은 기슈에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점에서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 말을 서슴없이 받아들인 루이즈는 통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래의 세계에서도 로모스 왕이나 레오나 공주같은 사람보다는 거만하고 어리석은 귀족들이 훨씬 많았으니, 루이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역마가 되었다면 지금보단 골치아파졌을 것이다.
“그런 달링의 쿨한 모습, 너무 좋아~!”
큐르케가 몸을 좌우로 조금씩 꼬며 포프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가슴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 있는 셔츠가 살짝살짝 벌어지는 단추 사이 때문에 ‘가린다’는 본래의 목적을 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벗는 것보다 이렇게 걸치고 있는 게 더 섹시한 법이라 포프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춘기 남자의 본능으로 단추 사이의 살을 투시해보려 하는 걸 본 큐르케는 아예 달려가 그를 가슴 안에 파묻어버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달링, 나랑 나가자~ 일단 옷부터 사고, 그 뒤로 이것저것 사서 몸치장을 한 다음, 밤에는 나와 미열로 불타는 밤을……”
“아, 아니 저기, 지금 입이 잘못하면 곤란한 곳에, 아, 그렇다고 거기로 가슴을 옮기는 건 반칙, 히익.”
풍만한 가슴 속에서 호흡곤란을 느끼며, 포프는 쿨함과는 매우 거리감있는 발언을 했다. 등 뒤에서 루이즈가 ‘이 색마, 발정난 개 같으니! 채찍이 필요해!’ 하며 연신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포프는 꼼짝없이 공격을 받으며 아픔과 쾌감과 호흡곤란으로 연신 몸을 비틀어댔다.
큐르케의 가슴에서 익사하기 직전인 포프에게 실컷 분풀이하는 루이즈에게 타바사가 다가섰다.
“사역마, 주인으로서?”
“응?”
뭔가 많은 말이 생략된 타바사의 어법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루이즈는 자기도 그렇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평소의 어투로 말해주기로 했다.
“주인이긴 해. 하지만 주인인 동시에 동료야.”
“동료?”
“서로 충고해줄 수 있는 사이. 예를 들자면……”
루이즈는 이제야 겨우 큐르케의 가슴에서 떨어져 ‘맥스~!!’라는 정체불명의 발언을 지껄이는 포프를 향해 상큼하게 말했다.
“색녀에게 헤롱댔다간 큰일난다는 교훈이나, 감히 라 바리에르 공작가의 원수인 체르프스트 가의 여자와 어울린다든가, 사역마면 사역마답게 주인에게 붙어있어야 한다는 거라든가……”
타바사를 향해 웃는 얼굴을 보인 채로 루이즈는 발을 들어 포프의 배를 잘근잘근 밟아댔다.
“그게 충고?”
“아, 이건 애★정.”
“크허억!”
중압주문이라도 걸린 듯 우지직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을 보며 타바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원을 나서기 전 루이즈는 오스만의 호출로 학원장실에 불려갔다. 포프도 함께였다. 학원장의 옆에 서 있던 롱빌은 그들이 오자 자연스럽게 물러갔다. 어쩐지 이마에 약간의 땀이 맺혀 있는 게 의아했지만, 학원장의 책상 옆 바닥이 부자연스럽게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파인 것을 보면 뭔가 납득이 간다.
오스만은 짧게 충고했다.
“지금 이 학원 최대의 화제는 자네들이라네. 특히 포프 군은 일전의 일로 헥사곤 메이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얻게 되었지.”
“죄송합니다.”
뚜껑 열렸던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마법사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마트리프 스승의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약간 답답해졌다.
오스만은 그가 반성하는 빛을 보이자 굳은 얼굴을 조금 폈다.
“그때 일은 이쪽에도 잘못이 있었으니 넘어가세나. 애당초 그런 결투 따윌 해서 자네가 실력을 드러내게 만든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좀 하고 있다네.”
“제 힘이 학원 밖으로 소문나는 것 말입니까?”
“그렇다네. 이해가 빠르군. 헥사곤 메이지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당장 왕궁 아카데미에서 자네를 소환해 조사할 걸세. 자네는 왕족이 아니라 평민이니 곱게 조사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 게다가 헥사곤 메이지는 오직 왕가의 사람만 가능하다네. 그러니까.”
“제가 사역마가 아니었다면 왕가의 숨겨진 자식으로 불릴 뻔했네요.”
포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함부로 지껄여대면 왕실 모독죄로 잡혀갈 수위에 닿아 있었다. 루이즈가 급히 포프의 발을 밟아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큰일날 소리 하지 마! 학원장님, 이 얘기는 못 들으신 걸로.”
“아닐세. 나도 그런 생각을 잠깐 해 보았으니까. 폐하께서 워낙 금슬이 좋으시고 황후밖에 모르셨으니 그럴 리 없다고 곧 웃어넘겼지.
그보다, 자네.”
“예?”
오스만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들어 쭉 빤 후 가볍게 내뱉었다. 뿜어져나오는 연기가 허공에 맺히며 글자를 형성했다. 루이즈는 바닥을 바라보며 열심히 이 상황을 대처하려 궁리하느라 이것을 보지 못했다. 연보라빛 연기는 포프의 눈앞에 ‘간달브’란 말을 적은 후 조용히 흩어져 갔다.
“어떤가. ”
“음.”
‘전 여기 글을 모릅니다만’이라고 말하는 대신, 포프는 그 글자 모양을 기억해두었다. 아마도 학원장은 루이즈가 모르게 그에게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으니까.
그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오스만도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 후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자네들 때문에 학원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어. 학생들이 집에 연락해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단 말일세. 게다가 원래 방과 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일일이 내게 허락받고 나가도록 하고 있기도 하고.
이 학원 안에 퍼진 소문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밖에까지 소문이 날 경우 나로선 자네들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네. 그러니 부디 나가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용무만 마치고 바로 귀가하게나. 알겠나?”
“알겠습니다! 가자, 포프!”
정신이 심란했던 루이즈는 그를 끌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을 쾅 열고 나서는 그들을 미스 롱빌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롱빌이 다시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오스만은 흰 머리를 붙잡은 채 깊은 고뇌에 빠졌다. 입단속이라 해도 한계가 있었고, 게다가 조만간 일주일 간의 휴가기간이 예정되어 있다. 이때 학생들을 내보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되면 학생들의 부모들, 즉 이나라의 모든 귀족들이 포프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헥사곤 메이지가 무소속으로 학원에 있다고 한다면 달려들지 않을 귀족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는 어떻게든 그 전에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한참을 끙끙대던 그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펜을 들었다.
큐르케는 방에 돌아와 화장을 시작한다. 화장이야말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다. 맨얼굴에 자신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직전까지 늘 짙은 화장을 유지한다. 화장을 끝마치고 방에서 나와 루이즈의 방문을 노크한다. 예전같으면 루이즈에게 별 관심 없었겠지만, 루이즈의 바뀐 모습을 본 이상 그녀의 허락 정도는 받는 게 좋으리라. 게다가 달링과 한바탕 좋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뒤 루이즈가 날뛰어 달링이 곤란해질 테니.
노크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시에스타를 붙들고 물어보았다.
“루이즈는 어디에?”
“아까 포프 님과 마을에 간다고 하셨어요.”
“쳇! 선수쳤군!”
큐르케는 분한 표정으로 내뱉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 타바사의 방으로 갔다.
타바사는 자신의 방에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루이즈보다도 작은 몸이 침대에 들어가 있으니 마치 커다란 인형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며 사락사락 책장을 넘겨 나가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큐르케가 뛰어들어왔다.
“노크.”
“그럴 시간 없었어. 미안.
타바사, 나갈 준비 해.”
큐르케는 간략하게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타바사는 가만히 눈을 너다섯 번 깜박이다 승낙했다. 헥사곤 메이지, 그 강대한 힘을 가진 사역마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라면 놓칠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다르게 그녀의 내면에선 또 하나의 신분, 북 화격기사단으로서의 냉정함이 이미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타바사는 옷을 걸쳐입고 창문을 연 후 휘파람을 불었다. ‘큐이큐이~’하는 풍룡의 소리가 저 멀리 들린다. 타바사가 망설임없이 뛰어내리고, 큐르케도 놀라지 않고 같은 행동을 취했다. 곧 둘의 육체는 풍룡의 부드러운 피부 위에 안착했다. 두 사람이라 평소보다 무거웠지만 풍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비상했다.
포프가 학원 밖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원 밖에는 거대한 성이 있었고, 그 성문을 나서자 탁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광대한 평야에서 향긋한 풀내음이 바람을 타고 대기에 뿌려졌다. 작은 짐승 몇 마리가 뛰어다니고 있고, 저 멀리에선 농부들이 한가롭게 밭을 갈고 있었다.
“평화롭구나.”
루이즈에겐 늘 보던 광경이었지만 포프에겐 다르다. 그의 세계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심지어 저 북극의 동토까지 대마왕의 손이 미쳐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 다른 마을로 가는 것만 해도 호위병이 필요할 정도였다. 자신만 해도 아방 선생님과 함께하기 전까지는 옆마을에도 가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뭐야. 감동했어?”
“응.”
포프가 이곳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의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린 루이즈는 그가 좀 더 감상에 취할 수 있도록 말없이 말을 달렸다. 그 뒤를 포프가 비상주문으로 여유있게 따라갔다. 원래는 포프에게도 말을 태워주려 했지만, 승마엔 전혀 자신없는 포프였기 때문에 좀 더 편한 쪽을 선택했다. 망토를 걸치지 않고 마법을 함부로 쓰는 건 좀 불안했지만, 귀족 중에는 공식 행사장이 아니면 다소 느슨한 차림을 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말을 맡긴 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의 모습은 포프의 마을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시설이 아니라 활기였다. 젊은 사람들이 병사로 징집되어 늘 조용했던 자신의 마을과 달리, 이곳은 남녀노소가 한데 어우러져 떠들썩하고 유쾌했다. 그 모습에 다시 감동받으며 곧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용무만 마치고 돌아올 것’이란 학원장의 말을 떠올려서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무기점이었다. 루이즈는 포프에게 검을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 이건 포프의 요청이었다. 학원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군가와 싸우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고, 만약 싸우게 되더라도 마법은 자제하고 싶었다. 또 얼마 전 기슈를 상대하면서, 자신의 신체능력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한 기선제압과 호신을 위해 이제부터라도 검을 한 번 배워보고 싶었다.
무기점 안에 들어서자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귀족 분이십니까? 저희 가게는 건전한 영업만을 모토로 하는 성실한 곳으로……”
“손님이야. 이쪽에게 검을 사줄까 하고.”
손님이란 말에 주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귀족 상대로 장사라면 한번에 대박을 노릴 수 있다. 그는 손을 맞잡아 슬슬 비비며 충실한 태도로 카운터에서 걸어나왔다.
“그러시다면 이쪽은 하인? 집사?”
“사역마.”
“그렇군요. 귀족 분의 옆에 있으니만큼, 화려함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검이 필요합죠. 암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저희 가게 비장의 물건을!”
주인이 카운터에 걸려 있던, 보기에도 화려한 검을 가져왔다. 상당히 화려한 검으로, 검신과 손잡이를 합쳐 1미터 정도의 장검이었다. 루이즈는 검과 인연이 없었지만 그 검을 보고 감탄했다. 하지만 포프는 그녀와 다른 반응이었다. 검을 달라고 요청해 손에 쥔 후, 몇 차례 휘둘러보고 손가락으로 검날을 쓰다듬고 손잡이와 검의 연결부분을 잡아당기는 등 루이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검, 순 장식용이군요. 좀 더 튼튼한 걸로 주세요.”
“예? 아, 예. 무기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한탕 해 보려던 주인이 찔끔해 검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창고로 돌아갔다. 루이즈가 포프의 옆구리를 찌르며 질문했다.
“저런 검이면 좋은 거 아냐? 왜 거절했어? 어떻게 안 거야?”
“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으니까. 직접 만드는 재주는 없어도, 이 정도 물건 보는 안목은 있지.”
포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어서 주인이 가져온 물건은 아까보다 훨씬 실용적인 검이었다. 하지만 모양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루이즈가 트집잡았다.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루이즈와 포프가 번갈아가며 거절하자 주인은 더 이상 물건이 없다는 표시를 했다. 너무 까탈스럽게 군 게 아닌가 싶어 포프가 아까 거절한 검 하나를 다시 집어들 때, 구석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는 눈은 있지만 몸은 영 젬병인 녀석인걸. 그냥 적당한 거 집지 그래? 어차피 제대로 된 검 실력도 없잖아.”
“델 공!”
주인이 놀라 구석에 대고 소리쳤다. 포프는 놀라 구석을 보았지만 사람이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낡아빠진 검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소리가? 하고 다시 둘러보려는데, 검집이 달그락거리며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살 거 없으면 나라도 사지 그래. 계속 여기 있으니 심심하다고.
“검, 검이 말을 했다?”
포프는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말을 하는 검이라니, 용사의 검이나 진마강용검 등 최강의 무기들도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포프는 자신의 지식을 빠르게 검색하고 곧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 저 검을 들여다놓은 지 얼마나 되었죠? 어디서 가져온 거죠?”
“어디서 가져온지는 기억나지 않고, 한 일년 전부터 저 자리에 계속……”
“저 검 잡아본 사람 있어요?”
“손님들이 호기심을 보이긴 했지만, 저 녀석의 말투가 워낙 거칠어 재수없다고 보기만 했는데요, 소, 손님!”
포프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손바닥을 폈다. 화끈한 열기가 밀려오더니 둥근 화염의 구체가 떠올라 어두운 실내를 환히 밝혔다. 이오라를 구현한 후 검을 노려보며 포프가 천천히 말했다.
“어이, 미믹.”
-미믹? 뭐냐, 그건?
“시치미떼지 말지. 말을 하는 무생물이란 없어. 보통 미믹은 보물상자를 위장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세계에선 이런 모습으로도 있나 보군.”
-뭔 소리야, 자식아? 이 세계라니? 미쳤냐?
“긴 말 않겠어. 셋 셀 동안 정체를 드러내. 그렇지 않으면 이걸 날려버리겠어.”
검의 형태를 한 미믹이라면 어떤 공격을 할지 선뜻 예상되지 않았다. 포프는 가볍게 긴장하며 이오라의 열기를 조절했다. 실내이니만큼 최소한의 피해로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루이즈가 그의 옷을 잡아당기더니 난처한 듯 말했다.
“포프. 그건 인텔리전스 소드야. 원래부터 말을 할 수 있는 검이라고.”
“뭐? 그럴 리가.”
“잠깐 그 불덩어리를 치워봐. 확인시켜줄게.”
루이즈는 이오라를 다시 흡수한 포프를 끌고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각종 장신구를 팔고 있었다. 루이즈는 가장 비싼 인텔리전스 브로치를 달라고 한 후 그것을 들고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브로치에서 젊은 여성의 애교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결이 정말 고우시네요. 아아, 이 안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헉?”
포프의 놀람을 즐기며 루이즈는 다음 물건을 집어들었다. 작은 손거울이었다. 그녀는 거울을 향해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 ”
“당연히 아가씨입니다!”
거울 안에서 듬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제일 가슴이 예쁘냐고 물어보려 했던 루이즈는 그 대답에 만족해 즉석에서 돈을 지불하고 거울을 샀다.
포프는 읽지 못하지만, ‘인텔리전스 시리즈 - 몸치장, 혼자 하지 마세요 - ’라고 씌어진 잡화들을 가리키며 루이즈가 키득키득 웃었다.
가게로 돌아온 포프는 주인에게 사과한 후 곧장 검을 잡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 내가 잘 몰라서 실수했네. 몬스터인 줄 알았어.”
-흥. 예의바른 녀석이군. 답례로 나를 사라.
“그럴까……라고 하고 싶지만, 너 너무 낡은데. 몇 번 부딪치면 부러지는 거 아냐?”
-절대 그렇지 않아! 이 몸이야말로 이 가게에 있는 어중간한 녀석들보다 훨씬 단단한 최고의 검이라고! 게다가 넌 ‘사용자’잖냐!
“뭐?”
-나도 몰라. 하지만 내 깊은 곳에서 네 녀석이야말로 내게 적합한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니 날 사라. 안 사면 네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있는 힘껏 머저리 천치 새끼가 내 가치를 몰라보았다고 울부짖을 테다.
“뭐 이런 건방진 검이……”
옆에서 듣고 있던 루이즈가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떨었지만 포프는 검을 뽑아본 후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명검 소리를 들을 만한 성능인데, 겉에 녹이 잔뜩 슬어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이란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검날의 녹 사이사이로 투명에 가까운 백은의 빛이 숨어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아마 가게 주인도 검이 고급이란 건 알고 있겠지만 성격이 감당이 되지 않아 팔려고 내놓은 것일 것이다. 실제로 계산하려 하자 다른 검의 절반도 안 되는 싼 값에 선뜻 내준 것이다.
가게를 떠나며 검은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델브링거다. 감사히 쓰겠다는 다짐으로 소중히 다뤄라. 네 녀석이 얼간이같은 짓을 할 때마다 이런 머저리가 내 주인이라니, 하고 한탄해 주마.
“글쎄. 안 하겠다는 보장은 없지만.”
포프는 검을 허리에 찼다가 다시 풀어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가게로 돌어가 작은 못을 하나 들고 왔다. 그러곤 신중하게 검 손잡이의 나사를 비틀기 시작했다.
-하으윽! 뭐 하는 거냐!
“나사가 풀리려고 해서. 정말 관리가 부실하게 되어 있구나.”
-으, 윽! 어허억! 큭!
“길거리에서 이상한 소리 내지 마.”
대장장이의 아들답게 그는 깔끔하게 나사를 죄어 놓았다.
검은 만족한 듯 긴 숨소리를 낸 후 묵직하게 말했다.
-……좋은 조임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앞으로 좀 얌전하게 지내라구. 종종 나사를 새로 박아줄 테니.”
‘그, 그런!’ 하는 의미불명의 외침을 내뱉은 후 검이 침묵했다. 이 녀석이 입을 다문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포프와 루이즈는 다음 목적지인 옷가게로 향했다. 포프는 줄곧 하인들이나 입는 셔츠밖에 입을 게 없었기에, 루이즈는 이 기회에 이런저런 옷들을 골라주었다. 고맙게 옷을 받은 포프는 주인에게 뭔가를 그려주며 요청했다. 그러자 주인은 알았다며 내일 오면 완성되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포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저기, 주인하고 무슨 말을 한 거야?”
루이즈가 돌아오는 길에 묻자, 포프가 허공에서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입던 옷. 그걸 입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포프의 표정은 우수에 차 있었다.
“이 계집애! 도대체 마을에 갔으면 한참 놀다가 저녁에나 들어가야지, 왜 바로 가는 거야!”
큐르케는 풍룡 위에서 신경질을 냈다. 잽싸게 마을로 이동해 그들을 찾았지만 이미 그들은 볼일을 마치고 돌아간 뒤였다. 설마 벌써 돌아갔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한참 마을을 뒤지다 상인들에게 그들이 떠났다는 걸 뒤늦게 듣고 되돌아가는 길이다.
“실수. 위병소에 물어봤어야.”
타바사가 말하자 큐르케는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성질을 부렸다.
“알아. 하지만 설마 벌써 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쳇! 달링에게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그냥 사서 던져주는 건 의미가 없다고!”
선물이란 기합을 담은 것(마음은 약간만 넣어도 된다). 따라서 즉석에서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기합을 가득 넣을 수 있기에 애정도를 대폭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어울릴 만한 검을 사 줄까 했다가 다음 기회로 미룬 터였다.
타바사의 방에 도착해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롱빌이 서 있었다.
“에?”
“학원장님의 호출입니다.”
롱빌은 싱긋 웃고 그녀와 타바사를 학원장실로 끌고 갔다.
무단 외출, 큐르케와 타바사. 휴가기간 일주일 중 이틀간 근신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