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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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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7화 대마도사의 강림


루이즈는 포프를 노려보았다.

“포프. 대답해. 네가 간달브라는 거, 진짜야?”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얼버무려도 좋고,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있다. 하지만 포프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차피 알려야 하는 일이고, 루이즈의 이런 진지한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해 주고 싶다.

“그래.”

침묵.
침묵.
루이즈는 오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난 뭐야?”

“아무래도 허무의 메이지.”



제로의 대모험 제 7화
-대마도사의 강림

 

시간이 흘러 알비온으로 향하는 배가 준비완료되었다. 이들은 짐을 챙겨 진교, 즉 배가 있다는 항구로 향했다. 항구라 해도 바닷가에 배가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아니다. 거대한 나무가 하늘까지 치솟은 가운데, 그 나무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그 가지마다 배, 아니 비행선이 정박되어 있는 식이다.

“이거 대단해.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 봐. 아마 마력으로 성장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저 배들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거야?”

“풍석을 소비해 이동한다. 아, 풍석이 뭔지 모르겠군. 풍석이란 내 바람의 마법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힘을 담은 돌이다.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덕분에 이렇게 장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지.”

“그럼 알비온에는 채굴되지 않은 풍석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겠네. 아니면 그 자체가 거대한 비행선의 구조를 하고 있든지.”

“그건 직접 보면 된다. 그때까지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포프와 왈드의 대화는 루이즈에겐 별로 재미없었다. 그녀에겐 출항 전, 포프의 방에서 나눴던 대화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내가 허무의 메이지, 그리고 포프가 전설의 사역마?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었다. 자신이 허무의 메이지라면 어째서 마법을 쓸 수 없냐고 루이즈가 비참한 심정으로 말하자 포프는 놀랐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너, ’폭발‘을 쓸 수 있잖아. 그건 아무도 할 수 없는 기술이던데?’

‘이게?’

루이즈는 지팡이를 꺼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자신의 폭발은 이상했다. 보통 계통마법은 어떤 식으로 구현되든 그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자신의 폭발은 목표지점에서 바로 폭발하는 형식이다. 그렇기에 포프는 그 주문이 폭렬주문과 다르다고 단정지은 바 있었다. 포프의 세계에도, 자신의 세계에도 없는 제 3의 마법.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허무’의 주문이 아닐까.
하지만.

‘괜히 바람이나 넣고 말야. 곤란하다구.’

루이즈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이 정도의 폭발로 ‘허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뭔가 다른 마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것을 배울 사람도, 주문서도 없다. 일단 포프의 말이니 믿기는 하겠지만, 그 믿음 때문에 앞길이 더욱 막막해진 루이즈였다.


포프는 시끌시끌한 선원들의 소란에 눈을 떴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배 옆에서 아래를 살펴보니, 하얀 구름이 둥실 떠다녔다. 배는 구름 위를 나아가고 있었다.

“알비온이 보인다!”

종루 위에 서있던 망을 보는 선원이 큰소리로 외친다. 구름의 사이에서 시커먼 대륙이 보이고 있었다. 대륙은 아득하게 시야가 이어지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공중에 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저 아래의 대지와 다를 바 없었다. 산과 강, 그리고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보였다.

“야아, 이런 거, 대단해.”

버언이 이 모습을 본다면 자신의 대마궁과 비교하며 분해하지 않을까. 포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왈드의 설명을 듣는다.

“부유대륙 알비온. 저렇게 공중을 부유해서, 항상 대양의 위를 해메고 있어. 하지만, 한 달에 몇 번 정도 하르케게니아의 위로 다가와. 크기는 트리스테인의 국토 정도는 돼. 통칭 '백의 왕국'.”

“어째서 '백의 왕국'인 거야?”

왈드 대신 루이즈가 대륙을 가리켰다. 커다란 강에서 넘쳐흐른 물이, 공중에 떨어지고 있다. 온도차 등의 이유로 물은 하얀 안개가 되어 대륙의 하반부를 감싸고 있었다. 안개는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은 하르케게니아의 대륙에 비를 뿌리는 것이라고 루이즈는 설명했다. 그 때, 종루 위에서 망을 보던 선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우현상방의 구름 속에서, 배가 접근해 옵니다! 신호에 반응이 없습니다! 기, 기를 걸고 있지 않습니다!”

“뭣이! 공적인가?”

“틀림없습니다! 최근 활동이 활발해졌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도망쳐라! 좌현 최대!”

선장은 배를 공적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검은 배는 포프가 탄 배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삐죽 튀어나온 대포에서 위협하려는 듯한 한 발이 발사된다. 그것은 포프가 탄 배의 진로 앞부분을 뚫고 구름 너머로 사라져 간다. 저거, 아래 있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야? 포프는 정말 생각없는 놈들이라고 한탄했다. 검은 배의 마스트에서, 네가지 색의 연기가 슬슬 올라온다. 연기의 색과 수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정선명령입니다. 선장.”

“어떻게 할까요?”

선장은 배에 탄 승객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왈드를 쳐다보았다. 왈드는 자신과 갑판 위에 부려놓은 그리폰을 잠시 되돌아본 후 쓰게 말했다.

“항복이다. 대항할 순 있겠지만, 이 배의 안전은 책임질 수 없어.”

포프는 이채를 띠고 왈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까지 냉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다. 하지만 그 지나칠 정도의 냉정함이 오히려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마치 이런 상황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다. 비밀임무를 띤 여왕의 특사가 공적에 잡혀 포로가 된다면 임무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닌가? 물론 왈드의 말대로 전투는 둘째치고 공적들이 대포를 난사하면 이 배는 그대로 끝장이니 항복하는 게 맞긴 맞다. 하지만 왈드는 도망조차 치려 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려 한다.

“포프. 어떻게 해 볼 수 없어?”

루이즈가 포프의 망토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확실히 포프라면 순간이동주문으로 일행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다. 가 본 적 없는 곳에는 이동할 수 없는 게 순간이동주문의 약점이지만, 이렇게 알비온이 보이는 곳까지 왔으니 이동가능하다. 하지만 포프는 왈드의 태도가 계속 걸렸다.

“왈드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여기선 그의 뜻에 따르자.”

“하지만……”

“여차하면 도망칠 테니 걱정마. 난 도망이라면 이골이 났다고.”

그러고보면 자신은 도망칠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선두였다. 크로커다인과의 싸움에서도, 죽음의 대지에서 도망칠 때도, 대마궁에서 도망칠 때도. 하지만 제대로 성공했던 건 한 번도 없었던가? 아무래도 그 쪽엔 의욕만 넘치고 재주는 없나 보다, 라고 포프는 쓰게 생각했다.
귀족의 일행은 이들뿐이었기에 포프 일행은 다른 승객들과 다른 취급을 받았다. 두목이 있는 방으로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된 것이다. 귀족들은 대부분 개인 비행선이나 고급 비행선을 이용하는 만큼, 이렇게 싸구려 비행선을 이용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 같다는 게 왈드의 추측이었다. 선원들과 선장,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것을 보며 포프는 눈을 찌푸렸다.

“이봐요. 우린 아무래도 좋지만, 저 사람들을 해치진 않겠죠?”

“물론. 우리가 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겠나. 약간의 서비스만 받고 안전한 곳에 내려줄 생각이지. 물론 당신들이 반항하지 않겠다면 말야.”

“그래서 지팡이를 맡겼지 않소.”

왈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와 루이즈는 지팡이를 뺏긴 상태이다. 포프는 자신의 망토가 귀족용이 아니라 여행용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종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 말해 지팡이를 압수당하지 않았다. 그 전에 블랙 로드는 이 세계의 지팡이와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나저나 이곳의 공적은 이상하다. 승객들을 유도하는 모습을 보니 공적이라지만 마치 군인처럼 절도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무기가 난잡하지 않고 몇 가지로 통일되어 있다. 포프는 그들의 모습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때 자신과 손을 맞잡고 있던 루이즈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포프는 루이즈의 손을 왈드에게 넘겼다. 왈드가 곧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하게 위로했다. 떨림이 진정된 루이즈였지만 포프를 살짝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좁은 통로와 계단을 지나 세 명이 끌려간 곳은 훌륭한 방이었다. 아마 이 공적선의 선장실인 것 같았다. 찰칵하고 문을 열자 호화스런 디너 테이블이 있고, 가장 상석에 화려한 차람의 공적이 앉아 있었다. 덥수룩한 검은 머리에 안대를 하고 있다. 그는 메이지인지 커다란 수정이 붙은 지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여기까지 루이즈를 데려온 깡마른 남자가 뒤쪽에서 루이즈를 찔러댔다.

“어이, 너희들. 두목님 앞이다. 인사하라고.”

하지만, 루이즈는 정색하고 두목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두목은 경박하게 웃었다.

“기가 드센 여자는 좋아한다고. 어린애라도 말야. 그러면, 이름을 대라.”

“대사로서의 취급을 요구하겠어.”

루이즈는 두목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왕당파에 가는 사자야. 아직, 당신들이 어느 편인지는 몰라. 하지만 반란군이 이겼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알비온은 왕국이고, 정통한 정부는 알비온 왕실이야. 나는 트리스테인을 대표해서 그곳에 향하는 귀족이야. 말하자면 대사지. 그러니 대사로서의 대접을 당신들에게 요구하겠어. 그렇지 않다면, 한마디라도 당신들 따위한테 입을 열 것 같아?”

“왕당파라고 말했겠다?”

“그래, 말했어.”

한편 두목은 호기심이 생겼다는 듯 이죽거렸다.

“뭘 하러 가는 거냐? 그놈들은, 내일이면 지워질 거라고.”

“당신들한테 말할 건 못 돼.”

“그래? 귀족파에 붙을 생각은 없나? 그 녀석들은, 메이지를 원하고 있어. 사례금도 듬뿍 내 줄 텐데 말야.”
“죽어도 싫어.”

루이즈의 몸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포프는 알 수 있었다. 역시 무서운 것이다. 무서워도, 루이즈는 똑바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포프는 저번에 기슈와 결투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사실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는 숙일 수 없었다. 지금의 루이즈는, 그 때의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안고서 그것을 쳐부수려는 것과 싸우고 있다. 그런 루이즈는 눈부시다. 그 당당함이야말로 제로라는 굴욕을 극복한 루이즈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포프는 감탄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귀족파에 붙을 생각은 없나?”

루이즈는 휙하고 고개를 들었다. 팔을 허리에 대고서, 가슴을 쭉 폈다. 입을 열려는 루이즈보다 먼저, 포프가 두목에게 말했다.

“사람을 떠 보려는 건 그만해요. 당신들이 우릴 어쩔 마음이 없다는 건 알겠으니.”

“네놈은 뭐냐?”

두목이 찌릿하고 포프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꼼짝 못하게 노려보는 데 익숙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포프는 그런 시선을 받고도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두목의 주변에 있던 공적들이 감탄했다.

“루이즈의 사역마입니다.”

“사역마?”

“그래요.”

두목은 큰소리로 웃었다.

“사역마라니, 인간이 사역마란 건 처음 보는군. 그런데 왜 내가 너희들을 떠 본다고 생각하는 거지?”

“오기 전에 이곳의 정세를 자세히 들어보았죠. 왕당파 최후의 거점인 뉴캐슬은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하나뿐이라 반란군이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병력의 차는 여전하고, 그렇다면 왕당파가 노릴 수 있는 건 적의 보급을 끊는 것 정도겠죠. 게다가 이 사람들은 군인 같은데, 군인이 이렇게 공적으로 변장하고 활동해야 한다면 답은 간단하게 나오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자신들의 예비전력도 숨기며, 덤으로 민간 상선을 약탈한다는 오명도 피하면서 부족한 물자를 얻을 수 있으니.”

두목은 아까보다 더욱 무서운 기세로 포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 왓하하, 하고 웃으면서 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실례했군. 주인도, 사역마도 모두 대단하다. 그렇다면 이쪽도 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지.”

주변에 서 있던 공적들이 경박한 태도를 멈추고 일제히 직립했다. 두목은 덥수룩한 검은 머리를 벗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발이었다. 안대도 벗고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수염도 떼었다. 그러자 금발의 늠름한 젊은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알비온 왕립공군대장, ​본​국​함​대​사​령​장​관​…​…​ 본국함대라고 말해도, 이제는 본함 '이글'호 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력한 함대지만 말야.”

젊은이는 앉은 자세를 바로하고 위풍당당, 이름을 말했다.

“알비온 왕국 황태자, 웨일즈 튜더다.”

루이즈는 입을 쩍 하고 벌렸다. 포프는 갑자기 이름을 댄 젊은 황태자를 바라보다 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왈드는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흥미롭게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웨일즈는 매력적인 미소를 띄우고 루이즈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알비온 왕국에 어서 오게. 대사에게는, 참으로 실례를 저질렀군. 하지만 말이네, 자네들이 왕당파라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 어려워서 말일세. 외국에 우리들의 편을 드는 귀족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자네들을 시험하는 듯한 짓을 해서 미안하네.”

거기까지 웨일즈가 말해도, 루이즈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상태이다. 아까까지 빛났던 게 거짓말 같다. 갑자기 최종목적지에 도착해버려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왈드가 대신 나서서 우아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앙리엣타 공주전하로부터, 밀서를 부탁받아 찾아왔습니다.”

“흠, 공주전하라니. 자네는?”

“트리스테인 왕국 마법위사대, 그리폰대 대장, 왈드 자작입니다.”

이어서 왈드는 루이즈와 포프를 웨일즈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이 공주전하로부터 대사의 대임을 임명받은 라 바리엘 영애와 그 사역마 소년이옵니다. 전하.”

“과연! 자네와 같은 훌륭한 귀족이, 나의 친위대에 열 명만 더 있었으면, 이와 같은 비참한 오늘을 맞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밀서라는 것은?”

루이즈가 허둥대며 가슴의 주머니에서 앙리엣타의 편지를 꺼냈다. 공손하게 웨일즈에게 다가가다가, 도중에 멈춰선다. 그리고서, 조금 망설이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 ​저​어​.​.​.​.​.​.​.​.​”​

“무엇인가?”

“저기, 실례지만, 정말로 황태자님?”

웨일즈는 빙긋 웃더니 갑자기 루이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앙리엣타가 대사의 표식으로 빌려준 ‘물의 루비’가 끼어져 있다. 얼굴을 붉히는 루이즈의 손에 입맞춘 후 자신의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벗어 물의 루비에 가까이 했다. 두 개의 보석이 서로 공명하면서 무지개 색의 빛을 퍼뜨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탄성을 올렸다.

“이 반지는 알비온 왕가에 전해지는 ‘바람의 루비’다. 그리고 자네가 끼고 있는 것은 앙리엣타가 끼고 있던 물의 루비다. 그렇지?
물과 바람은, 무지개를 만들지. 왕가의 사이에 걸리는 무지개다.“

“정말,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루이즈는 사과하고 편지를 웨일즈에게 넘겼다. 웨일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 편지를 바라보고 인장에 입을 맞췄다. 신중하게 봉인을 열고 안의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진지한 얼굴로, 편지를 읽고 있던 그가 흠칫하며 얼굴을 들었다.

“공주는 결혼하는 건가? 그, 사랑스러운 앙리엣타가. 나의 ​귀​여​운​.​.​.​.​.​.​.​,​ 사촌여동생은.”

왈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긍정의 뜻을 보였다. 다시, 웨일즈는 편지에 시선을 내린다. 이번에는 편지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앙리엣타와 웨일즈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포프는 그의 마음을 동정했다. 최후의 한 줄까지 읽고 편지를 내린 그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알았네. 공주는, 그 편지를 되돌려 받고 싶다고 나에게 전하고 있네. 무엇보다 소중한, 공주에게서 받은 편지지만, 공주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루이즈의 얼굴이 빛났다. 임무는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포프가 ‘이 임무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수중에는 없네. 뉴캐슬의 성에 있다.
공주의 편지를, 공적선에 가지고 올 수는 없으니 말일세.”

웨일즈는 웃으며 말했다.

“다소 귀찮겠지만, 뉴캐슬까지 수고해주었으면 하네.”

왕자는 부하들에게 귀환명령을 내렸다. 포프가 타고 있는 배의 화물을 신속하게 탈취한 후 이글 호는 뱃머리를 돌렸다. 구름이 시야를 가리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해, 이글 호는 상공에 포진한 반란군의 눈을 피해 비밀 항구로 입항했다. 아마 이 통로가 발각된다면 뉴캐슬은 그날로 함락될 것이다.
그곳은 새하얗게 빛나는 발광성의 이끼로 가득한 거대한 종유동굴의 안이었다. 절벽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글 호가 종유동굴의 절벽에 다가가니 일제히 밧줄이 날아왔다. 수병들은 그 밧줄을 이글 호에 잡아맨다. 수레바퀴가 붙은 줄사다리가 덜커덩 하고 다가와서 배에 달라붙었다. 웨일즈는 루이즈 일행을 재촉해 줄사다리를 내려갔다. 키가 큰, 나이든 노 메이지가 다가와 웨일즈의 노고를 치하했다. 탈취해 온 물품이 유황이란 말을 듣자 그는 희색이 만연해 외쳤다.

“오오! 유황입니까! 불꽃의 비약이지 않습니까! 이걸로 우리들의 명예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군요!”

노메이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선제 폐하로부터 부름받고 육십년……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습니다, 전하. 반란이 일어나고부터 쓴 맛만 보았지만, 이정도의 유황이 있다면……”

“왕가의 긍지와 명예를 놈들에게 보여주면서, 패배할 수 있겠지.”

“영광스런 패배로군요! 이 늙은이, 벌써부터 주먹이 떨려옵니다. 그럼, 보고 올립니다만, 반란군 놈들이 내일 정오에 공성을 개시한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정말이지, 전하가 늦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아슬아슬했군! 전쟁의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인의 수치이니 말일세!”

웨일즈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포프는 패배라는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패배는 돌이킬 수 없고, 이들은 이 자리에 앉아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두렵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을 떨쳐내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동물이었으므로. 그가 불쾌한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헌데, 그 분들은?”

노 메이지가 루이즈 일행을 보고서 웨일즈에게 물었다.

​“​트​리​스​테​인​으​로​부​터​의​ 대사일세. 중요한 용건으로 왕국에 오신 걸세.”

내일이면 멸망할 나라에 대사로 방문한다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멍해졌던 메이지가 곧 표정을 달리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그렇습니까. 먼 길, 알비온 왕국에 잘 와주셨습니다. 그리 대단한 대접은 해드리지 못하지만, 오늘밤은 조그마한 연회가 열립니다. 부디 참석해 주십시오.”

 

루이즈 일행은 웨일즈를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왕자의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촐한 방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허술한 침대에 의자와 테이블이 하나. 벽에는 전쟁의 모습을 그린 태피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왕자는 의자에 앉고서 책상의 서랍을 꺼냈다. 거기에는 보석이 박혀있는 작은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는 목에서 열쇠가 붙은 목걸이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뚜껑 안쪽에는 앙리엣타의 모상이 그려져 있다. 루이즈 일행이 그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을 눈치챈 웨일즈는 다소 수줍어하며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보물상자라고 변명했다. 안에는 한 통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웨일즈는 그것을 꺼내들고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맞춤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포프는 그 편지가 수도 없이 읽혀져 너덜너덜해진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것을 다 읽은 뒤 웨일즈는 다시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고 봉투에 넣어서 루이즈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공주에게서 받았던 편지다. 보는 것처럼, 확실히 반환했네.”

“감사합니다.”

루이즈는 깊숙히 고개를 숙이고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내일 아침, 비전투원을 태운 '이글'호가, 여기를 출항한다. 그것에 타서 트리스테인까지 되돌아가게나.”

루이즈는 그 편지를 바라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어, 전하. 아까 전에, 영광스런 패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왕당파에게 이길 확률은 없는 것입니까?”

껄끄러운 내용이라 루이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웨일즈가 대답했다.

“전혀 없네. 우리 군은 삼백. 적군은 오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있을 리 없지.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용맹히 죽어가는 모습을 녀석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네.”

루이즈는 고개 숙였다.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 낮은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전하의 모습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당연하다. 나는 맨 처음에 죽은 셈이다.”

“전하.”

포프가 놀라며 나섰다.

“공주님의 편지에, 망명을 권하는 내용은 없었습니까? 분명히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아. 있었지.”

한 글자 한 글자가 공주와의 그리움을 달래는 형태였기 때문에 웨일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내용을 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절하겠네. 내 죽을 장소는 이곳 알비온이지, 트리스테인이 아니야.”

“당신과 공주님은 사랑하는 사이이지 않습니까!”

포프가 날카롭게 외쳤다. 충격적인 내용에 루이즈가 헛, 하고 숨을 들이켰고 왈드는 호오, 하며 귀를 기울였다. 잠깐 웨일즈의 몸이 흔들렸지만 이내 진정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네. 아마 앙리엣타가 가르쳐 주었겠지. 정이 많은 아이라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을 보이고 말았어…… 그 뜻은 고맙지만, 트리스테인을 다스리기 위해선 나란 존재는 암덩어리와 같아. 내가 간다면 동맹도 깨질뿐더러, 반란군 놈들이 알비온을 점령한 후 다음 표적을 이쪽으로 잡게 되겠지.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갈 수 없네.
게다가 나나 이 편지가 공개된다면 그녀는 중혼의 죄를 저지른 것이 돼. 그녀에게 그런 낙인을 찍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웨일즈는 이제 막 알게 된 사역마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토로했다. 앙리엣타가 정에 우선시해 망명을 권했다는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소년이라면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볼 것이다. 게다가 어쩐지 이 소년의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십 년을 살아온 연장자처럼 깊어 보였다. 그 앞에서 그는 자신의 괴로운 짐을 잠시나마 털어놓고 싶었다.
포프가 무엇인가 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웨일즈는 손을 저어 말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연회가 열릴 테니 그때까지 잠시 쉬어 두게나. 방을 안내해 줄 걸세.”

“웨일즈 왕자님!”

루이즈가 비명처럼 외쳤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웨일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는, 정직한 여자아이군. 라 바리엘 영애. 정직하고, 똑바르며, 좋은 눈을 하고 있어.”

웨일즈가 더 이상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이란 사실을 안 루이즈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충고하지. 그와 같이 정직해서는 대사는 맡을 수 없네. 앞으로 유의하게.
하지만, 망국으로의 대사로선 적임일지도 모르지. 내일 멸망하는 정부는, 누구보다도 정직하니 말일세. 왜나하면, 명예 이외의 지킬 것이 달리 없으니 말이야.“

“……”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루이즈를 이끌고 포프는 방을 나섰다. 여기선 일단 물러날 생각이었다. 둘은 나갔지만 왈드는 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 무언가 볼일이 있는건가? 자작.”

“황송하지만,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의견이 있습니다.”

왈드는 웨일즈에게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웨일즈는 아까까지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밝게 웃었다.

“이 무슨 경사스런 이야기인가. 기꺼이 그 역할을 맡도록 하지.”


파티는 예상과 달리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막바지에 몰려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정장을 차려입었고, 음식 또한 트리스테인의 만찬에 버금갔다. 마지막이니 절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 참석한 현 국왕 제임스 1세는 내일 이글 호가 출발할 때 되도록 많은 사람이 그것을 타고 떠나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모두는 그 말을 무시했다. 끝내 국왕은 격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그렇다면 바보들끼리 한바탕 놀고 멋지게 죽자는 말로 파티를 시작했다. 떠들썩한 파티는 두어 시간 가량 진행되었고, 귀족들은 유쾌하게 루이즈 일행을 대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밝게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포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각오를 비웃게 되지 않도록 유쾌하게 대응했다. 루이즈 또한 긍지 높은 귀족의 명예를 지키려는 그들을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회의 막바지에 웨일즈가 이들에게 다가왔다. 포프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가장 지키고 싶은 건가요?”

“우리들의 적인 귀족파 '레콩키스타'는, 하르케게니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지. '성지'를 되찾는다고 하는 이상을 내걸고 말야. 이상을 내거는 것은 좋아. 하지만 그놈들은 그걸 위해서 흘려지는 민초의 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 황폐해져가는 국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

“그렇습니까.”

“우린 용기와 명예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다. 왕가에서 태어난 자의 의무인 거다. 비록 이런 반란을 허용한 한심한 왕가지만, 그렇기에 최후에 이루어야만 하는 의무인 것이지.”

“……당신도, 존경할 만한 왕가의 사람이군요.”

이런 말을 듣자 더욱 그를 구하고 싶다. 분명 자신이 하려는 일은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자신 때문에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부서지지 않을까. 포프는 자신의 신념이 자칫 자신만의 신념으로, 남의 신념을 짓밟는 신념으로 끝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그에게 웨일즈는 부탁을 남기고 떠나갔다.

“앙리엣타에게, 웨일즈는 용감히 싸우고 용감히 죽어갔다고 전해주게.”

 

“나, 나는…… 아직……”

“너는 열여섯이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나이이고, 아버님도 허락해 주실 거야.”

왈드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자신의 얼굴을 루이즈의 얼굴에 다가갔다.

“분명히 계속 내버려둔 건 사과할게. 약혼자라고, 말할 수 있는 체면 따위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루이즈, 나에겐 네가 필요해.”

“왈드……”

루이즈는 여관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그렇게도 동경했던 왈드의 청혼을 받았는데도 자신은 기쁘지 않은 걸까. 하지만, 뭔가 마음에 계속해서 걸리고 있는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했다.
포프는 어두운 복도를 걷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창문이 뚫려 있어서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그 달빛에 비친 루이즈의 모습은 요정 같았다. 복숭아 색이 깃든 긴 금발 머리가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하얀 뺨을 흐르는 눈물을 본 포프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걸쳐 주었다.

“감기 걸려.”

“포, 포프?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루이즈는 화들짝 놀랐다. 아까부터 한 시간 이상 보이지 않았다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포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가를 슥슥 닦는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없었다. 루이즈의 작은 몸이 포프의 몸에 기대왔다.

“어째서 울고 있는 거야.”

왈드는 그녀가 울 때에 어디에 있는 건가. 이 자리에 없는 왈드에게 살의를 가지며 포프는 루이즈의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소녀의 몸이 품에 안기자 포프는 얼굴을 붉힌다. 워낙 신체건강한 소년의 몸이다 보니 반응이 금방 온다. 그런 반응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가볍게 말한다.

“왈드를 가만 내버려두면 안되겠네. 주인님이 이렇게 울고 있는데 어디 있는 거야?”

루이즈의 몸이 흠칫했다. 포프는 흠칫했다. 혹시 둘이 싸운 건가? 그렇다면 자신의 시도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그가 어물어물하자 루이즈가 천천히 말했다.

“나, 결혼해. 내일. 식을 올린 다음 둘이 그리폰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넌 먼저 이글 호를 타고 돌아가라고 왈드가 전하래.”

“오, 정말? 축하해!”

-왈드 녀석, 과연 로리, 우컥!

“……과연, 사나이답다고 델프링거도 말하네!”

검집을 찍어누르며 포프가 애써 웃었다.
너무 시원시원한 포프의 대답에 루이즈는 당황했다. 그녀는 마치 항의하듯 웅얼거렸다.

“아직 결혼같은건 할 수 없어. 훌륭한 메이지에는 되지 못했고…… 네가 돌아갈 방법도, 찾지 못했고.”

“됐어. 돌아가는 방법은 혼자서 찾을게. 내가 네 발목을 잡진 않을 테니, 안심하고 결혼해라.”

울컥울컥울컥울컥.
루이즈는 포프의 뺨을 찰싹 쳤다.

“너 따위 싫어. 정말 싫어!”

루이즈는 빙글 발길을 돌리고는, 그대로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갔다. 포프는 뺨을 문질렀다. 맞은 뺨이 얼얼하게 아파서 포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루이즈는 왜 갑자기 저러는 걸까? 역시 결혼을 앞두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모양이다.

“저기, 델프.”

-말 시키지 마라, 머저리.

-……여자의 적.

어쩐지 델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기분 탓이겠지, 라고 포프는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막 바꿔치기에 성공한 편지를 꺼내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시조 브리밀의 상이 놓여진 예배당에서 웨일즈 황태자는 신랑과 신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왈드의 부탁으로 식을 집전하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하객은 없다.  모두, 전쟁의 준비로 바쁜 것이었다. 웨일즈도, 금방 식을 끝내고 전쟁 준비에 달려나갈 생각이었다.
축복의 말을 떠올리고 있던 그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문이 열리고 루이즈와 왈드가 나타났다. 루이즈는 말없이 왈드에게 이끌려다녔다. 자포자기한 기분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데다 죽음을 각오한 웨일즈, 그리고 어제의 포프의 태도가 루이즈를 침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왈드는 알비온 왕가에서 빌려온 신부의 관을 루이즈의 머리에 씌웠다. 신부의 관은, 마법의 힘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꽃이 달려져,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청초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어서 루이즈의 검은 망토를 벗기고 역시 알비온 왕가에서 빌려온 순백의 망토를 두르게 했다. 신부만이 몸에 두르는 것을 허락받은, 처녀의 망토였다. 왈드는 그동안 묵묵히 있는 루이즈의 모습을 긍정의 의사로 받아들였다.

“그럼, 식을 시작한다.”

왕자의 목소리가 루이즈의 귀에 닿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 멀리서 울려퍼지는 종소리처럼 마음에 닿지 않는다.

“신랑, 자작 쟝 쟈크 프란시스 드 왈드. 그대는 시조 브리밀의 이름에 걸고, 이자를 위하며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로 삼을 것을 맹세합니까.”

왈드는 장중히 끄덕이고 지팡이를 잡은 왼손을 가슴 앞에 두었다.

“맹세합니다.”

“신부, 라 바리엘 공작 삼녀,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브랑 드 라 바리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지금이 결혼식의 도중이라는 것을 이제야 루이즈는 깨달았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채, 막막하고 슬프기만 하다. 이런 감정은 신부가 된다는 불안감 따위가 아닐 터였다. 자신이 왜 그런지 루이즈는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알비온이라서? 아니다. 곧 죽을 왕자 때문에? 아니다. 자신의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어간다. 그것은 ‘슬픈’것과 조금 거리가 있다. 슬픔을 뛰어넘은 분노이다. 누구를 향한? 그녀의 머릿속에, 포프를 향해 뛰어들었던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포프가 무엇인가 말해줄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그는 예의 사람 좋은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순순히 이글 호를 타고 돌아가기까지 했다. 그 태도가, 그 우둔함이 견디지 못할 만큼 화났다.
만약,
포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면, 그렇게 화낼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결혼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가 ‘제로의 루이즈’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기 설 수 있었을까?
만약,
좋아한다고,
말하면,
포프,
는,
어떻게……

“루이즈?”

왈드가 루이즈의 손을 꾸욱 잡았다. 손이 짓눌리며 짜릿한 아픔이 전달된다. 그 아픔이 루이즈를 현실로 되돌렸다.

“미안해요, 왈드, 나, 당신하고 결혼 할 수 없어.”

웨일즈의 표정이 변했다.

“신부는, 이 결혼을 바라지 않는 건가?”
“그 말씀대로입니다. 두 분에게는 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만, 저는 이 결혼을 바라지 않습니다.”

왈드의 얼굴에서, 사악하고 핏기가 가셨다. 웨일즈는 안타깝다는 듯 왈드에게 말했다.

“자작, 참으로 안 됐네만 신부가 바라지 않는 식을 이 이상 계속할 수는 없네.”

하지만 왈드는 웨일즈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루이즈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에 루이즈가 작게 비명질렀다.

“긴장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루이즈. 네가, 나와의 결혼을 거절할 리는 없어.”

“미안해, 왈드. 동경하고 있었어.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난 이제, 동경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어. 울보 ‘제로의 루이즈’에서 벗어나, ‘루이즈’가 되고 싶어.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고 싶어…… 그 길을, 인정하고 알려준 사람이 있어. 난 그 사람에게 내 결심을 말하지 않으면 안 돼.“

루이즈의 고백을 들으며 왈드의 눈이 치켜올라가진다. 언제나의 상냥한 표정이 아닌, 표독스러운 표정이다. 독기가 깃든 말투로 왈드가 외쳤다.

“세계다 루이즈. 나는 세계를 손에 넣는다! 그걸 위해서 네가 필요해!”

갑자기 표변한 왈드에게 겁먹으면서도 루이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 세계 같은 건 필요없어. 난 나로 있고 싶을 뿐이야.”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 너의 능력이! 너의 힘이! 루이즈, 언젠가 말했던 것을 잊었나! 너는 시조 브리밀에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메이지가 될거야! 너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것 뿐이야! 그 재능을!”

“왈드, 당신.”

루이즈의 목소리가 공포로, 다시 분노로 떨렸다. 광기에 싸인 듯한 왈드의 외침은 루이즈에게 왈드가 접근한 진짜 목적을 알려주었다.

“난, 난 당신의 도구 따위가 될 맘이 없어!”

루이즈는 왈드의 손을 뿌리치려 몸을 비틀었다. 웨일즈가 급히 단상에서 내려와 왈드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러자 왈드는 한 손을 놓더니 웨일즈의 얼굴을 후려쳤다. 웨일즈는 단상과 부딪치며 쓰러지더니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뽑았다.

“으음, 이 무슨 무례인가! 자작, 지금 바로 라 바리엘 영애에게서 손을 떼라! 그리하지 않으면, 나의 마법의 칼날이 자네를 베어버릴 것이야!”

왈드는 루이즈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 표정은 아까처럼 상냥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식이란 것을 루이즈는 깨달을 수 있었다. 큭큭 웃으며 왈드는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차마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군. 그럼 목적의 하나는 포기하지.”

“목적?”

“그래. 이 여행에 있어서 나의 목적은 세 개가 있다. 그 두 개가 달성된 것만으로도, 됐다고 치면 말이야.”

왈드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우선 한 가지는 너였다. 하지만 이건 과거형이 되었고.”

다음으로 중지를 세웠다.

“두 번째 목적은 루이즈, 네가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던, 앙리엣타의 편지다.”

루이즈는 깜짝 놀랐다. 서둘러 주머니를 확인해 보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틈엔가 왈드가 빼간 것이다.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이야말로 미주의 맛이나 다름없다고 즐겁게 생각하며 왈드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루이즈가 몸서리쳤다.

“그리고 세 번째.”

왈드의 '앙리엣타의 편지'란 말에 모든 것을 알아챈, 웨일즈가 지팡이를 잡고서 주문을 영창했다. 하지만, 월드는 섬광과 같이 재빠르게 지팡이를 뽑아들고 주문의 영창을 완성시켰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웨일즈의 앞으로 이동하면서, 왕자의 가슴을 시퍼렇게 빛나는 그 지팡이로 꿰뚫었다.

“세 번째는 네놈의 목숨이다. 웨일즈.”

왈드는 지팡이를 뽑고 허공에 털었다. 지팡이에 묻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왕자는 그를 노려보며 맥없이 쓰러졌다. 죽진 않았지만 치명상인 것 같다. 이곳에는 물의 메이지가 없으니 그대로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왈드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루이즈를 쳐다보았다.

“시, 싫어, 오지 마.”

루이즈는 지팡이를 들어 그를 위협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달달 떨려서는 위협은커녕 방어용도 되지 못했다. 왈드는 다시 신속하게 이동해 지팡이를 쳐냈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지팡이가 땡그렁 하고 시끄럽게 굴렀다.

“다시 소개하지. 레콩키스타 소속 왈드다. 루이즈, 네게 마지막으로 청혼하고 싶다. 날 받아주겠나?”

레콩키스타란 말에 루이즈는 발끈 했다. 이제야 모든 게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왈드는 처음부터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배신자! 트리스테인의 귀족이 어째서!”

“신념은 국가를 넘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레콩키스타는 전 세계에 걸쳐 암약하고 있는 연합체이지. 이미 난 세계의 반을 손에 넣고 있어. 그리고, 이제 나머지 반을 얻고 싶은 거야. 그 중심에, 내 옆에 서지 않겠어?”

루이즈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흔들렸다. 죽음 앞에서, 고작 죽음 따위에게 자신의 신념을 꺾일 순 없었다. 그것이 저 앞에 넘어진 웨일즈에 대한 예의이자 자신에 대한 긍정이었다. 이제 와서 나 자신을 부정할까보냐, 하고 루이즈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그녀의 표정을 본 왈드는 별다른 표정변화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와는 이걸로 이별이다. 난 위협거리를 정 때문에 남기는 허술한 녀석이 아니야.“

왈드의 지팡이에서 푸른 뇌전이 번쩍이며 맴돌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없는 루이즈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아마 저 일격에 단숨에 사망하겠지. 루이즈는 눈을 감는다. 주문이 자신에게 내쏘아지는 순간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눈을 감자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모습이 떠오른다. 살아 있다고, 지금도 살아 있다고 미친 듯이 울면서 웃던, 사역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루이즈는 눈을 떴다. 왈드가 지팡이를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루이즈의 몸이 옆으로 굴렀다. 순순히 죽을 거라 생각했던 루이즈의 움직임에 왈드의 지팡이가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뇌전이 루이즈에게서 크게 벗어난 곳에 작렬한다.

“루이즈, 나의 루이즈. 보기 흉해. 되도록 아름답게, 최대한 원형을 보존한 채 죽이고 싶었는데.”

“왈드……?

“목졸라 죽이면 혀를 빼물고 눈이 뒤집히지. 불태워 죽이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가장 좋은 건 얼리는 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런 재능은 없어. 하지만 내 주문, ‘라이트닝 클라우드’를 대기에 섞어 흡입하게 되면 속은 전격에 구워져도 겉은 멀쩡할 거야. 약속하지.”

“그, 그런……”

자신을 향해 번들거리는 왈드의 추악한 눈빛에 루이즈가 질렸다. 순결한 처녀다 보니 이 정도의 악의를 받으면 어쩔 수 없이 공포를 느끼고 마는 것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걸음은 점점 빨라졌지만 이내 멈추어졌다. 막다른 벽에 몰린 것이다. 왈드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그녀를 겨냥했다.

“자, 그럼, 작별이다, 나의 작은 새.”

​“​…​…​…​…​…​…​…​…​…​…​…​…​…​…​…​…​…​…​…​나​도​…​…​…​약​속​ 하나……… 하지……………”

돌연 왈드의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일어났다. 막 주문을 내쏘려 했던 왈드가 급히 뒤를 돌아볼 정도로 강한 기세였다. 단상 앞, 쓰러져 있던 웨일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째서! 네놈, 그 정도론 죽지 않는 거냐?”

​“​…​…​…​…​‘​캐​슬​링​’​이​란​ ………걸 모르나…… 보군.”

비틀거리며 웨일즈는 상처를 움켜쥐었다. 그 손에서 강한 주문이 발해져 상처가 급속히 아물었다. 왈드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물의 기운이다. 왈드가 제대로 대응할 틈도 없이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한 웨일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이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가로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의 모습이 급격하게 바뀌어 갔다.
루이즈에게서 공포가 순식간에 추방되었다.

“포프!”

“여어.”

아직 핼쓱한 안색으로 루이즈에게 인사한 후, 그는 왈드를 노려보았다.

“설마 해서 왕자와 바꿔치기해봤는데 생각보다 더한 녀석이었군.”

“……네놈, 그게 간달브의 능력인 거냐.”

왈드는 이를 갈며 악의를 담아 내뱉었다.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프는 차분하게, 하지만 무게를 가득 실어 말했다.

“아까 말했지? 약속 하나 하겠다고.”

블랙 로드에 마력이 가득 주입되었다. 주문이 아니라 마력 그 자체가 블랙 로드의 겉표면에 맺히는 게 보인다. 블랙 로드의 마력 허용량도 막대한 편이지만 포프의 총량은 그를 웃돌고 있다. 불꽃처럼 일렁이고 눈보라처럼 소용돌이치며 마력은 그 어떤 주문보다도 찬란하게 실내를 밝혔다. 보기드문 진풍경에 눈을 크게 뜨는 왈드를 향해,

"너를 시작으로,
네 무리들을 박살내주지.“

대마도사가 선언했다.
 
'캐슬링'은 원래 주문이라기보단 특기에 가깝지만,
포프가 이를 카피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한 번 눈앞에서 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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