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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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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대모험 6화 알비온으로 가는 길


“웃기지 마.”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대화하고 있었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초 한 자루만이 음산한 실내를 미약하게 비추고 있다. 둘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불빛은 계속해서 흔들리며 그림자를 일렁거린다. 말에도 그림자가 있다면, 그 그림자는 분명 강철 가시처럼 상대방을 찌르는 흉기처럼 생겼을 것이다.

“마틸다? 그 이름을 안다면 내가 어째서 후케가 되었는지도 잘 알 텐데. 그런 내게 알비온에게 협력하라고?”

“그렇다. 알비온은 예전의 네가 알던 그 알비온이 아니다. 우린 힘을 축적하고 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지금의 알비온을 뒤집어엎고, 나아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틸다가 생겨나겠군.”

여자의 조롱에 남자는 대답 대신 지팡이를 들었다.

“설득할 시간은 얼마 없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릴 따르겠나?”

“여자를 설득하는 데 흉기부터 들이대는 남자는 질색이야. 그런 남자는 여자를 보자마자 바지를 벗고 흉기를 드러내는 거랑 별 차이가 없다구.”

남자가 가면 아래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지팡이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후케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 남자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를 부득 갈더니 뒤돌아섰다. 몇 발자국 걷던 그가 느닷없이 등을 돌리더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바람이 그녀를 강타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녀는 감옥의 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풀썩 쓰러진 그녀에게 더 이상 시선을 두지 않으며 남자는 그곳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난 이제 지친 걸까,
아니면 내가 변한 걸까.‘

아마 둘 다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문득 잡혀가는 그녀를 배웅해주던 소년의 따뜻한 시선이 생각났다.
으스스한 한기 속에서 작은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제로의 대모험 제6화
- 알비온으로 향하는 길-

 


루이즈와 포프만으로 출발하려 했던 일행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앙리엣타가 독단으로 빼낸, 그리폰대의 대장 왈드 자작이다. 왕녀는 이 정도밖에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했고, 포프는 이를 이용해 여비를 잔뜩 뜯어낼 수 있었다. 기왕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거라면 호의호식이라도 해야 좀 수지가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루이즈의 이런 반응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왈​드​님​.​.​.​.​.​.​.​”​

일어선 루이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루이즈! 나의 루이즈!”

나의 루이즈! 뭐야 그건! 포프는 입을 벌리고 루이즈와 왈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왈드는 붙임성 좋은 웃음을 띄우고는 루이즈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올렸다.

“오랜만입니다.”

루이즈는 뺨을 물들이고 왈드에게 안겨져 있다.

“변함없이 가볍구나 너는! 마치 깃털같이 말야!”

“부끄러워요.”

“저기, 둘이 아는 사이?”

멍해진 포프가 묻자 왈드는 반짝 하는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끼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보니 얘기를 하지 않았군. 나와 루이즈는 약혼한 관계일세.”

그런 얘기, 진작에 좀 하지, 하고 포프는 내심 투덜댔다. 하지만 루이즈가 저렇게 좋아 죽겠다면 어쨌든 잘 된 일이다. 안 그래도 왈드와 같이 가게 되었으니 둘을 잘 엮어주기로 결심했었는데, 이미 엮인 상황이라면 골치아플 필요가 없어 좋은 일이다. 덤으로,

“왜 그러나? 혹시, 알비온에 가는 것이 두려운 건가? 뭐가 두려울 게 있겠나. 자네는 그 '흙더미'의 후케를 붙잡았지 않나? 그 용기가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걸세!”

그렇게 말하고는 앗하하, 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녀석, 좋은 놈이잖아, 란 생각이 들어 한층 안심이 된다.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오빠의 심정이라고 할까. 나이는 루이즈가 연상이지만. 그런가, 루이즈는 이런 녀석하고 결혼하는 건가, 라고 생각하니 흐뭇해진다. 흉켈이나 라하르트처럼 어딘가 음산한 미남보단 이렇게 호쾌한 미남이 한결 보기좋다.
왈드가 피리를 불자 아침안개 안에서 그리폰이 나타났다. 독수리의 머리와 상반신에 사자의 하반신이 달린 환수이다. 멋진 날개도 달려있다. 월드는 훌쩍 그리폰에 올라타고서 루이즈에게 손짓했다.

“이리오렴, 루이즈.”

루이즈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왈드는 그녀를 안고 그리폰에 올라탔다. 그는 고삐를 잡고서 지팡이를 내걸고 외쳤다.

“그럼 제군! 출격이다!”

그리폰이 달려나간다. 포프는 자신의 말에 올라타 고삐를 흔들었다. 말이 기세좋게 달려나간다. 비상주문으로 따라가기에는 연비가 나쁠 것 같아 말을 선택한 것이다. 한 손에 델프링거를 쥔 덕에 신체가 강화되어 장시간 말을 타도 별다른 후유증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를 쓰는 놈은 네 녀석이 처음이라는 델프링거의 독설을 말벗삼아 그는 알비온으로 말을 달렸다.
마법학원을 출발한 이래, 월드는 그리폰을 바람처럼 달리게 할 뿐이었다. 포프는 도중의 역에서 두 번 말을 교환했지만, 왈드의 그리폰은 피로를 보이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기수와 같이 터프한 환수였다.

“조금, 페이스가 빠른거 아냐?”

안기는 것 같은 모습으로 월드의 앞에 타고 있는 루이즈가 말했다. 루이즈의 말투는 경어가 아닌 평대였다. 왈드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다. 네 사역마는 상당히 능숙한 기수인 듯하니까.”

지치지 않고 말을 달리는 포프를 바라보며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런데 말을 달리면서 검을 들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군.”

아직 포프가 자신이 간달브란 사실을 루이즈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즈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저 속도라면 라 로셸의 항구마을까지 멈추지 않고 갈 수 있겠군.”

“무리야. 보통은 말로 이틀은 걸리는 거리라구. 포프도 좀 쉬어야 해.”

“뻗는다면, 놓고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어째서?”

루이즈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치만, 동료잖아. 거기다 사역마를 놓고 간다니, 메이지가 할 일이 아니야.”

“역시 저 사역마의 편을 드는구나. 혹시 네 연인이라도 된 건가?”

왈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 연인같은게 아니야.”

루이즈는 얼굴을 붉혔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약혼자에게 연인이 있다고 들었다면, 쇼크로 죽어버릴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왈드의 얼굴을 웃고 있었다.

“부, 부모가 정한 일이잖아.”

“이런? 루이즈! 나의 작은 루이즈! 너는 나를 싫어하게 됐니?”

옛날과 같이, 익살스런 말투로 왈드가 말했다.

“정말, 작지 않은걸. 실례네.”

루이즈는 볼을 부풀렸다.

“나에게 있어선 아직 작은 여자아이야.”

루이즈는 전에 꾼 꿈을 떠올렸다. 태어난 고향, 라 바리엘의 저택의 정원. 어릴 적, 거기서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열등감에 토라져있으면, 언제나 왈드가 부르러 와 주었다. 부모끼리 정한 약혼, 어린 날의 약속. 약혼자. 그 무렵은, 그 의미가 잘 몰랐었다. 단지, 동경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져서, 왠지 모르게 기뻤었다. 지금이라면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결혼하는 것이다.

“싫어할 리가 없잖아.”

루이즈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다행이다. 그런, 좋아하는 거로군?”

월드는 고삐를 잡은 손으로, 루이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계속 너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 했어. 기억하고 있니? 우리 아버지가 란스의 싸움에서 전사하셔서……”

루이즈는 끄덕였다. 항상 쾌활하던 왈드가 상복을 입고 울부짖던 그 모습을 먼 발치서 바라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왈드가 혹시라도 침울해질까 봐 그녀는 밝은 화제로 바꾸었다.

“왈드, 당신 인기 많잖아? 별로, 나같은 별 볼일 없는 약혼자따위 상대하지 않아도……”

왈드에 대해선, 요 근래 잊고 있었다. 루이즈에게 있어서 월드는 현실의 약혼자라기보다, 옛 추억 속에서 동경하던 사람이었다. 약혼이라고 해도, 예전에 파기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난치듯이, 두 사람의 아버지가 나누었던 지킨다는 보장 없는 약속. 그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십 년 전에 헤어진 뒤, 월드하고는 거의 만난 일도 없었고, 그 기억은 꽤나 흐릿해져갔다. 그래서, 전날 왈드를 보았을 때 루이즈는 무척이나 동요한 것이다. 추억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찾아와 어떡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은 내 자신이 지원한 것이기도 해. 함께 여행을 계속한다면, 다시 그때의 그리운 기분이 될거야.”

왈드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이즈는 생각했다. 자신은 왈드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거야, 싫어하지는 않다. 확실히 동경하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추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갑자기 약혼자다, 결혼이다, 라는 소릴 들어도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십 년의 세월은 그만큼 큰 간격이다. 괜히 머리를 고정시켜두었던 핀을 만지작거리는데 핀이 떨어져나갔다. 아, 하고 뒤로 날아가는 핀을 바라볼 때, 저 멀리 말을 달리는 포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자 어쩐지 가슴이 아파, 루이즈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라 로셸에서 가장 좋은 여관, ‘여신의 절굿공이’에서 머물기로 한 일향은 일층의 술집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아니, 하루 종일 말을 탔기 때문에 제아무리 간달브의 힘을 썼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포프였다. 그것은 하루 종일 수다를 떤 델프도 마찬가지였는지, 검집 안에서 얌전하게 곯아떨어진 상태이다.
여관은 귀족을 상대로 할 수 있을 만큼 호화스럽게 지어져 있었다. 테이블은 바닥과 같은 바위에서 쪼개내어 반짝반짝하게 다듬어서 만들어져 있다. 포프는 어서 눕고 싶다고 생각하며 테이블에 앉은 채 음료를 홀짝거렸다.
부두에 나가 있던 왈드와 루이즈가 돌아왔다. 왈드는 자리에 앉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비온에 건너는 배는 모레가 되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는 것 같다.”

“서둘러야 되는 임무인데……”

루이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반면 포프는 안심했다. 이걸로 하루 정도 여유있게 쉴 수 있다. 돈도 많으니 좀 본격적으로 이곳의 여러 가지를 즐겨보고 싶다. 하르케게니아의 모든 것이 낯선 포프에게는 학원을 벗어나 여행하는 이런 때가 이곳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알비온에 갔던 적은 없으니까 모르겠지만, 어째서 내일은 배가 떠나지 않아?”

“내일 밤은 달이 겹쳐지겠지? '스붸르'의 달밤이다. 그 다음날 아침, 알비온이 라 로셸에 가장 가까이 온다.”

“알비온이 가까이 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모르는 건가? 알비온은 부유대륙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지.”

아무래도 대마궁 같은 녀석인가 보다. 말로 듣기만 해선 알 수 없으니 어서 실물을 보고 싶다.

“그러면, 오늘은 일단 자도록 하지. 방을 잡아뒀다.”

왈드는 열쇠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방은 두 개 잡았다. 네 방, 그리고 나와 루이즈의 방.”

“좋을 대로. 약혼했단 걸 알았으니 상관없겠지. 대신 너무 뜨겁게 놀면 곤란해. 알았지?”

포프가 음흉한 눈으로 루이즈를 보며 놀렸다. 사정을 몰랐던 루이즈는 깜짝 놀라며 왈드를 보았다.

그런, 안돼! 아직, 우리들이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네 사역마도 동의하지 않았나.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두사람끼리 이야기하고 싶다.”

그 말에 루이즈는 순순히 왈드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올라갔다. 안에 비치된 테이블에 술과 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왈드는 루이즈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에도 따른 후 잔을 내밀었다.

“두 사람에게.”

루이즈는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잔을 맞대었다. 유리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음미하며 왈드가 물었다.

“공주전하께서 맡기신 편지는 제대로 가지고 있니?”

루이즈는 주머니 위에서 앙리엣타에게 받은 봉투를 눌렀다. 아마 예전에 맡겼던 편지를 되돌려달라는 내용이겠지. 하지만 그것을 쓰는 공주의 표정은 루이즈의 예상보다는 훨씬 밝은 모습이었다. 루이즈가 알고 있던 공주라면, 그런 편지를 쓴 직후 그대로 기력이 다해 쓰러지거나 하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포프가 히죽거렸던 것도 수상하다.
루이즈가 생각에 잠기자 왈드가 자상하게 말했다.

“걱정되니? 무사히 알비온이 웨일즈 황태자에게서, 공주전하의 편지를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

“그렇네. 걱정이야……”

루이즈는 귀여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괜찮을 거다. 분명히 잘 될 거야. 뭐라 해도, 내가 함께 있으니 말야.”

“그렇네, 당신이 있다면, 분명 괜찮을 거야. 당신은 옛날부터 정말로 믿음직했는걸.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그보다 물어볼 게 있어. 지금도 마법은 쓸 수 없니?”

루이즈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지금까지의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의 손을 왈드의 손이 부드럽게 잡았다.

“루이즈. 너는 실패만 해왔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오라를 내뿜고 있어. 그것은 네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나 역시 보통 메이지가 아니야.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어.”

“설마.”

“설마가 아니야. 예를 들면, 그래, 너의 사역마. 그가 무기를 쥐었을 때에, 왼손에 떠오른 룬…… 그것은, 단순한 룬이 아니야. 전설의 사역마의 표시다. 그건 '간달브'의 표시야. 시조 브리밀이 사용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의 사역마다. 너는 그정도의 힘을 가진 메이지인거야.”

“설마. 그럴 리 없어.”

루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왈드가 농담을 말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전설이 어떻고 전설의 사역마가 어떻고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확실히 지난번 후케와의 전투에서 포프는 검을 사용한 적 있지만, 그리고 그보다 전의 기슈와의 싸움에서 헥사곤 스펠을 쓴 바 있지만, 그렇다고 전설의 사역마라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전제가 있다. 자신은 제로의 루이즈다. 낙제생. 아무리 생각해봐도, 월드가 말하는 듯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왈드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꿈꾸듯 중얼거렸다.

“너는 위대한 메이지가 될테지. 그래, 시조 브리밀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메이지가 될 것이 틀림없어. 나는 그렇게 예감하고 있어.”

월드는 뜨거운 눈빛으로,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학원에 등장할 때 수많은 여학생들의 여심을 단숨에 휘어잡은 그 눈빛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루이즈도 그 눈빛에 매료되었다.

“이 임무가 끝난다면, 나와 결혼하자 루이즈.”

“에……”

갑작스런 프로포즈에 루이즈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침이 되어 포프는 눈을 떴다. 아니, 아직 새벽에 가깝다. 어째서 이 시간에 일어난 거지? 그 질문에 답이라도 하는 듯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깃털모자를 덮어쓴 왈드가 포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프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성장을 마친 나이의 왈드는 그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좋은 아침이다. 사역마군.”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앞으론 포프라고 불러주세요. 무슨 용무입니까?”

포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왈드는 갑자기 씩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는 전설의 사역마 '간달브'잖나?”

“에?”

포프는 흠칫 놀라서 월드를 보았다. 루이즈에겐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알 수 없을 테고, 앙리엣타도 자신에게 다짐을 받았으니 섣불리 퍼뜨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의혹에 찬 눈빛을 왈드는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후케 사건으로, 나는 자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후케는 마법학원의 학생 몇이 달려든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실력이 아니야.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자네란 변수가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 되지. 그리고 전날 그리폰 위에서 루이즈에게 들었네만, 자네는 이세계에서 왔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왕립도서관을 좀 뒤져보았더니 전설의 사역마 '간달브'라는 것 같군.”

​“​…​…​대​단​하​군​요​.​”​

포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학원의 학생들과 달리, 이 자는 특이한 현상을 그냥 신기해하며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추리를 통해 논증해냈다. 베스트리 광장에서의 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학생이 있었다면 그 역시 곧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테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학생들의 지적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하니 오스만이 정보통제를 하긴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왈드의 말은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저 '흙더미'를 잡은 실력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알고 싶다. 잠깐 대련을 부탁하고 싶은데.”

“대련이요?”

“즉, 이거다.”

월드는 허리에 매단 마법의 지팡이를 뽑았다.

“그거, 거절하고 싶은데요. 아침부터 기운 빼기 싫어요.”

왈드가 휘청 했다.

“이봐, 고작해야 대련이잖나, 대련. 잠시만 어울려주면 안 되겠나?”

“하지만 오늘은 자유시간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어요. 슬슬 준비해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은데 이런 걸로 시간과 체력을 뺏기긴 싫어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포프는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가에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는 왈드가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구석의 델프링거가 소리높여 외쳤다.

-로리콘은 취향이 아니야! 로리콘은 병이다!

“무, 무슨! 로리야말로 이 시대의 진리다!”

무심결에 그렇게 외친 왈드는 다음 순간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델프링거가 달각대며 이죽거렸다.

-병 맞군. 변태 녀석.

“시끄러! 너야말로 제대로 된 변태 주제에 남을 비웃을 자격이 있냐! 너야말로 매일같이 ‘조이지 않겠는가’ 라고 조르면서~!”

느닷없는 델프링거의 시비에 포프가 얼른 꾸짖었다. 하지만 이미 도화선은 당겨졌다. 왈드는 핸섬했던 이미지를 단숨에 구기며 일그러진 얼굴로 울부짖었다.

“검을 들고 나와라! 그 검에게 내 정의가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마!”

-흥! 로리콘 따위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 주지!

‘……이건 델프링거와 왈드의 대결이야.’

포프는 들러리가 된 기분으로 검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대련이라 하지만 결투와 맞먹는 격렬한 대전이었다. 결투와 다른 점이라면 참관인이 없다는 것 뿐이었다. 피차 이런 추한 모습을 루이즈에게 보일 수 없었다.
백은의 검만으로 그와 맞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마법위사대의 대장답게 그는 노련한 전사였다. 주문과 체술, 그 둘을 조합하는 센스에 있어서 그의 능력은 최소한 ‘북의 전사’ 노바와 필적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분노에 불타 싸우면서도 뭔가 실력의 2할 정도는 감춘 듯한 것이, 밑천을 다 보이지 않는 전사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에 맞서는 포프는 간달브의 신체 강화와 대지참, 해파참을 위주로 싸웠지만 검을 이용한 대인 근접전에는 아직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빈틈을 보였다.

“뭐 하고 있나, 검! 어서 막지 않고!”

-시끄러! 파트너가 아직 머저리라 그런 거야!

“누가 머저리냣~!”

포프가 다시 한 번 해파참을 시도했다. 공기를 찢는 매서운 일격이 왈드의 마법 에어 해머와 충돌했다. 원래대로라면 그 정도 마법은 찢어발길 수 있어야 하겠지만, 검에 투기를 실을 수 없는 포프로서는 그 위력에 한계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에어 해머는 그 기세가 약해졌으면서도 여전히 묵직한 위력으로 포프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거다!”

과거 타이가 프레이저드와의 전투 때까지 써먹었던 필살 기술.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오히려 이 상황에서 쓸 만하다.
포프의 몸이 조금 숙여지며 검이 허리춤을 향해 뒤로 당겨졌다. 어딘가 기묘한 기색을 눈치챈 왈드는 이미 내쏜 에어 해머의 위력을 증대시켰다. 폭풍처럼 주문이 난폭하게 다가올 때 포프는 검을 들어 그대로 전방을 일직선으로 베며 외쳤다.

“아방 스트랏슈!”

파칵! 델프링거와 공기의 벽이 부딪쳤다. 어떻게든 눈앞의 주문을 베어내기 위해 용을 썼지만, 아무래도 미완성 스트랏슈론 무리인 것 같다. 타이처럼 용의 문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때 손등에 있는 문장에 생각이 미쳤다. 그가 인식하자 문장이 밝게 빛났다. 델프링거가 신나게 외쳤다.

-캬하핫! 잘 먹겠다!

슈르르르릅 하는 슬라임을 들이마시는 것 같은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델프링거가 바람의 장벽을 들이마셨다. 아방 스트랏슈와 격돌해 약화된 주문은 너무나 손쉽게 델프링거의 도신에 빨려들어갔다. 주문이 사라지자 왈드가 놀라며 다음 주문을 준비하는 모습이 포프의 눈에 비쳤다.

-이때다! 일격을 먹여, 파트너!

델프링거가 호기롭게 외쳤지만 포프는 오히려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찰칵, 하며 손잡이가 검집의 끝과 결합되자 그제서야 델프링거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포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왈드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이만하면 머리는 식었을 테니, 이제 그만. 이런 지치는 일은 그만하고 싶어요.”

“그건 안 될 소리! 저 검의 주인으로, 책임을 져라!”

“루이즈가 보고 있는데도요?”

흠칫한 왈드가 사방을 살폈다. 포프의 말대로, 4층의 방에서 루이즈가 창 밖으로 몸을 내밀며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걸 보니 막 깬 듯하다. 그는 서둘러 표정을 정리하며 두 팔을 활짝 폈다.

“오오, 나의 루이즈! 좋은 아침이다!”

“뭐야. 두 사람 뭐 하고 있었어? 시끄러워서 깼잖아. 밖에선 어쩐지 여관 주인이 좀 말려달라며 문을 쾅쾅 두들기고 있고.”

“그거야 아침 운동 아닌가! 남자는 아침마다 넘치는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지, 귀여운 루이즈!”

왈드가 지팡이를 품에 넣고 늠름하게 팔을 쭉 편다. 근육이 넘실대는 건강한 팔을 보고 사용인들이 탄성을 지른다. 포프는 그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신속하게 자신의 방에 도착해 검을 세워놓고 회복주문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여기저기 멍은 들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자기 때문에 벌어진 결투였는데도 델프링거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쳇. 가장 확실한 순간을 노리려고 주문을 흡수하는 걸 자제하고 있었는데, 기껏 살린 기회를 그렇게 놓치냐! 베어, 죽이라고!

“……네가 주문을 흡수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지만, 네가 제대로 된 변태란 사실은 늘 기억하고 있어.”

-검이 피를 좋아하고, 부품교체에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생긴 건 성검처럼 생겨서 이런 막나가는 성격인 거냐.”

-뭐, 내가 좀 생기긴 했지, 파트너. 그런데 너 어째 즐거워 보인다?

“응, 즐거워.”

미완성이긴 했지만 그 스승의 필살기를 처음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포프는 해실거리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편 델프링거는 한창 기분좋은 주인과 대조적으로 시무룩한 빛을 띄고 있는 블랙 로드를 보며 ‘눈치 없는 놈’이라고 뇌까렸다.
로리콘은 병이다!
크로스 채널 최고의 명대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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