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9화 푸른 머리의 소녀
어제까지 제임스 1세가 앉았던 옥좌에 지금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왕으로서의 기품과 위엄이 어딘가 약간 부족한 중년의 사내, 신성 제국 황제 크롬웰이다. 레콩 키스타의 총사령관을 겸한 그의 앞에 신하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사이에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부상당한 듯했지만 남자는 꿋꿋하게 자세를 고정했다.
“그대의 공을 높이 평가하오. 전상을 입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대의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이 편지가 우리 신성 제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겠지.”
왈드가 루이즈에게서 빼앗았던 편지가 지금은 크롬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편지만 있으면 게르마니아와 트리스테인의 동맹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들이 외교적 마찰을 빚을 사이 알비온은 트리스테인을 합병한 후 게르마니아와 맞서면 된다. 트리스테인에는 시조의 기도서라는 귀중한 보물이 있었으므로 결코 놓칠 수 없는 곳이다.
크롬웰은 편지의 봉인을 뜯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중략)……웨일즈 왕자님, 기억하고 계신지요?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고, 잠시나마 뜨겁게 부둥켜안을 수 있었던 그 행복한 때를……(중략)……
“으흠. 험.”
사춘기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다. 크롬웰은 편지에 집중했다. 신하들은 그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바짝 긴장했다.
-…………(중략)……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지요. 비를 흠뻑 맞아 둘 모두 옷이 젖었을 때 우리의 눈앞에 작은 오두막이 보였죠. 우린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불을 피웠지만 옷은 쉽게 마르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린 옷을 모두 벗고 시트 한 장만으로……
“오, 오오. 이거 굉장한 물건이군.”
그는 목구멍에서 야릇한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앙리엣타 공주는 ‘트리스테인의 존재 이유’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용모와 청순함을 고루 갖춘 젊은 왕녀이다. 그 용모와 어딘가 어벙한 성격 덕에 국내외적으로도 인기가 높다. 사실 크롬웰도 우연히 앙리엣타의 초상화를 본 후 트리스테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정도였다. 바로 그 앙리엣타 공주가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비밀편지를 자신이 이렇게 보고 있다. 사람은 역시 높아지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며 크롬웰은 다음 장면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트는 곧 걷혀나가고, 우리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에게 다가갔지요. 우리가 막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하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외쳤습니다……
그 집의 주인일까? 혹시 입막음의 조건으로 세 명이서 함께, 라든가? 아니면 그를 죽여 없애고 다시 하던 행위를 계속했다든가? 하필이면 거기에서 편지지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이어졌다. 침을 꼴깍 삼키며 크롬웰은 천천히 다음 편지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폐하!”
“정신차리십시오! 여봐라! 물의 메이지는 어디에 있나!”
“어서 폐하를 모시고 들어가라!”
신하들이 크롬웰의 졸도에 놀라 부산하게 행동했다. 왕을 떠메고 의무실로 향하는 위병들과 그를 따라가는 신하들로 대전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왈드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요란을 떠는 신하들 사이로 파고들어가 크롬웰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편지지를 집어 읽어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덜덜 떨리는 턱을 주체하지 못하며 편지를 들고 내용을 조합해 보았다. 두 번째 장을 넘기고 세 번째 편지지에 이르자, 거기에는 커다란 글씨로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외쳤습니다
.
.
.
.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으, 으와아아아아악!”
왈드는 재기불능이 되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이날 이후, 알비온은 더 이상 전선에 서는 왈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제로의 대모험 제9화
-푸른 머리의 소녀-
알비온 망명정부와 포프 일행은 무사히 트리스테인에 도착했다. 트리스테인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외곽의 숲으로 숨어든 포프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후 그대로 졸도했다. 장시간의 주문 시전으로 인한 극심한 피로와 레콩키스타 군에게 공격받은 상처가 그 원인이었다. 베호마로 치료하면 간단했겠지만 그는 그마저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물의 메이지가 없었던 일행은 급히 마차를 빌려 트리스테인 왕궁을 향해 질주했다. 왕궁에 도착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루이즈는 포프의 손을 내내 놓지 않았다.
왕궁에 도착해 루이즈가 위사에게 공주와의 단독면대를 청했다. 위사가 들어오고 얼마 후, 공주가 2층의 집무실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서둘렀으면 슬리퍼를 신고 손에는 찻잔까지 든 채였다. 그녀는 허둥거리며 잔을 내던지곤 웨일즈에게 달려가 힘껏 안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깊은 키스를 주고받았다. 공주의 게르마니아 왕과의 혼담은 이 순간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 작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던 마자리니 추기경은 두통을 억누르며 혼담을 정중히 취소하는 외교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작전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포상 같은 걸 해줄 여유는 없었다. 트리스테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알비온 왕가를 지원했다고 선포한다면 레콩키스타 군이 승리의 기세를 몰아 당장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간 싸워야 하겠지만, 개전 준비를 위해 되도록 늦게 싸워야 한다. 그래서 트리스테인 왕실은 ‘오랜 우의로 인해 알비온 망명정부를 받아들인 것’이라 해명하고, 망명정부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겼다. 교외에 있는 공주의 별장에 망명정부는 희망의 둥지를 틀었다. 한편 루이즈는 비공식적으로 공주와 독대해 그녀에게 ‘물의 루비’, 트리스테인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석 반지를 선사받았다. 그것과 바람의 루비가 합하면 무지개를 발산한다는 사실을 보았던 루이즈는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앙리엣타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지개보다 더한 기적이라며 억지로 그녀의 손에 반지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결혼식을 올릴 때 축사를 부탁한다며 왕가의 비전서인 ‘시조의 기도서’도 함께 건네주었다.
앙리엣타는 웨일즈와의 결혼을 뒤로 미루고 일단 신생 알비온과의 전쟁에 집중하기로 했다. 국력을 기울여 비행함선을 만들고, 메이지들을 소집한다. 그와 함께 귀족의 명예로운 호칭인 ‘슈발리에’를 이제부터는 종군한 메이지들에게만 선사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그렇게 부랴부랴 준비하는 트리스테인을 향해 신생 알비온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 크롬웰이 몸져누운 것이 그 원인이었다.
포고령이 내린 다음 날, 학원에서 최초로 한 사람이 자원입대했다. 그의 이름은 기슈. 애인인 몽모랑시가 울며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밝고 허세부리기 좋아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몽모랑시가 매일 내게 와서 울지 뭐야.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나한테 오는지 몰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이즈는 왜 그녀가 자신에게 오는지 알고 있다. 기슈의 성격이 변한 것은 포프와의 싸움 이후이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항상 형들과 비교되며 열등감을 가졌던 기슈였다. 그 열등감을 자존심과 허세로 애써 감추고 있었는데, 포프와의 싸움에서 그것들은 산산조각나 버렸다. 더 이상 자신에 대한 경멸을 가릴 수 없게 된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종군을 신청했다. 몽모랑시는 이를 깨닫고, 포프의 명목상 주인인 자신에게 무의식중에 하소연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면, 오직 포프만이 그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여러 사람이 널 필요로 하고 있어.”
루이즈는 한숨을 쉬면서 포프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포프는 사흘째 혼수상태였다. 왕실에서 파견된 물의 메이지가 외상은 치료해 주었지만, 그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나마 그가 지나치게 마법력을 소모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다. 늘 포프와 침식을 같이했던 그녀였기에 그의 부재는 매우 큰 공백으로 다가왔다.
“얼른, 일어나. 이 바보 사역마. 혼자 멋진 척은 다 한 주제에……
곤란하단 말야. 나, 네가 없으면 너무 심심해.”
한바탕의 모험 같았던 알비온 방문. 아마 포프와 함께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일도 겪게 되겠지.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설렌다. 학원의 정해진 틀 안에서 살던 그녀가 이번 일로 느끼게 된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험, 성과, 자유. 그녀는 포프가 자신에게도 그것들을 계속해서 나눠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것이 애정이 포함된 것인지를 구분해 보려는 시도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포프를 보며 떠오르는 모든 감정들은 아직 구분되지 않고 실타래처럼 엉킨 채 한 덩어리로 그녀의 가슴 속에서 커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이즈는 몇 번이나 그가 깨어나지 않는지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을 나서는데 시에스타가 복도의 창문을 닦고 있는 게 보였다. 시에스타에게 손짓해 부른 후 지금 막 생각난 사실을 말해주었다.
“조금 있다가 몽모랑시가 수업을 마치고 올 테니 문을 열어줘. 특제 물의 비약을 만들었다고, 포프에게 실험해보고 싶다고 하네.”
“특제……입니까?”
“응. 거의 죽은 사람도 펄쩍 뛰어 일어나게 만들 정도의 특제래. 효능보다 맛이 지독해 일어난다고 투덜대는 환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포프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루이즈는 포프가 입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모습을 상상하곤 쿡쿡 웃었다. 그런 모습을 시에스타는 어딘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를 배웅한 후 시에스타는 주방에 가 간단한 요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간단하다곤 하지만 제법 많은 양이었다. 여자 혼자 먹기엔 분명 부담될 정도이다. 쟁반을 들고 노크없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지 않은 포프에게 다가가 양쪽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톡톡 친 후 이마에 검지손가락을 짚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일어나세요, 포프 씨.”
포프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여전히 고마워. 이제 사흘째지?”
“네.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요?”
“그러잖아도 슬슬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 주인님한테도 더 이상 걱정시키게 할 순 없으니. 조금만 더 수고해 줘.”
포프가 두 손을 모으며 시에스타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시에스타는 에헴, 하고 가슴을 폈다.
“한 1년쯤 그러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제 방에 데려가 간호할 테니까.”
“우와, 루이즈는 어쩌고?”
“루이즈 님도 그 때쯤이면 포프 씨를 포기할 거예요.”
포프는 차려진 음식을 우걱우걱 먹으며 시에스타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포프가 사흘이나 의식불명이었던 것은 사실 꾀병이었다. 트리스테인에 도착한 직후에 졸도했던 건 사실이지만, 하루 뒤 그럭저럭 회복된 채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는 의식을 되찾기 무섭게, 비행하면서 쭉 생각했던 문제를 떠올렸다. 자신이 용으로 변할 수 있다거나 하는 사실은 이미 앙리엣타도 전해들었을 것이다. 조만간 레콩키스타와의 전투가 벌어진다면 포프는 트리스테인의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앙리엣타의 성격으로 보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대로 루이즈와 세트로 이것저것 귀찮은 일을 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는 아예 제대로 드러눕기로 결심했다. 스스로에게 최면주문을 걸어 혼수상태화되고, 이를 장기화한다면 왕실이 갖고 있을 기대감을 조금은 깎아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생각을 굳힌 그는 시에스타에게만 사정을 설명하고 식사와 관리를 부탁했다. 참고로 아까 시에스타의 행동은 포프의 최면을 깨우는 약속된 신호이다.
음식그릇이 깨끗이 비워지자 시에스타는 쟁반에 한데 담아 들고 일어났다.
“그럼 가볼게요.
참, 이따 몽모랑시 씨가 뭔가 대단한 비약을 들고 온다고 하네요. 각오하셔야겠는걸요?“
“대단한 비약?”
“맛이 지독하다는 것 같네요.”
“아, 그럼 일어나야겠네.
시에스타 씨, 당신이 여기 왔을 때 난 이미 없었다,로 둘러대요.”
시원스럽게 말하며 사흘 간 머물렀던 침상을 박찼다. 짚더미에 누워 자다 침대에 사흘이나 있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법력도 완전히 회복된 상태이다. 옆에 곱게 개어져 있는 자신의 옷과 망토를 걸치고, 블랙 로드와 델프링거를 허리에 찼다. 검과 지팡이가 웅웅거렸다.
-일어나셨……
-와하하! 이제 꾀병은 집어치운 모양이군! 좋아, 또 한바탕 날뛰는 거야?
“조만간 날뛰어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잠시 바람 쐬러.”
여전히 시끄러운 녀석이다. 사흘이나 놀아주지 않아 쌓이고 쌓인 게 분출한 듯, 주변의 소리가 한순간 묻힐 정도의 고함이다. 이 정도면 밖에도 들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 하지만 그 전에.
“걱정 많이 했지? 이젠 괜찮아.”
포프는 블랙 로드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뚝 그쳤던 블랙 로드의 진동이 다시 부드럽게 이어졌다.
시에스타는 그런 블랙 로드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창밖으로 나가려는 포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펄럭이는 망토가 눈앞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는 문득 포프에게 전부터 말해주고 싶었던 게 떠올랐다.
“잠깐만요, 포프 씨?”
“왜?”
포프가 아슬아슬한 자세로 허리를 꺾으며 뒤돌아보았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제 고향에 잠시 다녀오지 않으시겠어요? 오래 누워 있다 막 일어나는 거니까 신선한 공기를 쐬면 좋다고 생각해요.”
“에? 시에스타 씨랑? 단 둘이?”
“루이즈 님은 학원의 수업 때문에 오실 수 없겠지만, 전 휴가를 쓸 수 있으니까요. 약간 거리가 있어서 저 혼자 가기보단 남자와 함께 가는 게 안심도 되구요. 오시면 맛있는 와인을 대접해 드릴게요.”
“알았어. 나도 학원 바깥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니까. 이번 일로 신세를 지기도 했으니 동행할게.”
포프는 쉽게 오케이 사인을 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에스타는 작게 환성을 질렀다. 야호 하고 외치며 방금까지 포프가 누워 있던 침대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데굴데굴 굴렀다. 이것은 메이드란 신분에 묶여있는 그녀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남자를 낚을 절호의 찬스. 루이즈가 포프를 보는 눈이 더 이상 끈적해지기 전에 얼른 포프를 사로잡아야겠다고 결심하며 침대에 남은 포프의 잔향을 즐기는 시에스타였다.
일단 빠져나오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포프는 학원 밖에 있는 숲으로 순간이동했다. 예전에 후케와 맞서 싸운 곳이었다. 숲에는 아직도 파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그루터기 하나에 편하게 주저앉았다. 저녁까지 슬슬 시간을 때운 후 저녁식사 전에 돌아가 루이즈와 재회할 생각이었다. 이번 일로 사흘이나 앓아눕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분간 자신의 힘을 섣불리 빌리려 하지는 않겠지. 생각하던 그의 눈에 구덩이가 보인다. 그가 폭렬주문을 이용해 순식간에 개통한 작은 터널이다. 잽싸게 파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저 대지의 거름 신세가 되었겠지.
‘그러고보니 후케는 어떤 벌을 받았으려나?’
포프의 가슴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크게 신경쓰이진 않았다. 그녀가 처음부터 포프에게 악의를 가지고 제거할 셈이었다면 포프는 서슴지 않고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일전의 포프라면 정에 휩쓸려 마지막 한 방을 내쏘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포프는 자신의 적이란 것이 확실해진다면 냉정하게 그것을 제거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우발적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적’으로 인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냉정이란 것은 상당히 범위가 좁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건네주었던 쪽지를 들고 더듬거리며 읽어 보았다. 아무래도 트리스테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순간이동주문으론 갈 수 없다. 빠른 시일 내에 루이즈에게 사실을 말하고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쪽지를 접으며 이해가 가지 않은 글자들을 기억해두었다. 이건 나중에 타바사에게 물어봐야겠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타바사에게 하르케게니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이제 간단한 글은 더듬거리며 읽을 정도가 되었다. 그녀에게도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프는 천천히 숲을 걸었다. 이대로 숲 안쪽으로 들어가 마력이 완전히 돌아왔는지 테스트해 본 다음 마을에 놀러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참이었다. 루이즈가 수업을 마치는 시간은 저녁식사 한 시간 전이니 그 전까지만 돌아가 있으면 된다. 그리고 감격의 상봉. 어떤 얼굴로 눈을 떠야 할지를 궁리해 보며 그는 가볍게 걸어갔다. 바스락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가 조용한 숲에 울린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바스락, 버적버적.
“응?”
포프의 귀에 자신의 발이 아닌 다른 것이 나뭇잎을 밟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 멈춰서 귀기울여보니 사람의 것이라기엔 다소 난잡한 소리였다. 야생동물일까? 포프는 아주 가벼운 비상주문으로 몸을 약간 띄워 발소리를 없애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소리는 숲 안쪽에 있는 폐가 근처에서 나고 있었다. 그곳까지 이동한 포프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픽 웃었다. 야생동물이 아니라 타바사의 사역마인 풍룡이 햇볕을 쪼이며 뒹굴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에 타바사의 근처에 잘 보이지 않았는데, 타바사가 수업 중일 땐 녀석도 이곳에서 개점휴업 상태인 모양이다.
슬쩍 장난기가 동한 포프가 큰 나무 뒤에 숨어 주문을 웅얼거렸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작게 외치며 팔을 쭉 뻗자,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풍룡과 거의 비슷한 사이즈의 용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번의 드래고람이 그의 모든 마력을 다해 최대한 거대한 사이즈로 변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마력을 억제하고 최대한 작은 사이즈로 변신했다. 어차피 남아도는 마력이었으니 이 정도론 별 무리가 가지 않았다.
타바사의 풍룡은 숲에서 작은 풍룡이 날아오자 화들짝 놀란 모양이다.
-큐, 큐이? 무슨 일이세요?
풍룡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생각대로 용의 모습으로 변하자 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들을 수 있다면 말하는 건 어떨까. 포프는 신경을 집중했다. 변신하면서 성대가 바뀌었지만, 보통의 상황이라면 여전히 인간의 말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드래고람 주문에는 자동으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기능도 있다. 그 기능을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용에게 말을 건넸다.
-이 근처에선 처음 보는 용이군. 네 이름은 뭐지?
-전 실피드라고 해요! 타바사의 사역마예요! 아저씨는요?
-난…… 내 이름은 디노다.
포프는 엉겁결에 친구의 본래 이름을 댔다. 실피드는 디노, 디노 하고 몇 차례 중얼거리더니 그에게 달려와 어리광을 부렸다.
-동족을 보는 건 오랜만이에요! 누군가의 사역마로 오셨나요? 아니면 이곳까지 여행하러 오신 건가요?
-여행 쪽이다. 근처를 지나다 네 모습이 보여서 내려왔지.
-식사하셨어요? 큐이큐이! 저랑 타바사 언니한테 가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요! 손님이 왔다고 하면 언니도 할수없이 고기를 줄 거예요!
‘이녀석, 목적은 그건가……’
포프는 실피드의 입에 흐르는 은빛 액체를 보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실피드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몇 분에 걸쳐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난번의 모습이 아니니 학원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킬 리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포프는 실피드의 뒤를 따라 공중으로 치솟았다. 용의 모습인 채로 날고기를 먹는다면 무슨 맛일까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인 생각을 해 본 채로.
풍룡은 비행에 능하다. 도보로 삼십 분 넘게 걸리는 거리를 몇 분만에 돌파해 타바사의 방에 도착했다. 실피드가 창문을 콧등으로 두들기자 타바사가 창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큐르케의 모습도 보였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여행용 짐을 가지고 있다.
“오오, 역시 네 사역마는 영리한걸. 부르기도 전에 알아서 대령인 건가?”
“우연.”
타바사는 큐르케의 호탕한 웃음을 무시하고 실피드에게 말했다.
“옆은 누구?”
-큐이큐이~
실피드가 뭔가 입을 벌리다 황급히 앞발로 입을 쳤다. 포프와 큐르케는 이 용이 무슨 바보짓을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타바사는 담담했다.
“동료?”
실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큐르케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이거 잘 됐네. 타바사, 저 용에게 부탁해 보지 않겠어? 나랑 타바사가 나란히 저 용들을 타면 마차로 갈 거 없이 단숨에 목적지까지 닿을 수 있잖아?”
푸른 머리의 소녀는 자신과 큐르케를 번갈아 본 후 다시 물었다.
“오늘 하루, 사람을 태울 수 있냐고 물어봐줘. 댓가는 고기.”
-아저씨! 고기! 고기! 부탁해요!
타바사의 조건을 듣자마자 실피드는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큐르케의 눈으로 보기엔 실피드가 느닷없이 옆의 풍룡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포프의 눈으로 보기엔 자신이 승낙하지 않을 경우 이 녀석은 눈이 뒤집혀 공격해올 지도 몰랐다.
‘이녀석, 고기도 좀 어지간히 좋아해라……’
포프는 실피드의 기세에 밀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태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만족한 실피드가 타바사에게 큐이큐이, 웅얼거리자 타바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큐르케, 가자. 넌 실피드를 타. 난 이 풍룡을 탈게.”
“내가 실피드를?”
“저 용은 조련되지 않은 용이니 내가 타.”
타바사는 단호하게 말하고 자신의 지팡이를 챙겨 포프에게 올라탔다. 치마 안이 잠깐 들여다보여 ‘백색! 백색이다!’라고 포프는 속으로 외쳤다. 이것만으로도 타바사를 태운 댓가는 충분히 받았다고 할까. 곧이어 큐르케도 영차, 하고 실피드에 탔다. 마을이라도 나갔다 오는 거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포프의 귀에 천둥처럼 타바사의 말이 박혔다.
“갈리아로 가자. 실피드의 친구, 부탁해.”
‘…………!!!!’
어디보자, 갈리아가 어디쯤에 있었지?
이동은 신속했다. 순식간에 빼도박도못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후 루라로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다. 루이즈가 돌아오기 전에 방에 있지 않으면, 모처럼 그녀의 진노한 모습을 봐야 할 것이다. 포프는 실피드를 재촉해 최고 속도로 갈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국경쯤인가에서 잠시 검문검색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최고 속도를 유지해 날아갔다. 네 시간인가, 다섯 시간인가 걸려 그들은 거대한 저택의 위에서 멈췄다. 아마 타바사가 지름길로 이끌지 않았다면 전속력으로 해도 열 시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저택의 마당에 착륙하자 안에서 늙은 집사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아니! 샤를로트 아가씨 아니십니까! 생각보다 굉장히 일찍 오셨군요.”
“풍룡, 두 마리. 설명은 나중에.”
“옆의 분은?”
“친구.”
친구라는 말에 집사는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큐르케에게 다가와 깊이 절했다.
“아가씨가 친구를 데려오시는 게 몇 년 만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편히 쉬시다 가십시오.”
“아, 네. 그러죠.”
큐르케는 대답하면서 사방에 비치는 풍경을 이질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곳에는 누가 사는 것일까? 저택의 위치를 보니 갈리아의 최고위층 귀족이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입지인데, 정작 사용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거의 없다. 정원은 서툰 솜씨로 볼품없이 다듬어져 있고 연못의 물은 말라 있다. 타바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이 모습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숨을 몰아쉬고 있던 포프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잠시 햇볕을 쬐게 하기 위해 정원에 모셨습니다. 저기, 현관에 앉아계신 게 보이시죠?”
그 말에 타바사는 몸을 휙 돌려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옆에는 커다란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한 여성이 앉아서 인형을 안고 어르고 있었다. 타바사의 어머니라면 삼십대 쯤이 정상일 텐데, 큐르케에게는 그녀가 오십도 넘은 것처럼 보였다. 정상적으로 늙은 게 아니라 뭔가 충격을 받아 한순간에 늙은 듯했다. 그 증거로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타바사는 여자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타바사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잠시 마주쳤다.
“다녀왔어, 어머니.”
타바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큐르케와 포프는 침을 삼키며 모녀를 바라보았다. 저 얼음공주가 저런 말을 할 수도 있었단 말이지, 라고 생각할 때 여자가 손을 치켜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자의 손이 힘차게 움직여 타바사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타바사가 휘청거리자 여자는 크게 외쳤다.
“무례한 놈. 왕가의 스파이구나! 나로부터 샤를롯트를 빼앗으려는 수작이지? 하지만 어림없어! 우릴, 우릴 내버려 둬!”
“…………실성하셨군요.”
큐르케가 집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저 편에선 타바사의 어머니가 계속해서 타바사의 여기저기를 때리고 있다. 하지만 타바사는 얼굴과 머리, 어깨 등을 두들겨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어머니의 곁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보다, 희망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이 텅 비어가는 타바사의 푸른 눈이 안타까워 포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을 토했다.
실컷 타바사를 때리고 지쳐 쓰러진 그녀를 타바사가 주문으로 방에 옮겼다. 그녀가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게 내버려두고, 집사는 정원에 비치된 테이블에 큐르케를 앉힌 후 설명해 주었다. 타바사의 본명이 샤를로트라는 것, 타바사가 왕족이며 현 국왕이 타바사의 삼촌뻘이 된다는 것, 현 국왕 죠제프가 타바사의 아버지인 동생의 능력을 질투해 죽인 후 타바사까지 죽이려 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결사적으로 나서 그 독을 대신 마시고 저렇게 미쳐버렸다는 것까지. 집사는 오열하며 타바사의 유일한 친구인 큐르케에게 그 사정을 토로했다. 큐르케도 중간부터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본의아니게 정원 구석에서 신나게 고기를 뜯고 있는 실피드 곁에 있던 포프도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모두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큐르케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죠제프, 이 망할 새끼! 두고보라지, 이 미열의 큐르케가 타바사를 도와 당신을 꼭 왕좌에서 걷어차 주겠어!”
노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쇠한 몸이었지만 눈에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불꽃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아가씨가 인정한 단 하나의 친구입니다. 부디, 부디 앞으로도 아가씨를 계속해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죠! 이 미열의 큐르케, 타바사의 바람에 내 불꽃을 싣는 일을 주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도 말이지.
죠제프, 당신을 만나면 타바사 앞에서 땅을 기게 만들어주겠어.’
아직 얼굴도 모르지만, 갈리아 왕 죠제프는 이 순간 대마도사의 ‘적’으로 규정지어졌다.
해가 슬슬 저물어 갔다. 루이즈에게 서둘러 돌아가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귀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포프는 실피드와 적당히 놀아주며 때를 기다렸다.
큐르케가 식사를 마친 후 하품을 했다. 오랜 비행에 피곤한 모습이었다. 집사는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저택의 복도 쪽에 난 유리창들이 큼직했기 때문에 포프는 그 모습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타바사는 아까부터 어머니와 방에 들어간 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할 순 없었지만 그녀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할 테니 지금쯤 잠들어 있지 않을까. 살짝만 잠들어있으면 된다. 포프는 라리호마로 그녀를 확실하게 재운 후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집사가 식사를 치우고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이제 행동할 시간이다. 포프는 포만감에 행복해하며 뼈다귀를 씹고 있던 실피드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비밀이다.
-큐, 큐이? 뭘 하시려구요?
-명심해. 특히 타바사에겐 더욱 비밀이야.
용은 멋대로 말을 끝내고 몸을 웅크렸다. 용의 전신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나왔다. 커다란 몸이 삽시간에 몇 분의 일로 줄어들더니 실피드가 익히 알고 있던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큐이큐이?
“정체를 숨겨서 미안. 사실 난……”
“왜 갑자기 포프로 변신하세요, 아저씨? 그 모습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난 용이 아니라……어라? 너? 인간의 말을?”
드래고람을 해제했는데도 여전히 실피드의 말이 들린다. 놀란 포프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자리잡은 실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피드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인간의 말이나 변신주문은 우리 운룡들은 아무나 할 수 있잖아요, 큐이? 풍룡인 척 할 때는 상관없지만, 아저씨는 운룡이니까 이런 모습 보여도 상관없겠죠? 언니도 뭐라고 하지 않겠죠?”
‘그런가.’
운룡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실피드는 그동안 운룡이 아닌 척을 하느라 본래 능력을 감추고 있었단 말이 된다. 더 캐물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지만 포프는 그런 호기심을 꾹 참고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저 안에 들어갈 일이 있어서 잠시 변신했어. 저 안에 들어가 타바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가려고.”
“그, 그런! 모처럼 동족을 만났는데! 더 놀아줘요, 큐이!”
실피드가 바둥거렸다. 푸른 용이 몸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을 구르는 모습을 보니 덩치 큰 강아지 같다. 포프는 이런 상대를 다루는 방법을 델므린 섬에서 익힌 바 있다. 용에게 깔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가가 용의 목덜미를 붙잡고 역으로 쓰다듬어주엇다. 비늘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피부를 자극하자 실피드는 햐아~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 차례 더 목 아래를 긁어준 후 실피드의 귀에 대고 말해 주었다.
“노는 건 다음 기회에. 다시 볼 날이 있을 테니, 그때 같이 실컷 놀자.”
“야, 약속, 인 거예요, 큐이~”
순식간에 헤롱헤롱 상태에 빠진 실피드가 우습고 귀여워 포프는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드래고람을 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피드를 뒤로 하고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조용히 열었다. 실내는 조용했다. 큐르케와 집사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가 타바사가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먼저 문에 귀를 대 보고, 이어 문구멍으로 안을 살핀다. 타바사의 어머니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타바사는 침대에 몸을 기대 축 늘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단정치 않은 걸 보니 그녀는 잠들기 직전까지 타바사를 내쫓으려 한 것 같다. 문을 따는 주문인 ‘아바캄’으로 소리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타바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항상 단정했던 얼굴 이곳저곳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고 머리는 쥐어뜯긴데다 안경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바사의 잠든 얼굴 위에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약간의 안도와 약간의 편안함, 그리고 압도적인 절망과 슬픔. 그녀가 일어나는 대로 목을 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의 그런 표정이었다. 그 얼굴에 선명히 새겨진 두 줄기의 말라붙은 눈물 자국은 마치 과거엔 물이 풍부했지만 이제는 말라붙어 버린 협곡의 강줄기 같은 황량한 느낌이었다.
“…………이러면, 할 수밖에 없잖냐.”
도서관에서 글자를 가르쳐주던 표정없는 소녀.
실성한 어머니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 소녀.
포프는 그 커다란 간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리 생각했던 대로 라리호마를 걸어 타바사를 잠재운다. 그녀의 숨소리가 깊어진 것을 확인하고, 지팡이에 힘을 응축시킨다. 준비를 마친 후 타바사의 어머니를 깨웠다. 주문이 잘 먹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얕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타바사와 포프를 보자 발광하며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종류의 실성인 것 같다. 먼저 해독주문인 키어리를 걸어보지만 그녀의 난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툭탁툭탁 얻어맞고 있지만 포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주문을 외웠다. 잽 뒤의 느닷없는 일격필살정권이랄까. 포프가 건 주문은 그가 쓸 수 있는 최고위급 주문의 하나였다.
-자오릭(완전부활주문)!
자보에라의 비장의 독에 당해 목숨을 잃어가던 메를르를 살린, 회복계 최대의 마법. 베호마를 웃도는 강력한 힘으로, 죽어가는 자를 단숨에 되살릴 수 있다. 레오나 왕녀의 자오라르가 반반의 성공률을 보이는 데 비해 이 주문은 포프의 제어 하에 완벽한 성공률을 자랑한다. 자오릭의 눈부신 빛이 방을 가득 메우더니 서서히 그녀의 몸 안으로 흡수된다. 날뛰던 그녀가 차츰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낮부터 드래고람을 운용한데다 고위급 주문을 써 피로를 느꼈지만 포프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모습을 주시했다. 빛이 모두 그녀에게 흡수되자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다……당신은 누구야?”
그녀가 포프를 보고 당황해 이불로 몸을 가리며 말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그 움직임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던 그녀가 포프의 옆에 엎드려 있던 타바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샤를……샤를로트?”
“좋아요. 고생하셨어요.”
포프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곧장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놀라 손을 피하려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당신은 누구야? 왜 내 딸이 여기 있어? 난, 난……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요.”
포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단지 나쁜 꿈을 꾸고 있었을 뿐이죠.”
파앗! 포프의 손끝에서 미약한 빛이 흘러나와 그녀에게 흡수된다.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스르르 감겼다. 허물어지는 그 몸을 잽싸게 받쳐 자리에 눕힌다. 그리고 타바사를 들어 어머니의 곁에 눕힌다. 혼자 눕기에 너무 컸던 침대가 이제야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
타바사의 작은 몸은 침대 위로 올라가자 이내 새우처럼 웅크려졌다. 마치 아기처럼, 조금이라도 안에 남아있는 온기를 간직하기 위해 바깥의 자극을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포프는 호이미로 그녀의 상처들을 치유해준 후 그녀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잠시 후, 침대 위에는 한쪽 팔을 옆으로 벌려 타바사의 머리를 받쳐주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품에 바싹 안겨 아기처럼 새근거리는 타바사의 모습이 자리잡았다. 타바사는 만족했는지 응~ 응~ 하는 기분좋은 신음소리를 내며 어머니의 가슴을 조물거렸다. 그러자 어머니의 몸이 살짝 돌아눕더니 타바사의 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자 타바사의 몸은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았다.
포프는 자신이 어렸을 때 악몽을 꾸고 울며 일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무슨 놈의 악몽이냐고 비웃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장난감을 만들어 자신에게 건네줘서 눈물을 그치게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그 온기는 끔찍한 악몽의 기억을 순식간에 날려버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회복주문보다도 확실한 치유의 효과를 가져왔다.
“아버지, 어머니…… 타이, 선생님, 마암……메를르……”
무의식중에 포프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이름들을 되뇌었다. 자신이 루이즈의 사역마가 되면서 원래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약조차, 자신의 몸에 배어 있던 원초적인 느낌을 지우진 못했다. 그 느낌은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리운 이름들을 계속해서 끄집어냈다. 포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말없이 눈물흘렸다.
“당신들 때문에 생각나 버렸잖아.”
포프는 눈물을 흘리며 침대를 보았다.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에 자기 스스로 놀랐는지, 그는 머리를 붕붕 흔들고 눈물을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그리고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모녀에게 본래의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말했어요.
악몽을 꾸면 다음 날에는 반드시 좋은 꿈을 꿀 수 있다고.”
과거의 회상이라기보단 염원에 가까운 한 마디를 던지고, 그는 방을 빠져나갔다.
“포프! 주인님이 말하면 뭐라고 하라고 했지?”
“네! ‘멍’입니다!”
“그게 아니야! 그냥 ‘멍’이야!”
“네, 아니, 멍!”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의 강의실에 드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포프는 루이즈에게 연신 정강이를 걷어채이며 멍! 멍! 을 연발하고 있었다. 헥사곤 메이지의 굴욕에 학생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루이즈에게 존경을 표하며 그녀에게 함부러 거슬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까지 자신을 기다리던 루이즈에 의해 지옥을 보았던 포프도 당분간 그녀에게 절대복종해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 포프를 조교하던 루이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미스 체르프스트는 어디 갔지? 이쯤 하면 나타날 타이밍인데?”
“그녀는 타바사와 함께 장기 외출 중이야. 듣자하니 타바사의 본가로 갔다던데.”
“흐음. 휴가기간을 이런 데 끌어당겨 쓰다니, 알 수 없는 여자네.”
루이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어째서 돌아오고 있지 않은지 포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루이즈에게 말해주는 대신 그냥 활짝 웃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루이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의아해했다.
“어라? 포프, 넌 뭐가 그렇게 좋아?”
“아니, 난, 그냥.”
“그냥이라니, 싱겁게……가 아니라,
사역마면 사역마답게!“
“멍!”
포프가 잽싸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