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0화 시조의 기도서
타바사의 친가는 늘 조용했다. 당주가 죽고 당주의 부인이 실성하면서 모든 하인이 떠나갔고, 남은 사람은 충직한 집사 뿐이다. 단 둘만 남아 적적한 집을 지키고 있던 상황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단숨에 변화했다. 강력한 독으로 인해 실성해 있던 오를레앙 부인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타바사와 큐르케는 학원으로의 복귀를 미루기로 하고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상세를 살피기로 했다. 두 사람이 늘어나고, 스무 명 분의 활기가 집 안을 감싸고 돌았다. 항상 냉막했던 소녀의 입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만이 가득했고, 큐르케는 그런 친우의 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랬는데.
“플레임 볼!”
큐르케는 주문을 내쏘았다. 자랑하는 불꽃의 주문이다. 하지만 요새 그녀가 상대하는 적은 하나같이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상대는 불꽃을 들고 있던 무기로 베었다. 만약 주문이란 걸 평범한 무기로 벨 수 있다면 평민도 귀족을 상대로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을, 눈앞의 적은 너무도 손쉽게 해치웠다.
“사라져!”
그때 큐르케의 옆에서 엄청난 눈보라가 일어났다. 지팡이를 들고 뛰어내려온 타바사이다. 갑작스런 적을 큐르케가 상대하는 사이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타바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눈보라는 엄청난 기세로 적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남자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눈보라를 피했다.
‘피했어?’
타바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마법 아이스 스톰은 광범위한 부분을 동시에 제압할 수 있다. 플라이 주문 정도로 피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타바사의 몸이 무너졌다. 남자가 타바사의 뒤에 나타나며 타바사의 목을 강타한 것이다. 타바사는 전투에 능숙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 메이지가 있다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타바사!”
큐르케가 절규하며 타바사의 뒤에 나타난 적에게 불길을 내쏘았다. 하지만 남자의 무기가 휘둘러질 때마다 그녀의 불길은 맥없이 스러졌다. 그녀의 상식 선에는 ‘무기만으로 마법을 제압한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메이지는 무기를 든 평민이 눈앞에 있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법을 상쇄하는 건 같은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지팡이가 없으면서도 저런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누구야, 이 재수없는 자식아! 얼굴이라도 보이고 싸워!”
그녀의 외침에도 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혹시 깜빡였는지도 모르겠지만 큐르케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우스꽝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니까.
제로의 대모험 제10화
-시조의 기도서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의 경내를 한 소년이 걷고 있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교실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는 이곳의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머리띠를 매고, 이곳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신기해 보이는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망토를 등에 두른 채 걷고 있다. 걸으면서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그 모양에는 별로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도 좋은 날씨~”
태평하게 중얼거리면서 다 먹은 사과를 정원 구석에 버린다. 루이즈의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며칠 전 화가 잔뜩 난 루이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멍멍이 노릇을 하고 나니, 루이즈의 태도가 다음 날부터 돌변했다. 틈만 나면 자신과 붙어있으려 하는 게 전보다 심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떼어놓고 갈까봐 부모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일단 루이즈가 연상이긴 해도 외모는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기 때문에, 포프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녀와 찰싹 붙어 지낼 생각이었다. 그가 그나마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포프가 전혀 흥미없는 정치학이나 시조 브리밀에의 예배시간 정도였다.
루이즈와 함께 지낸다는 건 그에게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녀에게 부탁해 타바사가 가르쳐주던 글자를 대신 가르침받기도 하고, 하르케게니아의 역사라든지 정세 등에 대해서도 - 그녀에게 전문적 식견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므로 상관없었다 - 들을 수 있었다. 주인과 사역마라는 관계라면 정을 돈독히 쌓을 필요가 있기도 했고, 그 이전에 포프는 루이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힘이 없지만 강한 프라이드로 우직하게 귀족의 자세를 고집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때 그런 쪽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포프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온 바 있었다. 귀족이란 항상 젠체 하는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대신 시에스타와의 귀향은 불발이 되었다. 시에스타가 루이즈에게 일주일 간의 휴가를 얻어내며 포프와의 동행을 허락받으려 했지만 루이즈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둘이 동시에 없어지면 자신의 관리는 누가 해 주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예 못을 박았다. 시에스타가 고향 타르브 마을에 내려가있는 동안 자신이 포프를 직접 데리고 놀러가겠노라고. 루이즈가 동행한다고 말했을 때의 시에스타의 미묘한 표정이 떠올라 포프는 잠깐 식은땀을 흘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자들 간에는 남자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통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포프는 방에 돌아왔다. 요새 책 읽는 재미에 빠져 도서관에서 책을 계속 빌리고 있었고, 그 증거로 짚더미 옆에는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마법서들이었다. 네 갈래의 계통마법은 포프가 보기엔 자신이 살던 세계보다 훨씬 실용적인 마법들로 채워져 있었다. 포프가 익힌 마법은 거의 대다수가 공격 전용이었지만 이곳의 계통마법은 연금, 고정화 등 실생활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루이즈에게 듣기로 시조 브리밀이 등장한 이래 육천 년 동안 이 세계에는 결정적이라 할 만큼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란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주문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까. 또 계통을 서로 섞을수록 보다 강력한 마법이 나온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자신의 매드로아는 이곳의 조합에 따르면 불 불 불 물 물 물 이란 구성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은 불 불 흙 이라든지, 물 물 바람 바람 바람 같은 식의 구성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처음부터 계통마법을 배운다는 건 이미 ‘완성된’ 포프에겐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이런 방식을 응용해 보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한참 마법서를 읽으며 노닥거리다 보니 루이즈가 돌아왔다. 오늘도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포프는 그녀를 놀려댔다.
“멍, 멍멍?”
“……그건 그만하라고 했잖아.”
루이즈가 얼굴을 확 붉히며 포프를 제지했다.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나 포프를 조교했던 게 며칠 전의 일이다. 스스로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포프가 사라졌던 날 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만 같아 울먹이며 보냈던 시간들을 이런 식으로라도 보상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녀의 약점이 되어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이후로 루이즈에게 함부로 말도 붙이지 못할 텐데, 그는 벌을 받는 중에도 오히려 그것을 즐기더니 지금은 아예 틈만 나면 멍! 멍! 을 외치며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다. 루이즈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나마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니까 다녀왔으면 아는 척은 해 줘. 혼자 심심하게 뒹굴고 있는데, 기껏 와서 아는 척도 안 해주면 섭하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래. 알잖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거 말이지?”
포프가 턱으로 책상 위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루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위에는 낡아빠진 책이 놓여 있었다. 가죽으로 된 겉표지에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해진 글씨로 ‘시조의 기도서’라고 씌어져 있었다. 트리스테인 왕가의 비보 중 하나인 이 물건이 루이즈에게 전달된 까닭은, 언젠가 이루어질 웨일즈 왕자와의 결혼 때 축사를 지어달라고 하는 의미이다. 축사를 읊는 자는 그 손에 시조의 기도서를 들고 있는 것이 원칙이다. 보통 나이 지긋한 신관이나 왕가의 인물이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앙리엣타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루이즈에게 이러한 중책을 맡겼다. 축사를 맡은 인물의 명예와 지위가 향후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는 왕가의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즈도 자신을 향한 앙리엣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문제는 루이즈가 작문은 쥐약이라는 것.
“아아~ 여전히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녀는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를 쥐어뜯더니 그대로 침대에 점프했다. 혼자 쓰기엔 굉장히 넓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모습에 아랑곳없이 포프는 아까 읽던 책을 펼쳐들었다. 그 모습을 본 루이즈는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포프! 주인님이 이렇게 고민하는데 본 척도 하지 않아?”
“그치만 내가 도와줄 게 없잖아?”
“으으……”
포프의 말이 맞았다. 농담으로라도 포프에게 대신 써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치더니 포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응?”
“그거. 머리띠.”
“에?”
포프는 순순히 머리띠를 벗어 내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쭉 착용해왔던, 이마를 가리는 넓은 머리띠. 바란과의 싸움 때 타이에게 유품으로 건넸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다. 오래 썼기 때문에 낡았지만 관리는 꼼꼼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더니 자신의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어, 어이.”
“이러면 네 지능도 내게 들어온 느낌이 들지도 몰라. 잠깐 빌릴게.”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포프는 순순히 수긍하며 다시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 책을 읽다가 힐끔 루이즈를 보니, 또 책상을 박차고 나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지능을 빌리긴 무슨, 하고 한탄하며 지켜보니 이번엔 머리띠로 터번 비슷하게 둘둘 감으며 장난치고 있다. 아니, 어느새 리본의 형태가 되어 있다. 아무래도 머리띠를 빌린 건 그냥 놀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게다가 어쩐지 저 눈은 포프의 머리에도 똑같이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다. 아무튼 아무래도 오늘도 축사를 쓰긴 글른 모양이다.
포프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조의 기도서를 집어들었다. 이게 왜 왕가의 비보인지 모르겠다. 겉표지는 너덜너덜, 속은 무려 백지. 글자가 지워지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백지이다. 책이란 내용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시조 브리밀이 직접 내려준 책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으니 아무 내용도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면 내용이 원래 있었는데, 어딘가에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며칠째 거듭해 같은 문제를 고민하던 포프에게 한 가지 실마리가 스쳐지나갔다. 잃어버렸다? 이곳 하르케게니아에는 확실히 ‘잃어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잃어버린 허무의 계통’
아까 마법서에 적혀 있는 말이다. 시조 브리밀은 계통마법의 시조. 지금은 잃어버렸다고 일컬어지는 허무의 마법도 그가 있었을 당시에는 자유자재로 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말의 단서가, ‘허무’의 시초라든지 사용법, 어째서 사멸했는지 등이 이 책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을 찾는다면 루이즈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열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 포프는 책을 파라락 펼쳤다. 역시 맨 앞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 중 한 장을 집고,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찢어냈다. 부욱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이 넓은 방을 순식간에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분명 화내겠지,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루이즈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머리띠로 자신의 복숭아빛 머리에 예쁜 리본을 피워낸 후 그것을 자랑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녀는 기계처럼 입을 벌려 책을 읽듯 물었다.
“포프, 그, 거, 무슨, 짓?”
“실험.”
“무슨, 실험?”
“이 책이 왜 백지일까 궁금해서.”
루이즈는 너무 어이가 없어 몸이 굳은 것 같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울며불며 난리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나라의 비보를 맘대로 훼손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남았으니까. 그래도 포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책에서 떼어내는 걸로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군’
그는 종이를 들고 루이즈에게 다가왔다. 아직 멍한 채인 루이즈의 이마에 찰싹 하고 종이를 붙여보았다.
“뭐, 뭐하는 거야!”
“실험, 실험~”
역시 접촉만으론 반응이 없다. 루이즈가 허무의 메이지라면 이 기도서에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단순접촉은 아닌 것 같다.
“자, 아~”
종이를 살짝 찢어 먹였다. 오물오물, 퉤. 침 범벅이 된 종이에는 여전히 아무 흔적도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 글씨를 써 봐.”
글씨를 썼지만 곧 지워진다. 역시 뭔가 마법의 장치가 되어 있다.
“여기에 네 주문을 써 봐.”
기각.
“혹시 불에 쬐면 글자가 나오지 않을까?”
실패.
“그렇다면 이 종이에 금주법을……”
“어이, 어이, 그만 좀 해! 아까부터 뭐 하는 짓이야!”
루이즈는 캬오~ 하고 소리치며 펀치를 날렸다. 반지를 끼고 있어 무지하게 아플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반지가 손상되면 안 되는데, 그런 건 좀 고려해! 포프는 루이즈의 단순한 패턴을 한탄하며 뒤로 살짝 덤블링했다. 그 서슬에 놓친 종이가 팔랑거리며 루이즈의 주먹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태까지 아무 반응도 없었던 종이에서, 그리고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 빛은 고스란히 종이에 흡수되면서 여백 위에 글자를 새겨나갔다. ‘이에 나 브리밀은 내 후손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남긴다……’ 빛으로 새겨진 아름다운 글자는 박물관에 모셔진 시조 브리밀의 글자와 똑같았다.
“………………에? 에에?”
루이즈의 눈이 점이 되었다가 확 커졌다. 마법을 이용한 장난 같은 게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국가의 비보. 그렇다면 지금 떠오르는 글자는 정말 브리밀이 기록한 것이다. 그녀는 급히 종이를 두 손으로 잡고 제대로 읽으려 했다. 하지만 종이는 그녀의 손가락과 접촉하자 빛을 잃고 평범한 백지로 돌아갔다.
“이, 이거 왜 이래? 포프?”
당황한 루이즈가 종이를 붙잡고 흔들고, 이마에 붙이고, 불에 쬐어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포프는 한참 생각해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종이에 가져갔다. 아니, 정확히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져갔다. 반지와 종이가 닿자 다시 한 번 빛으로 새겨진 글자가 떠올랐다.
“역시 그렇네. 이 반지도 왕실의 보물이었지?”
“으, 응.”
“이게 열쇠였나 봐. 보물 두 개가 접촉해야 글자가 떠오른다. 그렇다는 건 왕실의 사람들만 읽어보라는 건가? 앙리엣타 공주나 다른 왕실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아는 건가?”
루이즈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앙리엣타와 놀던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왕녀가 그 책에 대해 조심하거나 하는 태도를 본 적은 없었다. 비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엄중하게 보관된 물건은 아니었고, 경사가 있을 때마다 꺼내져오곤 했다. 만약 왕실에서 이 책에 내용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남의 손에는 절대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비보 물의 반지와 시조의 기도서만으론 클리어되지 않는 조건이 또 있다는 이야기이다. 확인을 위해 포프는 루이즈에게 종이와 반지를 빌린 후 자신이 실험해 보았다. 역시 발동하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심증으로만 있었던 ‘루이즈=허무의 메이지’란 그의 가설이 이 순간 완성되었다.
“이건 네가 허무의 메이지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야. 네가 아니면 이 책은 읽을 수 없어. 저 앙리엣타 공주조차 읽을 수 없었지만, 넌 달라.”
포프는 종이를 찢어낸 페이지를 찾아내 거기에 다시 종이를 끼워넣었다. 신기하게도 종이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스스로 책에 달라붙었다. 이런 것도 고정화 마법의 힘일까 생각하며 그것을 루이즈에게 넘겼다. 루이즈는 그 책을 받아들고 신중하게 첫 페이지를 펼쳤다. 처음 부분엔 브리밀의 서문이 있었다.
‘이것을 읽는 자는, 나의 행위와 이상과 목표를 이어받는 자일지니. 혹은 그를 위한 힘을 짊어진 자일지니. '허무'를 다루는 자는 명심하라. 뜻의 한복판에서 쓰러진 나와 그 동포를 위해, 이교에게 빼앗긴 '성지'를 되찾도록 노력하라. '허무'는 강력할지니. 또한, 그 영창은 긴 시간을 지나, 막대한 정신력을 소모한다. 영창하는 자는 주의하라. 때로는 '허무'는 그 강력함에 의해 목숨을 깎는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는 자를 고르니, 설령 자격 없는 자가 반지를 끼워도, 이 책은 열리지 않는다. 선택받은 읽을 자는 '네 개의 계통'의 반지를 끼우라. 그리하면, 이 책은 열릴지어다.’
루이즈의 시선이 황홀하게 물들어갔다. 브리밀의 글자가, 육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옆에서 브리밀이 자상하게 하나하나 읽어주는 것 같았다. 주변의 아무 소리도, 아무 사물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는 책 속의 또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몰랐겠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포프의 눈에는 책에서 흘러나온 빛이 그녀의 전신을 두르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적으로 뭔가 연결된 게 확실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루이즈를 몇 차례 불러보다 반응이 없자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기냐, 브리밀! 기왕이면 사역마까지는 읽을 수 있게 해 달라구!’
포프는 투덜대며 방을 정리하고 구석에 세워둔 델프링거에게 무슨 일 있으면 소리치라고 부탁한 후 세탁물을 집어들었다. 이대로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시간때우기라도 할 요량이었다. 시에스타가 없으니 당분간 이런 건 자기 몫이다. 바구니를 들고 빨래터에 가 깨끗하게 빨고, 그것을 루이즈 전용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반짝이는 백색의 빨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다 상쾌해진다. 연분홍빛 속옷을 모처럼 빨며 남자로서의 무엇을 다시 잃긴 했지만. 남자의 마음이란 묘해서, 여자의 벗은 속옷에는 흥미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손으로 빤 속옷에는 흥미가 가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 정도면 루이즈가 정신차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유유히 방에 돌아가려 했다.
그때 포프의 직감에 위험 신호등이 켜졌다.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머리 위를 바라보자, 위에서 타바사의 풍룡이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 녀석, 이대로 착륙할 셈인가? 저 기세로 지면과 충돌한다면, 이곳은 날아가 버린다!
“멈춰~!!!!!”
포프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마구 휘두르며 용에게 정지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보았는지 용의 속도가 느려진다. 하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은 데다 지상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강제로 멈추게 할 수밖에 없다. 진공주문으로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지팡이를 뽑아든 순간, 느닷없이 푹신한 감촉이 얼굴을 짓눌렀다.
“큰일났어요, 큰일! 큰일이야! 아저씨! 큐이큐이!”
느닷없이 시야가 살색으로 막히고, 언젠가 큐르케에게서 경험했던, 남자로서 매우 기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숨넘어가기 딱 좋은 상황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큐르케와는 달리 결사적으로 잡고 있어 떼어놓기도 힘들다. 게다가 힘이 왜 이렇게 센지, 그녀가 맘만 먹으면 포프의 목을 손쉽게 분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수, 숨이…… 이런 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다니……’
누군지 모르는 여자의 품에서 죽는다는 건 남자로서 행복한 일이지, 라는 말을 어느 모험 소설에서 읽은 적 있다. 그런가. 행복한 건가, 라고 중얼거리자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품 안에 휴대화해 넣어둔 블랙로드의 느낌이었다. 그가 블랙 로드를 향해 손을 뻗자마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포프를 붙잡고 있던 여자의 몸이 1미터 정도 날아갔다. ‘바기’가 발동된 것이다.
‘난 주문을 발동한 적 없는데?’
포프는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그녀에게 달려갔다.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포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과거 스승 아방에게 ‘아스트론’의 주문을 당했을 때처럼 딱 정지한 채 더듬거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너, 아니, 당신, 대체,……”
푸른 머리의 여성은 다리를 벌린 채 나신으로 쓰러져 있었다. 숨김의 미학이란 상상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포프였지만 진짜 여자의 나신을 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마암의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 정도? 그런데 느닷없이 아름다운 여자의 나신을, 그것도 가장 은밀한 것까지 본 것이다. 어쩐지 코가 화끈해지더니 저절로 코피가 흘러 뚝 떨어졌다.
“오, 오, 옷……”
포프가 어버버 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어리벙벙해하던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다시 그에게 달려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얘기고 뭐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포프는 급히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씌웠다. 서두르느라 얼굴까지 덮어씌운 덕에 맨다리가 살짝 드러났다. 그 발에는 흙이 거의 묻어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꼴로 걸어오지는 않았다는 말인데? 그때 망토 안쪽에서 여성의 소리가 들렸다.
“큐이큐이, 아저씨, 저 실피드예요. 이거 치워주세요~”
“실피드?”
기억이 났다. 실피드의 사역마인, 풍룡인 척하고 있는 운룡. 지난번 얘기를 생각해보면 포프와 마찬가지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포프는 인간 쪽이 본체이고, 실피드는 용 쪽이 본체라는 점이겠지만.
“너, 그런데 왜 갑자기 변신했어?”
“그, 그거야~ 아저씨가 인간형이니까 저도 인간형으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큐이~”
아무래도 이 용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포프는 일단 그녀에게 다시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녀가 원래대로 되돌아가자 이제야 제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포프는 망토를 다시 착용하며 그가 인간이며, 특수한 주문으로 용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용은 설명을 대충 흘려듣고 급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도와줘요! 큐이~ 언니가 나쁜 놈한테 당했어요!”
“뭐?”
포프는 당황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포프보다 약간 더 큰 키라 눈높이가 잘 맞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쳐들어왔어?”
“실피드도 잘 몰라요. 어떤 남자가 정문으로 들어오더니 마법도 쓰지 않고 큐르케 언니랑 타바사 언니를 기절시켰어요. 실피드도 같이 싸웠지만 남자가 너무 세서 도망쳤어요. 아저씨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해서.”
어눌하게 말하는 용의 눈에 분함이 가득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이제 보니 몸 곳곳에 예리한 무기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급히 그 상처를 치료해주며 다시 물었다.
“그 녀석, 아직 거기에 있을까? 혼자 왔던 거야?”
“혼자였어요. 밖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큐르케는 단순히 동년배 메이지 중에서 쓸만한 실력이라 할 만하지만, 타바사는 다르다. 그녀가 골렘을 향해 내쏘았던 주문을 포프는 기억하고 있다. 그건 포프가 이 세계에서 본 주문 중 두 번째로 뛰어난 솜씨였다(골렘은 논외로 하고, 왈드의 라이트닝 클라우드가 가장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런데 둘이 협공하고도 한 남자에게 당했다? 아니, 그보다 둘이 함께 상대했다면 한 명이 식구들을 수습해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치료를 끝낸 포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큐르케의 건조대로 달려갔다. 굉장히 정열적인 어른의 속옷이나 승부 속옷 같은 게 가득해 그나마 입을 만한 옷을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인간으로 변신해서 이거 입어. 어서.”
파앗! 실피드는 인간으로 변신하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옷을 입었다. 마치 아이가 바지를 거꾸로 입는 것처럼 어색하기만 한 모습이다. 하지만 포프는 도와주는 대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즈의 옷시중을 들어주는 건 루이즈가 워낙 유아 체형이라 딱히 성욕이 치솟진 않는 게 그 근간이다. 하지만 최소한 큐르케 급의 미모를 자랑하는 연상 체형이 저렇게 홀딱 벗고 있으면 도저히 바라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 녀석이라면 이럴 때 당황했으려나? 뒤돌아 선 상태로 포프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친우이자 라이벌인 은발의 청년을 떠올렸다.
겨우 옷을 다 입은 실피드가 포프를 불렀다. 옷은 거추장스럽다며 투덜대는 그녀를 붙잡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후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루이즈는 여전히 무념무상 상태에 빠져 있었고, 델프링거는 한가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델프링거를 붙잡고 창밖으로 뛰어내린 후 급히 실피드의 어깨를 잡고 루라를 시전했다. 용과 함께 루라를 해 본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인간형으로 변신하라고 미리 주문했던 것이 맞아떨어졌다. 둘은 단 한 번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저택의 정문 앞이었다.
“우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대단하다. 내가 나는 것보다 빨리 왔어요. 큐이.”
“나중에 가르쳐줄게. 넌 여기 있어. 혹시 적이 오면 막아주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날아올라. 너까지 잡히면 골치아프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잡히면 안 돼. 알았지?”
포프의 진지한 눈을 본 실피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포프는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저택으로 달려갔다. 아직 아무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흔적도 없었다. 그 말은 그 작자의 일행이 아직 오는 중이거나, 혹은 플라이 주문으로 이동을 했거나, 혹은 아직 그가 저택에 남아있다는 말이다.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인질극이 벌어질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 여차하면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 지원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포프는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휑했다. 1층의 유리창이 몽땅 깨져 있었고, 여기저기 그을린 흔적과 작은 얼음알갱이가 뭉쳐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포프의 생각보단 흔적이 많이 남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들이 저항을 길게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인질을 잡혔거나, 아니면 그 자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거나. 그가 정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보면 기습은 아닌 것 같다. 기습이 아닌 순수한 실력만으로 메이지 둘을 제압하려면 왈드 정도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포프도 본의아니게 왈드에게 일격을 허용한 아픈 기억이 있었기에,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인기척을 살피며 신중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1층을 얼추 수색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포프가 유리가 깨져 휑해진 창문으로 뛰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땅바닥에 널부러진 푸른 용의 모습이 보였다. 소리와 흔적을 보니 날아오르다 강제적으로 땅에 추락한 것 같았다.
‘어느 틈에!’
분명 정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포프는 창에서 몸을 떼고 망설였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델프.”
-뭐냐.
“사방을 최대한 감시해. 누군가 있어. 내가 감지할 수 없는 자가.”
-그런 거라면 저기 블랙 양에게 맡기라구.
델프링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블랙 양? 헤에, 둘이 사귀는 것 같은걸?”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도 포프는 델프링거에게 농담을 했다. 입이 거친 자신의 검이 블랙 로드에게 ‘양’이란 칭호를 붙인 게 신기해서였다. 델프링거를 쥐고 있던 손이 잠깐 굳었다.
-이봐.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면 그녀가 화낸다구.
아니, 이봐, 잠깐? 뭔가 봤어?
블랙 로드가 눈에 띄게 웅웅거렸다. 포프의 마력이 포프의 의사와 무관하게 블랙 로드에게로 흡수되더니, 지팡이의 길이가 쭉 늘어났다. 살기마저 담았다고 할 만한 공격이 한쪽 벽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아주 미약한 기척이 포프와 델프링거에게 느껴졌다.
“거기냐!”
포프는 이오라 십수 발을 내쏘며 그리로 이동했다. 위력을 죽인 이오라들이 상대에게 부딪치려는 순간 두 동강났다. 남자가 휘두른 무기에 이오라 무리가 한순간에 괴멸했다.
남자의 무기를 본 순간 포프의 표정이 돌변했다.
“델프! 블랙! 전력전개다!”
-어? 갑자기? 이봐, 마음이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진동하는데? 저 놈이랑 아는 사이야?
델프링거가 물었지만 포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이 순간 포프의 모든 신경은 그 자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해파참이 적이 있는 자리를 베었다. 해파참은 아방 스트랏슈 A 타입처럼 어느 정도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 적은 무기를 들어 이를 튕겨냈다. 튕겨내느라 아주 약간 빈틈이 생긴 게 찬스였다. 포프는 마햐드를 발사한 후 블랙 로드에 힘을 주입해 남자에게 내쏘았다. 남자가 조금이라도 빙한 때문에 움직임이 굳는다면 바로 블랙 로드에 꿰인 꼬챙이 신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은 마치 허깨비처럼 스르륵 사라졌고, 주문과 지팡이가 거의 동시에 벽을 강타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과자처럼 부서져내렸다.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보지도 않은 채 포프는 그 자리를 박찼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를 구했다. 아주 약간, 그가 뛴 찰나, 그의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적의 무기가 포프가 있던 자리를 베었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는 조금 뒤에 들렸다.
“하르케게니아에 이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포프는 그 목소리가 남자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의 <b>녀석</b>이 교묘한 술수로 정체를 가렸다면, 이번의 <b>녀석</b>은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습은 남자인 주제에 목소리는 소녀의 것이었으니까.
“……모습을 드러내. 얘기하고 싶다.”
포프가 전신에서 퍼지는 살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만약 이런 장소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문답무용으로 녀석을 파괴한 후 산산조각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질들이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어째서 그녀들을 습격했는지도 들어야 한다.
“하르케게니아에 루라를 쓸 수 있는 메이지. 게다가 검.
너, 다른 세계 사람?”
“너도 마찬가지잖아.”
타바사만큼이나 축약이 심한 어투이다. 그렇다고 괜한 동질감에 상대에 대한 혐오가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포프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탐색했다.
녀석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저것도 공격수단인가 싶어 포프는 지팡이를 바짝 쥐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포프를 공격하는 대신 그대로 위로 치솟았다. 태양이 쨍쨍한 가운데에서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가 몽환적이었다. 녀석의 것이었던 커다란 그림자는 일그러지며 뭉치더니 창백한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진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가 빈틈을 보이며 자신을 드러낼 때 포프는 공격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러야 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소녀는 눈가에 내려온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삼단 같은 머리가 사르륵 뒤로 넘어가자 머리에 가려져 있던 귀가 드러났다. 그 귀의 끝은 인간과 달리 뾰족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본다면 엘프라고 외치며 도망쳤겠지만 포프는 그저 냉정하게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래, 이곳까지 무슨 용무로 행차하신 거지?”
“뭔가 착각하는 모양.
난, 네가 아는 그가 아냐.”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뾰족한 귀가 쫑긋 하고, 그 서슬에 귀걸이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포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술책일 수 있다.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결코 방심해선 안된다.
“물론 아니겠지.”
포프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아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거야!
말해봐, 이 자식아! 왜 이곳, 다른 세계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거냐! 거기가 실패하니까 여기서 지상 정복을 계속할 셈이냐! <b>킬번</b>!!“
포프의 외침이 폐허가 된 실내에 쩌렁 울렸다. 손등의 문장이 주체할 수 없는 전의로 화인(火印)처럼 달아올랐다.
소녀의 앞에 선, 한때 <킬번>이라 불렀던 자동인형이 든 낫에서 음산한 빛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