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7화 하르케게니아 최단의 전쟁
“지팡이가 없으면 마법을 쓸 수 없는 세계라. 그건 이쪽보다 마법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얘기와 같은 뜻일까?”
롱베르크가 포프의 손을 바라보다 물었다. 예전 타이의 검을 만들 때도 행했던 의식이다. 그때는 귀암성의 습격 때문에 기다리기 매우 초조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며칠을 해도 상관없다. 레오나와의 교섭이 끝난 데다 강력한 결계까지 쳐놓은 이상 이곳은 매우 안전하다. 아방이 친 마호카토르와 포프의 빙염결계가 겹쳐진 이상, 최소한 해들러 급이 오지 않는다면 이곳에 해를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포프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그냥 세계의 규칙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 또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팡이를 쓴다는 건 극대주문을 쓰기 다소 불편할 수 있다는 얘기지. 너도 빈 손으로 극대주문을 쓰기가 더 편하지?”
“아, 예. 손 대신 지팡이에 마력을 집중해 쓰는 건 곧 익숙해졌지만, 예전 동작들이 몸에 배어있다 보니.”
“혹시 그걸로 매드로아는 써 봤나?”
“아니요. 걸리는 게 있어서……”
매드로아는 오리하르콘마저 소멸시키는 에너지이다. 손으로 내쏠 땐 손과 직접적으로 닿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지만, 하르케게니아에선 무조건 모든 마법을 지팡이를 통해 발사해야 하니 매드로아 역시 지팡이에 담겨야 한다. 그때 지팡이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불확실한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게 속편한 일이라 그는 지금까지 매드로아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한 모양이다.
“잘 했다. 내가 만든 마검이 타이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블랙 로드도 매드로아를 견뎌내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니까.”
롱베르크는 그렇게 말하며 포프의 손에서 시선을 떼었다. 생각보다 관찰은 짧았다. 새로 무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블랙 로드를 개량하는 셈이라 그런 것 같다. 바퀴의자를 끌며 노바와 함께 분주히 작업준비를 한 후 불을 지폈다. 과연 전설의 무기를 만들어내는 장인의 가마는 일반 가마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뜨겁다. 전설의 장인은 십자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심호흡을 하고,
델프링거를 불 속으로 쑤셔넣었다.
-앗뜨거뭐야이거왜날집어넣는거야지팡이만든다면서~~!
“내가 만들 건 지팡이가 아니라 ‘떨어져 있어도 마력이 연결되는’ 새로운 무기라서. 그래서 네 구조와 원리를 좀 알고 싶군.”
-뭐야, 이 건방진 녀석아, 날 녹이려면 적어도 육천 살은 더 먹고 와라, 아니, 오세요, 뜨거워, 용암 속 같아, 살려줘, 파트너~~
롱베르크의 손 안에서 델프링거가 애처롭게 파닥거린다. 이런 말 하면 델프에게 미안하지만, 포프가 보기엔 개장수의 손에 잡힌 식용견 수준이다. 육천 년 동안 하고싶은 말 다 하며 제멋대로인 성격을 키워갔던 델프도 전설의 장인의 손 안에선 쉽게 반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불에 뜨겁게 달궈져 검신이 약간 달아올랐다. 하지만 검 자체의 형상이 변할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예리함은 둘째치더라도 강도만은 타이의 검과 비슷한 급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롱베르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다시 검을 불꽃에 달구어댔다. 꺄악~~!!! 하는 비명소리가 다시 작업장 안을 채웠다.
그리고 30분 후.
-어~~ 시원하군 그래.
벌써 적응해버렸는지 델프링거는 콧노래를 불렀다. 가마의 온도는 한계 직전까지 올라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 육천 년 먹은 검을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검신의 모양은 아까처럼 조금 달구어진 정도였다. 그 결과에 노바와 롱베르크는 적지않게 실망했다. 그들의 계획은 델프링거를 최대한 달구어 거기 흐르는 마력의 통로를 읽어내는 것이었다. 포프의 손등에 새겨진 룬과 어떤 식으로 호응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결과를 다시 역으로 발상해 손에 쥐지 않아도 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지팡이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더 없냐? 이 몸을 뜨겁게 하려면 이 세 배는 가져오라지! 이래서야 땀도 안 나는군!
무기에게 비웃음을 당한 롱베르크의 이마에 가볍게 핏줄이 돋아났다. 노바가 그의 표정을 보고 떨면서 뒤로 물러났고, 포프조차도 흠칫했다. 작업장 인근에 있던 몬스터들과 마족들은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살기어린 투기를 느끼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래…… 이렇게 날 끓어오르게 한 상대는 미스트번 이후 처음인 것 같군.
노바, 그걸 가져와라.“
“그거라면, 설마!”
“그래. 오늘이야말로 그걸 쓸 때가 된 것 같다.”
노바는 뭔가 항변하고 싶은 눈치인 것 같았지만, 스승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 못하고 구석으로 가 서랍을 뒤졌다. 그 사이 롱베르크는 포프에게 자신이 만들 무기를 설명해 주었다.
“델프링거의 마력라인을 확인하는 즉시 작업을 시작한다.
내가 만드는 무기는 기본적으로 약간의 자아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쪽 세계로 건너가 저 녀석을 만나면서 그 자아가 조금씩 성장하게 된 것 같구나. 혹시 블랙 로드의 말을 들어본 적 있나?”
“글쎄요. 음…… 없는데요?”
포프가 시원스럽게 대답한 순간, 숫돌 위에 올려놓았던 블랙 로드가 데구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모서리에 놓았나? 생각하며 다시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롱베르크가 중얼거렸다.
“걱정 마라. 조만간 저 녀석에게 한 방 날릴 수 있는 육체를 줄 테니, 그리 자학할 필요는 없다.”
“예?”
“혼잣말이다.”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자신의 코앞에서 얘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은 그대로 냉랭하게 등을 돌려 포프를 싹 외면하고 말했다.
“자아가 있다는 건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육체를 만들어주면 된다. 그것도 마법을 쓰는 널 보조할 수 있는 전사계 계열로 하면 좋겠지. 검은 델프링거를 쥐어주면 되겠고. 마력링크를 너와 연결시켜 놓으면, 인간형이 된 뒤에도 지팡이를 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일 거다. 저 검이 들이마신 마력을 네 몸으로 흘려보낸다는 건 블랙이 움직이는 마력으로 전환시키면 되는 문제이고.”
“블랙에게 육체를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 네가 금주법을 좀 써준다면 말이지.”
“그거야……”
당연히 포프는 승낙했다. 금주법이란 마법사들이 그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사용을 제한한 마법이다. 하지만 포프는 현재 그 마법사들의 머리꼭대기에 올라가있는 존재이다. 수명이 깎인다는 건 좀 맘에 들지 않지만, 그렇게 깎이고도 백 살이 넘게 장수한 마트리프를 보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도 같다. 설마하니 초 단위나 분 단위로 수명이 깎이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수습하고, 여기에 적당한 마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검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건 좀 아쉬운데요. 룬의 보정 덕분에 신체능력이 상당히 향상되어서 이제 저도 쓸 만한 검사인데요.”
“그건 잊어라. 넌 태생부터 마법사이지 전사 체질이 아니야. 그런 보정과 어설프게 독학으로 익힌 검으로 날뛰려 들다간 검에 맞든 불에 타든 곱게 죽진 못 할 게다.”
마계 제일의 검사이기도 한 그의 딱부러진 말에 포프는 할 말을 잃었다. 조금 부루퉁해진 그에게 노바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네가 양 손으로 마법을 쓰는 게 더 효율이 좋잖아. 또 나와 스승님이 만들어낼 그 육체는 네 손등의 문장의 힘을 받은 것만큼이나 강력할 거야. 해들러도 체스의 말로 그런 무시무시한 친위기단을 만들어냈잖아?”
“그래, 그렇지.”
아직 아쉬움은 남아있었지만 포프는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블랙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 마음껏 취향을 발휘해 미소녀 타입으로 하고, 몸매는 빵빵하게, 얼굴은……그래, 마암으로 하고, 눈은 메를르로 하는 거다. 그는 순식간에 흥이 올라 종이를 꺼내놓고 본격적으로 설계하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그에게 델프링거의 외침이 들릴 리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뜨거워! 꺄아아아악! 내 몸에 뭘 뿌린 거야!
“그 세 배는 가져오라고 해서, 말한 대로 한 것뿐이다. 마침 딱 적당한 물건이 있어서 말야. 마계의 마그마와 같은 성분인 <bl>어떤 녀석</bl>의 피이지.”
-녹는다! 부식된다구! 듣고 있냐!
“아아, 그건 오리하르콘도 부식시키는 물건이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걱정 말라구. 설령 완전히 녹아내린다면 자루 정돈 챙겨서……마저 녹여주지.
뭐, 녹지 않는다면야 고치면 되는 문제고.”
-그렇게간단하게얘기하지마아파뜨거워살려줘잘못했어요대장장이님!
“뭘 그 정도로 벌써 엄살이냐. 아직 피는 많이 남았어.
놀고 싶다면 내가 계속 놀아주지…… 델프링거……!“
-히익! 파트너! 포프! 주인님! 살려줘~!!
여전히 포프는 듣고 있지 않았다.
제로의 대모험 제17화
-하르케게니아 최단의 전쟁
쌍월이 밤하늘의 구름을 뚫고 그 자태를 드러냈다. 초저녁까진 구름이 많이 끼어 어두웠지만 지금은 구름 한 점 없다. 포프의 세계보다 두 배 정도 큰 달이 두 개나 떠 있다 보니 사방은 눈부시지만 않을 뿐, 저녁 어스름만큼 밝았다.
평야의 구석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서 포프는 뒹굴거리며 그 달을 감상했다.
“저건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아.”
-달 말이냐?
“응. 이곳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달구경하는 거니까.
태양을 보며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궁리하고, 달을 보며 다시 돌아갈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염원하던 것을 이루고 나니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자신이 빠진 세계가 그렇게 슬플 정도로 추악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나니,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히려 편안함마저 느꼈다. 이곳이 더 낫다, 란 문제가 아니다. 포프에겐 이곳보다 50년 후의 고향의 모습이 더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포프 님.”
차가운 감촉이 오른팔에 느껴졌다. 돌아보니 블랙이 소맷자락과 팔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뭐야, 블랙. 님 자는 그만 빼래도.”
“싫어. 포프 님은 내 주인님이야. 아까 잠시 포프라고 불러보았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어. 내게 기분좋은 건 주인님과 함께 하는 거니까.”
“우린 파트너 관계……”
“파트너 이전에 주인님이야.”
블랙은 딱 잘라 말하고 포프의 팔을 감싸안아 자신의 가슴으로 눌렀다. 인간 여자였다면 푹신한 감촉이 뒤따랐을 테지만 블랙의 경우 차가운 금속의 기운만 느껴진다. 하지만 포프는 그 팔을 빼지 않았다. 아무리 차가운 금속이라도, 이렇게 계속해서 맞닿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온기로 인해 열을 머금을 수 있으니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랙은 최고의 작품이었다. 갑옷 마검이나 갑옷 마창의 경우를 참조해서, 블랙 로드 또한 인형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롱베르크의 작품답게 모든 주문을 막아내는데다 기본 능력 또한 과거 마영군단의 비장의 무기였던 데드 아머를 상회한다. 단 후자에는 델프링거를 쥐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델프링거와 룬의 역학관계를 조사한 롱베르크가 그녀의 내부 전체에 룬을 새겨놓아서 포프가 받는 보정을 어느 정도 선까지 재현해 놓았다. 진짜 룬이 아니라 효력은 당연히 떨어지지만 그 가짜 룬도 수십 개가 넘게 있으면 꽤 볼만한 힘을 낸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용모는 투구를 쓴 마암+메를르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힘처럼 돌연변이로 탄생한 존재가 아닌 이상 그것까지 만들어내긴 힘들 것 같아 투구로 머리를 가린 형태를 취했다. 투구와 가벼운 갑옷은 검은색, 그 아래 드러난 피부는 하얀색이다. 몸매는 빵빵하지만…… 금속 생명체라 촉감 제로란 점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사역마 비슷한 존재가 된 블랙에게 치근덕댈 정도로 굶주리진 않았다.
바람이 불어 언덕에 돋아있던 긴 풀들을 와삭와삭 흔들어댔다. 그 소리 속에 포프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평온하게 말햇다.
“델프, 블랙. 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어. 매일 반찬투정이나 하고, 친구들과 놀러다니며 용사놀이를 하고,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싫어 도망다녔지. 그때 마침 진짜 용사가 우리 마을에 들른 거야. 난 얼씨구나 하고 그 용사에게 묻어 가출했지. 그리고 날 제자로 받아준 그분과 일 년간 함께 다녔어.”
“그래서 강해진 거야?”
델프는 물론이고 블랙 역시 그의 과거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호기심에 찬 그녀의 눈동자에 돌아온 것은 씁쓸한 웃음이었다.
“아니. 일 년간 배워서 쓸 수 있던 건 기껏해야 메라조마 정도였을까. 스승님은 내 응석을 잘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날 혹독하게 훈련시키지 않았어. 그리고 그 댓가는 꽤 컸지. 약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니까.”
-스승이 누구에게 당한 건가?
“아아. 해들러란 녀석이 있어. 지금은 존경하게 된 내 <b>전우</b>지만, 그땐 그냥 악당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땐 힘이 없었으니까, 란 말로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지. 풋내기인 타이와 역시 풋내기인 나, 그렇게 둘이 어떻게 그 무수한 난관들을 헤쳐왔는지 가끔 의아할 때가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은 힘이 있어서, 차고 넘쳐서 여기 이렇게 서 있어. 힘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막아 보이겠어.“
-엎드려 있잖냐.
“……여기 엎드려 있다고 하면 꼭 살려달라고 비는 것처럼 보이잖아, 델프. 그런 건 좀 넘어가 주라.”
델프의 태클에 힘이 빠져 포프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블랙이 상체를 일으켜세우고 전방을 응시하며 작게 소곤거렸다.
“오고 있습니다. 속도가 상당히 빨라요.”
군대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선발대만 해도 아까 자신들이 처리하고 온 병사들의 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설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끊임없이 모습을 보이는 장대한 모습에 포프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만한 숫자면 마왕군도 때려잡을 수 있겠는걸?”
그들의 눈앞에 조금씩 적의 선두가 보이고 있었다. 갑옷을 잘 챙겨입은 장창병을 시작으로 메이지, 몬스터, 말을 탄 기사 등등이 뒤섞인 진형이 서서히 평야를 채워나갔다. 행군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진형이 좀 흐트러져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숫자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포프는 자신의 세계를 떠올려 보았다. 가장 강한 국가인 카알 왕국도 초룡군단의 습격을 받을 당시 천 단위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다. 강력한 기사 수백 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로는 초룡군단의 압도적인 화력을 어쩔 수 없다. 마족에게 시달리다 겨우 15년간의 짧은 평화를 가졌지만 급감한 인구는 그 정도 시간으로 회복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이곳은 인간만을 위한 대지. 엘프가 공포의 대상이긴 해도 그들이 쳐들어왔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다.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산 덕에 저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배알이 뒤틀렸다.
“자꾸자꾸 나와요, 포프 님……”
블랙이 약간 긴장했는지 포프의 팔을 꾹 쥐었다. 포프와 함께 한 시간 중 저만한 병력을 본 적은 없었다. 언덕과 평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으므로 천 단위의 병력 정도는 결국 몇 개의 덩어리 정도로 보일 텐데, 이건 그야말로 개미떼 수준이다. 델프링거는 그녀와 대조적으로 느긋하게 말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천의 병력을 물리친 전설의 간달브란 거 뻥이야. 몇백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게 뻥튀기된 것뿐이지. 어때, 좀 긴장이 풀려?
“델 아저씨!”
블랙이 소리지르자 델프링거가 호탕하게 웃었다.
-왜 이러냐. 너만 몸 가졌다고 너무 괄시하는 거 아냐? 그리고 난 그동안 혹시 파트너가 믿고 있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구.
포프는 놀라서 델프링거를 바라보았다.
“아니, 믿었는데? 천 명 정도까진 충분하니까, 전설의 간달브란 사람도 그 정도는 되었으려니 했는데.”
-…………농담이 아니란 게 무섭구만.
아무튼 잘 들어, 파트너. 시간끌겠다고 저걸 막는 건 좋아. 하지만 급하면 당장 도망치는 걸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해. 흥에 겨워 날뛰다 탈출할 타이밍을 놓치면 끝장이야. 저 수많은 병력에 둘러싸이면 아무리 너라도 단숨에 무너질 수 있어. 게다가 지금의 넌 만전 상태가 아니니까.
실실대면서도 주인 걱정을 잊지 않는다. 포프는 검자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말하지 않았나? 도망치는 건 내 특기라고.”
-그거 좋구만.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특기야. 가령 여자애를 희롱하고 도주한다거나, 우갹!
“주인님, 그만 출발하죠?”
포프의 손에 맡겼던 델프링거를 거칠게 회수한 블랙이 딱딱 끊어 말했다. 포프는 그런 블랙이 귀여워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미끈한 표면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블랙은 포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주인만이 자신을 쓰다듬고, 자신에게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블랙은 거듭 다짐했다.
검과 지팡이를 모두 손에서 떼어놓아 좀 허전해졌지만, 원래 이것이 포프가 싸우는 스타일이다. 빈 손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는, 원래 세상에서의 상식을 하르케게니아에서 적용하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력을 막기 위해 세운 몇 가지 전략이 있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주문은 이미 실행했다. 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저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선수를 쳐 혼란에 빠트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후 포프는 깔고 앉았던 망토를 걸쳤다. 긴 망토가 가벼운 바람에 살짝 펄럭였다. 이것이야말로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신호나 다름없었다. 저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포프와 블랙에겐 이미 전초전은 지나간 뒤였다.
“간다.”
포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포프 앞에 블랙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을 기다렸다. 포프의 금주법에 의해 탄생된 델프는 포프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의 존재. 포프처럼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고, 포프처럼 진지해진다. 중요한 대목에서 손발이 잘 맞아떨어지는 관계이다. 둘의 모습은 마치 해들러와 친위대처럼 견고해 보였다.
그는 명령했다.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내가 무사히 귀환하는 것. 너와 나는 일심동체, 따라서 난 너를 지키기 위해 나를 지킨다.
그리고 그와 동격인 명령은 너와 델프 또한 무사히 귀환하는 것이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내가 이동할 때 함께 이동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 블랙 로드라는, 말 못하는 지팡이로 있을 때와 달리, 완전한 개별적 전투체로 싸움에 임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포프와 그녀, 델프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포프는 엄숙하게 불렀다.
“전투의 시간이야, 휘즈.
내가, 우리가 믿고 있는 정의를 위해 싸우자.“
해들러 친위기단에게 각각의 고유한 이름이 있었던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녀의 경우엔 보다 효과적으로 힘을 보존하기 위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오리하르콘으로 각인되어 있는 진명이 흘러나오자 휘즈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가벼운 경장갑이 늘어나며 전신을 휘감았고 투구가 얼굴 전체를 가렸다. 검을 쥔 손에는 건틀렛이 생겨나 델프링거를 단단히 잡았고 반대편 손에는 마암의 마갑권처럼 둥근 방패가 생겨났다. 롱베르크의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모양이다.
타이도, 흉켈도, 마암도 없지만,
포프의 세상에서 온 전우가 옆에 있다.
포프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토베루라!”
그녀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포프는 비상주문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알비온 군의 선두가 출렁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공격을 개시했다. 한 사람은 백은의 검을 휘둘러 그 검풍만으로 수십 명의 병사를 쓰러뜨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팡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람의 주문을 사방에 난사했다.
하르케게니아에서 검술이란 평민이 익히는 조잡한 기술일 뿐이다. 그런데 저 검사는 검으로 마법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르케게니아에서 메이지는 지팡이 없이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저 메이지는 빈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발의 마법을 연속으로 내쏘고 있다.
상식을 벗어난 사실에 병사들은 절규하며 공격했다.
총을 쏜다. 메이지를 향한 총알이 검사의 방패에 가로막히고, 그 직후 소총대 전원이 허공을 찢는 검의 충격파에 날아가 버린다.
환수와 몬스터를 동원한다. 지성이 없는 몬스터는 메이지를 밟으려 하지만 바로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며 병사들을 깔아뭉갠다. 만티코어 한 마리가 기세좋게 나서다 불꽃의 덩어리에 맞아 노릇하게 구워진다.
기사 대장이 산개를 명한다. 그들과 붙어 있던 자들은 이미 쓰러져 있고, 뒤에 오는 자들이 둘을 빙 둘러싼다. 그 바로 뒤에서 메이지들이 나선다. 화려한 빛깔의 마법들이 난사되지만 그 절반은 검사의 검이 들이마시고, 나머지 절반은 어째선지 쏜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믿었던 마법이 붕괴하자 포위 역시 빈틈이 생긴다. 기사대장은 분개해 말을 달리며 창을 내던졌지만 검사는 창을 맨손으로 잡더니 그에게 다시 던진다. 그의 말이 정통으로 맞아 고꾸라지고, 기사대장은 땅에 구른다.
이젠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궁수부대가 나선다. 어떻게든 이들이 자신들에게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 수백 발의 화살을 쏜다. 하지만 이들을 겨냥해 쏜 화살들은 빗나간 순간 아군에게로 그 머리를 돌렸다. 순식간에 전장에 피보라가 일어났다. 그들 자신들은 한 번도 살의에 찬 공격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어느새 침입자들의 몸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흥분한 군인들은 칼을 들고 마구잡이로 휘둘러댔고, 부상자는 초 단위로 늘어났다.
전열의 혼란은 단숨에 알비온 군의 중심부까지 퍼지고 있었다.
휘즈는 검을 ‘조심스럽게’ 휘둘렀다. 미리 포프에게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검날이 사람에게 닿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짜 룬에 의한 델프링거의 보정 효과, 그리고 미리 입력된 롱베르크의 검술로 인해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의 그녀를 순수하게 검으로 꺾는다는 건 최소한 최종결전 때의 흉켈 급 정도가 아니면 힘들 정도였다.
한편 포프는 그녀와 대조적으로 조금씩 숨이 거칠어져갔다. 현재의 포프는 마력이 평소의 절반 수준. 델프링거로 마력을 흡수하면 좋으련만, 롱베르크가 델프링거의 구조도 개조했기 때문에 현재는 그 방법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무리 그녀가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그녀의 활동은 포프의 마력을 자동적으로 조금씩 흡수하고 있었다. 마치 대마왕 버언의 무기인 광마의 지팡이처럼, 인간형으로 바뀐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포프의 마력은 줄어든다. 롱베르크가 광마의 지팡이보다는 효율적일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의 포프에겐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하다.
“주인님! 더 전진해야 해요!”
“그래! ……저기다!”
포프가 훌쩍 날아올라 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한 후 다시 착지해 휘즈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휘즈가 ‘아……’하며 부끄러워하는 사이 포프는 토베루라를 시전해 사령부로 날아갔다. 이 정도의 이동주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장병들은 난데없이 빛덩이가 자신들의 눈앞을 가르고 날아가자 엉덩방아를 찧으며 경악했다.
그들이 날아가는 곳에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아무리 보아도 총대장인 듯한 근엄한 인물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적은 고작 두 명이 아닌가!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두 명이라면 포위해서 힘을 빼면 그만이다! 이런 걸 처리하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군인인가!”
호통치던 알비온 총대장 호킹스에게 빛덩어리들이 날아왔다. 그것들은 그의 코앞에 쾅 하며 착지했다. 어딘가의 마법공격인가 싶어 검을 빼들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상대방의 손에 붙잡혔다. 바야흐로 군인정신을 본격적으로 시험받을 시간이었다.
“뒤를 부탁해, 블랙!”
“맡겨 주세요!”
휘즈가 검을 고쳐잡고 그대로 360도를 돌며 검을 그어갔다. 이번엔 진심으로 휘둘렀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을 덮쳤다. 병사들이 수수깡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리면서 포프와 휘즈를 중심으로 약간의 공간이 생겨났다. 휘즈가 병사들을 견제하는 사이 포프는 호킹스를 말 아래로 끌어내리며 함께 땅에 뒹굴었다. 검을 빼들려는 호킹스와 이를 제지하려는 포프가 바닥을 구르며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호킹스에게 쓰려던 주문이 빗나간 건지 불과 바람의 주문들이 사방으로 빗나가며 착탄해 연기와 먼지를 피워올렸다. 일반 병사들은 감히 그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고 발만 굴렀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을 구해라!”
“먼저 저 연기를 걷어내라! 메이지를 불러!”
“이 검사가 너무 강합니다! 이대로는!”
아까까지 7만의 병력들을 지휘하던 사령부가 지금은 일개 소대보다도 못할 만큼 우왕좌왕했다. 시야가 가린 데다 여기저기서 검사의 검이 번쩍이고 있어서 도무지 혼란을 수습할 방도가 없다. 가까스로 소식을 들은 메이지들이 달려와 바람의 마법으로 연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진화하고 시야를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병사들이 침착을 되찾았다.
그들의 중심에는,
쓰러져 있는 메이지와
그를 뭉개고 이마의 땀을 닦는 사령관의 모습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참모들이 달려오자 사령관은 거친 숨을 내쉬며 힘겹게 말했다.
“검사는…… 도망간 것 같다. 내가 이 놈을 제압하자 급히……떠나더군.”
“추격할까요?”
“아냐. 추격하다 희생이 늘어날 수 있어……전군, 이 자리에 멈춰서 피해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 녀석을 단단히 묶어 가둬 놓아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손발을 묶고 입도 막아 자루에 씌워놓아라. 그 정도쯤 하면 반항은 하지 못하겠지.”
“과연 사령관님이십니다. 저 메이지를 이렇게 직접 때려잡으시다니.”
참모들은 진정한 기사의 모습을 보여준 사령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 정도면 과연 알비온 제일의 기사이다, 이걸로 병사들의 사기가 한층 오를 것이다, 같은 아부성 말들을 그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것이 끝나자 참모들은 전군 정지의 명을 하달했다.
“전군 정지!”
명령이 전방으로 하달되어가고,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영문을 모른 채 멈춰섰다. 전방에서 전령들이 달려와 피해상황을 보고해 왔다. 피해는 아주 큰 편은 아니었지만 병사들이 입은 정신적 충격이 컸다. 또 무기나 지팡이를 격파당해 당장 전투불능이 된 자들도 꽤 많았다. 아직 ‘허무의 마녀’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강한 녀석들이 나온다니 큰일이라는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자연히 병사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참모들은 뒤바뀐 상황에 당혹스러워했다. 아까까지 사기가 충천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의도적으로 사령관의 무용을 이리저리 알렸지만 그런다고 이들의 사기가 회복되지 않았다. 저쪽은 아직 최후의 카드를 보이지도 않았다는 게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잠시의 점검을 마친 지휘관들이 행군 준비를 명했지만 병사들의 움직임은 굼떴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한참 고뇌에 싸여 있다 군 정비 시간을 더 늘리기로 했다. 이대로 진군하면 자칫 탈영자나 공황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아까 전투에 참여했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로 별동대를 내보내자고 누군가가 건의했지만 그것도 기각되었다. 섣부른 병력 분산은 연합군에게 각개격파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사기가 떨어져 도주하려는 연합군에게 그 정도의 작전 의지가 과연 있을 것인가 하고 참모들은 의심하고 건의했지만 장군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두 시간 동안 이곳에서 쉬기로 했다.
“만약 그 검사가 메이지를 되찾기 위해 온다면 어떻게 할까요?”
누가 묻자 호킹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검을 슬쩍 들어보였다. 그의 사나운 미소를 보고 참모들은 신이 나 환호했다. 병사들이 어찌되든, 일단 자신들은 사령관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는 걸까. 아니면 검사가 오는 순간 사령관을 그리로 내보낼 생각인 걸까. 젊은 참모들이 간과한 사실을 떠올린 늙은 참모 하나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경계를 강화하고 불의의 습격에 충분히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아까는 그야말로 불의의 습격이었지만, 이번에 그 검사가 다시 온다면 그때야말로 7만 명의 응집된 힘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 모두는 알지 못했다.
사령관의 망토 안에 숨겨진 검은 지팡이와, 검집 안에서 빛나는 백은의 칼날을.
-주문설명-
모샤스 : 요마주교 자보에라의 주특기이지만 용사 아방 등도 사용가능하다. 따라서 포프도 사용가능.
자신, 타인 모두 변신 가능하다. 단, 타인의 경우 무력화시킨 후에야 사용가능.
자신에게 사용할 경우 숙련된 사용자라면 변신한 상대의 능력을 따라할 수 있으며, 그 시간은 주문의
숙련도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