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6화 전우, 대지에 발 디디다
“이거 이거…… 참 타이밍 한 번 잘 맞추는 주인님이네.”
포프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앞에는 새까만 거울 같은 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것이 ‘문’이라는 것, 그리고 저 너머에 그리운 느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금방 분석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파사의 동굴 최심부까지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레벨업을 한 것도 같다. 중간중간 짜증날 때면 바닥을 날려버리고 내려왔으니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겠다.
목표였던 신의 눈물도 방금 손에 넣었으니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다. 신의 눈물을 그가 익히 알던 ‘고메’로 바꾼다는 건 이제 의미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면, 신의 눈물은 금방 소진되어 버릴 것이 뻔했으므로.
준비는 이제 끝났다. 그렇지만 저쪽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을 마무리짓고 돌아오는 거다. 그 앞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세웠다면 이젠 행동할 뿐이다.
“가자, 블랙! 델프!”
포프는 망설임없이 검은 거울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로의 대모험 제16화
-전우, 대지에 발 디디다-
루이즈는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어두운 방에는 그녀 혼자만 있었다. 어둡다는 표현이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은, 창 너머로 일렁이는 불꽃의 빛이 방의 절반 가까이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비명은 바로 직전까지 아군이었던 자들의 것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는 루이즈의 호위를 맡았던 병사들의 것이었다.
루이즈는 초점이 잡히지 않은 멍한 눈동자를 한 채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등 뒤에는 차가운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알비온이 공중 전함의 대부대로 트리스테인에 쳐들어왔을 때, 하르케게니아의 기적 같은 승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앙리엣타 공주와 웨일즈 왕자는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그 자신들도 승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트리스테인의 군사 배치 등의 고급 정보들이 왈드에 의해 알비온에 넘어갔기 때문에 국경은 순식간에 뚫려 버렸다.
전황을 뒤집은 것은 트리스테인의 비밀 병기나 다른 나라의 구원군이 아니었다. 이미 게르마니아 같은 나라에서는 트리스테인의 멸망을 기정 사실로 보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으니까. 경계지대였던 타르브가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전장에서 산화할 각오로 웨일즈 왕자는 몇 안 되는 전함들을 총동원해 나아갔다. 막강한 알비온 함대의 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때 동행을 요청한 것이 루이즈였다. 포프가 어디론가 사라진 후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미 그녀의 기개를 본 바 있던 그는 그녀의 요청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은 두 함대가 조우했을 때 일어났다. 막 포의 사정거리 안에 접근하려는 찰나, 루이즈는 시조의 기도서를 든 채 무심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알비온 함대가 있는 쪽에서 눈부신 섬광이 일어났다. 섬광은 알비온이 자랑하는 초거대 기함인 렉싱턴을 감싸고,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점점 커지며 다른 함선들까지 집어삼켰다. 빛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맥없이 추락하는 ‘함선이었던 것들’과 ‘사람이었던 것들’ 뿐이었다. 그 정도의 위업을 달성하고도 루이즈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 없이, ‘난 허무의 사용자니까’ 라고만 중얼거렸다.
승리의 여파는 대단했다. 알비온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전함부대가 괴멸해버리고, 그를 뒤따르던 지상부대도 자신들이 멸망시킨 그 타르브에서 사기가 오른 트리스테인 군에 의해 전멸했다. 메이지가 몇 되지 않는다는 신생 알비온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그 결과 게르마니아 등이 재빠르게 트리스테인에 연합을 제의했고, 그 연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수만의 대군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막 패배를 당한 알비온은 몇 차례의 간헐적인 반발만 해 왔을 뿐 주병력은 본국에 꽁꽁 숨어 버렸다. 연합군은 승승장구, 알비온의 코앞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 와중에 루이즈는 자폐증에 빠진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다. 허무의 사용자라는 존재 자체가 연합군에게 큰 상징이 되기 때문에, 마자리니 추기경은 그녀를 마차에 태워 전장을 따라다니게 했다. ‘승리를 위해서’ 란 마자리니의 설득에 앙리엣타와 웨일즈는 마지못해 동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지팡이를 휘둘러 적의 병력을 지워냈다. ‘작업’이 끝날 때마다 방에 처박히고, 마차에 타고, 또 ‘작업’을 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모든 것이, 모든 사물이, 모든 감정이 그저 허무할 뿐. 루이즈에게 있어 모든 것은 허무 그 자체였다. 허무를 사용해 수백 명도 넘는 사람들을 지웠다는 게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그녀의 자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포프가 사라져 비틀려져 버린 감정이 만들어낸 폭주. 그녀는 그렇게 원하던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약간의 기쁨조차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허무에 싱겁게 먹혀버렸으므로.
포프는 날 놔두고 죽은 걸까.
그렇다면,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브리밀도 기도서 안에 엘프에 맞서 싸우라고 말했으니까.
이기고 또 이겨서 엘프들의 앞까지 나아가, 축적한 허무의 마법을 내쏜다 -
이것이 루이즈가 허무 속에서도 끝까지 지킨 마지막 집착이었다.
그러나 한 번 기울었던 운명의 저울은 평형을 맞추기 위해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알비온을 코앞에 두고 주둔해 있던 연합군 쪽에 갑자기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원인도, 지도자도 알 수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자들의 습격 때문에 사령부는 삽시간에 전멸하고, 중간 계급의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군을 재편해 반란군과 맞서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란군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연합군은 맥없이 뒤로 밀려나며 어느새 루이즈가 있는 숙소 근처까지 다다랐다.
루이즈는 허리춤의 지팡이를 빼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면 분명 근처에 있는 작자들을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힘은 충분하다. 재수없는 아군 몇몇이 쓸려버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재수가 없는 것 뿐이다. 자아, 휘두르자. 그러면 다시 조용해질 거야 - 그녀는 그저 혼자만의 고독을, 고요를 되찾고 싶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총탄이 날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총알에 맞고 죽는다면 자신이 재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이 주문을 완성할 때까지 살아있다면 저들이 재수가 없는 거다. 어느 쪽이 되었든 조용함을 되찾을 수 있다. 루이즈의 작은 입이 빠르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허무에 익숙해질수록 이 긴 주문을 빠르게 영창할 수 있게 되었다. 지팡이가 휘둘러지자 거리에 잠시 섬광이 번쩍이고 고요가 찾아왔다.
“성녀님! 성녀님이다!”
“어서 거기서 내려오세요! 후퇴해야 합니다!”
요행히 아군은 맞지 않은 모양이다. 살아남은 몇몇이 거리에서 외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방 구석에 가 쪼그려앉았다. 모두, 이대로 날 놔뒀으면 좋겠다고 루이즈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창밖의 소리는 곧 비명으로 바뀌고, 짧은 정적은 곧 수많은 발소리들로 깨졌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루이즈는 그 발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발소리는 문앞에서 멈추고, 곧이어 문이 거센 충격에 흔들렸다.
루이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포프.”
그녀는 언젠가부터 포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무해졌지만, 포프를 떠올릴 때면 그 허무함이 잠시나마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포프.”
네가 사라져서 내가 이렇게 변한 걸까. 얼마 전까지 네게 내 마법을 보여주겠다고 실컷 들떴던 내가, 지금은 수많은 목숨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워내는 지우개가 되어버렸다.
“포프.”
미약하게나마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몽롱함이 남은 머리가 저 문이 열리기 전에 주문을 주창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다시 지팡이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주창하는 것은 허무의 주문이 아니었다.
-이세계의 어딘가에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고 강한 나의 사역마여……
잔혹한 진실을 재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실피드에게 이야기를 들은 직후 재소환을 시도한 적 있었다. 하지만 거울 저편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정신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만한 타바사와 큐르케가 중상으로 꼼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손쓸 도리조차 없을 만큼 허무에 침식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는……
과거의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여기에 오라.
이제 곧, 포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얼빠진 소리를 지껄이리라.
그리고 자신은 포프에게 자신이야말로 네 주인님이라고 다시 한 번 선언해주면 되는 것이다.
문이 부서지고 병사들이 뛰쳐들어오는 순간에도, 그녀는 시선을 게이트에 고정시킨 채 힘없이 미소짓고 있었다.
“주인님! 포프 귀환…… 하자마자 이오라!”
태평하게 게이트를 통과해 루이즈와 다시 마주쳤던 포프는 다음 순간 급히 주문을 날렸다. 루이즈의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휘두르던 병사가 이오라에 맞고 온몸이 그을려 나가떨어졌다. 위력조절할 틈이 없었던지라 사과하는 의미로 햐다르코로 가볍게 얼려준 후 주위를 바라보았다. 루이즈의 방이 아니라 여관 같은 곳인데, 어째선지 병사들이 멍한 얼굴로 이리 다가오고 있었다.
“루이즈! 이 녀석들 뭐야?”
일단 사정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루이즈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포프의 등에 매달렸다.
“에헤헤……포프, 잘 들어. 난 네 주인님이야. 넌 내 사역마고.”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저 녀석들 뭐냐니까!”
“왜 화내는 거야……인간을 소환한 메이지가 그렇게 이상해?”
순식간에 어조가 희미해지더니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그렇다면 대화는 나중에 시도하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낫겠다. 일단 여기 있는 자들을 쓸어버린 후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보자. 대강 상황을 정리한 후 포프는 블랙 로드를 꺼내들어 그대로 휘둘렀다. 강한 타격력이 주입된 지팡이는 선두에 선 남자를 강타하더니 그 뒤에 있던 자들까지 문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수 명의 병사가 복도에 나뒹굴자 아래층에서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루이즈! 무사해?”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인데? 잠깐 생각하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요란하게 계단을 올라왔다. 포프가 그를 알아본 것과 그가 포프의 존재를 눈치챈 건 거의 동시였다.
“기슈?”
“포프!”
기슈는 이를 으드득 갈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포프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인사라도 할 줄 알고 방심했던지라 포프는 낙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후, 기슈는 재와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너! 대체 어디 가 있었던 거냐? 주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네 녀석 때문에 루이즈가 저 지경이 되었잖아!”
“뭐?”
코피가 주륵 흘러나와 그걸 닦으려 했지만, 기슈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포프를 흔들어댔다.
“그런 모르는 얼굴 따위 하지 마라. 역겨워. 몽모랑시의 편지를 통해 대강의 사정은 들었어. 루이즈를 놔두고 멋대로 나가 행방불명되었다지? 사역마의 행방불명이란 게 주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이나 해 본 거냐?”
“시끄러! 나도 좋아서 떨어져있던 게 아니라고!”
환영파티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루이즈는 헤롱대는데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기슈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억울했지만 기슈의 반응이 심상치 않으니 당장 따질 순 없었다. 지금 와서 기슈에게 유감이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 솔직히 유감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이럴 때 티격거릴 순 없다. 무엇보다 아래층에서 또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간다! 그대로 잡고 있어!”
포프는 천장에 이오라를 연속해서 날렸다. 천장 한편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이 꼭대기층이었던 모양이다. 기슈와 루이즈가 자신에게 접촉한 것을 확인한 후 토베루라로 지붕 위로 날아갔다. 기슈가 갑작스런 이동에 놀란 틈에 포프는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말했다.
“피차 따지는 건 나중에 해. 지금 무슨 상황이야? 난 잠깐 이 세계를 벗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하나도 몰라.”
“원래 세계로? 네가 아무리 특별한 사역마라지만, 그런 것도 가능한가?”
“우연히 사고가 있어서 그랬어.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어서 상황을 설명해 줘.”
조금 전까지 들끓었던 화를 애써 억누르며 기슈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포프와의 결투 이후 쭉 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터라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얘기를 마치고 목이 마른지 허리춤의 수통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 할 때 느닷없이 포프가 그의 손을 쳤다. 수통이 땅에 떨어져 뒹굴고,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기슈는 천천히 목을 돌려 포프를 노려보았다.
“……시비 건 거냐?”
“바보냐, 너? 이런 수상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겠단 거야?”
“수상한 물?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이건 그냥 군에 비치된 물통에서 퍼온 물에 불과한데.”
포프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가볍게 혀에 대고 이내 퉤 뱉었다.
-예리해졌는걸, 파트너. 동굴을 통과한 효과인가?
“아무래도.”
아방이 지하 150층에서 익힌 파사의 비법을 익힌 뒤로, 안 그래도 예민했던 감각이 더욱 예리해졌다. 이제는 마력의 흐름뿐 아니라 마력이 깃든 물건에 대해서도 금방 감지해낼 정도이다. 그래서 기슈가 물을 꺼내들었을 때 거기에 독과 맞먹는 수상한 마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맛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봐. 이 물을 여기 있는 군인들 모두가 마셨다고?”
“……? 설마 여기 독이라도 든 건가? 그래서 저들이 정신이 나간 거고?”
“정확한 추측이야.”
포프가 단언하자 기슈에게 문득 스친 생각이 있었다. 기슈가 루이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상대했던 반란군들은 하나같이 이지가 불안정한 자들 뿐이었다. 그걸 떠올려보자 이 반란이 어떻게 일어났는지가 순식간에 이해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거의 동시에 뼈아프게 느껴졌다.
포프에게 진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힘이 정의란 자신의 정의가 산산조각나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훌륭한 가문과 가족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자부심과 허영으로 무장했건만 난데없는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올린 것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자신을 지키고 감싸주던 갑옷이 사라진 이상 새로운 것을 몸에 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메이지가 선호하지 않는 군대로 들어갔고, 조금씩이나마 전공을 쌓아올렸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기억나는 처참한 패배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승리하고 또 승리했다. 그러면서 상실했던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시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게 다시 쌓아온 것이 다시 한 번 잔인하게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불꽃이 여기저기 피어오르고, 시내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저 어둠 속에서 무의미하게 싸우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포프는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헥사곤 메이지라는 사실이 기슈에게 조금 늦게 떠올랐다. 아니, 인식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겐 방법이 없나?”
“……”
포프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것이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기슈는 자기도 모르게 포프의 멱살을 다시 움켜쥐었다.
“말해봐! 헥사곤 메이지인 네겐 뭔가 방법이 있지 않나!”
“포프를 괴롭히지 마!”
포프의 등에 매달려 있던 루이즈가 튀어나와 기슈를 떠밀었다. 여자아이의, 그것도 정상이 아닌 상태의 소녀의 힘이란 약하기 그지없었다. 기슈는 잠시 휘청했을 뿐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긍지로 가득했던 소녀. 그 정신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던 루이즈가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자신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먼 곳을 보는 듯한 공허한 눈을 한 채 두 주먹을 들어 기슈의 가슴팍을 콩콩 내리쳤다.
“포프는 평민이지만 내 사역마야. 포프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 전까지는 내가 주인님이라구. 그러니 절대 포프에게 해를 끼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더듬더듬 얘기하는 루이즈의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아이가 자신의 강아지를 꼭 끌어안고 지키려 드는 모습 같았다. 포프는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가 끌어안았다.
“미안. 잠깐 쉬어, 루이즈.”
라리호마의 빛이 루이즈에게 스며들자 루이즈는 의식을 잃고 포프의 품에 안겼다. 그녀를 땅에 눕힌 뒤 포프는 델프링거를 들어 바닥에 기묘한 그림을 그렸다. 둥근 원 안에 다섯 개의 뿔을 가진 별이 들어있는 형태였다. 그녀를 그 안으로 눕힌 후 주문을 외우자 원을 둘러싸고 빛의 기둥이 솟아났다. 눈부시지만 기분좋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하얀 빛이었다.
“이건……?”
기슈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포프는 칼로 마법진을 가리켰다.
“지금 저것과 똑같은 걸 그려야 해. 이 도시 전체에.”
“말도 안 되는……”
기슈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하려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왈큐레는 모두 7기. 7기를 동시에 운용해 섬세하게 조작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포프가 그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 팡팡 두드렸다.
“이건 나도 할 수 없어.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믿고 맡길게. 저 마법진이 완성되어야 내가 수를 쓸 수 있어.”
‘포프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에 기슈의 마음이 급격하게 동했다. 그는 일단 자신의 마법력을 점검해 보았다. 오는 도중 상당한 전투를 치른 터라 그리 여유있지 않았다. 아마 이런 대작업을 진행한다면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지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잖아. 이젠 도망칠 구석도 없으니.”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물러남은 한 번으로 족하다. 단 한 번의 굴욕만으로도 죽고 싶을 정도의 비참함을 실컷 맛보았다. 더는 그렇게 될까보냐! 기슈는 왈큐레를 소환했다. 주인을 지키는 청동의 처녀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에 비해 더욱 향상된 솜씨였다. 포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좋아. 너도 사내라면 일생에 한 번쯤은 진짜 영웅이 되어보라구!”
“그 말, 잊지 마라!”
그렇게도 응어리가 남아있었던 상대에게 칭찬을 들으니, 그 응어리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기슈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왈큐레를 조종했다. 청동의 처녀들은 무기를 땅에 박고 금을 그으며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기슈가 그 쪽에 집중한 사이 포프는 루이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루이즈에게 건 것은 파사의 주문인 아포카토르였다. 아까 그 물을 마시고 이렇게 된 거라면 파사주문으로 치유 가능했을 것이다. 시험삼아 물을 몇 방울 손으로 찍어 뿌려보니 예상대로 빛에 닿자마자 치지직 하며 증발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험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호이미와 키어리를 걸어보았지만 루이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포프를 점점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루이즈?’
이런 주문들이 효과가 없다면 루이즈의 정신 그 자체가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주문 등에 의한 외부적 간섭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최소한 포프가 살펴보았을 땐 외부에서 개입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함성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려왔다. 워낙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서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집중해서 들으니 간신히 구별할 수 있었다.
“허무의 성녀를 잡아라!”
“앙리엣타를 죽여라!”
허무의 성녀?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포프의 눈앞에 누워 있는 루이즈뿐이다. 그는 잠시 루이즈를 빤히 바라보다 기슈에게 물었다.
“이봐. 루이즈는 마법을 쓰기 시작한 거냐?”
“그래! 듣기론 허무의 메이지라고 하더군!”
“그럼 마법을 얼마나 써 댔어?”
“집중해야 하니까 자꾸 말 시키지 마. 알비온의 함대를 지우고, 이곳까지 진격하는 동안 하루에 두어 차례씩 나서 적군을 지웠다고 하던데?”
“그거다!”
이런 망할, 하고 포프는 속으로 덧붙였다. 죠제프와의 싸움을 통해 허무의 주문이 메이지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그것을 루이즈에게 적용해 보면 의문은 금방 풀린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힘 조절이고 뭐고 없이 빵빵 날려댔다는 소리인데, 주문을 막 배운 초보자가 위력조절을 하지 못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차라리 주문의 출력이 낮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위력이 큰 주문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시전자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포프는 안타깝게 루이즈를 바라보며 품 안의 신의 눈물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이걸 써야 하나? 이걸 쓴다면 루이즈를 확실히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소원의 강도에 따라 줄어드는 신의 눈물이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야 한다. 원래 세계에서 쓸 양도 빠듯한데 이곳에서 벌써 낭비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루이즈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잘라낼 수 없는 소녀이다. 난감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갈팡질팡했다.
그때였다. 시끄러운 함성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뚫고 음산한 피리 소리가 퍼졌다. 솜씨 여부를 떠나 듣는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묘한 음색은 포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이 소리는……”
아래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지만 포프의 움직임은 딱 멈추었다. 그는 고개만 살짝 돌려 옆을 보았다. 옆 건물의 지붕에 커다란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
그 그림자에서 마족 소녀가 나와 인사했다.
포프는 하, 하고 가볍게 실소하더니 블랙 로드와 델프링거를 동시에 뽑아들었다.
“오랜만이라서 좋냐? 이쪽은 심란해 죽겠다, 임마! 또 싸우러 온 거냐?”
“아니. 주인 얘기 전하러.”
“죠제프의 얘기를?”
포프는 턱을 까딱해 일단 이야기를 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소녀는 책을 읽듯 평탄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허무’를 치유해 주고 싶으면 7만 대군을 넘어선 뒤 내게 와라.”
“……………………………………………………아, 그러셔? 무슨 수로?”
“비보인 엔드 발리의 반지. 어떤 것도 치유 가능. 주인도 사용하는 중.”
뭔가 대단한 아이템인 것 같다. 죠제프가 사용한다니 일단 믿어도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메를르도 아니고, 이쪽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킬번을 다시 바라본 순간 그것이 어리석은 의문이란 걸 깨달았다. 마왕군에서도 잠입과 암살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는 녀석이다. 아마 죠제프의 명으로 그동안 루이즈를 관찰해온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저쪽 세상에 다녀왔다는 것까진 몰랐겠지, 라고 생각하자 그나마 위안이 된다. 혹시나 해서 킬번에게 물어보았다.
“루라로 병사들 무시하고 그리 가면 어떻게 될까?”
“그럼 꽁꽁 숨어서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 생각은 기각. 어차피 그가 루라로 날아가 죠제프를 때려잡는다 한들, 그사이 7만 대군에게 아군이 짓밟히면 결국 이쪽이 손해보는 장사가 된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원래 물어보려던 질문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와 함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마족 소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고 검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한쪽 눈꺼풀을 내리며 혀를 쏙 내밀었다. 커다란 금빛 눈동자가 환히 드러나는 갑작스런 메롱~ 공격에 넋이 나간 포프는 무심코 시선을 돌리고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소녀의 머리 위에서 킬번이 똑같은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같은 동작이라도 저런 인형 같은 소녀와 죽음의 인형이 하는 건 질적으로 틀리다. 아니, 삼계의 차원에서라도 저런 건 있어선 안 된다고 포프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잠시 후 손가락을 내리고 원래 표정으로 돌아간 소녀가 말했다.
“주인 명령. 그 말을 하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뜻인가?”
“아주 강력한 거부표시……랄까.”
포프가 간신히 대답하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포프의 말에 흔들리지 않은 걸 보면 죠제프가 또 뭔가를 말해 구워삶아 놓은 것 같다. 어차피 지금 그녀를 회유할 짬은 없었다.
기슈는 왈큐레들의 제어에 집중하느라 킬번이 왔다 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가 마족 소녀의 귀를 봤다면 엘프라고 난리를 쳤겠지. 다행히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완료하고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다 그렸다!”
“벌써? 예전의 왈큐레의 속도는……”
“날 예전의 나로 보지 마라!”
마침 달이 구름 안으로 들어가, 기슈가 모처럼 으쓱거리는 모습은 눈에 자세히 들어오지 않았다. 어쩐지 기슈가 잘난 척을 하면 본능 차원에서 울컥하게 되므로 지금은 다행인 일이다. 곧이어 그가 ‘아아, 베르단데. 네가 내 옆에 있다면……’하는 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포프는 정신을 집중했다.
“으으으으읍!”
스승 아방이 했던 것처럼 온몸에 힘을 집중시킨 후 마법진과 마력을 연계시킨다. 방금 전까지 왈큐레들이 그어놓은 낙서에 불과했던 마법진이 포프의 마력을 주입받아 선 전체에서 빛을 발하고, 나아가 그 빛을 대지 위로 퍼뜨리기 시작한다. 마치 번개가 떨어진 것처럼 선을 타고 방전이 흐른다. 마력이 잘 흐른 걸 보면 기슈가 정확하게 그려놓은 건 확실하다. 아마 포프 자신이 그리려면 이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했겠지. 일단 기슈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는 주문을 주창했다.
“사악한 힘이여! 빛 앞에서 물러갈지어다!
마호카토르!”
주문이 완성되자 마법진 전체의 표면에서 빛이 발생하기 시작하더니 눈부신 빛기둥을 생성했다. 빛기둥은 구름 저편까지 닿을 듯 치솟아올랐다. 마법진 안에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고 무기를 떨어뜨리며 나뒹굴었다. 그렇게 나뒹구는 사람들의 태반 가까이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검은 증기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빛기둥이 사라졌다. 밤하늘은 원래대로 까만 색이었고, 두 개의 달은 은은한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잠시 저 달들이 해로 변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자들은 상대방을 노려보며 다시 무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병장기를 부딪치는 소리는 없었다.
“우리가 왜 싸우고 있었지?”
“그러게 말야. 저녁밥을 먹은 것까진 기억에 남는데……”
“잠깐! 네 녀석들, 그거 진담이야?”
“모르겠어. 왠지 ‘그래야만 한다’란 느낌이 들어 무기를 들었는데,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아.”
병사들이 불안하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지붕 위로 전달되었다. 대주문을 주창한 여파 때문에 포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슈를 향해 히죽 웃어 주었다.
“어때? 네가 그린 마법진의 효과야. 대단하지?”
“대단해……오오, 이것이 이 몸이 그린 아름다운 마법진의 효과란 말이지!”
군에 들어와 조금 쿨해진 것 같긴 했지만 그 본성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꼭 보기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의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되돌아갈 일상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기슈는 재수없고 성격도 포프와 영 맞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돌아갈 자리 정도는 지켜주고 싶었다. 게다가 그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소녀까지 있는 것이다. 자기 연애는 꽝인 주제에 남의 연애는 잘 챙겨주고 싶은 성격이라 늘 손해막심이었다.
기슈가 자신의 세계에 반쯤 발을 걸친 사이 포프는 자신의 현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일단 마법력은 이제 절반. 파사의 동굴에서 제대로 회복하지도 않고 빠져나온 데다가 이 정도의 대단위 파사주문을 쓰는 바람에 마력이 격감해 있었다. 과거 아방처럼 깃털을 가지고 있다면 회복에 썼겠지만, 휘성석이란 물건 자체가 아방의 집안에만 제조법이 전해내려오는 것이라 포프로서도 만들 수 없었다. 몸 상태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 검을 들고 날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마법사이고, 아무리 룬의 보정으로 신체능력이 향상되었다고 해도 아방류 도살법 중 대지참과 해파참만 겨우 쓸 수 있는 빈약한 레벨이다.
즉 지금 상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7만 대군과 맞서싸우기는 -
“충분해.”
포프는 결연하게 내뱉었다.
“기슈. 알비온 군이 쳐들어온다면 어느 방향이지?”
“아마도 저 방향일 거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그가 손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티 오브 사우스고타의 남서쪽에 평야가 있어. 적은 그 평야를 타고 이쪽으로 들어올 거다. 혹시 우리 군의 이상을 눈치채고 진군을 시작했다면, 내일 저녁 전에 이곳까지 들이닥칠 거야.”
“알았어.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루이즈를 부탁하지. 너흰 여기서 후퇴하겠지? 루이즈 잘 챙겨!”
포프는 기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주문을 쓰지 않았지만 룬의 힘에 의해 강화된 육체는 착지의 충격을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포프는 그 길로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말 한 마리를 잡아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등을 향해 기슈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무슨 속셈이야! 설마 너 혼자서 그 병사들을 다 막겠다는 소리야? 그만둬!”
“여차하면 도망칠 거니 걱정마!”
단 한 마디로 일축한 후 그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잘 길든 말이라 승마에 다소 서툰 포프로서도 편하게 달릴 수 있었다. 비상주문으로 날아가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마법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지금은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한번쯤 그를 붙잡고 행선지를 물어보았을 병사들은 막 혼란에서 깨어난 참이라 그를 막지 못했다.
한 이삼십분 정도 달렸을 무렵, 그의 앞에 드디어 막아서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마법진 밖에 있던 자들인가?”
꽤 많은 수의 군인들이 있었던 만큼, 당연히 도시 밖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합군이 주둔하던 도시인 시티 오브 사우스고타가 워낙 큰 규모라 밖의 병사들은 정찰을 위해 세워둔 보초병력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보초의 수만 해도 물경 천에 다다르고 있었다.
포프는 비상주문으로 날아올라 주위를 확인해보았다. 아무래도 회복되지 않은 자들은 여기의 병력이 전부인 것 같았다. 무시하고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었다. 마호카토르 같은 파사의 마법진은 부정한 것 일체를 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 또한 저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말해 회복받을 길이 없다는 소리이다. 포프가 이들을 무시한다면 이들은 알비온 군이 도착할 때까지 마법진 근처를 방황하다 모두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아~ 정말! 블랙의 데뷔를 이런 곳에서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포프는 아플 정도로 머리를 득득 긁었다. 그러는 사이에 눈이 풀린 병사들이 포프를 둥글게 포위하고 다가왔다. 하지만 소년은 번쩍이는 창검에도 전혀 주눅드는 기색이 없이 말에서 뛰어내린 후 지팡이와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휘두르는 대신 동시에 땅에 꽂았다. 자진해서 무기를 내려놓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는지 선두에 선 병사들이 잠시 전진을 멈추었다.
“자자, 여러분. 주목해주세요~ 여러분은 지금, 마계 제일의 명공 롱베르크 씨의 최신 작품을 막 감상하려 하고 있습니다~”
-난 그 녀석이 만든 게 아냐! 육천 년의 역사를 가진 몸이다!
“시끄러. 태클 거는 건 사양할게★”
지팡이와 검이 동시에 진동하며 땅 아래로 가라앉아갔다. 검은 맘에 들지 않는지 큰 소리로 떠들어댔지만 지팡이와 마찬가지로 묻혀 버렸다. 자기 무기를 파괴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게다가 이지가 없는 중에도 ‘지팡이가 없는 메이지는 쓰레기 대용품’이란 인식이 있어 은연 중에 안심한 탓도 있었다.
“어때요? 신기하죠?
하지만 진짜 신기한 건 지금부터!”
‘지팡이를 들지 않은 메이지’가 분명할 터인 소년이 느닷없이 불의 공을 사방에 흩뿌렸다. 전혀 마법을 예상하지 못했던 선두의 병사들이 와르르 나가떨어지며 뒷열에까지 혼란을 끼쳤다. 이지가 상실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판단력의 문제일 뿐, 전투기술 등은 평소에 익혀둔 방식 그대로이다. 차라리 마법을 무시하고 육탄으로 돌격해 체중으로 찍어누른다면 그들에게 보다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정석대로 싸우기 위해 대열을 갖춰야 했다. 그 찰나의 소란 때문에 병사들의 이목은 온통 포프에게로 집중되었다.
“자, 신기하죠? 제가 어떻게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썼을까요? 여기 그 비법을 공개합니다! 짠짠★ 은 훼이크고, 바기마!”
포프를 중심으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고 있어 그것은 사방으로 퍼지며 반란군의 오감을 마비시켰다. 게다가 기왕 하는 김에 이오나 햐드 등의 가벼운 주문을 병사들 틈 사이로 찔러넣어 혼란을 한층 가중시키는 통에, 병사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거대한 원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포프 님도 참! 그냥 변신시키면 될 텐데. 부끄럽게 그런 연출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이걸 그리려면 저 녀석들 사이를 빠져나가야 했잖나. 그것보단 파트너가 주의를 집중시키고 그 사이에 네가 땅을 통해 빠져나오는 게 낫지.
“하지만 그 덕분에 흙투성이가 되었다구요! 포프 님의 앞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이는 자리인데!”
-그럼 파트너한테 잘 닦아달라고 해. 저 녀석, 보기보다 제법 하는 녀석이야. 요즘도 내 나사를 조여줄 때의 그 짜릿한 기분이란……
“흥이다! 이제 그건 제가 해 줄 거에요! 누가 포프 님에게 그런 거 시킬까 봐!”
-켁! 그건 내 유일한 즐거움이란 말이다!
한참 소란스러운 전장의 바깥에서, 어둠에 몸을 숨긴 여성의 그림자가 은빛의 검을 바닥에 끌며 대지를 질주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