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19화 허무의 종말
타바사는 지팡이를 살짝 흔들었다. 막 도착한 포프가 그쪽을 주목했다.
“질문. 포프는 어떻게 내가 왕족이란 걸 알았지?”
“뭐? 왕족?”
기슈가 놀라 외쳤지만 타바사는 그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포프를 계속 바라보았다. 타바사가 갈리아의 왕족이란 건 원래 큐르케에게만 알려준 사실이다. 그런데 포프는 블랙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그걸 이용해 타바사와 동료들을 모으게 했다. 포프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걸 모르는 타바사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드래고람으로 변신해 그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건 귀찮은 일이다. 포프는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네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알게 되었어. 사정상 날 밝힐 수가 없어서 어머니의 기억을 약간 지웠었지. 그건 사과할게.”
타바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집에 돌아갔던 날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그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계속 석연치 않았었다. 그녀의 병은 강력한 독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자연적으로 나을 수 없었고, 실제로도 전혀 낫는 기미가 없었다. 그랬던 것이 하룻밤만에 나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이 지금 드러났다. 사실 포프는 그녀에게 들은 게 아니라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었지만 이 정도 거짓은 충분히 허용될 법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바사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땅에 대었다.
“그건 내가 평생 감사해야 할 정도로 큰 은혜. 무엇이든 원하는 걸 말해줘.”
왕족이면서도 은혜를 갚기 위해 서슴없이 몸을 굽힌다. 앙리엣타나 웨일즈, 레오나 등과는 또 다른 태도이다. 그리고 지금의 포프에겐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한 열쇠이기도 했다.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냉막한 표정 속에 감추어진 따뜻함에 포프는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래서 포프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갈리아의 왕이 되어 줘.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줘.“
제로의 대모험 제19화
-허무의 종말-
갈리아 왕궁에 돌연 굉음이 일어났다. 마치 운석이라도 추락한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일어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궁 중심부였기 때문에, 외곽을 수비하던 병사들은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다.
큐르케가 지팡이를 흔들어 플레임 볼을 거듭 내쏘았다. 이곳에 있는 몇 안 되는 수비병력은 갈리아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메이지는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지들이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겠지만, 미열의 불길에 휩싸여 순식간에 쓰러져 갔다. 쓰러진 자들에게 몽모랑시가 비약을 던지고 주문을 외워 조금씩 회복시켜 주었다.
“이런 전투는 처음이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꼴 아냐?”
큐르케는 기가 찬다는 듯 포프에게 말했다. 그녀는 얼핏 보면 느슨해 보이지만, 결코 무른 성격이 아니다. 전투에 임하게 되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적을 말살할 수 있다. 그녀가 직접 목숨을 끊은 적만 해도 두 자릿수이고, 이젠 살인에 별다른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왕 이곳에 온 김에 시간끌지 말고 단숨에 죠제프에게 쳐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좀 부루퉁해 있자 포프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미안. 하지만 내가 싸우는 방식을 이해해 줘. 그리고 이 싸움에서 저들은 적이 아니야. 타바사가 죠제프를 물리친 순간 무릎을 꿇고 타바사의 신하가 될 사람들이니까.”
죠제프의 기행 때문에 병사들이 질려 있다는 건 지난번에 확인했다. 큐르케와 타바사 등을 통해 알아보니 그 나라의 백성들 거의 모두가 왕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왕이 유능한 동생을 독살하고 그 자리를 빼앗았다는 게 민간에까지 널리 알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정설이라기보단 소문 정도였지만, 둘이 일치해 버리니 빼도박도 못하게 된 상황이다. 게다가 ‘돌아온 공주님’이란 이미지는 백성들이 열광할 요소이기도 하다. 그 이미지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전투의 희생자는 최소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신에게 거듭 이해를 구하는 포프의 모습에서, 헥사곤 메이지의 풍모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여기 있는 일행 모두는 그의 무서움을 새삼 다시 느끼고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로의 순간이동이란 건 적의 방어를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는 무서운 주문이다. 호기심이 동한 큐르케가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포프는 딱 잘라 거절한 바 있었다. 군사력이 발달하고 전쟁이 흔한 이 세계에 자칫하면 악용될 수 있는 주문을 남기는 것은 사양이다.
기슈가 왈큐레로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일전과 달리 화려한 동작이 사라지고 왈큐레의 연동공격이 강화되어 있었다. 그는 몽모랑시를 불러 치료하게 하며 포프에게 제안했다.
“이봐. 무거우면 왈큐레로 업어줄 수도 있는데.”
“아냐. 내가 사역마니까, 내가 업는 게 맞겠지. 그리고 전혀 힘들지 않아.”
포프의 등에는 루이즈가 단단히 업혀 있었다. 마치 아기라도 업은 것처럼 허리를 단단히 동여맸다. 다행히 루이즈가 포프보다 꽤 작아 다리가 끌리거나 할 일은 없었다. 물론 루이즈는 걸을 수 있긴 했지만, 자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혼자 멋대로 움직이다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을 고려해 포프가 직접 업었다. 루이즈는 등뒤에서 꼼지락거리며 포프의 어깨에 두른 팔로 그의 목을 가볍게 안았다.
“아빠, 따뜻해요. 루이즈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 마법을 쓸 수 없지만 아빠와 엄마처럼 멋진 마법을 쓰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 절 불쌍하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어서 가자.”
더 늦기 전에 죠제프가 갖고 있다는 비보를 찾아야 한다. 포프는 손에 쥔 파푸니카의 검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룬이 이전보다는 약하게 은은한 빛을 발했다. 아무래도 주인에게 이상이 생기면 그만큼 약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포프에겐 루이즈를 지탱할 정도의 힘이면 충분하다.
경비병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모두는 포프의 인도를 받아 죠제프가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이곳의 구조는 기억하고 있다. 지난번 그와 죠제프가 격전을 벌였던 곳은 중앙의 홀이었다. 그곳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일행이 헉 하며 순간적으로 물러났다.
홀에는 한 사람만이 있었다. 그는 후원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서 문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기세를 은연 중에 내뿜고 있었다. 평소에 쓰고 있던 모자는 벗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뾰족한 귀가 탈색된 금발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마치 학자 같았지만, 그 귀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하르케게니아 인에게 본능적으로 새겨진 공포의 각인이었다.
“에……엘프……”
기슈와 몽모랑시가 딱 굳은 채 입을 뻐끔거렸다. 큐르케, 실피드도 꽤나 볼 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바사는 원래의 무표정 그대로 눈만 크게 떴다. 시조 브리밀조차 패배를 인정하고 후손에게 복수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가 엘프이다. 타바사와 큐르케 정도의 트라이앵글 클래스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절망에 이르지 않았다.
“당신이 엘프?”
포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섰다. 눈꼽만큼도 무서워하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으로 본 엘프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하다. 마족보다 선하게 생겼고, 육체적으론 그리 강한 것 같지 않다. 아마 마법에 특화된 엘프이거나, 아니면 엘프 전체가 원래 저렇거나. 어쨌든 지금은 속 편하게 강한 마법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엘프는 예의바르게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엘프 비다샤르라고 한다. 만남에 축복을.”
“당신이 죠제프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나도 축복해 주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인간에게는 웬만하면 존대를 해 주지만(하르케게니아에서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더욱 신경쓰는 부분이다), 마족 등의 이종족에겐 반말부터 나온다. 마족과 수도 없이 싸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몸에 밴 습관이다. 비다샤르는 그리 불쾌해하진 않았지만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순 없다. 지금의 난 그의 부하. 때문에 이곳에서 너희들의 발목을 묶으란 명령은 지켜야 한다.”
“그럼 죠제프는 여기 있긴 한 건가 보네. 당신을 쓰러뜨리고 저 문으로 나가면 있겠지?”
포프는 아무렇지 않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엘프는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는 몸짓을 취했다.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포로가 되지 않겠나. 엘프는 무익한 싸움을 싫어한다.”
“포로? 누가! 플레임 볼!”
돌연 큐르케가 나서서 몰래 주창했던 마법을 내쏘았다. 아무리 엘프라도 기습엔 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한 것인지 이전에 내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불덩이가 날아갔다. 하지만 엘프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불덩이가 그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츠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불덩이의 방향이 큐르케 쪽으로 바뀌었다. 미처 반응하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때 백은의 검이 불꽃을 베었다. 불꽃을 파고든 검은 기세좋게 마법을 흡수했다. 휘즈가 검을 가볍게 털어 불꽃의 잔해를 없애자 검이 짜증나는 듯 거칠게 말했다.
-제기랄. 저거 골치아픈 마법이야. 선주 마법이란 놈인데, ‘카운터’라고 하지. 자기 주위에 공기의 벽을 둘러치고 있어서 마법공격이고 물리공격이고 몽땅 반사해 버리지. 모든 정령과 계약한 저런 놈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물리 공격도요?”
휘즈는 그 말을 되새겨보는 대신 바로 엘프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만약을 대비해 전력의 반 정도만 사용해 보았는데, 과연 팔이 저릿할 정도로 검이 튕겨나갔다. 그녀는 바로 백덤블링으로 원위치로 돌아왔다. 델프가 자기 말 좀 들으라고 불퉁거렸다.
그 모습을 본 포프는 새삼 하르케게니아의 마법이 결코 자신의 세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리력 방어나 마법 반사는 있어도 저 두 개를 합치고, 그것도 모자라 받아낸 공격을 상대방에게 되돌려버리는 배리어는 자신의 세계엔 없다. 만약 있었다면 버언이 타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몇 번이고 썼을 것이다. 만약 저 엘프와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을 텐데, 하고 포프는 아쉽게 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당신의 마법은 그게 끝?”
“음?”
“당신이 마법을 쓰지 않고 그 몸으로 버틴다면 우린 당신과 싸우지 않고 바로 죠제프에게 갈 테니까. 그거 반사만 되고 공격은 안 되는 거 같은데?”
“……야만인이여. 잘 보았다만, 이미 이 몸은 이 성을 이루는 모든 정령들과 계약을 마친 몸. 공격 수단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비다샤르는 양손을 치켜들고 주문을 외웠다.
“돌에 깃든 정령의 힘이여. 나는 오래된 맹약에 근거해 명령한다. 내 원수들을 토벌하라.”
그그그그극 하는 마찰음과 함께 옥좌 아래에 있는 계단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들이 공중에서 폭발하더니 일행을 덮친다. 프레이저드의 탄암폭화산에 비할 만큼 많은 수의 파편이었다. 휘즈가 급히 전진해 온몸으로 돌을 맞받았지만 일행을 모두 보호하진 못했다. 그때 인간 형태로 변해 있던 실피드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일행을 감쌌다.
“실피드!”
타바사가 안타깝게 외쳤다. 실피드는 온 몸에 돌이 박힌 채로 큐이큐이, 하고 중얼거리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몽모랑시가 급히 비약을 꺼내 상처에 뿌렸다. 타바사는 드물게 화난 표정으로 지팡이를 그에게 겨누었다. 그것을 큐르케가 제지했다.
“진정해, 타바사! 네가 마법을 써도 튕겨져나올 뿐이야!”
“실피드, 복수.”
“아직 달링이 있어!”
큐르케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포프는 돌의 세례가 멈추자 자신에게 건 아스트론을 풀었다.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료들까지 방어해주진 않았다. 자신이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 주기 위해 그들을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들 또한 지금은 엄연한 전우이다. 자신은 이들을 도와주는 역할이지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은 아니다.
“마법과 물리공격 반사, 거기에 덤으로 원거리 공격.”
한 걸음 나섰다.
비다샤르가 그런 그를 살짝 짜증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렇지. 자네들이 이런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
공격을 튕겨낸다는 건 공기의 방어벽을 둘렀기 때문. 마력 그 자체를 이용해 반사하는 게 아니라, 공기를 이용해 공격방향을 되돌리는 방법이다. 즉 오리하르콘 방패처럼 절대적인 방어를 자랑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시험해 볼까.”
포프는 악동처럼 웃었다.
그의 손에서 수십 발의 폭렬주문이 발해졌다. 어떤 것들은 비다샤르에게로, 또 어떤 것들은 비다샤르 아래의 바닥을 향해 날아갔다. 비다샤르는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포프에게 되튕기진 못했다. 워낙 많은 수의 주문인 데다 날아오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아 의도한 방향으로 튕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주문은 하르케게니아에서 본 적이 없는 형태인데?”
엘프가 곤혹스러운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 한계를 드러내지는 않은 듯, 그 많은 이오를 한 발도 남김없이 튕겨내는 데 성공했다. 포프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다음 공격을 발했다. 이번엔 메라조마 연발. 게다가 폭렬주문처럼 튕기기 쉬운 공 모양이 아니라, 계속해서 힘이 가해지는 불줄기였다. 두 개의 불줄기가 서로 교차하며 그에게 날아와 방어벽에 부딪치자 비다샤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힘! 정령이 고통스러워 할 정도의 힘이로군! 대단해…… 하지만 이걸론 날 뚫을 순 없어!”
“네네, 그렇겠죠. 이쪽도 별로 기대는 안 했으니까.”
정말 기대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포프는 벌써 다음 주문을 내쏘고 있었다. 하지만 주문을 내쏘는 그의 모습을 비다샤르는 볼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리리루라로 엘프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바기크로스!”
이번에 발해진 것은 바기 계 최강의 주문. 그야말로 전력전개로 내쏘았다. 등 뒤에 일격을 맞은 비다샤르가 이번에야말로 당황한 신음을 흘렸다. 전방의 주문을 막는 데 신경을 집중한 틈에 받은 일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같은 공기 계열의 주문이기 때문에 공기의 정령들이 친화력을 느껴 제대로 막아내질 못했다. 있는 힘을 다해 전방의 주문을 대충 튕겨낸 후 닥쳐오는 공기의 칼날을 막기 위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포프의 모습이 없었다. 다시 뒤로 돌아가 바기크로스, 옆으로 돌아가 바기크로스. 머리 위로 솟아올라 바기크로스! 한 발 한 발이 신경써서 막지 않으면 안 될 묵직한 위력인데 그것이 사방에서 전개되자 공기의 벽이 버텨내지 못할 지경이다. 본래 카운터 마법이란 일대 일의 싸움을 가정하고 만들어낸 마법. 따라서 한 방향에서 오는 충격은 문제없이 반사가 가능하지만,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온다면 막아내기 힘들다. 급기야 그는 카운터 마법으로만 상대하겠다는 자신감을 버리고 돌의 정령을 불렀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바닥이 패이더니 거대한 손 모양이 되어 공중의 포프를 덮쳤다. 그러나 그 직후, 그 손은 델프링거에 의해 여지없이 소멸되었다. 주인에게 닥쳐온 위협을 소멸시킨 휘즈가 차가운 눈으로 엘프를 노려보았다.
빠직빠직 소리와 함께 공기의 방어벽이 점차 좁혀들어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포프는 일부러 다급하게 일행을 불렀다.
“모두 도와줘! 조금만 더 하면 깰 수 있을 것 같아! 내 힘으론 부족해!”
“맡겨주라구!”
큐르케를 시작으로 타바사, 기슈, 몽모랑시의 마법들이 차례로 비다샤르에게 날아왔다. 기껏해야 트라이앵글의 마법이라면 몇 발이라도 되튕겨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방어벽이 깨지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말하자면 있는 대로 금이 간 벽에 망치질을 두어 차례 가하는 격이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비다샤르는 급히 머리위에만 집중해 그쪽의 바기크로스를 날린 후 힘껏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 곳에 뭉쳐진 공기의 소용돌이가 응축되더니 엄청난 기세로 폭발했다. 강한 바람이 실내에 있는 모든 것을 날려버리며 일행들을 우르르 쓰러뜨렸다. 그 난리에 무사한 것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서 파편을 막아내는 휘즈뿐이었다.
“으으……블랙, 역시 몸무게가.”
“전 금속 생명체이니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왜?”
“아니야. 뭔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달까……”
그녀는 아직 인간의 상식에 대해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이 여성형이란 건 자각하고 있지만, 인간 여성의 몸가짐이나 마음 등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알고 있었다면 포프의 농담은 농담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다른 일행보다 추하게 날아가 볼품없이 널부러져 있는 포프의 앞에 검이 콱 꽂혔다. 검은 돌바닥을 가볍게 관통해 손잡이까지 푹 들어갔다. 잠시 하얗게 질렸던 포프는 곧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 그, 그러니까 내 눈앞에 꽂은 델프링거는, 이걸 잡고 일어나라는 네 착한 의도가 맞는 거지? 농담 좀 했다고 화나지 않은 거지? 응?”
“예. 화나지 않았습니다만. 왜 제가 화를 내야 하나요?”
“아니, 저기, 뭔가 여기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정말 미안.”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포프가 사과하자 손잡이만 남은 델프링거가 휘즈 대신 대답했다.
-……아니, 그보단 날 바닥에 꽂으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하는데, 이것들아!
델프링거가 캬오~ 하고 울부짖다 문득 위! 라고 외쳤다. 그들의 머리가 모두 위로 올라갔다. 비다샤르는 반지에 숨겨두었던 풍석을 이용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잡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저 자는 발목을 묶는 역할일 뿐이었으니 잡아도 의미가 없다. 무시하고 길을 나서는 게 낫다.
그는 포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야만인 중에서도 넌 특출하다. 계통마법으로 선주마법을 깬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잠깐이나마 깬 건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다.”
“얼른 가 버려요. 두 번 상대하긴 싫으니까.”
손을 휘휘 저으며 빨리 꺼지란 신호를 발하자 그는 일행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둘러본 후 이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저쪽도 보아하니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쪽도 마찬가지이므로 어서 사라져주는 게 속편하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기슈가 몽모랑시를 끌어안고 외쳤다.
“이겼어! 나의 몽모랑시, 내가 이겼어!”
“아니, 기슈. 어쩐지 너 혼자 다 한 것처럼 들리는걸.”
몽모랑시가 딴지를 걸자 기슈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잘난 척하는 버릇은 도무지 고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기슈의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큐르케는 기슈의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봤어? 내 플레임 볼!”
“그보다 왈큐레가 막판에 돌격하는 걸 보고 쫄았던 게 아닐까?”
“모두들! 나도 한몫했다구~!”
하르케게니아 인이 엘프를 잡았다는 건 지금까지 유례 없던 일이다. 계통마법의 시조 브리밀마저 엘프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 엘프를 상대로 싸워 그가 도망가게 만든 것이다. 엘프 한 명이 백 명의 메이지를 홀로 상대할 수 있다는 과장 섞인 소문에 항상 떨어야 했던 그들이었기에 지금의 승리는 어느 것보다도 값지다. 타바사조차도 흥분으로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의 흥분이 채 식기 전에 포프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몽모랑시가 실피드를 좀 더 회복시킨 후 따라오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은 비다샤르가 지키고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문 너머에는 갈리아 왕궁이 자랑하는 넓은 후원이 있었다. 무수한 관목들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위에서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일 것이다. 날씨에 걸맞지 않게 봄꽃부터 가을꽃까지 가리지 않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은 고정화의 마법이 응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풍채 좋은 남자였다.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포프와 타바사 뿐이었다. 타바사는 죠제프를 보자 노성을 지르며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죠제프!”
“아아. 오를레앙의 딸. 지금은 잠시 기다려라. 어리석은 것, 이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단 말이냐.”
“……?”
그러고보니 그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비록 미친 놈이라고는 하지만 가만히 있을 땐 비교적 정상인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안절부절못하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겁먹은 표정이 아닌 걸 보면 왠지 뭔가 꾸며놓고 성과를 기다리느라 초조해하는 모습 같았다. 저런 걸 기다려줘야 하나? 그렇지만 악당의, 하물며 미녀도 아닌 아저씨의 사정 따위 기다려 줄 필요는 없다.
포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바사는 지팡이를 들어 죠제프를 겨누었다. 이제는 인질도 없으니 지난 수 년간 꿈꿔왔던 것을 드디어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자신의 마법으로 죠제프의 심장을 꿰뚫는 것을 그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던가. 그녀가 자랑하는 윈디 아이시클이 지팡이 끝에서 발사되었다.
그 순간, 그들의 발밑이 출렁 흔들렸다.
“윽! 뭐야?”
“앗!”
타바사의 지팡이가 흔들리며 조준이 어긋났다. 윈디 아이시클은 죠제프의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옆으로 갔다면 그는 머리가 박살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태세 하나 갖추지 않은 채 광오하게 웃어댔다.
“왔다! 제군들! 드디어 요르가 왔어!”
손뼉을 짝 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 큐르케 일행은 당혹스러워했다.
“뭐 저런 놈이 있어! 왕이란 놈이, 아아앗!”
위에서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가 들려 모두는 위를 바라보았다. 위에서 뭔가 엄청나게 큰 골렘이 낙하해오고 있었다. 아까의 흔들림은 먼 곳에서 이곳까지 점프하기 위해 대지를 박차서 일어난 것 같다. 그나저나 얼마나 큰지 그림자가 순식간에 화원을 가득 덮었다. 이대로라면 여기에 충돌한다!
“쳇! 뭔지 몰라도!”
포프가 단검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두 손을 좌우로 벌렸다.
한 손에 메라조마.
한 손에 마햐드.
메라조마의 불꽃을 활로,
마햐드의 얼음을 화살로 하여,
두 개의 반발하는 힘을 하나로 합친다 -
“그동안 이걸 쓰고 싶어서 근질거렸다고!”
거대한 빛의 화살이 포프의 손에 맺혔다.
불, 불, 불, 물, 물, 물의 헥사곤 스펠.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눈으로,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건, 헥사곤 스펠이면서 헥사곤을 초월한 위력이라는 것을.
두 손에 맺힌, 완성된 빛의 화살의 익숙한 느낌을 마음껏 즐기며,
포프는 머리 위의 물체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매드로아!”
포프의 머리 위로 빛기둥이 치솟았다.
“예쁘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 빛을 바라본 루이즈가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낙하해오던 골렘의 몸 전체가 그 빛에 휩싸였다.
“오, 오오오오오오오오! 요르! 견뎌라! 요르! 아아!”
죠제프가 허공을 바라보며 발작하듯이 외쳤다. 그의 비장의 병기 요르문간트는 스퀘어 급의 골렘보다도 크고, 움직임도 인간과 흡사하며, 게다가 선주마법인 카운터가 걸려 있다. 이제 요르문간트가 저 빛기둥을 아래로 튕겨내면 죠제프의 짧은 유희가 싱겁게 끝날 것이다. 선주마법의 위력은 그 역시 목도한 바 있었기에 그는 요르문간트의 패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빛에 휩싸인 요르문간트가 점차 그 빛에 잠식되어 스러져가고, 뒤이어 완전히 소멸된 이후에도.
아무리 기다려도 요르문간트가 대지에 내려앉지 않자, 그는 몇 걸음 전진하며 연극배우처럼 허공을 향해 떠들어댔다.
“하……아하하하……요르, 어디 간 건가? 잠시 짐을 놀라게 해 주려고 다른 곳으로 숨었나? 이리 나와, 요르! 널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와! 나오란 말이다! 사역마!”
마지막 말에 응하듯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의 옆에 소녀가 나왔다. 아까까지 없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걸 보니 저 골렘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녀는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평탄한 어조로 띄엄띄엄 말했다.
“실패…… 선주마법도 소멸.”
“그걸 소멸시키다니! 이런 무능한 녀석! 다 묘즈니트니룬인 네 조종이 미숙한 탓이다! 모든 도구를 최상급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전설의 사역마인 주제에 어째서 요르를 살리지 못했나!”
죠제프가 발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찼다. 대비하지 못했던 소녀는 뒤로 쓰러졌다. 그녀를 일으켜세울 시간도 아까웠는지 그는 발로 그녀의 작은 몸 여기저기를 짓밟았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묵묵히 그의 구타를 받아들였다. 적끼리 싸우는 거니 이대로 놔둬서 자멸하게 만드는 게 좋겠지만, 그녀의 모습이 어린 소녀라는 게 이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타바사는 죠제프의 그런 폭행에서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겹쳐 본 모양이었다.
“멈춰! 죠제프!”
타바사가 외치자 죠제프는 발을 든 채 딱 행동을 멈추었다. 정말 멈출 줄 몰랐던지라 타바사는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죠제프는 그렇게 발을 든 채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발을 내리고 소녀를 부축해 일으켜세웠다. 여기저기 묻은 흙을 털어주고, 피를 옷소매로 대충 닦아준 후 아까까지 그녀를 폭행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많이 다쳤구나, 인형. 이 상처는 다 저 녀석들 때문에 생긴 거야. 저 녀석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나면 제대로 쉬게 해줄게. 그러니 지금은 싸워라. 자, 인형을 꺼내 맞서 싸우는 거야. 네게 룬을 준 게 누군지 아직 기억하고 있지?”
소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소리없이 자동인형이 나타났다. 그녀의 몸이 녹아내리듯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자 자동인형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이미 저 인형에게 제대로 당한 과거가 있는 큐르케와 타바사가 화들짝 놀라 포프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포프! 아까 여자애가 저 녀석을 조종하던 놈이야!”
“그래! 저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힘들 테니 다들 조심해야 해!
블랙과 내가 저 녀석을 상대할 테니, 너희는 죠제프를 공격해! 허무의 마법을 쓰지 못하게 끊임없이 방해해야 해!“
“그거라면 쉽지!”
아무래도 메이지는 같은 메이지끼리 어울려야 제맛이다. 미열의 불길이 불의 뱀처럼 꾸불거리며 허공을 갈랐다. 죠제프가 눈을 번뜩 빛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허공에 폭발이 일어나더니 불길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것을 ‘실패’로 여기는 루이즈와 달리 그는 그 폭발을 목표지점에 정확히 구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또한 ‘허무’의 일종이라 계통마법으로 뚫기 어려웠다.
“조무래기들은 비켜라. 아, 오를레앙의 딸은 조무래기가 아니니 정정해주지. 너희들이 피라미라면 오를레앙의 딸은 금붕어 급이니 말이다. 후하하하하!”
기슈가 입술을 깨물고 왈큐레를 불러냈다. 일곱 체의 왈큐레가 전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오, 제법 예쁜 인형 아닌가. 하지만 우리 요르에 비하면 어림없지. 그런 개미같은 사이즈로 요르에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아아, 우리 요르. 불쌍한 요르…… 비다샤르가 제대로 된 별명도 붙여주지 않아 제대로 된 별명도 갖지 못하고 계속 요르로 불려야 하는 불쌍한 녀석……”
중얼거리는 건 정신병자 수준이지만 마법은 초일류였다. 그의 입이 아주 빠른 속도로 주문을 영창하자 왈큐레들에게 빛덩어리가 내려앉았다. 아까의 폭발을 대비해 일곱 체 모두가 거리를 벌리고 있었는데, 그런 예측을 무색하게 하듯 빛덩어리 또한 일곱 개였다. 그 빛에 싸인 왈큐레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산산조각나 가루가 되었다.
허무의 주문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특징이다. 계통마법은 숙련도가 높아지면 주문을 영창하는 과정을 조금씩 생략할 수 있지만, 허무의 마법은 반드시 주문을 모두 외워야 한다. 단순히 빨리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게 아니라, 영창 과정에서 몸 안에 잠재된 부정적 에너지를 이끌어내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영창하는 시간도 짧아지게 된다. 대신 익숙해질수록 허무의 감정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그로 인해 정신을 잠식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말하자면 아방의 비기 그랜드 크로스가 흉켈에 이르러 필살기로 변모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조 브리밀의 경우 정신을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 주문의 출력을 낮췄지만, 루이즈나 죠제프는 그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위력을 높여 사용하기 때문에 부작용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루이즈가 처음으로 허무를 시도했을 땐 오 분 정도 영창한 후에야 사용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해서 관찰해 온 사람이라면 그녀의 주문 영창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한 달도 안되는 시간 동안에도 영창 시간을 줄일 수 있는데, 하물며 몇 년 넘게 허무를 쓰며 허무에 잠식되어온 죠제프의 수준은 얼마나 높은 것인가. 하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죠제프의 파멸이 머지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허무는 사용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 그 감정이 격렬하게 변화할수록,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에 허무를 느낄수록 마법은 더욱 강해지고 빠르게 완성된다. 즉 긴 주문을 고작 몇 초만에 완성해 내뿜고 있는 죠제프의 모습은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간 등잔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합류할 때까지만 버텨줘, 다들!’
사신과 싸우는 건 휘즈에게만 맡길 순 없는 일이다. 휘즈는 가짜 룬의 미약한 보정을 받을 뿐이었지만 저 사신은 죠제프가 말한 묘즈니트니룬인지 뭔지 하는 제대로 된 룬의 보정을 받는 모양이었다. 만에 하나 휘즈가 당할 경우에는 지팡이와의 마력 연결이 끊어져 자신마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합세해 얼른 사신을 해치우는 게 낫다.
사신이 낫을 크게 돌렸다. ‘사신의 피리’를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포프는 일부러 움직이지 않고 그 공격을 받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흐릿해진 청각에 쩡 하고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온몸의 감각이 다시 회복되었다. 휘즈는 인공적인 생명체였으므로 고주파 음을 받아도 별 영향이 없었고, 오히려 사신이 사신의 피리를 연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반격을 시도했다. 한 번 수세에 몰리자 사신의 움직임은 방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포프는 그런 사신에게 외쳤다.
“어이, 너! 하나 묻자! 죠제프가 죽는다면 넌 어떻게 되는 거냐?”
“룬 소멸. 사역마 관계 소멸. 홀로 남는다.”
주인이 죽는다고 사역마가 뒤따라 죽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외쳤다.
“그럼 죠제프가 죽으면 싸움을 멈춰! 나와 함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자! 나나 넌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야!”
“……”
“아냐!”
타바사가 갑자기 크게 외쳤다. 그 목소리는 평소 과묵한 그녀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포프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해! 싸움이 끝나더라도 떠나면 안 돼! 이곳에 남아서, 내가 나아갈 길을 지켜봐줘야 해!”
그녀의 외침은 절박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타바사 안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포프의 모습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 것일까. 단순한 연애감정의 대상이 아닌, 자신이 가는 길을 지켜봐줬으면 하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라고 하는 편이 더 무난한 표현일 것이다. 어머니를 치유해줬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이 남자에게 숨김없이 드러내고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의한 바 있었다. 좋은 왕이 되라고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결단코 좋은 왕이 되고 말 테다. 그리고 그것을 포프에게 보여줘야 한다.
죠제프는 자신의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낸 타바사가 놀랍다는 듯 탄성을 발했다.
“인형 주제에 감정이 생긴 건가. 흥, 오를레앙도 비슷한 소릴 했었지. 형님은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야. 그런 가식적인 말들을 바라보면 구역질이 난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느닷없이 왈칵 토한다. 정말 감정의 기복이 대단한 작자다. 흐트러진 그를 향해 타바사가 비기 아이스 스톰을 발했다. 죠제프를 본 순간부터 격해진 감정이 그녀의 수준을 스퀘어 수준으로 이끌어내고 있었다. 평상시보다 더욱 넓어진 범위와 흉흉한 위력을 보이는 주문이 그대로 그를 집어삼켰다. 무수한 얼음조각이 그를 강타했지만 그는 오히려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 이 녀석! 하하하!”
죠제프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아이스 스톰이 공중에서 그대로 분해되었다. 큰 주문을 써 지친 타바사가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토했다. 그녀의 앞에는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쌩쌩한 죠제프가 우뚝 서 있었다.
“북 화단 기사단이란 허울은 아니구만 그래. 꽤 실력을 쌓았구나. 그 정도라면 네 아버지 오를레앙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 항상 재능이 넘치고 주변에 사람들과 절친해지는 인덕, 용모 등등 도무지 어딜 봐도 떨어지지 않는 녀석이었지. 너도 네 아버지의 그런 재능을 물려받은 거냐, 응? 나같은 무능왕을 비웃기 위해, 녀석은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재능을 물려준 거냐?”
지팡이 끝에 다시 빛이 맺혔다. 이번의 주문은 익스플로전.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허무의 마법이다. 누구보다 빨리 그것을 알아챈 포프는 급히 가장 쓰기 쉬운 주문을 그에게 날렸다. 그것은 환각주문. 한참 공격주문을 킬번에게 퍼붓던 중이라, 마력을 정돈하기 위해 시간벌기용으로 내쏘았다. 익스플로전이라면 매드로아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환각주문의 빛이 죠제프의 눈앞에서 번쩍였다. 이미 허무에 침식된 그에게 환각주문은 고작 몇 초 정도 지속한 후 사라졌다. 포프가 선택한 환각주문의 효과는 ‘가장 싫어하는 기억’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 일반인에게 썼다간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겠지만 죠제프에겐 통하지 않으리라. 과연 죠제프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매우 불쾌했는지 이를 갈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 너! 오를레앙! 샤를로트를 지키려고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냐! 제기랄! 자긴 내 손에 죽었지만 딸까지 내줄 순 없다는 거냐!”
지팡이에 맺힌 빛이 더욱 강해졌다. 포프는 급히 매드로아를 준비했지만 약간 늦다. 죠제프는 지팡이를 타바사에게 겨누었다. 새하얀 파멸의 빛이 그녀를 조금씩 감싸온다. 그 빛은 그녀를 중심으로 빠르게 죄여들다가 갑자기 파앗 하며 빛무리로 변하더니 흩어져 버렸다.
“디, 스펠……?”
죠제프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잠시 굳어 있다 포프 쪽을 노려보았다. 포프의 등 뒤에서, 루이즈가 지팡이를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눈동자를 보자 기슈는 자신이 언젠가 보았던, 전장에 ‘허무의 성녀’로 선 루이즈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죠제프의 허무의 마법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건가? 그녀는 입을 열어 노래하듯 말했다.
“허무. 허무. 허무. 허무. 허무에는 허무.”
“제기랄 년! 허무에 완전히 먹혔냐!
지금은 네 년을 상대할 때가 아니야! 사역마!”
사신이 낫을 크게 휘둘러 휘즈를 떨쳐내고 곧장 포프에게 날아왔다. 매드로아를 막 합치려던 그는 급히 주문을 캔슬하고 마햐드를 쏘았다. 사신은 낫으로 그것을 막고 재차 공격하려 했다. 휘즈가 그 사이 달려와 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았다. 루이즈는 코앞에서 그 싸움을 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지팡이를 들어 죠제프를 겨누었다. 그녀의 입에서 주문이 빠르게 쏟아져나왔다. 그에 맞서 죠제프도 같은 주문을 영창했다. 둘이 선택한 것은 익스플로전. 죠제프로서는 한 방으로 포프까지 잡을 수 있으니 더 이익이다.
영창 쪽은 죠제프가 한 발 앞섰다. 허무에 먹힌 정도가 비슷하다면 얼마나 숙련도가 뛰어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이 달라진다. 승리를 확신하며 그는 지팡이를 막 휘두르려 했다. 그때 옆구리에 격통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타바사가 내쏜 얼음의 송곳이 옆구리를 꿰뚫고 있었다.
지팡이에 맺힌 빛이 사그러들고, 그는 입을 벌리고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쓰러졌다. 아니,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땅바닥에 얼굴이 닿기 직전, 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후 튕기듯 일어나 타바사에게 돌진했다. 그런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루이즈는 아까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익스플로전을 발사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타바사는 순간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로서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빛을 등지고 뛴 덕분에 시력이 온전했던 죠제프는 그대로 타바사의 손을 낚아챘다.
“잡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그는 타바사의 작은 몸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큐르케와 기슈는 타바사가 아래에 있어서 주문을 쏘지 못하고 몸으로 그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죠제프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둘을 뿌리쳐버린 후 타바사의 목을 졸랐다. 가느다란 목이 두꺼운 손에 덮여 보이지도 않게 되자 타바사는 컥컥 하며 몸을 비틀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타바사의 시야 전체를 사로잡고 있었다. 입에는 침이 맺혀 그녀의 얼굴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고, 핏발선 눈은 환희를 가득 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모습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된 타바사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히더니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원망을 가득 담아 신음처럼 말을 토했다.
“왜, 왜……이런 자……를 질투하셨나요, 아버……님……”
“뭐……뭐?”
금방이라도 하얀 목을 꺾어버릴 것 같던 우악스런 손길이 멈추었다. 그녀의 목을 움켜쥔 채 잠시 굳어있던 그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외쳤다.
“무슨 말이냐! 그 녀석이 날 질투했다고!”
“……아버님……은 왕이 된 당신을 질투……하고 원망……했어. 자신을 왜……왕에 임명시켜주지 않았냐고……할아버님을 원망하기도……하지만……하지만 그런 감정을 숨기고……당신을 도와 훌륭한 나라를……만들겠다고……”
아아, 훌륭한 나라라고 했지. 기억난다. 죠제프를 여기까지 몰고 갔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왕위에 임명받은 날, 그는 자신보다 훌륭한 동생이 왕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광희하면서 그가 질투로 얼굴이 일그러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를 본 순간 환히 웃으며 다가와 축하하고, 함께 갈리아를 훌륭한 나라로 만들자고 하였다. 그 순간 죠제프의 마음 속에 있던 방어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그는 허무를 각성했다. 그처럼 완벽한 동생을 살려둘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손을 피로 물들이며 저주받았다. 그런데, 그런데 정작 그 녀석 또한 질투로 일그러진 본심을 끝까지 숨기고 있던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신의 허무의 기원이, 사실은 오해일 뿐이었다는 것인가?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타바사는 그가 손을 거두자 괴롭게 기침을 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죠제프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슈가 머뭇거리다 왈큐레로 공격을 가했다. 왈큐레의 몸통박치기를 그는 전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붕 날아간 그의 몸은 화단 한켠을 엉망으로 만들며 처박혔다. 그곳에 심어져 있던 국화꽃이 우르르 그의 몸에 떨어져내렸다. 장례식장에서 애도받는 시체처럼 국화꽃잎이 뿌려진 채 그는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겼나?”
기슈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는지 왈큐레를 더 소환해 자신의 옆에 두었다. 큐르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타바사는 저편에 널부러진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에 감추고 있었는지 손에 잘 벼려진 단검을 들고 있었다.
“악적……복수!”
그녀는 비틀대며 한 걸음씩 전진했다. 큐르케는 그런 그녀를 더 이상 부축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순수히 그녀의 몫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와줘서 그녀에게 앙금을 남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수 년간의 괴로움을 등에 짊어진 채 이제 그것을 내려놓을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작은 소녀를 돕는 방법은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뿐이다.
비틀대면서도 타바사는 죠제프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파란 눈에 파란 불길을 담은 채 검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이대로 이 검을 그의 목에 꽂아넣으면 모든 게 끝난다. 또래의 소녀들과 달리 그녀는 검을 다루는 기술에도 어느 정도 숙달되어 있다. 단 일검, 단 일검만 - 그런 마지막 순간의 방심이 죠제프의 반격을 허용하게 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죠제프의 몸이 튕겼다. 누워있던 게 힘을 축적하고 있던 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타바사가 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자세가 무너진 뒤였다. 다시 타바사 앞에 거대한 장애물로 우뚝 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검을 떨어뜨리게 한 후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낙법 없이 등부터 강한 충격을 받은 소녀는 또다시 호흡곤란으로 컥컥거리며 꿈틀거려야 했다. 죠제프는 발밑에서 애처롭게 신음하는 소녀에게 호령했다.
“오를레앙의 딸 샤를롯트여! 내가 너 따위에게 죽을 것 같은가! 천만에! 오를레앙도 죽이지 못했던 나를, 그의 딸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사역마! 이리 오라!”
“안 돼!”
포프가 여차하면 사신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낼 기세로 타바사에게 날아갔다. 큐르케와 기슈도 허겁지겁 그녀에게 뛰어갔다.
죠제프가 다시 호령했다.
“날 죽여라!”
“!”
충격적인 그의 명령에 포프와 휘즈의 움직임이 잠시 둔해졌다. 그러나 사신은 미리부터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다. 자동인형의 몸이 사라지더니 죠제프의 뒤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낫이 죠제프의 심장을 꿰뚫었다. 죠제프의 몸이 크게 출렁이더니 곧 왈칵 피를 토했다.
“죠제프!”
타바사가 몸을 비틀어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어 그 의도를 파악하기 불가능한 외침이었다. 죠제프는 드물게 광기가 사라진 인간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슴 위로 삐죽 튀어나온 사신의 낫이 빠져나가자 엄청난 양의 피가 사방에 쏟아졌다. 순백의 소녀에게도 피보라가 쏟아져 청색의 머리칼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순식간에 대량의 피를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쓰러지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허무의 바다에 발을 담그고, 허무의 바다에 무릎을 적시고, 허무의 바다에 가슴을 적시고, 허무의 바다에 내 목을 적신다.”
“허무……”
루이즈가 중얼거렸다. 죠제프는 그녀를 보더니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아 분출하는 피를 막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의 반지를 잡아빼 포프에게 그것을 던졌다. 포프는 그것을 받은 후 말없이 죠제프에게 고개를 한 번 숙였다. 그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크게 외쳤다.
“허무의 시조 브리밀이여! 네 녀석이 천국에 있을 리 없다! 지옥에서 널 보게 되겠구나!”
외침이 쩌렁 후원을 뒤흔들었다. 그 안에 담긴, 수 년만에 처음으로 표출된 죠제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루이즈에게도 전해진 모양이다. 멍하니 있던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포프는 그녀를 묶었던 끈을 황급히 풀고 바닥에 눕혔다. 비보 엔드 발리의 반지란 매직아이템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긴 했지만 금방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반지를 끼고 루이즈의 머리에 가져가자 푸른 빛이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머릿속으로 흡수되어갔다. 모든 것을 치유하는 이 비보는 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무가 침식하는 속도를 늦춰주고, 직접 사용할 경우 그 침식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다.
죠제프는 자신을 좌절시킨 자의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오를레앙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만족스러워 그는 피를 토하며 광소했다. 자신은 동정 따위 어울리지 않는다. 허무에 먹힌, 미치광이 왕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
갈리아의 지배자, ‘무능왕’ 죠제프는 훗날 전쟁을 종식시켜 ‘자애왕’이라 불릴 소녀의 앞에서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고 있다.
둘의 모습이 허무에 잠긴다.
두 언니가 따스하게 안아 준다.
둘의 모습이 허무에 잠긴다.
제로라고 놀리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허무에 잠긴다.
따스하고 강한, 자신만의 사역마 소년이 있었다.
그의 모습도 허무에 잠긴다.
결국, 이 세상에 남은 것은 허무 뿐 -
그녀의 몸도 허무에 잠긴다.
목까지 허무에 잠긴 순간, 허무의 바다가 갑자기 갈라졌다. 땅에 쓰러진 루이즈가 더듬거리며 자신이 선 대지의 감촉을 재확인한다. 너무 오랫동안 허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 그 감촉을 거의 잊고 있었다. 돌아보니 저 먼 곳에서 푸른 빛이 바다를 관통해 길을 만들고 있었다. 길 너머엔 대지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하고 그녀는 망설였다. 저 곳으로 간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은 혼자가 아닐까? 혼자 외로이 저 곳을 떠돌아다니는 것보단, 이 희망도 절망도 없는 바다 아래 잠겨버리는 게 편하지 않을까? 그녀는 움직이길 주저했다. 길이 조금씩 허무의 바다에 잠식되어가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택한 허무, 그렇다면 더 이상 상처입을 일 없는 이곳에 머무는 편이……
“이 바보야! 돌아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빛 너머, 이 빛의 끝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헥사곤 메이지인 주제에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팔짝팔짝 뛰면서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보이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시 외친다.
“네가……네가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게 싫단 말이야……!”
빛이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온다.
잃어버렸던 기쁨이, 눈물이 메마른 볼을 적셔나간다.
그리고 원망도, 미움도.
그녀의 발이 저절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두 걸음을 거쳐, 세 걸음째부터는 이미 몸이 뛰고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전력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헥사곤 메이지의 마법인 걸까. 이건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를 대 본다. 우습기 짝이 없는 변명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몸이 한결 가뿐해진다.
돌아가면,
기쁨을 가득 담아 저 소년을 힘껏 끌어안는다.
원망을 가득 담아 저 소년에게 일격을 먹인다.
그리고,
‘다녀왔어’ 라고 말한다 -
빛의 끝에서 소년이 팔을 활짝 벌리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루이즈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루이즈! 이제 괜찮아?”
시야 가득 자신의 사역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들어왔다.
아아. 꿈이 아니었나 보다. 루이즈는 안도했다.
이 소년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서 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포프. 그동안 어디 갔었어?”
루이즈가 힘없는 목소리로 묻자 포프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자세한 사실을 알려줘야 하나, 아니면 간단하게 말해 줘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루이즈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손을 천천히 들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뭔가 할 말이 있나보다, 하고 포프가 얼굴을 그리로 가져갔다. 그러자 루이즈는 들었던 손을 편 후 그대로 포프의 뺨을 후려쳤다.
“후걱!”
포프의 머리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막 회복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그의 자세가 살짝 무너지자 루이즈는 다른 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고정했다. 이번엔 박치기인 거냐! 하고 포프는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충격은 이마가 아니라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꼭 닿고, 따뜻한 숨결과 말캉한 혀가 포프의 입 안을 휘감았다. 이 느낌을 포프는 알고 있었다. 컨트랙트 서번트의 의식 때 행해졌던 키스의 느낌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포프는 가만히 눈을 떴다. 이제 막 그의 얼굴에서 떨어진 루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포프의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그대로 포프를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뺨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고,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윽, 흑…… 사역마 주제에, 사역마 주제에! 두 번 다시 주인님을 떨어뜨려놓지 말란 말이야! 날 혼자 놔두지 말라구!”
“……루이즈. 그 말은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도 해당되는 걸까?”
포프의 진지한 질문이 루이즈에게 이해되는 데는 잠깐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전에 이미 그녀는 답을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해한다 해도, 백 번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해도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갈 거야! 세상 어디라도! 난…… 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알았어. 후회하기 없기다.”
아마 그녀는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대답은 즉흥적이거나, 나중에 후회할 그런 성질이 아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제로의 메이지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녀의 굳은 의지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포프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루이즈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끌려들어갔다. 세상의 누구보다 듬직하게 느껴지는 가슴이 낯익은 향기와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다시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리웠던 그 느낌 속에 푹 파묻히며 그녀는 포프의 속삭임을 들었다.
“다녀왔어, 루이즈.”
“………………흥이다. 이젠 그런 소리 못하게 매일 같이 다닐 테니까.”
루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포프의 품 속을 더욱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