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20화 햇빛마저도 비치지 않는, 그 세계에서
오를레앙의 딸 샤를로트가 정식으로 갈리아 왕의 자리를 이어받는 대관식이 무사히 끝났다. 신하들도, 백성들도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죠제프가 특별히 폭정을 저질렀던 건 아니지만, 신하들은 그가 도무지 조언을 듣지 않는 ‘무능왕’이었다는 점에서, 백성들은 인기가 높았던 오를레앙의 딸이라는 점에서 샤를로트의 즉위를 환영했다.
대관식이 끝나고 일단 트리스테인 학원으로 돌아온 루이즈 일행은 트리스테인과 갈리아의 국교를 우호적으로 이끌어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슈발리에 임명이 확정되었다. 갈리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정상회담은 일단 연기되었고 왕들은 모두 자기 나라에 돌아간 상태였다. 웨일즈가 알비온에 남아 뒷수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임명식에는 앙리엣타만 참석하기로 했다.
기슈와 몽모랑시는 신나서 날뛰었지만 루이즈는 혼자 끙끙 앓아댔다. 포프가 일언지하에 작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묻자 ‘지금 공주와 얼굴을 맞대면 서로 민망하다’고 하는데,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둘이 눈이라도 맞았다면……하고 쓸데없는 망상을 해 보며 임명식에 참석해 보니, 오히려 공주 쪽에서도 포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안도하는 눈치였다. 대신 슈발리에 수여는 루이즈가 대리로 받기로 해 포프도 정식으로 트리스테인의 슈발리에가 되었다. 루이즈가 돌아와 이 사실을 전하자 포프는 ‘뭐, 망토는 멋있는 것 같으니 일단 챙겨둘까’란 한 마디로 소감을 말했다.
한편 포프가 헥사곤 메이지란 사실은 슬슬 여기저기에 알려지는 모양이었다. 트리스테인 학원의 필사적인 입막음도 이제 그 한계에 다다라, 학생들의 집안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문의가 빗발쳤다. 그걸 오스만이 몇십 년만에 과로란 것까지 해 보며 어떻게든 무마했다. 하지만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건지 로마리아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절을 보내 루이즈와 그 사역마가 부디 로마리아에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를 끌어안고 마자리니와 함께 끙끙대던 왕녀는 결국 루이즈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당분간 포프의 얼굴을 보기 민망했기 때문에 루이즈가 둘을 연결하는 대화창구가 되어주었다.
왕궁에서 돌아온 루이즈가 친서 이야기를 하자 포프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침 잘 됐네. 지난번에 이야기한 그 일을 하러 갔다와야겠어. 한 반 년 정도 자리를 비워두면 그 쪽에서도 포기하지 않을까?”
“반 년? 난 어쩌고!”
“따라올래?”
“…………따라갈 거야.”
“무지막지하게 위험한데?”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포프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갈리아에서 돌아온 후 포프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 주었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포프의 과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저 듣기만 한 루이즈에게는 지금 하려는 일이 과거에 그 대마왕이란 자와 맞섰다는 때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그 일을 지금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즈는 겁먹지 않았다.
“지난번에 말했지? 이제 어디라도 따라가겠다고. 널 잃을 수도 있는 이런 일이라면, 더더욱 따라가야 해. 그리고 사역마의 싸움에는 항상 주인이 함께 하는 게 원칙이야. 사역마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지도 않는 비겁한 주인이 되고 싶진 않아.”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므로 포프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의를 이미 갈리아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녀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포프 자신마저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의 험난한 길이 되겠지만, 결의를 굳힌 소녀를 배신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포프의 그림자에서 마족 소녀가 슥 솟아났다.
“고향, 간다. 나도.”
“꺅! ……넌 좀 아무 때나 솟아오르지 마!”
아직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루이즈는 이번에도 놀라 침대에 넘어져 버렸다. 얼굴을 붉히며 따졌지만 소녀는 그 외침을 무시하고 포프의 옷깃을 잡았다.
“고향, 나도.”
“알아알아. 너도 데려갈 테니 걱정 마.”
죠제프와의 싸움이 끝난 후 포프는 룬을 잃고 쓰러진 그녀를 회수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버리니 증오보다 애틋함이 솟았다. 일전의 음험했던 킬번과 달리, 정말 꼭두각시처럼 자신의 자아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도 그녀를 살려둔 이유였다. 게다가 자동인형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검은 핵은 보이지도 않았다. 지난번 녀석과 구조가 다른 걸 보면 처음부터 장착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인 것 같았다. 나중에 묘즈니트니룬이니까 니룬, 이라고 이름붙인 그녀가 깨어난 후 물어보자 원래부터 그런 건 없었고, 이곳에 우연히 소환되어 룬을 받기 이전에는 인형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로 행동하지 않았다 해도 니룬은 이곳의 인간을 죽이고 다닌 살인인형이었다. 이곳에 놔두면 그녀가 생활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포프는 그녀도 원래 세계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는 고향, 마계에 데려가 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죗값이 없다곤 말 못하겠지만, 어차피 그걸 치를 방법이 없는 이상 이 세계로부터 떨어뜨려놓는 게 포프가 생각한 최선책이었다.
“그럼, 이 녀석을 쓸 때가 된 건가.”
포프는 품 안에 간직했던 신의 눈물을 꺼내들었다.
제로의 대모험 제20화
-햇빛마저도 비치지 않는, 그 세계에서-
파푸니카의 국왕 레오나가 사망했다.
수십 년간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녀의 죽음은 일파만파의 영향을 미쳤다. 구심점을 잃은 세계의 왕들은 그녀를 대체할 중심을 찾기 위해 연일 회의를 거듭했다. 실상 그녀의 업적은 진행형이 아니라 완료형에 가까웠다. 대마왕 버언을 물리치고, 세계를 하나로 묶고, 세계의 마족을 토벌해 델므린 섬에 몰아넣었다. 그녀가 힘든 일을 모두 처리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받는 자는 앉아서 그 떡고물만 주워먹으면 된다. 장례식이 끝난 뒤 7일 후에 공개될 그녀의 유언장이 무슨 내용일지는 궁금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왕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이권을 걸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 유언장이 개봉되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자로 카알의 아를 왕자를 지목한다는 것이 가장 먼저 적혀 있었다. 아방의 손자인 아를 왕자는 아직 열두 살이었지만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검술로 할아버지와 판박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재였다. 게다가 마침 둘째 왕자라 첫째가 카알 왕국을, 둘째가 파푸니카 왕국을 통치하면 된다. 카알 왕국은 당연히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다른 나라도 도의적 이유로 반대하지 못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빼곡하게 기술된 유언장에는 벨더와 관련된 내용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비밀을 지켜왔던 이유는 전세계가 겪을 혼란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그 사이에 수면 아래에서 벨더와 협상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 직전 델므린 섬에 전갈을 보내 포프에게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야 벨더가 깨어날 테니 뒷일은 포프에게 완전히 맡긴 셈이었다.
델므린에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포프가 돌아오자마자 롱베르크와 작업에 들어갔다가 며칠 만에야 작업장 밖으로 나오자, 거기에 맞춰 모두 모여 술과 음식을 늘어놓고 먹고 마셨다. 명목상은 2년 만에 돌아온 포프를 맞이하는 환영파티였지만, 그곳에 있는 마족들에게는 자신들을 박해한 여왕 레오나가 사망한 것을 기념하는 파티이기도 했다.
“잘 돌아왔다, 포프. 이젠 여자도 데려올 정도의 솜씨가 되었구나. 아예 여기 살림을 차리지 그러냐?”
“포프, 저 험상궂은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아, 내가 듬직해졌다고 하네…… 노바, 농담은 그만해.”
무작정 포프를 따라 이곳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이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포프는 룬의 보정 덕분에 하르케게니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지만, 루이즈는 그것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말이 하나도 안 통해 포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술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니룬은 포프의 그림자에 숨어 나오지도 않았다. 자동인형을 포프가 파기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포프에게 붙어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저 편에서 ‘인간의 마녀가 드디어 뒈졌네’라며 껄껄거리는 마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포프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뭐라고 말하진 않았다.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그녀가 원망스러울 법한데도 롱베르크 역시 별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블랙과 델프링거는 포프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는데, 블랙이 롱베르크를 보고 기쁘게 웅웅거린 것과 정반대로 델프링거는 아무 말 없이 보통 검처럼 검집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지난번에 호되게 당한 기억이 생생한 모양이다.
말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루이즈는 포프를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포프, 포프. 그 신의 눈물이란 거 설명해 주지 않을래? 어떻게 우리가 단숨에 다른 세계로, 그것도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었던 거야?”
“아아, 이거.”
포프는 품에서 신의 눈물을 꺼냈다. 눈물처럼 길쭉한 물방울 형태를 띠고 있는 그것은 처음보다 크기가 약간 줄어들어 있었다.
“이건 이 지상의 신이 인간을 위해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이야. 이걸로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지. 소원이 이루어질 때마다 신의 눈물의 크기는 계속 줄어들고, 마침내는 사라지게 돼. 정확한 횟수제한이 없고, 내 생각엔 소원이 어느 정도의 스케일이냐에 따라 줄어드는 정도가 다른 것 같아서 함부로 쓸 순 없는 물건이지.”
“그래……”
중간까지 들뜬 채 있다가 묘하게 낙심하는 걸 보니, 뭔가 빌 소원이 있긴 했나 보다. 아쉽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이 포프의 눈에 비쳤지만, 그는 그 행동의 의미를 신경써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시공간을 이동하는 건 내 힘으론 불가능해. 루이즈의 소환주문이나, 지난번 우연히 일어났던 허무의 주문과의 충돌이 아니면 하르케게니아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 하지만 신의 눈물은 이런 것도 가능하게 하지.”
“혹시 그걸로 네 시간을 되돌릴 마음은 들지 않았나?”
롱베르크가 무겁게 물었다. 그 말에 포프는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기는 타이와 함께 모험을 다니던 때였다. 나쁜 마족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대마왕 버언마저 쓰러뜨려 지상 최고의 영광을 막 손에 넣으려던 찰나 그는 아깝게 희생되어야 했다. 하지만 신의 눈물로 그 때로 돌아가 검은 핵을 막는다면, 건재한 동료들과 함께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포프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건 아닐 거에요. 하지만 제겐 불가능해요.”
“어째서지?”
“분명히 없어야 할 존재인 내가 그리 가게 된다면 지난 50년간의 역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저 좋게 바뀌기만 한다면 가도 상관없겠죠. 하지만 만약 ‘포프’라는 비틀림 때문에 지난 50년이 붕괴해 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어요. 허무의 메이지와 싸우다 본의아니게 하르케게니아에서 튕겨져 이곳에 날아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고정된 역사축이 여전히 없는 상태라면 한번 도전해 보겠지만요.”
자신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걸어야 하는 도박은 사양이다. 게다가 그의 눈앞에는 롱베르크와 노바가 있었다. 둘 다 이 세계에서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포프가 50년 앞으로 훌쩍 날아가 역사를 바꾸게 된다면, 눈앞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더라도 경거망동할 순 없었다. 그래서 포프는 신의 눈물에게 ‘레오나가 죽은 직후의 델므린 섬으로 우릴 보내줘’란 소원을 빌었었다.
롱베르크는 그에 대해 더 물어보는 대신 노바에게 완성된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노바는 작업장에 가 엄중히 봉인된 상자를 가져왔다. 아직 근력은 젊은이 못지않을 텐데도 낑낑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며칠 전에야 완성했다. 생각보다 아주 까다로웠어. 힘의 육체를 몽땅 쏟아부어야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네가 얘기했던 대로, 이 물건은 신의 눈물이 없으면 그저 단순한 폭탄일 뿐이다.”
그는 상자째 포프에게 넘겨주었다. 생각보다 아주 묵직하다. 검은 핵만 여섯 개가 들어간 물건이니 알 만하다. 레오나의 서찰에는 왕실에 보고하지 말고 바로 게이트로 들어가 벨더와 협상을 시도하라고 되어 있었다. 레오나가 평생 지켜온 비밀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지켜져야 의미가 있다. 이쪽 세계든 저쪽 세계든 세계가 위험에 빠지면 인간들은 일단 전쟁을 일으키고 본다. 레오나라는 구심점이 없는 이상, 벨더가 부활한다는 소문은 벨더가 지상으로 나오기도 전에 지상을 파멸시킬지도 몰랐다.
포프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술잔을 쭉 들이켰다. 델므린에 자생하는 과일의 알싸한 향이 느껴진다. 술을 좋아하는 롱베르크를 위해 노바가 직접 담근 물건이다. 한 잔을 다 비운 후 포프는 상자를 들고 일어났다. 루이즈가 놀라며 따라 일어났다.
“포프, 벌써 가는 거야?”
“그래. 바로 가는 게 좋겠어.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저쪽에서 먼저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레오나가 아무리 비밀을 지켜왔다 해도, 벨더가 부활하자마자 지상에 자신의 부활을 알린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녀석보다 한 발 앞서 행동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 물론 힘으로 맞상대하려면 왕년의 용사 일행 전원이 나서야 할지도 모를 상대겠지만, 지금의 그에겐 ‘협상’을 위한 좋은 물건이 있다.
“포프.”
루이즈의 어깨를 붙잡고 게이트로 날아가려 할 때 롱베르크가 그를 불러세웠다.
“다녀와서 다시 한 잔 하자꾸나. 매일 노바와 술을 마시는 것도 이제 질렸다.”
롱베르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렸다는 듯 말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그가 던진 모처럼의 농담에 포프는 진심으로 웃어 버렸다.
“아아. 다녀오면 코가 비뚤어지게 함께 마시죠.”
-난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데……
델프링거가 롱베르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속삭였다.
게이트의 위치는 오잠 부근에 있었다. 워낙 추운 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이 많았고, 그 허허벌판 안의 작은 숲에 게이트가 있었다. 두 개의 돌을 깎아 이어붙인 거대한 문 앞에는 오잠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그 문은 원래 활짝 열려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은 정말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의 틈만 벌어져 있었다. 문에는 아방이 즐겨 쓰던 파사의 비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아방이 직접 했다고 하기에는 시기가 안 맞으니, 레오나가 아방에게 배워서 쓴 것일까? 그 파사의 비법이 마족이 지상에 올라오는 걸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에게 포프가 다가가 레오나가 보내준 통행증과 왕의 직인을 보여주자 그들은 깜짝 놀라 이들의 통과를 허가했다.
마계로의 입구는 우선 어두컴컴했다. 처음에는 한동안 직선으로 쭉, 그리고 다음에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의 길이다. 햇빛마저 닿지 않는 그 세계는 과연 멀었다. 한동안은 잘 버티던 루이즈가 점점 걷기 힘들어하자 포프는 블랙을 휘즈로 변형시켜 루이즈를 업게 했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아끼기 위해 토베루라는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어둠을 밝히기 위한 광구 하나만 둥실 띄웠을 뿐이다.
“정말 엄청난 깊이에요. 마계 사람들은 다 이 계단으로 올라온 걸까요? 올라오다 지쳐서 죽은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성큼성큼 걷던 휘즈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광구의 빛에 그녀의 새하얀 몸이 빛을 발해 길이 아까보다 환해져 있다. 그런 그녀의 등에서 루이즈가 느릿느릿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길이야, 이거. 이런 건 말도 안 돼. 이 정도의 지하에 생명체가 있다고? 이런 걸 우리 언니가 알면 당장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올걸.”
“그거 무서운걸. 난 주인님 하나만 해도 버거운데.”
“뭐야, 그거.”
맥없이 대답하더니 휘즈에게 다시 몸을 맡긴다.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포프도 마찬가지로, 그 역시 몇 번이고 머리띠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서늘해야 하는 게 그들의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의 지하는 내려갈수록 열기가 조금씩 더해지고 있다. 이미 한여름이란 말로도 모자랄 지경의 열기가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내려가자 드디어 출구가 보였다.
“아, 출구……! 저기는 좀 시원할까?”
루이즈가 다소 기운이 돌아와 밝게 말했지만 포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이즈는 잠시 후 알게 되었다.
‘맙소사……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하르케게니아의 화산 지대도 이 땅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일 것이다. 출구를 나온 루이즈의 눈앞에는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는 새카만 어둠이 자리잡고 있었고, 구름이나 달, 해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상을 밝히는 것은 끊임없이 분출하는 화산의 폭발과 마그마의 붉은 빛이었다. 그 빛에 비추어진 사물들은 모두 시뻘건 빛을 띨 수밖에 없었다. 대지는 퍼석퍼석해 어떤 식물도 자라기 힘들어 보였고,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와우! 육천 년 동안 이런 곳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조심해야 할걸, 델프. 지난번 네가 죽을 뻔했다고 징징댔던 마계의 마그마가 잔뜩 있는 곳이니까.”
-으헥…… 그렇군. 용무만 빨리 마치고 돌아가자고.
마계에 오는 건 포프도 처음이다. 아니, 그 이전의 역사를 통틀어 마계에 온 인간이 얼마나 될까. 바란이 벨더를 쳐부수기 위해 왔다지만 그는 용의 기사이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이런 곳에 왔다간 며칠도 못 가 쓰러져버릴 것이다.
어쨌든 도착했으니 할 일은 해야 한다. 포프는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화산지대 부근을 제외하곤 모두 어둠에 싸여 있어서 눈으로 수색하기 힘들다. 흘끔 머리 위를 보니 하늘이 있어야 할 공간에 바위벽들이 꽉꽉 채우고 있다. 이 머리 위에 있는 대지에 지상이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매드로아로 위를 뚫어 버리면 빛이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하다 스스로도 어이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매드로아가 위력이 크더라도, 이 정도의 방대한 크기에 아무리 쏜다 한들 바늘로 찌르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착지해 수색에 실패했다고 말하자, 그림자 안에서 니룬이 솟아올랐다.
“저기.”
소녀가 작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서 날 부르고 있어.”
“그래? 자기들이 직접 올 것이지.”
투덜거리면서 포프는 일행들을 감싸안고 토베루라를 시전했다. 너무 더워서 마력을 아끼려 걸어갔다가는 마력보다 체력이 고갈될 지경인 것이다. 이제부터 아낌없이 마력을 팍팍 써 용무를 마치고 얼른 돌아갈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구멍 앞이었다. 니룬이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이다. 니룬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자신의 머리 위였다.
“공간이……흔들린다!”
“헤에. 왕림하시는 건가.”
일전에 버언과의 싸움에서 보았을 때와 같다. 버언에게 통렬한 일격을 당해 지상의 동료들이 모두 당했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출현한 녀석. 조각상 모양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한때 마계를 버언과 양분했을 정도의 실력자, 명룡왕 벨더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작은 조각상 형태인 것을 보면 봉인이 아직 덜 풀린 것도 같았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벨더에게서 웅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왔구나. 네게 감사한다, 인간이여.
“아아아아악!”
니룬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벨더의 조각상에서 뿜어져나온 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조각상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하나씩 부스러져가며 그녀에게로 흡수되어간다. 빛을 쐬자 움직이기도 힘든 듯, 그녀는 그저 고통에 찬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포프 님!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포프!”
하르케게니아에서 포프의 최대 숙적이긴 했지만, 지금은 고향을 찾아온 어린 소녀일 뿐이다. 그녀가 벨더에게 능욕당하는 모습은 웃어넘길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휘즈와 루이즈가 거의 동시에 소리치며 포프에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는 말없이 벨더와 니룬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렇게 융합하는 모습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와 같은 걸까.’
서로 다른 두 개의 육체가 하나로 합쳐진다. 과거 자신들과 싸우던 미스트 번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 직후 젊은 버언이 나타났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니룬은 단순한 킬번의 조종자가 아니라 벨더가 직접 자신의 육체를 떼어놓았던 걸까? 포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몇 초 간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일 수 있다. 지금 이대로 니룬을 날려버린다면 벨더는 힘을 되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면 지상의 평화는 영구히 지켜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계는?’
최근 포프의 내면에 생겨난,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다. 신에게 버림받은 대지에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들. 지상에 허락되지 않은 존재라는 이유로 무참히 학살당해야 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상의 태양을 갈구하는 그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포프는 지금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조각상이 어느새 형체를 완전히 잃어갔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아까와 달라진 모습의 니룬이 고고히 서 있었다. 아까의 모습이 열 살 남짓한 소녀였다면 지금은 열대여섯 정도로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작은 뿔이 두 개 솟아 있었고, 뺨 한쪽에 ‘어둠’을 의미하는 마족의 문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부끄러움없이 나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서 오히려 지배자다운 당당함이 묻어나왔다. 그 자리의 유일한 남자인 포프는 잠시 얼굴을 붉혔지만 곧 표정을 바로잡고 그녀를 직시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내 땅에 잘 왔네. 너희들 덕분에 무사히 부활할 수 있었으니 일단 감사를 표하겠네.
그녀는 입을 벌려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은 음성이 아니라 진동이 되어 이들의 마음 속에 직접 와닿았다. 덕분에 루이즈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이즈는 살짝 뒤로 물러나며 휘즈에게 물었다.
“저게, 명룡왕……? 아까까지 니룬이었잖아?”
-그래. 아까까진 불완전했었지. 이건 실패한 주술이니까.
니룬은, 아니 명룡왕은 감았던 눈을 떴다.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버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영생에 흥미가 있었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은 얼어붙은 시간의 주문. 그래서 난 내 육체를 떼어내 고정시키고 그것으로 새로운 킬번을 만들려 했다. 나의 힘을, 자아를 가진 킬번이라면 완벽했을 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수백 년에 한 번 있는 개기일식을 기다려야 했지. 그래서 난 일단 육체와 혼을 분리한 후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그런데, 버언 녀석이 바란에게 내 동정을 흘려 버릴 줄이야!
울분을 참지 못했는지 그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자 소녀의 목소리가 아닌, 정진정명 마계의 지배자다운 용의 괴성이 사방을 메우며 퍼졌다. 자신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프 일행은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휘즈까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마력이 섞여 있는 게 분명했다. 몸부림치는 그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그녀가 계속해서 외쳤다.
-바란 따위, 내 원래의 육체였다면 상대도 되지 않았을 녀석이……! 그 놈 때문에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어! 혼은 갈기갈기 찢겨 봉인되고, 자아의 찌꺼기만 간신히 남은 육체는 암흑의 구덩이에 버려지고! 게다가 비장의 무기였던 검은 핵마저 내게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 당신 거였어, 그거?”
포프가 겨우 말했다. 그 가느다란 음성에 벨더의 울부짖음이 그쳤다. 그녀는 끼기긱 고개를 돌려 포프를 노려보았다.
-검은 핵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미안. 그거 써버렸어. 결계를 하나 만들어야 했는데, 내 힘으론 좀 벅차서 그걸로 에너지원을 삼았어. 이해해 줄 거지? 유후~”
아까까지 괴로워하던 작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능청맞은 표정이다. 빠직, 하고 벨더의 정순한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우와, 화났네 - 하는 사이 그녀는 포프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들어올렸다. 포프보다 키는 작지만 무시무시한 힘이 그 팔에 실려 있었다.
-용사도 아닌 녀석이 누구 앞이라고 이렇게 건방진 거냐. 네 녀석…… 그러고 보니 타이의 옆에서 널부러져 있던 인간 녀석이 아닌가. 그때 검은 핵에 죽은 거 아니었나?
“포프 님을 놔라!”
휘즈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와 델프링거를 후려쳤다. 벨더는 그대로 포프의 몸을 휘즈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휘즈는 이미 예상한 듯 힘껏 점프해 그를 뛰어넘으며 무방비 상태인 등을 그어갔다. 이대로는 허무하게 당할 판이라 벨더는 포프를 그녀에게 던진 후 앞으로 이동했다. 포프는 그녀에게서 떨어지자마자 토베루라를 써 아슬아슬하게 휘즈와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포프 님. 역시 지금부터 전력전개로.”
“나도 도울게, 포프. 저 녀석……정말 괴물인 것 같네.”
둘이 포프의 앞에 나서서 검과 지팡이를 벨더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벨더는 그녀들에게 대비하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포프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보실까. 그리고 어떻게 내 검은 핵을 얻었는지도 말이다.
“아아, 말하자면 복잡한데, 이거 참…… 니룬, 아니 예전의 킬번의 기억은 전혀 없나 보지? 하긴, 자아의 찌꺼기라고 했으니……
간단히 말하자면 난 다른 세계에 소환되어 갔고, 검은 핵도 거기서 발견했어. 어쩐지 나 외에도 과거에 이쪽에서 그쪽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이 세계와의 접점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문제고.“
-호오. 다른 세계…… 그렇다면, 이 지상을 정복한 이후 그쪽으로 가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군.
루이즈의 등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저 괴물은 지금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녀석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벨더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입 속으로 익스플로전을 주창했다. 벨더가 그런 루이즈를 보고 살풋 웃었다.
-재미있는 수법을 쓰려는 것 같군. 한번 해 보겠나? 단, 그것을 내게 쏘는 즉시 나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이쪽에서도 손을 쓰겠다.
“루이즈!”
포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린 루이즈가 주문의 주창을 멈추고 포프를 보았다.
“포프! 왜 망설여? 이 녀석이랑 싸우러 온 거 아니었어?”
“싸움은 나중에! 지금은 할 얘기가 아직 남아있어!”
주변을 채우고 있는 어둠 사이로, 그보다 더욱 진한 어둠이 나타났다. 물건을 수납하는 ‘공간의 틈새’이다. 그 안에서 포프가 꺼낸 것은 예의 상자였다.
“휘즈! 뚜껑을 베!”
“예!”
휘즈가 정확한 놀림으로 포프가 들고 있는 상자의 뚜껑을 베어냈다. 철로 된 뚜껑이 종이처럼 베어졌다. 포프는 그 안에서 둥글고 하얀 공을 꺼냈다. 가장 큰 사이즈의 수정구만한 그 물건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벨더가 갑자기 흠칫했다.
-너…… 너희 인간들, 이건…… 이런 물건을 만들어낸 거냐!
중간에 말을 더듬을 정도로 벨더의 충격은 큰 모양이었다.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을 향해 포프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역시 기운을 느끼나 보네. 맞았어. 이건 검은 핵이야. 그것도 여섯 발 들이짜리 초대형 폭탄이지.”
-인간! 버언의 잔재를 이용하다니 미친 거냐! 바란과의 싸움에서 멋모르고 사용했던 검은 핵 한 방으로 마계의 2할이 날아갔다! 여섯 발이면 마계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단 말이다! 이 마계가 사라지면 지상이 무사할 줄 아느냐!
“아니. 아마 지상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지만, 네가 지상에 올라온다면 역시나 피해를 입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인간이여, 정말 그것을 쓸 각오가 되어 있긴 하는 한 건가? 이 내가 전력을 다해 막을 거란 걸 알면서도?
벨더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암흑투기와 용투기를 반씩 섞은 듯한, 포프로서도 처음 접하는 낯선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투기의 강도는 최소한 늙은 버언 이상이었다. 벨더의 뺨에 있는 문신이 점차 커지며 그녀의 전신을 물들여갔고, 머리카락도 검게 변해갔다.
-오오오오오오오오!
그녀가 다시 외쳤다. 아까의 외침보다도 더욱 강맹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포프는 급히 방어막을 쳐 일행을 보호했다.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 방어막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무지막지한 압력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오르더니 몸 전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비늘이 돋아나고, 등을 찢고 날개가 솟아나왔다. 얼굴이 길어지면서 흉폭한 맹수의 이빨들이 기세좋게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루이즈는 가까이에서 본 적 있었다.
“포, 포프! 이거 설마! 예전에 너처럼!”
“아아. 그거랑은 차원이 다를 걸?”
과거 포프는 전력을 다해 드래고람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크기는 족히 20미터 이상의 거체. 하지만 용 중의 용, 명룡왕 벨더라면………… 자꾸자꾸 거대해지는 용을 올려다보며 모두는 숨을 삼켰다. 20미터 따위는 오래 전에 초월해버린, 아득할 정도의 크기의 용이 마침내 대지에 그 발을 올렸다.
-자, 다시 말해라. 너희는 정말 그 물건을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한 마디만 잘못했다간 그대로 그 거대한 발로 이쪽을 깔아뭉갤 기세였다. 루이즈는 한 눈에 다 담기도 어려운 용의 크기 때문에 마법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델프링거는 ‘제기랄! 저걸 어느 세월에 베어죽이냐!’라고 외쳤고, 휘즈 또한 막막한 표정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포프가 싸울 의지를 보인다면 죽기로 싸울 테지만, 지금의 포프는 싸울 건지 싸우지 않을 건지 꽤나 애매한 태도였다.
포프는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용한다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없앨 뿐이다!
명룡왕의 입에 검은 독기가 맺혀 갔다. 명룡의 브레스는 암흑투기가 혼합된 독. 그 독은 모든 것을 녹이고 부식시킬 수 있다. 과거 뇌룡 보리쿠스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뇌룡에게 착실히 데미지를 누적시킬 수 있어서였다. 그러한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는다면 포프가 방어막으로 막는다 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자아, 인간이여.
공포를 보여라.
벨더는 브레스를 당장에라도 토해낼 듯 고개를 숙였다.
루이즈가 비명을 질렀다.
델프링거와 휘즈가 동시에 뭐라고 외쳤다.
그리고 포프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명룡왕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검은 독기를 위협적으로 호흡하며 벨더가 낮게 말했다.
그 모습에 포프는 가볍게 웃고는,
“너, 왜 쏘지 않아?”
-…………!
“난 알고 있지. 왜 네가 그 브레스를 쏘지 못하는지.
그거 쓰는 순간 너도 소멸되는 거지?”
-헛소리!
용이 내뱉은 한 조각의 독기가 포프에게 떨어졌다. 포프는 즉시 매드로아를 영창해 그 독기에 내쏘았다. 검은 독기는 빛기둥에 휩쓸려 사라져 가고, 그 빛기둥의 길목에 목을 늘어뜨리고 있던 벨더는 황급히 목을 펴 일격을 피했다.
포프는 재차 말했다.
“몇 분 전까지 영혼이었던 주제에, 그런 큰 힘을 쓸 수 있겠어? 합체한다고 마력이 돌아오는 건 아닐 거야. 버언도 합체한 이후의 마력은 늙은 버언보다 못했지. 타이와 싸우면서 이미 마력의 상당 부분을 허비했으니까. 하물며 마력이 제로인 상태였던 네가 불완전한 육체와 합쳐 봤자 오래 가지 못하지. 즉 그 브레스는 쏘는 순간 마력이 고갈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거야.”
-으…………윽. 네, 이놈~!
용이 브레스를 머금은 채 앞발을 들어 땅을 내리찍었다. 포프가 토베루라로 피하고, 휘즈가 루이즈를 안고 자리를 이탈했다. 목표를 놓친 채 땅에 엎드린 용이 다시 남은 한쪽 앞발을 거칠게 휘저었다. 무서운 바람이 일어나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날려버리려 했다. 일행 모두는 그 바람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포프는 급히 진공주문을 써 바람의 진행을 차단했다. 흙먼지가 일어나며 뜨거운 바람이 대지에 일었다. 그 소란 속에서 모두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흙먼지가 걷히자, 이들의 전방에는 니룬의 모습으로 돌아간 벨더가 알몸인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 벨더. 괜히 겁 주느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니까 그런 거야.”
-인간………… 놈에게 희롱당하다니…… 캬아앗!
그녀는 입을 벌리더니 어둠의 독기를 내쏘았다. 하지만 그 기세는 아까 포프에게 내쏜 브레스의 파편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휘즈가 나서서 델프링거로 독기를 흡수해 튕겨냈다.
-으악! 써! 써! 이것이 인생의 쓴맛이란 거냐~!
델프링거의 비명을 듣고 아차 싶었던지 휘즈는 급히 천을 꺼내 검을 닦으며 ‘죄송해요, 아저씨!’라며 연신 사죄했다.
포프는 다시 공을 챙겨들고 느긋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쓴 게 최후의 공격이었는지 소녀의 몸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저런 무기력한 소녀의 모습이 벨더의 본체라니, 아마 롱베르크에게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이면의 모습을 가진 적이라면 용모에 속아선 안 될 테지만. 포프가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자 벨더는 눈만 치켜뜨며 포프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이제 물을게.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지상을 정복하고 싶어? 지배하고 싶어?”
-……그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버언과 달리 지상의 존속을 원했지. 마지막에 킬번이 초치긴 했지만 말야.
그러니 말해 줘. 당신이 원하는 건 뭐야? 태양이야, 아니면 지상이야?“
-그릇이 작은 놈이로군. 둘 다를 원한다. 어느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을 지배욕이라고, 정복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인간?
킬번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 검은 핵을 폭발시키려 했지만 그런 건 내 뜻이 아니었다. 자신이 먹을 수 없다고 음식에 침을 뱉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 난 달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 마침내 손에 넣고야 말지……
“하지만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포프가 놀리듯 말하자 벨더는 꿈틀거리며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분명 아까까진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몸을 일으키고 있다. 휘청휘청 일어나는 그녀의 몸에 마계의 마력이 흡수되어가는 흐름이 포프에게 느껴졌다.
‘역시 마계가 고향이란 건가.’
마계의 대지는 독기에 가득 차 있지만, 그 독기가 벨더에겐 오히려 양식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벨더는 다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포프는,
은빛 공을 들어올렸다.
-너.
벨더는 완연한 살기를 띠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격할 정도의 힘이 모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휘즈나 루이즈가 공격해도 먹힐 정도였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포프를 향한 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꼬리 만 개가 된다는 것은 그녀의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
벨더의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포프와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 안팎. 마력이 떨어졌다곤 해도, 명룡왕의 육체는 건재하다. 단 한 번의 도약에 그녀는 포프의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손에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그대로 휘둘렀다. 포프의 팔을 찢어 공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프는 이미 그 이전에 공을 머리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이익!
헛손질을 한 벨더가 이를 갈며 힘껏 뛰어올랐다. 은빛 공은 포프의 마력을 전달받았는지 포프가 던진 힘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는 토베루라로 공을 앞질러 간 후 그대로 공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때 눈부신 빛이 공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터져나와 벨더의 육체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벨더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추락해 걸레처럼 처박혔다.
-아, 으윽, 하으윽! 칵!
땅에 격돌한 충격보다 더한 아픔에 벨더는 알몸인 채로 대지를 뒹굴었다. 은빛 구를 끌어안으려 한 가슴 부위에 화상처럼 피부가 크게 짓물러 있었다. 바둥대는 그녀에게로 마계의 독기가 모여들었지만 상처는 치유되기는커녕 더욱 깊숙이 패였다. 소녀의 모습을 한 명룡왕이 괴롭게 땅을 구르고 있는 모습은 과연 이 자가 한때 마계를 제패했던 자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 정도였다.
포프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자신을 죽이리라. 급하게 독기를 끌어모았지만 자꾸만 가슴의 상처를 통해 새어나가 버린다. 아까 허세를 통해 인간들을 겁먹게 만들어 저 비장의 무기를 빼앗으려던 전략이 최악의 결과로 치환되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통탄하며 최후를 기다렸다. 저 마법사가 ‘소멸’의 힘을 다루는 것을 아까 보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떨어진다면, 과연 소멸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뿐일까, 아니면 수천 년을 이어온 혼까지일까? 마지막으로 든 의문이 서글퍼져 그녀는 쿡쿡 웃었다.
포프의 손에 빛이 맺혔다. 벨더는 이를 악물었다. 소년은 잠시 마계의 지배자를 내려다보다 그 손을 그녀의 가슴에 갖다댔다. 빛이 그녀의 상처에 빨려들어가자 깊숙하게 패였던 상처가 서서히 수복되어갔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뜨더니 노성을 발하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베호마를 거는 데 여념이 없던 포프가 그 일격에 맞아 저만치로 날아갔다. 루이즈가 나서려 했지만 휘즈가 다시 제지했다. 그녀는 가만히 포프를 가리켰다. 포프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날 죽일 셈이 아니었나? 아니면 이 기회에 날 희롱해 보겠다는 건가! 그런 모욕을, 감히 이 몸에게!
“……당신 말야.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정말 수천 년 동안 생각이 굳으면 참 무섭구나, 란 생각이 들어. 기껏해야 백 년의 수명을 가진 인간은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일 테지.”
-…………?
“한 가지 물어볼게. 검은 핵은 분명 엄청난 위력의 폭탄이지. 난 내 손에 들어온 검은 핵을 자세히 분석해 본 적 있어. 내가 가진 모든 지식, 그리고 하르케게니아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내린 결론은 이것이 생물이나 마찬가지란 것이었어. 아니, 정확히는 검은 핵의 중심물질인 마정석이 생물이라고 해야겠지. 탐욕스럽게 마력을 흡수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위의 마력이 고갈되면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니까 말야. 그렇다면, 이렇게 마계 안에서 알아서 성장하는 검은 핵의 용도가 과연 폭탄 제작에만 쓰이는 걸까?”
-당연한 소리. 저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물체가 폭탄 말고 어디에 쓰인다는 말이냐?
“그게 고정관념이란 거야, 임마!”
포프는 두 팔을 벌리고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은빛 공은 계속계속 올라가 이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루이즈. 내가 쓰는 폭렬주문과 섬열주문의 차이가 뭔지 알아?”
“으, 응?”
느닷없이 포프가 등 뒤의 루이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걸 알 리가 없어 루이즈는 허둥댔다. 그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지 바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섬열주문은 열을 최대한 압축해 일직선으로 내쏘는 거야. 반면 폭렬주문은 열기를 응축해 공 모양으로 만든 후 그 공을 던져 상대방에게 물리적 타격과 마법적 타격을 동시에 입히는 거지. 따라서 그 공은 자연히 빛과 열기를 내뿜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라고 말한다면 포프를 실망시키는 일일 것이다. 루이즈는 총명한 학생이었고, 곧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 하며 포프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더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포프는 설명을 계속했다.
“열은 응축될 수만 있다면 빛과 열을 내뿜어. 그렇기에 주문으로 그 열의 응축을 지속하려면 막대한 마법력을 필요로 하겠지. 하지만 만약, 만약에 말이야,
열을 가두고 고정화시킬 수 있는 오리하르콘 구체와,
영구적으로 타오를 수 있는 연료가 있다면?“
-뭐……………………?
이제야 벨더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경악으로 물든 얼굴을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먼 하늘에 불덩어리가 조금씩 생성되는 게 보였다. 그 열기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혀를 낼름거렸다.
-그만둬! 이건 미친 짓이야!
포프가 하려는 게 무슨 짓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검은 핵 여섯 개로 벌이는 도박은 너무도 위험하다. 만약 저 정도의 허공에서 검은 핵 여섯 개가 폭발한다면, 지상은 뿌리부터 반 넘게 날아간 후 그대로 마계 위로 붕괴되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육망성의 검은 빛이 음산하게 번쩍이는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몸서리쳤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은 포프는 설명을 재개했다.
“너희는 마정석에 육망성을 새겨넣어 파괴를 위한 도구로 만들지. 하지만 나와 롱베르크, 노바는 거기 착안해 정반대의 물건을 만들었어. 파괴의 육망성을 생성의 오망성으로 만드는 작업 말이야. 이미 육망성이 새겨진 검은 핵을 오망성 형태로 재배치하고, 가운데에 핵을 박아넣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크게 바뀌지.
거기에 안전장치가 하나 더해졌어. 우리 인간이 쓸 수 있는 최고의 비술 중 하나인 파사의 비법. 보통 그 비법에는 휘석이나 성석을 사용하지. 하지만 저 비법에는 그것들을 넘어서는 최상위 도구인 휘성석 다섯 개가 사용되었어. 과거 미나카토르를 발동할 때도 쓰였던 역사적인 유물이지. 그것들이 오망성의 각 꼭지점에서 검은 핵의 불길한 마력을 억제하고 있다는 게 이해돼?“
그래. 저것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과거의 일부분을 버려야 했다. 이것으로 아방의 제자임을 나타내주는 상징물은 영영 사라졌다. 자신의 가장 빛났던 부분도, 자신이 정의의 사도임을 자각시켜주는 용기의 녹색 빛도 이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재료로 마계에 빛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척박한 대지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자신도, 이곳에 없는 동료들도 만족할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징은 사라졌지만 자신과 동료들, 스승과의 유대는 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포프는 서서히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불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구체의 구조는 포프가 말한 대로 오망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검은 핵이 내부에 있었고, 그것을 오리하르콘 외피가 감싸고 있는 식이었다. 그저 꽉 막힌 공이라면 검은 핵이 발동하는 순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롱베르크는 몇 년에 걸쳐 그 구체에 미세한 구멍을 수도 없이 뚫어놓아 빛과 열기가 자연스럽게 새어나갈 수 있게, 그러면서도 단숨에 폭발하지 않게 조정했다. 그건 결과부터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었다. 휘성석에 파사의 비법까지 써서 단단히 고정시킨 오망 마법진의 검은 핵은 훌륭히 인공 태양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도 불안정해서, 약간의 충격이 가해지기만 해도 당장 터져버릴 수 있었다. 애당초 단숨에 터지는 성질을 가진 검은 핵을 서서히 타오르게 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벨더 또한 검은 핵을 최초로 사용한 마족이었다. 검은 핵이 그저 조용히 타오르기만 하는 물건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눈에는 불꽃의 점에서 불꽃의 구 정도로 커진 허공의 물건이 이제 막 불붙은 시한폭탄처럼 보였다
-그런 손장난 따위로 조종할 수 있는 검은 핵이 아니다! 당장 저 불을 꺼! 멈춰!
“아아, 손장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의외로 포프는 싱겁게 수긍했다.
“당신도 검은 핵을 꽤 많이 다루어봤을 테니, 저게 당장은 괜찮더라도 늘 불안정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즉 우리 지상의 인간은 마계를 협박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돼. 저 빛과 열은 말을 잘 듣는 대가로 부수적으로 따라온 거고.”
-목적은 그거였나. 지상의 패자인 파푸니카의 여왕이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말이지. 하지만 너희 뜻대론 되지 않아. 차라리 날 죽이고, 네 말을 들을 다른 지배자를 찾아라. 하지만 이 마계에 그런 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거다.
벨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했다. 지상의 인간과는 다른, 신에게 버림받은 자만의 긍지란 게 있다. 모든 걸 다 갖춘 채 태어나는 지상의 생명체가 그런 긍지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마 자신이 죽고 새로운 마계의 지배자가 탄생한다 해도 그 역시 벨더와 같은 선택을 하리라. 태양을 향한 갈망과 지상의 생명체에 대한 증오, 이것이야말로 마족의 삶의 원동력. 인간에게 굴종한다는 건 이러한 원동력을 모조리 포기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포프는,
“…………일 줄 알았어?”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자, 손 내밀어 봐.”
그녀는 머뭇거리다 포프를 때렸던 손을 내밀었다. 포프는 스스럼없이 악수하듯 그 손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와 포프 모두 물컹 하는 이상한 감촉을 손과 손 사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녀가 손을 펴 보려 하자 포프는 그 손을 꽉 잡아 펴는 걸 제지했다. 하지만 지금도 힘은 벨더 쪽이 강하다. 벨더가 힘을 줘 빼내려 할 때 포프가 낮게 말했다.
“신의 눈물.”
-뭐!
“버언이 박살낸 게 오랜 시간에 걸쳐 부활해, 내가 회수했지. 그게 지금 너와 내 손 안에 들어있어.
내 소원은 저 구체를 완전한 태양으로 만드는 거야. 엄청나게 스케일 큰 소원이지만, 이쪽도 이를 위해 그 동안 소원을 거의 빌지 않았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 애당초 저 물건의 완성도도 높으니, 신의 눈물이 안정성만 높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인공 태양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
-………………
“지금 너와 난 동시에 신의 눈물을 쥐고 있어. 신의 눈물은 소원의 스케일에 따라 줄어드는 크기가 차이가 나지. 아마도 이 소원 하나만으로 신의 눈물은 거의 소진되리라 예상해. 한마디로 말해 빠듯할 것 같다는 얘기야.”
-그런데 왜 나와 함께……
벨더의 의문은 당연했다. 신의 눈물은 주인을 전능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극상의 아이템. 그런 것을, 그것도 빠듯하다는 주제에 어째서 자신과 함께 쥐는 것인가? 그때 포프는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갔다. 숨소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자, 이제 난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게. 아까 당신이 말했지? 태양도, 정복도 포기할 수 없다고. 그건 어찌 보면 당신같은 존재에겐 당연한 것일 수도 있어. 수천 년을 기다리며 준비하면 어떤 것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인간의 인생은 짧고, 그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것을 포기해야 다른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항상 고민하고 또 고민해. 마족은 이런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인간은 그런 마족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수 있어.
간단한 문제야. 이 빠듯한 신의 눈물에 당신이 다른 소원을 빌면 그걸로 끝나. 그 소원이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둘째치고, 저 인공 태양은 영원히 제대로 된 태양이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해. 불안정하게 떠 있으면서 수상한 빛을 내뿜을 뿐이지. 그래도 좋다면, 마계와 인간계 모두를 제패하려는 그 꿈이 태양보다 우선순위에 있다면, 지금 신의 눈물에 그 소원을 빌어봐.“
-무슨, 그런 바보같은 소릴!
“셋 셀 동안 결정해. 하나.”
-자, 잠깐! 너무 빠르지 않나!“
“둘.”
-인간! 기다리라니까!
“셋!”
외침과 동시에 둘의 마주잡은 손 안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은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갔다. 과연 저 빛은 생성이 될 것인가, 파멸이 될 것인가. 여차하면 디스펠로 지워버리겠다는 각오로 루이즈는 주문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허공을 비상한 빛이 이들의 시야 너머로 사라지더니, 인공 태양의 광점이 점점 넓어져 갔다. 불꽃이 점점 타오르며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처음엔 광점이던 그것이 광선으로, 이어서 광면으로 진화되어갔다. 그 크기는 가히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태양에도 비견될 정도였다. 불안정하던 빛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해 사방을 고루 비추었고, 따뜻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 무더위 속에서 열기가 굳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마계 전역을 놓고 보았을 땐 꼭 필요했다. 마계의 마그마가 흐르지 않는 지역에서는 사막의 밤처럼 항상 냉기가 가득했는데, 이 냉기들이 조금씩 열기에 녹아 갔다. 수천 년 동안 한결같은 모양이었던 저 먼 산의 만년설이 햇볕을 받아 정상 부분이 우르르 쏟아져내리는 것을 벨더와 포프는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던 작은 동물들이 갑작스런 햇빛에 놀라 굴 밖으로 뛰쳐나와 빛을 받고, 힘겹게 밭을 갈던 농부들은 태양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온 마계의 생물들이 환호했다.
햇빛마저 없는 이 버림받은 세계에서,
모두의 발치에 저마다의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이제야 그들은 빛이 무엇인지, 어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포프가 꼭 잡고 있던 벨더의 손을 놓았다. 따뜻한 손의 느낌이 빠져나가자 벨더는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포프의 두 손이 벨더의 손을 다시 잡았다.
“고마워. 네가 정말 다른 소원을 생각했다면 저건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그 상황에서 다른 걸 비는 건 어지간한 머저리라도 못할 짓이다.
“그럼, 지상 정복은 이제 포기한 거야?”
-그럴 리가! 이 몸은 오직 지상 정복만을 위해 달린 몸이다! 네 녀석에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만으론 내 숙원을 포기할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씩씩대는 벨더의 모습을 보고 루이즈와 휘즈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받을 건 다 받은 주제에 여전히 자기 고집만 부리려는 걸까? 하지만 포프는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벨더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태양이 마계를 비추고 있었다. 비록 지상의 푸른 하늘과는 전혀 다른 흑빛 하늘이었지만, 태양의 빛만은 지상의 태양보다도 훨씬 강렬했다. 그 빛이 눈부셔 눈을 살짝 찡그리며 포프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태양을 가리켰다.
-이제 마계는 항상 낮이겠군. 숙면을 취하기 어렵겠어.
저건 얼마 정도의 수명을 갖고 있을지 알고 있나?
“아니. 롱베르크가 만든 거니 오래 갈 거라고밖엔 말 못하겠네.”
-그런가. 그렇다면 그걸로 좋다.
저 태양을, 나 벨더와 마계의 신민들은 인간과의 약속의 증표로 받아들이겠다.
저 태양이 떠 있는 한, 우린 지상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마계의 지배자가 마계를 걸고 선포했다. 여전히 모습은 알몸의 소녀인 채였지만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그 뒤에 있는 거대한 용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포프는 잠시 멍하니 있다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정말? 고마워. 이야기가 잘 통해서 다행이네.”
명룡왕의 결단을 접한 인간 치곤 너무 담백한 반응이다. 벨더는 기가 차 그에게 물었다.
-……이봐. 넌 항상 이렇게 긴장이 없이 살고 있나?
“아니. 난 항상 긴장하며 살고 있는 소심한 마법사야. 단지, 이번 일은 막판에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어. 자신을 죽이고 다른 지배자를 찾더라도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말에서 마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볼 수 있었으니까.”
-고작 몇십 년 산 인간인 주제에 몇천 년을 산 나를 재 보았다는 거냐?
“잰 게 아니야. 믿었을 뿐이야.”
-믿어?
비로소 포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상대방을 덩달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노인이 손자에게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런 것과 흡사했다.
“인간은 조건 없이, 댓가 없이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야. 이것저것 따져 보고 믿는 게 아니라 정말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믿어버릴 수 있어. 물론 이건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의 일부야. 그리고, 난 그런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어.”
그러면서 정말 바보처럼 활짝 웃었다.
그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벨더는 다시 물었다.
-그건 비효율적인 행위가 아닌가? 난 항상 모든 것을 생각해보고 결단을 내린다. 상대방이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혹은 배신할 것인가, 혹은 마지못해 협력하는 것인가 등을 따져보고……
“그건 마족들이나 할 수 있는 방식이지. 인간도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너무 비효율적이야.”
포프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벨더는 말이 끊겼다는 불쾌감보다 포프가 이어서 할 말이 궁금해 대답을 재촉했다. 포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답해했다.
“으으~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분명 더 멋있는 말이 있었는데……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이래. 마족의 생명은 길지.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짧아. 섬광처럼 한순간 지나가는 그 순간에,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서로를 믿는 게 더 효율적이야. 아니, 효율적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어. 모두가 하나가 된 세상을 난 아주 잠깐이나마 보았고, 그 순간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고메의 희생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었던 그 때.
지상의 사람들은 잠시 동안의 그 기묘한 감각을 곧 잊어버렸지만, 고메의 희생을 눈앞에서 본 타이와 포프, 레오나는 그 감각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바꾸었다.
타이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대마왕 버언을 물리쳐 지상을 구했다.
레오나는 마족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포프는 인간과 마족의 뿌리깊은 증오를, 그저 ‘믿는다’는 한 마디로 허물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문득 벨더에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타이와 버언의 싸움을 구경하러 갔다가 타이의 눈이 죽은 것을 보고 실망해 돌아간 직후. 천계의 신전에서 다시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려던 그에게 작은 외침이 들렸다. 비록 작았다고는 하나 천계까지 들릴 정도로 강렬한 외침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의미를 모른 채, 그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그 말은 ‘섬광처럼……!!’이란 단 한 마디였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이제 되었겠지. 돌아가라, 인간들. 용건은 끝났을 터.
그녀는 포프 일행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아니, 마계의 지배자가 침입자들에게 하는 말이니 명령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전처럼 차갑지 않았다.
-섬광 같다는 네 녀석들의 짧은 삶 동안에 나를 다시 만날 일은 다시 없겠지.
그러나 이 만남, 너희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이 내가 틀림없이 기억해주마.
명룡왕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일행이 가는 길을 더는 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포프는 그런 그녀에게 활기차게 ‘그럼 잘 있어!’ 하고 인사한 후 미련없이 돌아섰다.
“가자, 블랙, 루이즈! 단숨에 나가자!”
“단숨에?”
“아아. 미궁 탈출 주문과 리리루라를 섞으면 나갈 수 있어. 왜?”
“이이…… 그런 거 있으면 진작에 쓰지 그랬어!”
캬오~ 하는 루이즈의 외침을 잔향으로 남긴 채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벨더는 눈을 감았다 뜨고,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뜨거운 태양빛이 망막에 맺히자 잔상처럼 그 빛이 아프게 박혔다.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잔상은 남아 있었다. 무의식중에 눈을 비비다, 문득 명룡왕은 수천 년 동안 알지 못했던 고독이란 감정을 이들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섬광이란, 결코 섬광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성대를 울려 목으로 직접 소리낸 그녀의 맑은 음성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은 채 태양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잔상이 박힌 투명한 눈물이 몇 방울, 햇볕을 받아 덥혀진 대지 위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