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대모험 최종화 그 후, 일테면 후일담
포프는 루이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미안! 이미 예상했던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미안!”
“……난 네 그 말투 때문에 더 열받는데 말이지.”
그녀가 허무의 기운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게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흉악한 발차기나 채찍이 포프에게 작렬했을 것이다. 휘즈는 루이즈와 포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애당초 포프 일행이 이 세계로 건너올 수 있었던 건 신의 눈물의 힘이었다. 즉 그것이 없으면 돌아갈 방법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마계에서 태양을 만들기 위해 그 귀한 물건을 몽땅 소비해 버렸단다. 그래놓고는 태연하게 ‘이제 우리 돌아갈 수 없겠네’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손놓고 있을 순 없는 일이라 포프는 궁여지책으로 손 안에 남아있던 신의 눈물의 찌꺼기를 중심으로 파사의 마법진을 그리고, 파사의 비술로 그 마법진을 강화했다. 신의 눈물은 가장 정순한 힘의 결정체. 그렇기에 정순한 공간에 있다면 그만큼 회복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그 생각이 맞았는지, 아니면 포프가 매일같이 그 마법진에 무식할 만큼의 마력을 부어넣어서 그런지 몰라도 신의 눈물은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포프와 휘즈, 루이즈, 델프링거가 머리를 맞대로 토의해 본 결과 한 반 년 정도면 한 번 정돈 쓸 수 있을 정도의 형태가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루이즈는 좀 더 이 물건을 키운 후 하르케게니아에 들고 가고 싶어했지만 포프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세계의 법칙 자체가 다르니만큼 그 효용이 변할 우려가 있고, 또 학원이나 왕가 등에서 냄새를 맡는 순간 루이즈를 노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 말에 겁먹었다기보다는 포프의 딱부러진 태도에서 안 된다는 걸 확실히 느꼈는지 루이즈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뭐, 반 년 정도라면 휴양 왔다고 칠 수 있겠네.”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기 이전부터 허무에 조금씩 잠식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이후로 매사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허무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았고, 손에 엔드 발리의 반지도 끼고 있으니 폭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허무의 메이지로서의 삶을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와 포프는 델므린 섬에 돌아왔다. 포프는 도착하기 무섭게 마계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상당수의 마족들이 마계에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대마왕 버언보단 그나마 명룡왕 쪽이 무난하고, 또 마계에 해가 뜬 모습을 꼭 자기 눈으로 보고 싶다고들 했다. 지상은 여전히 이들에게 접근불가 지역이었으므로 포프는 이들을 순간이동주문으로 게이트까지 데려다주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반복했다. 그 사이 루이즈는 롱베르크와 노바에게 이쪽 세계의 말을 배우는 데 전념했다. 원래 총명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흘 남짓 지나자 더듬거리면서 간단한 회화 정도를 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렇게 대규모 작업이 끝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프와 루이즈, 롱베르크, 노바가 나란히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이 날의 저녁은 실험정신에 불타는 루이즈의 스튜. 차마 입으로 말해선 안 될 재료들이 다수 섞여 있었지만, 남자들은 그녀가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두고 묵묵히 먹어치웠다.
식사가 끝나자 포프와 루이즈, 휘즈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달리 어두운 색 위주로 입는데, 그것도 몸에 딱 달라붙는 것들이다. 어쩐지 밤손님이 되려는 듯한 분위기들이다.
“어이. 가면은 그만둬.”
루이즈가 좀 지나치게 나가는 것 같아 일단 말려 두었다. 어차피 루이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체형이나 머리카락만 봐도 단숨에 눈치챌 텐데, 머리카락은 가릴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가리다니 무슨 센스인가.
“어울리지 않아?”
루이즈는 아쉬운 듯 나비 가면을 벗어 한쪽에 던져 두었다.
그에 반해 휘즈는 검은 색 도장을 몸에 칠하는 것으로 간편하게 변장을 끝냈다. 그녀야 여차하면 지팡이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사실 그녀 정도라면 이번 목표를 수행하는 데 따른 장애물을 전원 제거하며 나갈 수도 있을 텐데, 주인 포프가 ‘최대한 안 들키고 납치만 하기’란 주문을 했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나가기로 했다.
“그럼 갈까.”
포프는 파푸니카 왕가의 직인이 찍힌 서찰을 손에 들고 그대로 불태웠다. 레오나가 죽기 전 제작한 최후의 친서가 그의 손에 불타 없어졌다. 마계로 폭탄을 갖고 갈 시점이라고 적힌 앞장이 먼저 불타고, 뒷장도 곧 재가 되었다. 현 파푸니카 왕국 왕위계승자 1순위인 아를의 이름이 적힌 부분은 가장 나중에 불탔다.
그 후, 일테면 후일담
-용사 탄생-
파푸니카 왕궁은 벌집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간밤에 왕궁에 침입자가 들어왔다. 몇 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국답게 궁의 경계태세는 매우 엄중한 편이었지만 그 경계를 말 그대로 유유히 피하며 궁의 최심부까지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는지, 만약 국왕수업을 받던 중인 아를 왕자가 납치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들이 왔다 간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전군을 풀어 왕자를 찾으려 할 때, 그것을 말린 사람이 있었다. 파푸니카 궁정마법사단장인 현자 로이언이었다.
“왕자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는 묘하게 자신있는 태도로 선언했다.
‘우웅…… 추워……’
아를은 눈을 떴다. 아름다운 금발이 짚더미처럼 보기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시각적으론 보기 좋지만 머릿결이 좋지 않아 자꾸만 뻗치는 건 아방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아방은 아예 머리를 돌돌 말아 다녔다고 하는데, 아를도 요즘은 그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채 머리를 정리하고 나자 슬슬 주위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어어?’
항상 눈뜨면 볼 수 있는 지겨운 방이 아니었다. 그는 조촐한 오두막 안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침대는 짚을 넣어 만든 것이었고, 탁자와 의자는 대리석이 아니라 나무를 깎은 것이었다. 그는 신기해하며 오두막을 한 바퀴 돈 후 밖으로 나왔다. 문 옆에 기대 서 있던 소년이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여어. 이제 일어났어?”
“넌 누구야?”
아를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 소년의 얼굴은 통 낯설었다. 아를이 반말을 하자 소년은 대뜸 주먹을 들어 아를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야!”
“열두 살이면 열여섯 살인 형에게 존댓말…… 아, 아차! 타이나 흉켈이나…… 아니, 미안.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존댓말 따위 쓰지 않아도 돼.”
갑자기 횡설수설하더니 손으로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이렇게 남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몇 년만의 일인 것 같아 아를은 잠시 멍하니 포프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사이 포프의 손에서 발해진 호이미가 그의 머리에 난 혹을 잽싸게 없앴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뗀 소년이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포프. 만나서 반가워, 아를.”
“포프? 흔한 이름이네.”
“흔해? 어디가?”
“몰라? 포프는 옛날 용사의 일행이었잖아. 그래서 남자아이의 이름을 타이나 포프로 짓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들었는걸.”
“……어쨌든. 아, 그리고 저쪽에 오는 두 사람 보이지? 분홍색 머리카락이 루이즈, 은빛 여자가 블랙이야.”
“블랙? 은빛인데? 아니, 잠깐. 사람이…… 아니잖아!”
아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그녀들은 먼 발치에 있었지만, 휘즈의 경우 꽤 눈에 띈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금속생명체 휘즈를 바라보던 아를이 포프에게 외쳤다.
“여기가 어디야?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여긴 델므린. 바깥 세상에는 나쁜 괴물들이 득실댄다고 알려진 섬이지.”
“그, 그런 곳으로 왜 날……! 싫어! 잡아먹힐 거야!”
아를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휘즈에게서 방향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가기도 전에 포프에게 덜미가 잡혔다. 아를이 바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하자 포프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도망치려는 거야? 실망인걸. 용사로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용, 사……?”
그의 움직임이 그쳤다. 포프는 그를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루이즈와 휘즈가 도착했다. 휘즈를 본 아를은 떨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냐. 용사는 이제 없다고 들었어. 모험도 끝났고, 남은 건 괴물들뿐이고, 이제 그 괴물들만 해치우면 진짜 평화가 찾아온다고……”
“그래? 그럼 넌 용사가 되고 싶지 않은가 보네. 알았어. 돌려보내줄게. 그럼 됐지?”
흥미가 뚝 떨어진 눈으로 아를을 보며 포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명백히 실망했다는 그 태도에 아를이 발끈했다. 항상 천재라는 칭찬만 받고 살아온 소년은 어설픈 도발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냐! 난 용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용사는 이제 없다는 걸 아니까 이러는 거야! 날 어린애로 보지 마!”
“스페셜 하드 트레이닝.”
포프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단어를 내뱉었다. 아를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포프는 그것을 설명하는 대신 떠돌이 약장수처럼 자신있게 말했다.
“오직 일주일! 일주일만 하면 당신도 용사가 된다! 어때, 속는 셈치고 일주일만 딱 투자해보지 않겠어?”
“그, 그렇지만…… 여긴 괴물이 사는 델므린 섬이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여기 괴물들은 사람을 습격하지 않아. 내가 지켜줄테니 안심해도 돼. 자, 하겠어, 말겠어? 물론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신용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알아둬야 해. 만약 지금 하지 않는다면 넌 다시 이 세상에서 용사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무리들 속에 끼어야 하고, 평생 용사가 될 수 없을 거야.”
“……으음…………”
“뭐, 정식으로 수련을 마치고 나면 뭔가 상도 있는 것 같은데, 어때?”
“으으으으음…………”
아무래도 용사가 되고 싶은 소년다운 꿈과 나이에 걸맞지 않은 현실감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다. 아를은 머리에 김이 난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포프는 속으로 투덜댔다.
‘레오나, 각오해. 이 빚은 저 세상에서라도 받아낼 거라구.’
포프가 태워버린 레오나의 서찰 마지막에는 ‘장차 파푸니카의 후계자가 될, 카알의 왕자 아를을 용사로 만들어 줘’란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아를은 많은 것을 배웠다. 생존기술에서부터 검술, 마법, 정신력, 철학 등 용사가 갖춰야 할 기본 지식들을 세 사람에게 혹독하게 배웠다. 검술은 휘즈가 맡아 가차없이 대지참과 해파참을 익혀나가게 했다. 공렬참은 포프와 휘즈 모두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라 이론만 가르쳐줬는데 마지막 날에 와서 그 요령을 깨달은 것 같았다. 마법은 그의 기본이 탄탄했기에 라이데인 등의 용사 전용 주문을 계약해주고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신력과 철학 부분은 루이즈와 포프가 번갈아가며 가르쳤는데, 특히 루이즈는 막 배워 어눌한 말로 더듬거리면서도 귀족의 명예와 자긍심, 그리고 상황에 맞춰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수업을 종료할 시간이 다가왔다.
“정말 잘 했어. 이것으로 넌 훌륭한 용사야.”
늦은 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포프는 아를의 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슥슥 쓰다듬었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수업만 받아왔지만, 이렇게 용사라고 인정받게 되니 일단은 기쁘다. 궁의 도서관과 연병장만을 오가며 틀에 박힌 수련만 거듭해 왔던 아를은 어느새 이 훈련을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내가 왜 왕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 있는 거지?’ 란 생각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수련의 틈틈이 델므린 섬을 탐험하며 말끔히 사라졌다. 이곳이 델므린 섬이란 건 진짜였지만, 괴물들은 모두 순했다. 포프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면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나이의 소년이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보면 일단 호기심부터 생기는 편이다. 나중엔 수업을 후다닥 해치운 후 포프나 루이즈, 휘즈를 졸라 길을 나서기도 했다.
소년이 두근두근 기대하며 포프를 바라보았다. 포프가 뭔가 멋있는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흠칫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의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어 보았지만 먼지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으음, 생각해보니 아방의 목걸이가 없잖아. 줄 수가 없겠네.”
“에이, 포프도 참. 농담하지 마. 할아버지의 목걸이가 왜 이런 데 있겠어?”
이미 포프의 실없는 성격을 아는 터라 아를은 농담이려니 생각하고 웃었다.
“그런가?”
포프는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이마의 머리띠를 벗어 소년의 이마에 둘러주었다. 머리띠는 낡고 여기저기 해져 있어 주인과 함께 험한 나날을 보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 됐다.”
포프는 매듭을 마무리짓고 씩 웃었다. 난생 처음 이마에 머리띠란 걸 해 본 아를도 신기한 느낌에 만족스러워했다. 항상 부스스했던 앞머리를 뒤로 넘기니 한결 깔끔해 보이기도 했다.
“흠흠. 아를, 넌 이것으로 수업 종료야. 내 제자…… 가 아니라, 아방의 대리로서 널 새로운 아방의 제자로 인정해 주지.”
“아까부터 농담만 계속 하네, 포프. 재미없어~”
“재미없다잖아. 그만해, 포프.”
“루이즈 씨도 참……”
루이즈가 사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놀려대느라 쿡쿡 웃었고, 휘즈는 그런 루이즈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포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
“자, 아를. 처음에 약속했지. 수업이 끝나면 상이 있을 거라고.
아를은 지금 무엇을 원해?“
“음…… 일단 궁에 돌아가야지. 날 걱정해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안심시켜주고 싶어.”
“소원은 그것 뿐? 소박하네.”
“………………………………사실은 하나 더 있지만.”
“뭔데?”
아를은 얼굴이 빨개져 우물쭈물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 같다고 놀리기 없기야…………나도 할아버지처럼 멋있는 필살기를 쓰고 싶어. 아방 스트랏슈를 쓸 수 있어야 용사가 될 수 있잖아. 하지만 포프에게 말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니까.”
“이야, 그것 참 어려운 문제네. 확실히 내게 말해서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따뜻하게, 자신의 스승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포프는 소년을 품에 끌어들였다.
-왜냐면, 넌 벌써 그걸 쓸 수 있는걸.
“…………………………!”
아를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화려한 벽지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거친 탁자와 의자, 소박한 회반죽 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방인 왕궁의 침실 그대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을 휙 들쳐보았지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그곳에서 입었던 질긴 명주옷이 아닌 비단 잠옷이었다.
“…………꿈인 거야?”
소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도저히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상냥한 포프, 고결한 귀족이었던 루이즈, 엄격했던 휘즈의 모습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다는 증거는? 증거가 없다면 그저 꿈일 뿐. 자신은 결국 꿈에서 용사놀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야!”
그는 강하게 부정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는 은으로 된, 한쪽 날의 반 정도가 톱니처럼 되어 있는 멋진 검이 있었다. 누군가가 선물해준 걸까? 하며 몇 차례 붕붕 휘둘러 보았다. 확실히 꿈을 꾸기 전보다 실력이 약간 나아진 것도 같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좀 더,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꿈 역시 다른 꿈처럼 몇 시간 뒤 잊혀질 뿐이다.
-왜냐면, 넌 벌써 그것을 쓸 수 있는걸.
어디선가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깨기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를은 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았다. 하지만 사방의 문은 꼭 닫힌 채였고, 방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결국 결심했다.
‘포프는 분명 할 수 있다고 했어.’
검을 들고, 심호흡을 한다. 평소의 자세와 달리 역으로 잡은 후 옆구리 뒤로 서서히 당긴다.
‘포프는 내가 용사라고 했어.’
검을 가상의 칼집에 넣는다. 그 상태로 검에 자신의 힘과 기술, 그리고 마음을 불어넣어 -
‘난…… 용사라구!’
아를의 검이 힘차게 허공을 찢었다.
아를과 창문과의 거리는 수 미터. 마법을 쓰지 않으면 깰 수 없는 거리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일격은 유리창을 단숨에 박살내고, 그것도 모자라 창 앞에 있던 거대한 나무를 싹둑 베어나갔다. 나무둥치가 쿵 하며 대지에 추락하자 정원 부근에 있던 하인들의 방에 불이 밝혀지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왕자의 방을 가리키며 바쁘게 그리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아를은 그들의 발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어.”
가볍게 중얼거려 본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흘러들어온 시원한 밤바람이 자신의 이마를 스치고, 그 이마에 단단히 동여매어진 머리띠를 가볍게 나풀거리게 했다. 이것은 정말로 용사가 되었다는 징표가 맞는 걸까. 팔락이는 머리띠를 소중하게 손으로 잡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소년은 행복하게 웃었다.
포프와 루이즈, 휘즈는 왕궁의 지붕 위에 걸터앉아 아래의 소란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깊은 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왕자를 재운 후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나서 가만히 기다려보니 왕자가 느닷없이 아방 스트랏슈로 창문을 박살내버리는 게 아닌가.
“저 녀석, 할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용사가 되겠네.”
포프가 기가 막힌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루이즈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저기, 포프. 아직 채 1개월도 지나지 않았어. 네 예상 대기 시간은 반 년이었지?”
“응.”
“응, 이라고만 말하지 말란 말야……”
말을 꺼낸 루이즈가 포프의 반응에 실망했는지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포프에게 뭔가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런 루이즈의 심리를 모를 포프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루이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 그럼 본격적인 모험을 떠나 보실까요, 주인님.”
루이즈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갈 길을 확신하고 있는 그 모습에 새삼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르케게니아에서도, 이곳에서도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를 사랑하려, 모두를 구원하려 노력한다. 메이지의 정점에 서 있다는 대마도사, 헥사곤 메이지이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그 힘을 남을 위해 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어둠 속에서 루이즈의 입이 움직였다.
“포프.
포프는 언젠가 힘이 정의가 아니라고 했지.
지금, 내게 포프의 정의를 다시 들려줘.“
포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이즈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야 몇 번이라도 들려줄 수 있지.
수행해서 쌓은 힘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
그것이 내 정의다.”
틀림없다.
이 사람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다.
그 한결같음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남자이다.
“포프.”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숨기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포프의 품에 폭 안기며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 마음껏 모험하자.”
“그래.”
모험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험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한, 모험의 시대는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주인님, 저도!”
휘즈가 칭얼거렸다. 포프는 그런 휘즈도 끌어당겨 함께 안았다. 은색 피부가 달빛에 반짝이는 그 모습은 그녀의 전신이 하나의 커다란 보석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얼굴이 붉게 물든 루이즈에게, 그리고 호기심과 기대로 빛나는 눈을 한 휘즈에게 포프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들 모두가 내 최고의 순간이야. 루이즈, 블랙, 델프. 너희들 덕분에 정말 밝게 빛날 수 있었던 것 같아. 정말 고마워.”
-흥! 잊었으면 삐칠려고 했다!
델프가 포프의 허리춤에 매달린 채 자못 당당하게 외쳤다. 포프는 손가락을 튕겨 검자루에 가벼운 딱밤을 먹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즈와 휘즈가 웃으며 한 손을 내밀자 포프는 두 손으로 그 손들을 마주잡았다.
한 손은 따뜻하고, 한 손은 차갑다.
하지만 그 두 손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건 매드로아 같잖아’
생각해보니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 웃음을 입에 걸어둔 채 포프는 주문을 외웠다. 포프와 일행들에게 빛무리가 강림하더니, 그들 모두 빛에 휩싸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험의 신호탄이 지금 파푸니카의 밤하늘을 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