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렐 2 ‘그 멋진 클리셰를 여러번’
기분 좋게 눈을 붙이며, 유키는 늦잠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미 요란스레 우는 자명종은 활동을 멈췄다. “이거라면 댁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며 요시노가 언젠가의 생일에 선물해 준 시계다.
확실히 마치 요시노처럼 큰 소리가 울리지만, 익숙해져 버리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기에 지금쯤은 다시 잠드는 스위치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는 기색을 느꼈다.
지금의 상태라면 기합을 넣으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일어나는 건 포기했다. 솔직히 말해서 매번 되풀이되는 요시노의 폭력적으로 잠을 깨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불만을 토하고 싶지만, 자력으로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왠지 기분이 언짢아지는 거다.
이건 그거다. 요시노는 선천적인 사디스트여서, 유키를 괴롭히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키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을 때의 요시노는 괜시리 기뻐 보인다. 그런 거였나. 일어나도 지옥, 안 일어나도 지옥. 그렇다면 한순간의 쾌락을 고른다.
그렇기에 유키는 자는 걸 골랐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불을 통해 들려오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 무시하고 자기로 작정했지만, 거기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언제나 계속 당하고 있는데 가끔은 되돌려주는 건 어떤가 하고.
어차피 이 뒤에는 몸을 흔들어서 깨우려고 하겠지. 봐라. 한숨을 쉬고 손을 뻗어 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 타이밍을 노려서…….
팔을 잡아 휙 잡아끌었다.
“……꺅?!”
“으헉!!”
―――어라?
원래라면 팔을 잡아당기면서 몸을 일으켜, 그대로 침대에다 쓰러뜨려 위치를 뒤바꾸려고 했었는데.
작고 가냘픈 요시노니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무게라고 할까 저항이라 할까에 의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짓눌리는 꼴이 되어 좀 괴롭다.
그런데 요시노 녀석, 어느샌가 굉장히 커졌다고 할까 살집이 좋아졌다고 할까, 이 얼굴에 닿는 건 뭐야? 좀 괴로워서 치우려고 손을 뻗는다.
“―――읏, 꺄, 어, 유유, 유키 군?!”
“……에?”
거기서 간신히 상대가 요시노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레이였다.
키도 크고, 무도를 익히고 있기에 나름대로 힘도 있는 레이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임에도 저항을 해내, 그 결과 끌려서 쓰러지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견디려 한 결과 어중간하게 유키의 몸과 교차하는 듯한 꼴로 유키의 위에 올라탄 형상이 되어 있었다.
유키가 치우려 하다 잡은 건 레이의 가슴이다. 교복으로 몸을 감쌌으면서도 제법 포동포동한 감촉은 필설로 다할 수 없고.
바로 눈앞에 뺨을 붉게 물들인 레이의 얼굴이 있다. 눈을 뜨고 유키를 바라보고 있다.
“저저저저기, 유, 유키 군! 안돼,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마, 마음의 준비나, 소, 속옷도.”
“에?”
“아아아으아으, 아아, 아무것도 아아, 아니니까.”
다시금 새빨개져 지금 당장에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은 기세로 눈을 뱅글뱅글 돌리는 레이.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봐도, 레이의 얼굴은 역시나 굉장히 단정하고 아름답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어쩐지 조금 사랑스럽다.
그러자.
“―――레이 쨩, 유키 아직 안 일어났니? 정말로 유키는”
초조해졌는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비춘 어머니. 그 움직임이 멈춘다.
그것도 그렇다. 친아들과 소꿉친구인 소녀가 침대 위에서 뒤얽히듯 서로 껴안은 데다, 추가로 말하자면 쓰러진 순간에 레이의 교복 치마가 말려 올라가서 속옷이 보일 듯이 되어있는 모습.
“유, 유키, 레이 쨩?!”
“어, 엄마. 아니, 이건.”
“둘 다 이러면 안 되잖아. 시간도 없는데 아침에 정사에 빠지면……하려면 돌아온 다음 하거나, 좀 더 빨리 마쳐줘…….”
그걸 듣고.
“아, 아주머니, 아니에요 저희들은 저 그 딱히!”
더더욱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패닉 상태에 빠진 레이. 레이가 위에 올라가 있으니까 침착해지면 간단히 몸을 떨어뜨릴 수 있을 텐데, 혼란에 빠져있는 레이는 바둥바둥거리듯 움직여서, 그 결과 더더욱 곤란한 자세가 되어가 궁지에 빠져가 버리는 거였다.
아침의 혼란이 끝나고 채비를 갖춰 거실에 들어가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엄마와 레이가 동시에 유키 쪽을 바라본다.
“언제나 고마워, 레이 쨩. 유키도 참, 어머니인 내가 깨우러 가도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는걸. 레이 쨩이라면 요리도 재봉도 잘하고, 빨리 유키의 신부로 와 주렴.”
“아하하, 하, 하아…….”
“엄마는 이제 됐으니까. 자, 가자. 레이 쨩.”
어머니의 농을 흘려듣고 현관을 향한다. 그보다, 저번에는 요시노에게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을 텐데. 얼마나 적당한 성격인지 알 수 있다는 거다.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 허둥지둥 레이가 쫓아왔다.
“어라, 오늘 요시노는?”
“당번이니까 먼저 가겠다고.”
“아, 그런가.”
레이는 가끔 아침연습이 있어서 아침은 대게 유키와 요시노 레이 셋이거나, 유키와 요시노 둘이서 등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처럼 레이와 둘이서 등교한다는 건 글쎄, 얼마만의 일일까.
“아, 새로운 반에는 이제 익숙해 졌어?”
“응, 뭐어 새롭다고 해도 요시노도 코바야시도 있어서, 그리 새롭다는 느낌은 안 들려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아직껏 꼬리를 끌고 있는지, 이야기도 어딘가 거북하여져 버렸다. 미묘하게 편찮은 분위기를 깨트리기 위해 유키는 짐짓 농담인체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아까 전은 미안. 무심코, 요시노라고 생각해서.”
“에, 요, 요시노하고는 아침부터 그런 거 하고 있는 거니?!”
뭘 망상한 건지 입가를 누르고 새빨개진 레이.
“그, 그런 게 아니라. 언제나 요시노가 깨울 때 지독한 짓을 하는 거, 레이 쨩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약간 복수해 줄까 해서.”
“뭐, 뭐야, 그랬구나. 아하하, 좀 깜짝 놀랐어.”
“나도 놀랐어. 그게, 그렇게 부드러워서.”
“엣.”
유키는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 부정하려고 해도, 손바닥으로 확실히 느꼈던 그 감촉을 떠올려 버린다. 곁을 걷는 레이도 눈을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감추려는 듯한 동작을 취해 버린다.
다시금 분위기가 나빠지려고 하는 상황을, 이번은 레이가 억지로 돌리려 했다.
“아, 좀 너무 느긋이 걸은 것 같아. 조금 서두를까.”
손목시계를 보고 레이가 가볍게 달려나간다.
이대로 느긋이 계속 걸었다간 확실히 지각해 버릴 것 같았다. 뒤를 따라 유키도 달려나간다.
다리가 길고 운동신경이 좋은 레이는 가볍게 달려도 나름대로 속도가 나온다. 늦지 않도록 유키도 기어를 넣으려 했다.
그러자.
“우왓?”
길모퉁이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나왔다.
앞을 달리고 있던 레이는 검도로 기른 반사신경과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순식간에 몸을 틀어서 피했다.
하지만 뛰쳐나온 사람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균형을 무너뜨렸고, 한편 유키는 극히 평범한 운동신경의 보유자였다.
결과―――
“우왓!”
“꺄악!”
정면충돌을 일으켜 유키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괘, 괜찮아, 유키 군?!”
레이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아무래도 이마를 세게 부딪쳐 버린 모양이어서 머리가 어질어질거린다. 제법 단단한 거랑 부딪쳤으니, 혹시나 상대도 이마를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괜찮을지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아파……어딜 보고 달리는 거야!”
하고, 상대에게 공격적인 말을 먼저 먹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유키라 해도 열을 받는다. 애초에 주의가 부족했던 건 양쪽 모두일 텐데. 사과하고자 했던 생각은 금세 사라져, 대신에 튀어나온 건 요시노를 상대로 단련된 깐죽이는 말투.
“뭐야,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야. 갑자기 뛰쳐나온 건 그쪽이잖아?”
“우와, 여자애를 상처입혀놓고 그거야? 조금 미안하다곤 생각 안 하니?”
“그러니까 완전히 그대로 돌려줄게. 애초에, 여자애라니…….”
거기서 간신히 유키는 눈앞의 여자애를 주시했다. 유키와 마찬가지로 쓰러져서 길가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린 모습이어서, 짧은 치마 아래의 그것이 유키의 눈으로 날아 들어왔다.
유키의 눈길을 느끼고 그 여자애도 눈치를 챈 건지 당황하며 다리를 닫아 치마를 손으로 누른다.
“최악이야! 변태! 짐승! 뭐, 뭘 보고 있는 거야!”
“바보, 누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걸 볼까! 나는……으헉!!”
놀랍게도, 그 여자애는 잽싸게 일어나 유키의 정강이에 로킥을 처먹였다. 체중이 제법 실린 무거운 킥이었다.
그리고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혀를 내민다고 하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메롱’을 날리고 달려가 버렸다.
“아야야야……뭐, 뭐야, 저거. 폭력녀잖아.”
얻어맞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더러워진 교복을 턴다.
릴리안 학생복을 입고 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독한 꼴을 당했네……아~ 갈까, 레이 쨩.”
마음을 추스르고 학교로 향하려고 소꿉친구인 키 큰 소녀 쪽을 보자.
왠지 레이는 미묘하게 차가운 눈으로 유키를 내려다보면서.
“……유키 군, 야해.”
라고 말한 거였다.
하루의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유키는 힘없이 걷고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운이 없었다.
수학 수업에서는 과제 범위를 착각하고 있어서 대답을 못하고, 체육 수업에서는 다른 학생과 부딪쳐 굴렀고, 점심시간 때는 매점에 홍차를 사러 갔더니 품절이었고, 그 끝에 건네받은 건 야자 주스. 일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유키는 싫어했고, 레이의 도시락에 어울릴 리도 없다.
기억을 되새겨보면 아침의 그 사건이 모든 일에 꼬리를 잇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 버린다.
“구질구질한 표정 짓지 마라니까. 이 뒤에 즐겁게 보내면 되잖아. 끝이 괜찮으면 전부 괜찮다고.”
곁을 걷는 코바야시는 평소처럼 발걸음도 가볍다.
뭐가 대체 그렇게 즐거운 건지 물어보면, 그 이유도 역시 쓰잘데기 없다. 동아리 권유가 넘치는 이 시기, 새로 1학년이 된 귀여운 여자애들을 방과후 이런저런 곳에서 볼 수 있다던가.
공학이 되었다고는 애도 아직껏 릴리안은 여자 학생 쪽이 많다. 비율로 놓고 보면 7:3 정도일까. 그리고 릴리안의 여자는 레벨이 높고, 지금도 아가씨는 많다.
“뭐야, 벌써 시들시들해 졌어? 뭐어 확실히 요시노 쨩이라는 상대가 있으니까 그런 기분이 들지도 않겠지만.”
“그러니까 요시노랑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시시때때로 듣는 말인데도 조건반사적으로 반론해 버린다. 요시노와 레이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태어났을 때부터라는 느낌이다. 유키의 집 옆이 요시노의 집이고, 그 다음 집이 레이의 집. 그래도 요시노와의 일만이 클로즈업되어 버리는 건 역시나 요시노와 같은 학년이기 때문이겠지.
어째선지 반이 같아지는 일도 많고, 서투른 주제에 신경 써주려는 듯 나에게 상관해 온다. 함께 있는 일이 많은데다가 요시노 자체가 눈에 띄는 존재기도 하니 어느샌가 주위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하자면 아무래도 요시노는 미소녀인 모양이다. 그러니 더더욱 눈에 띈다는 모양이었다.
“넌 네가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 있는 건지 이해하고 있지 않아. 요시노 쨩 하나만이 아니라, 레이 선배까지 있다고 하는데.”
코바야시의 설교인지 푸념인지 알 수 없는 불평을 흘려 들으면서 교정으로 나간다. 코바야시의 ‘미소녀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는 실로 쓸데없는 이유기는 하지만,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소중하다. 덧붙여서 그 리스트는, 뒤쪽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소문도 흐를 법한 물건이다.
“아직 전원을 본 건 아니지만, 올해의 1학년도 레벨이 높다고. 저번에 굉장히 귀여운 애를 봤어.”
“헤에.”
유키도 남자다. 귀여운 애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흥미가 끓지 않을 리 없다.
“이름은 아직 모르겠지만, 무지막지 귀여운걸. 위험해, 그거.”
“위험한 건 네 머리겠지. 너무 흥분하지 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시끄럽네. 나만치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어, 오오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딱 그 애가.”
“에?”
코바야시의 목소리 톤과 눈빛이 변한다.
거기에 따라 유키도 주위에 눈길을 돌려보지만, 방과후가 되고 아직 시간도 그리 지나지 않았기에 동아리에 힘쓰는 학생, 귀가하려고 하고 있는 학생 등 제법 많은 학생들의 모습이 있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바로는 알지 못했다.
“봐, 저 애야.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는…….”
“응~?”
그쪽을 보자.
여자애 하나가 확실히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더욱이, 중간에 이쪽을 눈치채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보다, 저건――
“뭐, 뭐야.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고……호, 혹시나 나한테 첫 눈에 반해서?!”
“아니…….”
유키가 코바야시에 대해 코멘트를 꺼내기 전에, 그 여자애가 눈앞까지 찾아와서 입을 열었다.
“유키 오빠, 드디어 찾았다ー.”
“안녕, 쇼코.”
“오, 오빠?!”
옆에 있던 코바야시가 굳어 있다.
정면에 서서 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건 나이토 쇼코.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다. 유키와의 관계는 초등학생 때에 속해있던 보이 스카우트의 동료. 한 살 연하인 쇼코는 왠지 유키를 따르고 있다. 처음에, 활동 중에 넘어져서 상처를 입은 쇼코에게 응급처치를 해 준 덕일지도 모른다.
그 이래, 보이 스카우트에서는 언제나 유키의 뒤를 따라 걷게 되었다. 보이 스카우트는 초등학생 중에 그만둬 버렸지만, (그 무렵 몸이 약했던 요시노가 휴일에 유키가 어딘가에 가 버리면 무진장 기분이 나빠져서 날뛰었기 때문이다) 쇼코와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는 느낌으로 계속되고 있다. 방학 같은 때에 공연에서 만나거나 편지를 교환하거나 하면서.
“잠깐 기다려, 유키치. 나는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다고! 애, 애초에 중학교 때도 본 적 없고.”
“쇼코는 다른 학구였으니까.”
“맞아. 모처럼 같은 학교에 들어왔는데, 지금까지 계속 볼 수 없었다니, 저를 피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빼쭉거리며 쇼코는 귀엽게 화낸다. 진심으로 화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미소가 지어진다.
“우연이라니까. 이만큼 넓은 학원이고, 학년도 다르니까.”
“정말로요? 저, 릴리안에 들어왔다고 이야기 했었죠. 유키 오빠, 제가 정말로 들어왔는지 찾아 줬어요?”
“억지 부리지 마.”
“자, 자, 잠깐 기다려 유키치.”
코바야시가 교복 소매를 당겨서 쇼코에게 등을 향한다.
“너, 요시노 쨩이 있으면서 이런 귀여운 애한테까지 손을 대고 있었던 거야?”
목소리를 낮춰 물음을 꺼내는 코바야시.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설명한 대로야. 아니, 아무리 봐도 그렇겐 안 보여. 네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야 등을 작은 소리로 떠들고 있자.
“기다렸지, 쇼코. 뭐 하고 있니?”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저기…….”
“……헤에, 쇼코가 말하고 있었던 그 ‘오빠’? 나한테도 소개해줘.”
“응, 좋아. 저기, 유키 오빠.”
그 소리에 돌아보자.
“……엑.”
“아, 아침의 물방울 팬티.”
입에 담은 순간에 저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눈앞의 여자애는 분노의 형상으로 바뀌어 유키를 노려본다.
“어머, 노리코 쨩, 오빠하고 아는 사이니?”
“이런 변태랑 아는 사이일 리가 없잖아. 아침부터 갑자기 남의 속옷을 엿보는 것 같은 사람이랑.”
쇼코에게 ‘노리코 쨩’이라고 불린 여자애는 틀림없이 아침에 부딪혔던 애였다. 가지런히 자른 검은 머리칼, 기질이 강함을 드러내는 듯한 눈동자, 겉모습만을 보면 일본 인형 같지만, 고풍적인 일본 인형치고는 기질이 드세고 말본새가 너무 나쁘다.
“무슨 소리야, 뛰쳐나온 건 양쪽 다잖아. 이쪽도 자칫했다간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아아 그렇습니까, 것 참 유감이네요. 상처를 입었던 편이 전 세계의 여성을 위해서도 좋았을 텐데.”
“대체 뭐야, 아침부터 보고 싶지도 않은 걸 본 내 입장도 되어 봐. 덕분에 오늘 하루 내내 변변찮은 일이 없어. 아침부터 마가 끼었으니까.”
“뭐, 뭐야. 사실은 기뻤던 주제에. 야한 눈초리로 지긋히 보고 있었던 주제에.”
“뭐라고?”
“뭐, 뭐가.”
서로 이마를 서로 붙이듯 노려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코바야시와 쇼코가 각각 친구의 몸을 당황하며 억누르고 있다.
“자, 잠깐 노리코 쨩, 무슨 일이니?”
“어, 어이 유키치, 진정하라니까.”
간신히 두 사람을 서로 갈라놓았다.
날뛰는 숨을 내쉬며 대치하는 두 사람.
이윽고.
“……가자, 쇼코. 기분 나빠.”
“노, 노리코 쨩.”
“쇼코도 조심하는 게 좋아. 유감이지만 널 볼때도 수상쩍은 마음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유키 오빠에 한해서 그런 일은 없어~.”
울분을 풀 길이 없는 단발머리 소녀와 어떻게든 달래려 하고 있는 쇼코는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 중간에 이쪽을 돌아본 쇼코가 ‘미안해’라는 느낌으로 입을 움직였지만, 그걸로 유키의 화가 들어갈 리도 없다.
코바야시의 팔을 떨쳐내며 두 사람과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참나, 올해 1학년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자식이 있네.”
울분을 드러내듯 입에 담자.
“그래도 아까 그 ‘노리코 쨩’이라는 애, 제법 귀엽지 않았었나?”
“하아?! 저거의 어디가. 건방질 뿐이잖아.”
“그럴까. 뭐, 요시노 쨩 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유키치로선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쳇, 결국 마지막은 거기냐?”
“당연하잖아. 두 사람의 지긋지긋한 사이는 끊을 수 없는 운명이니까. 자.”
어설프게 한쪽 눈을 감은 코바야시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해했다. 요란한 목소리로 소란떨며 다가오는, 가냘프지만 태풍 같은 기세를 가진 사람.
“어이, 유키. 오늘 내 쇼핑 같이 가 주기로 약속했었잖아ー?!”
“뭐야, 데이트였냐.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 요시노 쨩.”
“데, 데, 데이트 같은 거 아니야! 그냥 살 게 많으니까 짐꾼으로 딱 좋은 것 뿐이니까, 착각하지 말아줘 코바야시 군?”
“오케, 오~케이. 그럼, 유키치. 열심히 염장질하라고. 너무 다른 여자애들한테 눈을 돌리고 있으면 요시노 쨩도 정나미가 떨어질 거다?”
“시꺼ー, 후딱 가.”
밉살스런 소리를 하는 코바야시를 휙휙 떨쳐버린다. 모처럼 방과후의 시간을 써서 어울려 줬는데 사귀는 보람이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요시노는 의미를 잘 모르는 건지, 허리에 팔을 대고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뭐야, 뭔가 있었니?”
“아니, 딱히. 단지 물방울이…….”
“물방울?”
“아니, 아, 아무것도 아냐.”
말하면서 무심코 눈이 요시노의 치마를 향해 버린다. 치맛자락에서 뻗어나온 가는 다리는 병약했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건강해져 왔다고 생각한다. 색기같은 건 느껴지지 않지만.
“……요시노는 줄무늬가 많으려나.”
“하아? 무슨 이야기?”
“응ー, 이쪽 이야기야. 그럼 후딱 가자. 어디 가기로 했었지?”
“차암, 어제 말했잖아? 쿠션을 사고 싶으니까 역 앞의…….”
불만스런 말을 흘리면서도 요시노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요시노와 비슷한 타입인가 생각했지만, 이렇게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눠 봐도 요시노가 상대일 때는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까 전과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그래도.
한동안 못 보는 동안에 더욱더 귀여워진 쇼코. 그리고 상급생인 유키에 대해 겁 없이 달려들어온 소녀.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이 왠지 묘하게 뇌리에 남았다.
<판명 스테이터스>
니죠 노리코 (new) ··· 드셈, 연하
나이토 쇼코 (new) ··· 여동생
<발생 이벤트>
레이 ‘아침의 포옹’
노리코 ‘근접조우’
쇼코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