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방에서
당신과 나의 방에서
옥상 문을 열자 찬바람이 훅 끼쳤다. 미리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지만 갑작스런 냉기에 몸서리칠 수 밖에 없었다. 미리 올라와 있던 다른 사람들은 문 열리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 곧 관심을 끊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야, 새끼야. 우리가 바본 줄 아냐? 니 윗도리 이거 얼마야?”
“시, 십오만원요.”
“근데 왜 가지고 다니는 돈은 이 따위야, 임마. 너 지금 장난하는 거 같지? 지금 머릿속으로 빨리 경찰서 가서 신고하고 싶지? 그건 너가 이 바닥을 몰라서 그래. 내가 지금 널 칼로 찌른다고 짭새들이 뜰 거 같냐? 걔네가 그 수많은 사건들 제쳐두고 이리로 달려올 것 같아? 그렇게 생각되면 한번 소리라도 질러 봐. 저어기 파출소 보이지? 저기다 대고 크게 한 번. 왜, 못 하겠냐? 소리 질러 보라고, 새끼야!”
멀리서 봐도 제법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뺀질이와 츄리닝을 걸친 3인조 녀석들의 일상적인 대화. 늘 생각하는 거지만, 한 편의 랩을 듣는 것처럼 거침없다. 이 바닥에서 두어 달만 구르면 깡패들은 래퍼가 된다. 말을 더듬는 깡패는 별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무기나 눈빛으로 위협하는 수밖에 없다. 저 녀석들은 그런 점에서 기가 막힌 팀이었는데, 리더 원출이는 언젠가 삥 뜯다 말고 나라의 경제와 양키들의 보이지 않는 침략에 대해 웅변을 토했을 정도로 달변이었고 - 초등학교 때 웅변대회에서 상도 탔다고 한다 - 민구는 칼 다루는 솜씨, 병석이는 눈빛이 특출했다. 어느 날 셋은 먹잇감이 없나 탐색하러 오 분 간격으로 이 옥상에 올라왔고, 즉석에서 바로 팀을 결성했다고 한다.
언제 봐도 저 팀이 일하는 모습은 제법 프로 같다. 원출이는 뺀질이의 정강이를 연신 걷어차고, 나머지 둘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거나 마침 옥상에 굴러다니던 쇠파이프를 집어들고 괜히 야구 배트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누가 저 녀석들을 보고 깡패가 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는 가출 청소년인 줄 알겠는가. 내가 감탄어린 시선으로 녀석들을 보는 동안 뺀질이는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척 보기에도 돋보기 안경에 키 168센티, 몸무게 53킬로의 남자를 신용하긴 어려웠나 보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반쯤 부러진 담배가 나왔다. 기역 자로 꺾어져 덜렁거리고 있었지만 아직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으로 잘 고정시키고 반대쪽 주머니를 뒤졌더니 라이터 대신 구멍난 주머니만 만져졌다.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바늘과 실을 사러 가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방치하고 있었는데, 오늘 깜박하고 여기다 라이터를 집어넣었던 모양이었다.
“원출아! 일 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라이터 있냐?”
쇠파이프를 아예 골프치는 것처럼 붕붕 휘두르던 병석이가 나를 째려보았다.
“아이씨. 일 하는데 거 방해 좀 하지 맙시다. ”
“누가 방해한다고 했냐? 불만 좀 빌려줘. 한 대 피우고 바로 들어갈 테니.”
“야, 그냥 줘라 줘. 들어간다잖냐.”
원출이는 뺀질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툭 내뱉었다. 병석이의 손이 힙합 스타일로 여남은 개의 주머니가 달린 바지로 내려갔다. 여기저기 더듬는 꼴을 보니 자신도 어느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었는지 헷갈리는가 보다. 차라리 주머니마다 번호를 붙여 놓고 지갑은 2번, 담배는 3번, 라이터는 8번 식으로 기억한다면 편할 것이다. 그때 녀석이 지금 내가 막 6번 주머니로 명명한 곳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보나마나 어제 삐끼 노릇을 하면서 나눠주던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왠만하면 라이터 좀 가지고 다니슈! 제길, 돈 뺏는 우리가 오히려 돈푼 쥐어줘야 할 것 같은 인상이니.”
“니네가 돈 준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형이 정말 돈 없는 거 잘 알잖냐.”
병석이의 손이 성냥갑을 던졌다. 직육면체의 종이상자는 허공을 날아왔고, 난 그것을 잡기 위해 하늘을 보았다. 서울의 하늘은 황사로 부옇게 찌들어 있었다. 만약 김수영이 살아돌아온다면 ‘푸른 하늘을’이 아니라 ‘황사’란 간략한 제목을 선택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난 2년 전의 시험에서 과락을 면했을 것이다. 아니, 과락을 면해봤자 탈락은 확정이었으니 별 상관 없지만.
이제는 날지 못하는 비둘기처럼 비틀거리며 내 손에 내려앉은 성냥갑 안에는 내 담배처럼 한 개비의 성냥만 있었다. 좀 기가 막혔지만 공짜로 받은 거니 고맙게 쓰는 수밖에 없다. 조용히 성냥을 꺼내들고 칙 긋자 호롱불처럼 파들거리는 자그만 불이 일어났다. 가만히 담배에 갖다대려는데 옆에서 퍽 소리가 났다. 흘끗 돌아보니 원출이가 기어이 뺀질이를 친 모양이었다. 코가 터져 피가 줄줄 흐르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삼인조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갔다. 저 계단의 끝에서 삼인조는 다음 사냥감을 찾을 것이다. 어쩌면 뺀질이가 도망가기 전에 한 번 더 마주칠 수도 있겠지. 그건 별로 좋은 꼴이 아니고, 나도 그 꼴을 보는 건 편치 않다.
“휴지 없냐?”
“어,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이거 써라.”
어제 맥도널드에서 천 원짜리 햄버거를 사 먹으며 한 움큼 집어온 티슈뭉치를 던져주었다. 뺀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마 날 녀석들의 일행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게 오해받아도 당연하겠지만, 내게 벗겨먹을 것이 백결선생의 집에서 옷을 훔치는 것 만큼이나 지난한 일임을 깨달은 삼인조 녀석들과의 무언의 협정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저기.”
“뭐냐?”
“소, 손에.”
“앗뜨!”
반쯤 숯으로 변한 성냥을 얼떨결에 집어던졌다가 이내 후회했다. 성냥은 찬 바닥에 닿자 이내 피식 꺼져 버렸다. 문득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본 시험을 가채점했던 날이 떠올랐다.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그 상실감. 밤새 주먹을 쥐고 소리죽여 끅끅댔던 그 기분이 엉뚱하게 되살아났다. 아까까진 담배를 상당히 피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절박하게 피우고 싶어졌다.
“야. 불 있니?”
“아, 예, 예. 지금 드릴게요.”
녀석은 피를 스윽 훔치더니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순간 피식 웃었다. 라이터의 기름은 바닥에 간신히 고여 있는 정도였다.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다행히 조심조심 켜보니 살짝 불이 나왔다.
그리고 그 때, 당연하다는 듯 담배가 부러졌다.
코를 틀어막으며 나와 담배를 불안하게 살피던 녀석이 내게 말했다.
“저기요, 담배는 없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
녀석이 내 눈치를 보다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나도 담배에 미련을 끊고 학원을 나왔다. 삼인조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삥 뜯은 걸로 점심을 사먹으러 간 건지도 모른다. 난 삥 뜯은 것도, 뜯길 것도 없는 터라 터벅터벅 고시원으로 걸어갔다. 고시원에는 밥이 있다. 반찬은 각자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뭘로 지었든, 지은 지 얼마나 지났든 밥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면 단물이 나온다. 요즘은 그게 내 반찬이다.
시험에 떨어진 게 이번이 몇 번째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건망증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동안 손 대본 시험의 종류만도 대여섯 가지는 된다. 마치 로또라도 뽑는 듯한 기분으로 시험을 보고, 결과를 보고, 다음 시험을 보고. 그러는 사이 주변은 조금씩 변해 갔다. 한 달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반찬을 놓고 가시던 부모님이 어느새 가끔 날아오는 생활비 봉투 겉면의 이름 석 자로 대체되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결혼할 때마다 내가 내는 축의금의 액수는 줄어갔다. 나와 같은 점수대의 인간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보다 높은 점수를 가진 학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싸고 맛있는 식당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울면서 떠나가고, 왠지 호프집이 슬금슬금 들어섰다. 거리는 식당, 학원, 호프집 세 종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을 채우는 사람은 예외없이 나 같은 인간이었다. 저기, 돈이 모자란데 술만 마실게요. 아니요, 안주는 됐구요. 강냉이만 주세요.
호프집을 지나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다. 늘상 보던 길이었지만 볼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할 만큼 굉장한 경사였다. 지난 겨울은 정말 끔찍했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곳을 걸어내려가다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솔직히, 죄송스럽지만, 그때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보다 모의고사 평균점수가 2점 가량 높은 녀석이었다. 녀석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전국에는 수많은 녀석들이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나 둘 쯤 없어진다고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생기진 않는다. 그건 말하자면 산더미처럼 쌓여져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계란바구니에 계란을 하나 더 얹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길을 올라가 고시원에 도착했다. 희망 고시원. 지금은 희 자가 떨어져 망 자만 남아 있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지만 용케 유지되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아직 바글바글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덕분에 좀 괜찮다 싶은 고시원, 즉 복도의 너비가 1미터, 혹은 그 이상인 곳은 모두 만원이었다. 게다가 요금도 하루가 다르게 올랐기 때문에 웬만한 곳에서는 배겨낼 수 없었다. 그래서 고생 끝에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은 정말 굉장한 곳이었다. 모든 것은 당연했다. 당연이란 머리말 속에서 5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올라가는 길목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악취가 나는 것도, 4층까지가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체류비가 고작 10만원인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사람이 나까지 둘 뿐이란 것도 모두 당연해졌다. 건물의 색깔이 색 바랜 핑크빛이란 사실은 차라리 애교였다.
총무 할아버지는 마침 자리에 없었다. 어쩌면 박물관에 전시되러 간 건지도 모른다. 그가 몇 살인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이 건물의 주인이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입구에서 얼쩡거리는 쥐 한 마리를 발로 걷어찬 후 슬슬 올라갔다. 1층에선 쓰레기 냄새, 2층은 우유 썩는 냄새, 3층은 고양이 똥 냄새, 4층은 고기 냄새, 5층은 고기와 피 냄새. 평소보다 더 강렬하다. 냄새는 내 방에 가까워지면서 더 심해졌다.
복도의 너비는 약 45센티. 문을 확 열면 앞방의 문에 부딪쳐버리는 구조였다. 불이 났을 때 어떤 식으로 탈출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단으로 나가는 것보다 저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어찌어찌 나가는 편이 생존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다. 그런 걸 따질 형편이었다면 애당초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내 방 앞에 도착한 나는, 그 강렬한 냄새를 느끼며 문을 조심조심 열었고,
쾅 소리나게 닫았다.
“어머? 왜 들어오지 않아?”
문 안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목소리다. 난 지금 본 광경을 떠올려 보고, 조용히 문패를 확인했다. 영락없이 내 방이다. 안 들어갈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뛰쳐나갈까 생각을 하다 일단 마음속으로 다짐만 해 놓고 문을 다시 열었다.
그 곳에 그녀가 있었다.
문을 다시 세차게 닫으려는 찰나, 가느다란 팔이 나를 잡았다.
“여기 네 방 맞아. 어서 들어와.”
그녀가 날 잡아끌며 문을 닫았고, 손을 뻗어 불을 켰다. 수명이 한참 지난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빛을 뿌려대자 아까 얼핏 보았던 풍경이 제 빛깔을 찾았다. 그 빛깔이란 참으로 괴이했다. 회색 벽지에 적갈색 책상, 누런 이불. 이 색깔들은 간곳없고, 온통 붉은 빛 일색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부엌칼을 들고 있었는데, 칼에는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방 안에는 무언가가 누워 있다. 좁은 방 안에 튄 피는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몸에도 잔뜩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섹시해 보여서 잠깐 침을 삼켰다가 켁켁거렸다.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지금 그런 말 할 땝니까? 대체 이거 뭐…”
그녀는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내 입술에 갖다댔다. 조용히 하라는 표시였다. 그녀의 눈이 내 방문으로 향했고, 내 시선도 따라갔다. 거기에는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쓴 ‘절대정숙’이 붙어 있었다. 그 말이 지난 수 년간 내게 가져다 준 마력 때문인지 난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칼을 내려놓더니 나직나직하게 속삭였다.
“우리, 나름대로 친한 사이지? 그치? 방도 옆방이고, 요 1년간 계속 이곳에 같이 있었잖아. 얘기도 몇 번 했고.”
긴장감이라던가 하는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어조였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기에 좀 진정이 되긴 했지만, 불안함이 가신 건 아니었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다 같은 단군의 후예이기 때문에 친한 사이일 것이다. 옆방이라곤 하지만 서로 얘기는커녕 마주친 일도 몇 번 없었다. 얘기를 나누었다는 건 저기, 휴지 좀 빌려줄래? 라든가 저기, 건전지 좀 빌려줄래? 라든가 저기, 돈 좀 빌려줄래? 였다. 그 세 가지의 질문 모두는 그에 상응하는 물품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는데, 그것은 어딘가 그녀에게 끌렸기 때문이었다. 소년처럼 짧게 친 머리에 귀여운 옷차림을 한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호감을 가질 만했고, 그것이 오히려 나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런 여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물건을 건네줄 때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남의 방에서 뭐 하는 짓이냐구요.”
한참 꺽꺽대다가 간신히 말했다. 아까 삼인조에게 협박당하던 뺀질이 생각이 난다. 아아,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협박당하는 건 아니지만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한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누워있는 물체를 가리켰다. 영화 같은 장면이다. 아직도 피를 조금씩 내뿜으며 고요히 누워 있는 사람, 아니 시체!
“저기, 나 사람을 죽였는데.”
그 말을 다 들을 것도 없이, 난 졸도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쩐지 으스스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어디선가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은 여기가 아직 내 방임을 알게 했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방에 없는 건 확실했다. 이 좁은 방 안에 숨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총무 할아버지가 뻔뻔스럽게 침대라 명명한 매트리스 아래나 저 손바닥만한 냉장고 안에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때마침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그녀가 들어왔다.
“이제 깼어? 한심해. 무슨 남자가 말 한 마디에 쓰러지냐? 무슨 영화의 한 장면도 아니고. 그래서 어디 합격할 수 있겠어? 합격 통지서를 받으면 너무 놀라서 죽을지도 몰라.”
“난 왜 묶은 거에요?”
“묶다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몸을 잡고 옆으로 살짝 굴렸다. 그 순간 오른팔이 저릿 하며 무지막지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것은 사흘 묵은 변비를 부여잡고 화장실에서 끙끙거릴 때의 감각과도 같은 잔인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내 팔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바보. 팔에 전기 올랐었네.”
그녀는 가만히 팔에 손을 얹더니 내 팔을 주물거렸다. 여전히 찌릿하긴 했지만, 왠지 짜릿하기도 했다. 그녀의 손은 내 손보다 길고, 가늘고, 그러면서도 작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운명 교향곡과 할렐루야가 좌우 합작으로 울려퍼졌다. 그 울림은 점점 커져 혹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이곳 5층엔 1년 전부터 나와 그녀 외엔 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란 사실이 날 묘하게 흥분시켰다.
그러나 그 야릇한 성욕은 여전히 자욱한 피비린내에 의해 바로 중화되었다.
“아까 살인이라고 했죠? 그거 농담이죠? 빨간 물감 사다가 뿌려놓고 몰래카메라 찍는 거죠?”
“이봐, 현실을 직시해. 난 그런 장난은 안 한다구.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한 척 하는 건 또 뭐야? 그런 건 정말 싫어. 방에 들어와 보니 이 남자가 내 방을 뒤지고 있었다, 칼을 들고 날 위협하며 강간하려 했다, 순순히 당하는 척 하다 칼로 푹푹 쑤셔 죽였다, 끝.”
“하지만, 당신이 왜 내 방에서 살인을.”
“그야 내 방에서 저질렀다간 방이 더럽혀지는걸. 그래서 이쪽으로 유인했지. 우리 고시원의 열쇠는 모든 자물쇠에 맞거든.”
나보다 이곳에 오래 산 그녀였기 때문일까. 이 말은 굉장한 당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 초라하고 아늑한 평안이 깨끗하게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난 이럴 때 쓸 수 있는 법이 뭐 없을까 생각하다가 곧 포기했다. 그런 법을 시행하는 건 결국 경찰이다. 그리고 난 경찰이 아니다. 고시생이 법지식을 행사할 기회는 뉴스를 보며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짖어대는 정도이다. 그건 정말 이 사회엔 개가 짖는 정도의 반응에도 미치지 못한다. 백제나 신라가 망할 때는 개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짖었다지만, 요즘 그랬다간 당장 주민의 신고에 의해 포획될 것이다.
그녀는 다시 날 타이르듯 찬찬히 말했다.
“혼자 사는 여자가 기껏 살인이라는 힘든 일을 저질렀는데 도와주지 않을 거야? 강간당할 뻔 하기도 하고, 얼마나 놀랐는데. 일단 여섯 번쯤 찌르니까 죽긴 했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그 뒤처리가 참 힘들었다고. 지금 겨우 팔 한 쪽을 떼어낸 참인데, 역시 이런 건 남자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좀 해 줘. 응?”
이 여자, 지금 벽에 못을 박아라, 와 시체를 썰어줘, 를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는 것인가.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겨우 얘기할 수 있었다.
“이건 당장 신고하겠어요. 더 이상 말하지 마요. 당신은 지금 살인을 저지르고 혼란스러워하는 거라구요. 경찰이 오면 사건을 파악하고 알아서 처분할 거에요.”
그녀의 머리가 갸웃 흔들렸다.
“난 지금 제정신인데. 좀 피곤하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신고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여긴 네 방인데?”
“내 방이라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지금?”
“그야 경찰이 오면 공범으로 신고해야지. 내가 저 남자를 유인했고 네가 죽인 다음 파묻기 좋게 썰어놨어요. 이러면 되지 않을까? 경찰이 못 믿을 이유는 없을 거야. 식칼에다 네 지문도 듬뿍 묻혀놨으니.”
이제 좀 납득이 간다. 지금 이 여자와 나는 빼도박도 못한 공범 신세다. 애시당초 피를 보자마자 뛰쳐나가 신고했어야 한다. 시간을 끈 것만으로 이렇게 덤터기가 씌워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려들어가 경찰에 발견되기라도 하면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내 인생은 완전히 종치는 것이다. 시험을 볼 수 있는 것은 올해와 내년 정도였고, 살인의 처벌은 1, 2년 정도의 구형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찰이 내 무죄를 밝혀낼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마 무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억울하겠지만 인생이 다 그런 거잖아. 너 하나 합격하라고 지금껏 돈 대줬을 네 부모님은 얼마나 억울했겠어? 그러니 그 억울함을 이런 때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딴 소리 하지 마!”
짝! 어쩐지 메마른 타격음이 방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울컥해져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 것이다. 여자의 뺨을 때리면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것인가. 그건 이 직사각형의 방 안에서 6.1채널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로 높인 것보다 더 강하게 울렸다.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그렇지만 가장 현실적인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한 번 더, 아까보다 강하게 들렸다. 내 귀에 직접 울리는 소리였으니 당연히 아까와 격이 달랐다. 퍽! 여자의 주먹치고는 꽤 매운 일격에 난 몸을 휘청했다.
“그래?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했어? 남자란 원래 말이 막히면 손부터 나간다더니 정말이네. 저 녀석도 마찬가지고, 너도 마찬가지야.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명심해. 인생은 일을 저지르고 그걸 수습하는 게 전부야. 너 혼자 억울해봤자 그걸 신경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봐. 난 어쩌다 사람을 죽였지만 바로 뒤처리를 생각하고 있잖아. 본받으라는 얘기까진 하지 않겠지만, 네가 할 일을 하라고.”
어딘가 허점이 있다. 청산유수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지금이라도 허점을 찾아 공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어땠다는 건가? 이 자리에서 결과가 안 날 말싸움을 벌이는 것보단 바로 뛰쳐나가 신고하든지, 아니면 이 여자에게 협력하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아까 내린 바 있다.
“알았어요. 우선 시체부터 보기로 하죠. 총무 할아버지가 없으니 아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고, 잘만 하면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디 놔 뒀어요?”
그녀의 손이 오른쪽 구석을 가리켰다. 여태 불을 안 켜고 있었던 터라 일단 불부터 켰다. 안개처럼 흐릿한 빛이 어슴프레하게 방을 메우자 난 헛신음을 삼켰다. 마치 옷걸이처럼 벽에 기대 서 있는 남자의 시체를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니. 피는 다 빠져나갔는지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만, 한 팔이 잘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데다 하반신만 벌거벗고 있는 그 모습은 폐기처분된 마네킹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아까까지 한껏 팽창해 있었을, 지금은 빈약한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의 성기는 상징적으로 그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번째로 졸도했다간 나까지 저 꼴이 될 것 같다는 기분나쁜 생각이 들었다. 일단 뭔가를 해야 했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는 문구가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이 경우엔 무엇이 될까.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만, 시체의 팔을 썬 것에서 그 설득력은 매우 떨어진다. 그렇다면 그녀의 생각대로 끝까지 나가는 수 밖에 없다.
군대에서 산악레펠을 할 때가 생각났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줄 하나를 걸쳐 놓고, 두 팔과 두 다리만으로 공간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다. 허공에 매달리고 1분이 경과했을 때,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꼬챙이에 꿰인 통닭일 뿐이었다.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구워지는 존재. 그 뜨거움에서 해방될 때는 먹히기 위해 오븐을 나올 때 뿐이다. 난 누구에게 먹히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건가. 내 몸은 그런 생각들을 허공에 날리며 아래 설치한 그물로 추락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그물마저도 없는 상황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돌이킬 수 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런 위기감이 생기자 갑자기 시체가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저건 그저 먹다 남은 통닭의 하얀 뼈다귀일 뿐이었다.
“일단 피부터 닦아야 해요. 전체적인 일은 이 방에서만 이루어졌죠?”
“응.”
“그럼 이 방에 있는 것들만 어떻게 하면 되겠군요. 이 시체는 피가 응고되었을 테니, 뭘 하든 지금처럼 많은 피는 나오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내가 이걸 어떻게 해 보는 사이 당신은 피가 묻은 옷가지 같은 걸 싹 정리해요. 벽에 피 튄 건 도배를 하든지 신문지를 바르던지 해요. 방바닥은 맨 마지막에 치우면 되니까, 나머지 것들을 치우고 버려요. 할 수 있죠?”
“알았어. 피가 묻은 건 모두 버릴게.”
그녀는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신속하게 행동했다. 뺨이 붉게 부어있는 걸 제외하면 그녀의 표정은 아까 나와 마주쳤을 때와, 아니 1년 전 처음 마주쳤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 사실에서 난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난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하는 일도 모른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꼬박꼬박 반말을 쓰는 것도 아리송하다. 방에 들어가 본 일이 없으니 그녀가 고시생인지 여부도 알 수 없다. 그 짧은 지나침들 속에서 그녀라는 전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동안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이제는 궁금해 할 여유가 없다. 모든 것은 이 시체를 처리한 다음부터다. 난 심호흡을 했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가 난 정육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다 로 머릿속에서 전환될 때까지 난 쉬지 않고 썰었다. 톱이 있었으면 더 편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있는 도구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 애당초 이 부엌칼도 시체 씨가 들고 오지 않았다면 없는 물건이다. 그렇다면 시체 씨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길이라곤 좀 더 정성스럽게 토막을 내는 것 뿐이다. 하지만 칼이 피부를 지나 배를 찢고 내장을 드러낼 때, 핏줄과 혈관과 뼈가 툭툭 튀어나올 때, 굳은 피가 천천히 스며나올 때 마다 구역질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난 칼을 잡아본 적이 거의 없다. 칼솜씨고 뭐고, 그냥 거칠게 썰어내는 것 뿐이다. 자를수록 크기가 줄어든다는 단순한 공식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싸구려 부엌칼의 날이 다 빠지고 내 숨이 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변했을 때 눈앞에는 무수한 고깃덩어리와 결국 손대지 못한 머리, 그리고 토사물과 위액이 즐비했다. 어지간한 고어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참한 광경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내가 이렇게 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수고했어. 다 끝난 것 같네. 이제 이걸 어떻게 할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비로소 난 시체에서 눈을 뗐다. 내 방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옷가지고 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치워져 있었고, 책상 위의 책이나 노트 등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난 뭐라고 항의하려다 포기했다. 증거를 조금이라도 남기면 곤란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내 방은 나라는 사람이 1년간 살았다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오직 문패의 ‘절대정숙’ 아래에 직접 써 넣은 ‘엿이나 먹어라’는 말이 내 1년간의 과거를 거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역시 먹어야 하나?”
너무 갑작스런 말에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 솟구치는 피를 가라앉히며 그녀를 보니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게 더 무서워 일부러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씨팔, 도대체 당신 평소에 뭘 보고 살았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걸 먹다니!”
흥분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을 놓았다. 아니, 원래 놓았어야 하는 건데 아까까진 그녀의 박력에 밀려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태연했다.
“소화되면 증거가 없어지잖아. 식인종이 되자는 게 아니라, 증거인멸이라 생각하면 돼. 쓰레기를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식인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둘이서 저걸 다 먹기는 무리지. 너무 많아.”
“당신.”
“그럼 여기다 싸서 땅에 묻는 수 밖에 없겠네.”
그러면서 그녀가 들어올린 것은 대형 쓰레기봉투였다. 그나마 분리수거하자는 얘기는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뒤따르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보니 이걸 들고 산에 몰래 가 매장하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다고 한다. 그 의견엔 나도 찬성한다. 이곳에는 산이라 부를 만한 장소가 없으니, 아무래도 멀리까지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쓰레기봉투에 정말 쓰레기처럼 시체를 주워담고, 그녀가 뒷수습을 끝냈다. 시계를 보니 밤 열두 시 반이었다. 냉장고가 컸다면 당장 이것을 처박았을 테지만, 고시원 냉장고란 물건은 김치 한 그릇이나 먹다 남은 치킨 반 마리 정도를 보관하면 포화상태가 되어버리는 그런 물건이다. 별 수 없이 이 방에 그대로 놔두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을 저질렀으면 정신이 멀쩡해야 할 테지만, 난 긴장 대신 졸음이 왔다.
“이럴 땐 여기가 장사 안 되는 게 다행스럽네. 하긴, 이런 곳이라서 1년째 묵고 있었던 거지만. 넌 왜 여기에 죽치고 있었던 거야? 값이 싸서?”
“그게 아니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그렇구나. 난… 아니, 이 얘긴 나중에 할게. 기왕 시작한 거 끝장을 봐야 속이 후련하지 않겠어?”
나와 그녀의 시선이 동시에 쓰레기봉투 쪽으로 향했다. 봉투는 모두 네 개였다. 내장과 장기들을 모조리 따로 떼어놓고 나니 사람의 몸이란 것도 의외로 가벼웠다. 물론 총량은 변하지 않겠지만, 피도 거의 다 흘러나왔기 때문에 둘이서 들고 갈 수 있게 포장할 수 있었다. 되도록 봉투를 열어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다른 쓰레기들 - 내 방의 옷가지들이 주로 활용되었다 - 과 섞어놓았다. 바닥에 흥건히 고였던 피를 닦아낸 휴지들도 여기에 몽땅 쑤셔박았다.
“그럼 갈까? 두 개씩 나눠서 들어야겠는데, 할 수 있겠어?”
“들지 못하면 안 되는 거잖아. 가자. 어떻게든 들 테니.”
그녀는 정말 두 개를 들고 끙 하며 일어났다. 많이 가벼워졌다곤 해도 여자가 들긴 분명 무리인 무게다. 그것을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애써 옮기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내 몫은 그보다 훨씬 무거웠다.
둘이서 5층에 달하는 계단을 내려온 것은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 만큼이나 대단한 이동이었다. 둘 다 입구에서 탈진해 쓰러졌고, 겨우 숨을 돌린 내가 시내로 나가 이쪽으로 택시를 데려왔다. 그때까지 총무 할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목격자는 없는 셈이다.
만오천 원 어치를 달린 후 무작정 차를 세웠다. 몇 채 안 되는 인가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사방은 고요했다. 야트막하지만 나무가 무성한 산의 입구가 뻐끔하니 뚫려 있었는데, 그 모습은 먹이를 향해 입을 벌리는 뱀을 연상하게 했다. 산 입구에서부턴 직접 짐을 들고 가야 한다. 택시기사는 우리의 행색과 짐 등을 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더니 차를 타고 멀어져 갔다. 택시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우린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이런 곳에서 사람의 눈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신음소리를 애써 바깥에 내지 않으며 그녀는 자신의 짐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진 것이 십자가처럼 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십자가만큼 무겁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때 갑자기 택시기사의 웃음이 이해가 갔다. 그는 아마 우리 둘이 산 속에서 특이한 밀회를 즐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백 번이라도 이곳에 오겠지만, 지금은 당장 이 짐을 던져놓고 도망가고픈 심정이었다.
나무들이 버석거리는 소리나 이름모를 짐승이 뛰어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며 또 하나의 숲을 만들어냈다. 그 검은 숲에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미아 같았다. 낯설음과 타협하지 못하고 굴복하면서 부모의 손만 그리워하는 아이. 그것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외로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끔 바스락 소리가 나면 그때마다 그녀는 흠칫거리며 주위를 살피곤 했다. 아까까지 보여준 박력과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산에서 가장 무서운 건 우리가 들고 있는 물건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이런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평탄한 지역이 나왔다. 흙이 물러 파기 좋아 보였다. 일단 거기에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렸다. 다행히 달이 밝아 시야에 지장은 없었다. 저 멀리서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죽은 아기를 찾는 어머니 전설처럼 은근히 온몸에 감겨왔다. 말없이 땀을 닦으며 바람을 맞았지만 등산의 여유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잡념이 어둠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난 이 무수한 흙에 약간의 양을 더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백오십년 후엔 흙먼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살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한 살아있다는 실감이,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난다. 시체를 썰면서 얼마나,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토했던가. 그렇게 내가 살아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게 얼마만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하려는 행위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완전한 내 삶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제 시작해야겠네. 삽이 없으니 아래로 내려가 사 와야겠어. 둘 다 움직일 필욘 없겠고, 내가 내려가 어떻게든 구해 올 테니 넌 여기서 쉬고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좀 난감했다. 대체 이 시간에 어디로 가 삽을 구해야 하는 건가. 문을 연 가게가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놔뒀다가 해가 뜨면 다시 준비하고 오는 게 낫다. 기왕 그렇게 할 거면 여기 멍하니 있는 것보다 일단 내려가는 게 상책이다. 난 그녀에게 동의를 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뭐야. 거의 다 끝났는데 성질도 급하네. 지금 그래봤자 택도 없어. 일단 쉬었다가 날 밝으면 계속하자. 지금은 도구를 구할 수도 없어.”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녀의 손놀림은 점차 빨라졌다. 처음엔 놀이터에서 두꺼비집을 만드는 것 처럼 신중하더니, 점점 거칠게 땅을 팠다. 그렇지만 그게 쉬울 리 없었다. 그녀의 하얀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로, 피투성이로 변했다. 적당히 하고 그만두려니 했는데 그만둘 기색이 없었다. 손이 쓰린지 잠깐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뾰족한 돌 하나를 가져와 그걸로 땅을 찍어댔다.
“어, 설마 계속할 작정이야? 포기해. 바보같은 짓 말고. 그런 걸로 땅 후비려면 일년은 걸릴 거다.”
“닥쳐!”
느닷없이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외침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줄 알았던 그녀의 뜻밖의 반응에 흠칫했다.
“닥쳐, 닥치라구! 니가 뭘 알아, 새끼야!”
그녀는 소리지르면서 땅을 내리찍었다. 땅이 거칠게 파여나갔다. 지금의 행동은 땅을 판다기보단 풀 길 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에 가까웠다. 아까 그 남자도 이런 식으로 찔렀을까. 난 약간 질린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괴성을 지르며 들고 있던 돌을 던졌다. 뜻밖의 기습에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뺨에 찰과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화끈한 느낌이 들어 손을 대 보니 피가 흥건히 묻었다.
갑자기 아픔이, 그리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제껏, 내 건조한 인생을 단번에 부정하는 그런 뜨거운 기운이 속에서 치솟았다. 아까 시체를 보았을 때의 막막함도, 그것을 처리할 때의 역겨움도 이 기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직 이 세상에서 나만 느끼는 아픔이었고 분노였다. 동시에 욕정이자 쾌락이기도 했다. 난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처럼 뜻모를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녀가 다른 돌을 들어 날 때렸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쓰러뜨렸다. 그녀의 몸부림이 마치 저 세상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때렸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 일을 하면서 난 아마 크게 웃었던 것 같다. 그 웃음은 어느새 헐떡임으로 바뀌어 있었고, 내 손은 그녀의 목에서 가슴으로, 배로, 음부로 거칠게 내려갔다. 이미 힘이 빠진 건지 그녀는 저항하지도,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타고 올라 옷을 벗기는 내 귀에, 평소처럼 나직나직한 그녀의 말이 들렸다.
“저 사람은 내 의붓아버지야. 엄마를 두들겨 패고 내쫓고 날 강간했지. 그래서 도망쳤는데, 그때마다 따라왔어.”
듣고 싶지 않다. 타인의 과거 따윈, 나와 상관없어야 할 너의 이야기 따윈.
“이젠 마지막이다 작정하고 들어온 고시원까지 들어왔을 때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어. 아, 난 왜 이 자에게 당하기만 했지? 진작에 죽였으면 좋았을 걸.”
조금씩 그녀의 신음이 달떠 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날 보지 않았다. 저만치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봉지를 바라보며, 마치 의붓아버지에게 보내는 추도사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네 생각도 났어. 아니, 날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났지. 어째서, 어째서 나 혼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하고. 특히 네 얼굴이 떠올랐어. 몇 번 보지도 않았지만, 널 진심으로 경멸하고 있었어. 고작 방 한 칸을 사이에 두고서도 타인과의 완벽한 거리를 만들 수 있는 너 같은 녀석의 옆에서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아? 일 끝나고 돌아서는 손님을 바라보는 창녀가 된 것 같았단 말야!”
모른다.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 없다. 5층의 기묘한 동거, 단 둘뿐인 그 상황에서 이름 한 번 물어본 적이 없는 나로선 찾을 수 없는 해답이다. 때마침 달을 가린 구름 때문에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그래서 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흐느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깨가 들먹이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내 거친 행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다 끝이야. 저 개새끼를 묻고, 너랑도 헤어지면 난 혼자가 돼. 차라리 그게 나아. 관계할 수 없는 남들과의 동거보단 아무도 없이 고독한 게 나아. 그러니……”
“닥쳐! 입 다물어! 더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난 한 손으로 그녀의 양 볼과 입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발했고, 그때 난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진입했다. 둘 모두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둘은 서로를 핥고, 깨물고, 집어삼키며 잡아먹을 것처럼 산 육체를 탐했다. 사건이 끝나고 주인공들끼리 장소를 옮겨 섹스하는 싸구려 영화의 결말 같았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 열기 안에서 서로를 알려는 노력은 필요없었다. 이 관계는 내 수고에 대한 그녀의 답례일 뿐이란 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등을 긁으며 비명을 지르는 그녀와 내 신음소리가 야산의 고요와 정적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신음들의 간격을 사락사락 꽃잎이 쌓이는 소리가 채워나갔다. 소슬한 바람 속에 벚꽃잎이 떨어져 흩날리고, 그 중 몇 장은 한 덩어리가 된 우리의 몸 위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그녀의 흰 몸뚱이가 점차 파들거렸고, 마침내 경련을 일으켰다. 나 역시 참지 못하고 그 위로 몸을 던지며 그녀의 안에 한껏 내쏟았다. 머리 위에서 내리비치는 달빛은 미치고 싶을 정도로 온몸을 시리게 했다.
한 차례의 행위가 끝났지만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겹쳐진 채 쌍둥이 태아처럼 서로에게 웅크렸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서로의 몸은 서로에게 따뜻했다. 실핏줄 하나에까지 휘도는 아득한 쾌감 속에서, 나는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벚꽃이 가득 떨어져 눈처럼 우릴 덮어주었으면, 그래서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된 채 떨어지지 말았으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방들 사이에서 우리들의 방이 잠시나마 합쳐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