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합성을 하는 자리
광합성을 하는 자리
출근길 지하철을 묘사하는 데 ‘출근길 지하철’이란 말 이상의 묘사가 필요할까? 좁은 통로에 꾸역꾸역 늘어선 인파가 내뿜는 가쁜 숨이 이곳의 불쾌지수를 시시각각 키우고 있었다. 나무 대신 콘크리트 기둥이 가득한 정글이라고 해야 할까. 몇 년을 겪어온 상황이지만, 여전히 영진은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간신히 전철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겼다. 옷이 끼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웠다. 이제 빨리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어물어물 두 대의 전철을 보낸 터라, 지각하지 않으려면 매우 빠듯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전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멋쩍게 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 열차는 앞차의 출발이 지연되는 관계로 이곳에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그는 눈을 꽉 감았다.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영진보다 분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올랐다. 단,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다.
‘여기서도 ’지연‘이냐!’
그가 며칠 전까지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이름은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3주나 연락을 끊고 있다 ‘미안. 다른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란 문자 한 통을 보냈던 전 여자친구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사귈 땐 몰랐는데, 헤어지고 나니 그게 그렇게 흔한 이름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마치 그에게 잊지 말라는 듯, 사방에서 별의별 경로로 지연이란 단어가 들려 왔다. 2년간 사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헤어진 것만 해도 그에겐 충분히 상처가 되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괴롭힘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직장을 때려치고 섬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지연이란 이름을 들어도 내면의 평정을 깨뜨리지 않도록 해탈하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길이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도착한 영진은 계단을 향해 뛰었다. 눅눅한 습기를 느끼며 그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얼마 전까지는 여자친구와 함께 쓰기 위해 반드시 장우산을 챙겼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언제 샀는지도 모를 조그만 우산을 펼치자 하늘이 손바닥만큼 가려졌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이 안이라면 옛 기억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의 끝. 회사 문을 나선 영진은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까지 걸어가면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지하철로 가면 삼십 분 넘게 단축할 수 있지만,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해서 번거로웠다.
그는 홍대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걸 선호했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홍대 거리를 걷는 건 즐거우면서도 괴로웠다. 혼자 걷는 예쁜 여자를 보면 즐거워지고, 수많은 연인의 웃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주택가 쪽으로 걷는 것보단 이쪽이 나았다.
어차피 집에 가도 할 일이 없는 터라 영진은 빈둥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항상 가던 길로만 집에 간 터라, 그는 간만에 다른 길로 가기로 했다. 불야성의 대로 한켠에 빼꼼히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자기주장을 조금 덜 하는 느낌의 가게들이 그를 맞이했다. 도로의 가게들이 현란한 불빛으로 호객을 하고 있다면, 이곳은 찬찬히 구경하다 가라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작은 카페와 갤러리들을 지나치던 그에게 조금 이질적인 느낌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다육이 전문’이란 촌스런 이름을 가진 작은 화원이었다. 인테리어도 엉성했고, 가게 안은 어둑어둑했다. 영진은 별 생각 없이 화원을 지나쳤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아무도 없어 쓸쓸한 방에 조그마한 변화를 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였다. 빨간 꽃 피운 선인장이라도 하나 놓으면 그나마 집에 돌아갈 이유가 조금은 늘어나는 셈이었다.
“실례합니다.”
영진은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백한 얼굴의 여주인이 자리에 앉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조금 나이 들어 보였지만, 영진은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30대 초반쯤이라 예상했다. 얼굴이 지나치게 흰 걸 보니 오랫동안 햇볕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카운터 때문에 그녀의 상체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다리가 젓가락처럼 가늘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게 빼빼 말랐으니 다육이보다 큰 화분을 취급할 힘이 없을 거라고 영진은 멋대로 추측했다.
여주인은 어딘가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선인장 좀 보려구요. 좀 골라봐도 되죠?”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푹 숙였다. 보아하니 따라다니며 안내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영진으로서도 그 쪽이 편했다. 안 그래도 좁은 가게라 혼자 움직이는 게 좋았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화원 안엔 다육이가 제법 많았다. 영진은 신기한 모양의 다육이를 하나하나 바라보다 아쉽게 고개를 돌렸다. 다육이 두 개를 죽인 전적이 있다 보니, 역시 생명력이 강한 선인장 쪽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투박한 생김새의 선인장 중 가장 오래 살 것 같은 선인장을 골라 카운터로 가져갔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게 아쉬웠지만, 기다릴 여유 하나는 차고 넘쳤다.
영진이 선인장을 카운터에 놓자 여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홍옥 같은 건 어떠세요?”
이어질 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홍옥을 잘 키우면 사랑이 이루어지고……운운. 하지만 그 말을 듣는다면 영진은 ‘어디서 약을 팔아?’라고 쏘아붙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기 전에 영진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홍옥 사다 잘 관리했더니 오히려 여자친구랑 헤어졌네요. 홍옥은 앞으로 절대 안 키울 겁니다.”
여주인이 흠칫 하더니 말없이 선인장을 비닐봉지에 넣었다. 영진은 자신이 좀 심했나 싶었지만 굳이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선인장을 자기에게 내밀면서도 끝까지 일어나지 않는 여주인에게 감탄했다. 가게도 초라한데 서비스 마인드까지 이래서야 어디 손님이 올까? 그는 거스름돈을 받은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때 가게 바닥에 눕혀진 지팡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디자인 거리 홍대에선 무엇이든 인테리어가 되는 법이지만, 이 지팡이는 장식용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리가 불편한 걸까. 여자 혼자서, 게다가 다리까지 불편한데 이런 가게를 운영한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여주인에 대해 이런저런 망상을 하며 집까지 즐겁게 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선인장을 비닐봉지에서 꺼낸 그는 저만치에 놓인 홍옥을 노려보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만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는 홍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화분을 집어들었다. 그대로 봉지에 넣고 버리려다 문득 홍옥을 눈앞에 대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홍옥의 끄트머리가 살짝 빨개져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잘 살고 있는 녀석을 보니 영진은 조금 안쓰러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홍옥을 원래 자리에 놔두고 그 옆에 선인장을 함께 놓았다.
다음날, 영진은 화분을 쇼핑백에 넣고 출근했다. 이를 꺼냈다간 사람들에게 놀림받을 것 같아 새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라 얼버무렸다. 며칠 죽을 상이더니 그새 여자친구가 생겼냐며 놀리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그가 향한 곳은 어제 들렀던 화원이었다.
“여기 분갈이 되나요?”
들어가자마자 영진이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여주인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쇼핑백에서 화분을 꺼내 여주인 앞에 놓았다. 그녀는 잠시 홍옥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여태까지의 음침한 모습과 달리, 지금만은 제 나이를 찾은 듯한 밝은 미소였다. 하지만 영진이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곧 웃음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바로 해 드릴게요.”
여주인은 허리를 숙여 지팡이를 집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바닥에 끌릴 듯한 긴 치마를 입고 있어, 그녀의 다리가 가느다란지 확인할 순 없었다. 다리를 절며 가게 한켠에 있던 빈 화분과 흙을 꺼내온 그녀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화분에 흙을 담았다. 분갈이하는 동안 한 알갱이의 흙도 흘리지 않았기에 그는 내심 감탄했다.
“저, 여기 정수기 좀 써도 될까요?”
영진은 그녀에게 허락을 구한 후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 두 잔을 받아 커피를 탔다. 그리고 한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기 가게에서 자기가 준비한 커피를 대접받으리란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 고맙습니다.”
“뭘요. 분갈이해주신 보답입니다.”
그와 그녀는 말없이 커피를 호르륵 마셨다. 영진은 그녀의 가느다랗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등을 바라보았고, 이어서 머리끈으로 묶은 길다란 말총머리와 그 아래 드러난 하얀 목을 바라보았다. 그저 흘끗 보았는데도 이렇게 자세한 항목들이 관찰되는 걸 보니, 이 여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취향인 듯했다. 다리를 저는 게 걸리긴 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그녀와 이인삼각을 뛸 것도 아니었고, 당장 결혼상대를 구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가볍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분갈이하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던데요. 놀랐습니다.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가장 난감한 대답인 ‘왜요?’라고 말하는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허지연이에요.”
영진의 얼굴이 또다시 살짝 일그러졌다.
어째서 세상에는 이렇게 지연이 많은 거냐는 영진의 한탄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퇴근하면 집에 바로 가는 대신 화원에 들렀다. 처음 며칠은 홍옥 화분을 들고 괜히 영양제를 맞히네, 더 큰 화분에 옮겨심네 했지만, 나중엔 그냥 화원에 맡기다시피 해버렸다. 홍옥이 완전히 빨갛게 될 때까지 잘 보살펴 달라는 영진의 말을 듣고 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거진 한 달이 다 되자, 둘은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되었다. 영진이 워낙 적극적으로 나섰던 터라 지연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었다. 마치 야생 고양이를 길들이는 것처럼 영진은 조심조심 그녀에 대해 알아갔다. 그녀가 자기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이 사실을 안 순간 그는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도 그에게 반말을 쓰게 되었다.), 바리스타 준비를 하다 방향을 전환해 이곳에 화원을 열었다는 것, 다육이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 처음 보는 사람에겐 낯을 가리지만 익숙해진 사람에겐 털털하게 대한다는 것, 사고 때문에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 등을 퍼즐 맞추듯 연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천 피스짜리 퍼즐을 뒤엎는 듯한 발언을 했을 땐 영진도 깜짝 놀랐다.
“몰랐어? 나, 이혼녀야.”
풉! 영진은 종이컵에 든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뿜었다. 커피가 가게 바닥을 적시자 지연은 비난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진은 카운터의 휴지를 뽑아 바닥을 닦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혼녀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혼녀와 사귄 적은 없었기에 그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 상황은 아직 사귄다고 말하긴 일렀지만.
“언제 결혼했었어? 얼마나 했어? 어떻게? 왜?”
“육하원칙으로 대답해줘야 해? 했으면 한 거지. 왜, 실망했어?”
“아니, 놀랐을 뿐이야.”
영진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연은 그 말에 거짓이 없다고 느껴 화를 내지 않았다.
“얘기하자면 길어. 딱히 털어놓고 싶은 얘기도 아니고. 중요한 건 그 남자와 헤어졌고, 위자료 조로 이 가게를 받았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여길 운영하면서 먹고 자고 하고 있는 거야. 오케이?”
“잠깐, 잠도 여기서 자는 거야?”
“몰랐어? 저기 가게 뒤에 쪽문 있잖아. 저 안이 내 방이야.”
영진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창고의 문이었다. 굳이 문을 열지 않더라도, 저 문 안에는 장롱 한 짝 놓기도 버거울 크기의 공간이 있을 거란 짐작이 갔다.
그래서 그는 부담 없이 찔러보기로 했다.
“나, 오늘 자고 가고 싶은데.”
“좋아. 난 문 걸어잠그고 잘 테니까, 넌 여기서 자.”
예상했던 대답이라 영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를 본 지연은 묘하게 웃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면 안에서 재워줄까?”
“정말?”
영진이 반색하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넌 안에서 자는 거고, 난 밖에서 저 문을 걸어잠그고 여기서 잘게.”
영진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사위에 가득 흐르는 어느 날, 영진은 지연에게 제안했다.
“우리 놀러가지 않을래?”
호기롭게 이야기를 꺼낸 영진을 향해 지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았다.
“가게는 어쩌고?”
“하루 쉬어. 너 휴일도 없이 일하는 거 다 알아.”
“싫어. 여기 있는 다육이 다 팔기 전까진 쉬지 않을 거야.”
영진은 가게를 둘러보았다. 한 개 이천 원짜리 다육이가 오십 개 정도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호기롭게 말했다.
“이거 다 팔면 된다고 분명히 그랬지? 이거 내가 다 산다! 십만 원 낸다, 까짓거!”
“뭐? 제정신이야?”
지연이 당황해 손을 파닥파닥 흔들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영진은 십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가기 전까진 조용히 카운터에 앉아 있기만 하는 그녀가 자신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그저 기뻤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내딛으면 고지에 오른다고 생각해 그는 힘을 냈다.
“결정됐지? 그럼 가자!”
“잠깐! 그럼 돈부터!”
지연은 이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돈부터 요구했다. 영진은 망설이지 않고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그리고 바로 카운터 뒤로 돌아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럼 합의되었으니 일어나시죠!”
“꺅!”
말총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샴푸 냄새를 행복하게 들이마신 것도 잠시, 지연의 팔꿈치가 영진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자 지연은 그를 걷어차다시피 가게 밖으로 내몰고 문을 잠갔다. 설마 축객령은 아니겠지, 하고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가게 앞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십 분쯤 지나자 그녀가 아까와 다른 옷을 입고 한 손에는 핸드백을,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가게를 나섰다. 여전히 치마 길이는 길었지만 색은 좀더 화사했다. 평소 어두운 계통의 옷을 입던 그녀였기에, 옷 색깔을 바꾼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미리 말하지만, 멀리 가진 않을 거야.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곳 아니면 안 갈 거니까.”
“알았어. 넌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없으면 내가 정하고.”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외출 자체가 오랜만인 건지, 찰랑이는 머리카락 아래로 약간의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이미 정해둔 곳이 있었기에, 그는 고민하지 않고 택시를 잡은 후 행선지를 말했다. 뒤따라 타는 그녀의 표정이 원래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 영진에겐 아쉬웠다.
모처럼 밖에 나왔으니 더 흥분해도 좋을 텐데, 이상하게 가는 길 내내 그녀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지팡이를 꾹 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를 싫어하거나 멀미를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아무리 영진이라도 그녀가 남의 차에 토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 불필요한 말을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회복했다.
“하늘공원,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가 그립다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태도를 보니 사고가 난 이후론 이곳에 온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잠시 자리에 내버려두고 영진은 자전거 대여소에서 커다란 자전거를 빌려왔다. 그녀가 걷기엔 하늘공원이 지나치게 넓었다. 단 그녀가 페달을 밟을 수는 없을 테니, 커플의 로망인 2인용 자전거는 자제했다. 자동차를 탈 때와는 달리, 지연은 자전거에 기분 좋게 올라타 한 손으론 그의 어깨를, 한 손은 지팡이를 각각 잡았다.
“자, 그럼 단숨에 꼭대기로 간다!”
영진은 바퀴를 힘껏 밟았다. 그녀의 몸무게가 대체 얼마나 조금 나가는 건지,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를 싣고 달리는 것 같았다.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자전거는 제법 속도를 붙이며 전진했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그에게 페달을 더욱 힘주어 밟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순간이 영원할 리 없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영진은 속으로 느꼈다. 그리고 등뒤의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낮에는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는 건지, 무성한 갈대밭에 도착하자 영진의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지연은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준 후 핸드백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주었다. 그는 감사히 받아들고 단숨에 한 병을 비워버렸다. 빈 병을 버릴 데가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던 영진의 눈에 조금 부루퉁해진 그녀의 표정이 들어왔다.
“다 먹으라고 준 건 아니었는데.”
“아, 그랬어? 미안.”
“여기서 물 마시고 광합성하려 했단 말야.”
난 잠깐 잘못 들었나 했다. 광합성? 식물을 자라게 한다는?
“잠깐, 광합성은 식물만 하는 거라고 십 년도 전에 배웠는데.”
“나도 알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문득 투명해졌다. 영진은 그녀가 더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연은 곧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냥 해 본 소리야.”
중간에 뭔가 어물쩡 넘어간 느낌이 들었지만, 영진은 이를 추궁할 수 없었다. 지연이 밝게 웃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걷자.”
“그, 그래.”
자전거를 적당한 곳에 세운 후 둘은 천천히 갈대밭 사이로 걸어갔다. 갈대밭 여기저기엔 가족과 연인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고, 하늘에는 때이른 기러기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햇볕을 그대로 머금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는 갈대가 솨아 흔들릴 적마다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마치 갈대밭을 처음 보는 어린이처럼, 지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영진은 사진기를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저주했다.
들뜬 그녀가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속도는 영진이 의식해서 천천히 걷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속도만으로도 그녀는 금방 지치는 모양이었다. 갈대밭을 반도 채 돌기 전에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영진은 잠깐 생각하다 저만치에 있는 벤치로 성큼성큼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데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아무래도 그냥 쉬자고 하면 피곤하지 않다고 우길 것 같아 영진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과연 지연은 슬금슬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사뿐히 앉았다.
“남자가 벌써 피곤해? 약골이네.”
아마 영진이 먼저 앉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디까지라도 걸어갔을 것이다. 지연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 이 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진 곁에 앉자마자 그 결심은 와르르 허물어졌다. 고작 십오 분 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발바닥이 쓰리고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십오 분은 고사하고, 오 분 동안 서 있던 적도 드물었기에 이런 움직임은 아직 무리였다.
“잠시 무릎 좀 빌릴게.”
기왕 앉은 거, 지연은 아예 영진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 드러누웠다. 키가 작았기에 다리를 접을 것 없이 쭉 펼 수 있었다. 그렇게 눕자 푸른 하늘이 눈에 가득히 뛰어들었다. 갈대들이 한가롭게 사각거리며 가을의 냄새를 한껏 사방에 흩뿌렸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 지연은 하늘로 손을 뻗었다. 작은 손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며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가려 영진은 그녀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대로 지연은 속삭였다.
“항상 나무가 되는 꿈을 꿨어.”
아까의 광합성과 연관되는 이야기 같았다. 영진은 뭐라고 대답하려다 포기하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항상 앉던 의자 아래 물이 찰랑찰랑한 대야를 갖다두고, 거기 발을 담근 채 꼼짝 앉고 있는 거야. 그러면 발끝에서부터 뿌리가 뻗어나와 대야의 물을 빨아들이고, 그 뿌리가 커지면 대야를 뚫고 땅 속에 박히지. 그때부터 내 몸에는 껍질이 생겨. 단단하고, 아무도 날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갈색 껍질. 그게 내 몸을 가슴까지 덮으면 난 두 팔을 활짝 벌릴 거야, 이렇게.”
지연은 남은 팔을 마저 들었다. 마치 끌어안아 달라는 듯한 자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영진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팔을 하늘로 뻗으면 손끝에서부터 파란 잎이 하나둘 피어날 거야. 처음엔 열 개의 손톱이 아름다운 이파리가 되겠지. 그리고 손의 마디마디마다 이파리가 맺히고, 나중엔 손금 따라 넓적한 이파리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팔꿈치 정도까지 푸른 잎이 주렁주렁 달리면, 그때에야 비로소 쳐든 팔이 아프지 않을 거야.”
지연은 두 손을 내렸다. 그녀와 영진의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공허해진 그녀의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다. 피곤할 때 따스한 햇볕을 만나자 급속도로 졸려진 모양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나무가 되어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대로 30분 정도는 꼼짝없이 이 자세로 있어야 할 듯했다. 영진은 마치 갑자기 배터리를 잡아 뺀 인형처럼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다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햇볕은?”
그녀의 가게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나마 양지바른 곳은 다육이 등의 화원 식물에 양보한 터라, 카운터는 항상 형광등 불빛만 흐린 날 달빛처럼 맥없이 떨어지곤 했다.
지연이 그에게 원하는 게 뭔지 영진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영진과 미약하게나마 쌓은 관계를 다시 허물고, 혼자 가게 안에서 조용히 가라앉던 과거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꿈에 영진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게 이를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영진이 보기엔 그 삶이야말로 최악이었다.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만날 일도 한없이 적은 그런 가게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아마 영진이 그곳에서 살게 된다면, 한 달도 되지 못해서 거대한 곰팡이가 될 것 같았다.
그때 지연이 신음을 하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벤치가 약간 울퉁불퉁하다 보니 등이 배긴 모양이었다. 다리가 이상한 모양으로 엇갈리면서 발목까지 온 치마가 살짝 말려올라갔다. 그러자 치마에 감싸여 있던 왼쪽 다리가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영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목까지 덮은 양말 위로 무기질의 단단한 금속이 있었다. 보형물이나 교정기 같은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저건 의족이 분명했다. 그녀가 다시 다리를 움직이자 의족은 곧 치마 사이로 사라졌지만, 그 순간은 영진의 머릿속에 DSLR로 찍은 사진만큼이나 확실히 각인되었다.
‘맙소사.’
영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냥 다리를 저는 것도 아니고 의족이었다는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그에게 둘은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제는 정말로 잠든 그녀를 여전히 무릎 위에 눕힌 채, 그는 자신과 지연의 관계를 되짚어보았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하자 그간 그녀에게 느낀 감정이 100% 연애감정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마 연애감정이 반, 호기심과 나머지 잡다한 감정이 반이었다. 물론 그녀의 외모와 성격은 그의 취향에 맞아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녀의 다리 문제는 항상 생선가시처럼 심장에 박혀 있었다. 게다가 방금 그 생선가시는 닭뼈 수준으로 커져 버렸다. 어찌 보면 왜 지금까지 자신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감정이 당황인지 거부감인지, 그는 지연이 깨어날 때까지 골똘히 생각해야 했다.
돌아가는 길 내내 지연과 영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가 다가온다는 이유로, 영진은 다음날부터 엄청난 업무를 할당받았다. 익숙하지 않은 숫자놀음 때문에 그는 매일 열한 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면 얼른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라서, 그는 걷는 대신 지하철을 타는 걸 택했다. 가끔 지연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정리를 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 포기하곤 했다.
그렇게 1주일 동안이나 감사에 매달린 끝에야 그는 해방될 수 있었다.
“으아아! 정말 끝이다!”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나온 그는 문을 쾅 닫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폭우 예보가 있는데다 시간은 새벽 1시 반. 게다가 주말도 아니다 보니 길거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길을 전세낸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몇 걸음 걷다 보니, 그간 그가 미루고 또 미뤄왔던 문제가 제 차례라는 듯 영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직 그의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고, 그녀를 다시 예전처럼 대할 자신도 없었다. 만약 그녀를 만난다면 말하는 중간마다 그녀의 다리를 흘끔흘끔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다리를 숨기려 했던 그녀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눈앞의 남자가 비밀을 눈치챘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연과의 관계도 끝장난다. 자신의 마음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아니 동정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끝맺는 건 비겁한 짓이었다. 자신의 옛 여자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둘의 이름이 같다고 해도, 이별의 방식까지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보고, 자신의 발을 본 다음,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술이라도 한 잔 먹고 가는 게 나을까?”
혼잣말에 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영진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지연의 화원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충동적이고 애들 장난 같은 발상에서였다. 지금 가서 지연이 문을 열어주면 이야기를 하고, 지연이 잠에 취했거나 다른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녀와의 인연은 끝. 단 한 번의 시도로 지금의 모호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면, 굳이 술을 마실 필요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고 반너머 추측하고 있었다.
서둘러 걸은 것도 아닌데 그는 어느새 화원 앞에 당도해 있었다. 주위를 잠시 살핀 후 그는 화원 문을 쿵쿵 두드렸다. 천천히, 간격을 두고 세 번 가량 두들긴 후 문에 귀를 갖다댔다. 인기척이 -
- 문이 벌컥 열렸다.
“으앗!”
문에 기대고 있던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게 안으로 쓰러졌다. 눈높이가 한없이 낮아지자, 까만 트레이너 바지의 아랫단과 양말이 신겨진 의족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뭐야, 영진 씨였어? 난 또 도둑이라고.”
환기되지 않은 가게 안에 술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는 카운터에 있는 빈 소주병을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걸로 날 치려고 한 거야?”
“당연하지. 술이 조금만 더 취했으면 끝장을 냈을 텐데.”
그 말이 제법 스산하게 들려, 영진은 제발 지연이 농담한 것이길 빌어야 했다.
“아무튼 잘 왔어, 영진씨. 아직 술 한 병 더 있으니까 이거 마시자고. 그리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거야. 오케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연은 카운터 아래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더니 종이컵에 넘치도록 따라 영진에게 건넸다. 아직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그녀와 이야기하려면 자기도 술을 마셔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는 소주를 단숨에 털어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뭐야, 마시려면 잘 마시네. 자, 잔 이리 내. 더 줄 테니.”
“아니, 술은 됐고. 우선 할 얘기가 있어. 내가 일주일간 연락도 제대로 못했던 게……”
“하늘공원에서 내 의족을 봐서?”
콰당탕! 영진이 앉아 있던 간이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벌떡 일어선 그는 지연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지연이 깔깔 웃었다.
“설마 우연히 그걸 봤을 거라고 생각했어? 착각하지 마. 난 그동안 밖에 나갈 때마다 타이즈나 팬티스타킹을 속에 입었어.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걸 막으려고.”
“그런데, 왜? 아니……설마 일부러?”
“그래, 일부러. 영진 씨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
지연은 쿡쿡 웃으며 술병을 들어 자기 입에 부었다. 소주가 꼴꼴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사라져갔다. 영진은 그만 마시라고 말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을 지연은 매섭게 쳐냈다.
“그래, 의족 보니까 이제 장난이 아니다 싶었지?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이 남자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아니란 걸. 그래도 잠시 동안 꿈을 꾸고 싶었지. 혹시, 혹시……하는 부질없는 꿈.”
그녀는 술병에 금이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게 내려놓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어서 영진에게 집어던졌다. 영진이 깜짝 놀라 이를 피하자, 지연은 영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거 알아? 그래도, 부질없단 걸 알고 있었어도, 꿈에서 깨니까 기분은 참 더럽더라. 영진 씬 내가 일주일 동안 영진 씨를 기다리며 이렇게 술 마실 동안 무슨 생각을 했어? 아, 재수없게 다리병신이야, 그런 생각?”
그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가 연락을 하지 않은 건 순전히 회사 일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백한 게 아니라, 마침 대기 좋은 핑계가 있는 것뿐이었다.
지연은 술을 다시 두어 모금 마신 후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붉은 얼굴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렸다.
“나라고, 나라고 좋아서 다리병신이 된 것 같아!”
한번 소리를 지르자, 비로소 그녀가 필사적으로 제어하던 이성의 벽이 무너져내렸다.
“그건 사고였어. 난 단지 남편 옆에 타고 있을 뿐이었어! 트럭이 갑자기 우리 차를 덮치고, 일어나보니 남편은 죽은 데다 난 다리 한 쪽이 날아갔고, 남은 건 남편이 막 시작한 이 빌어먹을 화원뿐이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카운터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영진은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면 조용히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란 건 확실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는 지연을 바라보다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갔다. 다리 길이가 조금 맞지 않는지, 의족만 바닥에 닿아 있었다. 창백하고 무감정한 의족은 당장에라도 대지에 뿌리를 박고 지연을 이 자리에 못박아둘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일전에 바랐던 나무가 되어 있었다. 단, 무수한 이파리를 드리우며 밝게 빛나는 여름 나무가 아니라, 언제 꺾일지 모를 앙상한 가지만 무성한 겨울 나무였다.
지연의 울음이 잦아들어갔다. 혼자서 소주 두 병 반을 비웠으니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자게 둘 순 없었다. 그는 그녀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일으켜세웠다. 아직 정신이 어느 정도 있었는지, 지연은 발버둥치며 그를 뿌리치려 했다.
“놔, 새끼야! 꺼져!”
“안 놔.”
지연의 팔꿈치가 지난번처럼 옆구리를 세차게 쳐 댔지만, 영진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어찌어찌 그녀를 들쳐업는 데 성공했다.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그녀의 몸을 지탱하자 트레이너 바지 너머로 금속의 촉감을 느껴졌다. 피와 온기가 들어있지 않은데도 원래 다리보다 몇 배는 무거울 의족은 지금까지 그녀의 생명력을 얼마나 흡수한 걸까. 지금의 그녀에게 이 의족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죽은 뿌리일 뿐이었다. 이를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그가 의족에 손을 대 떼내는 걸 지연이 허락할 리 없었다.
“날 내려놔! 난 걸을 수 있어! 날 병신 취급하지 마!”
“착각하지 마.”
영진은 한숨을 쉬며 등뒤의 폭군에게 충고했다.
“네가 걷는 건 이미 수도 없이 봤어. 난 언제나 네가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하지만, 잠시 두 발을 땅에서 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대로 놔뒀다간 넌 나무가 되고 말 테니까.”
“무슨 헛소…… 아.”
처음으로 지연의 말문이 막혔다. 하늘공원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래. 사과할게. 네 다리를 보고 망설인 게 맞아.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 오히려 네게 묻고 싶어.”
그는 그녀를 업은 채 문을 열었다. 그러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영진의 손이 가방 속에 들어갔다가 작은 우산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펼치자 영진과 지연 모두 우산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둘만이 할 수 있는 작은 우산 활용방법이었다.
영진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우산을 쳐든 채 거리에 나왔다. 우산에 부딪친 물방울이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사실은 지연에게 우산을 들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한참 취해 있는 그녀가 우산을 제대로 씌워줄 것 같진 않았다.
한 발짝.
그리고 다시 한 발짝.
그의 발이 빗길을 뚫고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망설임을 떨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날 데리고 어딜 가는 거야?”
아까 실컷 감정을 폭발시킨 건지, 지금의 지연은 그저 지친 듯했다. 마치 영진이 지금도 벗고 있는 중인 망설임과 불안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흡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의 앙칼진 고함 대신,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만이 지연의 목소리에 절절이 느껴졌다.
“난 네게 묻고 싶어. 지금도 화원 안에서 나무가 되고 싶어?”
“………………그래.”
어딘가 억지를 부리는 듯 억눌린 지연의 목소리가 영진의 척추뼈를 따라 올라왔다. 대답을 들은 영진은 그 자리에 서더니 지연을 땅에 내려놓았다. 약간 어리둥절한 기색의 지연에게 우산을 쥐어 주며 그는 어느새 멀어진 화원을 가리켰다.
“그럼 네 다리로 직접 걸어서 들어가. 저곳에서 다시는 나오지 말고. 그러다 보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 찾아가 물을 줄 순 있겠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넌 이제 두 번 다시 햇빛도, 달빛도 볼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가고 싶어?“
그녀에게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를 작은 우산으로 간신히 가리며 그녀는 낮게 흐느꼈다. 이를 본 영진은 한숨을 쉬고 쪼그려 앉아 자신의 등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는 방법도 있지.”
다시 업히라는 그의 제스처를 본 지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머뭇거렸다.
지연에게서 돌아서 있는 그 자세 그대로, 영진은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나만을 봐 달라고 하진 않을게. 지금의 난 너와 얼굴을 맞댈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네 다리가 되어줄 순 있어.”
“……네가?”
“미리 말해 둘게. 이건 네가 불쌍해서 돕자는 게 아니야. 그저 너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기왕 둘이 걷는 거 좀더 효율적으로 걷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
의족이 불편해? 그럼 벗어버려. 나랑 같이, 어디까지라도 걸어 보자. 네게 사과하는 의미로, 널 다리병신이라 부르는 녀석은 내가 패 줄 테니까.”
비에 흠뻑 젖다 보니 이젠 자기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 영진은 필사적으로 자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그는 조금만 뒤를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을 실행하기 전, 묵직한 충격이 등을 강타했다.
“크억!”
불의의 일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영진의 몸이 진흙탕에 나뒹굴었다. 입 안에 들어온 진흙을 뱉은 후에야 그는 자신을 걷어찬 사람을 노려볼 수 있었다. 지연은 성한 다리로 우뚝 선 채 영진을 걷어찬 의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럼 네가 제일 먼저 맞아야지. 날 다리병신이라 생각했던 게 누군데?”
“그, 그건 미안해.”
도저히 반박할 수 없어 영진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러자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리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덜컥 소리가 나더니 의족이 그녀의 다리에서 떨어져나갔다.
“무, 무슨?”
“뭐긴 뭐야. 의족, 원래 잘 빠지는 거 몰랐어? 거기 바보를 걷어찬 충격으로 빠졌나 보네.”
아직 술에 취한 채였지만, 그녀는 용케 한 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맨발은 흙탕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영진은 그녀의 발에서 처음으로 넘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빗물을 양분으로 삼으려 맥동하는 튼튼한 뿌리와도 같았다.
그 모습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는 지연이 두 번째 부를 때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서 이리 오라니깐!”
“응? 뭐, 뭐라고?”
“하여간.”
지연은 한 손으로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을 가리켰다.
“거기 있으면 다 젖잖아.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김에 나도 좀 따뜻한 데로 데려가고.”
방금 전 영진을 흙탕물에 뒹굴게 한 주제에 너무도 뻔뻔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폭소를 터뜨리며 그녀에게 등을 댔다. 흠벅 젖은 그의 등에 지연의 몸이 다시 한 번 달라붙었다. 아까보다 더욱 따뜻해진 그녀의 온기가 영진의 전신을 파고들어갔다.
“새벽 3시.”
영진은 그녀를 업고 일어나며 말했다.
“새벽 3시에 빗속에서 이러고 있는 커플은 우리밖에 없을 거다.”
등뒤에서 키득 하는 웃음이 들렸다.
<광합성을 하는 자리>
‘다육이 전문’이란 간판이 내려가고, ‘광합성을 하는 자리’란 파스텔 풍 간판이 그 자리에 걸렸다. 이것으로 화원의 마지막 흔적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어때? 이제 감이 좀 돌아온 것 같아?”
“아직. 그래도 오픈일까진 제대로 된 커피를 끓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연은 몇 잔째인지 모를 자작 커피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화원을 카페로 바꾸자는 건 영진의 아이디어였다. 그녀가 바리스타 공부를 중단했던 걸 떠올린 덕분이었다. 지연은 고민 끝에 그 의견을 받아들여 스파르타식으로 바리스타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반 년 후, 자격증을 거머쥠과 동시에 화원을 완전히 개조했다. 모든 벽을 유리로 바꿔 가게에 햇빛이 잘 들어오게 하고, 창가엔 다육이를 빼곡하게 놓아 손님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홍대 출신인 영진이 인맥을 총동원해 간판을 만들고 가게 앞 골목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준 덕에, 카페는 개장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지연의 앞에는 작은 홍옥 화분이 놓여 있었다. 무성하게 가지가 올라온 홍옥은 머리부터 뿌리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기며 영진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그녀의 다리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두 다리의 생김새는 달랐지만, 둘 모두 그녀를 굳건히 지탱해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두 개의 뿌리를 통해 자신을 지탱하고 광합성을 할 것이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