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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방에서(단편소설 모음)


예언의 시대


어두운 방이었다.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에서 미약하게 비치는 빛이 지금은 대낮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보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방 중앙에 위치한 탁자, 정확히는 그 위에 얹힌 수정구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촛불처럼, 때론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렁였다.

수정구의 앞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지만 노인의 로브는 끊임없이 펄럭였다. 손에 들린 지팡이의 끝에 달린 보석은 수정구와 같은 색의 빛을 은은히 내뿜고 있었다. 그러한 노인의 의식은 마치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여보게, 리만. 아직 보이지 않는 건가? ”

노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굵직한 저음에는 위엄이 가득 실려 있었지만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리만이라 불린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폐하. 슬슬 윤곽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 뚜렷하지는 않지만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

지팡이의 보석에서 나오는 빛이 수정구를 향해 내뿜어졌다. 그것은 곧 벽을 향해 반사되며 빛의 길을 만들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경탄을 발하는 가운데, 흰 벽에 벽화처럼 무언가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리만의 말대로 선명한 색은 아니었지만 윤곽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육체, 강철 방패보다 견고해 보이는 수천 개의 비늘들, 성의 첨탑보다 높은 두 개의 뿔, 숨을 내쉴 때마다 새어나오는 초열의 불꽃.

그렇다.

이것은 드래곤이었다.

리만의 의식이 완성되었는지, 이제 드래곤은 눈앞에 살아 숨쉬는 것처럼 이들에게 다가왔다. 물론 그것이 벽에 비친 전신의 크기 그대로였다면 그저 박장대소하며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드래곤 옆에는 오우거 한 떼가 발톱만도 못한 크기로 죽어 자빠져 있었다. 어지간한 드래곤, 아니 임시 드래곤 로드로 익히 알려진 셀레스타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왕과 신하들은 물론이고 대마법사의 호칭을 지니고 있는 리만도 이만큼 거대한 드래곤에 대해서는 익히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 ”

“정말 저 괴물이 예언서에 나온 그 녀석이란 말인가! ”

신하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은 순식간에 웅성거림의 소음으로 메워졌다. 그 자리에서 침묵을 유지한 것은 리만과 왕, 둘뿐이었다.

“묻겠소, 대마법사. 저 드래곤이 인류를 멸망시킬 녀석이오? ”

​“​.​.​.​.​.​.​그​렇​습​니​다​.​ 전하. ”

리만은 백발을 떨구며 맥없이 대답했고, 왕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서 하늘이란 천정보다 못한 존재인 것이다.

 

일찍이 예언서가 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에서도 제일 가는 보물로, 그 열람은 역대 왕의 대관식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언제 쓰여졌는지도 모를 이 예언서가 한 사람의 왕마다 한 페이지씩을 할애해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은 추상적이었지만 결코 틀리는 법은 없었다. 가령 ‘발린 왕의 때, 그의 지팡이가 부러지고 그는 발을 헛딛을 것이다’ 같은 예언은 발린 왕의 신하들이 대부분 간신이었다는 점에서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적중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일곱 개의 달이 일곱 사람을 죽이리라’ 같은 경우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변방의 이민족이 쳐들어와 7만 명을 학살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지어졌다. 비록 예언이 일어난 이후에야 그 실현 여부를 알 수 있는 불편함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왕국의 누구도 그 예언의 신빙성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단, 이 예언서의 종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시대에 해당하는 페이지만 볼 수 있었다.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무수한 왕이 거쳐간 옥좌의 현재 주인은 레날 왕이었다. 그는 어쩐지 침통한 표정인 아버지에게서 왕관을 물려받은 후 예언서를 보러 갔다. 대신관의 손에서 팔랑팔랑 넘어가는 페이지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그에 따라 그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 갔다. 이윽고 주름진 늙은 손이 페이지 넘기기를 그쳤을 때 왕은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는 낡은 예언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단 한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 레날 왕의 때. 인류는 드래곤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이때부터 왕은 이전까지의 방탕함을 모두 벗어던지고 필사적으로 예언에 매달렸다. 규율에 얽매인 아버지가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이런 꼴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이 예언을 막는 게 중요했다. 이제까지의 예언이 절대적이었기에 이것 또한 맞을 수밖에 없겠지만, 레날 왕은 그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족히 2000년 가까이 된 이 왕국을 자신의 손에서 멸망시킬 순 없다. 신하들 또한 왕의 이런 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 또한 멸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언이 짧은 만큼 해석이 갈릴 위험도 줄어들었다. 인류가 멸망하는 원인이 드래곤이라는 건 자명했고, 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했다.

세상의 모든 드래곤을 없애자!

레날 왕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고, 순식간에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대 왕국의 예언서가 인류는 드래곤에게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기술해놓았다는 것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 인류를 하나로 묶는 사슬이 되었다. 모두는 레날 왕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각국이 보유한 무기들과 군단, 은거하고 있던 검사와 마법사들이 속속 도착하자 결전은 시작되었다. 아니, 그것은 결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인류의 온 힘을 집결한 대군단 앞에 드래곤은 하나하나 쓰러져 갔다. 설마 나약한 인간들이 쳐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한 드래곤들은 종족의 반 이상이 순식간에 학살당하자 급히 뭉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때늦은 감이 있었다. 드래곤들의 레어에서 가져온 마법 무구며 스크롤 등이 몇 남지 않은 드래곤들을 강습했다. 드래곤 로드가 아직 수면하고 있어 임시로 로드를 맡은 셀레스타는 날개가 모두 찢어지고 이빨이 반 이상 부서져나간 채 추락하며 길게 외쳤다.

- 어리석은 인간들아! 도대체 왜 그동안의 평화를 잊어버리고 우리를 죽이려는 거냐! 인간이란 종족은 다른 종족을 짓밟고 그 위에 서야 만족하는 존재인가!

물론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컨대 이것은 자존심과 생명 모두가 걸린 문제였다. 안그래도 걸핏하면 인간의 머리 위에 서려는 오만한 드래곤들은 손봐줘야 할 존재들이었다. 만약 일개 국가가 이런 시도를 했다면 필경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겠지만, 대륙의 모든 국가가 같은 생각으로 전투에 임하니 이런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투구를 공중에 던지며 환호했고, 교회의 종은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우렁찬 개선가를 연주했다. 발빠른 사람들은 '드래곤은 악마의 자식들이었다' 나 '정의는 어떤 강대한 악의 힘도 능히 물리친다' 같은 주제로 책을 써 떼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반면 역사가들은 지금이 '역사' 란 것이 생겨난 이래 최초로 인간끼리의 다툼이 종식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것인지에 대해 고심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열광의 도가니가 빙하 한가운데 쳐박아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드래곤들의 레어를 조사하던 원정대가 셀레스타의 레어에서 그의 일기를 발견한 것이다. 진정한 드래곤 로드인 길리간이 지금 구백 년째 수면을 하는 중이었고, 그 때문에 그가 깨어날 때까지 자신이 임시로 드래곤 로드를 맡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그래봤자 드래곤 한 마리 아니냐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대마법사 리만의 투시마법으로 길리간의 실체를 보게 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바뀌었다. 셀레스타의 브레스만 해도 수천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그의 다섯 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저 덩치에서 나오는 브레스는 어느 정도의 위력이란 말인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저 드래곤이 깨어난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장 가까운 인간의 나라부터 박살내는 일일 것이다. 명색이 드래곤 로드인데 자기 종족을 멸망시킨 인간들에게 보답하지 않는다면 말도 안될 것이다. 인류는 드래곤 로드 길리간을 단순한 드래곤으로 볼 수 없었기에, 이제까지의 드래곤 모두를 다시 한 번 잡는다는 생각으로 철저한 준비에 임했다.

그리고 결전의 순간이 왔다.

 

"투석기 부대,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

"케이르 마법사 연합, 메모라이즈 완료되었습니다"

"금갑기사단,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전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

레날 왕은 특별히 마련된 장막에서 장군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거의 5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기 때문에 장군들 또한 100명 가까운 숫자였다. 그래서 장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장군까지 있을 정도였다.

"폐하, 명령을! "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장군들은 모두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장막을 쩌르릉 울리는 그 기세는 기르간이 이곳에 온다 해도 능히 때려잡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레날 왕은 눈을 빛내며 서서히 일어났다. 청춘과 장년 시절을 오직 드래곤 사냥에만 바친 증거로,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허옇게 세어 있었다. 하지만 늘 최전선에서 싸워왔기 때문에 아직도 팔과 다리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가득했다. 성벽처럼 우뚝 선 그의 육체에서 수많은 장군들을 압도하는 기백이 흘러나왔다. 이 사람의 젊었을 적 모습이 주색잡기에 열중했던 허약한 왕자였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장군들은 감히 고개로 들지 못했다.

"여러 제군들. 드디어 때는 왔도다. 우리 인류에 있어 최후의 적, 최후의 악마, 최후의 심판자이다. 저 녀석의 죽음으로 인류는 영원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죽어나가더라도, 그대들의 후손은 그대들을 칭송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고귀한 희생이다! "

레날 왕은 한마디 한마디 힘있게 말한 후 품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던 예언서였다. 왕의 손이 책을 가볍게 허공으로 던지나 했더니, 눈부신 빛이 허공을 갈랐다. 책은 몇 등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겨져 맥없이 떨어졌다. 그것을 왕의 발이 짓이겨댔다.

"모두들 잘 보라. 이제 예언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책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꿋꿋하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예언을 딛지 않으면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모두 명심해라! "

"예! "

장군들의 감동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장막을 뒤흔들었다.

"좋다! 모두 출격! 길리간이란 녀석을 뼈조차 남기지 말고 분쇄해버리는 거다! "

장군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장막을 나섰다. 왕도 자신의 검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왔다. 50만의 대군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나아가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게 아니라, 하나하나가 잘 벼려진 검처럼 예리한 기세를 내뿜는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백오십대에 달하는 거대한 투석기와 수십 명의 대마법사, 검의 최고 경지에 이른 소드 마스터 부대 등은 인류가 드래곤에 대항해 내놓는 필살의 카드였다.

"드래곤은 저 산 아래 있다! 엄청난 놈이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드래곤이 나올 때까지 산을 향해 공격! "

미리 마련한 전술에 따라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좁은 레어 안에서는 각개격파가 가능하므로, 어정쩡한 병력 수천이 들어가 봤자 일시에 으깨져 버릴 것이다. 다행히 레어가 산 아래 눈에 잘 띄는 동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일단 산을 최대한 무너뜨린 후 견디다 못한 드래곤이 뛰쳐나오면 총공격을 가해 때려잡는다는 전술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산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무너뜨린다는 건 다소 황당해보이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한나절 정도면 산을 깨끗하게 평지로 만들 수도 있었다.

"공격! 공격~!!! "

집채만한 바위들이 지상을 그림자로 덮으며 쉴새없이 날아갔다. 대마법사의 마법은 지축을 흔들고 용암을 흐르게 했다. 예리한 검기는 굵직한 나무들을 이쑤시개처럼 동강냈다. 레어 고유의 마법장벽이 미약하게 저항했지만 그마저도 처절하게 박살났다. 물론 드래곤이 튀어나올 때를 대비해 다들 본실력을 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기르간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인류 연합군이 지척에 이르도록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의 축적이 그 이유였다. 비정상적인 힘과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마나를 소비하는 양 또한 그만큼 막대했다. 일반 드래곤처럼 살아서는 몇 년 못가 마나가 고갈될 위험이 컸기에, 그는 아예 일천년간 수면하며 마나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팔백년간 살아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침 이 시기가 일천년의 끝자락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 하는 참에 이런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레어가 우르르 떨리며 돌무더기가 쏟아졌다. 그것은 그대로 기르간의 몸 위에 쏟아졌다. 마법장벽은 이런 때를 위해 존재했지만, 그것도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거대한 육체라는 말은 충격이 전달되는 면적이 넓다는 얘기와 동일했고, 그래서 그의 몸에는 자잘한 충격들이 쌓이고 있었다. 아직 1000년을 채우기엔 오십년 정도 모자랐고, 충전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 움직였다간 축적한 마나가 몽땅 날아가 다시 천 년을 자야 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지만 돌무더기의 양은 늘어나기만 했다.

- 제길! 왜 산이 무너지는 거야! 셀레스타 녀석, 이런 건 좀 신경써줘야 하는 거 아냐!

이제는 상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허공에 푸념을 한 기르간은 심호흡을 해야 했다. 아무리 드래곤 로드라 해도 산에 묻히면 죽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천 년을 더 자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거대한 날개를 천년만에 활짝 펼치자 돌무더기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가며 드래곤 로드의 위용이 되살아났다.

같은 순간, 리만을 비롯한 대마법사들과 소드 마스터들의 뇌리에 경고의 붉은 빛이 켜졌다.

"온다! "

"모두, 준비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퍼붓는 거다! "

50만의 병사는 일제히 각자의 병기를 꼬나잡고 레어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들도 레어 저편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무지막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맹렬한 바람이 입구 쪽에서 불어왔다. 마나가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태풍처럼 강렬한 기세였던지라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리고 바람과 때를 같이하여 실로 거대한 생물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해라!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50만의 인간은 한 목소리가 되어 외쳤다. 수십만 개의 화살과 창이 장대비처럼 하늘을 덮었다. 기르간이 비행하며 생긴 기류가 대부분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려 버렸지만, 그래도 몇 만 개 정도는 기르간의 육체에 꽂히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7~9서클까지의 각종 마법들이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창공을 수놓았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마법이 작렬할 때마다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그에 비해 예리한 검기의 다발은 소리없이 날아와 드래곤의 비늘을 찢어발겼다. 다만 투석기만 조준을 마치지 못해 발사하지 못했다.

- 뭐냐, 이건!

기르간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격렬한 고통이었다. 이제까지 그를 찾아오던 인간들은 기껏해야 철없는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였고, 그것도 힘이 너무 약해 보여 마법 무구 하나씩 쥐여 보내 줄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는 이 군단급 공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이 천년 동안 수면하는 사이, 지상에 드래곤을 때려잡으라는 교리를 설파하는 종교라도 설쳐댔단 말인가? 아무튼 급한 것은 일단 살고 보자는 것이었다.

- 수호의 결계!

짧은 외침이 비산하자 그의 육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찢겨지고 부서진 비늘을 고쳐주진 못했어도 쏟아지는 공격들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다. 뒤늦게 조준을 마친 투석기가 거대한 돌을 쏘아붙였지만, 그것은 드래곤의 육체에 닿자마자 먼지처럼 부서졌다. 공격이 먹히지 않자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최단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면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의 브레스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리만은 이를 부득 갈더니 대마법사들에게 외쳤다.

"모두들! 메테오 스웜을 저 용에게 쏴라! "

모두는 깜짝 놀라 혹시 저 작자가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시선을 보냈다. 메테오 스웜은 우주에서 운석을 끌어와 대지에 작렬시키는 마법으로, 단 한 발로도 도시 하나쯤 우습게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런 걸 수백 발이나 집중해서 쏘란 말인가? 그들이 망설이자 리만은 몸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뒤이어, 수장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들도 영창을 시작했다. 사실 리만은 저 드래곤이 첫번째 메테오 스웜을 막아내는 사이 두번째 공격을 시도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하지만 인류 중 가장 현명하다는 그의 선택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했을 종류였다. 기르간은 방어막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그런 마당에 느닷없는 운석이 떨어져 등을 정통으로 강타하자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때 그가 천년간 모아온 마나는 속절없이 그의 몸을 빠져나갔다. 기르간에게 있어 더욱 안 된 사실은 그 막대한 양의 마나가 자리에 있던 검사들과 마법사들에게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에 충만해지자, 그들은 이유를 탐구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더욱 막강한 공격들을 주저없이 퍼부어댔다.

- 대... 대체 어째서...!

기르간의 몸에서 황금빛 기류가 사라졌다.

그리고, 수백 개의 운석들은 기르간을 꿰뚫으며 대지에 작렬했다.

쿠콰콰쾅!!

동시에 떨어져내린 운석들은 믿을 수 없는 굉음을 뿌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고막이 찢어졌다. 물론 대부분은 운석이 만들어낸 충격 때문에 고막뿐만 아니라 온몸이 찢겨져나갔다. 거기에는 이미 마법사, 검사, 일반 병사의 구분이 없었다. 현실 세계에 구현된 지옥은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었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사신은 그저 즐겁게 두손 가득 인간의 목숨을 움켜쥐기만 하면 됐다.

레날 왕은 다행히 전장에서 떨어진 막사 안에 있었기에 목숨을 잃진 않았다. 다만 충격을 받아 이것이 드래곤 때문인지, 아군 때문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한쪽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난 그의 눈이 다시 커지더니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

왕은 탄성을 발했다. 거대한, 실로 거대한 용암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운석들이 떨어지며 만들어진 구덩이로부터 뿜어져나온 그것은 사방으로 날리며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불의 비를 뿌렸다. 아까 마법사들의 공격보다도, 그나마 예측 가능했던 기르간의 브레스보다도 더 참담했다. 아마 운석이 지축을 정통으로 강타한 탓에 밑바닥에서 탈없이 흐르고 있던 용암이 뛰쳐나온 것이리라. 이제 50만의 병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지는 거대한 지진을 예고하며 흔들리기 시작하고, 용암은 파도가 되어 살아남은 것들을 휩쓸었다.

레날 왕은 털썩 주저앉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예언을 깨부수자고 시작한 일인데, 도리어 예언대로 흘러간다는 건 무슨 영문인가. 인간은 도저히 정해진 도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일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질수록 의식 한구석은 점점 명료해지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이성은 그에게 잔인하게 속삭였다. '레날 왕의 때, 인류는 드래곤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구백오십년째 잠들어 있는, 오십년 후 깨어날 드래곤'

왕의 떨리는 손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깊은 주름이 밭이랑처럼 패여 있는 얼굴에 눈물 몇 줄기가 흘러내리다 말라붙어갔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자신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면 기르간은 여전히 잠든 채였을 것이고 드래곤들도 유유히 날아다녔을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후회할 순 없었다. 이제 인류는 멸망한다. 그 시작점에 서서 고작 후회나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뭐야, 순 엉터리였잖아. 예언서나 사람들이나. "

그렇게,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밝게 웃으며 왕은 두팔을 벌려 용암의 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언이란 참 골치아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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