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
컴퓨터를 켜자 익숙한 기동음이 들려왔다. 부우우웅, 하는 소리에 위화감이 든 상민은 컴퓨터를 뜯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짐작대로 안에는 먼지가 그득했다. 반년 넘게 컴퓨터를 하루 한나절씩 하다 보니 어느새 초보 딱지를 벗은 모양이다. 먼지를 털어내고 케이스를 닫은 후 다시 켜자, 아까보다 부드러운 소리가 기계 내부에서 들려왔다. 아직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지만, 상민은 벌써부터 자신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윈도우즈를 실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컴퓨터를 놔둔 채 시계를 보니 열한시였다. 습관적으로 대문을 잠그고 베란다로 가 담배를 피운다.
아내는 언제 돌아올 생각일까.
그는 아내의 여섯 번째 가출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아내는 부부싸움의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확대시키곤 했다. 엊그제는 반년 넘게 까먹어 이제는 반으로 줄어든 상민의 퇴직금 때문에 또 한바탕 했다. 사실 그건 꼭 상민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된, 기술도 별로 없는 명예퇴직자를 받아줄 직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 자신도 아무 대책 없으면서 직장 구하러 나가란 소리만 되풀이했다. 그 뒤로는 무슨 드라마 같았다. 홧김에 재떨이를 던진 것이 아내의 머리를 스쳤고, 아내는 한바탕 울며불며 그를 있는대로 쥐어뜯은 후 짐을 싸서 나갔다. 엉망이 된 상민은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다만 한 사흘 있으면 들어오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벌써 열흘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담배를 끄고 잠깐 창문을 열어 담배냄새를 날려버린 후 다시 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집이었지만 방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헤드폰을 쓰고 마우스를 잡은 후 폴더옵션의 ‘숨김 파일 및 폴더 표시’를 클릭하자 휑하던 공간에 노란색 폴더들이 병아리떼처럼 줄지어 선다. 보기 좋게 정리된 폴더에는 그가 본 여인들과 아직 손대지 못한 여인들이 뒤섞여 그에게 손짓하고 있다. 사창가의 접수창구에 온 기분으로 하나씩 클릭하고, 화면 가득 펼쳐지는 살색의 잔치를, 짝짓기라는 목적에서 멀어진 배설행위를 감상한다. 아내가 오 년 전에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했을 때부터 생겨난 취미이다. 파일 하나당 최소 30분은 넘기 때문에 점심먹는 시간을 빼면 기껏해야 하루에 열 개 남짓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이것들은 다 보면 언제라도 지우고 새로운 것들로 바꾸면 된다. 무궁무진한 인터넷의 바다에는 껍데기를 벌린 조개가 널렸고, 조개를 잡아다 파는 상인들도 넘쳐났다. 이쪽에 손댄 지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검색하다 보면 그가 모르는 파일명이 속속 등장했다. 하긴 일본에서 한 해 제작되는 물량만 해도 그가 몇 년에 걸쳐 봐야 할 양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여자 둘이 동시에 절정에 달했다. 어찌 보면 우렁차기까지 한 교성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생각보다 큰 소리였기 때문에 상민의 손이 급히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했다. 너무 낮췄는지 갑자기 방은 정적에 빠졌고, 그 간격을 벨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현관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가 올 시간은 아니었는지라 상민이 주춤하는 사이 다시 벨이 울리고, 이어서 바깥에서 누군가 콩콩콩 하고 문을 두들겼다. 이렇게 벨을 눌렀을 때 반응이 없는 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재차 진입을 시도한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무리일 가능성이 높다. 발소리를 죽이며 살짝 문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자, 역시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대는 2인조가 서 있었다. 이럴 땐 집안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그는 살살 방으로 돌아와 헤드폰을 꺼내 연결하고 아까 보던 동영상에 재차 집중했다.
아아아앙드르륵아앙드륵하아악드드득하앙득
뭔가 이상한 잡음이 간헐적으로 들린다.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교성이 낮아질 때마다 들리는 것이다. 헤드폰이 고장난 건지도 몰라 벗어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까까지 그의 귀를 메우고 있던 소리들이 사라지자 상민은 다시 한 번 정적을 느꼈고, 그 간격을 아까처럼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드르륵, 철컥, 삐거덕.
상민은 튕기듯 일어났다. “누, 누구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낯선 자가 신발을 신은 채 성큼성큼 현관 옆에 있는, 상민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손을 보니 아까 드르륵 소리를 냈을 터인 조그마한 드릴과 희한한 도구가 들려 있었다. 일단 부엌칼 같은 흉기가 없어서 약간, 아주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안심이 불러온 여유인지, 급한 와중에서도 상민은 신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진하게 자국을 내는 게 안타까웠다. 저런 얼룩 지우기 어려울 텐데, 란 생각보다 재빨리 방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그의 미래는 최소한 현재보다 더 암울해지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자를 제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대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 시끄러운 소리 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구. 형씨 해치러 온 건 아니니까.”
“그, 그럼? 뭐하러 왔어?”
남자는 마스크 너머로 입술을 살짝 실룩이더니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주먹을 휘둘러 상민의 배를 쳤다. 명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민의 빈약한 육체에 충분한 타격감이 전달되었다. 그는 숨이 턱 막혀, 정말로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남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잽싸게 낚아채 들어올린 후 자신의 얼굴을 바싹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입 다물랬지.”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와는 다르게 입이 조금 벌어진 상태였고, 거기서 침이 조금씩 새나왔다. 남자가 자신의 입을 빤히 보고 있음을 눈치챈 그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놓은 후 컴퓨터를 흘끔 쳐다보았다. 남자배우가 드러누워 있는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아 일으킨 후 얼굴에 사정하고 있었다. 여자는 눈으로, 입으로 정액을 받아내며 도리질치려 했지만 다른 여성이 머리를 잡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잠깐 뭔가 생각하더니 그대로 놔두고 상민에게 말했다.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알았지?”
상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싸워봤자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만약 상민이 무기를 들고 있더라고 남자는 어렵잖게 그것을 뺏고 상대를 제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옷 아래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꿈틀대며 말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손끝 하나 까딱하지 마.”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문 쪽에 섰다. 문턱에 서서 바깥에 손짓을 하는 걸 보니 일행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땀이 확 치밀었다. 사우나 안에 있는 것처럼, 끈적한 땀과 기름이 불과 몇 초 만에 송글송글 맺혀갔다. 아무튼 잠깐의 여유가 생긴 사이 뭔가 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나지 않았다. 전화를 쓰다 들키면 정말 제대로 두들겨맞을 것 같아 몇 시간 같은 몇 초를 생각하던 그에게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상민은 일단 남자의 기색을 살폈다. 남자는 아직까지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민은 마우스나 키보드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급히 네이버를 켰다. 아까 로그인해 두었지만, 뉴스란을 보고 껐기 때문에 재차 로그인을 해야 했다. 다행히 그의 타이핑 속도는 아이디와 비밀번호에 한해서 500타를 넘나들었다. 후다닥 로그인을 하고 아무 기사에나 대고 댓글을 눌렀다. ‘살려주세요’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상황이라 그는 믿기 힘든 기지를 발휘했다. 다시 타이핑할 여유가 없음을 깨닫자마자 마우스로 드래그해 ‘복사하기’를 누른 후 커서에 대고 붙여넣기를 하고 ‘등록하기’를 누른 것이다. 이렇게, 모 연예인의 대마초 복용 혐의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은 1161개에서 1163개가 되었다. 이렇게만 해 두면, 네이버 관리자가 글을 보고 뭔가 조치를 취해 줄 것이다. 평소 네이버 댓글에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최소한 관리자가 글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이것이 112 신고나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뭔가를 메고 있어 순간 흉기로 착각했지만, 다시 보니 카메라였다. 일반 캠코더 같은 앙증맞은 사이즈가 아닌, 정말 본격적인 촬영을 할 때나 쓰이는 물건이다. 그것을 든 또 다른 남자, 그리고 화장을 진하게 든 여자가 잇따라 방을 밟았다. 그들이 모두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자, 상민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자신의 맨발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눈치를 보느라 말 한마디 못하는 상민을 내버려둔 채, 그들은 회의라도 하는 양 서로에게 눈짓, 손짓을 건네며 말했다.
“이 방 보라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맞는 것 같아요. 정말 예상보다 시험에 적합하네요.”
도대체 무슨 촬영을 하려는 건지 상민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카메라의 모델이 자신이란 건 확실하다. 다짜고짜 들어와 촬영한다면 무슨 컨셉일까? 혹시 몰래카메라? 하지만 그들은 설명하는 과정을 가볍게 생략하고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럼 나갈까요?”
술이라도 한 잔 하러 가자는 것처럼 여자가 가볍게 말했다. 상민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깨닫고 황당해했다.
“이, 이대로?”
“예. 그대로. 마침 차림도 딱 좋네요.”
여자는 즐겁다는 듯 쿡쿡 웃었지만 상민은 그게 비웃음인지 즐거움에서 오는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상민의 차림은 누가 보더라도 어딘가 가기 위한 차림이 아니었다. 목이 늘어진 누런 반팔 티와 남색 츄리닝바지, 덤으로 떡진 머리까지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거리는커녕 아파트 복도에 나가기도 창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가 당황하든 말든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어서 나와요. 아, 그리고 주머니에 뭐 들었나 확인해 봐요.”
남자가 상민에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졌다. 주머니가 그쪽에 있으니 확인하려는 의도뿐이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민은 화들짝 놀랐다. 그 손이 아까 자기를 때렸다는 걸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 상민은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가 주머니에서 안대를 꺼내 그에게 씌우자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가 뭐라고 항의하려 하자 남자는 그의 엉덩이를 철썩 내리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나마 얼굴이나 배를 맞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 상민은 안대를 한 채 슬리퍼를 대충 신고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집을 나섰다.
그는 일부러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으면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꼴을 누군가 본다면 당장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았다. 이 시간대면 아파트 복도나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있거나, 경비가 한둘쯤 순찰할 시간이다. 그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음식물쓰레기 냄새를 풀풀 풍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데 낯선 발소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제 갈 길로 멀어져 갔다. 이런 괴상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게 서두는 듯한 기색도 없이 이들은 느긋하게 차에 도착했고, 유쾌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출발했다. 물론 상민은 그 분위기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딱해 보였는지 여자가 말을 걸어 주었다.
“차에서 괜히 시끄럽게 하지 말아요. 만약 그랬다간 재갈을 물려 버릴 테니까. 안대를 벗으려거나 하면 손발도 묶어버릴 테니, 그냥 얌전히 앉아 있어요. 참,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잠깐 갈등했지만, 아무래도 이 안의 모든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았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머니에서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냈다. 찌익 하고 포장이 뜯긴 물체는 상민의 손에 쥐어졌다. 상민은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지만 냄새만으론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먹는 거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것을 입에 가져가 살짝 베어무니 치즈냄새가 확 풍겼다. 퍼석퍼석해서 먹기 불편했지만 그는 꾹 참고 모두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이번엔 커피가 주어졌다. 안대를 한 채 입으로 가져가다 살짝 흘렸다. 옆에서 신경질을 내며 캔과 쓰레기를 그의 손에서 가져갔다. 만약 옆의 사람이 여자였다면 상민에게도 모험심이라든가 용기, 혹은 만용이라 부르는 감정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일단 여자의 목을 휘어잡고, 운전자를 협박해서……하지만 그는 이 차 안에 최소 4사람 이상 타고 있다는 사실과,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고 자신의 옆에는 아까의 우락부락한 남자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그런 감정의 생성 자체가 부정되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상민은 졸지 않기 위해 생각을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이들의 목적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까 카메라가 어쩌고 한 것을 보면, 이들이 그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찍고 싶어하는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그를 보고 시험에 적격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시험, 이, 대체, 무엇 이 ㄴ……
아무래도 수면제를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은 너무 늦게 들었다.
상민에게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어두웠다. 아직 안대를 풀지 않은 모양이라고 짐작했지만, 곧 아까까지 귀를 팽팽하게 당기던 두 개의 끈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시야가 어두운 건 그가 아직까지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젠가 소백산 중턱 쯤, 구름이 잔뜩 낀 곳에서 길을 잃고 헤멨던 때 같은 어지러움과 막막함이 느껴졌다. 역시 수면제를 먹였구나, 하고 그는 짐작했다. 부질없이 그 사실을 따지는 대신 상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 안의 사람들은 부산하게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마다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옆의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보니 그를 흔들어 깨운 듯했다. 약기운이 가시지 않아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 너머에서 남자가 말했다.
“다 왔으니 내려. 그리고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 도망치면 바로 잡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여.”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자기가 이들에게 휘둘리다 죽을 때까지 고개만 끄덕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통처럼 속이 찌릿하게 울렸다. 입술을 깨물며 그는 처음으로 아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는 자신이 납치된 사실을 알까? 돌아왔다면 발자국이 집안 곳곳에 널려 있으니 수상한 자가 왔다 갔다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걸어잠근 문을 뚫고 집주인을 납치해갈 정도의 녀석들이다. 아직 목적은 모르지만, 이들은 그의 가족이 여기저기 신고하며 날파리처럼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자기 혼자 여기서 고생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역시 아내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돌아왔다면.
남자가 문을 열고 먼저 내리자 상민이 뒤따라 내렸다. 그는 상념을 지우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시계는 열두시를 약간 못 미쳐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은 오늘 수많은 낯설음 속에서 방황하던 상민에게 최초의 낯익음을 안겨주었다. ‘서울역’이라고 쓰인 모습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그때 여자와 남자가 양쪽에서 상민의 팔짱을 꼈다. 셋은 거나하게 취한 사내를 양쪽에서 부축하는 사이좋은 친구처럼 보였다. 낮이라면 이 모습은 꽤 이국적으로 보였겠지만, 총총히 지나가는 행인들은 어두운 가로등 아래의 광경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뒤이어 차에서 나온 카메라맨 일행이 장비를 챙겨들고 나왔다. 곧 기묘한 행렬이 이루어졌다. 상민은 등 뒤의 카메라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큰 위안이 되진 않았다. 장전된 권총을 사람에게 겨누게 된다면 총의 격발 여부보다는 총이 대상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시되는 법이다.
일행은 역에 들어갔다. 카메라를 보고 역무원이 나왔다. 일행 중 하나가 나오더니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뭐라고 속삭였다. 역무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새 그의 바지주머니에 꽂힌 봉투가 덩달아 조금씩 흔들렸다. 상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양 팔에서 느껴지는 압박은 그가 간신히 견딜 정도로 묵직했다. 그는 여자 쪽도 자신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어렵게 인정해야 했다. 역무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져 가자 이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소리에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섞여 기묘한 불협화음을 연출했다.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들의 뒤를 따라왔다.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이들을 지나치는 일반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윽고 이들의 눈앞에 이질적인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노숙자?”
상민은 자기도 모르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뉴스에서만 보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자 생생함을 넘어서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밤이 되어 질서와 규제가 사라진 대합실 안에는 노숙자들이 신문지와 담요, 헌 옷가지 등을 깔고 누워 있었다. 소주를 컵도 없이 병째로 들이키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안주라고는 새우깡이나 자갈치가 전부였지만, 그나마도 없이 먹는 사람이 더 많았다. 때에 절은 옷은 멀리까지 그 악취를 내뿜었다.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벽에 대고 오줌을 누는 것이 보였다. 간혹 옷이 비교적 깨끗한 사람도 보였지만, 얼굴이나 머리가 지저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상민이 지난번에 왔을 때는 낮이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상민은 흘낏 옆을 훔쳐보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런 모습을 자주 본 듯 태연하기만 했다.
그가 노숙자를 보고 놀란 것처럼 노숙자들도 그들을 보고 놀라는 모양이었다. 작은 파문이 그들 근처에서 일어나 점차 확산되었다. 기묘한 모양새나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도 그렇지만, 이들 뒤에 있는 카메라야말로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조용하던 대합실 안에서 웅성거림이 조금씩 번져 갔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술을 내려놓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한 남자가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고, 다른 남자가 일어나 마치 비서처럼 뒤를 따라왔다. 둘 다 그나마 깔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상민은 안심할 수 없었다. 노숙자 중 정신병자도 상당수 있다는 인터넷 뉴스를 본 적 있는 까닭이었다.
상민 일행과 1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멈춰섰고, 자존심과 악취를 동시에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카메라 가져온 거 보니 취재하러 왔나 보우.”
“네. 취재라기보단 다른 용건이지만 말이죠.”
“그런 건 날 통해서 하시오. 이름 말하긴 싫으니, 앞으로 날 선생이라 부르쇼.
그리고 돈부터 내슈. 일단 15만원에, 카메라에 얼굴 비치는 사람 당 3만원씩.”
선생은 많이 해본 솜씨인 듯, 대뜸 가격부터 제시했다. 상민의 양 옆에서 시선이 잠시 오고 간 후 남자가 나섰다. 남자는 상민의 팔에서 자신의 팔을 떼어내고 그대로 품 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봉투에서 만원짜리 한 다발을 꺼낸 그는 세보지도 않고 선생에게 던져주었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일었다. 선생은 돈다발을 뒤의 남자에게 건네 준 후 상민 일행을 휙 흝어보며 말했다.
“뭐 촬영하러 왔는지 말해 봐요. 인터뷰할 거면 지금 말해주고, 다른 거면 원하는 장면 말해주고 좀 기다려 보고. 다른 팀들이 찍어갈 때도 바로 안 찍고 우리가 준비해 준 장면으로 찍었수다. 그게 서로 좋은 방법이니.”
“허어. 예를 들면?”
“단체로 술병 안고 잠들어있는 거라든지, 강간 미수를 당하고 훌쩍거리는 여편네라든지 하는 거. 물론 다른 데서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여긴 그런 사람들이 언제든지 대기 중이니까. 이리저리 찾아다닐 거 없이 여기서 바로 찾아낼 수 있으니 시간 낭비할 거 없다고 좋아하데.”
“미리 듣고 오길 잘 했네요. 그런데 그런 거 얘기하면 수치심을 느낀다거나 그러지 않나요?”
여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동정심 같은 건 조금도 묻어있지 않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선생은 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여기 나앉을 정도면 그런 거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인생 막장이니 여기 왔고, 여기서 다들 언젠가 죽어 나자빠질 테고.
그건 그렇고, 나한테 인터뷰하지 말고 얼른 온 목적이나 말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끝내고 다들 자야지.”
여자는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잘 됐네요. 이쪽에서 원하는 사람을 준비해 준단 말이죠? 그럼 살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하나 부탁할게요.”
느닷없이 파격적인 말이 나왔지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덤덤했다. 상민만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주위를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생은 주문받은 상품을 찾아주는 상인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험악한 놈을 원하는가 보네. 예전엔 좀 험악한 녀석들이 여기 숨어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기껏해야 눈먼 칼 휘두르다 사람 죽인 녀석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 자로 괜찮을지?”
“그 사람밖에 없다면 할 수 없죠. 아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불러주세요. 촬영을 오늘 중에 끝내야 하니까.”
“지금 하려면 서둘러야겠네. 어이, 장씨 좀 찾아와! 장씨! 어디 갔는지 알고 있는 사람? 뭐? 화장실? 그럼 술 처먹고 토하는 중이겠네. 몇 명 가서 데려오슈.”
돈뭉치를 봐서 그런지 노숙자들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누구를 지정할 것도 없이, 네 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가더니 상거지 꼴의 남자를 데려왔다. 이곳의 노숙자들도 가끔은 옷을 갈아입고 가끔은 목욕하러 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반년 이상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듯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은 완전히 뭉쳐 있었고,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에서는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마른 앙상한 체구를 보니 멸치와 다를 바 없었다.
카메라를 든 남자가 혀를 차며 물었다.
“저건 상태가 심한걸.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마누라가 옆집 녀석이랑 한참 그짓 하는 걸 딱 봤다고 했어. 아내는 죽일 생각 없어서 그 연놈만 칼로 쑤셨는데, 아내가 그 녀석 죽이지 말라고 매달리다 애먼 칼 맞고 죽었다는군. 그래서 거기 도망쳐서 여기 왔어. 팔다리 멀쩡하지만 꼴이 저렇다 보니 오히려 적선이 잘 들어와서 지금껏 목숨 부지하고 있지. 대신 조금만 충동질하거나 술 들어가거나 하면 지랄발광을 해대서 골치아픈 친구야.”
“발광한다면 정신이 나갔단 얘긴가요?”
선생이 깜박했다는 투로 말했다.
“아, 그 친구 정신 살짝 놓은 친구야. 막 들어왔을 땐 말도 제법 하고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혼자 웅크리고 중얼거리기만 하데. 언제는 술 처먹고 카터칼 휘둘러대서 여럿 다치기도 했고.”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약한 사람이네요. 사람 둘 죽였다고 정신을 놓을 정도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상민은 놀라 그녀를 보았다. 이 여자도 정신이 이상한 건가? 하지만 천연덕스럽게 멸치를 관찰하는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이상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확인하기 위해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뭘요?”
“사람을 죽인다는 건 평생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행위인데, 그걸 모르는 거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요? 아가씨나 나나 저 사람이나 일단은 사람 아니오. 죽기 싫은 건 모두가 똑같고, 그리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여자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상민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똑같은 생명이란 말은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하루에 세 번 밥을 먹고, 똥오줌을 싸고, 숨을 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죠. 하지만 여기 이 사람들을 봐요. 저들과 당신이 똑같다고 생각하나요? 그래도 당신은 집과 가족이 있고, 밥 걱정은 하지 않고 있죠. 저들은 달라요. 3만원만 던져 주면 발이라도 핥아줄 그런 사람들이죠. 즉 3만원짜리 생명이라는 것이죠.”
“3만원짜리라니, 말도 안 되는……”
상민은 다시 반박하려다 멈칫했다. 당연히 반응이 있을 줄 알았던 노숙자들이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있었다. 선생은 아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내 말 때문인가 보군. 그러면 난 15만원짜리요?”
“일단 그 정도로 쳐 드리죠. 이쪽 일이 잘 풀리게 도와주시면 더 올려드릴 수도 있어요.”
“그럼 더 노력해야겠네. 뭘 도와주면 될까?”
여자가 뒤에서 상민을 붙잡고 있던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는 이제야 상민의 팔에 강제로 끼웠던 팔짱을 풀었다. 팔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기에 상민은 팔을 약간 흔들어 보았다. 우둑 소리가 나긴 했지만 평상시와 같은 컨디션이었다.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저 녀석과 싸워.”
“예?”
“저 노숙자랑 싸우라고.”
상민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자신이 여기까지 끌려온 게 이곳의 노숙자와 싸우기 위해서란 말인가? 달랑 그런 이유로? 어떻게 생각해 봐도 비합리적인 얘기였다. 눈앞의 현실이 사실은 게임 비슷한 것이고, 자신이 가상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환상을 품는다고 해서 이곳을 벗어날 순 없는 일이었다.
“과연, 시험인가.”
선생이 중얼거리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생은 굳은 얼굴로 지시했다.
“좋아. 장씨, 저 녀석과 싸워. 이기면 내가 소주 한 박스라도 사 주지. 대신 지면 술 뺏어먹을 거야.”
과연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맞는 소리였다. 선생의 유치한 충동질이 끝나자마자 멸치는 으르렁대며 상민을 바라보았다. 짐승처럼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크르릉 소리를 들으며 선생은 나직하게 웃었다.
“형씨. 잘 해보게. 시험일세.”
“이, 이보시오…… 선생, 당신이라도 이 자들을 말려야지, 왜 부추기는 거요?”
멸치의 살기가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상민의 말은 부분부분 떨렸다. 그런 둘의 모습을 언젠가부터 카메라가 바쁘게 찍고 있었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노숙자들도 많았지만, 깨어 있는 노숙자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섰다. 선생은 그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을 보게. 그리고 나를 보게.
우리는 지금 막 고정되었어.”
“고정?”
“난 15만원, 이들은 3만원. 저 여자가 우릴 규정지었어. 아주 정확하게.”
“하지만 당신은 이 자들을 처음 봤잖소. 처음 본 사람이 당신의 가치를 매길 권한이라도 있는 거요?”
“권한은……”
상민은 그의 말을 다 듣지 못했다. 멸치가 느닷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둘의 모습이 겹쳐지고, 장씨가 그의 위에 올라탔다, 미친 자의 눈빛과 자신을 정상인이라 생각하는 자의 눈빛이 교차할 때 상민의 귀에 선생의 말이 마저 들렸다.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
멸치가 연이어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아래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상민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상민이 그에게 정신차리라고 소리쳤지만 닿지 않는 듯했다. 체구로 보면 상민 쪽이 더 우세해 보였지만 힘은 멸치 쪽이 위였다. 상민은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팔이 아직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상민은 한 팔로 그의 주먹을 막으며 다른 팔로 공격을 시도했다. 여기저기 때려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자 옆구리만 노려서 계속 쳤다. 효과가 있었다. 여덟 번 째의 주먹에 멸치는 비명을 지르며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그 틈에 상민은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멸치의 몸이 크게 출렁이자 상민은 그 반동을 이용해 장씨와 함께 옆으로 반 바퀴 굴렀다. 멸치가 계속 발버둥쳤지만 상민 또한 필사적이었다. 잠깐의 버둥거림이 끝나자 이번엔 상민이 멸치를 깔고 앉은 모양이 되었다.
아까 일방적으로 맞았던 것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상민은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말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평생 누구 한 번 때려본 적 없었지만 지금은 이곳까지 끌려온 것에 대한 억울함과 맞은 것에 대한 분노 등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힘쓰는 일에 동원된 적이 거의 없던 그의 주먹은 멸치를 때리면서 금방 부어올랐다. 그 통증은 그의 주먹이 실수로 멸치의 두개골을 때리면서 무섭게 부풀었다. 상민이 악!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자 멸치는 대뜸 몸을 일으켜 그의 팔을 깨물었다. 상민은 이를 악물고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눈가를 내리쳤다. 눈두덩이 크게 찢어지며 피가 줄줄 났지만 멸치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상민은 같은 곳을 몇 번 더 때리다 반응이 없자 팔꿈치로 멸치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이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무는 힘이 약해졌다.
“이, 개새끼가!”
상민은 비명같은 고함을 지르며 물린 팔을 들고 냅다 바닥으로 휘둘렀다. 멸치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히며 그의 팔이 자유로워졌다. 상민은 발을 흔들어 슬리퍼를 던져버리고 냅다 멸치를 짓밟았다. 손보다 발이 충격에 둔감하기 때문에 이번엔 마음껏 밟을 수 있었다. 팔, 다리, 배, 머리 등을 걷어차고 밟으며 상민에게 알 수 없는 흥분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쾌감 비슷한 종류였다. 자신이 누군가를 패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좀 더 확인해보기로 했다.
축 늘어진 멸치의 위에 다시 올라간 상민은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두어 대 제대로 맞자 끄르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멸치의 눈이 뒤집혔다. 그 소리는 상민에게 닿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 그들을 둘러싼 노숙자들, 냉소를 흘리고 있는 여자와 남자, 조용히 돌아가는 카메라가 그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주먹의 통증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사방은 조용했고, 그는 그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깟 3만원짜리가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비명같은 고함을 외치며 때리고, 때리며, 때리다 드디어 기운이 다해 장씨의 위로 넘어졌다. 피범벅이 된 멸치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상민은 비로소 그것이 쾌감이 확실했다고 생각했다. 쾌감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지독한 피로만 남았다. 이상하게 죄책감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보기보단 하는 친구구만. 저 친구 좀 일으켜 줘. 장씨도 데려가고.”
두 사람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선생이 지시를 내렸다. 구경하던 노숙자 몇이 나와 상민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게 한 후 멸치를 다시 들쳐업었다. 선생이 그들에게로 가 3만원을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멸치에게는 특별히 5만원을 찔러주는 게 상민의 눈에 잡혔다. 마치 일당을 받고 헤어지는 일용직 노동자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에게서는 동료의 복수니 뭐니 하는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선생은 여자에게 물었다.
“더 할 거요?”
사라져가는 쾌감의 여운을 좇던 상민이 움찔했다. 노숙자 한 명과 싸워 이겼을 뿐이지만, 이미 그의 체력은 바닥나 있었다. 그는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싸울 때는 그저 현실감각을 떨어뜨릴 뿐인 배경들이었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그가 현실에 있음을 여실히 일깨워주었다. 멸치를 때려눕혔다고 시험이란 게 끝났다는 법은 없다. 선생이 지명하는 대로 두 명, 세 명 째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승리의 기쁨은 싹 달아나고, 자신이 여전히 약자라는 사실만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피로와 긴장으로 가쁜 숨을 내쉬는 상민에게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여섯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자 상민을 향하고 있던 카메라가 치워졌다. 마치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어준다는 투였다. 상민은 여자의 행동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멸치보다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여자는 일어나서 선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또 이용할 일이 종종 있을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야 자주 오면 좋은 일이지. 잘 가슈.”
여자 일행은 챙길 걸 챙기더니 상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모여 있던 노숙자들도 서서히 흩어졌다. 반쯤 쓰러져 있는 상민에게 선생이 다가왔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더니 그대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예의상 한 번쯤 권유해볼 만도 한데, 그는 아예 상민을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듯했다. 그래서 상민은 멍하니 그 담뱃불이 타들어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길다란 담배가치가 점차 줄어들고, 마침내 필터만 남고, 그 담뱃불마저 이윽고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보았다.
선생은 필터를 집어던지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게 자네 인생일세. 저쪽 말대로 하자면 6만원짜리지.”
“그런 말 들으면 화도 나지 않습니까?”
“사실이니까 화를 낼 순 없지. 난 노숙자고, 저들도 노숙자야. 빌어먹는 게 더 편하게 되었고, 이젠 여기서 뒹굴다 어느 날 시체가 되어있을 인생이지. 이런 싸구려 인생에 가격을 매겨봤자 얼마나 할까? 저 여자는 능력있어 보이니 앞으로 가치가 계속 높아질 수 있겠지. 우린 달라. 여기서 끝이야.
한 가지 더 말해 주지. 당신이 보기엔 그래도 나름 우리끼리 의리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하지만 결국은 혼자야. 3만원짜리 둘을 붙여봤자 3만원 더하기 3만원이지, 6만원이 되는 건 아니거든.”
상민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선생은 다시 말했다.
“시험이란 것도 마찬가지야. 시험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거야. 그 여자는 꼴랑 지금 한 번으로 시험 운운했지만, 사실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걸세. 왜냐하면 저 여자는 카메라가 잡은 모습을 보며 그 안에 사람의 가치란 것까지 고정시켜버리지만, 사실 자네는 카메라 안에서 사는 게 아니잖나. 그래서 시험은 끝날 수 없어. 아마 자네가 나 같은 꼴이 되거나, 아니면 죽을 때가 되었을 때야 끝날 거야.”
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상민은 힘겹게 물었다.
“그럼, 왜 접니까? 왜 하필 저냐구요?”
선생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자네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이 말은 이해가 되었다.
상민은 거칠게 흔드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역무원이 귀찮다는 듯 그를 깨우곤 역 밖으로 나가란 손짓을 했다. 상민은 자신이 일반인이며, 알 수 없는 사건에 말렸다고 말하려 했지만 역무원은 반도 듣지 않고 그를 내쫓았다. 어쨌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걸 깨달았고, 곧이어 슬리퍼도 온데간데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낯익은 얼굴은 아무데도 없었다. 선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맨발로 개찰구를 넘은 그는 황급히 달려가 열차에 탔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한참 사람이 많은 시간이었지만 그를 중심으로 작은 진공지대가 생겨났다. 누군가가 폰카를 꺼내들고 멀리서 그를 찍었다. 온종일 그를 따라다녔던 카메라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는 얼굴을 감싸고 웅크렸다. 그러자 더욱 많은 폰카와 디카가 그를 비추었다.
다시 한 번 개찰구를 넘자, 이번엔 역무원이 쫓아왔다. 하지만 그 또한 귀찮았는지 몇 걸음 뛰지 않고 뒤돌아섰다. 잡힐 것을 각오했던 상민은 쫓아오던 존재가 사라지자 안도와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며 맨발로 걸어갔다. 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파출소에서 나온 순찰대원에게 붙들렸다. 정신나간 부랑자 취급을 하며 연행해가려는 순찰대원에게 증명해보일 것이라곤 집이 근처에 있으니 같이 가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냐는 말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대문 앞까지 동행한 연후에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적고 물러갔다. 음식물쓰레기 냄새를 풍기는 여자 하나가 피투성이의 그를 무심히 지나쳤다.
상민은 벨을 누르고, 다음으로 문을 두들긴 후 마지막으로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이 열렸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문을 잠그며 들어온 상민은 여전히 선명한 발자국을 보고서야 아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씻고, 자고,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뿌리치며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방의 모습 역시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책상 위에 놔 둔 핸드폰이 느릿한 간격으로 깜빡거렸다. 열어보니 아내에게서의 부재중 전화 한 통. 걸어 보니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이 들려 왔다. 무너지듯 의자에 앉아 어제 접속했던 사이트에 로그인하자 쪽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사이트 관리자 이름으로 된 그 쪽지에는 글을 임의로 삭제했으며, 추후 같은 식의 장난 댓글을 달 경우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는 선생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시험은 끝난 게 아니었다.
상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신음했다.
문 쪽에서 다시 드릴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다.
아니, 이 소리는 환청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그에게 별 상관없는 문제였다.
어느 쪽이 되었건, 그는 행동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오롯이 고독하게 해 줄 존재를 환영하기 위해 식칼을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