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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방에서(단편소설 모음)


낯선 자들


미약한 달빛조차 없는 실내에서 어둠은 물결처럼 잔잔하게, 조금씩 흔들렸다. 원래 흰색이었으나 지금은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퇴색한 벽지에는 나방들이 드문드문 달라붙어 지친 날개를 쉬고 있었다. 삭은 문에 너덜너덜하게 붙은 창호지 사이사이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하지만 격렬한 본능이 담긴 소리들은 어둠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방 안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소리와 소리가 교차하고 마침내 짝을 만난 쌕새기가 기쁨의 함성을 지를 때, 비로소 방 안에 누워있던 남자는 눈을 떴다.

가늘게 눈을 뜬 남자는 잠이 덜 깬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입을 살짝 벌린 것으로 보아 목이 마른 듯 했다. 하지만 손이 닿은 범위 안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휘젓고 나서야 남자는 귀찮다는 듯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조금씩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어둠뿐이었기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문풍지를 떨리던 바람이 잠시 멎었기에 풀벌레 소리 외에는 그의 수면을 방해하는 건 없었다.

 

미약한 달빛이 하늘거리는 실내에서 어둠은 안개가 되어 공간을 잠식했다. 원래 흰색이었으나 지금은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퇴색한 벽지에는 나방들이 드문드문 달라붙어 지친 날개를 쉬고 있었다. 달빛이 방에 들어오자 동틀녘의 햇빛을 받기라도 한 듯 몇 마리가 풀도 꽃도 없는 방 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삭은 문에 너덜너덜하게 붙은 창호지 사이사이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하지만 격렬한 본능이 담긴 소리들은 어둠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방 안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소리와 소리가 교차하고, 마침내 자신의 영토로 들어온 경쟁자를 내쫓는 데 성공한 여치가 승리의 찬가를 두 날개로 비빌 때, 방 안에 누워있던 남자는 다시 눈을 떴다.

가늘게 눈을 뜬 남자는 잠이 덜 깬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입을 살짝 벌린 것으로 보아 목이 마른 듯 했다. 그렇게 손을 휘저어대자 어디선가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가 뛰는 소리였다. 이런 우중충한 방바닥에 사는 벌레라면 뻔하다. 귀뚜라미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영 딴판인 곱등이일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다면 몰라도, 벌레가 뛰어다니는 방 안에서 맘 편하게 잘 만큼 신경이 굵지 않은 그였기에 부스스 일어나 문을 열러 나갔다.

방 밖으로 나서자 눈앞에 거대한 수풀 더미가 펼쳐졌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의 마당은 수풀이 울창해진다. 그 수풀 속에서 가을 벌레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울었다. 나직한 협주곡을 들으며 남자는 곡을 이루는 악기들을 구별해 보았다. 왕귀뚜라미, 쌕쌔기, 여치, 실베짱이, 땅강아지 정도를 구별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곧 싫증을 느끼곤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기억을 떠올려본다.

 

분명 정신을 차리기 전 자신은 술에 취해 있었다. 눈앞이 빙빙 흔들리고 당장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처럼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무언가를 잡고 있다. 그래, 그것은 둥글고 갈색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체이다. 자세히 보니 핸들이다. 브레이크 경고등과 엔진오일 압력 경고등이 교차하며 깜빡거린다. 황색 실내등이 비추는 지저분한 실내에는 잡다한 도구들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다. 옆에 벨트도 메지 않고 눕다시피 탑승해 있는 상대방은 거의 무의식이 된 상태에서도 소주병을 비스듬히 들고 간간히 술을 홀짝거리고 있다. 둘 다 이렇게 만취한 채로 운전하고도 살아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기뻐할 일은 아니다.

 

기억이 조금 전으로 이동한다.

 

이번엔 다방 안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백열전구가 부연 빛을 내뿜고, 그 위엔 먼지가 잔뜩 앉은 갓이 흔들거리고 있다. 파리 몇 마리가 윙윙거리다 그가 휘두른 팔에 놀라 달아난다. 그 서슬에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원형을 잃고 소리와 파편으로 재구성된다. 엎드려 자고 있는 주인은 그 소란에도 깨어나지 않는다. 성의없이 그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작대던 여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한다. 이를 본 남자의 벌개진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오른다. 곧 테이블에 차려진 빈약한 안주접시와 몇 남지 않은 소주병들이 허공을 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여자의 발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분수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웅크린다. 오른쪽 종아리 아래로 피가 주르륵 흐른다. 하얗게 부은 퉁퉁한 다리를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는 선정적이라기보단 핫도그에 잔뜩 짜 놓은 케첩처럼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걸 봐 넘길 수가 없어 그는 한마디 한다. 너, 생리 시작했냐? 기억 속의 그는 너무 취해 여자가 왜 피를 흘리는지 안중에 없다. 여자는 기가 막혔는지 피를 닦지도 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은 흔히 말하는 질질 짜는 눈물이 아니다. 엄마를 부르며 서럽게 우는 그 모습은 깊고도 무거워서 남자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와 돌덩이처럼 아래로 내려간다. 울음이 그치지 않으면서 남자의 안에 쌓여가는 슬픔도 커져만 간다. 술을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의 울음은 가슴을 진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는 취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결심을 한다. 남자는 구겨진 셔츠와 세로줄무늬가 적당히 새겨진 조끼를 입은 후 다크 그레이 양복을 먼지 하나 없이 털고 상체에 걸쳤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녀의 팔목을 잡아 일으킨다. 남자는 그대로 유리조각들을 밟으며 출구를 향해 전진하고, 여자는 그 서슬에 끌려 따라간다. 좁은 곳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움직임은 좁은 가게를 공감각적으로 가득 채운다. 주인이 억지로 눈을 떠 본다. 대낮부터 들어와 양주를 두 병이나 까고 죽치고 앉아 있던 녀석이 가게의 재산을 질질 끌고 막 나가는 참이었다. 주인은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다 카운터 모서리에 무릎을 찧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고개를 숙이고 잠깐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주인을 뒤로 하고 그와 여자는 유유히 차를 탄다. 의외로 여자는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거의 회색으로 보이는 허름한 흰색 투스카니가 그녀에게 백마로 보일지 어떨지는 알 바 아니지만, 남자는 분명 왕자로 보일 자격은 없다. 그건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내릴 테면 내려.

-싫어. 지금 내리면 저 새끼한테 맞아죽을걸. 당신이나 나나.

-그러고 보니 돈도 안 냈지. 이대로 간다.

무미건조하게 날강도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며 남자는 시동을 건다. 술에 취한 터라 열쇠를 꽂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네 번만에 성공한다. 키를 돌리자 푸릉푸릉 맥빠지는 소리가 나고, 그 직후 차체에 심한 진동이 가해진다.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문을 두들기고 발로 차는 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유리창을 깨부술 기세로 덤벼드는 주인을 향해 여자가 가운데손가락을 내민다. 엑셀을 밟자 차가 과격하게 급출발하고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난다. 백미러로 살펴보니 시야에서 멀어지는 주인이 바닥에 있는 잔돌 하나를 집어들어 던지는 게 보인다. 돌이 엉뚱한 방향으로 힘없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쪽에 대한 관심을 접는다.

이제 혼자였던 남자는 잠시나마 함께가 되었다. 여지껏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남자에게 짜증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감정의 변화는 생각보다 신선했고, 그래서 그는 여자와 대화하여 그 감정을 지속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반쪽 달의 서늘한 빛이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어둠과 뒤섞여 푸르스름하게 변한 빛은 여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비추었다. 짙은 화장이 땀과 뒤섞여 보기 싫게 망가져 있었다. 눈썹은 반토막밖에 남지 않았고 입술의 루즈는 찐득하게 말라붙었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부어 있었는데 살이 쪄서 그런 건 아닌 듯싶다. 살짝 퍼머한 머리가 보기 싫게 헝클어져 얼굴을 살짝 덮고 있었다. 원래 흰색이었으나 지금은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퇴색한 벽지에 비친 빛은 아직까지 달라붙어 있는 나방들을 얼룩처럼 보이게 했다. 삭은 문에 너덜너덜하게 붙은 창호지가 잠깐 흔들리더니 스르륵 움직였다. 반쯤 열려있던 문이 완전히 열리자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너울거렸다. 서슬이랄 것도 없었지만, 방 안의 변화를 깨달은 여자가 서서히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

“그래. 여기.”

아무래도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흉가나 다름없는 폐가에서 낯선 남자와 자연스럽게 마주보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누운 채 반사적으로 팔을 휘젓고, 눈을 깜빡거리며 시각을 회복했다. 어렴풋한 시야 너머로, 얼굴을 향해 풀쩍 뛰어오른 곱등이가 보인다.

“아? 히약!”

반쯤 감겨 있던 여자의 눈이 확 뜨였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얼굴로 향했다. 싸구려가 분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손은 얼굴에 앉아 더듬이를 흔들거리고 있는 곱등이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친다. 곱등이가 충격을 받아 벌러덩 뒤집어지자 바로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으직! 손바닥이 방바닥의 접점 사이에서 한 생명이 예정보다 일찍 생과 작별을 고한다.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여자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리친다. 작은 벌레이니 그럴 리 없겠지만 남자는 어쩐지 피가 사방에 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죽었으니 이제 그만 해.”

“아냐. 이런 녀석들은 이정도 해야 확실히 죽어. 아주 자근자근 밟아야 한다고.”

“……네 기준으로 봐도 충분하니 그만 해.”

그제야 여자는 손을 멈추었다. 방바닥과 손바닥의, 성만 다른 두 연인의 과격한 키스가 끝난 자리엔 초록과 갈색이 뒤섞인 곤죽만 남아 있었다. 당연히 그것은 여자의 손바닥에도 묻어 있었다. 그걸 계속 보기에는 비위가 상하기에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자는 손수건을 받아들어 냄새를 한번 맡더니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걸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나 봐?”

“지난번에 코 풀고 넣어둔 뒤로 빨지 않았으니까 더 냄새맡지 마라. 손바닥 닦으라고 준 거니까 얼른 닦고 내다버려.”

“싫다. 내 손이 더러워질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자는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뽀득뽀득 골고루 닦아냈다. 손수건에 갈색 얼룩이 묻는 사이 그는 밭은기침을 두어 번 한 후 괜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바로잡았다. 다 닦은 여자가 손수건과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돌려주는 대신 둘둘 말아 밖으로 내던졌다. 손에 더 이상 묻은 게 없는지 다시 확인해본 후 여자는 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한 대 피울래요?”

“음. 마침 피우고 싶었는데 잘 됐군. 기왕이면 밖에서 피우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앉을 만한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비슷한 타이밍으로 쭈욱 빨았다. 여자가 만족스럽게 연기를 내뱉을 때 남자가 느닷없이 쿨럭거렸다. 감기라고 생각하기엔 기침 소리가 생선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발작적이었다. 여자가 옆으로 바싹 당겨 앉아 등을 몇 차례 두들겨 주자, 남자는 눈물이 조금 그렁한 채 간신히 말했다.

“이제 진정됐어.”

“사장님 수상하네. 혹시 담배는 처음?”

“음.”

“거짓말! 이 나이에 처음일 리가 없잖아요. 그럼 왜 새삼 달라고 해요?”

“죽기 전에 한번 피워보고 싶었거든. 네 말대로 이 나이에 담배 한 번 안 피고 죽으면 좀 그렇지.”

“이상한 분이네. 암튼 무리해서 피우진 마요. 그 나이에 배워봤자 맛있진 않을 걸요.”

“상관없어. 이 한 대는 다 피울 거야.”

남자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겨우 한 대를 재로 만들었다. 벌써 다 피우고 두 대째를 피우던 여자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분 어때요?”

“화생방 훈련 할 때 최루탄 냄새 맡은 것 같아.”

“난 잘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마당에 갖다놓은 저것들은 다 뭐에요?”

툇마루 앞, 풀이 그나마 덜 난 땅 위에는 여러 도구들이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밧줄과 생수, 약병, 부탄가스, 커터칼, 대야, 버너 등이 한 자리에 모인 풍경은 어지간하면 볼 수 없다. 이 드문 풍경을 여자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었다.

“우리 일을 하기 위한 도구들. 내가 아까 일어난 다음 차에서 가져왔지. 예정 외라서 모두 1인분이지만 다행히 이것저것 들고 왔으니 지장은 없을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설명 좀 해주세요.”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기억나지 않아? 저기, 그…… 정말 모르는 거야?”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송송 맺혔다. 그것을 닦는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왜 그런지 몰라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술이 깬 남자들이 억지를 부리기 전 흔히 짓는 표정이다. 이런 걸 물어보면 뒤끝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지 말해봐요. 똑바로 말하면 기억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너랑 나랑……”

“내가 술먹고 사장님이랑 결혼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먼저 얘기하고, 너도 찬성하고……”

“답답해 죽겠네. 제대로 얘기해 봐요.”

“아, 음, 흠흠. 그게 말이지, 내가 자살한다고 하니까 니가 그럴 바엔 같이 동반자살하자 고 했잖아. 그걸 기억 못하는 거야?”

 

기억났다.

 

여자는 소주 두 병째를 마시고 있다. 차 안에는 다섯 병의 소주가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마셔댔는데 나중에 또 마실 셈이었던가 생각하니 남자가 알콜중독자가 아닌가 의심해 본다.

-사장님도 한 병 더 할래요?

-넌 왜 나 따라왔냐?

-사장님은 왜 절 데리고 왔어요?

-불쌍해 보여서.

여자가 술병에서 입을 떼고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는 여자의 시선에 대응하지 않고 정면만 바라본다.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더니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는 소주병이 풀숲으로 날아간다.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밀어닥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다. 그대로 창문을 완전히 열고 머리를 내민 다음 가래침을 탁 뱉는다. 다시 문이 닫힌다. 아까보다 더 험악해진 시선이 남자를 향한다.

-잘난 척 마시죠. 멋대로 그따위 동정을 하지 말라구요. 사장님이 뭔데 남을 그따위로 평가할 수 있어요?

-그럼 니는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는데? 말해봐.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럼 불쌍한 거 맞네. 어제 살았으니 오늘 살고 내일 살 생각밖에 못하면 그게 불쌍한 게 아니고 뭔데? 아니면 그 일 하면서 삶의 보람이라도 느껴본 적 있어?

여자는 입을 다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뜨거워지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여러 손님을 받아봤지만 대부분 추근대거나 한번 하기 위한 사전과정이었다. 다짜고짜 직선적으로 신경을 끄집어내 소금을 뿌리는 이런 작자는 없었다. 덕분에 무단이탈, 혹은 도주라 불러야 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걱정이 싹 달아난다. 오랜만에 받은 격한 분노를 달래고 있지만 남자는 눈치 못 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도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야. 어차피 너 아무데나 내려주고 내 갈 길 갈 테니까. 적당히 불빛 보이는 데 있으면 세워줄게.

-기가 막혀! 이런 데 내려서 어쩌라고 그래요? 나보고 걸어서 돌아가라구요?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

여자는 다시 입을 다문다.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없어서다.

-너처럼 어린 애는 보나마나 계약서 잘못 써서 이리저리 구르다 단물 다 빨리고 여기로 온 거겠지. 민증 압수당하고 빚 갚으라고 매일 닦달이나 당하고. 뉴스 보면 이런 거 매일 나오잖아. 틀려?

-……대강은 맞아요.

-그래도 가고 싶으면 이거 가져가. 난 거기 다시 가기 싫으니 차비나 하라구.

남자가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던져준다. 여자는 지갑을 벌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십만원짜리가 세 장, 만원짜리가 열댓 장. 사장님들에게 받은 화대라야 몇 푼 되지도 않고, 그나마도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이런 큰 돈을 만지기는 참 오랜만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당장에라도 차를 세우고 카섹스를 하자며 덤벼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 남자는 왜 지갑을 그녀에게 넘겼을까.

-사장님 너무 기분 내는 거 아니에요?

-난 그 돈 더 쓸 일 없어.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거든.

-농담?

-진담이야. 자살하러 가는 길이지.

아까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여자의 눈길이 남자를 구석구석 흝어본다. 남자는 지금까지 여자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저 고리타분한 진지함을 보니 진담인 것 같다. 같이 죽자며 덤빌 타입이 아니기에 무섭지는 않다. 여자는 다리를 꼬고 잠시 생각하더니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남자는 옆을 흘끗 본다.

-왜 그래?

-왜 죽으려고 하는데요?

-말 안 할란다.

-알았어요. 굳이 듣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데 정말 제대로 결심한 거에요? 어디로 갈 건데요?

남자는 잠시 침묵한다. 대답할까 망설이는 기색이다. 머뭇거리다 내키지 않은 듯 입을 연다.

-고향집으로 가는 중이야. 지금은 폐가가 되었지. 아무튼 이 근방에 차 다닐 만한 곳이 있으면 세워줄 테니 더 묻지 마.

여자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남자의 손을 덥썩 잡는다. 한계 이상 마신 그녀는 팔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남자는 잠깐 핸들을 놓치고 당황하여 브레이크를 밟는다. 울퉁불퉁한 1차선 도로 위에서 차가 반 바퀴를 돌고 어정쩡한 각도로 멈춘다. 남자는 잠깐 심호흡을 한 후 소리친다.

-뭐하자는 짓이야! 죽고 싶어?

-사장님 아까 죽고 싶댔잖아요. 왜, 이제 겁나요?

남자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 방 먹인 게 통쾌해 여자는 깔깔 웃어댄다. 민망한 듯 남자는 애써 변명한다.

-이봐. 죽는다는 건 한 번밖에 할 수 없어. 난 분명 죽고 싶지만, 볼썽사납게 죽고 싶지 않아. 몸과 마음 모두 제대로 준비된 상태에서 차분하게 하고 싶다구.

-예. 그러시겠죠.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같이 한 번 죽어볼래요?

-뭐?

-마지막 가는 길의 동반자! 어때요? 나도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 끝내고 싶다구요. 마침 제대로 준비된 사람도 만났으니 한번 저질러 보자구요! 다시 출발해요!

남자는 갑작스런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여자를 바라본다. 몇 차례 채근을 받고 나서야 엑셀을 밟고 핸들을 돌린다. 차가 부릉대며 출발한다. 아까와는 달리 운전자의 시선이 조수석을 자꾸 힐끔거린다. 여자는 자기가 이겼다는 생각을 한다. 아까 했던 말이 미칠 결과를 생각하는 대신, 그녀의 코끝을 간질이는 수마에 몸을 맡긴다.

 

남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착하자마자 집 안으로 구르듯 들어가 잠든 덕에 술이 깨고 나니 한결 소심해진 모양이었다. 아까의 허세가 사라지자 여자가 무슨 대답을 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자신이나 남자나 똑같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짐짓 대범하게 말했다.

“생각났어요. 분명 아까 죽겠다고 했었죠. 지금도 그 생각은 그대로에요.”

여자는 남자에게 다가가 이마를 손으로 흝었다. 소금기 가득한 땀이 이슬처럼 손끝에 맺혔다. 그것을 남자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런 배짱을 하고 잘도 죽을 결심을 했네요.”

“아, 아냐. 네가 나와 같이 죽든지 말든지 난 죽을 거라구.”

“그러셔야죠. 그런데 어떻게 죽을 셈이에요?”

뜻밖에 얘기가 술술 풀리자 남자는 안심했다는 듯 물건 무더기로 다가가 하나씩 집어들며 설명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것저것 준비해 봤어. 밧줄은 말 안해도 알 테고, 여기 약병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어. 이만큼 모으느라 꽤 고생했지. 요즘은 이정도 양을 한번에 처방하는 미친 약사가 없거든.”

“그건 저도 알아요.”

“다음은 부탄가스. 이게 의외로 파괴력이 세거든. 애들이 하는 것처럼 가스를 한껏 들이마시고 몽롱할 때 라이터를 켜면 그대로 펑! 하는 거지.”

“말은 잘 하네요. 사장님 가스 해 본 적 없잖아요. 담배도 안 피워본 사람이 가스를 마셨을 리가 없지. 이거 생각보다 약한 물건인데, 이만큼 터뜨려 놓고 살아 있으면 얼마나 끔찍하게 죽어갈지 상상이나 해 봤어요?”

“……아니.”

처음엔 제법 잘난 척을 했지만 갈수록 어리숙한 모습이 드러났다. 구부정한 체구에 성실해 보이는 가르마를 모자처럼 머리에 달고, 낡은 양복을 입은 채 자기를 죽일 물건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게 외판원 같다는 생각을 하자 여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큭큭거리며 뱃속에서부터 트림처럼 올라오는 웃음을 겨우 넘긴 후 손짓을 했다.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얼굴이 빨개진 남자가 뭔가를 중얼거리며 다음 물건을 집어들었다.

“다음은 이거. 커터칼. 손목을 긋고 이 버너로 덥힌 물을 담은 대야 안에 담그는 거야. 그러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 다음은.”

“듣기 싫어요. 그만 하고, 이걸로 하죠.”

여자는 약병과 생수를 집어들었다.

남자는 반색했다.

“그래. 그게 좋겠군. 적당히 나누면 2인분도 나올 테니. 지금 바로 할까?”

“아니요. 사장님은 몰라도, 전 저런 냄새나는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럼 알아서 해. 누가 뭐래도 난 저기서 죽기 위해 왔으니까.”

남자는 딱 잘라 말하더니 신발을 벗고 툇마루에 올라섰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여자의 손에서 약병과 생수를 집어들고 방으로 향했다. 여자는 무언가 항의를 하려다 포기하고 뒤따라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사방을 둘러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양복재킷을 벗어 바닥에 대충 던지고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낡을 대로 낡은 장지문이 발길질 한 번에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무슨 짓이에요?”

장지문이 나무조각이 되어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날아가자 여자는 기막힌 듯 물었다.

“냄새가 난다면 환기를 시켜야지. 내겐 이 장소가 중요하지, 여기 있는 물건들이 중요한 건 아니거든. 내친 김에 창문도 떼고 먼지도 좀 쓸어내자구.”

“그러니까 청소를 하자는 거에요? 나 참.”

여자는 더 말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쓸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자 남자가 벗어놓은 양복재킷을 들어 벽을 털었다. 손바닥만한 나방들이 우르르 날아오르자 여자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재킷을 마구 휘둘렀다. 그 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작은 창을 떼어 밖으로 던지고 다리를 쭉 편 채 편하게 앉았다. 소동은 곧 가라앉았고 나방은 침입자를 피해 넓은 곳으로 날아갔다. 벽과 천장을 둘러보며 나방이 더 없나 확인해보던 여자는 느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 화가 난 듯 재킷을 던졌다.

“뭐에요! 남은 청소하고 있는데! 그리고 벌레 쫓는 건 원래 남자가 해야 하지 않아요?”

“아까 보니 벌레 잘 잡던걸. 난 도망쳤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에요! 그걸로 바닥이라도 훔쳐요. 먼지 좀 봐.”

“이건 물걸레질이라도 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어. 진정하고 여기 와 앉아. 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달빛도 들고 마당도 훤히 보이는 게 좋지 않아?”

“그건 그래요.”

여자는 재킷을 구석에 던지고 남자의 옆에 와 앉았다. 둘은 약을 한 움큼씩 나눠 입안에 털어넣고 잘게 씹은 후 생수로 넘겼다. 그리 좋은 맛은 아니었기에 남자와 여자 모두 다시 생수를 입에 머금고 한참 입가심을 한 후 마루 너머로 뱉고 돌아와 다시 앉았다. 그렇지만 벽에 등을 기대기는 싫은지 남자의 등에 자신의 등을 포갰다. 둘 다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아까보다 체온이 올라가 있었다. 서로의 등에서 느껴지는 낯선 온기는 둘에게 잠시의 침묵을 부여했다. 상황과 장소의 특수함 역시 둘 중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풀벌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니, 계속 울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수많은 벌레들이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며 각자 짝을 찾아, 혹은 먹이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새나 짐승의 소리와는 달리 풀벌레 소리는 작지만 폐부를 찌르르 울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밖에서부터 여자의 안으로 파고든 진동은 아슬아슬한 곳까지 몰려와 있는 여자의 복잡한 감정을 뒤흔들었다. 마당에 길게 자란 풀들은 방 안으로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올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왕귀뚜라미였다. 안쪽에 거대한 짐승 둘이 겹쳐있는 모습을 목도해서인지 주춤거리며 들어왔지만 금세 자리를 잡고 선명하게 귀뚤거렸다. 눈에 뻔히 보였지만 여자는 그것을 잡으려들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에요.”

앉은 자세 그대로 여자는 말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죽는다는 건 생각도 안 했는데, 이렇게 약을 먹고 죽기를 기다리게 되었다니.”

“후회해? 아직 늦지 않았어.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토하면 돼.”

등 뒤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하지 않아요.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나 이런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기 전 항상 다음 날 눈을 뜨는 일이 없었으면 했죠. 일어날 때마다 내 자신이 경멸스러워 견딜 수 없었구요. 사장님은 계기를 준 것 뿐이에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수면제를 먹고 조용히 죽는 걸 꿈꿨어요. 목매달면 얼굴이 붓고 똥오줌이 흘러나오죠. 손목을 긋는 건 성공률이 낮고, 쏟아지는 피를 보고 있으면 죽는 게 무서워질 것 같아요. 떨어져 죽는 건 시체가 온전할 리 없으니 싫구요. 이런 말 우습겠지만, 제가 죽은 후 제 시체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도록, 죽은 다음에도 얘는 자는 중이구나, 라고 착각할 정도로 조용히, 깨어나는 일 없이 편히 죽고 싶어요.“

“그래.”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어요. 제가 죽어봤자 슬퍼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가출했다가 자리를 잘못 잡아 이 꼴이 될 때까지 저를 알려고 한 사람은 수많은 ​사​장​님​들​뿐​이​었​으​니​까​요​.​ 이제는 상품가치도 떨어져 이런 시골에 팔리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마지막으로 집에 전화라도 걸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몇 번 눌러보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화기 있어요?”

따뜻했던 등이 떨어져나갔다. 내심 아쉬워하며 여자는 핸드폰을 받아들고 폴더를 연 후 버튼을 꾹꾹 눌렀다. 그대로 전화기를 귀에 갖다대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휙 던졌다. 풀숲 안에 전화기가 떨어지자 풀벌레들은 잠시 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통​화​불​능​지​역​이​라​네​요​.​”​

별로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과장되게 손을 탁탁 턴 여자는 남자의 앞에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남자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이 옮겨가는 쪽으로 여자의 얼굴도 옮겨졌다. 몇 번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포기한 그는 지친 음색으로 물었다.

“뭘 바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잖아요. 이름은 어차피 알아봤자 소용없겠지만 사장님이 왜 죽으려고 하는지는 알고 싶어요. 가르쳐줘요.”

그는 준비한 것처럼 술술 대답을 했다.

“지금 니가 나에 대해 예상하는 것들이 열 개라면 일곱 개 정도는 사실일 거야. 사업부도에 빚쟁이에 도망간 마누라 같은 것들 같은 거.”

“재미없네. 뭔가 신선한 걸 기대했었는데.”

“그럼 넌 어떤데?”

“아저씨 대답 그대로 되돌려줄게요. 도망간 마누라는 없지만.”

“그럼 성병이랑 임신도 포함되는 건가? 창녀한테는 필수잖아.”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한 손으로 배를 가리고 다른 한 손은 남자를 칠 것처럼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이 원위치한 것은 남자의 얼굴이 시체처럼 텅 비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따위로밖에 말 못하겠어요? 마지막인데 서로 좀 웃으면서, 덮을 건 좀 덮어주면서 입닥치고 눈 감을 수 없냐구요. 아까도 그랬어요. 다짜고짜 불쌍하다는 얘기나 툭 던지고, 나몰라라 하고. 어차피 내가 무엇을 말해도 당신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나 또한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피차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음을 나누고, 의례적인 말이나마 나누는 게 낫지 않나요? 왜 인생을 그렇게 극단적으로만 살려고 해요? ”

남자는 쿡쿡 웃었다. 여자가 씩씩거리거나 말거나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는 한참 웃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처럼 방바닥에 자연스럽게 드러누웠다. 혀로 입술을 두어 차례 핥은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이게 내 본모습이야. 항상 억누르면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쑤셔대도 웃는 낯짝을 유지하던 걸 포기한 모습. 죽기 전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그렇게도 흉해? 이해할 능력도, 수단도 없으면서 굳이 그것들을 억지로 주입당하거나 받고 싸구려 동정이나 나누는 게 요즘 말하는 관계라는 건가? 나를 따라온 것이나 같이 죽는 건 자유지만 어째서 나에 대해 알려는 거야?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둬!”

“뭐가 어째요……!”

“그리고 이건 확실히 하자. 먼저 시작한 건 너야. 입닥치지 말라고 한 것도 너고.”

남자는 이제 만사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약효가 슬슬 발휘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대로 굳은 채 남자를 노려보다가 팔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아니, 남자의 곁에 누웠다. 남자처럼 눈을 감고 자려는 시도를 했지만 잘 안 되는 듯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그 손으로 눈을 비비고, 얼굴을 감쌌다. 가을의 싸늘한 냉기가 부실한 장판을 뚫고 그녀의 등으로 기어올라왔다. 오한이 든 채 자는 건 맘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베개가 없어 영 어색했다. 자신의 팔을 깍지껴 목 아래 넣어보지만 곧 포기하고 손을 뺐다. 그녀는 멈칫멈칫하며 남자의 곁에 다가가 슬그머니 그의 팔 위에 자신의 머리를 올렸다.

남자가 눈을 떴다. 졸음이 눈에 눌어붙어 있었지만 의식을 또렷해 보였다.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여자가 선수를 쳤다.

“이게 제 본모습이에요. 전 베개랑 사람이 없으면 잠을 못 자요. 게다가 춥다구요. 이불 하나 준비 못했는데 인심 좀 쓰시죠?”

남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이를 무언의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여자는 어미품에 파고드는 강아지처럼 남자에게 온몸을 밀착시켰다.

잠시 후 남자의 겨드랑이 밑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자살한 영혼은 지옥에 간다고 들었는데 그 말 믿어요?”

“믿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안 믿어.”

“다행이네. 그럼 저도 그렇게 믿을게요. 그럼 이대로 잠들면 정말 끝나는 거죠?”

“그래.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들이 마지막이 되는 거지.”

“만약에, 만약에 둘 다 실패해서 눈을 뜨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전 그게 제일 무서워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어.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어떤 느낌?”

“죽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는 느낌. 기껏 각오하고 저질러 버렸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 버리면 맥이 빠져서 다시 죽을 생각을 못할 것 같아. 지금도 참 막막한 심정인데, 이걸 두 번이나 겪으라면 나도 사양이야.”

“저도 사양하고 싶네요.”

사방이 고요해졌다.

잠시 후 아까보다 나직해진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아깐 어떻게 알았어요?”

“병은 네 아랫도리 만졌을 때 알았고, 임신은 찍은 거야. 원래 날씬할 체형인데 몸이 부어 있어서.”

“……병 걸려 있을 때 아기를 낳으면 기형아가 되겠죠?”

“아마도.”

“저도 그럴 것 같아서 애기 뗄 돈 모으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문득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 아빠는 누군지도 모르지만 애기는 지금도 뱃속에서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리는데, 엄마란 사람은 죽으려고 약이나 먹고. 여기서부터라도 시작하는 건 불가능한 걸까요? 아니, 이제 와서 후회한다는 얘긴 아니에요. 하하, 왜 이럴 때 센치해지는 걸까?”

남자의 겨드랑이 밑이 조금씩 축축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여자의 행동을 말해주었다. 풀벌레들도 저마다 울기 시작했다. 문득 남자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여자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여자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남자의 품에 안겼다. 거대한 두 짐승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지는 모습에 놀란 귀뚜라미가 밖으로 달아났다. 소리없는 울음이 남자의 가슴으로 흡수되어 심장을 적셨다. 꺼져 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을 여자를 향해 남자는 목멘 소리로 겨우 말했다.

“잘 자. 좋은 꿈 꿔.”

“아저씨두요.”

하나가 된 그림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보랏빛 노을이 산등성이에 자욱하게 서렸다. 꺼져 가는 낮의 마지막 잔재가 툇마루 앞을 비췄다. 원래 흰색이었으나 지금은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퇴색한 벽지에는 나방들이 드문드문 달라붙어 지친 날개를 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쉬고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 모든 근심을 잊은 편안한 표정을 한 소년과 소녀가 부둥켜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에는 약병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아졸’이란 상품명이 선명했다. 아까까지 문이 있었던 공간 저편에서 바람이 불었다. 해는 빠르게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고 달이 살짝 고개를 디밀었다. 실내에는 미약한 달빛이 하늘거리기 시작하고, 어둠은 안개가 되어 공간을 잠식했다. 나방 몇 마리가 날아오르자 팔랑거리는 그림자가 바닥에서 호응했다. 아까까지 장지문이 있던 공간을 통해 풀벌레 울음소리가 시나브로 방을 적셨다. 반쪽 달이 완전히 떠올라 서늘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조용하지만 격렬한 본능이 담긴 소리들은 어둠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방 안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소리와 소리가 교차하고, 교차와 교차 사이에서 수풀이 버석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울어댈 때, 남자와 여자는 함께 눈을 떴다.

 

꽤 옛날에 썼던 작품인데,
다시 봐도 옛날 티가 꽤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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