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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방에서(단편소설 모음)


유년(幼年)의 윗목


​1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2
난 엄마가 나간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몇 번이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 했지만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소리,
찬밥 한 덩이를 물에 말아 소리죽여 먹는 소리,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내 이마를 어루만질 때의 따뜻한 촉감은
모두 꿈속의 내가 독차지했다.
난 꿈속의 내가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꿈속의 나도 나를 부러워할 것 같다.
난 엄마가 밤늦게 돌아오면 엄마를 껴안고 잘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난 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밥 한 그릇과 김치 한 보시기,
물이 가득 찬 찌그러진 주전자 하나,
어머니가 시집올 때 들고 온 조그만 장롱 하나,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놋쇠 요강 하나,
어머니가 엿장수에게 얻어온 한글 교습책 한 권과 몽당연필 한 자루.
 
손바닥만한 창문은 사람들의 발 높이에 있었다.
금간 창문 너머에서 사람들의 부산한 발소리는 자갈처럼 자갈거렸다.
저 발소리 속에는 조약돌처럼 통통대는 가벼운 발소리도 섞여 있었다.
아마 내 또래의 아이가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일 것이다.
난 월사금을 낼 수 없어 이제 학교에 가지 않는다.
열무 천 단을 팔면 꼭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엄마가 약속했었다.
그래서 엄마가 몇 단을 팔았는지 손꼽아 세어보지만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배운 덧셈은 그렇게 큰 숫자를 사용한 적 없었으니까.
하여튼 엄마는 정말 열무를 많이 팔았지만 아직 날 학교에 보내진 못했다.
 
발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난 아침밥을 먹었다.
밥그릇에 담긴 찬밥을 한 입 먹을 때마다
난 내가 방 안에 담긴 찬밥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밥알갱이를 완전히 뭉개고 나면 김치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고
김치까지 입 안에서 곤죽이 되면 꿀꺽 삼키고 물 한 모금.
이런 동작을 반복하다 밥과 김치가 반으로 줄어들면 숟가락을 놓는다.
나머진 저녁으로 먹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침을 먹고 하는 일은 엄마와 약속한 숙제다.
한글 교습 책에 쓰여진 한글을 하나하나 백 번씩 쓰기로 약속했었다.
책에는 더 쓸 자리가 없어 누런 벽지에 ‘가, 나, 다, 라……’라고 한 글자씩 썼다.
그것만 쓰기는 심심해 아는 단어들도 하나씩 써 보았다.
‘배추’ ‘열무’ ‘엄마’ ‘귀신’……
다른 건 다 볼 수 있는데 귀신이란 건 아직 보지 못했다.
왜 난 아빠가 없냐고 물어볼 때마다 엄마는 ‘귀신이 잡아갔다’라고 했는데,
만약 귀신을 볼 수 있다면 나도 잡혀가는 걸까?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오늘은 엄마가 오는 것보다 내가 숙제를 끝내는 게 빨랐다.
숙제가 끝났으니 이젠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면 된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 난 멍하니 글자를 써내려갔다.
엄마를 내게서 멀어지게 한 ‘배추’와 ‘열무’를 빼고 쓰다 보니
어느새 ‘엄마’ ‘귀신’ ‘엄마’ ‘귀신’을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엄마도 보고 싶고, 귀신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귀신이 날 잡아가면 아빠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3
해는 시든 지 오래였다.
절반씩 차 있던 밥그릇과 보시기도 모두 빈 지 오래였다.
찬밥이 없어지자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아침의 나를 저녁의 내가 모두 먹어버린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밥그릇에 붙은 밥풀 찌꺼기를 손으로 떼어먹다 보니
문득 언젠가 먹었던 생태찌개가 생각났다.
생태 대가리는 하얀 눈깔을 희번득거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깔을 엄마는 젓가락으로 푹 찍은 후 내게 먹였었다.
난 연필을 들어 벽에 물고기를 그리고 눈깔 자리에 밥풀을 붙였다.
물고기가 그때보다 사납게 날 노려보았다.
무서웠지만 외로움은 조금 가셨다.
 
방은 한밤중처럼 컴컴했다.
머리 꼭대기에 달린 전구는 내가 까치발을 해도 닿지 않았다.
엄마가 밖에서 방문을 잠근 자물쇠를 달그락달그락 따고 들어와야
전구는 비로소 사나운 빛을 토해내곤 했다.
컴컴한 방,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내 하얀 손과
날 노려보는 흰 눈깔뿐이었다.
 
날이 깜깜해지자 아침처럼 발소리가 부산하게 들렸다.
그 발소리에 배춧잎처럼 타박타박 걸어오는 엄마의 발소리는 섞이지 않았다.
발소리,
발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고요한 빗소리가 금간 창 틈 너머를 가득 채우고
빗물 새어들듯 작은 방을 퐁퐁퐁 채웠다.
방에서 바라보는 빗줄기는 새하얀 국수 가닥처럼 가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엄마가 팔러 간 열무 삼십 단은
저 비를 맞으면 분명 더 팔기 힘들어질 것이다.
열무가 다 팔릴 때까지 비를 맞고 섰을 엄마를 생각하니
영원히 엄마가 내 옆에 오지 않을 것 같아 무서웠다.
빗소리는 조용했고, 난 빗소리처럼 끅끅 소리죽여 울었다.
 
4
엄마는 항상 내게 큰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큰 소리를 내면 무서운 집주인이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난 방에서 큰 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난 내 소리 대신 주위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열 수 없는 저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는
벽지에 가득한 글자들처럼 나를 둘러싸고 조여 왔다.
 
옆집에선 내가 모르는 아빠가 죽어서 엄마와 자식들이 매일 울어댔다.
낮에는 모두 어딘가에 나가 있다가 밤이 되면 돌아와 울었다.
무서운 집주인이 다그치러 오면 울음은 잦아들었다가
속으로 일백까지 셀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들은 마치 무서움에 까맣게 물들기를 원하는 흰 벽지처럼
매일 절박하게 집주인을 맞이하며
자신들의 울음을 애절하게 토해냈다.
그들이 같이 울어달라 부탁하면 난 무서워서 울어버릴 것이다.

술집에서 나온 사내들이 있는 힘 다해 취했다고 거리에서 고함쳤다.
취한 사내들의 발은 각각의 박자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창 앞에 외투를 벗어던지고 흐느꼈다.
나머지 사내들이 그를 조롱하자 그는 결국 도망쳤다.
사랑을 잃으면 저렇게 된다고 언젠가 엄마가 이야기했었다.
난 사랑을 하는 것도, 잃는 것도 무서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할 상대가 없는 이 방이 무서웠다.
하얀 눈깔이 나를 노려보며,
검은 글자들이 검은 잎처럼 나부끼며,
나를 사랑해! 라고 소리 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들을 피해 이불 안에 옹송그린 채 눈만 빠꼼히 내밀었다.
내 사랑은 온전히 엄마가 차지해야 했으니까.
 
5
비가 그치자 자욱이 안개가 끼었다.
길을 걷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치며 천천히 지워져 갔다.
 
안개는 닫힌 창문의 금 사이로, 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손바닥으로 막자 손가락 사이로 안개가 흘러내렸다.
그래서 난 창가에서 떨어져 멀찌감치 도망갔다.
이 작은 방이 날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주길 바랐지만,
방은 오히려 날 가두는 감옥이 되고 있었다.
안개는 자꾸자꾸 밀려와 어느새 허리까지 출렁였고
나는 지우개가 밀고 간 흔적처럼 흐릿하게 지워져 갔다.
밖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안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하다못해 엄마가 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지워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얄밉게도 흰 눈깔과 검은 글자들은 안개 너머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저들은 내가 마실 공기를 대신 마시고 더욱 짙은 안개를 토해내고 있었다.
숨을 참으려 했지만 안개가 턱밑까지 차올라,
결국 울면서 안개를 마셔야 했다.
 
6
안개에서는 공장 굴뚝의 연기 냄새와
알싸한 열무 맛이 느껴졌다.
 
7
안개에서
엄마가
느껴졌다.
 
8
아니, 안
개는

마였
다.
 
9
안개는 어둠에 녹아들며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이제야 내겐 안개 너머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는 고단해진 엄마가 지척에 왔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버둥대는 물고기의 흰 눈깔을 떼어먹은 후,
창문을 열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10
그 시절, 내 유년(幼年)의 윗목은
아직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가엾은 엄마의 사랑 속에서
평화로운 성(城)이라 생각했던 그 방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무지하고 외로웠으며, 그래서 행복했다.
 
 
*참고자료: 엄마 생각 / 그집 앞 / 안개 / 입 속의 검은 잎 / 숲으로 된 성벽 /
빈집 / 진눈깨비
기형도는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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